예수님의 보혈과 성령세례와 휴거와의 관계
조우리 목사
예수님의 피의 목적은 먼저는 귀신쫓음이 아니라 우리를 정결하게 하는 것이요 우리가 그 피를 힘입어 회개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생각만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그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글은 맥스웰 화이트의 '보혈의 능력'에서 나온 글들입니다. 규장에서도 작년에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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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레스터 섬랠(Lester Sumrall)은 필리핀 제도에서 귀신 들린 소녀를 구원해 주기로 했는데, 그 때 그 소녀 속에 있는 귀신은 완전한 영어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소녀는 영어를 전혀 알지도 못하는 아이였다.
이 악령은 성부, 성자, 성령, 예수의 피를 순서대로 저주했다.
1957년 시카고에서 개최된 복음 전도대회에서 섬렐 형제는 말하기를 그 귀신은 예수의 피가 살아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의 피 속에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이 강한 악령의 반응에 놀라지 않는다.
기독교인이 예수의 보배로운 피를 전하고 그것을 노래하거나 간구하기 시작하면, 마귀는 무섭게 불안해 한다.
(주 : 예수님의 보혈의 적용은 십자가의 실현인데 마귀가 처벌당한 장소이고 예수님의 보혈이 뿌려지면 성령이 역사하심과 동시에 마귀가 무력화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예수의 피의 능력을 알고 있으므로 기독교인들이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행해왔다.
많은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표현대로 말해서 "도살장 종교"와 전혀 관계를 갖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 있지 않는 종교 신앙이 있는데, 마귀는 우리가 그런 종류의 신앙을 갖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그리나 우리가 적극적으로 예수의 피를 존중하기 시작하는 순간 마귀들은 병적으로 흥분한다. 그것은 마치 말벌 집에 불을 붙인 것과 같다.
교회 내에서조차 예수의 피에 대해 그다지 가르치지 않으며
교인들이 악령들의 활동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현 명한 기독교인이라면 예수의 피에 대한 믿음이 없이 악마들을 쫓아내려는 시도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여러 번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어 영과 육이 마귀의 지배 하에 있는 사람들을 구한 일이 있었는데, 언제나 예수의 피를 힘입어 간구했으며 그가 문자 그대로 그 피에 덮혔다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경우에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하신 예수의 약속(눅 10:19),
"무릇 너를 치려고 제조된 기계가 날카롭지 못할 것이라"는 이사야서의 약속(이사야 54:17)이 완전히 실행된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것은 그 피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말한다는 사실에 의지한다. 그 피는 하나님께 "죄가 덮혔다! 벌금을 지불했다!"고 소리친다.
실제로 성경에는 흘림을 당한 피가 하나님께 말한다는 증거가 많다.
가 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했을 때, 여호와께서는 가인에게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다.(창 4:10) 이 말씀으로 보건대, 아벨의 피 속에 있는 생명은 그가 살해 당한 후에도 끊어지지 않고 복수를 위해 소리쳤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하나님께서는 무죄하게 흘려진 피는 복수해달라고 소리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의 피를 아벨의 피와 비교하여 언급하면서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라고 했다(히브리서 12:24). 아벨의 피가 복수를 부르짖는 반면에, 예수의 피는 자비를 부르짖는다.
이 것은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이 해마다 지성소에 있는 속죄소에 염소와 황소의 피를 뿌린 것 안에 상징되어 있다(히브리서 9:25). 그렇게 피를 뿌린 결과 하나님께서는 속죄소를 가리고 있는 두 스랍 사이에서 대제사장에게 자기를 나타내시고 말씀하셨다.
피를 사용할 때에만 영광이 나타내고 음성이 들렸다는 사실에 유의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대제사장이 지난 일년 동안 이스라엘이 지은 죄를 대속하는 피를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였다. 그는 피를 사용해야 했다.
우 리는 오직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를 위하여 휘장(휘장은 그의 육체를 의미한다)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을 따라가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브리서 10:20-22).
