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사 학 위 논 문
중세 기독교 신비주의 영성
1999年 12月 22日
침례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신 학 전 공
이 덕 기
피 영 민 지도교수
석 사 학 위 논 문
중세 기독교 신비주의 영성
이 논문을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함
1999年 12月 22日
침례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신 학 전 공
이 덕 기
이덕기의 석사학위 논문을 인준함
1999년 12월 22일
심 사 위 원 장 피 영 민 인
심 사 위 원 허 긴 인
심 사 위 원 김 승 진 인
목 차
서 론 1
1. 연구 목적 1
2. 연구 방법 2
Ⅰ. 기독교 신비주의의 기원 4
1. 신비주의 정의와 이해 4
2. 신비주의 기원 7
1) Paul의 신비신학 7
2) John의 신비신학 9
Ⅱ. 신비주의 운동의 전개 11
1. 헬라철학과 신비신학 11
1) Platonism의 영향 11
2) Aristoteles의 영향 12
3) Plotinus의 영향 13
2. 교부들의 신비신학 16
1) Drigen의 신비신학 16
2) Gregory of Nyssa의 신비신학 17
3) Augustine의 신비신학 18
4) Psuedo-Dionysius의 신비신학 19
Ⅲ. 중세 후기 신비주의자들의 영성 21
1. 엑카르트(Meister Eckart, 1260-1327) 21
2. 헨리 수소(Henry Suso, 1300~1366) 28
3. 요한 타울러(Johann Tauler, 1300-1361) 32
4. 루이스브렉(Jan van Ruysbroeck, 1293-1381) 36
Ⅳ. 중세 후기 신비주의 집단의 영성 40
1. 하나님의 벗(Friends of God) 40
2. 공동생활의 형제단 (the Brothers of the Common Life) 41
Ⅴ. 신비주의가 종교개혁에 미친 영향 44
결 론 51
참고문헌 53
서 론
1. 연구 목적
오늘날 신비주의를 지나치게 추구하는 신비적 사이비 단체도 있고, 신비주의 추구를 성숙되지 못한 종교 행위로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서 신비주의 요소를 제하여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신비주의 요소를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그 능력을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절대적 존재에 대한 갈망과 믿음에서 결정적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모든 범위와 신학에서 신비주의 요소를 연구하고 발전적인 면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다. ”(요14: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 20)
이 말씀은 사도 요한과 사도 바울의 최고 신비적 발언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최고의 절대적 존재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서로 교통하며 연합된다는 불가분의 관계를 나타내는 신비적인 것이다. Lossky는 “신학 없는 신비주의도 없고 신비적인 것이 없는 신학도 없다.”고 말하면서 정통신학과 신비주의는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Lossky는 “신학과 신비주의는 서로 돕고 완성시키는 것으로, 신학은 신비주의가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하여 신비주의의 중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Lossky가 말한바와 같이 신학과 신비주의는 불가분 관계를 갖고 있다고 하겠다. 신학을 완전하게 하고 신앙을 성숙 발전하는 것으로써 신비주의는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오늘날 현재 우리 한국교회에 있어서도 신비주의 요소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신비주의 요인이 과거에 한국교회를 부흥시키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활력을 주었던 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신비주의 요인으로 성장하고 선교되어 왔지만 신학적 지지나 뒤받침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신비한 체험의 현상을 보고, 위험하고 비 신앙적 작태라고 우려하기도 하고 비판하는 경향이 많이 있었다. 교회는 신비적 요인으로 선교되었고 부흥되었는데 신학은 이를 외면하기 때문에 “신학 없는 교회로”, “신앙 없는 신학”으로 보였으며 교회의 신앙과 신학이 서로 갈등되어지는 현상을 보여 왔다. 그러므로 극단적인 신비 현상의 체험에만 치우쳐 비윤리적이고, 반역사적이며 탈 현실적인 신비주의에 대한 비판과 기독교 신비주의 영성 신학의 정통적 입장과 전통을 연구할 필요를 인식하게 한다. 이 논문은 이러한 목적과 동기에서 기독교 신비주의 영성을 중세 후기 교회사 속에서 나타난 사실적 사건을 중심으로 신비주의 영성을 정리하고 평가하여 중세 신비주의가 그 사회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여 한국 교회의 성장과 균형 있는 신앙 생활과 선교활동에 기여함을 목적하고 있다.
2. 연구방법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의 영성이 그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를 밝히기 위하여 신비주의가 교회의 모든 생활과 신학에 체계화되고 실현되었던 중세 후기를 택하여 그 중에서도 신비주의 신학에 대표적 인물인 14세기의 마이스터 엑하르트와 헨리수소, 요한 타울러, 루이스브렉을 중심으로 연구하여 신비주의 신학을 고찰하고자한다. 중세 후기 기독교 신비주의 신학이 이루어지기까지 그 기원으로 바울 신비주의와 요한 신비주의, 그리고 신비주의 정의와 이해와 신비주의 운동의 전개로 중세 후기 신비주의에 영향을 크게 준 희랍 철학자들의 사상과 교부시대 신비주의에 크게 영향을 준 교부들의 영성을 살펴보고, 중세 후기 신비주의자인 마이스터 엑하르트와 헨리 수소, 요한 타울러, 루이스브렉의 신비주의 영성을 중심으로 연구함으로써 분석, 정리, 평가하고 신비주의 집단형성 내력과 그들의 영성과 그 영향력을 살펴보고, 중세 후기 신비주의가 종교개혁사상에 미친 영향과 중세 후기 변혁기에 신비주의자들이 하나님을 향한 열망으로 신앙의 새로운 불씨를 남겨 역사의 새로운 장으로 안내한 중세 기독교 신비주의 신학의 특징과 그 위치를 밝혀보자 한다.
Ⅰ. 기독교 신비주의의 기원
1. 신비주의 정의와 이해
신비주의가 무엇인지 이해를 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신비주의에 대한 오해가 많기 때문이다. 그 많은 오해들 중에서 큰 오해 두 가지가 있다. 첫 째로 어떤 막연한 심령적이며 정신적 경험의 축적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고 둘째로는 이 우주의 불투명하고 어두운 면들의 계시들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언더힐(E. Underhill)은 신비주의란 철학이 아니며, 신비한 지식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영원한 것을 묵상하는 능력도 아닌 것으로, 인간 불멸의 천성을 성취시키는 것이며, 절대자와 관련을 맺는 것이라 하여서, “신비주의란 이론적이 아닌 실천적이며 영적인 행위로서 그 방법과 일은 사랑이다,”고 하였다. 틸리히(Paul Thillich)는 신비주의를 “궁극적 실재인 신과의 교통과 합일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신비주의는 인간의 현존에서 하나님과 직접 일치(Union)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다.
정경옥은 신비주의는 이지감정, 직관, 의지 여하를 막론하고 사회전체로써나 혹은 개아의 인격적 총전으로써 우주의 객관적 실재와 직접관계, 즉 합일적 융합을 의식하며 이와 같은 합일의 경험에서만 인격의 근본가치와 우주의 절대목적을 이루고 지식의 객관적 확실성을 얻는다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오토(R.Otto) 같은 학자는 “신비주의란 근본적으로 말하면 종교의 비합리적 요소를 극도로 강조하는 것이다.”고 정의하기도 했다. 신비주의를「마음속이나 자연 속에 살아있는 신의 존재를 실감하려는 시도」라고 보거나, 일상적 방법이나 교리이외의 방법으로 어떤 존재자 또는 「실재자의 임재를 의식하는 일」이라고 하여서 신비주의를 직접적 체험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칼 바르트는 신비주의를 정의하여 말하기를 “신비주의는 외면적 세계 즉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세계에 대하여 최대한의 절제를 함으로써 인간 본성의 고등한 완성을 도모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신비주의의 사상 중에 중요한 한가지를 거론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비주의는 인간의 내면적 세계의 개발을 뜻하는 것이다. 신비주의는 종교의 의식이나 교리 학습보다도 기도와 묵상을 더 본질적인 종교적 행위로 간주한다. 신비주의가 종교의식과 역사적 전통을 전혀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신비주의는 상징적인 가치를 그것들에게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종교의 핵심은 내면적인 세계에 대하며 무관심하거나 그것을 부정하는 길을 택해야만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신비주의」라는 용어는 근래에 와서 생겨난 말이고, 보다 오래된 중세시대에는 신비신학(Mysticism theology)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원래 피조물 등을 통하여 얻어진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지칭하는 「자연신학」이나, 계시에 의한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지칭하는 「교의신학」과 대립되는 것으로서 사용되었다.
잉게(W. R. Inge)는 신비주의를 “하나님 즉 최상, 궁극적 실재와의 인간의 교통”이라는 정의한다. 그리고 “만일 신비주의자들의 말처럼 저들의 경험이 사실이라면, 즉 성령과의 교통이 사실이라면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세계와 우리 자신들을 이해함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중대지사 라고 생각한다.” 하는 말을 그는 추가하였다. 이 두 가지 정의에서 우리는 신비주의는 사람이 하나님에 관하여 가질 수 있는 지식이요 또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경험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신비주의가 주장하는 바 사람이 하나님에 관하여 갖는 지식이나 그와 더불어 교제하는 경험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지식이나 경험과는 달리 직관적이며 실존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지식이나 경험은 사람에게는 표면적이라기 보다는 내면적이요 흔한 것이 아니라 비상한 것이라고 생각함이 옳을 것이다.
신비주의자는 주장하기를, 사람의 심령은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가 있는데 그와 같은 교통에 있어서 하나님은 객관적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주관적인 경험의 내용이 된다고 한다. 인간의 심령은 시공의 세계로부터 영원한 세계를 향하여 길고 먼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은 “비약”을 경험한다고 한다.
기독교적 신비주의에 있어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거나, 또는 “하나님의 지식”을 성취하는데 두 가지 길이 있다. 첫째로 적극적인 길이다. 이는 via positiva 또는 “적극적 방법”인데 긍정적인 사고의 결과로서 하나님의 지식에 도달하는 것이다. 피조계에 존재하는 미와 선과 사랑 등의 미덕들을 극대화하여 하나님 안에 존재한 속성들로 인식함으로써 하나님의 지식을 성취하는 길이다. 그리고 둘째로는 부정적인 길이다, 이는 via negativa 또는 “포기적 방법”으로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갖는 어떠한 자연적 지식도 승인하지 않는다. 디오니소스의 말처럼 하나님은 사람에 대하여 “신적 흑암”이다. 사람은 자기의 지식과 지각 및 도덕 등을 모두 부정하고 벗어버림으로써 하나님을 비로소 알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이 둘째 길, via negativa를 주로 택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 신비주의의 전통은 두 가지 형태의 신비적 명상을 보여 주고 있다. 첫째로 그리스도 중심적 명상이요, 둘째는 하나님(성부) 중심적 명상이다. 첫째 형태가 되는 그리스도 중심적 명상은 복음서와 바울서신에서 많이 볼 수가 있고 성 버나드(St. Bernard of Clairvanx, 1090-1153)의 저술들과 특히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의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 Christi)에서 활짝핀 꽃처럼 나타나고 있다. 아켐피스는 말하기를 하나님께로 가는 실은 “십자가의 길”이요 “십자가의 길”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죽는 길”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천상의 진리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 중심적 명상으로 희랍철학자 플라톤의 영향 하에 어거스틴(Augustin of Hippo, 354-430)이 기독교적으로 정초 하였다고 본다. 플라톤을 따르면 이 우주의 완전성과 미는 하나님의 마음의 산물이요 하늘에 있는 원형의 모형인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은 시공적인 이 현상세계로부터 출발하여 우리의 영원한 사랑과 욕망의 대상을 찾아가는 순례자의 길을 설파하였고 또 그것을 묵상하기를 즐겨 하였다.
2. 신비주의 기원
1) Paul의 신비신학
바울의 신비주의는 한마디로 그리스도신비주의(Christ-Mysticism)라 할 수 있다. 바울 생애에 있어서의 전환점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었다. 이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그의 생애를 지배하였고 그의 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바울 신학의 중심도 인류의 죄를 대속 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시며 부활의 승리를 주시는 그리스도시다. 이러한 그리스도는 지금도 역사 하셔서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죽음과 삶에 동참한 새로운 피조물인 것이다. 다이스만(Adolf Deissmann)은 “바울의 종교적 체험이 그리스도 중심적임을 의심할 수 없다”고 하여 바울의 그리스도 중심적 신앙은 보다 더 깊고 실제적인 것으로 과거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현재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것이 바울 신학의 중점이라 하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바울”(Paul in Christ)과 “바울 안에 있는 그리스도”(Christ in Paul)로 그의 신비적 신학을 요약하고 있다.
