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사 학 위 논 문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베드로의 영성 개발
2000年 1月 5日
침례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신 학 전 공
김 원 종
문 상 기 지도교수
석 사 학 위 논 문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베드로의 영성 개발
이 논문을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함
2000年 1月 5日
침례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신 학 전 공
김 원 종
김원종의 석사학위 논문을 인준함
2000년 1월 5일
심 사 위 원 장 문 상 기 인
심 사 위 원 이 명 희 인
심 사 위 원 안 태 길 인
목 차
Ⅰ. 서 론 1
1. 연구 목적 1
2. 연구 방법 4
Ⅱ. 영성에 대한 이해 6
1. 일반적인 영성이해 6
2. 성서적인 영성이해 8
3. 신학적인 영성이해 13
4. 목회적인 영성이해 14
Ⅲ. 목회자의 영성개발 18
1. 영성과 목회의 관계 18
2. 목회자의 영성개발의 필요성 24
3. 목회자의 영성개발의 방법 27
Ⅳ. 베드로의 영성개발 39
1. 베드로의 영성개발 방법 39
2. 베드로의 영성개발의 축복 43
3. 베드로의 영성개발의 도구 45
1) 기도를 통한 영성개발 46
2) 말씀을 통한 영성개발 47
3) 설교를 통한 영성개발 49
4) 지도력를 통한 영성개발 50
Ⅵ. 결 론 55
참고문헌 59
Ⅰ. 서론
1. 연구의 목적
1884년 한반도에 기독교가 들어온 이래 한국교회는 1세기 동안에 많은 발전을 하였고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크게 성장하였다는 것은 자타가 다 인정하는 사실이다. 거기에는 수많은 신앙선배들의 피눈물나는 노력과 성령의 놀라운 역사, 그리고 교회를 성장시켜 보겠다는 목회자들의 뜨거운 구령의 열정과 또 이에 호응하는 긍정적으로 신앙지도를 받아들인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자세 등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본다.
오늘날 교회성장에 대한 많은 논문들이 발표되고 있으며 각기 저마다의 타당한 교회성장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교회성장에는 오직 한 방법의 원리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방법과 서로 다른 원리들이 교회성장의 원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본질은 동일하다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성장시키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중심의 목회를 시도할 때 교회는 성장한다. 왜냐하면 교회성장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교회성장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교회성장이란 성도들이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성장해 나갈 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성장의 본질이다.
교회성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목회자이다. 교회는 목회자만큼 성장하고 자라간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교회이다. “새들백 교회 이야기”에서 릭웨렌 목사는 건강한 교회는 반드시 성장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좀더 구체화 시켜서 건강한 목회자가 있는 교회는 반드시 성장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의 목회현실을 보면 목회자가 건강 할 수 없는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너무 바쁘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상실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목회자들의 본분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전하는 것에 전무하는 것이다(행 6:4). 즉 기도하는 것과 말씀전하는 것이 목회자들의 근본적인 뿌리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를 인도하고 있는 현 목회자들의 실상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일 이외에도, 심방과 상담, 교회행정과 지역사회 유대, 지방회와 총회의 업무, 타교단과의 연합사업, 자선사업, 선교원 운영, 다양한 사람과의 인간관계 등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여러 분야에 걸쳐 바쁘게 일해야 하는 실정이다. 이와같은 현실속에서 전부는 아니더라도 많은 목회자들이 너무 바쁘다는 이유 때문에 충분한 말씀준비와 기도무장을 하지 못하고 강단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함에 있어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이 기름 부으심이 없는 형식적인 예배로 전략해 버리지는 않았나 생각해본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예배는 형식화되고 형식적 교인들을 양성하므로, 윤리도덕적 타락과 함께 교회 부흥의 한계를 맛보며 교회 본질인 영혼구원과 영혼사랑을 상실하므로 타종교와 이단이 득세하고 전도의 힘을 상실하는 영적 침체에 빠져 있다고 진단해 본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이 목회자의 영성개발이다. 목회자의 영성 개발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무한대로 개발시킬 수 있는 잠재 가능성이 있다. 영성을 개발시킬 수 있는 통로는 기도와 말씀이다. 말씀은 하나님이시다(요 1:1). 하나님과 깊이 있게 호흡하고 대화하고 교제할 때 성령의 감동을 입고 하나님이 깊은 것이라도 통달 할 수가 있다(고전 2:10).
본 논문의 신학적인 뼈대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3권의 기도와 믿음 그리고 제4권의 목회에 관한 부분이다. 칼빈의 “기도는 믿음의 주요 실천이다”라는 신학적 명제는 이 논문 전체의 논지를 이끌어 가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구실을 하고 있다. 모든 기본 사상들은 믿음에 핵심을 두게 했고, 그 믿음은 실천적 수단인 기도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성서의 실천적 역사적인 맥락에서 목회자의 기도생활에 그 본질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본 연구의 사상적 배경이다.
이 연구는 목회자의 영성개발에 교회부흥의 열쇠가 있음을 주장한다. 목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하나님의 형상인 거룩한 성품에 이르는 것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끊임없는 기도생활이다. 기도하는 목회자, 기도하는 성도, 기도하는 교회가 되어질 때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공중권세를 잡은 악한 마귀의 진이 깨어지고,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교회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로 귀신이 축출되고 병자가 치료되며, 영혼이 구원받고, 인생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평안을 주고, 고난, 고통, 질병, 괴로움으로 시달리는 문제를 해결해 준다. 목회자가 먼저 영성개발을 통하여 생수의 강이 터지게 될 때 성도들을 푸른초장, 맑은 물가로 인도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무장되어지고 영혼사랑 하는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나서 전도와 선교의 불을 통하여 가정 복음화, 지역 복음화, 민족 복음화, 세계복음화의 역사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연구자는 이와 같은 현실을 파악하고 다시 한번 한국교회 강단 목회에 위대한 성령운동을 일으켜서 성장하고 있는 교회는 더 크게 부흥할 수 있게 하고, 침체에 빠진 교회는 성령의 뜨거운 불이 다시 재연되어 놀랍게 부흥하는 교회로 활성화시켜 보자는 목적과 동기로서 본 논문을 쓰게 된 것이다.
2. 연구 방법과 범위
성서를 통하여 영성 개발에 위대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한 인물이 있다. 그는 바로 베드로다. 베드로는 교회를 세운 특별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예수님은 특별히 베드로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셨다. 베드로는 문벌 좋은 사람이 아니었으며, 능력이 많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높은 학문을 쌓은 지식인도 아니었고, 참으로 평범한 보통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토록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일이다. 그러나 그의 나중 생애를 보면 그가 크게 쓰임 받은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는 위대한 인물이 될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수제자”라는 명예를 얻었으며, 그가 설교할 때 삼천 명이 회개하고 제자가 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는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한 분이다. 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당시에 엘리트라고 하는 관원과 서기관들, 제사장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높은 학문적 지성도 겸비하게 되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다가 그리스도의 복음전도를 위해 크게 쓰임을 받았다. 이러한 가능성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체험적 사건으로 일어난다면, 우리는 위대한 가능성과 변화된 인격을 지니게 될 것이다.
“목회자의 영성 개발과 교회 부흥”은 그 내용과 범위가 넓고 광할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성경의 인물 중에서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를 중심으로 요엘서 2장 28-32절에서의 요엘의 예언이 사도행전 2장 16-21절에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서 이루어지는 사실을 기초로 하여, 베드로의 영성개발에 중점을 두고 연구해 나갈 것이다. 연구방법으로는 자료 수집에 의한 분석과 여러 출판사에서 발간한 영성과 기도의 책자 및 교회성장 문서, 관계논문, 잡지 및 보고서들을 수집하여 그 자료들을 분류 분석하려고 한다.
본 논문의 구성은 모두 3장으로 되어 있는데, 제1장에서는 일반적인 영성이해, 성서적인 영성이해, 신학적인 영성이해, 목회적인 영성이해를 살펴보았고, 제2장에서는 목회자의 영성개발로서 영성과 목회의 관계를 살핀다. 목회자에 대한 이해를 먼저 하고 목회의 본질을 알아보고 목회자의 영성개발의 필요성과 그 방법들을 제시한다. 제3장에서는 베드로의 영성개발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4장에서 베드로의 영성개발을 통한 교회성장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베드로의 영성개발을 통한 교회 부흥을 근거로 21세기 현대적 목회대안을 제시하면서 끝을 맺는다.
Ⅱ. 영성에 대한 이해
1. 일반적인 영성이해
영성에 대한 일반적 이해는 기독교 영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브래들리 한센(Bradley Hansen)은 영성에 대한 정의를 “영성이란 인간의 삶의 본질과 목적에 관한 확신에 따라서 사는 한 개인이나 한 공동체의 삶의 스타일이다”라고 명쾌하게 말하고 있다. 이 정의는 영성에 있어서 두 가지 면을 분명히 제시해 주고 있는데 첫째로, 영성은 한 개인이나 공동체가 자신과 이 세계에 대한 나름대로의 믿음의 체계, 즉 이해의 체계라는 것이다. 둘째로, 영성은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이해의 체계로 끝나지 않고 그에 따라 사는 삶의 구체적 표현의 체계, 즉 실천적 체계가 그것이다. 한마디로 모든 영성은 나름대로의 삶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이해에 따른 삶의 구체적 표현, 즉 삶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영성이란 그 사람을 움직이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는 사상을 의미한다. 예를들면 소크라테스의 정신을 자기의 정신으로 내면화시켜서 스크라테스의 정신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스토아철학자들은 ‘스토아주의 영성’이라 부른다. 스토아학자들은 소크라테스의 인간과 삶을 가장 이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의 정신을 본받아 사는 것을 최고의 덕으로 생각하여 스토아주의와 같이 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여 소크라테스를 따라 살려고 노력한다. 이처럼 영성이란 용어는 자기가 보기에 가장 이상적인 정신을 자기의 정신으로 받아들여 그 정신을 실천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거는 것을 의미한다.
죠던 오만(J. Aumann)은 “영성이란 어떤 특정 종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적용되며 영성은 각자의 종교적 확신에 따른 생활양식을 형성한다”고 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의 최고의 이상과 가치가 다르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수많은 영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 어떤 최고의 정신을 가지고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영성을 가지고 산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어떤 사람은 정신적인 가치보다는 물질적인 쾌락이나 정욕을 따라 살기 때문이다.
