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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십자가 신학

하나님아들 2024. 5. 13. 23:11

바울의 십자가 신학 -십자가 신학의 중요성과 교회론적 함의-

 

오선균

 

Ⅰ.들어가면서

  교회와 교인을 상징하는 십자가는 오늘 우리의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저녁 대도시의 고층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면 주의 상가의 광고 간판을 압도하는 우뚝 솟은 빨간 불빛의 십자가를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외모를 아름답게 꾸미는 장식용 금은 십자가를 몸에 걸고 다니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오늘날 십자가는 이처럼 우리의 삶과 너무 밀착된 채 ‘자연스럽고 일상화 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심하다. 십자가가 너무 가까이 있고 일상화된 나머지, 이에 대해 뭔가 심각한 것을 연상시키는 것이 더 이상 자연스럽지 않게 되었다.1)

  이러한 오늘의 우리 상황과 달리 예수 당시 로마법에 따르면 십자가 처형은 가장 혐오스러우며 잔혹한 사형 제도로 알려져 있었다.2) 그래서 어느 누구도 십자가를 자연스럽고 일상화된 것으로 여긴다든지 심지어 장식품으로 사용될 수 있는 뭔가 우아하고 아름다운 것과 연결짓는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3) 나사렛 예수의 끔찍한 죽음과 관련된 십자가 처형을 구원 사건과 연결시킨다는 것은 한마디로 ‘미친 짓’에 불과했던 것이다.4) 그런데 이와 같은 십자가 처형 사건을 초창기 교회는 심오한 신학을 표현하는 중요한 신학적인 개념(theologia crucis)으로 발전 시켰다. 십자가의 신학적 개념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강조한 ‘교회의 신학자’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다름 아닌 사도 바울이다.5) 신약성서 기자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한 바울은 이 개념을 자신의 신학 중심에 놓았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바울신학을 결정짓는 핵심 주제로서 바울 선포의 다양한 내용과 직결되어 있다. 예컨대 바울의 칭의론과 율법 이해 또는 죄론 등은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의 십자가 신학은 그의 신학을 이해하는 열쇠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중요성에 걸맞게 바울의 십자가 신학과 관련하여 서구에서는 수많은 성서학적 연구가 있었다.6)

  오늘날 우리 교회는 십자가의 고난의 측면을 강조하여 선포하기보다는 영광과 축복의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십자가 신학은 이러한 우리 교회의 모습에 자기 반성의 기회와 아울러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본고는 바울 신학의 중심에 있는 십자가 신학에 대하여 중요한 구절을 중심으로 요약하여 다루고자 하며, 끝으로 바울의 십자가 신학으로부터 도출되는 교회론적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Ⅱ.십자가 신학의 뿌리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예수 십자가 처형을 죄인 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 사건으로 증거함으로써 십자가 신학을 최초로 발전시킨 사람은 바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원시 그리스도교 가운데 십자가 신학에 관한 진술을 한 최초의 증인이 다름 아닌 바울이기 때문이다.7) 그런데 바울의 십자가 신학은 그리스도 신앙의 선배들로부터 바울이 물려받은 복음 전승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에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1-7)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하여 설명하는 15장의 도입부를 이룬다. 여기에서 바울이 고린도교회 설립 무렵 자기에게 전해 내려온 복음에 관한 전승을8) 인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에게 “전한”(1절,3절) 복음의 내용이 자신이 “받은 것”(3절)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받다’와 ‘전하다’라는 동사는 유대인들의 전승과정을 나타내는 전문 용어에 해당되는 표현이다. 게다가 바울이 다른 서신에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 용어들이 여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본문은 의심의 여지없이 바울 이전의 전승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9)

  이 전승의 범위에 대하여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나, 인용되고 있는 전승의 내용은 대체로 3절 후반에서 시작하여 5절까지만 해당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6절 이하의 문장은 더 이상 동사(전하였노니)에 종속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부분 6-8절은 바울의 표현으로 여긴다. 바울이 전해 받은 3절 후반-5절까지의 진술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2개의 잘 짜여진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십자가와 부활을 구원 사건으로 선포하는 이 양식문은 현재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가장 이른 시기에(바울보다 앞선 시기)에 형성된 예루살렘 교회 초창기의 ‘신앙 고백문’으로 간주되고 있다.10)