바울은 또한 그리스도의 영과 성령을 동일시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과 성령을 상호 교환하여 사용하였고 단순히 “그리스도” 또는 “영”(The Spirit)으로 상호 교환하여 “주는 영” 이시므로 “주와 연결된 자는 한 영”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통함을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성령 안에 있는 것과 동일하게 사용하였다. 바울에 있어서 구원의 길은 그리스도 안에(In Christ) 있는 것이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갈2:20)이라 하였고, “너희가 죽고 너희 생명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다”(골3:3)고 하며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갈4:19)고 한 점에서 그의 신학이 그리스도 중심적임을 볼 수 있다.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는 이러한 바울의 그리스도를 역시 그리스도신비주의(Christ-Mysticism)라 하여, 예수 자신의 교훈의 발전으로써 예수의 설교가 이미 ‘그리스도신비주의’임을 나타내고 있다하여 마5:11-12 막8:35-38과 같은 구절에서 볼 수 있다 하였다. 또한 마10:40, 마2:31-46에서도 신비적 의미를 표현하였다 했다. 슈바이쳐는 바울이 결코 (Union with God)‘하나님과 일치’나, “하나님 안에 있는 존재”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 에 있는 존재(Being in Christ)를 가리켜 바울의 그리스도를 예수의 교훈과 종말론적인 의미와 연관시키고 있다. 바레트(C.K. Barrett)도 바울의 신비주의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로 종말론적 그리스도라 했다.
이일선은 “사도 바울의 신비주의는 어떤 의미에서 정적주의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윤리적이었기 때문에 능동적이요 실천적인 신비주의였다."고 하였고, 또한 다이스만도 구체적인 실제성을 갖는다고 하였다.
이상에서 우리는 바울의 신비신학이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능동적이고, 실천적이며, 윤리적인 특성을 가지고 겸손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여 죽고 사는 새로운 피조물을 이루어 그리스도와 교통을 통한 하나님에 이르는 신비주의라 할 수 있다.
2) John의 신비신학
바울의 신비주의가 ‘그리스도 신비주의’(Christ Mysticism)라 한다면 요한의 신비주의는 “하나님 신비주의”(God Mysticism), 신신비주의라 할 수 있다. 요한신학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사랑이시며, 빛이시며, 생명이시며, 영으로 보았다. 윌래스(Maurice Wiles)는 요한의 주요개념을 영, 진리, 생명, 빛, 세상, 영광, 지식, 믿음, 로고스 등으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은 추상적이 아니라 인격적인 최고의 존재로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며, 사랑하시고, 계몽하시며, 영감주시는 분이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 되셨고 그의 인격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으며 세상의 빛과 영원한 성령을 나타내셨다.
요한의 중심은 하나님 아버지로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하시며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고 깨닫게 하시며 모든 성도들을 위로하시며 보호하시며 구원을 완성시킨다는 것이다. 요한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이며, 영원한 분으로서 말씀인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요1:1) 하였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요1:14)고 하였다. 또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라 하여,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계시며, 하나님과 일치됨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는 실제로 아버지와 하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서 하나님과 교통하고 불멸하신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요한의 신비주의는 그리스도와 성령과 일체 되신 하나님 중심 신비주의, 로고스 신비주의(Logos Mysticism), 영 신비주의(Spirit Mysticism)라 부를 수 있으며 이러한 요한 신비주의의 특성은 묵상적이며 지성적인 특징을 갖는다.
Ⅱ. 신비주의 운동의 전개
1. 헬라철학과 신비신학
1) Platonism의 영향
중세 기독교 신비주의 운동의 기원을 헬라철학에서부터 시작하여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신비주의를 올바로 연구하는 순서가 되겠다. 왜냐하면 플로티누스, 오리겐,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버나드 등에 의하여서 신비주의가 계승되어졌기 때문이다.
헬라철학 그 중에서도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은 중세신학이 신비주의 및 스콜라 신학의 두 갈래로 특색을 나타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신비주의적 성격은 기독교의 사상과 신앙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기에 외부적인 것에서보다는 기독교 그 자체 속에서 신비주의의 기원을 찾을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헬라적 영향을 살펴보려고 한다. 기독교가 형성되던 초대 기독교는 여러 종교와 사상과 문화와 접하게 되었다. 당시는 특히 로마시대로서, 헬라적 문화의 시대였으므로, 기독교와 헬라철학과의 만남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초기 기독교에 헬라철학사상은 많은 영향을 가졌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영향을 준 것은 플라톤주의의 사상이었다.
죠게감(William. D. Geoghegam)은 “최근 종교사상에서의 플라톤주의”라는 저서에서 플라톤 사상이 기독교 신비주의에 준 영향을 고찰하면서 “플라톤은 그리스도 이전의 기독교인이었다.”고 하였으며, 그 사상의 다섯 가지 주요 개념을 하나님, 이상, 본질적 실재, 역사적 실재와 인간의 도덕적 인격의 본질과 운명이라 했다.
또한 길슨(E. Gilson)은 플라톤이 기독교에 여러 중요한 요소를 주었다고 하면서, 특히 신비주의에 계승된 것은 “우주의 창조론자, 섭리하는 하나님론 지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실재론과 감성계는 단지 형상에 대한 신의 세계론, 영혼의 영성론, 육을 초월하는 이론” 등이라고 말하면서, 이것이 특히 버나드(Bernard)에 계승되었다고 하였다.
틸리히(Paul Tillich)는 플라톤의 초월적 관념, 곧 경험적 현실을 초월한 그 무엇이 존재한다는 사상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초가 되었다고도 하였다. 곧 플라톤의 초월사상, 삶의 테로스(Teros:목적)사상, 영혼과 사상, 섭리사상 등은 기독교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기독교의 신앙 내용과도 일맥상통하는 훌륭한 내용이 되고 있다.
플라톤은 인간 영혼을 신적인 초월의 존재로 보아 영원한 존재와 재결합하기를 동경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 영혼은 현세에 태어나기 전에 순수한 존재의 현존과 영원 불변하는 실재에 있었던 것으로써 영혼만이 참된 실재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힘을 소유하고 있다고 보았다. 플라톤은 그의 공화국에서 동굴의 비유를 통해 그림자와 실재를 구분하여 감각을 통해서 주어진 그림자와 같은 세계를 떠나서 더 높은 실재의 세계로 상승해야 할 것을 말하였고, 인간의 인식이란 영혼의 처해있던 전생의 상태이나, 그것이 구체화돼 있던 상태를 ‘상기하는 것’과 은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기독교 신비주의에 큰 영향을 끼쳤다.
2) Aristoteles의 영향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384-322)에 의하면 신적인 것은 질료 없는 형상이며, 그 자체로서 완전한 형상이다. 이 최고의 형상(신이라고 일컬음)이 세계를 움직인다. 이 신은 유한한 모든 것으로 하여금, 신에게로의 사랑에 의해서 스스로 신을 향해서 갈 수 있게 함으로써 세계를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가장 심오한 사상이다. 모든 것은 최고의 형상과 결합하려는 욕망을 가지며, 보다 낮은 형상(질료의 예속상태를 못 벗어난 형상)을 떨쳐버리려는 욕망을 가진다는 것이다.
플라톤에 있어선 이데아만이 현실성을 지니고 있어 개별적인 사물이란 이데아를 바탕으로 하여 불완전한 모사에 불과하였으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는 플라톤과 달리 이데아에 대한 것도 우리의 시간과 공간의 테두리 안에 있는 개별적 사물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우리의 판단은 개별적 사물과 관련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그 외 질료와 형상론은 중세 스콜라 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순수 정신이 신성과 관련되어 중세 신학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신 관념은 그리스도신학 형성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특히 엨하르트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3) Plotinus의 영향
신플라톤주의자인 플로티누스(Plotinus, 205-270)는 신비주의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3세기 후반 로마제국 내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가졌던 신플라톤주의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사카(Ammonius Saccas, ? -245)에 의해서 창설되었으나, 이를 실제로 잘 발전시킨 사람은 244년경부터 로마에 정착한 플로티누스 였다.
이 신플라톤주의는 플라톤 사상을 신비주의적으로 해석하는 일종의 범신론이었다. 신은 분해될 수 없고 절대적인 존재이며, 완전하여 그로부터 모든 하위 존재가 나온다. 그는 우리의 사고 속에 함축되어 있는 이원성을 넘어서는 유일자이며, 오리겐 신학에서의 로고스와 같은 누스(Nous)가 그로부터 방출된다. 그 누스(Nous)로부터 세계 혼(Word-soul)이 파생되고, 세계 혼으로부터 모든 개인 영혼이 나온다. 세계 혼은 물질 세계를 낳기도 한다. 그러나 각 존재단계는 상위단계에 비하여 각기 열등한 존재양식을 가지게 되며, 진실도가 낮아지는데, 그 등위는 완전자인 신으로부터 시작하여 신에 대하여 부정자가 되는 물질세계에까지 내려간다.
신플라톤주의는 플라톤적 사상, 스토아적 사상,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사상 등을 서로 융합시킨 하나의 체계였으며, 통합적인 국가종교였었다. 이 주의에 성립의 전제가 되었던 것은, 첫째는 모든 특수한 종교들의 소멸이요, 둘째는 자율적 이성의 붕괴였는데, 이로써 이성의 힘에 의해서는 새로운 삶의 의미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사실이 확실시되었고 이같은 상황에서 철학자들은 신비주의에 기울어졌고, 배교자(기독교 박해자) 율리아누스황제 아래서 그들은 신비주의자로서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내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유명한 클레멘트와 오리겐은 신플라톤주의에 대항하여 싸우게 되었는데,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그리스도교 사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신플라톤주의의 여러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이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신플라톤주의는 가장 위대한 최초의 신학체계를 만들어낸 오리겐에게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리나, 특히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Dionysius Areopagita)에게 영향을 주어 그를 통해서 그 이후의 모든 기독교 신비주의와 고전적 그리스도 신학의 여러 형태, 신, 세계, 혼에 관한 학설에 영향을 끼쳤다.
플로티누스의 유일자 사상은 인간의 최고 목적과 행복은 영혼이 그 영혼의 발생근거인 신의 경지와 합일되는데 있다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겠는데, 이러한 그의 사상은 중세 신학과 신비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다. 플로티누스는 플라톤과 중세에 일어난 신비가들과의 사이에 있어서 위대한 중간자가 되었었다.
플로티누스의 이러한 분출론은 일반에서는 연금술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지만, 만 가지 법을 신으로부터의 분출이라고 보는 그의 생각은 그 후 개인의 마음에도 신성이 있음을 인정하게 되어, 각 사람에게서 물질적인 장애를 제거함으로서 견신을 체험할 수 있다는 신비도의 기본관념이 되며 이것을 오리겐이 「끊임없이 새롭게 신봉자를 가지는 순수한 사유로부터 철학을 구성하려는 계획도, 중․고 신비주의의 정의 생활도 역시 거슬러 올라가려면 플로티누스에 근거하는 것이다」라고 평한 것은 옳은 것이었다.
이 위대한 사상가, 플로티누스의 생애를 다시 요약해보면, 205년에 이집트에서 태어나 알렉산드리아의 학교에서 공부했고, 폐르샤 원정에 참여하였으며 동방학문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인도의 종교와 신비주의에 매력을 느껴서 거기에 관해서 탐구하고, 많은 여행도 했다. 그 후에 이집트를 떠나 로마에 머물면서 유명해지고 존경받는 교사가 되었다. 기독교에 대하여서도 잘 알고 있었으나 어느 한 종교에 예속되기를 싫어하여 기독교인이 되지는 아니했다. 고디아누스 황제가 그의 친구였으며 헬라철학의 가장 존경받는 학자로서 명예를 얻고 거기에서 활동하다가 270년 로마에서 죽었다.
이플로티누스의 영향은 그의 시대인 고대를 넘어서 중세기로부터 현대까지 이쳐서 항상 계속되며 다함이 없는 것인데, 특히 어거스틴은 플라톤으로부터 바로 플로티누스를 거쳐서 전해온 헬라의 신비주의에 새로운 히브리 민족의 기독교적 신비주의를 혼합하여 그의 독자적인 인격을 창조할 수 있었다. 이밖에도 플로티누스의 영향은 보에티우스에게도 나타났으며, 특히 위디오니시우스에게는 큰 영향을 미쳤다.