영성은 단순한 지식이나 이해가 아니요 삶의 본질에 대한 나름대로의 확신에 따라서 사는 삶의 형태를 지칭하는 것으로 다른 말로 표현하여 통합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모든 활동 영역을 분석해 보면, 지적인 차원, 정서적 차원, 의지적 차원 등 세 가지의 차원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이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차원적 요소들이 인간 속에서 통합되어지는 것을 가리켜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영성이란 맹목적 행동주의도, 단순한 감정주의도 아니며, 또한 단순한 지식이나 도그마의 체계도 아닌 인간의 세 가지 차원, 즉 지적 차원, 정서적 차원, 의지적 차원의 연속성 속에서 통합되어진 구체적 실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의 본질과 목적에 대한 이해는 삶에 대한 나름대로의 내적 수용으로 이어지며, 그것은 그에 따른 구체적 의지적 작용, 즉 행동을 수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빠진다면 이미 그 영성은 통합성을 상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의 본질적 특징 중의 하나가 통합성이요, 통합성이 결여된 영성은 참다운 영성이 아니다.
2. 성서적인 영성이해
기독교 영성이란 단어에 대한 구약적 뿌리는 영에 해당하는 단어인 ‘루아흐’이다. ‘루아흐’(הוּר)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바람, 숨, 생명의 원리, 하나님의 능력 등을 의미하는데 이 단어는 구약에 389회 사용되어졌다. 구약에 있어서 영에 대한 이해를 몇마디로 요약해보면, 영은 인간이나 생물에게 있어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으로 인간에게 임하는 분으로서 소개되며, 하나님의 영은 인간세계에 임하여 생명을 소생시키고, 공의와 자비를 베풀며, 인간을 변화시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하게 만들며, 또한 능력을 제공하는 본체로서 소개되어지고 있다. 구약에서의 영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속하였다는 면에 있어서 초월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초월적 영은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인간의 삶 속에 개입하는 내재적 영임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으며, 그리고 또한 인간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는 면에 있어서 영의 통합적 특성을 들 수 있다.
구약에서의 ‘루아흐’는 바람, 숨, 생명력을 지시하는데, 정서와 의지도 가지고 있다. 히브리어 명사인 ‘ruah’는 마소라 본문 (MT) 전체에서 378회 나타난다. 그 중에서 주로 사람이 들이 내쉬는 ‘숨’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33회, ‘바람’을 이야기한 경우가 117회, ‘정신’이 76회, 육체 속에 내재한 ‘생명력’이 25회, ‘정서’, ‘기분’, ‘감정’ 이러한 것들의 기본이 되는 자리로서가 3회, 정신적인 활동의 자리 혹은 기관으로서 9회, 인간의지로서 3회, 도덕적 성품으로서 18회, 그리고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과 관련하여서는 94회이다. 이처럼 많이 언급되어진 것을 다시 크게 나누어 보면 세 가지로 나누어졌다. 포괄적으로 자연계에서 움직이는 기상학적 현상인 바람 즉, 기상학적 현상으로서의 ruah, 그리고 사람 속에서 작용하는 각종 능력, 기분, 정서 등과 관련된 ruah, 그리고 하나님과 ruah이다.
하나님의 영이 창조의 시초에 활동하셨듯이 후의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근처에 장막을 치고 하나님의 성막을 세우고자 하였을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로 그 일을 행할 인물들을 지시해 주셨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예언하게 되기를 바라던 모세의 희망은 여러 세기 후 여호와의 날에 대한 요엘의 환상 가운데 반영된다(욜 2:28-29).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영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개인들에게 지혜와 창조력을 주셨고, 지도자들에게는 그들의 통치권을 수여하셨고, 선택된 백성에게는 예언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해 주셨다. 그 본래의 개념은 창세기 1장 2절에 나타난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이 성령의 활동에 의하여 혼돈은 극복되고 세상은 창조되었다. 성령안에서 사는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모든 인간을 위한 강한 도입문인 것이다. 인간에 대한 영적인 이해는 창세기 1장 26절부터 28절과 2장 7절에 나오는 인간 창조 기사를 고찰하는데서 부터 시작될 수 있다. 구약학자 볼프 (Hans W. Wolff)는 창세기 1장 26절부터 28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에서 세 가지 영성적 차원을 지적했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와 비슷하게 사람을 만들자” 여기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이 시사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근성을 말한다. “우리가 아담을 만들어 그들이 다스리게 하자”라는 창세기 1:26b의 계속된 내용에서는 인류 공동체를 뜻하는 ‘아담’이란 단어에서 인류의 공동체성을 찾아야 하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씀 가운데서는 피조물에 대한 주권과 문화와 역사에 대한 위탁을 인식해야 한다고 한다. 즉 인간은 하나님과 이웃과 피조세계와의 관계 속에 놓여진 영적인 존재인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보면 하나님의 영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개인들에게 지혜와 창조력을 주셨고, 지도자들에게는 그들의 통치권을 수여하셨고, 선택된 백성에게는 예언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주셨다.
신약에서 '영'은 '숨을 쉬다', '바람이 불다'라는 뜻으로 137회 나오고 성령이란 단어도 93회 나온다. 신약에서 보면 세상의 통치자가 하나님의 영을 받아서 행동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신약에서 정치는 유대교든, 기독교든 신앙공동체의 생활과 반대되기조차 한다. 신약의 영성에 있어서 그 구심점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집약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신약의 영성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체험 그리고 제자들의 부활체험과 초대교회의 성령강림 사건에 있다. 이 체험은 곧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의 주체자인 하나님, 그리고 그 구원에 동참함으로 구원을 받는 인간의 인격적인 관계체험이다. 이와 같은 신앙체험이란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과의 대화,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체험이 신약의 영성에 기초를 이루고 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침례 받으신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영이 예수에게 임하였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마가는 “예수 속으로 (into him)” 들어왔다고 표현한다. 마가의 기사는 성령이 예수 속으로 들어가서 머물러 있음을 암시해 주는데 이는 침례 받던 그 날 예수에게 성령이 강림하였고 그 성령은 예수 안에서 계속적으로 있게된 것을 말한다. 복음서들은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 인간의 영은 하나님께 저항할 수도, 하나님을 갈망할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예수의 교훈, 선교, 사상 그리고 행동은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 즉 신앙체험의 외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전한 것은 바로 이러한 체험이었다. 예수의 기도생활은 바로 하나님과의 영적교제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의 내면생활은 바로 기도생활이었다. 예수의 공생애와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은 바로 성령의 인도와 하나님과의 영적교제에서 비롯된 역동적 활동이었고, 계속해서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과 초대교회에 이러한 영적 힘이 계승되었다. 사도들의 설교가 모두 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설교라는 점을 볼 때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령의 강림으로 확증되었다. 성령강림으로 교회가 서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강력히 증거되었다. 사실상 초대교회는 구약적인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구약에서의 영체험은 초기 기독교에서 계속되었다. 구약의 영체험은 신적인 영감, 신적인 힘으로 갑자기 인간에게 다가와서 초자연적인 힘으로 발휘하다가는 갑자기 떠나버리는 것인데, 이러한 영에 대한 이해가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있었다.
영적인 일에 대하여 우리에게 가장 많은 교훈을 준 사람은 사도바울이다. 바울은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으나,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를 불러 전도자로 삼았다. 그는 성령으로 충만한 사도가 되어 소아시아 지역에 복음을 증거하였다. 이때 그는 온전히 성령의 인도를 받았다. 성령께서 지시하시면 그는 행선지를 바꾸기도 했다 (행 16:6). 바울에게서 볼 수 있는 신비주의적인 영성은 ‘교제의 신비(Communio Mystica)’라는 말로 표현된다. 바울의 교제의 신비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는 형태로서 어디까지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에 대한 복종 및 그와의 교제의 관계에서 사는 것을 말한다. 이런 면에서 바울의 영성은 실제적이며 실천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능동적이며 윤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신약의 영성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항상 구심점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집약된다고 볼 수 있다. 전통적인 기독론의 연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집중되어 왔다. 그러므로 인간인 예수의 고뇌와 내면생활, 종교적 체험에는 관심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영성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체험, 그리고 제자들의 부활체험과 초대교회의 성령강림사건에 있다.
바울서신은 신자들 가운데서와 교회를 통하여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다. 바울은 그들 가운데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에 대하여, 또한 그들의 역사를 가능케 하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는 은사를 주시고 이는 개인의 발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은사를 통해 기독교 공동체를 굳건하게 세우기 위하여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은사가 하나님의 은사로 남아 있기 위해서는 사랑의 은사가 언제나 첨가되어야 한다는 것이 사도바울의 은사체험에 대한 기본학식이었다.
신약의 영성은 영성이 단지 내적인 느낌만이 아니라, 모든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는 종들이 되도록 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은 인간들의 역사와 삶을 창조하시는 역동적인 실재로서 인간들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 우리들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으로 이해됨을 볼 때 결국 개인적인 것보다는 공동체적인 의미라 볼 수 있다.