구 약 시대에 지성소에 들어간 대제사장은 피를 제물로 바치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오직 피만 바쳤다. 오늘 기독교 사회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다른 것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본다. 즉 자기의 행위, 감정, 이상한 불, 다양한 종류의 예배들을 바친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거룩한 곳"에 들어가려 한다면 우리의 유일한 탄원의 근거로 예수의 피를 바쳐야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히브리서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주 : 성소는 구약의 땅에 있는 성전의 성소를 말함이 아니다. 이 히브리서를 기록할 때에 성전은 이미 훼파되었다.
이 성소는 성령의 임재, 혹은 기름부으심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럴 때에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과 접촉하고 교제하고 그 거룩하심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의 몸에도 주님의 능력이 임하는 것이다.)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예수의 피를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손에 아무 것도 들지 않고 다만 당신의 십자가에 매달리나이다." 우리가 예수의 피를 근거로 내세우면, 그 피는 곧 우리를 위해 탄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말하는 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아버지와 함께 앉아계신 하늘 나라 속죄소에서 자비의 말을 한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의 피를 근거로 내세우는 이유이다.
(주 : 우리가 회개할지라도 씻기시는 것은 예수님의 일이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 우리의 죄를 더러움을 씻어내시는 것이다.
회개도 안 하는 자는 이러한 축복을 누리지 못한다.
진정 회개하는 자는 이러한 정결하게 됨의 축복을 누린다.)
우리는 온 교회가 예수의 피를 사용하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배워야 한다고 확신한다. 이 비밀을 발견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의 모든 영역이 개방된다.
(주: 성령이 임하시는데 성령은 하나님의 모든 좋은 것을 우리에게 공급하신다. 오직 성령을 통하여 공급하신다. 맥스웰 화이트 목사님의 이 구절은 의미심장하다.)
또 하늘나라에 있는 천사들은 예수의 피를 귀하게 여기고 사용하며 간구하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와서 그를 돕고 구해줄 것이다. 진실로 어느 작가가 노래한 것처럼 "성령은 예수의 피에 응답하신다."
예수의 피는 우리의 피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베 드로는 그것을 "보배로운 피" 라고 했는데, 이것은 올바른 표현이다.(벧전 1:19) 우리는 인간의 가치 기준에 의해서 예수의 피를 평가할 수는 없다. 그것은 무한히 귀한 것이다. 그것은 온 인류를 대속하기 위해서 치르신 하나님의 속전(贖錢)이다.
잠시 상상해 보라. 만일 예수의 피가 세상에 있는 인간의 혈액 은행에 저장될 수 있다면 놀랍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피를 수혈 받는 사람들은 그 깨끗한 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되지 않겠는가? 물론 하나님께서는 결코 수혈에 의해서 구원을 집행하려 하지 아니하신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예수를 의뢰하며 자기의 구세주로 받아들일 때 그와 마찬가지로 큰 기적이 일어난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즉시 큰 정결케 함이 발생하며 혈류 속에 있는 죄가 씻기어진다.
"내가 전에는 그들의 피흘림 당한 것을 갚아 주지 아니하였거니와 이제는 갚아 주리니 이는 나 여호와가 시온에 거함이니라"(요엘 3:21)
성경은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면 그의 피가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고 선포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정확한 사실이다. 우리의 혈류 속에 있는 죄가 깨끗이 제거되고 영적 더러움이 씻기어졌다면, 피를 순환시켜 주는 심장도 깨끗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구원이라는 기적에 의해서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아들의 거룩한 건강을 받는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살균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이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들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사단의 별명인 "마왕(Beelzebub)" 이 "파리들의 주" "파리들의 왕자" 라는 뜻이라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죽은 피는 파리들을 끌어들이며, 파리들은 굳어지는 피 속에서 부패함을 번식시킬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피는 그와 정반대의 효과를 발휘한다. 그것은 마왕과 모든 악마들을 격퇴한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어떤 대상에게 예수의 피를 뿌리면, 예수의 피는 살아 있기 때문에 사단은 도망칠 것이다. 생명은 예수의 피 속에 있다.