  이 본문의 3절 후반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라고만 언급하지 십자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는다. 이를 빠뜨린 것은, 수치스러운 사형 제도에 관한 언급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기 위해서라고 보기 어렵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사실일 뿐만 아니라, 당시 십자가에서 달린 저주받은 죽음을 구원사건으로 파악하려는 신학적 관심이 아직 자리 잡지 못한 것이 그 이유라고 생각된다.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다름 아닌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키며, 이것은 우리의 죄를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이 증언을 수용하여 자신의 십자가 신학의 토대요 복음 선포의 중심으로 삼았던 것이다.11)

 

Ⅲ.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 - 바울 신학의 중심

1.십자가의 복음 - 바울 선포의 내용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사도로서의 소명을 받았으며(고전 15:8 이하; 갈 1:13 이하), 이 소명에 근거한 이방 선교의 사명을 갖고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고자 하였다. 이때 바울이 전한 복음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다. 십자가의 말씀은 곧 바울이 선포한 복음의 내용을 나타낸다.

  바울 서신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된(50년경)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해 보낸 서신 가운데 바울은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살전 4:14)라는 진술을 하고 있다. 이 간단한 진술은 나사렛 예수의(부활 사건과 더불어) 십자가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을 하나로 묶어 주는 신앙과 복음의 내용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몇 년 뒤에 기록된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도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선포에 대하여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고전 1:23)라고 한마디로 말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진술을 통해 십자가 사건을 가리키는 ‘예수의 죽음’이 바울이 선포하는 신앙의 핵심 내용에 속하며 바울 신학의 중심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로마서에선 복음이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다(롬 1:2-3). 이때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함축한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갈 3:1)만을 전하기를 원한 바울은 십자가에 달린 자를 주님으로 선포하며,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선언한다(고전 1:24). 그런데 바울이 강조하는 십자가 사건은 종말론적인 구원 사건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단순히 골고다에서 일어난 예수의 십자가형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 활동으로 확신하였다.

 

2.하나님의 지혜로서의 십자가 - 고린도교회를 중심으로

1)고린도교회의 위기 상황

  바울신 가운데 특히 고린도전서는 초창기 헬라 문화권에 속한 도시 교회가 안고 있던 문제와 어려움을 이해하는데 더 없이 값진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래서 바울에 관한 고전적인 단행본을 낸 귄터 보른캄(Gunter Bormkamm)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바울 서신만큼, “초기 기독교 문헌 가운데 어느 문서도 최초 헬라 교회의 하나로 보이는 교회의 삶과 위험에 대한, 특히 바울이 사도로서 감당해야 했던 구체적인 과제와 투쟁에 대한 이처럼 직접적이며 놀라울 정도로 풍부한 상을 제공하는 문서는 없다.”고 말했다.

  고린도에서 선교를 시작하였을 때 어떤 이유에서인지 분명히 밝히기 어려우나 바울은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 2:3)고 증언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린도라는 지역이 선교하기에 그다지 용이한 지역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울이 숱한 고생 끝에 이곳에 교회를 세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울이 숱한 고생 끝에 이곳에 교회를 세웠다는 사실을 ‘해산’(고전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에 비유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초창기 교회 개척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바울은 교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는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강조하였을 것이다 어느 정도 교회의 기초가 잡히자 바울은 동역자에게 목회를 맡기고 자신은 또 다른 선교 지역을 향해 떠난 상태에 있었다.

 

2)지혜의 규범으로서의 십자가(고전 1:18-25)

  고린도교회에 벌어진 분쟁의 배후에서 바울은 ‘사람의 지혜에 근거한 믿음’(고전 2:5) 또는 ‘세상의 영을 받은 것’(2:12)이 문제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아직 부족한 미성숙한 믿음’(3:1)으로 인해 그 모든 분쟁과 갈등이 교회 안에 일어난 것이라고 보았다. 바울이 복음에 대한 참된 이해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된 까닭은 고린도 교회에 만연된 그릇된 신앙 때문이었다. 교인들은 바울이 전하여 준 ‘신앙고백’(고전 15:3b-5)을 오해하여 영적인 열광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즉 부활과 영광의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써 지혜와 권능을 지금 여기서 충분히 받아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한”(고전 4:8) 상태에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식이 있다고 자만한 가운데(고전 8:1) “모든 것이 가하다”(고전 6:12, 10:23)고 확신하여 음란과 우상숭배 등의 일을 거리낌 없이 저질렀던 것이다. 결국, 부활의 주님을 믿음으로써 종말에 수여받게 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로 지금 이 땅에서 누리고 있다는 열광주의가 고린도교회에 만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바울은 복의 진리가 무엇이며 바른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한 가르침을 분쟁에 빠진 고린도 교인들에게 제시하고자 한다. 그래서 바울은 지식이 있다고 자랑하는 고린도교회 지혜의 교사들에 대항하여 십자가의 신학을 고린도전서 1장 18-25절에서 전개시킨다. 십자가 신학의 핵심은 ‘십자가의 말씀’에 관한 것이다.