2. 교부들의 신비신학
1) Origen의 신비신학
알렉산드리아학파에 속한 클레멘트와 함께 오리겐은 신학을 체계화시킨 분이시다. 오리겐은 “하나님은 영”이시며 “하나님은 빛”이라 하였고, 하나님은 존재며, 존재를 넘어선 존재로 보았다. 이러한 하나님은 “지성적인 본성”을 지니며 모든 물질적인 것에서 자유하고, 시공에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분으로 보았다. 따라서 신은 “이해할 수 없이 무한하며, 측량할 수 없고, 무감각하며, 어떤 것을 원하는 것을 초월하신 분”이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세상의 근원으로써 창조주요, 섭리자며, 통치자시다.
이러한 한 분이신 하나님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아들을 통하여 알 수 있는데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로고스요, 지혜로써 영원하며 빛의 광채처럼 하나님에게서 출생된 분으로 하나님과 피조물의 중재자로서 활동하신다. 또한 성령을 통하여 아들과 하나되어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고 결국에는 성부의 신적 생활에 참여하게 한다고 하였다.
또한 오리겐은 인간영혼이 로고스의 신부로써 영혼은 그 자신의 신랑으로 받아들인다는 그리스도와 영혼의 신비적 결혼의 개념으로 해석하였다. 틸리히는 이러한 영혼은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포착된 존재로써 그 자체를 넘어가지 않고 신의 구체성인 로고스가 영혼으로 들어온다고 하면서 이것을 신비주의의 “세례”라 부르는 첫 단계라 하였다. 그는 또한 로고스와 영혼의 신비적 결혼을 오리겐이 말한 것이 구체적인 인격성을 파괴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결혼이라고 했다.
오리겐의 신관이 존재자체로 존재를 넘어선 존재로 이해한 것과 신성 속의 삼위일체성을 말하며 인간의 영혼 속에 관계하신다는 구원관을 제베르크(Reinhold Seeberg)는 “오리겐이 중세 신비주의의 기초를 이루는 사상을 표현하여 주었다”고 하였다.
2) Gregory of Nyssa의 신비신학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335-394)는 희랍교부로 카파토키아 학파의 3대 교부중 한 분으로서 신학을 희랍철학으로 설명하였다. 그레고리는 신앙을 위해 이성의 가치를 인정하여 신의 존재를 우주의 질서에서 증명하며 신의 단일성을 신의 완전성에서 끌어낸다. 특히 삼위 일체론을 체계화시켜 한 본질에 세 가지 존재양식인 실체를 갖는다고 하였다. 성령은 성부에서 나오고, 성자에게서 받는다고 하여 성부만이 기원이 없는 원인자이고 성자와 성령은 그 원인자에게서 생긴 분이라고 보았다. 그레고리에 의하면 창조는 사랑에 의해서 인간이 신의 신성에 참여하도록 자유롭게 이루어졌고 신의 자유에 참여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악은 인간의 자유선택의 결과로써 신의 책임이 아니다. 하나님은 악을 미리 아셨고 그것을 묵인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모든 인간들이 결국에는 그 자신에게로 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코플스톤(Copleston)은 이 점에서 그레고리는 오리겐주의자들의 “모든 것의 회복설”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그러므로 육체의 어느 일부분에 구속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삶의 요소요, 지성이며, 몸에 생기를 주는 영혼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며 불멸적인 것으로써 신과 합일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영혼의 진전은 신적 로고스인 그리스도의 과업으로써 그리스도 중심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코플스톤은 니사의 그레고리가 체계적인 신비신학을 첫 번으로 참되게 기초한 분이라고 하면서 디오니시우스 뿐 아니라 크로스의 성 요한과 보나벤투어에까지 영향을 주었다고 하였다.
3) Augustine의 신비신학
어거스틴에게 하나님은 존재의 근거, 생명의 원천으로서 세계에 내재하면서 초월하시는 분으로 불변자, 무한자, 영원자이시다. 이러한 신은 드러난 분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밖에 있는 분이다. 그러므로 신 인식의 길은 영혼의 심층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참회록에서 신을 내면세계에서 찾고 있다. 즉 “내가 어디서 당신을 찾아야 합니까? 내가 밖에 당신을 찾고 내 기억 속에서 찾지 않으면 내가 당신을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을 기억하지 않고 어떻게 당신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코크란(C.N. Cochrane)은 어거스틴의 신관이 히브리신관과 헬라신관을 훌륭하게 융합하였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본질을 본질의 범주로 이해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자기는 본성이란 말을 쓰면서 이 본성이란 말은 하나님께 사용될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즉 하나님의 본성은 “존재”로서 어거스틴은 “자기가 자기를 의식하는 원리가 되어 존재 양식 없이도 모든 것을 파악하시며, 위치하는 곳 없이도 무소 부재하고, 시간에 종속됨 없이 영원하시고 가변적인 사물의 변천에 추종함 없이 행동할 수 있으며, 정열 없이 느낄 수 있는 분이며, 양 없이 위대하시며 필요 없이 선하다”고 하였다. 카세레이(J.V.L. Casserley)는 어거스틴에서 이러한 신 지식은 자기의식(Self Consiousness)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것이 곧 “신 의식”이라 하면서 “하나님을 알기 위해 밖으로 나가지 말고 내 자신에게로 돌아 오라 진리가 거하는 곳은 속 사람이다”는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영혼의 기능을 일곱 단계로 나누어 분석하여, 신과 합일로 인도하는 길을 말했다. 이 과정은 첫째로 영혼의 빈곤이며, 둘째는 신선한 성서를 받아들이는 경건이고, 셋째는 하나님에게서 자기자신의 슬픈 탈퇴를 아는 것, 넷째는 의를 위하여 굶주리고 목마름에 의한 고된 일미며, 다섯째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자비에 대한 개방성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타인에게 자기자신의 자비를 베푸는 것으로 증명하는 것이요, 여섯째는 묵상을 위하여 정결한 마음과 순수한 마음을 준비하는 것이며, 마지막 일곱째 단계에 이르러 묵상 그 자체로 여기가 영혼의 급수지요, 본질이라 하였다. 이러한 묵상과 행동의 균형은 그레고리와 버나드에 자극을 주어 중세 전반에 걸쳐 기독교 봉사와 사회적 책임에 자극을 주었다.
어거스틴 사상의 근원적 요인은 “하나님과 영혼으로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는 것”이며 성서에서 말하는 종교의 근본적인 것으로 당신은 당신을 위해 우리를 지으셨고, 우리의 마음은 당신의 틈 안에서 쉬기까지 쉼이 없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존재 자체, 무형, 무상, 무질, 무량이면서도 교통할 수 있는 분으로 보았으며, 인간영혼의 심층에서 만날 수 있으며 자기인식을 통한 죄의식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을 향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특히 그의 고백에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길은 오직 그리스도인 중보자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인간은 그의 모범을 따라 겸손을 배우며 사랑을 깨닫는 데 있다.
4) Psuedo-Dionysius의 신비신학
위 디오니시우스는 하나님을 감성과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분으로 보았다. 그는 신 인식을 긍정적 신학과 부정적 신학의 두 가지 길로 나누었다. 긍정적 신학이란 피조물 안에 있는 완전성들이 신에 관하여 서술되는 것이나, 피조물 안에 있는 것을 그대로 신에게 서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에게는 피조계와 달리 아무런 불완전성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 자체가 유일자로서 선자체로 모든 피조물에 넘쳐흐르는 원천이며 궁극목적으로서 모든 사물 속에 내재하여 있는 보편적 개념인 신성으로 신의 본성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신은 초지성이므로 피조물의 불완전한 속성들로 신에 이를 수 없고 결국 피조물의 속성을 거부하는 부정적 신학으로 신존재에 이른다는 것이다.
디오니시우스는 신존재를 근원적 존재로서 모든 사물에 존재를 부여하는 유일자시다. 이러한 것을 신의 유출로 설명하였다. 유출에 의해서 일자는 그대로 있으며 아무 변화 없이 만물의 원인이 된다. 이러한 유출과정에서 삼위일체를 말하는데 이 삼위일체 배후에는 불변의 일자가 있는 것이다. 즉 유일자 안에 포함하는 존재양식일 뿐이다. 그것도 유출도에 따라 무생물, 생물, 정신, 영 등의 존재의 위계가 성립되어 정화와 조명과 합일의 길을 통해 고차원적 존재로 상승하여 만물의 원인이며 최종적 목적인 신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디오니시우스의 사상은 플로티누스의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중세 전반에 영향을 주었고 특히 신비신학체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Ⅲ. 중세 후기 신비주의자들의 영성
1. 엑카르트(Meister Eckart, 1260-1327)
엑하르트(Meister Eckhart)는 신비학파의 시조로 모든 사색적 신비주의자 중에서 가장 위대하다. 그는 1260년 경에 태어나 튀빙겐에서 1327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짐작한다. 그는 도미니크회의 수도사로 에르프르트 수도원장과 튀빙겐 부교장, 그 후에 보헤미아의 감독보조로 있기도 하였다. 그는 스트라스브르그에 살면서 그곳에서 “자유의 영의 형제“들과 알게 되고, 후에 프랑크푸르트에 옮겨가 도미니크 수도원장이 되었다.
헤겔(Hegel)은 엑카르트를 가리켜 ‘독일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렀으나 독일 신비주의의 원조로 불리움이 마땅할 것이다. 엑카르트 이전에도 독일 교회에 신비주의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엑카르트의 출현은 독일 종교사상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콜론에 가서 설교하기 전에 그는 파리에 가서 공부하여 박사가 되었다.
그는 단테와 동시대인으로 1278년에 작센의 에어푸르트 시에서 도미니크 탁발 성직자가 되었다. 도미니꼬 수도회는 낡은 수도 단체들에게서 얻을 두 있는 것보다 더 강한, 개인적 헌신을 바라는 일반적인 요구에 응해서 수년 전에 창립된 바 있었다. 도미니꼬 파는 각별히 이단의 소멸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 과업 때문에 그들은 지적 탐구를 통하여 정통신학의 노선을 명백히 하려고 애쓰게 되었다. 처음부터 그들은 두 교단 중 가장 학문적인 수도 회였고 13세기적인 신학적 종합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 수도회에서 지도적 역할을 부여한 학자들과 지식인들을 끌어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설교가 감동적인 것으로, 그의 저서들이 심오한 것으로 한창 교계의 화제가 될 무렵 콜론의 대주교 헨리로부터 1325년에 이단적 경향이 있다는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1327년 2월 엑카르트는 이단이 아니라는 공식 변명을 하였으나 교황 요한 22세는 1329년 3월 27일 끝내 이단으로 정죄 하는 교서를 내렸다.
엑카르트의 설교는 독일어로 쉽게 한 것으로 일반 평민들이 알아들을 수가 있었고 신약 성경을 많이 인용하며 예화를 많이 사용하는 특색이 있었다. 설교가로서의 엑카르트를 일컬어 중세 학자 크루엘(Crule)은 “엑카르트야 말로 가장 담대하고 독일 강단 역사상 가장 심오한 사상을 담은 설교가였다. 독일 교회 역사상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창조적 설교가 였다”고 격찬하였다.
그의 설교는 항상 직접. 간접으로 신비주의의 추상적이며 체계적인 분석에 입각해 있었다. 에크하르트는 개인의 신비적 경험을 전하려고 하지 않고 그 대신 규칙적 직접적인 개인의 계시가 있을 수 있다는 데 대해서 스콜라 신학의 각성을 촉구하려고 원하였던 것이다. 어느 의미에서는 에크하르트는 그의 시대의 합리주의적 추세를 대변하였다. 그는 신비적 체험을 일반화하고 체계화하고자 원하였고, 그렇게 함에 있어서 다른 방식으로 경험을 체계화하려고 하는 다른 사람들과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존재와 피조물의 존재를 구별했으나 엑카르트는 두 존재의 연합을 강조했다. 그 연합의 매개체는 영혼 속에 있는 빛(Funkelein)이며 음식이 몸으로 들어가 육체화 되듯이 이 빛으로 인간 영혼은 하나님 속에 들어가 연합케 한다. 삼위일체의 제2위 되신 그리스도의 성육신도 인간이 하나님과 연합되게 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바울이 갈라디아 2장 20절에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한 것이 그의 지나친 범신적 경향으로 다음 표현에서 더욱 나타난다:
내가 하나님을 보는 그 눈은 바로 하나님이 나를 보시는 같은 눈이다. 그러므로 내 눈과 하나님의 눈은 같은 눈이요 그래서 한 시선과 한 생각과 한 사람이 된다.
