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학 개론
1. 예배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
■ 들어가는 말
예배자가 예배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을 의미 있는 예배를 드리게할 뿐만 아니라 예배자의 예배 자세를 결정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며 감상주의적이거나 무속 신앙적인 예배의 현장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예배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질 때 감격적인 예배를 경험할 수 있으며 경건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 예배의 용어적인 의미
1. 히브리어로 '예배하다'에 해당하는 단어는
'샤카(shachah)'와 '아바드(abadh)'인데 '샤카'는 엎드려 절하다 또는 경배하다라는 뜻이고(신 26:10 참조) '아바드'는 섬기다 또는 봉사하다(service)라는 뜻이다(출 8:1 참조). 즉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예배는 숭배, 순종, 봉사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2. 헬라어에서는 예배하다에 해당하는 단어는 셋이다.
(1) 프로스퀴네오(proskyneō): 존경의 표시로 "절하다" 또는 "굽혀 엎드리다", "입맞추다"라는 뜻으로, 지상의 통치자에게 신체적으로 굴복 또는 순종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2) 라트레이아(latreia): "하나님께 대한 봉사", "거룩한 예배의 수행" 등 이 단어는 예배에 있어 예배자의 봉사를 뜻하는데, 종으로서 자신의 상전을 섬겨야할 신분을 확인시켜 준다.
(3) 레이투르기아(leitourgia): 이는 예배의 의식과 관계 있는 말로 본래는 "백성을 위하여 일하다"의 뜻이나, 기독교에서는 성례전이나 특별한 의식이 행해질 때 예배자들이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봉사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3. 요약
용어적인 의미에서 예배는 경배의 대상인 하나님께 대한 부복, 순종, 섬김, 봉사를 뜻한다.
■ 예배의 성경적인 의미
1. 구약성경-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예배적 특징을 살펴보면,
(1) 한분이신 야웨 하나님께만 경배해야 한다(출 20:3).
(2)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어떠한 형상으로든지 표현해서는 안된다(출 20:4. 5).
(3) 예배에 대한 세심한 제의적 규례가 철저하였다.
(제사, 제사장, 장막에 대한 제사법)
(4) 제물을 가지고 제사를 드렸다(레 1-7장)
(5) 형식에만 치우친 제사를 드릴 때 예언자를 통해 호된 비판과 경고를 받았다(암 5:21-24).
2. 신약성경
(1) 예수님의 가르침(요 4:20-24)
① 특정 지역에서만 예배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요 4:21)
② 확실하게 아는(믿는) 하나님께 예배하라(요 4:22)
③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요 4:23)
④ □□ 과 □□으로 예배하라(요 4:24).
(2) 사도 바울의 가르침(롬 12:1-2)
① 몸으로 영적 예배를 드리라(롬 12:1-2).
②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사를 드리라.
③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를 드리라.
■ 예배의 신학적인 의미
1. 기독교 예배는 그 대상과 중심이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는 일차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창 12:9). 은혜 받기 위해서 드리는 것은 예배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기인한다. 은혜 받기 위함은 예배의 동기나 예배의 결과일 수 있으나 예배의 목적일 수 없다. 은혜 받기 위함이 목적일 때 그것은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아니라 인간 위주의 예배이다. 은혜 받았기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며 예배를 드리면 그 결과 하나님께서 예배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다.
2. 예배 시간에 하나님은 임재하신다.
예배는 예배 드리는 자와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함께 있을 때 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예배 순서를 받으실 뿐 아니라 말씀으로 모든 예배자들에게 응답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예배 속에서 예배자와 인격적인 교제를 하고 영광을 받으신다.
3. 예배는 계시와 응답이 만나는 지점이다.
예배는 찾아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자의 응답이다. 인간을 만드시고 타락한 죄인을 용서하시고 용서한 죄인과 만나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림이 곧 예배이다. 인간을 찾아 오시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을 사모하는 예배자의 만남이 예배요, 그 만남의 광장이 예배당이다.
4. 예배의 원동력은 성령이다.
예배의 현장에서 예배를 역동적으로 인도하는 것은 성령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 성령의 역사가 없는 예배는 형식적인 의식에 불과하다. 성령의 교통과 역사 없이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불가능하다.
5. 예배는 공동체적 행위이다.
예배의 공동체는 언제나 단수적인 개념보다는 복수적인 개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기독교 예배는 언제나 예배 공동체인 교회와의 관계에서 형성되었고 교회의 순수성은 예배의 순수성에서 보존되었다.
6. 예배는 순환 구조를 갖는다.
예배의 완성은 축도가 아니라 선교적인 삶 속으로 연장되며 선교적인 삶의 열매를 가지고 다시 예배 드리러 나오는 순환 구조를 갖는다. 예배자는 선교의 사명을 띠고 세상에 파송되며 그 선교의 열매를 가지고 다시금 하나님께 예배 드리게 되는 것이다.
■ 맺는 말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예배란 그리스도인들의 삶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직무로서 마음과 말과 행위와 물질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섬김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룩된 구원 사역에 대한 거듭된 발견으로 인한 감격적인 응답이 곧 예배이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으며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를 깨닫고 앞으로 무엇을 하실 것인가를 기대해야 한다. 그럴 때 예배자의 미래가 오늘처럼 내일도 하나님에 의해 지켜질 것이기에 더욱 기쁨에 찬 감사와 평안의 찬미를 드릴 수 있으며 희망찬 내일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2. 예배의 정의
들어가는 말
우리는 교회를 여러 각도에서 정의하고 있다. 종교개혁의 선봉 자였던 마틴 루터는 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로서의 교회를 말하고 있다. 또한 종교개혁 제 2세대인 요한 칼빈은 교회를 "하나님의 선택받은 성도들의 공동체"로서 또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정의에 따라 칼빈은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가 나타나시고 그의 살아있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곳에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런 참된 교회에서 중요시 해야할 것은 바로 말씀과 성례전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디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고 거기서 그 말씀이 순수하게 전파되고 들을 수 있으며 성례전이 그리스도의 지시대로 실행되는 곳에 하나님의 교회가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는 없다." 결국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신령한 제사를 드리고, 그의 은혜의 놀라운 사역을 알리기 위해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벧전 2:5-9).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사이에는 이미 구약시대부터 예배라 불릴 수 있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어왔다. 본 입문서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할 예배에 대한 기본적인 점들에 대해서 기술하여 보고자 한다.
예배의 의미
사전(事典)적인 의미
a. Worship
예배라는 말의 영어단어인 Worship은 원래 앵글로색스어의 weorthscipe, wyrthscipe (worth, weorth, wurth: 가치, 존경 + scipe: 어떤 상황 등을 유발시키다, 만들다)에서 유래하였는데 이것이 Worthship으로 되었다가 다시 Worship이란 단어로 변화되었다. 이 말의 단어적 의미는 "가치를 돌린다, 어떤 사람에게 가치 혹은 존경을 주다"라는 것이다. 이 말은 간혹 영국에서 여러 시장들이 연설할 때 사용하곤 하였다. 1549년부터 영국국교도의 결혼식에서 "나는 그대를 내 몸으로 존경(worship)합니?quot;라는 맹세를 했다. 이 경우에는 한 사람이 몸으로 다른 사람을 존경하고, 가치를 높인다는 의미이다. 이런 맹세를 한국에서는 하지를 않고 있고, 생략되어지고 있다. 어째든 이 worship라는 단어의 기본 개념은 "가치를 드린다, 혹은 존경을 표한다"라는 의미이다. 즉 인간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그에게 최상의 가치를 돌린다는 것이다.
b. Gottesdienst
예배라는 말의 독일에 단어는 Gottesdienst인데 이 단어는 Gott와 Dienst의 합성어이다. 이 단어는 영어로 표현하려면 7개의 단어가 필요하다: Gods service and our service to God(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은혜적 봉사와,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봉사). 그러므로 이 단어는 우리에게 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하나님께 봉사한다, 드린다, 헌신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진다. 즉 이 단어는 예배의 다른 면인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응답, 곧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답변을 나타내고 있다. 곧 예배란 하나님의 역사 하심에 대한 인간의 헌신적인 대답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에서의 의미
a."굴복하는 것, 자신을 엎드리는 것
엎드린다, 따른다"는 뜻으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복종해야할 존재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단어는 숭배, 순종, 봉사의 종교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 개념은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마음과 몸을 가지고 최대한으로 존경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표현은 "머리를 숙여 경배했다"라든가 "엎드려 경배했다"라고 번역되어져 있다. 성서구절은 창 24:26, 출 4:31, 34:8, 역대하 29장 30절 등이다.
b. (에바드) "봉사, 섬긴다"는 뜻으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자주성을 버리고 그의 뜻을 따르며 섬기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영어의 Service가 여가서 유래되었다. 이사야 19장 21절 등에서 이 단어는 나타나고 있다.