3. 신학적인 영성의 이해
영성은 넓은 의미로 인간행위를 유발하는 그 어떤 태도나 정신으로서 구체화된 종교적, 또는 윤리적인 가치를 총칭하기에 어떠한 특정 종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신적(神的), 또는 초월적인 것들을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적용되며, 각자의 종교적인 확신에 따른 어떤 생활양식을 형성한다. 그러나 영성이란 개념은 ‘영’이나 ‘정신’이란 말로서 신성한 능력, 즉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칭하는 성서적 용어와 일치하는 것 같다. 그러기에 엄격한 의미로 볼 때 진정한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그분을 통하여 성삼위에 이르는 영성일 뿐이다. 이것은 영성생활의 생명적인 원리인 창조된 은총이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올 뿐 아니라 영성생활에 정진하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다 자신들이 처한 종교적 위치에 관계없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영성과 신학이란 개념의 연합이 영성신학이다. 그러므로 영성신학의 올바른 정의를 내리려면 두 가지 개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져야 한다. 영성의 개념은 이미 살펴보았다. 넓은 의미의 영성은 인간행위를 유발하는 그 어떤 태도나 정신으로 구체화된 종교적, 또는 윤리적인 가치를 칭한다. 그러므로 영성은 종교적, 보편적인 개념일 수 있다. 신적, 혹은 초월적인 것들을 믿는자이며, 누구에게나 적용되며, 각자의 종교적 확신에 의한 생활양식을 형성한다. 기독교 영성이란 전통적으로 은총의 내적 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성은 생활인 초자연적인 질서이기 때문에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신학적인 방법이다. 그러므로 탐구방법은 신학에 고유한 방법이어야 한다. 이제는 신학의 개념이 문제이다. 신학의 전통적인 개념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관한 신비와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으로서의 하나님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영성신학은 신자들을 크리스챤 생활의 완성에로 인도할 목적으로 윤리신학을 그들 각자의 영성생활에다 응용한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서술할 수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영성신학은 신적인 계시진리와 개개인의 종교체험에서 시작하여, 초자연적 생활의 본질을 밝히고, 그 성장과 발전을 위한 지침을 규정하며, 영성생활의 시초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영혼들의 진보과정을 설명하는 신학의 한 영역이다. 영성신학의 주제와 목적이 무엇이며, 다른 신학 분야간의 관계가 어떠한가를 알게 될 것이다. 영성신학이 신학의 일부분이라고 말함으로써 특수하게 구분된 학문으로서가 아니라 전문화의 영역으로서 다른 분야의 신학과 구분하게 된다. 영성신학은 ① 영성체험의 심리학적인 자료; ② 신학원리의 적용; ③ 크리스챤 완덕의 관점에서 본 영성생활의 진보에 관한 실천적 지침 등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4. 목회적인 영성이해
목회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 도자이며, 신자의 상담자이며, 교육자이며, 사회적으로도 하나님의 사신으로서 영적 지도자이다. 이와 같이 다양하고 막중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목회자에게는 지도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지도력이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어 그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 지도력이란 목회하는데 있어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복음적인 영향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견고하고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워 가는 성도들이 되게 하는 능력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영성의 발달은 교역의 발달 과정이며, 회개와 중생의 변화과정을 겪게 된다. 회개는 인식의 향상을 뜻한다. 목회자의 영성발달은 그의 인격과 목회의 발달을 포함한 그 모든 관계의 변화와 성장을 촉진시키게 된다. 또한 목회자의 영성발달은 그의 환경과 그가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따라 달라지게 된다.
넬슨 떼이어(Nelson S. T. Thayer)는 교역의 중요한 역할을 “사람들로 하여금 이 시대 속에서 성서 속에서 계시되고 교회의 은총과 삶을 통해 표현된 거룩한 하나님의 차원을 향해 개방적으로 그를 체험하고 질서를 세우도록 돕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이것이 기독교의 영성 형성이고 목회의 과제이다”라고 정의했다. 교역과 영성은 하나님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그래서 교역은 인간이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모세나 다윗, 베드로, 바울이 저자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성령을 통한 말씀으로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영성이 존재할 수 없듯이 교역자가 영성이 죽어 있다면 이는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이니 교역이 불가능하게 된다. 교역이나 영성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에서 비례되기도 한다. 하늘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 영성의 길을 찾아 나아가는 교역은 영성과 불가분의 관계로 밀착된다고 본다.
홈즈(Holmes)는 그의 저서 「목회를 위한 영성」에서 영성에 대한 정의 다섯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관계성을 위한 인간의 노력, 둘째는 인식현상을 초월하고, 셋째는 이 관계성은 주체자의 노력들에 관계없는 증폭되고 고양된 인식으로서 주체자에 의해서 인식되게 된다. 넷째는 역사적인 구조 안에서 존재한다. 다섯째는 세계 안에서의 창의적인 활동 안에 자신을 노출한다. 홈즈는 영성의 주요한 점을 가르치고 있지만, 반면에 “관계성”, “초월하는”, 그리고 “고양되어진 인식”과 같은 용어들에서 구체적이 되지 못한 문제들을 남기고 있다. 영성은 경험, 인식, 그리고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특수한 상황 안에서 설명되어진 인식의 세계를 초월하는 의미와 권능의 차원과 관계를 가지는 특수한 인간의 능력이다. 다시 말해 목회자는 먼저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경험과 인식을 통한 그리스도인의 영적생활을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목회자의 영적 삶은 세상의 소금이요, 빛의 삶이어야 하므로 항상 구별된 생활을 해야 한다. 초기 한국교회는 목회자를 양성할 때 신령한 사람을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신령한 사람이란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란 의미가 있다. 옛날 목회자들은 일반교육도 많이 받지 못하고 신학교육도 1년에 석달씩 2년 공부하고 목회자다 되었으나 인격적으로 존경을 받았고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흠이 없었을 뿐 아니라 신적인 존재로 높임을 받은 것은 신령한 목회자였기 때문이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영성이 중요한 것은 목회자는 영적 공동체를 위한 인도자이기 때문이다. 이 인도자가 하나님의 목회를 성취시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엄격한 주의력과 헌신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기쁨, 황홀함, 성취감 그리고 새로 거듭남을 언제나 체험해가야 한다. 반드시 회중을 인도하는 목회자의 삶은 “영적이어야”한다. 목회자는 개인에게서 뿐만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영적 갈망에 대해 분별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열망에 응답할 능력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영성훈련이 잘되어 있는 목회자는 강력한 복음주의적 중요성을 포함하고 있다. 목회자에게는 무엇보다도 영적인 지도력이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교회는 물리적인 힘으로 이끌 수 있는 모임이 아니며 또한 법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단체도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성별하여 부르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여 감사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인 모임이므로 영적 지도력이 필요하다. 목회자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도록 양육하며, 영광된 교회의 지체로서 교회를 견고히 세우며, 주님의 교회를 성장시키는 제자로 양육하는 일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우선되는 것이 영적 지도력이다.
Ⅲ. 목회자의 영성개발
1. 영성과 목회의 관계
1) 목회자
목회자는 단순한 직업적인 직업인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전능자의 사신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파자이며, 진리의 해석자로서 고귀하고 거룩한 직분의 소유자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분명한 소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목회자를 목회자되게 한다. 에드워드 투루나이젠(Eduard Thurneysen)은 목회를 정의할 때 그것은 “영혼을 돌보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영혼을 보살핌이 바로 목회이고 이 일에 헌신하는 사람이 곧 목회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교역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개개인에게 전달하는 데에 그 본질이 있다”고 하였다.
목회자는 교회에 소속된 모든 성도들을 돌보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그들이 영적인 성숙, 즉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양육하고 돌봐야 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교회에 목회자를 세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목회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며, 그 말씀이 선포되기까지의 모든 대화 형태로 이루어진다. 투루나이젠은 이런 대화의 형태는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며 바로 교역의 본질이라고 하면서 영혼의 유동성을 다른 사람들이 함께 동참할 수 있는 정신생활로 바꾸어 주는 것은 오직 대화 뿐이라고 하였다. 교역의 활동은 하나님이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답변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대화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대화의 상대자 쌍방은 서로 서로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결국 목회란 목사에게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일이고 목회자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의 구속의 역사를 성취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일꾼이다(행 20:24). 목회자는 하나님과 교회에 의하여 부름을 받고 안수를 받아 교회를 대표하여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전을 집례하며 하나님의 계시를 완전한 응답을 하도록 기독교 공동체를 인도하고 양육하기 위하여 구별된 자이다.
2) 목회의 본질
목회의 활동은 하나님이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답변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대화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대화의 상대자 쌍방은 서로 서로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자들이 되는 것임을 우리는 살필 수 있다. 그로 인해 우리는 목회 대화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인간의 말을 통하여 자신의 말씀을 하시며 대화의 쌍방이 자기들 나름에만 집착치 않고 대화를 통하여 하나님과 대면할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답변을 얻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역의 대화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적 영적 현실 속에 뚫고 들어와 완성해주고 결단을 내려주는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교회적인 대화라 할 수 있다. 투루나이젠은 “목회대화는 본질적으로 말씀과 성례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삼는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교역대화도 역시 죄의 용서를 중심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목회대화는 설교와 침례와 성만찬에 관한 유일한 주권적인 내용 즉 하나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의 삶 전체 속에 내려 주시고 이를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통하여 선포하게 하신 은혜로운 심판의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는 목회대화의 내용은 바로 죄의 용서인 것이다.
목회에서 이 과제는 교역자의 지적인 능력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목회자의 훌륭한 지적의 능력이 쓸모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목회가 이일을 감당하는 데는 바로 목회자의 좋은 인격과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 바로 목회자는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회를 바로 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즉 현대인의 삶을 복음 앞에 개방시키고 그것을 그들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영성의 회복이 필요하고 이것이 목회의 중심적 과제이다.
3) 교회의 기능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서 성도들이 교회의 목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교회의 기능은 대단히 중요하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것은 교회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요, 또한 교회의 영성이 약하다는 것이다. 교회는 그 기초를 그리스도에 두고 있으며 따라서 교회의 사명은 예배, 교육, 선교, 교제, 그리고 봉사이다. 이러한 교회의 기능을 수행하는 능력은 곧 교회의 영성의 성숙도를 의미한다.
(1) 예배
영어에서 표현하는 예배(Worship)라는 말의 뜻은 ‘가치를 돌린다’(to ascribe worth)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리는 것’(to ascribe to him supreme worth)이 예배이다. ‘예배’로 번역된 구약성경의 중요한 단어 ‘샤하아(shachah)’는 그 뜻이 ‘굴복하는 것, 자신을 드리는 것’으로서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중심 활동이 된다.
구약시대에 있어서 히브리인들은 절대자인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동물의 희생제사를 통해서 드렸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교회의 예배에서 더이상 동물의 희생제사는 필요 없게 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하여 온전한 예배의 기초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인간의 대표가 되신 그리스도가 전 인류를 대신하여 ‘충분하고 완전하고 흠없는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셨으므로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가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인간들의 목적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폴 훈(Paul. W. Hoon)은 “예배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통하여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며, 섭리자이시며, 구속자이심을 알고, 그 은혜와 사랑에 대하여 감사와 확신으로 응답하는 동시에 화해와 구원의 확증 위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의 생을 위탁하는 행동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교회의 신앙고백이며, 예배는 피조물이 그의 창조주에 대해서 최고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을 그에게 돌리는 것이다.
(2) 교육
둘째로, 교육의 사명(didache)이다. 이 교육은 하나님 중심의 종적인 면과 인간과 인간 사이의 횡적인 과정이 잘 조화를 이루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교육하는 것은 교회의 교인들이 교회의 기능들을 이행하도록 가르치고 훈련하는 것이며, 그들이 충분하게 성숙한 기독교인으로 발전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같은 신앙 인격을 갖추도록 크리스챤은 계속해서 훈련을 받아야 하는 학습자들이다. 교회 교육은 언제나 죄인된 인간을 주님의 훈련과 훈계 안에서 회개시켜 구원받은 인간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영화롭게 된 인간을 양육하는 일이다.