마귀는 예수의 피에 대한 언급을 싫어한다. 우리가 직접 그러한 말로 마귀들을 공격해 보면 이러한 사실이 분명해진다. 우리가 예수의 피를 언급했을 때에 어떤 마귀들은 실제로 "그런 말을 하지 말아라. 그런 말을 하지 말아라" 라고 말했었다.
또 어떤 마귀는 마치 우리가 무서운 말을 하기나 한 것 처럼 비난조로 "너 계속 그런 말을 할테냐?"라고 말했다.
언젠가 우리는 정신이 나간 여인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나는 "예수여. 우리는 당신의 보배로운 피를 힘입어 간구합니다!" 라고 말했는데, 즉시 그 여인의 목구멍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면서 말하기를 "그런 말을 하지 말아라. 나는 그런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하여 "우리가 그 피를 힘입어 간구합니다!" 라고 소리치며 기도했다. 그랬더니 드디어 마귀는 항복했다.
마귀는 "좋다. 그런 말을 해도 좋다.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고 말했다.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마귀는 그 부인에게서 나갔으므로 여인은 정신을 되찾았다. 우리는 예수의 피의 능력을 보고 기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피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레위기 17장에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였느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라고 말한 사도의 말은 옳은 말이다. (히 9:22)
사람들 중에는 예수의 이름을 소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는 예수의 이름과 피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피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자기의 피를 흘리시고 그것을 아버지에게 바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셨으며(마태복음 28:18), 그런 까닭에 예수의 이름에 능력이 있는 것이다. 또 그와 동일한 능력과 권세는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지지만(누가복음10:19), 그것은 우리가 예수의 피를 존중할 때에만 작용한다.
흔히 예수의 죽으심을 "대신하는" 죽음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대속의 죽음이라는 의미이다.
주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구약에는 피흘림이라는 조건에서만 죄 사함을 얻는다는 것, 생명에는 생명으로 대응한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말씀들이 많으며, 신약 성서에서도 그러한 말씀을 찾아볼 수 있다.
( 주 : 알 레이시의 예수님의 보혈이라는 책을 보면 이 책에서
알 레이시는 존 맥아더 목사(미국의 그레이스 커뮤니티 처치)와 토론한 것이 나타나는데 우리의 구속이 예수님의 죽음 때문이라는 존 맥아더의 말에 대하여 알 레이시는 예수님의 보혈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게 그것같지만 차이가 있으므로 알 레이시는 이 점을 기록하려고 이 책을 썼는데 이 사실을 제대로 이해할 때에 우리의 신앙,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과 존재에 실제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서는 존 맥아더 목사가 틀린 것이다. 맞는 말같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죽으시면서 흘리신 것이 피이고 그 피로 우리의 죄를 씻는 것이다. 그 피에는 그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를 위하여 바치셨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그 보혈을 우리를 위하여 흘리셨다는 것이며 우리에게 늘 적용해주신다는 것이다.
구원과 구속의 차이점
구원과 구속은 다른 것인데 구원 이후에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을 구속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구속의 방법은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이다.
이것이 성경에 명백하게 나타난다. 즉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오셔서 예수님의 보혈로 죄를 씻기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구속하여 주시는 것이다.
구속에 대한 말씀들을 찾아보면 그것이 어떤 경우 휴거를 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의 구절에서 구속이 어떤 의미인지 구원과 어떻게 다른지 알아야 한다.
[롬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예수님을 만나서 그 보혈로 씻겨져서 성령의 능력으로 구속당함 이라는 의미이다.)
[롬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이 로마서 구절은 분명히 휴거를 말한다. 구원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듭나는 것이며 성령의 능력이 우리의 몸까지 잡아주시고 변화시켜 주신다는 것이다.
곧 휴거 때에 일어나는 일이다.
1. 그러면 휴거에 예수님의 피는 필수적인 것이다.
요한계시록
7:13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이 구절의 해석은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환란전에 이미 휴거된 자들을 사도 요한이 그저 보는 것이 옳다고 보는데 (그러므로 환란전 휴거이며 또한 당연히 환란후 휴거가 아니다. )
그 이유는
이유 (1) 그러므로 이 구절은 예수님의 피로 씻고 휴거되는 자들을 말하므로 환란중간에서 나왔다는 말로 해석될 수 없다.