  고린도교회 내의 분쟁 가운데 바울은 어느 파당도 두둔하지 않고 모두를 비판하는 가운데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내세운다.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을 구분하고 있는데,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나름대로의 표상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상이하나, 십자가를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서로가 일치한다. 유대인은 하나님을 강력한 왕으로 생각하기에 왕적 권세의 표적을 구하는 반면, 헬라인은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세상 원리를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세상의 지혜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둘 다 나름대로의 규범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증거를 확보하고자 하는데, 이것은 결국 십자가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세상 지혜를 찾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23절)를 선포한다. 인간의 구원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 달려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바울은 십자가의 말씀을 무엇보다도 강조함으로써 고린도교회의 분쟁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한마디로 바울은 참된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말씀을 고린도교회에 분출된 심각한 신앙의 문제를 해결하고 결정짓는 ‘규범(kriterium)'으로서 제시하고 있다.

 

3.율법과 대립된 십자가 - 갈라디아교회를 중심으로

1)갈라디아교회의 위기상황

  갈라디아서는 격양되고 흥분된 사도 바울의 마음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서신이다. 마치 적대자와 생사를 놓고 벌이는 격렬한 전투에 비유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서신을 가리켜 ‘투쟁 서신’이라 부르기도 한다. 바울이 적대자와 벌이는 격렬한 논쟁은 교회 내적인 싸움이었다. 이것은 바울의 사도직을 부정하면서 바울과는 다른 입장을 표명하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싸움이었다. 이들 바울의 적대자들은 외지 출신의 선교사로서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유대 전통을 여전히 중시여기는 유대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이방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이방인에게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바울의 사도직을 공격하는 이들 적대자와 벌이는 바울의 논쟁은 갈라디아서 1장 1절부터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분이 어느 인간으로 유래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또한 다른 서신들이 서언에 이어서 교인들에 향한 감사의 말과 함께 하나님을 높이는 찬송의 말을 일반적으로 하나, 이곳에서는 곧장 갈라디아교회에 대한 소식을 들은 바울은 이해할 수 없는 당혹감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바로 이런 당혹감에 흥분된 바울은 갈라디아교회를 향한 서신을 썼던 것이다.

 

2)칭의론의 전제로서의 십자가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이른바 ‘칭의론(Rechtfertigungslehre)'이 최초로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는 서신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여기에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써는 어느 누구도 의로워질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 인간을 지배하는 죄의 세력을 말미암아 율법은 구원의 길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전통적인 유대 사고를 극복하고 있다.12) 이어지는 20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삶을 포함하여 의롭다 함을 얻은 죄인의 삶은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에 근거한다는 점을 밝힌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유대주의자들이 자기 명성을 구하는 것과 달리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명성을 구하는 일과는 정반대가 된다.13) 십자가를 통하여 신앙인은 세상에 대하여 죽었으니, 율법의 의를 구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해야 할 것을 말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인간이 의로워지고 구원을 얻는 일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하여 가능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과 실존의 근거 역시 새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찾고 있다(갈 6:15.17). 율법을 강조하는 적대자들과의 논쟁 가운데 바울은 십자가가 칭의론의 전제라는 사실을 밝히고자 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칭의론이 십자가 신학과 밀접히 연관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14)

 

4.새로운 실존의 근거로서의 십자가

  신약성서 기자 가운데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바울처럼 강조하여 지적한 사람은 없다. 바울은 모든 인간을 예외 없이 죄인으로 이해하였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란 구체적인 죄 된 행위를 저지름으로써 죄인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의미에서 인간은 불의하며 죄인이라고 간주하였다. 인간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운데 자기를 주장하는 존재로 파악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9절) 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10절)고 선언한다. 죄의 결과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으며(롬 3:19)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말한다(롬 1:32). 이러한 죄인 된 인간에게 십자가는 구원을 선포하며, 십자가 선포는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선언한다(고전 1:18b, 21b). 그리하여 바울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은 자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을 뜻하며,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은 율법에서 자유로운 새로워진 실존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새로운 실존의 근거라고 강조하는 바울은 십자가를 자신의 사도 됨을 인정하는 표징으로 확신했으며, 십자가로써 자신을 교회의 그릇된 열광주의와도 구분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의 참된 실존은 십자가에 근거한 실존이라는 사실을 바울은 어느 누구보다도 강하게 강조하였다.