이상의 2가지 어휘에서 나타나는 뜻은 다음과 같다: 모든 寬@?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의 뜻을 따르며 섬겨야 할 존재라는 사실과, 경배와 복종의 생활이 예배 자들의 주요한 삶의 근본이 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신약에서의 의미
A. (고뉘페테오; kneel down) : 무릎을 꿇을 때나 완전히 부복하여 엎드렸을 때에 사용하는 말인데 겸손과 자기의 부족감과 존경과 복종과 숭배의 표현이다. 이 단어는 마태 17:17, 막 1:40, 10:17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B. (프로스퀴네인; worship of the idol, worship of polytheism) : 어원적인 의미는 우상의 형상에 절하는 것이다. 이 단어는 행 7:43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에 나타나고 있고 또한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셨을 때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마태 4:10)" 라는 말씀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낯선 구절이지만 요한계시록 5장 14절에서 24장로가 엎드려 경배했다는 구절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는 신약 안에서 24회 정도 사용되는 것으로 보아서 가장 보편적으로 헬라인들이 사용하였던 말이었다.
C. (라트레아; in religious usage Service of Worship of Gott) : 이 단어는 종교적으로 사용되어서 주로 신에 대한 예배숭배, 제사예배에 사용되었다. 원어적인 의미는 "삶, 일이나 보상, 일반적인 봉사"의 뜻인데 그 일에 대한 대가를 바라는 개념은 전혀 없고 노예의 일에 비하여 보다 포괄적인 뜻을 띠고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다만 그분만을 섬기라"고 유혹하는 사탄에게 최종적으로 선언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 이것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종으로서 자신의 상전만을 섬겨야 할 신분을 확신시키는데 사용되었다. 이 단어에서 성직자들을 가리켜 "주의 종"이라고 하는 표현의 언어적 근원을 찾아볼 수 있다.
D. (레이투르기아) : 이 단어의 기원은 일(ergon)과 사람(laos)의 합성어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예식은 도시와 국가의 유익을 위한 공적인 행사였다. 그 원리는 세금을 지불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즉 국민은 세금을 내고 이에 대한 것으로서 국가는 봉사를 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로마위정자들을 "하나님의 일군(롬 13:6)"으로 말하고 그 스스로도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일군(롬 15:16)"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단어는 크게 두 가지로 그 의미가 나뉘고 있다.
ㄱ. 제의적이고 제사적인 봉사, 경배를 의미(Of ritual and cultic services). 누가복음 1장 23절에서는 제사장의 직무와 관련되고 있다.
ㄴ. 대제사장적인 직무수행(Of the high priests service)에 관련되고 있다. 이 단어는 어원적으로 백성이나 국가에 대한 봉사와 관련하고 있다. 정치적 공동체에서의 봉사를 의미하는데 예배는 전체 회중의 일이요, 회중의 참여와 모인 회중에 의해서 행해진다는 뜻이다.
E. (호모로기아; confession as an action) : 어원적으로는 행위로서의 고백의 의미하고 있다. 그 예가 고후 9장 13절(the subjection of your confession to the gospel: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에 나타나고 있다. 그 기본적인 뜻이 "똑같은 것을 말하거나 또는 어떤 말에 동의한다"는 뜻인데 일반적으로 많이 쓰인 것은 죄의 고백이란 의미이다. 자신의 죄를 시인하는 데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인정상태로 나아간다. 이때의 고백은 하나님께 대한 찬양고백의 의미가 있다. 그 외에 선포와 기도의 의미를 이 단어는 포함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은 회중 안에서 하건 세계를 향하여 하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상호관계-상동관계(양쪽 동등한 관계)"로도 번역할 수 있는 이 단어는 다방면에서 하나님께 대한 숭배의 뜻으로 사용된 모든 용어 중 가장 포괄적이고 심각한 의미가 있다.
이상 성서에서 다루어진 예배에 관한 단어들의 공통점은 예배의 대상 앞에서 한 인간은 자신의 인간적인 요소를 다 버리고 그 대상의 뜻을 따른다는 것과 그를 경외하고 그 앞에 섬기는 존재라는 것이다.
3. 예배의 역사
예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는 참으로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종교사의 관점에서 보면 예배의 개념은 신을 숭상하는 모든 형태와 관련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문자가 있기 이전부터 분명히 예배라 불릴 수 있는 것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메소포타미아의 한 문헌을 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볼 수 있다. 이 문장은 창조에 대한 기사 중에서 신의 어머니(G ttermuter) Nammu가 그의 아들 Enki에게 하는 이야기이다: "너 잠자는 아들아, 너는 잠을 극복하였었는데... 그러나 네가 만들어내었던 신들을 사람들이 맨몸으로 도전하고 ..... 신이 할 일을 할 수 있는 이러 저러한 자들을 창조한다. 그래서 부담감을 내던져 버릴 수 있도록 한다." 이 문장에서 보면 신들을 위한 예전적인 행위를 위해서 어떤 인간들이 정하여진다는 것이다. 고대의 이런 한 예전적 행위들은 주로 희생(Opfer)제물을 동반한 제사형식이었던 것을 우리는 자료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기독교예배에 관해서는 우리는 그 근원을 성서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우선 성서시대에서 시작하여 종교개혁시대까지의 예배의 역사적 측면을 간략히 다루어 보고자한다.
구약시대
구약에 나타나는 예배의 역사를 여러 시대로 구분할 수 있겠으나 여기서는 크게 족장시대와 율법시대 그리고 포로기 이후 시대로 나누어 약술하고자 한다.
족장시대의 예배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족장과 그의 가족과 계약을 맺으셨음을 구약을 통해서 볼 수 있다. 그 예를 창세기 18장 19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가장 최초의 집단예배는 가족이나 부족의 대표 - 즉 가장이나 족장 -가 제사장 자격으로 활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초기의 예배 형태는 어떤 장소에서 우연히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과 함께 제단을 쌓는 것이었는데, 그들이 신을 경험한 장소는 대개 돌이나 나무 또는 샘과 같은 자연물이었다. 그 예로 아브라함의 예배는 나무와 이삭이나 이스마엘의 예배는 우물이나 샘과, 그리고 야곱의 예배는 돌과 관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들 족장은 예언자, 제사(祭祀), 왕으로 불리었고, 이들이 공적인 예배에서 사회를 담당하였고 예배를 집행하였다. 죤 칼빈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향한 제단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어디든지 다녔다"라고 말하였듯이, 옛날 이스라엘의 족장들은 그 가족과 더불어 삶의 자리를 이동할 때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을 하였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셨음을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창 12장 7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고 그 나타나신 곳에서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의 원리를 분명하게 해 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제단은 제단이 아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하나님은 자기를 찾으시는 자에게 오시고 예배 드리는 자 마음속에서, 그 자리에 임재 해 계시는 것이다.