그 말은 환란중간에 있다가 예수님의 피로 씻겨진 것이 아니라 이미 환란이 오기 전에 성령의 능력으로 보호받고 있다가 휴거되어 환란에서 나오는자들, 곧 큰 환란을 피하여 나오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
원어를 보면 전치사 에크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from 혹은 out of 이다. 나온다는 동사가 사용된 문장은 아니다.
이유 (2) 우리가 계속 구속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때에 이러한 개념이 서로 일치한다.
즉 정결하게 예수님의 피로 씻은 자는 환란을 거치지 않는다 라고 하는 것이 성령의 보호를 말하는 다른 구절과 일치한다. 그럼 성령받은 이들은 안 죽었는가? 순교당하지 않았다는 말인가?라고 물을 수 있지만 기독교 시대의 순교와 이 환란기의 순교는 다르다.
전자는 성령충만하여 순교도 하지만 후자는 성령충만한 자는 없고 단지 버려둠을 당한 자가 순교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유 (3) 어떤 이는 또 큰 환란과 그 전의 환란을 나누어서 이것이 환란중간설을 말한다고 합니다. 저는 그것도 아니라고 본다. 환란 자체가 이미 큰 환란이다.
마태복음 24:20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24: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런데 마태복음 24:21부분은 마태복음에서도 유대인에 대한 설명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그 앞의 15- 20절의 안식일을 언급하신 것때문이다. 이 내용은 유대인에게 주시는 설명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7장의 구절은 유대인에 대한 환란의 설명이다. 6-11장은 유대인에게 주는 설명이고 12장은 교회의 형성, 13-19는 이방인에게 주는 설명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큰 환란에 오기 직전이라고 볼 이유가 없다.
이미 6-11장에서 7장의 위치는 환란중 전삼년반 기간이라고 보인다.
8:6부터 일곱 나팔이 나오는데 이때에 니비루와 같은 재앙이 임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후삼년반의 시작이라고 본다.
설명이 좀 미비하지만 다른 곳에서 다루도록 할 것이다.
이 구절이 환란전휴거의 이유인 것은 이유 (4)
이미 7:9에는 하늘에서 휴거된 자들이 있음을 보는 것은 그 이전에 휴거가 된다는 것이며 이는 환란전 휴거의 명백한 증거이다.
6장이 환란의 시작인데 휴거되는 자들이 그 이후로부터 7:9에 오기까지 휴거된다 라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구절이 없다.
휴거와 예수님의 보혈의 적용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구원받은 자들이 다 올라가더라 라는 말씀이 없다. 이 구절을 문맥에 의지하지 않고 해석함으로 혼동을 초래하는 것은 올바른 해석이 아니다.
3. 구원 이후에 성령으로 구속되는 자들이 곧 예수님의 보혈로 뿌리심을 받아 정결하게 된 자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구속을 당하는데 이것이 바로 휴거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는 구원받은 자와 휴거되는 자를 나누는 것이다.
이것이 엄청나게 중요한 사실임을 아셔야 한다.
[고전 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 이 말씀은 우리가 어찌됨을 말함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 우리를 덮고 계신 예수님 그분 자체가 우리의 지혜이시고 우리의 의로움이시며 우리의 거룩하심이며 우리의 구속하심이다. 예수님과 피는 나눌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과 말 그대로의 ‘죽음’은 나뉜다.
이 말은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며 죽음을 정복하신 것이다.
예수님께 온 죽음을 부활때에 떨구어내셔서 지금 예수님의 죽으심은 과거사가 된 것이다. 죽음의 세력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부활하신 후에도 늘 우리에게 적용해주시는 것이다.
죽음이 예수님을 어찌 하지 못한 것이다. 위의 존 맥아더 목사가 죽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죽음의 결과로 우리에게 주신 바 예수님의 몸과 피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고 구속받는 것인데 이를 구분하지 못한 것이라고 본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죽으신 것이고 예수님의 살과 피는 예수님의 자체이다.
히브리서 10장의 말씀대로 우리는 예수님의 몸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성소로 나아간다.