그에게 있어서 죄는 유한한 피조물에 매이는 것이요, 거기에 쾌락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감각적인 사랑이나 세상의 연락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연합을 하는데 참 구원이 있다고 보았다. 엑하르트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중요한 점에 있어서 다른 것도 많다. 신과 신성을 구별한 점이 토마스 아퀴나스와 다른 점이다.
신성이란 것은 아직 개발하지 않고, 모든 차별을 속에 포함하고 있는 유의 영원한 가능성이다. 그러므로 신성은 지식이나 예배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암흑이요 무형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신성에서 나온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이시오 이미 말한 아버지의 사상이다. 성령이란 ‘신의 나무의 꽃’으로서 아버지와 아들을 통일하다 상호간의 사랑이다. 엑하르트는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며 “나는 마음에서 나오는 말과 같고, 태양에서 발하는 광선과 같고, 꽃에서 나오는 향기같고 영원한 샘에서 흐르는 물과 같이 왔노라”하여 성자의 탄생이 영속적 자용이라고 주장한다. “신성과 신 사이에는 명백한 상위가 있다. 신성은 그 자체가 은폐된 것이요 신성 그 자체를 위해 존재 않을 수 없게 된 듯 여겨진다. 그리고 신성이 가져오는 무형의 힘이 스스로 하나의 이미지를 낳게 된다. 이 심상이 생기는 일이 신성을 분명히 식별하게 하고, 그 덕택으로 인식 작용이 가능하게 된다. 이같이 하여 신의 무한성이 결정된다. 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신지식으로만 만족하지 못하고 삼위일체의 근저라고 하는 소위 신적 암흑에까지 관철하려고 했다. 평자는 이것을 그가 계시의 말씀에 불만을 품고 추상적 사색을 일삼는 자율 사색이라 했다. 그는 천국과 지옥은 장소가 아니라 상태라고 했다. 엑하르트는 인격적 형태를 갖고 나타난 신이라 할지라도 그 배후에 있어 기초가 된 신성과 구별했다:
신성은 우리의 지식을 초월한 것으로 무명이요, 허무요, 영원한 현재다. 이 신성은 자지 의 활동에 의하여 자기를 지식의 대상으로 일삼고, 이 대상을 자기에게 귀입하게 하기를 좋아한다. 여기서 주관과 객관의 차별이 생긴다. 주관은 성부이신 신이요, 객관은 곧 성자이신 신이다. 양자 사이의 사랑이 곧 성령이다. 이같이 삼위일체 신은 이것이 곧 신의 자의식의 영원한 사상이다. 스스로의 안에 갖고 계시던 관념을 때와 공간에 투사한 것이 곧 우주이다. 이 우주의 이상적 총제는 성자이신 신이다. 성자이신 신 안에 포괄되어 성부에게로 귀입 하는 일이 곧 만물의 귀취이다. 인간 이외에 만물은 또한 인간이 이성에 포괄되어 신께 귀입 한다. 인간의 영혼은 만유를 포괄한 소우주이다. 인간의 마음의 정점에 신적 불티가 있다. 이것이 가장 신께 가까운 것이다.
이 불티는 신께 지음 받은 것이겠는가, 혹은 이것 자체가 신인가? 여기에 대하여 엑하르트 자신의 사상에 동요가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이것을 지음받은 것이라고 말했으나 말년에는 지음 받은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이 하나님과의 연합을 향한 엑카르트의 줄기찬 추구는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의 영향아래 범신론적인 경향으로 탈선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은 하나님이다.”
에크하르트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통에 따라 저술하고 생각한 신학자이긴 하지만 신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관한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달랐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두 가지 길을 보았는데 그것이 이성과 계시였다. 이성은 감각에 의해 마련된 데이터에 입각하여 작용하면서 사물의 법칙을 이해하고 그 자체는 자연을 초월하여 스스로의 시야에 따라 모든 자연의 밑에 깔려 있는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다. 계시는 이성으로 인간이 얻을 수 없는 것을 마련해 준다. 그것은 인간 자신의 경험 밖에서부터 오며 인간을 납득시키는 방식은 인간성과 자연성을 통하는 것이다. 엑하르트는 인식에 이르는 이러한 두 길을 다같이 인정하였으나 세 번째의 길을 덧붙이고자 원하였다. 즉 내적 의식인데 그것은 모든 감각이나 외부적인 인도와 독립적인 내적 영혼에 대한 신의 직접적인 자기계시인 것이다. 그는 주장하기를 이러한 계시에 대해 갖는 우리의 인상이 사실상 타당성이 있으며, 다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신의 본질적 속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유형의 인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였으나 그것이 특수하며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식으로 얻어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또한 이성과 계시를 통해 얻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엑하르트는 우주는 성부의 전 사상의 표현이라고 하면서, “자연이란 것은 신성의 아래 부분이다” “창조 이전에는 신의 신이 아니었다“고 했다. “아들이 없이는 아버지는 신이 아니요, 다만 유의 미개발적 가능성이다. 이 같은 세 인격은 다만 실체의 우연히 되어진 일도 아니요, 또는 양식도 아니요, 신성에 고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이 존재하는 않았던 시대는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아들의 출생은 필연적으로 인념계의 창조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 까닭은 아들이란 곧 이성이요, 이성은 이념의 세계에 의해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념계는 신의 사상의 완전한 표현이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다.” 그는 현상계를 “자연화한 자연(Diug Enaturte Nature)" 이라고 부르고, 이개념를 ”자연화되지 않은 자연(Non-natured nature)“ 이라 불렀다. 신 플라톤파의 사람들은 유출이란 태양에서 광선이 분산되는 것과 같은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즉 그것이 중심점에서 멀어질수록 열과 빛은 필연적으로 감소해 가는 것이다. 따라서 삼위일체의 제2위 누스(Nous)인 예지는 제1위에 종속하고, 제3위는 제2위에 종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엑하르트에게 있어선 종속이란 것이 없다. 아들은 아버지의 영광의 순전한 광채시오, 아버지의 인격은 명확한 상이다. “사물의 영원한 샘은 아버지이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사물의 상은 아들이다. 이 상에 대한 사랑은 성령이다”, “모든 지음 받은 것들은 신성의 바탕 속에 무형하게 (가능성으로)영주해 있다. 그리고 만물은 아들 안에서 실현된다”
엑하르트는 범신록적이라는 비난도 받는데, 그것은 그의 사상체계 중 가장 애매한 부분인 현상계와 이념계와의 관계의 해석여하에 달려 있다. 그는 원형이 외계에 나타나는 과정의 설명으로서, 로고스의 화신 교리를 가지고 말한다. 하나님이 자기의 이상을 말씀하시자 현상계가 생겼다. 이것이 화신이다. 그런데 심령이 현상계에서 스스로를 해방하여 예지게에 복귀하는 과정도 또한 “아들의 출생” 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모든 과정은 순환적 과정를 이루는 것으로 신에게서 나와 다시 신에게 되돌아간다. 그리고 신간과 공간은 세계에 함께 창조되었다. 신이 “그 아들을 낳게” 되는 “필연”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 필연이다. “선은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나주지 않을 수 없다”, “시간과 공간만큼 우리가 신을 아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없다.
엑하르트는 순간적인 것에다 영구적 가치를 주려고 하지 않고, 이 세계도 불멸의 영이 순간적으로 머물다 떠나는 별로 흥미가 없는 곳으로 보았다. 그는 모든 역사를 무시했다. “영원의 현재”에 있어서의 신적 과정이 측량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요, 외적 세계에 있어서의 그 어떤한 사건도 도저히 여기다 비교할 바 못된다고 느꼈다. 그는 디오니시우스의 주장과 같이 유를 선이라 보고, 소위 악은 “비유”와 동일한 것이라 보았다. 도덕적 악이라는 것은 내 뜻이요, 피조물의 입장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떠나 특별한 종류의 이것저것이 되려는 기도이다.
엑하르트의 윤리학에 있어서 가장 새로운 현저한 점은 내재론에 중요성을 둔 점이다. 엑하르트는 처음에는 이것은 창조받은 것이라 하고, 단지 우리를 신에 변형하게 하려는 매개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으나, 후에 가서 그것은 창조된 것이 아니요, 신 자신의 유와 본성과의 내재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이 불티, 이것이 신이다.” 고 말했다. 이 불티가 신과 영혼의 신비적 합일을 이루는 것이요, 일체 생활의 목적인 신 인식의 극치라고 했다. 이 주장은 루이스브렉, 수소, 타울러 등이 그대로 채용했다. 이 불티가 바로 우리의 인격과 신과의 사귐을 가능하게 하고, 신을 알게 하는 기관이다.
엑하르트의 주장이 자기 신화의 모독이라고 비난받은 점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 것에 기인한다. “우리가 신을 보는 눈은 신이 우리를 보시는 눈과 같다”, “지음 받은 것이 아닌 불티” 그것은 우리를 신과 같이 상태에까지 오르게 하는 신의 은혜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은혜는 심령 속에서 인간의 능력처럼 활동하여 이것을 개조해 “사람 스스로가 은혜가 되게끔 하는 신 자신”이다. 심령 속에서 심령 이상의 것이 있다. 신적인 단순한 순수 무, 이름 있는 것보다 도리어 이름 없는 것이다. 어떤 경우엔 그것을 힘이라 부르고, 어떤 때는 지음 받은 것이 아닌 빛이라 부르고, 때로는 신적 불티라 부르기도 한다. 그것은 절대적인 것으로서 모든 명칭이나 모든 형식을 벗어난 것임은, 마치 신이 자기 자신 안에서 자유이고 절대적인 것과 같다. 그것은 지식보다 높고, 은혜보다 높다. 그 까닭은 이런 것들 속에서 아직도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이 힘에 의해 신은 그 전 신성으로 꽃이 만발하고, 성령은 신 안에 있어 영광을 나타낸다. 이 힘에 의해 아버지는 스스로의 안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그의 외아들을 낳으시는 것이다. 이 빛 속에서 성령이 생긴다. 이 불티는 모든 지음을 받은 것들을 버리고 다만 신만을, 신께서 자기 안에 계신 것 같이, 단순히 받아들일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에게도, 아들에게도, 성령에게도, 또는 이 세 인격에게도 만일 그 각각의 인격이 자기 고유의 속성 안에만 존재하고 있는 한 만족하지 않은 것이다. 왜냐 하면 그것은 초 본질적 본질에서 만족하기 때문이다.
또는 그 불티는 단순한 땅, 정적한 황야, 아무도 살지 않은 통일에 들어가려고 결심한다. 이때 그것은 광명에 만족한다. 이때 그것은 하나이다. 그것이 스스로의 안에 있어서 하나인 모양은 마치 이 땅이 단순한 정적이요, 본질적으로 부동하고, 그러면서도 이 부동하고, 그러면서도 이 부동에 의해 만물이 움직이고 있는 것과 같다.“ 그 거룩한 뜻대로 우리 속에 역사 하사 우리로 하여금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이나 인격에 무슨 피해를 주시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인격이 신의 인격과는 구별되어 있지 못하다면 우리가 신을 볼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 완전한 융합은 완전한 분리와 마찬가지로 사랑이나 지식의 가능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엑하르트는 “최고의 이성”을 인간의 모든 능력 중에 첫째 되는 것으로 삼고, 그의 사상의 초기에는 이 최고 이성을 불티와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이성의 절대적 우월성을 확신했다. “이성적 지식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 어떠한 외적 계시라도 그것이 내적 체험에 의해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를 도울 수 있는가. 언제나 맨 마지막에 가서 호소할 때는 우리 스스로의 존재가 가장 깊은 곳이 아니면 안 된다. 그것은 우리 이성이다.” 이성은 지혜에도, 선에도, 신 자신조차도 만족하지 않는다. 이성은 모든 선이나 지식이 생겨나는 곳이다. 우리는 그 소지에까지 파고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엑하르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매개된 신의 지식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삼위일체이신 현현의 근저를 이룬 신적 암흑에까지 투철하기를 동경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에 대해 말할 때는, 모든 만민이 더듬어 갈 “인류의 길”과 신비가 만이 가는 “신성의 행로”를 구별했다. 이같이 “3에서 1에로” 올라가려는 너무도 대담한 갈망을 위하여 정신주의적 자기-단순화를 강조하고, 인간의 관능에서 오는 것은 모조리 배격하고, 신의 마음에 나 스스로를 투신하여 거기서 “모든 지음을 받은 것에서 숨겨져서” 영원히 안심입명 하라고 가르쳤다.