이 족장시대의 예배에 있어서의 특징을 간략히 보면 먼저는 인간의 간절한 부르짖음이 있었고 여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예배의 제단에는 희생의 제물이 그 중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3년 된 암소와 3년 된 암염소와 3년 된 수양과 산비들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창 15장 9-10절). 그리고 이 시대의 예배는 언제나 가족 중심적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성서를 통해 알 수 있다.
율법시대의 예배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성막을 통해 예배가 지속되게 하셨고,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제의(cultus)와 도덕법(moral law)을 계시함으로써 자신을 나타내셨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솔로몬의 성전 건축을 통해서 점차적으로 예배가 성전중심으로 그 모습을 자리잡게 되었다. 율법시대의 예배는 가족적 예배의 성격을 계속 지속하기는 하였으나 공적 예배의 장소는 성전을 중심하여 거행된 것을 알 수 있다.
이새대의 공적 예배의 특색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⑴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 이외에 어느 곳에서도 희생의 제물을 드리는 일은 허락되지 않았다.
⑵ 예배의 규정들이 세부적인 것까지 세칙화 되었다. 즉 성전을 시설하는 방법, 제사(祭司)의 예복, 희생제물의 종류와 방법 등이 자세하게 규정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을 우리는 레위기에서 자세하게 볼 수 있다.
⑶ 율법시대의 예배는 대리적, 위탁적이었다. 족장시대는 누구나 제단을 쌓을 수가 있었으나 이 시대의 예배는 제사(祭司)와 특히 레위인들 만이 예배의식을 집행할 수가 있었다. 12세 이상의 남자는 연 3회 -무교절, 맥추절, 장막절(참고, 출 2장 14-17절)-를 제외하고는 모두 성전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했었다.
⑷ 이 시대의 예배는 의식적(儀式的)이었다.
⑸ 제단과 기둥, 벽에 장식되어진 주제들과 또한 촛불과 진설병, 물두멍 및 놋바다 등을 통해서 예배는 가시적(可視的)이었으며 상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이 시대의 예배는 음악, 축송, 춤, 기도, 행렬, 단순한 설교, 선조들에 대한 회상, 고백 등과 함께 이루어졌다.
포로기 이후시대의 예배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행하여지던 예배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후로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성전에서 드리는 희생의 예배를 대신하여 등장한 것이 바로 회당에서 드리는 예배였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회당에 모여서 나라를 잃은 슬픔을 함께 하며 성전 예배를 대체한 회당예배를 갖게 되었다. 이 예배의 중심은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일이었다. 이 말씀 전에 모두가 일어서서 지극한 경외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 예배에서는 회생 물을 제단에 바치는 의식이 점차 약화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은 집전자의 점유물이 아니라 모든 예배 자들의 참여 속에 경청되어 이해를 가져오는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되었다. 이외에도 성전의 제사 대신에 새벽, 아침, 정오로 드리는 기도가 만연하게 되었고 가정까지도 예배 드리는 성서로 바뀌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전 444년 느헤미야의 인솔로 마지막으로 포로에서 귀환하였고,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기 시작하여 다시금 성정예배가 복원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느헤미야는 에스라와 더불어 제사법전의 발견과 함께 예언의 전승과 제사예식을 새롭게 다듬고 거룩한 공동체의 새출발을 주도해 나갔다. 이에 따라 포로지에서 행하여지던 회당예배의 새로운 변화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회당예배는 폐지가 된 것이 아니라 성전 예배와 더불어 함께 존속하게 되었다. 회당에서는 안식일마다 예배가 집례 되었고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행 15장 21절). 이 회당에서 진행된 안식일 예배의 순서를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⑴ 쉐마 낭독 ⑵ 기도 ⑶ 율법의 낭독 ⑷ 예언서의 낭독 ⑸ 강해와 권면 ⑹ 제사(祭司)가 있을 때는 축도, 축도 후에는 아멘.
정장복교수는 구약의 예배를 다룸에 있어서 위의 사항들 외에 시편에의 강조를 하고 있다. "시편은 집단적인 예배에서 부른 것보다도 개별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역경을 그분께 직접 호소한 것이 많은 기록이다. 여기서 우리는 절망과 운명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감사하고 호소하는 깊은 신앙의 자세를 볼 수 있으며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의 찬송을 찾을 수 있다." 계속해서 그는 시편을 하나님을 향한 노래와 예배공동체를 형성하는 찬송과 기도로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한국교회에 있어서의 시편 사용을 신중히 재고해야할 시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약시대
예수의 사역과 예배
예수 당시의 시대에는 회당예배와 동시에 성전예배가 공존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신약성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예수는 그의 지상생애 동안에 자신의 새로운 형식의 예배를 만들어 사용하시겠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았다. 예수의 관심은 어떤 특정한 의식적인 제도보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하는데 있어 심령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는 회개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래서 예수는 백성들의 내면적 각성과 실천을 추구하는 가운데서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함"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예수께서 회당예배라든가 성전예배를 부정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고 또한 회당에도 들르셔서 예배에 참예하셨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한 예수는 성전 예배를 부패시키는 무리들을 향해 노하셨고 채찍을 드신 사건을 비롯해서 여러 절기를 지내시기 위해서 성전에 들리셨던 일들과 그의 생애의 절정을 의미하는 수난주간을 대부분 성전에서 보내신 기록 등은 예수께서 성전예배를 얼마나 중요시하였는가를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예수는 예배의 단절자가 아니라 완성 자이시라는 것이다. 그는 율법과 선지자들의 주제였던 "하나님을 사랑하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요약된 계명으로 예배중심의 종교성과 실천 중심의 윤리성을 계속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예배와 관련되어서 빠져서는 안되는 것이 바로 예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에 함께 하셨던 식탁에서 시작되는 성찬예전과 세례가 바로 그것이다. 이 두 가지의 성례전은 구약의 성전예배나 회당예배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의미와 내용을 지닌 예배 의식이다. 이 예전은 기독교 예배의 역사에 변함없는 예전이 되었고 예배의 구심점으로 지금까지 지켜져 내려오고 있다.
사도시대와 그 이후의 예배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실 때 좌절과 공포에 휩싸여있던 사도들은 예수가 부활 승천하신 후 다시금 확고한 신앙을 소유하게 된 후 이들은 예수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을 중심 하여서 예배 속에서 새로운 사역을 준비하였다. 또한 이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사건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교회 예배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들은 처음에 계승되어 온 성전과 회당에서 행하여지는 예배에 참석을 예수께서 허셨듯이 행하였다. 그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의 행위를 지속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오순절 사건 이후에도 성전을 중심 하여 모이기에 힘쓰고 하나님을 향하여 찬미와 기도를 하면서 성전을 교회와 예배활동의 근거지로 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외에 사도행전과 서신서 계시록을 통해서 볼 때에 사도시대의 예배를 추론할 수 있는데 윌리암 맥스웰(William D. Maxwell)은 다음과 같은 것을 지적한다. 첫째로 초대교인들은 한동안 회당이나 성전예배에 참석을 했으며 둘째로 이들은 모임을 자주 가지면서 애찬이라 불리는 공동식사를 하였다. 셋째로 그들은 이식사의 마지막부분에서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에 부탁했던 명령을 받아 성찬예전을 행하였고, 넷째로 이 예전이 끝날 무렵에는 예언이나 방언을 비롯한 특별은사를 나타냈으나 상당한 조심 속에서 이러한 것들이 행하여졌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됨으로써 성전예배는 막을 내리게 되었고 회당예배 역시 로마의 박해로 인해 지하의 교회로 숨어들게 되었고 성도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생명을 걸고 예배를 드리는 시기가 있게되었다. 이러므로 이 당시의 예배내용을 아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로 남아있는 몇 개의 자료를 통해서 초대교회의 예배 내용을 우리들은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첫째로, 이 당시의 예배에서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찬양으로 먼저 예배 자들의 마음을 주님께 드렸다.