교회는 하나님에 대해서 복음의 충실한 증인이 되며, 그리스도를 뜻깊게 전하며, 인간과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표시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교회의 사역들은 교육을 통하여 시행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교회교육의 관심은 ‘교회가 되기 위한 교육’이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돕기 위한 교육’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교육의 중심은 종교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각각 개인으로 하여금 성령이 인도하시는 공동체에 의뢰하며 충성스럽게 봉사하도록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 생활에 최선을 다하여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는 것이다.
(3) 전도, 선교
교회의 기능 중에 또 다른 축은 전도, 선교의 사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고 인간관계를 돈독히 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의 선포는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시고 구속적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증거를 마련하는 것이다. 교회는 그 선포의 기능에 대해서보다 우선권을 두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부활의 구속적 사역을 통하여 죄로부터 구속을 마련하셨다는 소식을 가지고 불신자들을 만나는 것이 전도이다.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며 제자들과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명령이다. 전도는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영생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것이다. 모든 신자들은 이 복음전도적 사명과 선교적 사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4) 교제
마지막 축은 교제(koinonia)이다. 이는 성도간의 나눔인 봉사와 헌신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신부로 상징되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 상호간에 신령한 교제를 나누며 봉사하는 단체이다.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 확장에 있는데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교회는 예배, 선포, 교육, 그리고 봉사의 기능을 가진다. 교회가 이러한 목적과 기능을 시행하고 실천에 옮기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공동체 의식이다. 성도간의 나눔은 교제와 봉사, 섬김을 통해 실천으로 나타나야 한다. 봉사하는 것은 사랑으로 인간의 필요에 응답하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산실로서, 교회는 세상에서의 하나님 나라 실현의 도구로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봉사는 인간을 위한 사랑에서 생기는 교회의 한 중요한 기능이다. 기독교인은 그의 사랑을 교회를 통해서도 나타내야만 한다. 교회와 성도는 사람들의 필요에 대한 봉사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다른 방법이기도 하다.
4) 목회와 영성과의 관계
넬슬 떼이어는 목회의 중요한 역할을 “사람들로 하여금 이 시대 속에서 성서 속에서 계시되고 교회의 은총과 삶을 통해 표현된 거룩한 하나님의 차원을 향해 개방적으로 그를 체험하고 질서를 세우도록 돕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이것이 기독교의 영성 형성이고, 목회의 과제이다.”라고 정의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영성이 존재할 수 없듯이 교역자가 영성이 죽어있다면 이는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이니 목회가 불가능하게 된다. 목회나 영성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에서 비례되기도 한다. 하늘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 영성의 길을 찾아 나아가는 목회는 영성과 불가분의 관계로 밀착된다고 본다.
2. 목회자의 영성개발의 필요성
교회와 사회, 그리고 성도들을 향해 목회자로서의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목회자는 포괄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학식과 지혜가 필요하다. 목회자는 신학에 관한 전반적인 학문인 성서신학, 조직신학, 기독교교육, 윤리, 교회사, 심리, 경영과 행정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목회자에게 가장 시급하고 가장 급선무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것은 바로 영성이다. 이러한 것이 선행되고 그 이외에 필요한 지식과 지혜는 그 다음이다. 이러한 것들이 적절하게 연합되고 연결될 때 교회성장은 이루어질 것이다. 이는 교회성장을 이룬 한국교회의 현실을 볼 때 더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들은 영성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고 스스로 영성을 회복하고 극대화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영성을 훈련함과 동시에 개발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는 이러한 것들이 선행되었고 충족되었기에 교회성장이 가능했다.
피터 와그너(Peter Wagner)는 성장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서 다섯 가지의 특색을 통해 교회성장을 위해 필수적인 지도자의 영성개발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 첫 번째는 성장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하기 위하여 대가를 치루는 것을 개의치 않고 기쁜 마음으로 일하고 있으며, 마지막 날에 주님의 일군으로서 칭찬 받을 것을 소원하면서 일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어서 저들을 통하여 성취하기를 원하신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일하며 신자들을 제자를 만드는 일에 전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성장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은 통찰력 있는 연구조사를 통하여 교회성장에 대한 합리적인 계획을 세운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성장하는 교회의 목사들은 실용주의를 하나님을 위한 실용주의로 사용하고 있어서 어떠한 전략들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과를 얻지 못한다면 곧 폐기해 버리고 새로운 전략으로 대체할 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능동적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 목사들은 마태복음 16장 18절에 말씀하신 것처럼 그의 교회를 세우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이런 믿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믿음으로 사역하며 기대하는 것이다. 와그너 박사가 말한 것처럼 교회성장을 원한다면 첫 번째 변화는 당연히 담임 목회자의 변화이다.
목회자의 위기는 계획이 없거나 지식의 부족에서 오는 위기감보다는 너무 바쁜 나머지 기도할 시간이 없고 하나님과 만날 시간이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이 없음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죽어가는 한국교회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한국교회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영성의 회복이다. 예수님께서 사도행전 1장에서 아버지의 약속하신 바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목회에서 영성이 가장 근본적인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러므로 목회에서 영성훈련과 개발이 필수적이며 이러한 내용이 잘 적용될 때 진정한 부흥과 교회성장은 당연적으로 따라올 것이다.
목회자에게 영성개발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목회자에게 속해 있는 성도들 때문이다. 컬리는 그의 도서 「영적성장을 위한 교육」에서 ‘방황하는 현대인’을 심각하게 묘사하고 영성개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인간들은 불안한 마음 가운데 평화를 얻고자 하여 무수한 기술들을 개발하였다. 그리고 영성훈련에 대한 안내서가 새롭게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어느 시대보다 현대인은 불안으로부터 도피하고 적개심으로부터 도피하여 마음의 평온을 찾고자한다. 그러므로 성숙한 영성은 불안한 마음의 고향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영성은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점진적으로 성숙되어 가는 것이다. 목회자는 목적을 갖고 교회를 찾는 성도들에게 평안과 함께 그리스도의 영성을 회복하거나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나 목회자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성도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목회자는 영적인 지도자로서 영적인 지도력을 발휘하여 사람을 움직여야 하는데 설득력, 감동력, 동원력, 그리고 자진성의 창조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능력은 인간의 수단이나 방법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으며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더욱 영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3. 목회자의 영성개발의 방법
영성생활의 목표가 그리스도를 본 받고 그리스도와 관계를 가지고 사는 생활이라고 하는 면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동일한 목표이지만 목회자의 영성생활을 주제로 하는 이유는 목회의 형태가 바로 성육신의 형태요. 목회자의 삶이 상징적인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영성의 도구가 되기 때문인 것이다. 여기서 영성생활의 목표인 성화는 인간의 업적은 아니며 분명히 성화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 도구는 의지와 개성을 가진 인간인 것이다. 목회자는 자신의 영성회복과 영성의 성숙을 위해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철저하게 성경적으로 훈련을 계획하고 실천해야 한다.
영성이란 크게 두 가지 뜻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 또 하나는 더 특별히 성령과 관계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사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교역자나 또는 평신도든지 자기와 올바른 영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가며 또 성장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내 마음과 뜻을 다해 내 몸을 다 바쳐 주를 사랑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이웃과의 관계를 포함한다. 이웃과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나온 결과이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이웃을 참으로 사랑할 수 없고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야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으로부터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영성을 가질 수 없다(요 3:5).
내적인 성령의 역사가 있으면 거듭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계속 영적으로 성장하는 가능성이 있다. 영성훈련은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훈련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도록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훈련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된 하나님의 현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 나가는 삶의 과정이 기독교 영성의 핵심이기 때문에 모든 영성훈련은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오게 하도록 하나님과 인간 및 피조물과의 깊은 친교와 연대성을 성취하도록 돕는 전인적인 훈련이다. 영성훈련을 통해 교역자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게 되며 성령의 지도를 받게되며 목회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보여주는 삶을 살며 목회를 승리로 수행해 나갈 것이다.
영적지도력은 하나님에 의해서 수여되는 것이지만, 준비되고 훈련된 자들에게 수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영성개발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영성개발은 시대상황이나 주변 환경, 혹은 개인의 기질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어느 방법이 절대적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변하고 각 개인의 기질이 다르더라도 말씀훈련과 기도훈련에 의한 영성개발은 변할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목회자의 영성훈련의 방법으로여러 가지가 있지만 연구자는 목회자에게 필요한 말씀묵상 훈련, 기도훈련, 그리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생활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 말씀 묵상훈련
묵상훈련은 하나님과 단독자로서 대화를 하는 훈련으로 외부세계나 상황들과 절대 단절하는 고독의 훈련으로써, 가능한 한 하나님과의 만남에 있어 많은 장면들을 연상함으로써 영혼의 어두운 밤 안에서 빛을 제공받는 훈련이다. 성경의 저자들에게는 묵상이 낯선 것이 아니였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창 24:23),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시 63:6),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시 119:148) 등의 말씀들을 보아서 알 수 있다.
기독교의 묵상은 우리를 내면의 온전함으로 이끌어 가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데에 꼭 필요한 상태이다. 그리고 우리를 영적인 인식으로 이끌어 가는데, 그것은 사회의 악을 공격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다. 다시말해서 묵상이란 하나님과의 교제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길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순종을 다짐하는 시간이고 하나님께 응답하고 기도하는 시간이다. 진정한 말씀묵상은 심리학적 테크닉이 아니라 신학적 은혜이자 경험이다. 목회는 다른 직(職)과 달라서 일정한 근무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요 성도를 돌보는데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성도 개개인의 신앙생활은 물론, 목회자의 가정 생활에서부터 사회생활과 사소한 개인문제에 이르기까지 목회자에게는 이 모두가 관심의 대상이요 범위이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성도들의 영적인 생활은 목회자의 가장 큰 관심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목회자는 무엇보다도 영적인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교역자의 입장에서 건전하고 깊은 영적인 생활의 유지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주야로 묵상 (시1편)할 때 가능함으로 깊은 말씀의 묵상은 교역자에게 가장 중요한 일중 하나이다.
그리고 성경말씀에 대한 훈련은 영성을 개발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딤후 3:16-17)라고 말씀한다. 성경을 통해서 ① 우리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하며 우리를 깨우쳐 주며, ② 우리와 함께 계시며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체험되며, ③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에 대한 진정한 훈련이 없을 때, 우리의 영성훈련은 영적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없을 것이다.