히브리서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존 맥아더가 이 히브리서를 깊이 묵상했다면 위와 같은 논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존 맥아더 목사는 장로교 목사로서 은사중단론자에 속한다.
그는 성령의 실제적인 능력보다는 개념과 진리로 인한 구원에 초점을 더 맞추고 있는데 구원의 시각에서 신앙의 모든 것을 다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시각에서만 보면 어떤 휴거되지 않는 자들은 “아니, 왜 우리는 안 데려가시는가?”라는 질문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구속이라는 기준으로 봐야 휴거가 잘 이해가 된다.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 제물로서, 어린 양으로서,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교회의 머리로서 예수님은 이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를 둘러싸고 계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에 예수님이 보이므로 우리를 정죄하시지 않으신다.
요한일서
5: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잘 보시오.
예수님과 예수님의 생명 곧 영생은 나뉘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님은 안 받고 영생만 받는다면 거짓이다.
예수님이 우리안에 계시고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라고 하나님은 보시는 것이다.
나와 분리되지 않는 예수님을 보시고 하나님은 생명이 있음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이를 아시기에
그 아들 예수님은 피로서 우리를 덮으시고
예수님의 살을 주셔서 우리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신다.
이것이 출애굽때에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또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드리시며 하신 일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찢기신 그 몸으로 우리를 덮으셔서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시고 우리는 살리신 것이다.
예수님의 생명이신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는 살리고 예수님은 죽으신 것이다. 당신의 어떤 죄라도 다 씻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고 믿고 예수님의 피를 뿌린다고 해야 한다.
유월절 양되신 예수님은 내 살을 먹으라 하셨고
내 피를 마시라 하셨다.
그렇게 함으로 생명이 우리안에 들어오고 그 생명, 곧 영생은 우리와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는 안에 영생을 가진 자가 된다.
하나님은 우리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에 죄없다 하시고 영생이 있다 판정하신다.
말로만 믿고 죄씻음이 없고 성령이 없는 자들도 있다.
복음이, 십자가와 구원이 그저 개념으로만 있는 자들도 있는데
이들중 일부는 정말 실수를 하여서 거듭남이 없고 주님앞에 망하는 자가 된다.
교회는 나가도 실제로 거듭나지 않고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사랑해도 자기 마음으로 사랑하지
변화된 새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 사랑을 참되다고 여기시지 않는다.
정결하지 않는 마음에서 나온 것은 다 저주를 받는다.
하나님은 정결하지 않은 죄인의 마음에서 나온 것은 다 죽이신다.
그런 예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나답과 아비후(레위기 10장) 등이다.
히브리서 10: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나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참된 마음으로 나아간다. 이 마음은 거짓이 없는 마음이고 인간의 마음인데 정결함으로 하나님이 받아주실 수 있는 피조물의 마음이다.
거짓된 마음은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합당한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이다. 그것이 피조물로서 합당한 마음이요 의심하는 자세는 하나님이 상종하시지 않으시는 자세이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에 의심하는 마음으로 하여 응답받은 적이 있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은 우리 스스로는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정결하게 씻어낼 때에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실 때에 비로서 성령을 부어주신다.
이 진리를 알고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힘입는 것이다.
이것을 알고 예수님의 피를 뿌린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10: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진리가 무엇인가? 바로 위의 구절들이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가 하나님앞에 나아간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찢기신 그 몸으로 우리를 덮으셔서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시고 우리는 살리신 것이다.
예수님의 생명이신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는 살리고 예수님은 죽으신 것이다.
이 진리가 고상한 것이며 가장 귀한 것인데 이것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죄를 범한 즉 그는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다.
10: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10: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10: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우리가 예수님의 피흘리심을 알고도 그것이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것은 형벌이 기다리는 것이다.
유다서 2:10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
주관하시는 분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의 역사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자들은 특별 형벌을 받는다. 성경대로이다.
좀 알고 살아야 할텐데 모르고 죄를 짓는 것이다.