둘째로, 구약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읽고 그 말씀에 대한 강해가 있었다.
셋째로, 기도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주님의 기도를 비롯하여 감사, 간구, 타인을 위한 기도, 축도 등과 주님의 다시 오심을 소원하는 기도를 드렸고 아멘으로 응답하였다.
넷째로, 예물의 봉헌으로 감사와 헌신의 표현을 하였고, 이것은 주님 이름으로 가난한 이웃을 돕는 성도들의 지극한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다섯째로, 이들은 죄인임을 표현하는 고백과 신앙고백을 개인적 또는 공동적으로 행하였고 용서를 구하는 시간을 가졌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성찬예전과 세례를 행함으로 예수의 구속 사건에 대한 재다짐과 은총의 경험적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이 당시에서부터 서서히 교회의 조직과 예배의 형태가 차츰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고, 이런 가운데 예배를 인도하는 집례자가 탄생하게 되었다.
중세교회의 예배
기독교 역사에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온 것은 바로 313년에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일이다. 이 기독교 공인은 그간 각 개인 가정이나 지하교회(Catacombs)에 숨어 분산되어 모이던 기독교인들을 공개적으로 한곳에 모일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상황이 급전하게 됨으로서 모여드는 성도들을 수용하기 위한 교회의 건물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콘스탄틴 대제가 당시의 중요도시인 예루살렘, 베들레헴,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에 대성전을 건축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많은 성도들이 모여 드리는 예배의 집전을 위해서 예전이 점점 더 체계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한 성직자의 수와 그 위치와 권위가 점점 더 커졌다.
5세기부터 종교개혁까지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사항은 미사의 발전이다. 이 미사는 일정한 시간에 드려지는 예배의 형식에 따라 많은 예전들이 첨가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 미사를 쉽게 표현하자면 우리 개신교의 성찬예전이라 할 수 있겠으나 내용상으로는 많은 차이가 있다. 예를 들자면 한국 개신교에서는 성찬예전에 대한 그 중요성이 현대에 많이 강조되고 있기는 하나 아직까지 미약한 것이 사실이다. 이에 반해서 카톨릭의 예배에서 미사는 매 예배 때마다 행하여지고 있다. 곧 카톨릭에 있어서는 예배가 곧 미사 그자체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개신교에서는 예배보러갑시다 혹은 예배(당)에 갑시다등의 표현을 아직도 많이 사용하지만 카톨릭 신자들은 성당에 갑시다라는 표현보다는 미사에 참예하십시다를 많이 하는 것을 우리는 주위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중세시대에 이 미사예전에는 수많은 성경봉독, 교독과 교창과 더불어 그 출처도 불분명한 많은 기도문이 포함되었고 찬송 및 성자들을 기념하는 축제가 포함되었다. 또한 우리가 이 시대에서 주시해야 할 것은 미수 횟수의 엄청난 증가이다. 마치 미사를 얼마나 많이 행하여졌는가 하는 횟수가 경건의 깊이를 재는 기준처럼 되어서, 가능한 한 최대의 미사 집례가 요구되었다. 심지어는 여행을 떠나는 자들이 여행의 안전과 여행목적의 달성을 위해서 사제들에게 미사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많은 수의 미사를 하기 위해서 많은 책들이 만들어졌다. 시편, 교송성가, 찬송가, 성서, 특별 기도문책, 행렬성가, 그리고 집례자를 위해서 집례서, 서품정식서, 성무 안내서 등의 많은 책들이 만들어졌다.
6세기가 지나가면서 다른 지역에서 조금씩 달리 거행되던 예전은 점차적으로 로마 카톨릭의 미사예전이 서방예배를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Robert Baker는 이 발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① 이들의 예배는 그리스도의 피 없는 제사로서 간주되는 미사의 집례에 다시 집중되었다. 포도주는 아직 일반 성도에게는 허락되지를 않았다. ② 중보적인 성도의 제도가 폭넓게 발전되었다. ③ 성모마리아의 숭배 사상이 널리 퍼졌다. ④ 성자의 유물(遺物)은 종교생활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⑤ 구체적으로 성례전의 수는 고정되지 않고 있었다. ⑥ 성례전과 외적행위에 대한 강조로 공적사상(功績思想)이 널리 유행하였다. 이런 예배의 발전은 16세기에 와서는 로마에서 행하여지는 미사예전이 일정 불변하게 되었고, 화체설이 확정이 되었다. 이 중세시대의 예배에서 지적될 수 있는 가장 큰 단점은 바로 예배에서 사용되는 언어일 것이다. 예배가 진행되는 동안에 회중들이 듣는 언어는 자신들이 사는 곳의 언어가 아닌 라틴어이었다. 이러하기에 신자들은 예배에 직접 참여한다기 보다는 하나의 구경꾼으로밖에는 여기지지를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에 더불어 종교개혁에의 큰 영향을 준 것은 바로 면죄부의 판매이었다. 이러므로 서서히 종교개혁의 불꽃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중세기 예배예전의 발전은 흔히 종교와 예술의 투쟁이라고 평하여지고 있다. 영적인 것이 예술적인 것에 예속되어졌다는 의미이다. 권위의 자리로서 보여지는 교회와 그 건물, 예배의 일정한 시간 및 규격화된 예배의 형태, 그리고 점차적으로 외형적인 의식을 높이려는 경향이 강조되었다.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는 예술적인 형식에는 사제들의 화려한 제복(祭服), 여러 가지 사용되는 기구들 -예를 들면 종, 향, 십자가 등- 또한 집례 하는 사제들의 상징적인 행동, 자세의 빈번한 변동 등이 포함되었다.
종교개혁시대의 예배
일반적으로 우리는 종교개혁의 시작을 1517년 독일에 있는 도시인 비텐베르그(Wittenberg)의 교회 문에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그 유명한 95개조 논제(95 Thesen)를 부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루터에 의해서 개혁의 불꽃이 활활 타오른 종교개혁은 단순히 예전(Liturgy)에 대한 불만과 그 시정을 위한 것은 아니었고, 종교 개혁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인간적인 교황이 자리하여서 믿음보다는 만들어진 제도 속에서 인간의 공적(功績)을 더 중요하게 취급하는 비성서적(非聖書的)인 사항에 대해 개혁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이들은 공통적으로 중세교회의 예배예전에 대한 시정의 필요성을 함께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간결하게 위에서 중세시대의 서방교회 예배의 단점들에 대해서 살펴보았었다. 당시의 예배, 특히 미사는 하나의 극적 인 구경거리로 변모하였고, 그 절정을 영성체 시간 자체에 두기보다는 화체의 신비적인 사건에 두었고, 거양성체에 있어서도 미신적인 요소가 첨가되어 숭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일반 성도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인 라틴어로 의식이 진행이 되었고, 지나치게 화려하고 장엄하게 장식된 예전, 그리고 수준 높은 음악 등은 일반 성도들이 예배에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극히 제한하였던 것이다. 일반 성도들에게는 성찬이 일년 1회에 한에 참여하게 함으로서 미사 자체가 성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부 선택되어진 사제직을 위한 것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또한 설교는 그 위치를 상실하였고 많은 수의 사제가 필요한 상황에서 이들의 지적수준이 이를 따라주지 못함으로서 일부 교구의 사제들은 설교를 하기에는 상당히 그 수준이 부족하였다. 성경봉독 부분이 정작은 성자들의 생활 담이나 전설로 대신하였고, 성경도 물론 모국어로 전달되지 않았다. 따라서 예배예전에 있어서의 개혁 또한 이 시기에는 당연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예배의 개혁에 기여한 모든 개혁자들과 그들의 예배에 관해서 서술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여기서는 커다란 3大 흐름인 루터, 쯔빙글리 그리고 칼빈의 예배에 관한 입장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루터와 그의 계열에서 행한 개혁은 가장 보수적이다. 루터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예배예전을 전면 부정하거나 과격한 변화를 원한 것은 아니었고, 그는 부분적으로 수정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카톨릭의 예배예전의 많은 부분을 그대로 남겨두고 있다. 루터의 예배에 있어서의 공헌은 자국어로 미사예전을 진행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완전히 예배의 집례시 라틴어를 완전히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신학적으로 카톨릭과의 차이점이 있는 것은 성만찬에서 화체설을 반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를 주장하였다는 점이다. 즉 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반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루터가 카톨릭에서 사용하는 여러 기구들, 예를 들면 예배시 사용하는 등불과 향 등을 계속 사용함으로서 그의 개혁이 성공하지 못하였다는 해석도 있기는 하나, 그가 회중에게 예배를 더욱 알기 쉽게 하여주었다는 것은 우리가 인정하여야 할 점이다.