현대사회는 복잡한 사회이다. 그리고 목회자들은 여러 가지 일들로 매우 바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이러한 목회자들이 묵상을 통하여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행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의미를 명상을 통해서 내면화하고 그 뜻을 생활로 옮기기 위해서 목회자들의 생활에 묵상이 있어야 한다. 묵상의 시간을 가짐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목회자는 지난날의 자신의 삶을 살펴보면서 자기의 종교적 체험을 점검하여야 한다. 다음으로 현재 기독인으로서 삶 속에 놓여진 목회의 여건들을 어떠한가 생각하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영성생활에 대한 점검을 함으로써 묵상의 시간을 갖는 것이 좋겠다.
2) 기도훈련
명상이 인간의 생각과 언어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을 하나님을 향해 열기 위한 방법이라면, 기도는 인간의 생각과 말을 통하여 하나님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기도는 바로 “믿음의 영혼”이기에 그것을 소홀히 하는 것은 진실한 종교의 붕괴를 의미한다. 기도는 선물인 동시에 명령이다. 즉 그것은 신적인 은총이 부어짐으로 가능하다. 영적인 생활의 기본은 기도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실 것을 요청하고(눅 11:1), 그 요청에 예수가 기꺼이 응하였음과 같이 우리도 기도훈련을 해야한다. 참된 기도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의 생활이다. 기도의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영적 공동체의 지도자인 목회자는 기도를 통해서 집중능력, 개방성, 하나님을 향한 수용성을 배워야 한다. 목회자는 싫든 좋든 매일 읽고 기도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의 삶과 사명을 위해서다. 그 외는 길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매일을 낭비할 뿐이다. 자신의 영혼을 소홀히 하지 말고 자신의 영혼이 성장할 수 있는 시간과 방법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기도는 언어보다 더 큰 능력의 통로이다.
기도시간은 주님을 사랑하는 은밀한 시간이다. 만일 기도하지 아니하면 주님을 은밀히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없게 된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서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우리가 기도를 쉬면 욕심이나 이기심과 절망을 이길 수 없다.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되어 세상에 기울어지며, 하나님과 멀어지고 만다. 어제까지 기도했어도 오늘 기도하지 아니하면 시험에 빠질 수밖에 없으니 항상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지 아니하면 시험에 빠진다. 그러므로 기도는 어느 곳에서든지 드려야 한다. 스테반처럼 죽음의 자리에서도 바울처럼 감옥에서도(행 16:25) 또는 폭풍우 몰아치는 배(행 27:23-35)위에서도 드려져야 한다.
(1) 새벽기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절대 능력자이시지만 새벽기도를 힘쓰셨다(막 1:35). 그리고 옛날 다윗왕도 새벽기도를 많이 했다(시 119:147). 그 뿐만 아니라 종교 개혁자 루터나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와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새벽기도를 힘썼던 분들이었다. 주님은 친히 새벽기도를 창설하신 분으로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다.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는 주님이 새벽기도를 하신 장면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한적한 곳을 찾아가 기도하셨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요, 영적 교제이며, 신앙의 활력소이기 때문에 아무런 표현방법이나 기구나 거리 관계가 전혀 필요없을 뿐더러 다만 장애물이 없는 조용한 곳일수록 적합한 장소라 하겠다. 예수님의 새벽기도는 죄인을 위한 구원운동을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 기독교 역사의 시발은 주님이 몸소 행하신 이와 같은 새벽기도이며, 또 한국 기독교 역사의 시발점도 새벽기도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인적이 끊긴 기척도 없는 고요한 새벽하늘의 새벽별을 보고 대지에 첫발을 디디는 신자의 발걸음은 실로 축복된 삶이 아닐 수 없다.
장자천은 새벽기도의 참된 의의를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새벽기도는 하루의 첫 부분을 주님께 드리는 격이 되므로(출 23:19) 의의가 크고 심령의 무장을 하고 나서게 된다. 고로(엡 6:17-18) 의의가 크다. 새벽은 마음이 잘 집중되는 시간이고(왕상 19:12), 시간상 별 지장을 받지 않는다(행 3:1). 그리고 영육의 생활순서를 바르게 하는 길이 되고(마 6:33) 신체건강에도 도움이 된다(시 39:13).
(2) 철야기도
교회에서는 철야기도회를 대부분 매주 실시하는데, 대게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날을 기념하는 금요일 밤에 실시하고 있다. “왜 훤한 대낮에 기도하지 않고 무엇 때문에 밤에 기도합니까?”하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성장하고 있는 교회마다 철야기도회를 강화시키고 효과적으로 운영하는 교회가 늘어가고 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의당 금요일에는 철야 기도회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기도는 우리 주님의 지상사역에서 매우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였고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기도’와 ‘기도하다’라는 낱말은 4복음서에 간략하게 기록된 주님의 생애에서 적어도 25회나 사용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철야기도는 예수님의 시간과 사역과 정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였음을 볼 수 있다. 누가복음 6장에는 예수님께서 밤중에 기도하시는 모습, 즉 철야기도 하시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는데, 물론 이것이 예수님의 일상적인 습관이었다고 상상할 근거는 없으나, 기도하시기 위해서 자주 온 밤을 새우시며 철야기도 하신 것만큼은 확실하다. 이에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야 할 목회자들은 예수님이 언제 어떤 일이 있을 때 밤을 새며 기도하셨는가를 생각하며 그에 대한 연구와 따름이 있어야 하겠다.
예수님은 공생애의 중대한 문제를 앞두고 철야하며 기도하셨다. 열 두 제자를 택하시기 전에(눅 6:12), 전도여행을 떠나시기 전에(마 10:1),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죽음을 선포하시기 전에(눅 22:39-46), 잡하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며 기도하셨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루신 직후 많은 무리들이 왕으로 세우기를 원했을 때, 그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돌려보낸 후 예수님은 따로 산에 가셔서 기도하셨다. 특별히 바쁘실 때마다 철야하며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소문이 더욱 퍼져서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왔을 때, 예수님은 오히려 물러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고 기록되었다. 또 식사하실 겨를도 없이 바쁘고, 필요한 휴식이나 수면을 취할 시간도 없이 바쁘실 때마다 예수님은 기도의 시간을 더 많이 가지셨음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온 밤을 완성하는 능력을 얻는 비결을 얻어 내셨던 것이다.
(3) 산상기도
기독교는 사회속에 존재하며 사회성을 지닌 종교이다. 그러나 때때로 사회속에서 식어지고 떨어진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서 세속사회를 떠나 깊은 산속으로 찾아가 기도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사회에 얽매인 모든 일을 잠시 잊고 조용한 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집중적인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점이 대단히 효과적이다. 예수님도 산에 오르셔서 기도하기를 즐겨하셨고, 변화산의 기도는 예수님의 존재의 역사를 알게 한 기회가 되었다(마 17:1-5; 막 9:2-8). 그러나 산상기도는 은혜도 많은 반면 시험과 유혹도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4) 금식기도
금식기도는 식음을 전폐하며 드리는 기도이다. 큰 문제와 심각한 사태가 발생하였을 때 결사적으로 매달려 하는 기도를 말한다. 금식기도는 교회에 따라 실시 여부에 논란이 많지만, 큰 일을 당했을 때 가장 효과적인 기도로서 드려진다. 성경에 나타난 금식은 영적인 목적을 위해 음식을 단절하는 행위이다. 중세에는 금식이 지나친 고행이라는 나쁜 평판이 있었다. 그 이유는 내면적 본질적 추구가 시들고 겉 형식만 강조되어 영혼의 힘이 제외되고 형식만 나타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통해 많은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 금식을 하였다. 금식은 영적 교제를 더 깊이 갖도록 한다(시 69:10).
모든 훈련이 그러하듯 금식을 위해서도 준비가 있어야 한다. 먼저 기도로 준비해야 한다. 금식은 다른 곳에서 얻을 수 없는 영적인 도약을 가져다 준다. 금식기도의 주의점으로는 타인에게 보이려고 하지말고 목적 없는 금식을 하지 말아야 한다. 금식은 음식뿐 아니라 마음도 금해야 한다. 실제로 금식을 통해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나며 삶의 균형을 유지하며 어려울 때의 도움, 잘못된 것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일을 찾고, 순수한 참회, 죄에 대한 승리, 하늘의 지혜, 중보기도의 응답, 성령의 능력 등을 얻을 수 있다.
금식기도가 효과적으로 드려졌을 때 개인적으로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큰 효력을 입었음을 성경에 잘 나타나 있다. 요나서에는 니느웨 백성들이 금식 기도로 국가적 위기를 모면한 기록이 있으며(욘 3:5-10), 느헤미야서에는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식 기도로 신앙을 회복한 기록도 있다(느 9:1-3), 에스더서에는 에스더와 유다 백성들이 금식기도로 민족 멸망의 위기에서 구출된 역사도 있다(에 4:15). 교회에서 금식 기도는 대부분 고난 주간 외에는 불규칙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지 아니하시는 습관을 가지고 있거나 죄악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이 원치 아니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면 금식훈련을 해야 한다. 모든 인간에게는 이처럼 죄의 속박이 있기 때문에 신실한 신앙인들은 모두 금식의 사람들이었으며, 금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해방을 체험하였다.
3) 묵상훈련
묵상(meditation)이라는 말은 라틴어 ‘메디타리’(meditari)에서 왔는데 무엇에 대해 ‘생각한다’, 또는 ‘곰곰히 생각한다’라는 뜻이다. 성경적인 묵상은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비우고 하나님과 그 진리의 말씀을 가득 채우게 하는 시도이다. 하나님과의 묵상기도가 있는 곳에 책임감이 생기고, 성령으로 채워진 사람의 행위가 있는 곳에 변화를 일으키는 역사가 계속된다. 묵상기도는 성경에 계시된 영적실제와 진리를 내면적 사고에 잠기게 하고 이를 적용하게 하는 기도로 이끌게 한다. 그러므로 묵상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거나, 읽거나 암송하는 그 이상의 활동영역이 있다.