예수님과 우리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의 찢겨지심으로 그 살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서, 그 피를 우리에게 적용하심으로서 성소로 들어가며 그리고 예수님은 죽으신 것이다.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 때문에 죄인인 우리를 치시려 하실 때에
예수님이 그 피흘리신 몸으로 우리를 덮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도록 함께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나뉘지 아니하신다. 그런 자들을 휴거시키신다.
예수는 우리의 의로움이시고, 지혜이시고 생명이시고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신랑이시고 우리의 영생이다.
하늘과 땅의 차이 때문에 나뉘어계신 것이 아니다.
죄 때문에 분리가 되실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로 씻어 정결한 자를
예수님은 성령안에서 우리를 늘 품고 계시다.
예수님이 그 죄값을 담당하신 피흘리시는 몸으로 우리를 덮어주시는데 아버지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를 더 이상 치실 리 없고 우리도 치실 리 없다.
이것이 예수님이 몸바쳐서 우리를 살리시는 방법이다.
이것이 현재적 구원이고 이것이 우리를 능력으로 잡아주심이고 구속의 의미다.
이것을 알고 체험하는 것이 승리하는 신앙이요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김은 바로 예수님의 피를 적용하여 성령안에 거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오늘도 대제사장으로 하시는데 이것은 다른 제물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몸 바로 그 몸을 찢으셔서 우리를 덮으시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은혜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에게 주시는 실제적인 복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바치시고 흘리신 예수님의 몸과 피이다. 이것을 구분해야 한다.
당신은 이 예수님이 몸찢으시고 피흘려 당신의 죄를 덮으시는데
여전히 죄에 거할 용기가 있는가?
그러도고 주님앞에서 눈감고 복락을 간구하는 자가 될 수 있는가?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죽어도 상관없는 것은 우리에게 이미 이 모든 것을 바치셔서 우리를 구하셨기 때문이고 이 구원하심은 언제나 효력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것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마시오. 이것은 저주를 부르는 어리석은 행위이다. (저주는 죽는다는 것이다. 신자가 지옥가는 저주를 받지는않아도 자기의 힘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할 때에 하나님은 막으시되 끝까지 계속하면 치실 것이다. 이것이 나답과 아비후에게 일어난 사건이다. 레위기 10장)
다른 것을 가지고 간다면 우리의 죄값을 감당할 것이 없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죽으라는 명령을 당하여 치심을 당할 것이다. 이런 자들이 가인(죽지는 않았으나 교제가 단절되었다.), 베레스 웃사의 웃사, 나답과 아비후(레위기 10장), 아나니아와 삽비라 등이다.
죽고자 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침해하는 우리의 의의 옷을 입고 나아가시라.
우리의 의는 더러운 낡은 옷과 같다.
그러나 살고자 하면 오직 예수님의 찢기신 몸과 그 흘리신 보혈을 덮고 나아가시라.
이에 대하여 다른 말을 하는 자는 진리를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것인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시는 분의 소유됨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휴거때에 부활되는 자는 다름아닌 이러한 자들 곧 그리스도의 소유물된 사람들이다.
고린도전서 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에게 붙은 자'는 소유격으로 Christ's로 되어 있이다.
당신은 예수님의 것인가?
예수님이 당신의 모든 죄를 몸으로 덮어주시고 흘리신 피로 씻어주셔서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주시는가? 스스로 물어보시기를 바란다.
나는 그런 자가 부활하고 몸이 변화되어서 휴거되리라 믿는다. )
[엡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구속이란 성령으로 잡아주심인데 이는 예수님의 피로 정결하게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후에(혹은 직후에) 이러한 일을 체험한다. 그리고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엡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성령의 인치심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휴거가 되는 날까지 우리를 붙들어주신다고 하는 말씀이다.
[골 1:14] 그 아들 안에서 (그의 피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개역판 성경에는 없지만 KJV 에는 엡 1:7과 마찬가지로 그의 보혈이 있다. )
[히2: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무엇으로 구속하시는가? 바로 우리의 죄를 씻어주셔서 우리를 구속하시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은 같이 공존할 수 없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손으로 죄인을 잡아주시면 죄인은 멸망한다.