루터가 예배에 크게 공헌한 부분은 바로 예배에 사용되는 음악이다. "음악은 하나님의 귀한 선물이며 나로 하여금 설교를 즐거운 마음으로 하게 하였고 깨우쳐 주었다. ...음악은 마귀를 물리치고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며, 분노와 불결과 거만 등 모든 것을 물리친다. 나는 신학 다음 음악을 손꼽으며 최고의 존경을 돌린다. 비록 내가 가진 음악에 대한 상식이 보잘 것 없이 적은 것이기는 하나 나는 세상의 무엇하고도 바꾸지 않으려고 한다...". 이같은 표현은 음악에 대한 루터의 열정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음악이 하나님 말씀 다음 갈 수 있는 귀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슬픈 자를 즐겁게 하고 낙망한자를 일으키며, 흥분한자를 조절시키는 데 음악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하버드 대학 음악교수를 지냈던 John K. Paine(페인)은 "우리는 현대의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자유에 있어서만 종교개혁이 가져온 결실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음악의 예술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고상한 즐거움을 가지게 된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한 헨델은 그가 퍽 많은 것을 루터의 작곡을 통해서 배웠다고 말하고 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작사 작곡한 찬송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내 주는 강한 성이요 (Ein feste Burg ist Unser Gott)」란 찬송일 것이다. 암흑과 마귀의 세력을 힘차게 물리치는 이 종교개혁의 군가는 종교와 자유를 침해하는 불의의 원수들의 세력이 아직도 우는 사자처럼 몰려오는 해인 1527년 여름에 만들어졌다고 알려지고 있다. 시편 46편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와 힘이시니"에 근거하여 그 가운데 나타난 사상을 반영시킨 이 찬양은 현재 많은 교파들의 찬송가 가운데 수록되어 있으며 170여 언어와 방언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 찬송은 그 가사의 곡에 있어서 루터의 인격과 성품을 잘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自身)의 말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 신뢰, 죽음과 사탄을 공격하여 무찌르는 그 용기, 그리스도의 진리의 최종 승리에 대한 불변의 신뢰 등이 이 찬송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바로 루터 자신이 이와 같은 사람이었다. 마틴 루터는 기존의 예배형식에서 찬송에 관한 부분도 수정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특히 세 부분에 대하여 그러하였다. 즉 사제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읊는 성가, 성가대의 찬양, 회중이 부르는 찬송 부분이다. 루터가 이 모든 것을 다 수정하려고 착수하였다. 첫 번째인 사제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읊는 부분으로서 여기에는 서신과 복음도 포함되었다. 루터가 성서의 단어 하나 하나를 분명히 들리게 하고 이해시키는 데 있어서 그처럼 열성적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가 왜 음악을 완전히 중단시키고 자연스러운 목소리만을 남겨두지 않았는가 하는 궁금증이 일어나기도 한다. 여기에 관해서는 건축학적인 구조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당시 건물의 구조는 입으로 말하는 말보다 노래하는 말에 더 어울리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루터는 여러 가지 대안을 제시함으로서 그 의미를 전달하려하였다. 한 음절에는 오직 하나의 음만을 사용해야 했으며 오르간 반주로 말소리가 흐려져서는 안 되었다. 예배 전체를 통해서 오르간은 오로지 화성 음으로만 사용되었다. 서신과 복음서에 대한 그레고리안 성가는 단조 음이었으며 끝에 가서만 음성이 낮아졌다. 루터는 복음서 기자의 설명, 그리스도의 말씀, 사도들의 말에 각각 다른 음역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나의 제안을 제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집례자에 따라서 자신의 전례음역에 맞는 악보를 발견하고 그것을 채택해야 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이에 따라 음계도 달라져야함을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더께서는 명랑하셨기에 복음서 낭송에서는 제 6음계를 사용하여야 하고, 바울은 좀 우울한 사람이었기에 제 8음계를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둘째 부분인 성가대의 합창부분에 루터는 네덜란드의 대위법적인 종교음악을 도입하였다. 이를 위해서 합창단이 필하게 되었고, 루터는 잘 훈련받은 합창대에 관한 강조는 아주 억척스러웠다. 게오르그 공작의 선창자이자 라이프찌히 논쟁 때 12파트로 부른 노래의 지휘자인 게오르그 라우를 Wittenberg로 데려와 궁중합창단의 선창자와 교회의 지휘자로 일하게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합창단이 여러 도시에서 생겨났으며 무엇보다도 어린이들은 학교에서 철저한 훈련을 받았다. 맨 마지막의 그리고 가장 큰 개혁은 회중의 찬송이었다. 중세의 예배는 거의 전부가 집례자와 성가대에게 국한되어있었다. 회중이 자국어로 찬송, 응답하는 부분은 참으로 적었다. 루터는 회중 찬송의 아버지로 불릴 정도로 이 부분을 발전 시켜놓았다. 예배의식의 부분 부분이 찬송으로 대치되었다.
이에 비해 쯔빙글리는 예배의 개혁에 상당히 급진적이었다. 그는 미사를 예배의 규범으로 간주하지를 않았다. 또한 쯔빙글리는 성만찬의 횟수를 일년에 4회로 제안하였는데 이것이 후대에는 마치 장로교의 전통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되었다. 그가 루터와는 대조적으로 예배를 과격하게 개혁한 것은 바로 음악에 있다. 그는 공중 예배에서 모든 음악을 철폐하였고 오르간 사용을 금지할 정도로 급진적이었던 것이다.
루터와 쯔빙글리의 중간에 서있는 개혁자가 바로 칼빈이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는 예배예전의 개혁에는 루터보다는 과감하였으나 쯔빙글리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특히 성찬예전이 자주 행하여져야함을 강조하였고, 회중의 시편 찬송이 교회 공중예배의 일부가 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찬송의 훈련에 그는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칼빈의 이러한 예배에 대한 개혁은 특히 마틴 부처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부처는 예배의 용어를 크게 바꾸었다. 예를 들면 미사대신에 주님의 만찬, 그리고 사제(司祭) 대신에 교역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제단(Altar) 대신에 상(床)이란 용어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영향아래서 칼빈은 거룩함과 질서를 보존하였고, 조직화된 예배 예전 및 쯔빙글리의 극단적인 예배 형태에 결여되어 있는 통일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장식에 불필요한 장식 골동품을 매우 싫어하였기에, 단순성은 바로 그의 목표였던 것이다. 즉 칼빈이 예배에 있어서 원했던 것은 중세 예배예전에 포함되어있는 많은 예식주의(Ceremonialism)를 배격하는 데 있었다.