묵상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장소, 시간과 자세 등이 잘 준비되어야 한다. 첫째, 묵상에 앞서서 긴장을 푸는 과정을 가지는게 좋다. 이렇게 긴장을 풀어서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게된다. 둘째, 묵상할 때 몸의 자세가 매우 중요하다. 꿇어 앉든, 그냥 서 있든지 어떠한 자세로 묵상을 하든 간에 관계없으나 너무 고통스러운 자세로 묵상을 하거나 너무 편안한 자세로 하는 극단적인 자세를 가급적 피하라. 셋째, 일정한 시간을 정식 묵상시간으로 정하는 것이 좋다. 넷째, 묵상의 장소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한 곳을 정하는 것이 좋다. 다섯째, 묵상을 하는 자료는 좋은 교재를 선택하여 일관되게 하는 것이 좋다.
4) 목회자의 하나님 경외생활
언제 어디서나 경우에 합당한 하나님의 꿀같은 말씀이 교역자의 입에서 거침없이 흘러나와야 한다. 책망할 자에게는 책망의 말씀이, 위로 받을 자에게는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이, 용기가 필요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권면의 말씀이 목회자에게서 나와야 한다. 목회자의 입에서는 세상적인 것, 부정적인 말, 절망의 말이 아니라, 긍적적이고, 소망적이고 일으켜 세우는 격려와 사랑과 축복의 말씀이 흘러나와야 한다. 세상의 화제로 충만한 교역자는 영을 죽이는 것이다. “저가 저주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 아니 하더니 복이 저를 멀리 떠났으며...”(시 109:17) 라는 말이 응할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만하면 영혼을 깨우고 살리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교역자의 입에서 넘치기 위해서는 성경을 더욱 열심히 읽고 묵상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적으로 복음을 위한 순례자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5) 봉사 및 순종과 섬김의 훈련
기독교 영성을 외부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방법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께 대한 복종과 인간에 대한 섬김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기독교인의 삶의 특징이 ‘자기 중심’에서 떠나 ‘주님 중심’, ‘타인 중심’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교회는 회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우선적으로 존재하는 유일한 단체이다. 이러한 점에서 교회는 개인의 영성화보다 더 넓은 전략을 생각한다. 공동체를 향한 봉사의 생활을 통해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신 애뜻한 사랑과 고통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또한 기독교 영성 훈련에 있어 봉사는 맺어진 열매에 대한 감사를 가지므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순종의 길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마 8:34)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신다(마 8:34). 여기서 자기 부정이란 자아를 잃어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남들에게 양보하는 자유를 뜻한다.
우리가 순종해야 할 대상은 첫째, 하나님을 향한 것이다. 둘째 성경에 대한 것이다. 셋째, 가족을 향한 것이다. 넷째, 이웃 사람들 그리고 살다보면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향한 것이다. 다섯쨰, 믿음의 공동체 즉 그리스도의 몸을 향한 것이다. 여섯째, 파멸한 자, 멸시받는 자를 향한 것이다. 일곱째, 세계를 향한 것이다.
섬김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섬김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섬김에는 봉사가 필요하다. 섬김만큼 육신의 무절제한 욕망을 훈련하는 것은 없으며, 숨어서 봉사하는 것만큼 육신의 욕망을 변화시키는 것도 없다. 섬김의 삶을 살기 위해서 숨은 봉사가 있어야 한다. 봉사에 있어 큰 봉사만을 생각하지 말고 적은 일이라도 적극적인 자세로 하도록 성도들을 이끌어야 한다. 봉사는 받는 것도,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이웃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사랑이며 봉사이다. 그러기에 참된 섬김을 실천하려면 자기중심적인 섬김과 분명히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자기중심적인 섬김은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것이며 큰 사업과 그 결과를 생각하며, 외적인 보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기분에 좌우되어 결국은 공동사회를 파괴한다. 그러나 참된 섬김은 마음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음으로서 나오는 것이다. 섬김을 배우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알고 자신을 낮추어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겸손이 우리의 삶 속에 침투하려면 섬김의 생활화를 해야 한다.
Ⅳ. 베드로의 영성개발
1. 베드로의 영성개발의 방법
베드로는 벳세다에서 자라났다. 그의 직업이 어부인 것으로 보아 그의 선친도 어부였을 것이다. 그는 성장한 사람이 되어 가버나움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형제 안드레와 짝이 되어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와 함께 어업에 종사하였다. 베드로의 직업이 어부인지라 그의 이미지는 건장한 몸에 굵은 손과 팔씨름꾼 같이 뚜벅뚜벅 걷는 모습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성격은 마음이 여리고 순진하며 성격이 급한 사람이었다. 주의 부름을 받았을 때 망설이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마 4:14-20).
그는 회당교육 이상을 받지 못했다. 아니면 그 이하일수도 있다. 토라는 회당에서 구전으로 알았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공회원 조차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이 여겨”(행 4:13)라는 공개적 반응이 나온다. 그는 어부로서의 지혜는 있었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수 있는 그런 위인은 못되었다.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을 때 그는 기혼자였고 형제 안드레와 공유하는 집에서 장모를 모시고 있었다(막 1:29-30). 베드로는 주님이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그리고 주님은 베드로에게 게바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다. 성급한 베드로가 때로는 비겁하기도 했던 베드로는 성난 거센 파도에 끄덕하지 않고 태연히 고난과 대결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출발시킨 것이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자신의 능력부터 보여 주셨다. 그때부터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외친 것은 그 자신이 주님을 인해 자신의 위치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베드로는 언제나 주님을 가까이 따라 다녔다. 회당장 딸이 죽었다 살아 났을 때도 그랬고 변화산에서 주님과 함께 엘리야와 모세를 만났으며 겟세마네 동산에도 주님을 따라갔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기도 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서 주께서는 사랑을 확인하시고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5-18)고 말씀하시므로 주의 종으로 부르심에 대한 사명을 부여하신다.
주님은 베드로를 특별히 아끼셨지만 베드로는 약한 인간이요 성미 급한 야생마일 뿐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를 붙들어 여러 가지 훈련을 시켜서 순종하고 헌신하는 주님의 제자로 만들어 놓으신다. 예수님은 어디나 베드로를 데리고 다니셨고, 베드로 또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이적을 많이 보며 따라 다녔다. 어쩌면 베드로의 믿음은 다른 곳에서 학문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시청각교육과 삶의 자리에서 실천적 삶의 교육을 보고 익히고 배웠기 때문에 그의 믿음은 급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그의 스승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배우고 그의 실천적인 삶을 따라 배웠다. 그 중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은 사람이었다. 사도행전 1장 4절과 5절을 보면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많은 성도들과 다락방에 모였다. 곧, 베드로와 많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리스도의 명령을 좇은 것이다.
베드로와 다락방에 모인 성도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행 1:14).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기도다. 그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함께 마음을 같이 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다. 베드로와 성도들은 다락방에서 전혀 기도에 힘썼다.
또한 베드로는 유다의 뒤를 이어 사도로서의 직분을 감당할 사람을 찾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뜻대로 사람을 선출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간구하며 지도자를 선출했다(1:15-26). 그들은 사도를 아무나 뽑은 것이 아니라 추천을 받고 그 중에 기도함으로 제비를 뽑아 결국 유다대신 맛디아를 사도로 선출할 수 있었다. 이는 새로이 선출되는 사도가 자신들과 같이 사도로서의 직무를 다른 사람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 받게 되었음을 공포하는 데 있다.
베드로가 선교를 하는데 있어서 그 자신의 길만을 가거나 그 자신의 일만을 하려고 했던 고립적인 인물이 아니라, 단단히 결속된 동역의 필요성과 가치를 인식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예수 재림이후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가 일어나자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는 제자들 중에 수장 격인 자로서 독선적인 지도자가 아니라, 모든 다른 사도들과 동역하는 좋은 본을 보이고 있다(행 2:14, 32). 사도행전 3장에서 사도요한과 함께 동역하여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그로 인한 고통을 받게 되는데 여기서도 베드로는 혼자가 아닌 동역을 통한 선교를 하고 있다(행 3:1이후). 10장에선 고넬료와 그 가정에 성령을 부어 주심을 인하여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신앙고백이 있은 후에 베드로는 침례를 베푸는데, 이때 자신이 직접 침례를 베푼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동역자 들에게 침례를 대신 베풀도록 했다(행 10:44-48). 이때 자신의 동역자 들에게 침례를 베풀도록 한 것은 ‘베드로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다’는 말을 막기 위함일 것이다. 이때의 동역자는 베드로 선교에 있어서 소중한 힘이 된 것이 사실이다. 사도행전 외에도 베드로의 동역자를 만나 볼 수 있는 곳은 베드로전서다. 베드로전서 5장을 끝맺으면서 베드로는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벧전 5:12)라고 표현하며 한 동역자를 소개한다. 실루아노는 아마도 베드로전서를 대서해준 것 같다. 동시에 “내 아들 마가(벧전 5:13)라고 하며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소개한 것과 유사한 표현을 통해 또 다른 동역자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는 늘 함께 동역하고, 팀사역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다락방에 모인 성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성령을 기다렸으며, 날마다 모여 영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들은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면서, 모여서 말씀을 연구하고 전혀 기도에 힘쓰며 서로 사랑을 나누고 구제에 힘썼으며 서로 애찬을 나누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초대교회는 영성의 훈련과 생활이 조화되었다. 기도와 성서연구, 그리고 사랑의 모임이었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말씀공부 (행 2:42, 3:12, 고전 11:23, 고전 15:11)
2) 합심기도 (행 1:14, 2:4, 3:1-4)
3) 교 제 (행 2:42, 46, 3:11, 4:32)
4) 청빈, 구제, 봉사 (행 2;44-45, 4:32-37, 6:1-6)
5) 금 식 (행 13:2-3, 14:23)
6) 복음전도 (행 1:8, 2:4, 3:11, 4:31)
7) 섬 김 (고후 4:5)
8) 병자들을 위한 봉사 (행 3:1-9, 5:12-16, 19:11-12)
9) 협력사역 (행 2:14, 32, 행 3:1이후, 행 10:44-48)
2. 베드로의 영성개발의 축복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 충만케 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몇가지 축복을 말해 보자.
첫째, 성화의 삶이다. 성령은 우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분이며 성화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가 우리의 심령 속에서 탁월한 위치를 차지할 때에 주님의 영이 거하시는 곳에 자유가 있으므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는 것이다.
둘째,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 성령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그의 매일의 생활에서 사랑과 기쁨, 화평과 절제 등을 통해서 성령의 지배를 보여준다. 이것은 또한 근본적으로 타고난 좋은 성품이나 좋은 기질의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생활을 지배하시는 초인간적인 성령충만의 열매들로써 성품과 생활에서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풍성히 맺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셋째, 관계의 변화이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변화한다. 성령충만은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와 찬송을 드림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뀌게 한다. 그리고 성령충만한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 복종해야 하며,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사랑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엡5:22-28). 또한 엡 6:1-4의 부모와 자녀의 관계이며, 마지막으로 엡 6:5-9의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변화가 나타난다.