하나님의 능력은 거룩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지 죄인된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이 치시지 않을, 곧 죄가 없는 자가 되어야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붙들어주실 것이다. 그때에 승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피이외에 이러한 정결함을 이룰 것이 없다.
짐승의 피는 죄를 가리우기만 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저 구속하시지 않으신다. 예수님의 피로 씻어주시고 성령을 부으셔서 구속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로 씻는 것은 놀라운 주님의 능력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베푸심이다.)
베드로전서 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우리의 죽을 죄악의 행동을 벗어난 것은 오직 예수님의 피로 된 것이다.
이 말씀은 죄를 예수님의 피로 온전히 씻어주셨으니 이제 성령이 임하실 수 있고 그 결과 성령이 인간의 타락한 본성조차 다스려주시기 때문에 그가 말씀을 따라 순종할 수 있으므로 (에스겔 36: 27) 죄악에서 구속된 자가 되는 것이다. 망령된 행실을 이제 하지 않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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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멕스웰 화이트의 보혈의 능력을 보도록 한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브리서9:22)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피를 흘리셨으며,
하나님의 대제사장으로서 백성들을 대신하여 피를 뿌리셨다.
그는 유월절, "여호와께서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고 하신 것을 기리는 명절날에 십자가에 달리셨다(출애굽기12:23).
유대인들이 최초의 출애굽을 경축하는 순간에 예수는 두 번째 출애굽을 위한 대속을 행하고 계셨다.
이 제물과 그의 보배로운 피의 효능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죄와 그로 말미암는 형벌(질병 포함)으로부터의 출애굽이 있다.
예수는 자신의 피를 뿌려 다음과 같은 전형(典型)들을 성취하셨다.
제단(십자가)위에서: 출애굽기 24장 6-8절
십자가의 주위에서: 출애굽기 29: 12-16절
대제사장의 옷에서: 출애굽기 29:20-21절
일곱 번 뿌림을 당했으며: 레위기 4:6-7절
십자가 밑에서: 레위기 4장 6-7절
십자가 옆에서: 레위기 5:9
십자가 주위에서, 즉 십자가 밑의 땅에서: 레위기 7:2
성소 앞에서 일곱 번 뿌림을 당했다: 민수기 19:4
마지막 것은 십자가와 갈보리 언덕은 예루살렘 성전이 보이는 곳에 있었다는 점에서 성취되었다.
이 모든 구약의 전형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일 속에서 성취되었는데, 예수는 자신을 우리의 유월절, 우리의 대리인, 우리의 구세주, 우리의 피 제물로 만드셨다.
예수의 피만이 우리의 죄를 덮을 수 있다.
(주: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 되시는 이유인 것이다. 믿음으로만 된다고 하는 자는 이러한 깊은 것을 모른다.)
사실 깊은 것이 아니라 기본인데 이 기본마저 사단이 가려버리우므로 진리와 동떨어진 교회가 되고 결국은 무능한 교회, 세상을 이기지 못하는 교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과거 역사속에서 사단은 예수님의 보혈에 대하여 방해작업을 많이 했다.
우리 나라 평양 대부흥때에도 보혈이 많이 강조되었으나 그 후에 많이 잊혀졌다.
보혈에 대한 찬송가를 다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 1800대에 작사된 것이 많은데 이는 그때에 부흥이 일어날 때였다.
우리의 승리는 예수님이 이렇게 능력있게 우리를 구하실 수 있음을 알고 의지하고 나아가서 그의 피로 씻김받음으로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내 힘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죄씻음받고 내게 임한 성령의 능력으로 따라서 일하는 것이다.
지금 이 표현들이 수없이 반복되지만 이것을 우리가 명심해야 한다.
죄를 지어도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여 회개하고 승리하여야 하고
내가 하려고 해도 그렇게 해야 한다.
요한일서
5: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5:6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5:7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오직 승리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 힘으로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뿐 아니라 피로도 우리에게 임하신다.
즉 피로 우리에게 오셔서 피를 적용해주신다. 그 결과 우리는 정결해지고 성령안에 거하는 삶이 되는 것이다.