예배의 요소들
우리는 예배에서 지켜져야 할 그 내용들에 관해서는 예배를 전공하는 학자들에 따라 다양하다. 그 이유는 속해있는 교단과 이와 아울러 신학적 배경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장로교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예배 속에 가지고 있는 요소는 다음과 같은 것들일 것이다. 즉 오르간 혹은 피아노 전주, 예배의 부름, 기원, 성가대의 찬양과 성도들이 부르는 찬송, 기도, 성경말씀 봉독, 설교, 봉헌, 성례전, 축복기도 등을 들 수 있다. 이모든 것들을 여기서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초대교회에서부터 그 중요성을 가지고 있으나 한국교회에서는 그 의미를 크게 가지고 있지 못하는 성만찬에 대한 설명을 중점적으로 하고자 한다.
성만찬
성만찬 -혹은 주의 만찬- 은 초대교회 교인의 삶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마지막 만찬에 대한 기억(Erinnerung)으로의 떡과 잔의 먹고 마심은 영적인 그리스도의 현존의 실재의 상황적인 再임재인 것이었다. 바로 이것을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믿는 것이었으며,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었다. 성만찬은 세례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 속에서 영속되도록 교회에 주신 성례 중의 하나이다. 특히 성만찬은 초대 교회로부터 예배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말씀의 예전은 다락방 예전이라고 부르는 성만찬 예전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이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교회는 지금까지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눈으로 보고 직접 참여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다시 한번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도 이 성만찬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성만찬이 자주 거행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성만찬은 한국의 장로교-소위 칼빈을 따른다고 하는-에서 그 의미를 크게 잃어버렸고 등한시되어져 왔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여기서는 성만찬의 성서적 고찰과 종교개혁 시대의 성만찬 이해를 간략히 기술하고자한다.
유월절?
성만찬에 대한 성서적 고찰에 있어서 신학적으로 가장 문제시되고 연구되어 오고 있는 것은 예수께서 제정하신 이 성례전(Sakrament)이 유월절 식사이었느냐 아니었느냐이다. 마가를 비롯하여 복음서의 기자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식사는 바로 유월절 식사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성서기술과 함께 지속되어 온 성만찬의 전통은 일반적으로 유월절식사를 성만찬의 근원으로 이의 없이 받아들여 왔었다. 성만찬이 유월절식사이었음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신학자가 Joachim Jeremias이다. 그는 저서 Die Abendmahlsworte Jesu 제1장에서 이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J. Jeremias는 유월절 전통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서 주장하고 있다.
a. 예수는 그의 최후의 만찬을 관습에 따라 사람들이 가득한 예루살렘 시내에서 행하셨다. 그리고 평소와는 다르게 예수는 베다니로 다시 가시지를 않으셨다.
b. 공관 복음(마가 14:17, 14:30, 마태 26:20)과 요한복음(요한 13:30) 그리고 바울의 기사(고전 11:23)에 따르면 예수의 최후의 만찬은 밤에 거행되었다. 이것은 보통의 식사 습관과는 다른 것이었다. 예외로 유월절 식사는 밤에 행하여졌다.
c. 마가 14:26과 마태 26:30에 나타나는 찬양 Passahallel의 후반부로서 식사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Jeremias는 누가복음에만 나타나는 두 개의 잔을 유월절 식사에서 사용되는 4개의 잔 중 2개로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관습과 성만찬의 비교연구를 통하여서 새로운 이론들이 대두하였다. 이중의 하나가 키두시 식사라 불리는 유대인들이 매 안식일이나 축제날에 전통적으로 가졌던 식탁에 관한 것이다. 이외에도 Dome G. Dix, H. Lietzmann K. G. Goetz 등은 유대교의 우정의 식사였던 Habhuramahl로 보고 있으며 K. G. Kuhn 등은 엣센 공동체에서 해하여지던 식사로 보고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전통적 견해로서 성만찬의 기원은 유월절 식사이고 예수께서 최후로 지켰으며 여기서 새로운 성만찬으로 제정되었다는 것이다. 공관 복음 기자와 요한 복음 기자는 예수께서 안식일 전날에 즉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데에 일치하고 있다. 공관 복음 기자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그의 최후의 만찬을 목요일 저녁에 즉 유월절 식사에 행하셨다. 유대교의 전통에 따르면 이 유월절 식사는 Nisan월 14일 저녁부터 15일까지 행하여졌다. 이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유월절 축제의 첫날인 15일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요한 복음에 따르면 이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않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서(요한 18:28)" 관청에 들어가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곧 요한 복음에 의하면 이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 요한 복음 기자의 계산법을 따르게 되면 예수의 마지막 만찬은 Nisan월 13일에 거행되어진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예수의 마지막 만찬은 유월절 잔치와는 관계가 먼 것이 되게 된다. 이러한 날짜의 상이함을 조정하기 위하여서 많은 연구들이 있어 왔다. 아래에서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해 본다.
a. D. Chwolson: 예수께서 죽던 해의 Nisan월 15일은 안식일이었다. 해서 유월절 양을 잡는 것과 안식일과의 겹침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그 해에는 유월절 양을 목요일인 13일에 잡아야 만했었다. 이렇게 됨으로서 유월절 잔치는 두 가지의 서로 상이한 날에 행해지게 되었다. Chwolson의 주장에 따르면 바리새인 그리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공관 복음에 나타나는 대로 13일 밤부터 14일까지 유월절 잔치를 행하였으며 이에 반해서 사두개인들은 요한 복음의 기록대로 전통적인 날짜인 14일 밤부터 15일까지 행하였다는 것이다.
b. P. Billerbeck: 당년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사이에 유월절 잔치의 날짜에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즉 당시의 두 계층 사이에서는 Nisan월 시작에서부터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는 것. 이 결과로서 유월절이 서로 다른 날에 시작되었다는 것.
c. A. Jaubert: 서로 상이한 달력이 당시에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달력에 따라서 Nisan 14일이 서로 다르게 계산되어졌다는 것. 즉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쿰란-에센의 달력을 사용하였으며 이에 반해 요한 복음에 나타나는 기록은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용되던 공식의 달력인 Lunisola Kalender의 날짜를 따랐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이한 주장들은 어떠한 결론이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계속 논의되어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최후의 만찬에 대한 역사적 기원을 어느 한 견해로 확정되어져야만 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주님이 어떤 형태의 식탁을 이용했든지 간에 분명히 새로운 성례전으로서 성만찬을 제정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월절의 전통에서 예수의 성만찬을 이해하는 것이 그의 의미를 더하는 것이 되어질 것이다. 이상으로 성만찬에 관한 성서 해석적인 문제는 마치고 다음에서는 성만찬 제정사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제정사
고전 11:23-26
주의 만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전 11:23-26에 나타나는 바울의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3절에서 바울은 "주께 받은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문구를 해석하는 데에 논쟁이 있다. 즉 다메섹 도상에서의 경험한 것과 같은 신비한 계시인지, 아니면 바울이 하나의 전통 -제자들 사이에서 구두로 전해 오는- 을 알고 있었는지. 이러한 논쟁은 그리 중요한 역할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유일하게 바울은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 짧은 바울의 표현은 그 상황의 실존적 성격과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포함하고 있다. 즉 이 식사는 보통 식사와는 다른 것이며 예수는 이 식사 후 잡히셔서 십자가로 향하게 되며 이것은 죄에서부터 구원의 역사라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곧 진정한 양이신 예수께서 모두를 위해서 단 한 번 희생을 당하신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이미 고전 5:7에서 예수의 죽음을 유월절 희생의 양으로 이해하고 있다.