넷째, 전도이다. 성령충만의 결과는 다른 방면에도 많이 나타나겠으나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향해서 불타는 심정을 갖게 한다.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 불쌍함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영혼의 곤고함과 그들의 영혼들의 불쌍함을 해결하기 위하여 어떤 고통과 고난과 어려움도 감수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다섯째, 은사의 체험이다. 행 2:38에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한 것은 성령충만과 성령의 은사주심을 의미한다. 은사주심은 성령님의 주관적 역사이나 성령으로 충만할 때 특별한 은사를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은 설교의 축복이었다. 다시말해 베드로의 영성회복은 곧 말씀을 선포하는 능력을 부여해 주셨다. 그의 설교는 능력과 확신에 가득차 있었으므로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관련되었던 예수님 생전의 대적들이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라고 물었던 것이다.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그의 말씀이 영감을 받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여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나가리라”. 베드로가 마술사 시몬에게 한 다음과 같은 말도 같은 경우이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돈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행 8:20-23).
베드로는 자신의 뜻으로는 결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을 것이나, 성령께서 그를 택하시어 처음으로 그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셨다(행 15:7).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이 성령의 강력한 인도였음을 위에서 기록했지만, 사실 베드로가 환상을 세 번씩이나 보고 나서야 순종을 했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을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말고 함께 가라 하셨다”라고 철저히 자신의 복음전파를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행 11:12). “성령이 충만하여”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한 베드로는 분명 성령의 사람이요, 성령의 도구인 것이다. 이러한 결과 3,000명이라는 많은 숫자가 침례를 받고 제자가 되었다(2:41).
3. 베드로의 영성개발의 도구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되는 생생한 현장인 동시에 교회의 역사이며, 교회성장의 표본을 제시하는 교회행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교회를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고백하는 신자들의 모임’이라고 정의해 본다면, 사도행전에 나타난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 외에도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한 무리들도 동일한 범주 내에서 교회성장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음과 같은 본문들은 말씀사역에 의한 교회성장의 중요한 실례로 들 수 있다.
첫째,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의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니라”(행 2:42-47)
둘째,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 구원받은 사람이 날로 증가됨(행 4:4).
셋째,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5,000이나 되었더라(행 6:7).
넷째,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 하니라(행 10:34-48).
다섯째, 베드로의 말씀에 고넬료의 가정과 이방인까지 성령의 은혜를 받고 부흥됨(행 11:19-26). 특히 베드로는 그가 오순절 마가다락방의 체험을 통해 성령충만해졌고, 담대하게 사람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침례를 받고 많은 사람들이 제자로 헌신했다.
교회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성장한다. 복음의 씨가 싹이 트고 자라나게 하실 이가 하나님뿐이듯 교회를 성장케하시는 분은 오직 성령님이시다. 하나님은 교회를 위해 당신의 뜻으로 일할 사역자를 부르시어 성령으로 기름부어 세우신다. 교회의 존속과 사역자의 활동 속에 공통적으로 필요한 요소는 성령의 역사이다. 그러기에 진정한 교회성장을 추구하는 교역자라면 먼저 목회자에게 영성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는 양들을 돌보고 지도자를 양성하는 목사로써 맡은바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훈련을 지속해야 할 것이다. 베드로에게 이러한 부분이 선행되었기에 설교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는 베드로에게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기도와 말씀, 그리고 선포(설교)의 세 관점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1) 기도를 통한 영성개발
성경은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말하고 있다(삼상 12:23). 기도하는 시간은 주님과 만남의 시간이며, 의지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회개하고 자신의 삶의 원리를 확정하면 그는 기도해야 한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기 전에 모든 사도들과 제자들은 마가다락방에 모였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성령이 강림함을 믿고 전혀 기도에 힘썼다(행 1:14). 그들은 다른 것보다 가장 많이 한 훈련이 바로 기도훈련일 것이다. 그러기에 가룟 유다를 대신해 다른 사도를 선택할 때도 기도로 선출했던 것이다(1:16-26).
기도훈련은 영성훈련의 가장 핵심이자 출발이다. 기도는 우리 안에 새 삶을 창조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사용하는 간선도로이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며, 하나님께서 바라는 것을 함께 바라게 하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게 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눈으로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을 보게 하며,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마가다락방의 기도는 영성개발과 훈련을 위한 좋은 기회였고, 이를 통해 초대교회는 성장한 것이다. 다시 말해 교회가 성장을 추구하고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기도훈련과 기도생활을 통해 준비되어야 한다. 그것도 기간이 되었다고 끝나는 기도가 아닌 수지말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살전 5:17). 그러기 위해 먼저 시간을 정하라. 고정된 시간을 정해 고정적으로 기도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두 번째는 장소를 정하는 것이다. 베드로와 그 외 다른 제자들은 마가다락방에 모였다. 그리고 그 곳에서 전혀 기도에 힘쓴 것이다. 이처럼 한 장소를 선택하되 때에 따라서는 다른 곳에서도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기도수첩을 만들어 자신이 기도한 것과 기도응답을 받은 것을 기록하라. 그러면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2) 말씀을 통한 영성개발
목회자 지도력 개발의 가장 강력한 도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딤후 3:16-17). 성서 말씀은 모든 지도력의 교과서이며, 척도이다. 원리와 방법이며, 평가 기준이다. 아무리 좋은 원리이며, 방법일지라도 인본주의적인 것은 목회에 사용할 수 없다. 목회는 하나님의 위임사역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하고, 도와주시지 않으면 끝나는 것이 목회다. 진정한 지도자는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도록 일과 기회를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능력이어서, 세상 사람들도 말씀의 원리를 적용하면 성공할 수밖에 없다. 군대 조직이나 기독교 선진국의 정치와 경제의 지도력을 보면 성서적인 것이 많다.
성령은 성서의 기록된 말씀을 살아있는 말씀이 되게 하신다. 말씀 안에는 우 리 인생에 필요한 모든 교훈과 바른 진리가 가득하다. 말씀은 믿어야 할 사실과 누려야 할 약속을 분명히 제시한다. 복종해야 할 명령과 주의해야 할 경고를 교훈한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가르쳐 알게 한다. 목회자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육체와 모든 관심이 말씀에 의해 조절 받아야 한다. 자신의 모든 이론을 파악하고 이성과 감성과 지성이 말씀에 사로잡혀야 한다(고후 10:5). 지도자가 자원하여 하나님의 사상으로 잘 정립되어 있을 때 지도력의 실질적인 기술은 빛을 발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전인 우리 영혼에 가득 채워서 우리 자신이 언약궤가 되어야 한다. 오직 말씀의 지식과 지혜만 의존할 때 말씀대로 역사가 일어난다. 따라서 말씀에 바로 서 있고 바른 성경신학 훈련이 되어 언약적 지식이 풍부할 때 능력 있는 지도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통찰력과 지혜가 있는 지도자는 언약적 지식을 사모하며 모든 사람이 자기의 스승임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배운다. 배우기를 포기하고 단념한 사람은 아무리 위대한 스승과 사상을 만나도 변화와 성장의 역사를 체험할 수 없다. 이 방법은 일반적인 특성에서 육체적인 결점을 보완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말씀은 우리의 안내자요, 길이다. 이러한 말씀훈련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말씀을 통하여 정보를 발견하고 지식을 습득하며, 진리를 깨달으려고 하는 지식훈련이 있고, 다른 하나는 말씀훈련을 통하여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 속에 넘치게 하여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키는데 중점을 둔 생명훈련의 방법이다. 전자의 훈련은 ‘나’가 중심이 되는 방법이며, 후자는 성경이 주체가 되어 나의 삶을 깨뜨리고 변화시켜 하나님 앞으로 인도되게 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말씀훈련을 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는 성경통독훈련과 성경공부훈련, 말씀묵상훈련 등이 있다. 이러한 말씀훈련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거나 성경공부를 하라.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처럼 말씀 앞에 서서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말씀을 읽어여 한다. 동시에 한 구절, 한 구절, 한 사건, 한 사건을 읽어 가는 동안에 끊임없이 기도하며 말씀의 공부하거나 읽는다면 말씀의 깊이에 빠져 들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말씀을 통하여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라. 우리가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거나 공부할 때에 성령께서는 우리와 성경 사이에 서서 역사하신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읽을 때에 진리의 성령은 우리 앞에서 그 성경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그 말씀을 가르치시며, 변화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그리고 비전과 도전을 주신다. 셋째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라. 영의 양식인 말씀을 읽어가거나 공부를 하는 동안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과 말씀을 묵상하며 깨달은 내용이 있다면 적어 두는 습관을 가지라. 우리의 기억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넷째로, 기도로 훈련을 마무리하라. 말씀과 기도가 분리되어 있으면 물그릇과 물이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어느 하나도 온전한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비유하고 기도는 영혼의 호흡으로 비유하는데 기도가 없는 말씀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다섯째로, 읽고, 배운 말씀을 삶에 적용하라. 알고만 있는 말씀은 오히려 우리의 죄를 더욱 가중시키는 도구밖에 되지 않는다. 행하는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이다. 실천하는 믿음, 행하는 믿음이 되기 위해 배운, 느낀 바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도록 노력하라.
3) 설교(전도)를 통한 영성개발
아마도 사도행전에 나타난 가장 분명하고 가장 확실한 특징 중의 하나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당시 30년 동안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복음전도의 불길”을 당겼다는 사실일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부흥이 전도의 영역을 초월한 그 어떤 것이라고 지적한다. 물론 전도가 곧 부흥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신앙부흥은 우리가 보통 경험하는 복음 전도와 확연히 구별되며, 신앙부흥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임재 현상은 그 깊이와 폭에서 복음 전도와 구별된다. 신앙부흥의 절대 불가결한 구성요소안 복음전도의 능력을 기대하는 우리의 소망은 사실 사도행전의 문을 여는 성령의 한 가지 약속에 근거를 둔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베드로와 제자들이 성령강림 사건이 있은 직후 많은 무리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 많은 무리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회심사건이 벌어진다(행 2:14-41).