 

Ⅳ.십자가 신학이 담고 있는 교회론적 합의

  우리는 위에서 바울의 십자가 신학을 주로 고린도교회와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서신을 중심으로 다루었는데, 앞서 살폈듯이 이들 교회는 당시 심각한 교회 내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바울 신학의 중심에 위치한 십자가 신학은 교회론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십자가 신학과 교회론과의 접촉점은 무엇보다도 세례 이해 가운데 잘 드러난다.

로마서 6장 3-4절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3장 26-28절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고린도전서 10:16-17 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이처럼 당시 갈라디아교회의 문제(율법과 복음의 갈등)와 고린도교회의 문제(하나님의 지혜와 세상 지혜와 갈등)에서 불거진 신학적인 문제를 바울은 십자가 신학의 배경 위에서 해결하고자 하였으며, 동시에 십자가 신학적 시각을 통해 교회의 본질을 밝히고자 애썼다고 말할 수 있다.

 

Ⅴ.나가면서

  우리 기독교가 무속 종교의 복 사상을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축복 등에 대한 가르침과 잘 조합하여 “축복을 심령의 가난보다, 부귀영화를 고난보다 정도에 지나치게 중요시하게 되었고, 이것들을 강조하는 정도에 따라 교회의 성장이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고 누군가 진단한 적이 있다. 또한 혹자는 한국 교회를 가리켜 “십자가를 잃어버린 교회”15)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진술은 대체로 한국 교회의 근본 문제점 가운데 하나로 지적되고 있는 이른바 ‘기복 신앙’을 염두에 두고 있다.16) 물론 복 신앙 자체를 비판적으로만 볼 수도 없고 보아서도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은 궁극적으로 구원을, 다른 말로 하자면 ‘천국의 영광’을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구원과 영광은 ‘(축)복’이란 개념과 연결지어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구원과 영광의 궁극점에 도달하기에 앞서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바울을 통해서 배울 수 있다. 그 길은 다름 아닌 십자가의 길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삶과 죽음을 감당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의 우편에 오를 수 있었다.

  비록 바울이 고난을 신성시하거나 미화시키는 고난의 신학을 발전시키지는 않았으나, 그가 강조한 십자가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 주고 있다. 십자가 신학의 정언적인 말씀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업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다. 동시에 십자가 신학은 이를 듣는 오늘 우리를 향한 명령도 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고난의 길인 십자가의 길을 가라는 명령이다. 그러하기에 바울은 교회와 교인들이 겪는 고난을 가리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증거”라고 말할 수 있었다(살후 1:4-5). 이처럼 고난과 십자가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깨달았던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후 모진 고난과 박해를 거쳐 죽기까지 복음 전파를 위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침으로써 신앙적인 삶의 본질을 보여준 그야말로 위대한 사도였다.

  바울에 앞서 이미 예수님은 이렇게 강조하였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cf. 마 10:38, 눅 14:27). 또한 마르틴 루터는 “하이델베르크 논쟁”(Heidelberger Disputation, 1518년) 가운데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crux sola est nostra theologia) 라고 십자가 신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이 표현으로써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하게 하는 복음이 중세 교회의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과 대립되는 종교 개혁적 통찰을 나타내고자 하는 가운데 십자가 신학을 개혁 신학의 핵심 프로그램으로 발전시켰다. 이처럼 십자가 신학은 예수와 바울 그리고 루터를 거쳐 우리 교회에까지 면면히 흐르고 있는 개혁 신학의 정수를 나타낸다. 오늘 우리의 교회는 이러한 개혁 신학의 소중한 정신을 되살려 다시 개혁하는 교회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1) 19세기말 서구의 세속화된 기독교 세계를 염두에 둔 니체(Fr. Nietsche)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상당 부분 오늘 우리 사회에도 해당될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기독교적 어휘 체계에 대하여 무감각해진 현대인들은 고대의 미각에 있어서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이란 양식의 파라독스에 담긴 이 무시무시하며 실로 엄청난 요소에 대하여 더 이상 아무 것도 느끼지 아니한다”(Jenseits von Gut und Bose, Ⅲ, 46 J. Moltmann, Der gekreuzigte Gott ; Das kreuz Christi und Grund und kritik christlicher Theologie, Munchen, 1972, pp/ 37f에서 재인용).