“정관에서 인간이 흡수해 둔 것을 사랑 속에서 분배해 내 보낸다.” 엑하르트가 즐겨 다룬 문제는 성령의 현실적 산 활동과 이 세상에 있어서의 생활의 성화였다. 그는 활동적 생활과 정관적 생활 사이에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않는다. 활동이란 것은 심령의 작용에 속하는 것이요, 정관이란 것은 심령의 본질에 속한 것이다. 그의 사상은 종교개혁자들의 선구자 노릇을 했다. 그는 부르짖기를 “죽은 성자의 유골이 무슨 역할을 해냈단 말이냐. 죽은 자는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다”고 했다. 그는 중세 기독교와 근세 기독교의 분수령 위에 선 듯이 느껴지는 인물이다. 그가 주장한 기본적 진리는 신의 내재에 있고, 그 내재는 인간 심령의 능력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령의 소지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말한 심령의 불티는 실제에 있어서는 신의 기의 미를 얻으려면 노력해야 하며, 그것을 처음부터 완전한 것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과 신 사이에 아무런 매개자도 끼지 않게 했다.
2. 헨리 수소(Henry Suso, 1300~1366)
헨리 수소는 스위스의 신비가로서 콘스탄스에서 탄생했고, 도미니크 수도원에서 교육받고, 퀄룬에서 신학 공부를 했으며, 독일의 신비가 엑하르트의 열렬한 제자였다. 그는 사변적 머리보다 상상에 능한 까닭이었던지 일종의 독특한 신비주의자가 되어 중세의 대표적인 시적 신비주의가 이였다. 그는 사상이 다져져 그것이 종내 인격화되어 완전한 아름다음의 빛에 감기는 데 이를 때까지는 만족하지 않았다.
신의 본질과 같은 숭고한 문제를 대체로 지나쳐가면서 그리고 그 대신 말과 행위를 통해 신비적 인식에의 길을 제시함으로써 이들은 비정통파라는 냄새를 피하고 엑하르트가 끼친 것보다 더 광범하게 그리스도교계에 대한 호소력을 작용할 수 있었다. 수소는 특히 그의 생애에 있어서나 사후에 있어서나 매우 높은 인기를 누렸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저작인 「영원한 지혜의 삶」은 당시의 가장 인기 있는 책 중 하나였으며 그 점에서는 심지어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능가하였다.
도미니크 수도원에 은둔하여 은자의 생활을 하면 1338년에 「영원한 지혜의 삶」을 저술하고, 1940년에 설교를 시작하고 여러 해를 원텔즐 수도원에 운둔해 지냈다. 신비가 타울러 및 신우회 친구들과 사귀고 동포회를 조직하여 그 규칙을 쓰고 많은 사람을 개종시켰다. 그는 특히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할 것을 몸소 실천한 분으로서 보속적 생활을 위해 무서운 고행과 난행을 감행했다. “십자가 없는 곳엔 면류관도 없다.”, “내가 있는 곳엔 내 종도 함께 있을지니라.” 그는 이처럼 외치면서 16년동안 그 이상 없을 준엄한 생활을 보냈다. 처음에는 남들과 같이 평범하게 살아가려고 했으나 “영원한 지혜(신)”는 그에게 명하기를 “부드러운 수단으로 제어하기 어려운 육체를 정복하려는 생각은 상식을 벗어난 것이다. 만일 네가 모든 것을 버리려고 결심했다면 목적을 완수할 때까지 쉬지 말라.”고 했다 이 준엄한 명령은 그는 복종했다.
수소는 정감이요, 시적인 성품을 타고나서 문학적 천품도 놀라웠는데, 애정이 풍부한 그의 성질은 신앙에도 사랑의 대상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의 사상은 잠언에 나오는 사랑에 가득찬 여인의 모습으로 인격화된 영원한 지혜에 집중했다. 수소와 그의 정신적인 딸인 엘리자벳 스테그린 사이에 신비주의적 교리의 어려운 문제를 두고 묻고 대답한 몇 가지를 기록하기로 하자. 이것은 특별히 삼위일체 교리에 관계된 것이다.
여인: “완전한 합일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기에게서 신의 관념을 버리고 다만 내적으로 비치는 빛으로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는데요?”
수소: “그 말을 보통 의미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잘못되었다. 그러나 신이란 존재는 위대한 공사 감독자여서 그가 주로 하시는 일은 상벌을 주는 데만 있다고 짐작하는 일반 신앙은 신의 완전한 사랑에 의해 무리쳐진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영적인 사람은 무지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같은 정도의 신 관념은 실제 내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다신 신과 합일하는 최고의 상태에 도달 했을때 우리 심령은 삼위일체의 각 인격에 관심을 두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축복을 내리시는 분은 신의 어느 한 가지 인격이 단독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일체이신 삼위께서 하시는 것이니까.”
여인: “하늘이란 것은 어디 있습니다?”
수소: “지적인 장소라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실재하는 이름을 지울 수 없는 무이다. 그것이 비유인 것처럼 우리에게 생각되어지기도 하는데, 사실은 비유이상의 것이라고 불려질 수 있는 것이다.”
여인: “삼위일체가 어떻게 자기를 전개해 나가는지 비유로 설명해 주십시오.”
수소: “연못에 돌을 던질 때 생기는 동심원의 이치를 연상하라. 그러나 사실은 흑인종 무어족이 아름다운 태양과 전혀 다른 것만큼이나 이 비유도 형상 없는 진리와는 다른 것이다.” 그 뒤 얼마 지나서 이 거룩한 처녀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수소의 환상 속에서 그녀는 찬란하게 빛나며 하늘의 기쁨에 넘쳐 수소에게 자기가 수소의 교훈을 따른 덕분에 얼마나 영원한 축복 상태에 들어갔는가를 보여주었다.
수소는 환상에서 깨어나면 소리질렀다. “오 하나님, 당신만을 갈망하는 자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우리는 세상에서 모든 고난을 달게 참아야겠습니다. 주께서 우리의 고통을 이같이 갚아 주시오니. 하나님이여, 우리로 하여금 이 여인의 일과 그 밖에 당신께서 자비를 베푸신 사람들의 일을 생각하여 기뻐하고 영원히 주의 존귀한 얼굴을 즐거워하게 하옵소서.”
수소는 자기가 기록한 「영원한 지혜의 삶」이라는 책의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나의 이 저서를 올바른 정신으로 읽어 주시는 이라면 그는 누구나 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 불타는 사랑과 새로운 광명과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과, 자기의 죄를 깨닫고 미워하는 마음과, 또는 은혜 속에서 그의 영이 다시 소생하는 영적 비약을 느껴 마음을 움직이게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원한 지혜의 삶」과 그 밖의 저술에서 수소는 경건의 실천에 관하여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는 신을 이해하는 길이 그리스도의 인간상에 이르는 길이라고 논하였다. 사람들은 경건하게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관하여 명상하고 항시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상기하는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수소 자신은 개인적인 경건함을 놀라울 만큼 오랜 기간에 걸쳐 실천하였다. 사과를 먹을 때 그는 그 과일을 네 개로 잘라 세 개는 성 삼위를 위해서 먹고 네 번째의 것은 성처녀 마리아가 아기 예수에게 먹인 사랑을 위해서 먹었다. 아기들은 사과 껍질을 벗길 수 없으므로 마지막 네 번째의 것은 껍질이 있는 채로 먹었으며, 크리스마스 직후에는 마지막 네 번째의 것을 전혀 먹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간난 예수는 너무 나이가 어려서 생 과일을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세 후기에 대한 가장 위대한 현대사가 중 하나인 호이징하(Johan Huizinga)는 수소와 그의 동시대인들의 행위를 의식 그 자체를 위한 의식에 대한 애착이라고 간주하였다. 확실히 후기 중세의 대부분은 헌신의 경우는 순전히 형식적인 것이어서 깊은 느낌이 결여되어 있었으나 수소의 경건심은 의심의 여지없는 정신적 기초를 갖고 있었다. 그의 일생은 그가 찾은 길에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바쳐졌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그는 생애의 중간에서 신비적이라 할 정도로 똑똑히 신을 경험하였으며 이러한 표현할 수 없는 통찰을 표현하기에는 말이란 부적합할 뿐이란 것이었다. 그가 환상을 본 후로는 더욱 더 설교와 교회 일에 열중하였다. 그는 한 번도 신학적 문제에 깊이 얽매여 본 적이 없었다. 초기의 저술에서 이단선고를 받은 엑하르트의 설명에 관해 정통적 해석을 가진 몇몇 구절을 제외하고는 오직 수소는 신학적인 사색을 피하고 신성에 관한 직접적인 신비적 인식의 기쁨을 기술하기를 택하였던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자연은 우리의 오관 너머에 있는 세계의 풍요함에 대한 비유라고 하면서 그는 풍성한 문학적 상상력으로 신의 메시지를 알기 쉽게 전하려고 하였다.
3. 요한 타울러(Johann Tauler, 1300-1361)
타울러는 1300년 경,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출생했다. 1315년에 어느 도미니크 수도원에 들어갔고, 쾰른과 파리에서 학구에 전념하여 박사학위까지 취득하였으나 신우단과 접촉하여 신비적인 체험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 유학 후 스트라스부르그에 돌아와 교회의 사제로 있다가 그 거리에서 벌어진 이단자 파문의 소란 속에 1339년 바젤로 도망쳤다. 거기서 그는 신우회라는 단체에 속한 어떤 신비적 평신도에게서 비상한 영향을 받았다. 그의 회심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듯하다. 그는 중세 독일의 신비가이지만 그의 전기는 자세히 알 수 없었다. 도미니크 수도원에 들어가 신학을 배웠지만 성 빅톨, 성 베아나 등의 신비주의에 심취하였고, 후에 스트라스부르그에 돌아와 엑하르트와 알게 되어 여생을 거기서 보냈다.
그는 영력과 지력을 겸비한 설교가로서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설교집은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 혁가들에게 애독되었다. 그의 설교의 특색은 성경을 많이 인용한 점과 어거스틴, 그레고리, 디오니시우스, 안세름, 아퀴나스 등을 자유롭게 인용한 점 등이었다. 타울러가 저술한 책은 설교, 소 논문집, 서한 등으로 된 것이었다. 그의 글은 엑하르트를 방불케 한다. 사변적(思辨的)으로는 약하나 경건면에서는 강력하다. 그는 철학자가 아니요. 실제적 인물이요, 설교자였다. 그의 사변적 글은 다만 그것을 실생활에 적용하려는 경우에 나온 말들이었다. 그가 그 시대 다른 신비가들 보다도 가장 감화력이 많은 설교자였던 까닭은 실제적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타울러는 사색가요, 설교자로서 엑하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종교개혁 당시의 신학자들에게 엑하르트보다 더 많은 영향을 주었다.
타울러가 믿은 바에 의하면 인간본성은 동물적인 감각적 성분, 합리적 성분 및 영적 성분으로 구성되고 있는데 마지막의 것은 정신의 가장 깊숙한 내부의 가장 높은 부분이었다. 어느 의미에서는 영적 성분은 가장 안정되고 충실한 것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존재의 근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는 그것은 항상 위를 향해 운동하며 우리가 스스로를 신과 결합시키는 수단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영적 생명의 자리이며 동시에 힘이다. 타울러가 심성이라고 부른 영적 성문은 천지창조 이전에 신의 마음속에 각 개인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징표로 간주될 수 있다. 아담의 타락은 인간의 의지를 부패시키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후자가 계속 인간을 신에게 매어 놓았으며 잃어버린 신성과의 친교를 회복시키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로 신은 설사 그가 원한다 해도 심성은 파괴하지 못할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 존재의 일부이면서도 동시에 신 그 자신의 존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의 설은 아슬아슬하게 이단과 접한 것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신의 전능을 의문시하고 신과 영혼간의 차이를 없애는 것 같이 생각되기 때문이다. 타울러의 저술 중 일부는 사실상 문제시되었으나 그는 엑하르트와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그의 저술은 15, 16세기를 통해 전혀 비정통적 교리의 냄새를 풍기지 않고 계속 널리 일반에게 읽혔다.