다른 구원의 방법을 말하면 기독교와는 다른 이단이다. 즉 우리의 간절함이나 우리의 믿음이나--이것도 우리의 것이다. 성령이 주셨어도 우리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예수님의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니다.
현대에 예수님의 피가 강조되지 않음으로서 성령의 능력이 없이 그저 긍정적인 사고방식만을 주장하는 이단이 또 생겼다.
수정교회의 로버트 슐러 목사와 죠엘 오스틴이다. 예수님의 피보다는 우리의 마음자세를 더 강조한다.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것이다.
다음 구절은 어떤 것인가? 이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살아갈 수 있다.
요한일서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영생을 누리는 삶, 구원받았음에 대하여 전혀 의심할 바 없이 이 땅에서 영생을 누리고 더욱 풍성히 누리는 삶을 살게 된다.(요 10:10)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5: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5: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 죄가 없으므로 담대하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업(상속)을 요구하는 응답받는 기도생활을 하게 된다.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정결한 삶이다. 그런 자의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신다.
이 상속이란 하늘나라에서 우리가 받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담대한 기도, 회개하고 정결한 자로서 하나님께 나아가서 구하는 담대한 기도는 바로 우리가 받을 것을 받게 하는 합당한 것이다.
우리가 억지로 떼를 쓰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여 정결하고 성령안에 거하는 자를 하나님은 기뻐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기도하면 주시는 것이다.
내 힘으로 떼쓰는 것이 기도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상속분을 받는 것이다.
감사할 일이다.
5: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5: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 올바른 중보기도의 생활, 우리는 중보함으로 형제를 사랑하고 살릴 수 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하신다.
요한일서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5: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는 보호하심.
예수님이 성령으로 (성령은 곧 예수님이시다. 헷갈리지 마시기를 바란다. 성령은 곧 예수님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감싸고 계심으로 창조주 하나님이신 성령, 거룩하신 성령이 우리를 둘러 감싸심으로서 악한 자, 사단은 우리에게 손대기 이전에 성령과 접촉해야 하는데 그것은 그 사단의 멸망이므로 감히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못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안에서 보호된다.
요한일서 1:7에서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죄를 사함받는다 라는 말씀을 하는데 이로 말미암아 요한일서의 참다운 하나님과의 교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 요한을 본받고자할 때에 그의 믿음과 하나님과의 교제를 요한일서에서 보고 따라갈 수 있다.
예수께서 갈보리에서 지신 무거운 죄짐을 생각해본다면,
예수께서(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영혼의 고통 속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외치신 것을 어찌 조금이라도 기이하게 여길 수 있겠는가(시편22:1, 마태복음27:46)?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자기 아들을 버리셨는가?
기록된 바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죄를 "참아 보지 못하시기" 때문이다.(하박국1:13)
예수께서는 세상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자기 아들이었지만 참아 보실 수가 없었다.
예수는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우리 죄의 악을 담당하시고 계셨기 때문에,
자기의 몸을 자기의 피로 덮기 전까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를 참아 보실 수가 없었다.
예수께서 자기의 몸을 자기의 피로 덮은 후에야
아버지께서는 자기의 독생자에게 얼굴을 돌리시고 그를 바라보셨다.
그는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이제 우리의 죄는 사함을 받고 그의 보배로운 피로 덮혔다.
그는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으니,
그것이 아버지께서 요구하신 일이었다.
이 일이 이루어진 후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죄를 바라보신 것이 아니라 자기 아들의 피를 바라보셨다. 그것이면 넉넉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이 온 인류를 대신하여 자기의 피 속에 있는 생명을 바치셨던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그 제물을 존중하셨으며, 우리의 대속은 완전히 이루어졌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중히 여긴다면, 아버지께서 미소를 지으시며 우리를 용서하시고 정결케 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따분하게 신학적으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결정적으로 그의 피를 포옹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의 피를 바쳐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덮고 용서하고 탄원하기 위해 바쳐진 자기 아들의 피를 보실 때에는 결코 우리의 죄를 보시지 않는다. 그는 단지 우리의 죄를 덮어주는 것, 즉 예수의 피를 보실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한다" 는 것을 깨닫는다
(레위기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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