바울은 신령한 음식과 음료가 얼마나 속된 음식 및 음료와 혼동 될 수 있는 가를 지적하기 위해서 "주님의 떡과 잔 (27절)"이라는 두드러진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 음식과 음료는 오직 주님 자신이 그에 효력을 끼치기 때문에 신령한 성격을 띄우고 있고 그래서 주님의 몸과 피와 동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자기 현시를 계산에 두지 아니하고 따라서 주님의 만찬을 축하하고 있지 않는 예배 자는 누구나 성만찬에 적절하지 못하게 처신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가서 그는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짖는다. 이것이 바울이 그의 기록에서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너희를 위한 내 몸"이라는 바울의 기록은 "이리하여 지금 높이 우신 그분은 그의 죽음에서 그가 단번에 우리에게 주셨던 것을 주님의 만찬에서 계속하여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의 "잔은 아버지에 의해서 예수에게 계획되어진 신의 뜻이었으며",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위한 희생의 잔"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주의 만찬은 희생적인 식사, 주님의 희생적인 삶을 부어 주는 데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주님의 희생적 제공, 즉 세상에서 그의 몸이었던 것에 직접적으로 향하는 제공 안으로의 참여를 포함하고 있다. 이리하여 바울은 역사적 예수의 희생을 강조하였으며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책임적 존재를 말하며 그리스도의 재림 대망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서 Wiederholungsbefehl이 두 번씩이나 나타나고 있다. 곧 성만찬에 거행될 때마다 예수 자신이 우리를 위해서 희생되셨다는 것이 기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억"이라는 것은 단순한 회상(R ckerinnerung)의 의미가 아니라 오늘에 있어서의 Vergegenw rtigung을 의미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마가(14:22-24)와 마태(26:26-28)
마태와 마가의 주의 만찬 제정 기사는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학자들은 마가의 기술을 마태가 따랐을 것이라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다. 둘 사이의 두드러진 차이점은 마태 26:28에 추가된 "죄의 용서"부분이다.
마가와 마태의 기사에 나타나는 단어인 "언약"은 출 24:8에 근거하고 있다. 마가와 마태에 나타나는 성만찬 제정에 관한 모든 기사는 예수가 그의 언약과 관련된 그 자신의 피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언약은 주되심에 관련되는 것이며, 하나님이 그 자신과 그의 백성 사이에 세우신 것에 대한 복종인 것이다. 또한 언약의 피는 그것을 나타내는 상징이며, 언약을 효과 있게 하는 수단인 것이다. 마가와 마태에서 발견되는 대명사 "나"에 대한 강조는 예수의 새 언약과 옛 계약 사이의 비교에 관련되는 것이다. 즉 마가와 마태는 예수의 말씀이 새 언약임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잘못 이해 되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 곧 잔 그 자체도 또는 물질적인 피도 이 언약을 효과 있게 하는 힘이 없으며, 십자가도 주님의 만찬 그 어느 것도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의 존재 형태 또는 새로운 하늘의 뜻을 보증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마술이나 마법을 가르치려 하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것은 예수의 희생적인 삶과 연결시켜야만 한다. 즉 마가 14:24에서 "많은 사람을 위해서 흘리는"이라는 구절은 희생적인 의미를 가진 언어인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주는 삶(Selbst-Hingabe)에 기인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많은 사람"이란 단지 몇 명만이 아닌 모든 인간들을 위한 것임을 의미한다. 또한 마가 14:25에 나타나는 "포도의 열매"에 관한 언급은 세상의 종말에 있을 메시아의 식사를 예견한 것이며 이것은 동시에 현재적 종말을 암시하고 있다.
이 마가와 마태의 기사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새로운 계약을 위해서 희생하신 예수"라는 사실이다.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는 새로운 모세로서,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로서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로써 (히 9:12) 새로운 완전한 계약 (히 9:26)을 맺은 것이다. 잔 속에 있는 것은 바로 십자가상에서 흘릴 예수 자신의 피였다. 이 피는 새로운 언약을 맺는 희생의 피였던 것이다.
누가 22:15-20
누가의 성만찬 제정 기사는 일반적으로 15-18절과 19-20절 두 부분이 합쳐진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누가는 독특하게 두 개의 잔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즉 빵 전의 잔과 빵 후의 잔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누가가 성만찬을 유월절 식사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두 개의 잔은 유월절 식사에서 사용되는 네 개의 잔 중 두 개를 언급하는 것이다. 19-20절에서 "너희를 위해 주는"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를 회상(Anamnesis)하면서 성만찬을 반복하라는 명령이며, 그리고 잔에 대한 두 번째 언급은 예수의 피안에서 이루어진 새 언약과 관련된다. 이 누가의 기사에서 바울과 같이 회상으로서의 만찬을 반복하라는 명령뿐만 아니라 종말론적 희망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또한 만찬을 하나님 나라에서의 메시아적 축제로 보고 있다.
종교 개혁시대의 성만찬이해
예수에서 시작된 성만찬은 초대 교회를 지나 종교개혁 전까지는 그리 큰 신학적 문제없이 받아들여 왔다. 그러나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을 발단으로 해서 로마 카톨릭과 개혁자와의 사이에서 성만찬에 대한 이해가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크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성만찬의 현장에 예수가 어떠한 형태로 존재하느냐"이었다.
로마 카톨릭교회
로마 카톨릭교회가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는 성만찬에 대한 입장은 집례자인 사제가 빵과 포도주에 대한 축성(Konsekration)을 하는 순간에 이 빵과 포도주는 즉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해석 - 즉 화체설(Transsubstantiationslehre) - 이다. 로마교회는 이를 통하여서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를 믿게 되었고 변할수 없는 교리로서 오랫동안 지속시켜 왔기에 지금도 동.서방교회에 정착되어 있다. 이그나티우스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받으신 육체가 실제적으로 그 현장의 Elemente(빵과 포도주) 속에서 변화하여 성도에게 전달됨을 강조하면서,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무리들은 예배나 기도회, 그리고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에서 분리시켰다. 이 화체설은 1215년 이노센스(Innozenz) 3세 교황 밑에서 행해진 공의회에서 확고한 교리로 확정되었다. 이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사제와 희생물이 그리스도 자신과 동일하며, 그의 몸과 피가 빵과 포도주의 형태로 제단의 성례 안에 실제 포함되어 있으며, 신적 능력에 의해 그 빵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로 본질 변화한다." 이에 덧붙여서 공의회는 정당하게 서품 된 사제만이 성체 성사를 축성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당시에 신자의 영성체가 너무나도 드물어졌기 때문에 신자는 적어도 1년에 한 번, 곧 부활절 때 성체 성사를 받지 않으면 안됨을 교회법으로 정하였다.
이 화체설은 1551넌 10월 11일 트렌트 공의회 13회기의 제 4장에서 다시 한번 명확히 공포되었다: "제4장 실체 변화에 대하여; 우리의 속죄주 그리스도는 빵의 형태 아래 봉헌된 것을 참으로 그의 몸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언제나 확신되어 온 것을 이제 이 성스런 공의회는 새로이 선언한다. 즉 빵과 포도주의 축성에 의하여 빵의 실체 전부가 우리 주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변화하고 또 포도주의 실체 전부가 그의 피의 실체로 변화한다고 거룩한 카톨릭 교회는 이 변화를 실체 변화라고 부른다." 트렌트 공의회가 이상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현존에 관한 가르침을 곡해하는 해석에서 지키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그것은 루터가 명백히 실체변화라는 가르침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카톨릭 교회가 이 전통적인 가르침을 재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루터의 성만찬 이해
일반적으로 16세기의 종교 개혁자들의 대부분은 성찬이 희생 제사(Opfer)라는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몹시 반대하였다.