타울러는 예수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누가복음5:1-6)는 명령에서 “깊은데” 라는 것은 지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심정의 깊이” 라는 것은 지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심정의 깊이”라고 했다. 그도 엑하르트처럼 “신적 암흑”,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는 무”, “ 황량한 광야” 등에 대해서 설명했고, 하나님께서 대해 설명하기를, “신이란 모든 다를 추월하는 통일이다” 고 했다. 이 신 속에 생성과 유와 영원의 평화와 운동 등이 포괄되어 있다고 했다.
그는 삼위일체에 대해 설명하기를 “세 개의 인격은 밖으로 현현 하게 나타나는 일이 없이 아예 묵묵히 포함되어 것이다. 아들은 모든 형상의 참 형상이기 때문에 우리 ‘신의 형상(인류의 이념)을 닮아 창조된 영원의 합리적 형상(인간)’ 은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기를 갈망하고 있다”고 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세계의 창조는 신의 본성에 있어서는 필연적인 사건이었다고 말하기 보다, 신의 본성에 조화되는 것이었다고 설명할 것이라 했다. 이 세계는 현실적인 것으로 이루어지기 이전에 이미 신의 속에 그 이념이 존재하여 있었던 것이고, 이 이념 계가 삼위일체라는 수단에 의해 나타나신 것이다.
이 이념이 영원한 옛적부터 존재해 있는 것은 아들의 인격 안에 있어서이다. 이념은 언제나 살아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이념이 형상으로서 활동하고, 또는 물질의 창조 후에 사물을 초월하면서 동시에 사물 속에 내재하는 보편으로서 활동하는 것이라 했다. 그는 이런 설명을 할 때 주의 깊게 자기는 범신론자가 아니라는 점을 설명하고자 했다. “신은 모든 유(有)의 유(有)이다. 그러나 모든 것 중의 어느 하나가 아니다. 신은 모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신인 것은 아니다. 신은 몸소 그가 그 속에 내재하신 우주를 훨씬 초월해 계신 분이다.” 타울러 사상의 중심점은 “인간 심령 속에 신의 내재” 라는 교설 이다. 그는 인격 생활의 세 가지 면으로 “감각성”, “이성”, “제3인격(영적 생명, 즉 심령의 순수 실체)”을 말했다. 그는 또한 인간 속에는 지음을 받은 소지(素地)와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닌 소지(素地)가 있다고 했다. 후자는 신성의 심연(深淵)이요, 그것이 우리 속에 있으면 안될 경험적인 자기를 의미하는 것이며, 어떤 때는 신께서 바라시는 것 같은 이상적인 인간을 의미했다. 이 후자인 이상적 인간을 소위“제3의 사람” 혹은 “영의 정점”에 있는 “불티(spark)” 라는 말로 표현했다. “지음을 받을 것이 아닌 소지”는 “지음을 받은 소지를 매개로 삼아 우리에게 활동한다. “지음을 받은 소지”를 그는 “영상(lmage)" 이라 불렀다. 그것은 엑하르트가 말한 ”불티“와 동일하다. 그것은 에리게나(Erigena)의 이념과 마찬가지로 이미 창조된 것이면서 동시에 창조적 원칙이기도 하다.
마태복음 25장 6절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를 본문으로 재림 설교를 하는 중 설교의 감동이 청중을 휩쓸어 50여명이 엎드러지는 진경을 이루기까지 하였다. 타울러는 성령의 역사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단순한 신앙’ (einfaltiger Glaube)을 강조하였다. 그는 신령한 은혜와 동시에 생활의 모범을 강조한 점에서 엑카르트 보다 실제적인 신비주의자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내가 성직자가 아니고 제화 기술자라면 나는 내가 만든 구두가 모든 구두의 본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고 고백하였다. 자기 직업에 충실하는 것은 교회에 충실히 출석하는 것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외쳤다. 신앙의 생활화는 비단 노동과 직업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에도 나타나야할 것을 강조했다. “나는 이웃의 잘못을 판단하여 비판하느니 차라리 피가 나도록 내 혀를 깨물으리라. 판단은 오직 하나님께만 맡겨라. 이웃을 비평하는 습관은 자족과 교만심을 키우는 것이 되는데 그것들은 마귀에게 속한 것이다” 고 말하기도 했다.
타울러는 그의 선배 누구보다도 한층 더 심각한 죄악 관을 가지고 있었다. 죄의 본질은 자기 긍정, 즉 자기 의지요, 따라서 신으로부터의 격리이다. 그는 어거스틴이 말한 타락한 인류의 비참한 상태설을 부활시켜, “육욕과 오만이라는 자기 의지의 두가지 큰 세력이 인간의 전 성질을 침범해 버렸다. 오만이란 것은 정신의 죄악으로서 그 해독은 소지(素地)에까지 침범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죄 없는 “심령의 절정"을 인격과 동일한 것으로 보려 하지 않았다. 신으로 부터의 격리가 모든 불행의 근원이다. 그 속에야말로 지옥의 고뇌가 있다. 인간의 심령은 결코 신을 갈망하기를 쉬지 않는다. 잃어버린 자의 가장 큰 고통은 이 요구가 결코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 그는 신비가의 영적 향상의 세 단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우선 자제(自制)를 연습해서 우리의 모든 저속한 욕망이 최고의 이성에 의해서 통솔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께서는 우리 속에서 매매하는 것들이 모조리 쫓겨나기까지는 우리 영혼의 궁전에서 말씀하실 수 없다. 이 첫째 단계에서 우리는 준엄한 규칙과 훈련을 일삼아야 한다. 우리 속에 그리스도께서 진리로 탄생하시기까지는 우리는 옛사람의 규칙아래 순종하고 살 수 밖에 없다.
둘째 단계에 있어서는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사랑에 가득찬 품에 기대어 쉬듯이, 우리도 쉬지 않고 열심히 그것을 정관 하므로써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욱 높이 부르실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는 모든 형상도 영상도 모조리 버리고 다만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는 대로 맡기라. 어떤 사람에게는 영의 진동과 함께 일고, 또 어떤 다른 사람에게는 고요히 정숙하게 서서히 진행되기도 한다. 그것은 하루 이틀 사이에 되어질 일도 아니요, 1년에 되어지는 일도 아니다.
셋째 단계에 있어서, 우리의 슬픔이나 기쁨은 그리스도의 그것과 동감 공명이 된다. 주님의 지상 생활은 슬픔과 기쁨을 엇갈려 엮는 새끼줄이다. 주께서는 자신이 겪으신 이 같은 일생을 제자들에게 하나의 신성한 유언 삼아 남겨 두신 것이다.
타울러는 역사적 속죄관에 참 뜻을 두면서도 그것이 특수적 사실이면서 동시에 보편적 사실임을 보이려고 애썼다. 타울러는 “영원한 것”이란 “영원한 현재”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미래의 상벌과 지옥 불에 대해서도 말했다.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께로부터 의지 없이 떠나가는 일이 멸망의 아들의 모든 고통의 근원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랑이란 “덕의 처음이요, 중간이요, 마지막”이라고 하면서 “사랑의 본질은 전적 자기 포기에 있고 한 방울의 물이 대양 속에 흡수되듯이 우리도 자아를 신의 사랑 속에 흡수시켜야 한다.”고 했다.
수소와 동시대인인 타울러는 대조적으로 신비주의 신학을 발전시키는 데 훨씬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 타울러는 자신의 경험을 기술하는 데 침묵하고 있긴 하지만 역시 신비주의 실천가였다. 수소와 마찬가지로 그의 목표는 신비적인 성찰에의 길을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엑하르트와는 달리 신의 본질을 설명하려는 일에는 말려들지 않았다. 그의 커다란 관심은 신비적 성찰로 밝혀진 인간성의 여러 면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설교와 저술에 있어서 엄격하고 요구하는 바가 많았으나 타울러는 한 번도 수소와 같은 인기를 얻지 못하였다.
4. 루이스브렉(Jan van Ruysbroeck, 1293-1381)
루이스브렉은 소와니에(Soignie) 숲속에 있는 그룬탈(Grunthal) 수도원장이었다. 그를 가리켜 탈혼선생(Doctor of Ecstaticus)이라고 불렀다. 그의 신비적 논문은 대개 성경의 직접적인 인도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그는 별로 학식이 있는 사람이거나 명석한 사색가도 아니었다. 그는 다른 신비가들에 비하면 사색적이라기보다는 정서적이었다. 수소(Suso)가 비슷했다.
루이스브렉은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신비주의를 공부하는 자들은 크게 중시하는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는 두 가지 주된 신비주의의 흐름, 감정적 신비주의와 지적 신비주의를 한곳에 모았기 때문이다. 그는 위 디오니시우스, 어거스틴, 클레르보의 버나드, 마이스터 엑하르트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주요 저서인 (정신적 결혼 계단)은 신비가의 진보의 가장 완전한 도면 중의 하나이다. 그 세 단계는 다음과 같다고 말했다. ① 활동적 생활 ② 내적인 높은 생활, 혹은 정적 생활(이 생활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다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님) ③ 정관적 생활(선택받은 소수만이 여기에 이를 수 있다)
여기서 첫 단계인 활동적 생활의 표어로 삼는 것은 “보라. 신랑이 온다. 나와서 맞으라”이다. 신랑은 세 번 온다. 육신을 쓰고 오시고, 은혜로 우리 안에 오시고, 심판을 위해 오실 것이다. 우리는 그를 맞으러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겸손과 사랑과 정의, 이 세 가지가 활동적 생활 조직을 지지하고 있는 세 가지 덕이다. 모든 덕의 기초는 겸손이다. 거기서부터 다음 순서는 순종, 내 뜻의 부정, 인내, 우아, 경건, 동정, 관대, 모든 덕을 위한 힘과 충동, 근직, 절재, 정절이 된다.
활동적 생활 다음은 오는 둘째 단계인 내적 생활에는 세 부분이 있다. 이 때 우리 지역이 초자연적인 명확성을 가지고 빛나지 않으면 안 된다. 신랑, 즉 영원한 진리가 내적으로 오는 것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외적 생활에서 내적 생활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신랑을 영접하여 그의 신성과의 합일을 향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 번째로 정신은 내적 생활에서 정관적 생활에까지 향상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기를 초월하고 이와 같이 하나님께로 올라감에 있어 매우 단순화되고, 우리를 포섭하는 사랑이 모든 덕의 실행을 초월해서 사랑만으로 채워지게 될 때, 우리는 변화하여 신 안에 있어 자기 자신에 대해 죽는 것과 동시에 모든 개개의 개성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인 영원한 사랑 안에 우리를 자기와 합일하도록 하신다. “신과의 이 포옹, 이 본질적 통일에 있어서 경건하고 내적인 정신은, 산채로 신 안에 침몰하여 신속에 녹아 버려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런 정신은 은혜에 의해 신과 하나가 된다. 그것은 똑같은 본질이 양자 속에 있기 떄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것, 그것은 우리는 전심으로 정관 하는 것이요, 우리가 정관 하는 것 그것이 곧 우리가 있는 곳이다. 우리의 심정, 생명, 본질은 승화되어, 진리 그 자체와 합일되어진다. 이것이 신이다. 그러므로 이 같은 단순하고 전심적 정관에 있어서 우리는 신과 하나의 생명, 하나의 정신이다. 이것을 정관적 생명이라 부른다. 이 가장 높은 계단에 있어서 심령은 아무런 개재하는 것 없이 신과 합일이다. 심령은 신성이라는 광막한 암흑 속에 잠기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여전히 영원히 신으로부터 구별되어 있다. 피조물은 피조물 대로 남아 그 피조물성을 탈피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신 안에서 자아를 의식하지 않으면 안되고, 동시에 자기 안에서 자아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영생이란 것은 신을 아는 일이고, 더구나 자의식 없이는 지식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루이스브렉은 전통적으로 사용되어온 신비적 성장의 삼 단계 도식-정화의 단계, 조명의 단계, 합일의 단계를 수정하여 사용한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각 단계가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순서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단계에 다음 단계가 추가되는 것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첫 단계는 두 번째 단계에 포함되며, 첫 단계와 두 번째 단계는 세 번째 단계에 포함된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참된 합일이 비록 일시적으로 정지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미 두 번째 단계에 포함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배열과 다르다. 루이스브렉은 자기가 주장하는 삼단계를 (1) 활동적인 생활, (2) 내면 생활,혹은 동경하는 생활, (3) 하나님을 보는 생활, 혹은 관상 생활이라고 구분했다.‘반짝이는 돌’(The sparkling stone)이라는 책에서는 이러한 단계를 수행하는 사람들을 각기 충실한 종, 은밀한 친구, 그리고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다.