4) 지도력을 통한 영성개발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는 모두가 영성의 대가였다. 남을 지도하기 전 하나님께 지도받기 위해 겸손히 무릎을 꿇는 사람들이었다. 모든 지도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따라서 하나님과 바른 영적 관계가 우선 되어야 한다. 타인의 영혼을 돌보기 전에 자기 영혼을 돌아보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비전을 가지고 세상과 사람의 필요를 보아야 한다. 지도자의 영성적 삶은 모든 사람을 따르게 하는 힘이다. 자신의 영혼이 먼저 구원받고 성령의 능력에 의해 사회와 이웃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벧전4:11). 기독교의 지도력은 개인의 영혼 구원이 먼저요, 그리고 사회구원이다. 이것은 우선 순위의 문제이며 성숙한 기독교인은 모두 중요하게 여긴다. 베드로의 영성은 곧 초대교회의 성장을 의미했다. 그의 설교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침례를 받은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러기에 목회자는 먼저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이어야 한다.
두 번째는 영적 권세를 소유하도록 노력한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 그는 이러한 기도를 통해 성령이 임하고 그 이후에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영성이 탁월한 지도자는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권위가 있을 때 강력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 부드럽고 평범한 말이지만 저항할 수 없는 힘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세우심을 믿고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한다. 영적 권세로 계속 인도받기 위해서는 영적 민감성을 길러야 한다. 영적 권세는 하나님의 주권적 허락이지만 보존과 강화는 지도자의 책임이다. 그러기 위해 수많은 눈물의 기도 속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끊임없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하나님께 복종하는 훈련을 통해 하나님께 전적으로 사로 잡혀 있어야 한다. 훌러 신학교의 클링턴 교수는 지도자가 하나님과 초자연적 접촉을 갖는 것을 지도력 개발 과정에서 “말씀 통과 학문”이라 불렀다.
세 번째는 하나님과 하나 된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베드로는 성령의 충만을 받고 예수의 복음을 증거했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가장 높은 수준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성령의 음성과 움직임에 민감하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는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삶에 적용하도록 훈련시키는 자이다. 하나님과 하나 될 때 하나님의 의도를 잘 파악하고 그것이 자신의 바램과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말씀으로 연합되어야 하고 성경 말씀에 통달해야 한다. 그의 비전과 성취방법이나 지도력의 원리 등, 지도자에게 필요한 모든 자료는 언제나 성경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찬송생활을 통해 늘 기쁨이 충만하고 능력과 열정이 넘쳐야 한다. 기도에 의해 하나님께 사로잡혀 있어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과 하나되며, 하나님의 지도력과 능력을 받고 그것을 유지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네 번째는 봉사 및 순종으로서의 섬김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이나 기존 성도들 간에 격이 없이 서로 교제하고, 섬기고 나누는 공동체교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라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 그리고 서로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기도 하고 도움을 받기도 한다(2:44-45). 영성의 회복은 곧, 섬김과 봉사적 실천에서 나타난다.
다섯 번째는 성전중심적인 삶이다. 현대인들은 신앙생활을 편하게 하고 있다. 교회가 멀어도 상관없다. 그만큼 교회에 가지 않아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고, 오히려 한번을 나가도 먼 곳부터 왔다고 극진하게 대접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모든 성도들이 교회 중심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 사도행전에서 나타난 교회가 서로 교제하기 위해서, 또는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기 위해서는 대부분 성전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여섯 번째는 지도자는 은사 개발에 앞장서야 한다.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효과적으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은사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일을 해야 한다. 은사 없이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다. 하나님은 각 사람을 세우고 감당할 힘과 능력을 주신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라고 할 때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은 계급 표시가 아니라, 봉사를 위한 직능을 표시하며, 서로 상호 보완적인 유기적 관계를 갖게 된다. 성령의 은사는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견고하고 영광스럽게 세우기 위함이다. 또한 자신의 신앙성장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러나 은사 자체로는 완전에 이르지 못하기에 늘 말씀의 권위 아래 있어 말씀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 성령의 온전한 열매를 사모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인격에 이르도록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목회자는 하나님이 세우시고, 리더십의 은사를 주셨지만 스스로 개발하지 않으면 도태된다. 은사는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는 수단이며, 도구이다. 하나님이 주신 도구로 일해야만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위대한 리더십은 스스로 자기 개발에 의해 만들어져 교회를 성장시킨다.
교회성장을 가능케 하는 가장 큰 힘은 성령의 역사하심이다. 교회는 성령의 능력을 체험한 강력한 지도자들에 의해 성장되어 왔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영성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한 성령의 능력이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이다. 예수님의 목회의 중심은 “무리를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다. 예수님은 고난 당하는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의 상처를 보시고 공감을 했다. 그리고 그들을 돌보아 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예수님의 목회는 사랑으로 충만했다. 즉 예수님의 삶이 영성생활과 목회라는 두 가지의 차원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의 모습 또한 무리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충만함을 받은 사람들이 각종 방언으로 기도를 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그들을 향해 조롱하고 술취했다고 비아냥 거렸다(2:5-13). 이 모습을 보던 베드로는 사도들과 그들 앞에 서서 자신들의 모습에 대한 설명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 그리고 이 말을 다 들은 3,000명의 사람들이 회개하고 성령을 체험 한 후, 침례를 받고 제자가 되었다. 교회는 불신자들을 향해 이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영혼구령의 주님의 심정이고 하나님의 사랑이다.
Ⅵ. 결론
성경은 특별히 인간의 영성에 관해서 그 의미를 강조한다. 그것은 사람의 생명이 단순한 물질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피조되었고,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이 가능하도록 지음받은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성이라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적 개념이며, 그것이 대인관계가 될 경우에는 먼저 동등한 사람이라는 삶의 터전이 된다. 그러기에 영성훈련을 받는다는 의미를 하나님과 다른 사람, 그리고 세계와의 정상적인 관계를 맺게 하는 실천적 학문이다. 이것은 그의 세계를 과다한 경쟁보다는 협력관계로 만들고 단순히 형식적인 무력한 신앙에서 성숙한 신앙을 지닌 그리스도인으로 변화해 가도록 하는 영성훈련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연구자는 영성이 교회성장에 많은 영역을 차지한다고 생각해 본 연구를 시작하였다.
먼저 2장에서는 영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리는 영성에 있어서 그 구심점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집약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체험 그리고 제자들의 부활체험과 초대교회의 성령강림 사건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목회자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도록 양육하며, 영광된 교회의 지체로서 교회를 견고히 세우며, 주님의 교회를 성장시키는 제자로 양육하는 일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우선되는 것이 영성임을 알 수 있었다.
3장에서는 영성과 목회의 관계성을 살펴보았고, 그 이후에 영성개발의 필요성과 영성의 회복과 성숙을 위한 방법들을 제시하였다. 특히 영성은 목회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며, 갖추어야 하는 교회성장을 위한 도구이다. 그러기 위해 목회자는 말씀과 기도, 하나님 경외생활, 봉사 및 순종과 섬김의 생활을 배우고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4장에서는 베드로의 영성개발 방법과 그에 따른 축복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5장과 연결해 베드로의 영성개발을 통한 교회성장 방안들을 몇 가지 제시하였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는 모두가 영성의 대가였다. 남을 지도하기 전 하나님께 지도받기 위해 겸손히 무릎을 꿇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과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큰 일을 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베드로를 연구하면서 베드로의 전환점에 주시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성질 급하고 덤벙대며 겁 많은 베드로였으나 오순절 성령의 체험이후로 베드로는 변하였다. 겁 많던 베드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담대한 베드로로 변했고, 성미가 급하며 덩벙대던 베드로는 영성의 성숙을 통해 통찰력 있고 판단력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다. 또한 학문이 없는 베드로는 아주 유식한 자로 변해 있었다. 어디서 이런 은혜가 있어진 것일까? 바로 성령의 은혜인 것이다. 그가 오순절 성령강림을 체험하면서 성령의 사람이 되었고 하루에 3,000명, 5,000명을 구원시키는 능력의 사도가 되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한 명의 지도자가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게됨으로 인해 교회공동체가 영적인 공동체로 변화되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홈즈는 목회에 대한 영성적 접근을 위해 세 권고를 하고 있다. 목회자는 자신의 영성을 성찰하고 훈련하는 한편 교인들을 바로 지도하는 영적 책임을 가지고 있다. 이 점에서 목회자의 영성은 평신도와 도구적으로 다르다고 강조한다. 전통적으로 수도자의 길을 걷거나 성직자가 완덕을 향해 스스로 택한 길은 복음적 세 권고(three evangelical counsels)를 따르는 것이다. 즉 순종, 가난, 순결의 생활을 말하는데 이를 복음 3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먼저 순종은 내면적 지향에 주의 깊게 경청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카톨릭의 위계질서에 대한 순종과 대조되는 것이다. 다음에 가난은 궁핍과는 다른 의미로 설명하는 데 이는 상징으로서의 가난인 청빈을 말한다. 이것은 주고 받는 것과 관계된 것으로 하나님을 향한 개방과 비움을 통해 채움 받으며, 이것으로 회중을 섬기는 것이다. 순결에 대해서는 그의 영성 개념과 부합하여 성(sex)은 영성과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고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본래의 에너지이며, 그 이면에는 더 위대한 현존에게 소유되고자 하는 염원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복음적 세 권고는 목회에 대한 영성적 접근 중에 목회자의 도구적 영성 가운데 한 부분이 될 것이다.
교회는 성장해야 한다. 그리고 목회자는 목회적 돌봄을 위해 성숙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 영성회복이며, 영성함양이다. 특히 급성장하던 한국교회가 성장을 멈춰버린 현 상황에서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부분이 한국교회의 영성회복이고, 한국 사회의 영성회복이며, 한국 교회 목회자들의 영성회복일 것이다. 에스라 10장 1절을 보면 하나님의 종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 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며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였다. 영적 지도자가 민족의 죄를 끌어안고 회개하며 부르짖을 때 주님의 심정과 영혼구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하고, 이 때에 하나님은 모든 육체에 기름부으시고 자녀들은 장래 일을 말하고 늙은이는 꿈을 꾸며, 젊은이는 환상과 이상을 보게 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맛보게 될 것이며 전 세계의 모든 교회가 부흥하는 성령의 바람이 불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먼저 영적 지도자들이 마음을 찢고 철저히 회개할 때 한국교회는 부흥의 전성기를 다시 맛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성을 상실해 가는 그런 사회에서, 문명의 발달과 기계의 발달로 인한 인간성 상실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의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영성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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