2) 로마 시대의 십자가 처형에 관해, M. Hengel, Grucifixion(Phiadephia: Fortress, 1977)(=『십자가 처형』, 김명수 역, 대한기독교서회, 1982)을 참조하시오.

3)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표시와 상징을 사용하였으나, 십자가를 상징으로 이용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 알려져 있는 가장 오래된 십자가 형상은 로마 팔라틴에서 유래한 3세기경의 벽화인데, 당나귀 머리를 한 사람이 십자가에 매달려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그리스도인을 비웃는 스케치이다(E. Dinkler, Signum Crucis, Tubingen, 1967, pp. 150-153, 그림 33a).

4) 2세기 때의 그리스도교 변증가였던 저스틴(Justinus, 165년경에 죽음)은 자신의 작품 가운데 십자가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선포를 가리켜 사람들이 ‘미친 짓’이라 불렀다고 전한다(Apology Ⅰ, 13.4: "그들은 우리의 미친 짓을 다음과 같은 사실에 있다고 말한다. 즉 우리는 십자가에 처형된 인간을 세계의 창조자요 영원불변하신 하나님의 다음 위치에 놓는다“).

5) 바울 외에도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으로서 특히 마가복음서 기자를(cf. 막8:31-34; 9:30-37; 10:32-45) 들 수 있다.

6) 이에 관하여 김지철 교수의 논문 「십자가의 하나님의 지혜: 고전 1:18-2:16을 중심으로」, in: 『신학 사상』(1992, 여름), 273-302쪽, 이곳 273쪽, 각주 3)을 보시오.

7) Cf. J Becker, Paulus: Der Aposted der Volker(Tubingen, 1989), p. 218

8) 고린도전서(15:1,3)에서 바울은 전승에서 전해 받은 복음에 대하여 언급하는 반면, 갈라디아서(1:11-12)에선 사람에 의존하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복음에 대하여 말한다. 이러한 외견상 차이는 모순으로 간주할 것이 아니라, 두 서신이 맺고 있는 상황과 관련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갈라디아서에선 역사적인 정통성을 주장하는 유대주의 그리스도인과의 논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계시의 직접성을 강조한 반면, 고린도전서에선 탈역사적인 열광주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항하여 역사적 전통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과 관련이 있다. “복음은 본질적으로 항시 역사적 전통이며 동시에 영적인 케리그마”로 보는 고펠트의 시각이 전달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부활절 케리그마 전통과 다메섹 체험을 바울신학의 출발점으로 여긴다. cf. 김세윤. 『바울 복음의 기원』(도서출판 엠마오, 1996), 114쪽 이하.

9) 바울 이전의 전승과 관련하여: 성종현, 「파라도시스-바울 이전의 신앙 전승」, in:「기독교사상」(1989) 220-228쪽을 참조하시오.

10) 사도행전 2-5장에 나오는 베드로 설교 역시 초기 교회에서 유래한 케리그마로서 고린도전서 15:3-5의 전승과 일치한다

11) 이 점에서 바울이 자신의 선교 사역 가운데 초창기 교회가 공유하던 선포와의 유대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12) H. W. Kuhn은 이와 관련하여 바리새파 사람인 바울이 “의심의 여지없이 유대교를 넘어서는 첫 발을 내딛었다.”고 말하였다.

13) 빌립소서에서 바울은 적대자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빌 3:18)라고 부른다.

14) 바울의 칭의론과 십자가 신학의 연결과 관련하여: pp. 1-106. 로마서에는 ‘십자가’라는 단어가 나타나지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칭의론과 밀접한 연관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로마서 3장 24-26절)

15) 손봉호, 『윗물은 더러워도』(샘터사, 1983), 161쪽.

16) 박시원, 『십자가를 잃어버린 교회』(울림사, 2002)

 

 

대전신학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