루이스브렉은 모든 문제를 점진적 등급으로 설명하되, 셋 또는 일곱 가지의 점진적 계단으로 말했다. 그는 사랑의 일곱 단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①착한 뜻 ②스스로 택한 가난 ③정절 ④겸손 ⑤신의 영광을 위하는 소원 ⑥신적 정관(직관, 정신의 청순, 심의의 적라의 3단계) ⑦모든 지식과 사상으로 말할 수 없고 이름지을 수 없는 초월의 단계이다.
루이스브렉은 자신이 즐겨 사용하는 비유 중 하나인 유동체라는 것을 사용하면서 사람이 어떻게 성령의 열기에 녹아져서 모든 유형의 사람들에게 흘러나가는지를 설명한다. 통일된 거룩(Holiness in unity)이란 다양성을 버리는 것, 혹은 최소한 유일자와의 연합을 반대하는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지적으로는 적나라한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접근할 때에는 “지력이 외부에 머물 때에 소원과 사랑이 안으로 돌아온다” 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정신에서 모든 피조물의 형상들을 제거한 후에 신적 암흑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의지와 관련해서 생각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뜻 앞에서 자기의 뜻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결코 세상의 것에 매달리지 않고서 모든 생각을 하나님을 행해 정렬시키는 것이 포함된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자기에 대해서는 죽고, 녹아져서 하나님께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친구들”(제2단계의 사람들)은 “자아의 일부를 그대로 보유하며,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일치 하에서 완전히 타서 무가 되지 못하지만”“아들들”(제3단계의 사람들)은 단순하게, 마치 죽은 듯이 형태가 없는 상태로 옮겨간다.“ 최고의 단계에서는“우리의 모든 능력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며 우리는 대범한 관상에 들어간다. 삼중의 단일체의 사랑의 포옹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가되고 하나는 모든 것이 된다. 우리가 이 단일체를 경험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한 존재. 한 생명, 한 축복이 된다.”
많은 다른 신비가들의 저서와 마찬가지로, 루이스브렉의 글도 읽기가 쉽지 않다. 그는 독자들에게 “여기에서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은 그것을 쉽게 이해하지 못 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경고한다.
Ⅳ. 중세 후기 신비주의 집단의 영성
1. 하나님의 벗(Friends of God)
하나님의 벗은 14세기에 라인강변에 주로 자리잡고 화란에서 바젤과 스트라스브르그까지 뻗친 광범한 지역에 집단적으로 사는 신비주의적인 단체이었다. 이들은 당시 교회생활에서 영적 고갈을 느끼고 모여든 신부들과 평신도들로 구성되었으며 성경 연구와 기도생활에 전념하였다. 경건 생활과 성별생활을 강조하였으나 현실교회를 정죄한 이단운동을 반대하였다. 그들은 적극적인 개혁운동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보상하시는 것은 선행이나 공로가 아니라 사랑뿐이며 하나님의 임재가 성례를 통하는 것보다는 순결한 마음에 이루어짐을 강조함으로서 중세 교회제도를 약화시켰고 결국 종교개혁에로의 길을 준비해 놓았다고 하겠다.
그들의 이름은 요한복음 16장 15, 6절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 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라는 말씀에서 연유되었다. 하나님의 벗의 대표적 인물은 멀스빈(Rulman Merswin)과 헨리(Henry of nordli-ngen)와 니콜라스(Nicolas of Lowen)등이 있었다.
멀스빈은 스트라스브르그에서 1307년에 태어나 사업에 크게 성공하여 개종한 후에 자기 집을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하여 세상을 등지고 찾아오는 순례자들의 안식처로 개방하며 하나님의 벗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377년에는 로마에 가서 그레고리 11세를 향하여 교회 개선을 촉구하는 탄원을 올렸다. 그 뒤로 교황과의 서신 교류를 계속하였다.
멀스빈은 주요한 저서는 Das Bannerbuchlein과 Das Buch won den neun Felsen 였다. 전자는 루시퍼(Liicifer)로부터 도망하여 그리스도의 피묻은 깃발아래 모이라는 권면이고 후자는 대화체로 쓰여진 교훈집으로 타락후에 구원에 이르는 아홉가지 단계를 바위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멀스빈의 저서 보다 애독된 책은 ‘Theologia Germanica'로서 그 저자는 알 길이 없으나 루터가 이 책을 일고 감동된 바 적지 아니하여 1516년 독일판으로 출판하기까지 하였다.
2. 공동생활의 형제단 (the Brothers of the Common Life)
14세기 말엽 화란에서는 “공동생활 형제단”이라는 경건운동의 단체가 일어났다. 이 운동의 가장에서 중요한 인물은 엑하르트 보다 한 세기 뒤에 나타나서 독일과 유럽의 신비주의를 키게 진흥시킨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A Kempis,1380-1471) 였다. 그는 수도승이었고 신비적인 경향을 띤 경건 서적들을 많이 저술하였다. 그 중에서도 그의 불후의 명작인「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 Christi)는 기독교 경건서들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항구적인 고전으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의 저서「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면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강조했다. 신학보다는 경건을, 사색보다는 예배를 강조했으며 형식보다는 내적 체험을 강조했다. “화육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적 삶의 원천이요 영감임을 보여주는데 있었다.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며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그를 사랑하고 인격적으로 친교를 나누는 삶, 이와 같은 삶이 곧 이 책이 이야기하는 내용이자 그 강조점이다. 아 켐피스가 들은 바 “주의 음성”은 「너는 내 겸손을 배워라! 먼지와 같고 티끌과 같은 네가 질그릇 같은 네 육신의 욕정들을 제압하고 겸손히 만인의 발 아래(내가 그렇게 했듯이)엎드려라. 그리고 온전한 순종의 삶을 살아라.」는 것이었다.
공동생활의 형제단이란 이름 아래 모인 이 단체는 그루트(Gerrit Groote, 1340- 1384)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하여 점차 라인강을 따라 중부 독일까지 미쳤다. 그루트는 디벤터(Deventer)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교육을 받고 콜론에서 교수 생활을 하였다. 1374년에 그의 친구 헨리(Henry of kolcar)를 통하여 개심의 체험을 가진 뒤 문니 크하이젠(Munni khuizen) 수도원에 들어가 3년간 수도생활을 하였다. 당시 교회의 타락을 보고 개혁의 필요를 통감한 그는 수도원에서 나와 네델란드 전역을 누비며 성직자들의 회개를 외쳤다. 1374년에 아버지의 유산으로 받은 자기 집을 내놓고 과부를 위한 모자원을 만들었다. 이 모자원 경영에서 얻은 체험을 가지고 초대교회와 같은 형제단을 만들어 공동생활을 영위하며 노동과 기도와 성경 연구를 권장하였다. 형제단에 가입하려는 자에게 서약을 하지 않게 하고 또 자기 직업을 그대로 계속하면서 자유스럽고 형제와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생활을 하게 하여 많은 추종자들이 생기게 되었다. “공동생활 형제단”의 속했던 또 하나의 대표적 지도자는 베셀 간스포르트였다. 그는 교회의 의식과 성례의 무용성을 지적했으며 사죄와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위한 신앙과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뿐이라고 했다. 베셀이 로마를 방문했을 때 교황 식스투스 IV에서 면죄부의 무용성을 말하며 탕자가 아버지의 은혜를 받는데 그런 면죄부가 필요 없었다고 지적했다. 베인톤 교수가 지적한대로 “베셀은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선구자였다.”고 하겠다.
형제단의 가장 큰 공헌은 교육사업이었다. 타락한 교회의 개혁은 교육을 통하여 가능한 것으로 믿은 그루트의 철학은 눈부신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아켐피스(Thomas a kempis)의 전기에 의하면 그루트는 그의 식당에도 책을 가득 진열하여 육의 양식과 영의 양식을 함께 섭취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설교하러 떠나는 여행길에도 너무나 많은 책을 지니고 떠나곤 했기 때문에 빈축까지 살 정도였다.
형제단이 있는 곳마다 학교를 세워 바른 성직자 양성에 힘썼고 그 다음 사회의 지도자 양성에 주력했다. 처처에 세워진 학교에는 구름떼 같이 학자들과 학생들이 모여 들었다. 헤르조겐부쉬(Herzogenbusch) 학원에서는 1200명의 학생이 몰렸고 헬라어 코스에는 1424명이나 등록했다. 리크(Liege) 학원에는 1524년에 최고의 수준에 이를 때 1,600명의 학생들이 수학했다.
드벤터(Deventer), 에라스무스(Erasmus)같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모국어를 사용하여 교육하되 복움주의 신학과 경건주의 생활을 훈련시켜 종교개혁의 터전을 닦아놓았다. 루터가 이 운동을 두 번에 걸쳐 칭찬한 것은 결코 과찬이라 할 수 없는 일이다.
Ⅴ. 신비주의가 종교 개혁에 미친 영향
16세기의 제도개혁자들은 세 가지 지적 전통에 의존하였다. 그것들은 이탈리아로부터 발생한 르네상스 휴머니즘과 독일 라인지대의 신비주의와 중세 후기의 명목론인 것이었다. 이 셋이 다 같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체계보다 더 개인적인 인간 경험의 이해에 대한 기반을 찾아내려는 시도했으나 주목할 만한 점에서 대단한 상이하였다. 만일 그것이 종교개혁의 대사상가들에게 어떠한 설득력을 갖게 되었는가를 우리가 알려면 그 하나 하나는 고유한 언어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신비주의의 본질은 개인의 궁극적 실재를 직접 몸소 경험하는 데에는 교회라는 제도의 중개 없이 혹은 외부적 감각으로 지각되는 증거의 중개 없이도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하나의 심각한 철학으로서는 단순히 정서적인 신앙심 이상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으로 몸소 알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이 제시한 것은 종교생활을 제도적으로 규제하는 데 대한 잠재적인 도전이다. 왜냐하면 신비주의자는 사회 일반인 전체에게는 활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 루터에게서 보여지는 신비주의적 경향은 번개에 접해 공포심을 느끼고 수도사가 될 것을 성 안나에게 서원했다고 한다. 자신의 생명을 건 맹세였는지 루터는 곧 수도사가 되었고, 자신의 구원을 위한 순례의 길을 걸었었다. 그 과정 속에서 루터에게 건너야만 할 강으로 다가온 것은 바로 신비주의였다. 물론 중세의 신비주의는 후기에 등장한 것은 아니다. 중세의 전성기였던 12,13세기 독일 각지에서 가장 생생하게 일어났던 운동이 바로 이 신비주의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신성의 시연 속에 자신을 망각하고자 하는 신비주의자의 길에 접해 다음과 같이 한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접근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모르는가 우리 연약하고 무지한 피조물들을 하나님의 경이의 측량할 수 없는 빛에서 발휘되는 신비한 위험을 탐구하고 이해하려 든다. 우리가 접근하는데 아니 우리가 접근할 준비를 압도하며 박살내는 것은 또 무슨 경이인가!” 이로 인해 루터는 곧 성서 연구에로 발길을 옮기게 되고, 이후 그에게 수도회 내의 ‘탑의 체험’을 하게 되었고 이 같은 루터의 체험에서 그가 하나님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루터의 감정적인 측면의 경향이 보여지며, 이는 특히 엑하르트의 신비주의가 보여주는 감정적 차원과의 유사성을 갖고 있다고 할 것이다. 또한, 신에 대한 열망은 곧 신비주의의 주요 동기 개념이며 이는 곧 바로 하나님과의 합일, 도는 연합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 연합은 루터의 구원론에 있어서 성례전 제도에 대한 불신과 중개 불필요성에 대한 신학적 개념과 관련된다고 보여진다. 오직 믿음에 의한 구원이라는 루터의 이신득의는 확실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어떤 형식적인 중개도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비주의자들이 보여주는 신과의 직접적인 연합이 루터와의 접촉점 존재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신비주의자들은 인간의 내면 속에 자리잡은 하나님의 은총, 즉 신의 내재와 관련하여 죄에 대한 회개와 깊은 명상을 통한 신비적 체험의 강조로써 스콜라 철학에 바탕을 둔 중세의 사상과 먼 거리를 유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확실히 신비주의 사상은 스콜라주의와 연계를 맺고 있었으나, 스콜라 사상이 강조하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는 별도로 진행되졌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합리적 사유보다는 헌신을, 외적인 의식이나 활동보다는 영혼의 정화를, 신앙에 대한 지적 동의보다는 내면적 체험을 내세우는 입장이라고 보여진다. 이러한 사상 내에서 성례전 제도를 약화시키고 공격할 수 있는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로마 카톨릭의 성례전 중심적 경향에 대해 엑하르트는 오히려 형식적이지 않은, 그리고 그 어떤 중개도 존재치 않는 하나님과의 연합을 추구했던 것이다.
이러한 연합에 있어서 그 추상성과 비의성을 벗을 수 있는 길은 엑하르트에서 발견할 수 있기에 엑하르트의 루터와의 비교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할 것이다. 엑하르트의 신학은 이성의 측면을 거부하고 감성에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종교개혁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루터가 신비주의자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어떠한 합의도 이루어내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신비주의 없이는 청년 시절의 루터가 있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신비주의적 경향이 없었으면 루터는, 그의 특별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 체험의 갈망을 통한 신앙을 전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신비주의는 로마카톨릭의 성례전 제도와 사제제도와는 대조적인 하나님과 인간관계의 직접성을 강조했다. 의식화되고 규정화된 하나님이 아니라 무한한 사랑으로 대표되는 인격적 신개념이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 성례전이나 교회의 계급제도의 도움 없이도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제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성례전제도가 전체적으로 흔들렸다. 이러한 신비주의는 교회의 권위를 흔들어 놓는 결과 이외에 스콜라주의의 몰락에 한 몫을 담당했다.
이렇게 신비주의자들이 로마카톨릭과는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었다면, 신비주의자들과 16세기 종교개혁가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보여진다. 첫째로 개인적 종교체험에 대해 깊이 몰두해 있었다. 기성교회의 형식화된 의식주의적인 관례들에 대해 불신감을 갖고 있었다. 둘째 진지하고 깊은 경건성을 소유하고 있었다. 셋째 중세 스콜라주의 신학에서 보여지는 지성주의적 경향에 불만을 토로했다는 점이다. 특별히 'sola gratia'와 ‘의’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라는 측면과 인간의 공로 개념의 거부라는 측면에서, 신비주의자들과 종교개혁가들을 비교할 때, 후자가 전자에 비해 표현에 있어서 보다 선명성을 지녔을 뿐이지 결코 위의 두 개념이 로운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 전체적인 분위기 속에서 엑하르트는 정말로 그의 사상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으며, 이에 따라 그의 신비주의 사상은 각계 각층의 민중들에게 받아들여졌다. 그의 수도회의 많은 동료회원들은 그의 정신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들 중에서 중요한 두 사람은 요한네스 타울러와 수소이다. 그리고 타울러의 의지력과 내면성은 루터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었다.
타울러와 “하나님의 벗”회원들이 적극적인 개혁운동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보상하시는 것은 선행이나 공로가 아니라 사랑뿐이며 하나님의 임재가 성례를 통하는 것보다는 순결한 마음에 이루어짐을 강조함으로서 중세 교회제도를 약화시켰고 결국 종교개혁에로의 길을 준비해 놓았다고 하겠다. 특히 루터는 타울러의 설교를 즐겨 읽었으며 그에게서 많은 감화를 받았다. 타울러는 사색가요, 설교자로서 엑하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종교개혁 당시의 신학자들에게 엑하르트보다 더 많은 영향을 주었다.
루터가 신약 성경을 번역할 때 직업을 사명으로 한 것은 결단코 우연한 것은 아니니라. 단순한 신앙과 신앙의 생활화를 강조한 타울러의 사상이 루터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도 남았다. 스팔라탄(Spalaten)에게 보낸 편지에서 루터는 타울러의 신학만큼 복음적인 것은 일찍이 없었다고 칭찬한 것으로 보아 ‘루터의 타울러이즘’ (Taulerism)은 ‘루터의 옥캄이즘’(Occamism)에 못지 않게 강한 것을 우리는 엿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엑하르트의 정신적인 방향에 놓여 있는 것은, 루터가 간행한 「독일 신학」과 리스브뢰크의 요한네스의 여러 저작들이다. 따라서 계보적 연계성으로 보아 그 가능성은 타울러에서 더욱 뚜렷해진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타울러와 루터간의 관계를 핵심으로 상정하지 않은 이유는, 중세 후기 신비주의의 대표자로서는 다분히 엑하르트가 천거되고 있으며, 중세 후기 신비주의도 엑하르트에 그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관계성은 엑하르트, 「독일 신학」, 그리고 루터라는 구도를 보여주며, 「독일 신학」은 엑하르트와 루터간의 연결고리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우선, 「독일 신학」의 저자가 엑하르트에게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에 대해서 헤글룬트는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과 사상사적인 측면에서도 「독일 신학」이 엑하르트의 주변인물에 의해 14C에 집필된 것으로 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엑하르트와 「독일 신학」의 연결의 타당성을 획득하게 된다. 루터도 “지혜와 지식의 보배로 가득찬”, “성경가 어거스틴 말고는 하나님, 그리스도, 인간 그리고 만물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관해 이 책만큼 나의 관심을 끈 것이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내용상으로 보아도, 엑하르트와 루터간의 유사점이 하나님의 행위를 두 사람 모두가 강조한다는 점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연결은 독일신학의 매개적 역할을 통해 가능성이 뒷받침된다. 엑하르트의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신비주의는 하나님의 행위에 우선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독일 신학」에서도 하나님과의 연합과정에서 하나님의 행위성으로 드러나고, 이것이 다시 루터에게 연결되어 루터의 관심을 끌게 충분했다는 맥락으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엑하르트와 루터 사이에 매개물 또는 연결고리가 「독일 신학」이라는 것은, 우선 셋이 함축하고 있는 하나님의 경험 가능성에 대한 주장들을 고찰함으로 중명된다고 본다. 엑하르트가 하나님은 이 세상 내에서와 이 세상적인 것을 통해 경험할 수 없는 무경험성을 주장했다고 한다면, 「독일 신학」은 하나님을 다각적인 세상 현실과 대치시키고 있고 모든 이름을 초월한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루터에 있어서 “숨겨진 하나님”의 개념은 놀랍고 신령한 체험으로 유사하게 반영되고 있다. 이를 정리하면, 엑하르트의 현세 내의 하나님의 무경험성, 「독일 신학」이 함축하는 하나님의 현세 초월성, 그리고 루터의 숨겨진 하나님이라는 사상적 매락의 구도를 그릴 수 있다. 따라서, 최소한 하나님의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엑하르트와 루터 사이의 연결이 「독일 신학」이라는 매개로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경험성에 대한 셋의 유사한 경향은 하나님의 행위와 연결된다. 하나님과의 연합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이 엑하르트의 주장이다. 엑하르트가 궁극적으로 만인들에게 외치고 싶었던 것은 형식성을 탈피한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신비적 요소라는 점은 앞에서 고찰되었던 것이고, 이 하나님의 연합이 단지 추상적이고 비의적인 개념이 아님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연합에서 엑하르트가 주장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은, 이 연합이 인간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서 가능하게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연합은 하나님의 행위라고 엑하르트는 단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행하심에 근거한다는 신학은 「독일 신학」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는 「독일 신학」의 다음 부분에서 보다 현저하게 드러난다:
…진실로 이것이 참되고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사랑, 동경, 그리고 그의 목적을 정하시는 길이며,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하시는 길이다. 자기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 특히 하나님 앞에서 그 공로를 인정 받을 수 있는 만큼 선을 스스로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피조물을 어리석은 자이다.
인간은 구원을 이룰 만큼 선을 행할 수 없으며 공로를 인정받을 수도 없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며, 발견케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나님의 행하심이 구원의 영역에서 두드러지게 되는 것이다. 이 구절은 아마도 「독일 신학」의 서문을 작성하여 간행했던 루터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루터도 결국은 주권적인 하나님의 행하심에 초점을 맞추는 의인론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루터가 내세운 의인은 죄인이 비록 불의하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인하여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행위가 된다. 이러한 루터의 의인론이 엑하르트가 내세운 하나님의 행하심과 연결점이 있음을 유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비주의를 심리학적 근거에서 부인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애의 어느 시점에서 직접 감각적인 혹은 “객관적”인 관찰로써는 알아 볼 수 없는 느낌이나 통찰이 있었음을 의식하고 있다. 소화불량에서 환각제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자연적 원인이 이러한 느낌을 설명하는 인용될 수 있으나 그 정확한 내용은 그다지 쉽사리 합리화될 수 없을 것이다.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그 느낌이 일상적인 존재물을 넘은 차원 높은 실재를 말해주는 것이겠지만 참다운 신비주의자에게는 생활 그 자체보다는 더 참다운 것일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체험은 종교적 충동의 핵심에 매우 가까이 있는 것이므로 어떠한 종교도 그 체험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관심들은 신비주의자들과 후의 종교개혁자들간의 연결을 예증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좀더 깊은 공동의 가치관과 사상체계가 가로놓여 있었다. 엑하르트와 그의 추종자들이 믿은 바에 의하면 궁극적 실재에 대한 인식은 주로 불가피하게 개인적인 것이며 쉽사리 질서정연한 세계에 들어맞지 않는 것이었다. 루터에게 영감을 주고 제도적 교회와 결렬하도록 하게 안 것은 바로 이러한 비전이었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14, 15세기에 활발했던 유일한 개혁세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두 중요한 지적 운동인 명목론과 휴머니즘과 공존하였는데 이러한 두 운동은 대체로 신에 대한 직접적 경험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으며 사실상 신비주의자들의 주장을 불신하는 경향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세 운동은 다같이 중세 후기의 합리주의에 대한 불만을 나타냈으며, 그 것이야 말로 16세기 종교개혁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그들의 공동 주제였던 것이다.
결 론
이상으로 중세 기독교 신비주의에 관해서 그 흐름과 영향을 살펴보았다. 신비주의적 성격은 성서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며, 특히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의 기록에서 볼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신비적인 성격이지만, 신비주의가 신학적으로 취급되어진 것은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고 교부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이러한 신학적이고 이론적이었던 신비주의는 고대를 지나 중세 수도원 운동시대에 이르러 실천적이고 구체적 생활로서 옮겨져서 개발되고 발전되어서 중세시대에는 이러한 신비주의의 발전과 부흥을 이루었다. 특히 중세 후기에 독일의 라인강변의 물줄기를 따라 일어난 신비주의 운동은 혼탁하고 부패하여서 형식적이며 제도적인 로마 카톨릭교회와 그 신앙적 시대에 엑하르트와 수소, 타울러, 루이스브렉과 하나님의 벗들과 공동생활 형제단들에 의해 전승되어지고 실천되어진 신비주의적 경건은 그 시대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되어졌고 이러한 신비주의 운동이 종교개혁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극단적인 신비 현상의 체험에만 치우쳐 비윤리적이고, 반역사적이며 탈 현실적인 빗나간 신비주의는 비판받기 마땅하고 극단적인 요소와 감정적인 면에 치우치거나 직관만을 중시해서 제도와 전통과 외적 요소를 무시하고 성서를 벗어나 범신론적 경향이나 현실을 무시하는 고립적인 면은 분명히 경계할 요소이다.
그러나 신비한 체험의 현상을 보고 위험하고 비 신앙적 작태라고 마냥 배척한다면 교회는 “신앙 없는 신학”으로 보여지고 메말라 갈 것이다. 오늘날 지식 산업사회 또는 정보화 사회, 포스트 모던의 시대라 하여 새로운 가치의 패러다임이 요구되는 현실속에서 우리 인간들은 변화에 적응하기에 급급한 신앙생활은 하지는 않는지, 그리고 너무나 지적인 신앙과 신학의 유희적 감각에 빠지지 않았는지 재고 해봐야할 것이다. 그러므로 중세 후기 역사적 암흑기에 일어나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사회변혁의 밑거름이 되고 새로운 힘을 불어 넣어준 중세 후기 신비주의 운동에서 오늘날 우리는 신비주의의 바람직한 영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는 중세신비주의가 발흥되기까지 신비주의의 기원과 유래, 그리고 중세 후기 신비주의자들의 영성과 그 영성이 종교개혁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였고, 다음으로 오늘날 목회 현장에서 신비주의의 긍정적인 요소가 발전할 수 있도록 신학적 연구를 계속하여 한국교회가 올바르게 하나님의 뜻을 찾고 이룰 수 있는 풍성한 교회가 될 수 있는 방향에 관하여 다음 기회에 계속 연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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