루터는 1520년에 저술한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 카톨릭 교회의 성례전 제도와 신학을 반박하고 있다. 여기서 루터는 성만찬에 관해서 로마 교회가 세 가지 과오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첫째는 신자에게 떡만을 허락하고 포도주를 주지 않는 것이다. 루터는 고전 11장 25절의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는 것은 일반 신도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으로 포도주를 일반 신도들에게 주지 않는 것은 성례전을 변질시키는 것이고 다 함께 참여함으로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 되므로 잔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죄에 속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둘째는 카톨릭 교회의 화체설의 과오를 지적했다.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실제의 몸으로 변한다는 화체설은 마술적인 것이라고 표현한다. 루터는 An den christlichen Adel에서 화체설은 신조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낸 하나의 설(Meinung)일 뿐이다라고 역설하고 있다.
셋째로 카톨릭 교회가 성만찬을 희생 제사로 해석함을 지적한다. 루터는 성만찬이 희생 제사(Opfer)도 인간이 행하는 선업(gutes Werk)도 아니고 만찬이며, 그리스도가 이 만찬을 제정한 것은 믿는 자를 위로하는 신앙을 우리 마음에 불러일으키기 위하여서라도 역설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루터는 그리스도가 실제로 성찬에 현존(Realpr senz)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성서의 말씀을 카톨릭과 같이 문자대로 믿었으나 카톨릭과는 다른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그는 주장하기를 "우리가 성찬 시에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 안에, 함께 그리고 아래에서 (in, mit und unter dem Brot und Wein)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소유한?quot;. 이런 루터의 표현은 보통 Konsubstantiaionslehre라 불리지만 루터 자신은 이 용어를 사용치를 않고 있다. 루터는 성만찬과 하나님의 말씀을 연관시키고 있다. 그는 대 요리문답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단순한 빵과 포도주에서 구별시켜 주는 것은 말씀이고, 말씀이 외적인 요소(Elemente)와 결합할 때 그것은 성례전이 된다. 말씀으로 인하여 그 요소들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말하실 수도 없고 속이실 수도 없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무소부재(Ubiquit t)를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우편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통치를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몸이 이 영광을 나눠 가짐으로 하려는가? 무소부재 역시 나눠 가지시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고 통치하시는 곳에 그리스도도 역시 육체적으로 임재 하신 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신성과 인성의 통일성을 주장하는 그의 기독론이 뒷받침되어서,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존재하는 곳에는 육적으로도 존재한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그의 이론은 빵이 곧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성찬은 절대적 효과가 있어서, 악한 자들이 성찬을 받거나 집행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참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나 신앙 없이 받아진 그리스도의 몸은 독약이며 죽음이다라고 주장되고 있다.
루터는 성찬이 주는 유익에 대해서 "이것을 통하여 죄 사함을 얻고, 새 사람을 강화시키고 영양을 주며, 우리들의 신앙이 새로워지고 강화시켜 주는 양식과 자양물"이라고 하였고, 죽음에 대항하는 힘을 얻고 영생에 들어가게 한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능력과 유익을 받을 수 있는 자는 "이 말씀을 듣고 믿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쯔빙글리의 성만찬 이해
쯔빙글리의 성만찬론은 기념설 또는 상징설로 불려진다. 곧 "빵과 포도주는 우리를 위한 희생제사에서 드려진 몸과 피의 표징들이다. 이 표징들은 몸과 피가 이렇게 드려진다는 것을 상징하며, 그리고 우리에게 구속사역을 회상시켜준다"는 것이다. 그의 성찬론의 중점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기념, 구속의 감사, 영적 연합에 있다.
쯔빙글리는 1523년의 저서 67개 논조에 대한 해설에서 "미사는 희생제사가 될 수가 없으며 단지 그리스도의 희생을 되새기는 회상(Wiederged chtnis)이며 구속에 대한 확신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여서 그는 성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를 부인하고 빵과 포도주는 단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는 견지하였으나, 육체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은 부인하고, 믿음 안에서 영적 참여를 가르쳤다.
그가 이같이 주장하는 배경에는 성만찬 제정의 말씀에서 "est(ist)"라는 단어를 "significat(bedeutet)"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서 쯔빙글리는 성서의 예를 제시하고 있다. 출애굽기의 "일곱 염소는 칠 년의 풍년이다" 또는 요한 복음의 "나는 포도나무이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등의 표현에서의 "이다"는 "의미한다"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표상은 성찬에 계시지 않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지리적 관념을 가지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데 지상의 성찬의 자리에 동시에 계실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는 승천하신 후에 그의 신성으로만 편재하시며 그의 인성으로는 하늘의 일정한 장소에 제한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쯔빙글리에게 있어서는 세례가 내적인 거듭남의 표시와 상징이듯이 성찬도 역시 한 표시이며 상징일 뿐이다. 이렇게 생각함으로서 그는 성만찬을 그리스도와 그리고 믿는 그리스도인들과의 공동 식사(Gemeinschaftmahl)로 간주하고 있다. 그는 성찬에 있어서 참여자의 신앙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또는 실제적으로 성찬에 임재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통해서 임재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앙의 행위를 통해서 임재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사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Eucharistie)를" 행할 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임재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쯔빙글리는 "das Essen des Glaubens", "geistige Speise"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찬에 진정으로 임재 한다고 믿는 바 그러한 임재 없이는 영적 교제(Kommunion)가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조악하고 육체적인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종교적이고, 신앙적이고, 경건한 마음에 의한 영적인 방법에 의해서 먹히운다고 믿는다."
쯔빙글리는 1525년 4월에 Z rich에서 미사를 폐지하고 대신 성찬예배로 대치하였다. 이 예식은 청년들에게는 목요일에, 중년층은 24일에 노년들에게는 부활절 주일에 행하였는데, 이때 누룩이 섞이지 않은 빵과 포도주를 나무그릇에 담아 행하였다. 그는 1년에 네 차례-부활절, 오순절, 가을에 한 번, 크리스마스-성찬식을 행하도록 제안하였다.
Marburg회의
루터 파와 쯔빙글리 파의 양쪽의 신학적 이견을 조정하기 위해서 필립의 주선으로 자신의 성에서 1529년 10월 1일에 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15개 조문에서 14항까지는 커다란 문제없이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15항인 성만찬에서 합의를 이루지 못한 채 이 회답은 끝을 맺었다. 이에 대해서 루터는 표현하기를 "우리는 서로 다른 영을 가졌다"고 하였다.
칼빈의 성만찬 이해와 실제
종교개혁의 제 2세대인 칼빈의 성찬론은 다른 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로마 카톨릭의 비성서적인 성찬론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하였고 루터와 쯔빙글리의 성찬 논쟁을 거치면서 양자를 조화하려는 마틴 부처의 영향을 받아서 소위 "영적 임재설"로 정착하게 되었다.
성례전
먼저 칼빈은 성례전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외형적인 표로 확인하는 증거이며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성례는 약속에 대한 인장이며, 언약의 표징이다. 그는 로마 카톨릭과는 달리 성례전에 참여하기 전에 무엇보다도 설교를 통해서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칼빈은 "설교를 들을 때 비로소 보이는 표징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게 된다"고 하였고 복음이 선행하지 않는 성례는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이 성례전에는 반드시 성령이 동반되어야 하는데 "성례전이 정말로 자체의 직책을 수행하려면 내적 선생인 성령이 와서 마음을 감동시켜야 하며, 이 성례전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 없는 성례전은 아무리 거창하게 거행되어도 신앙을 북돋아 줄 수 없는 것이다.
성만찬
그러므로 빵과 포도주는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되는 것을 나타내는 징표이며, 상징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계속해서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서 받는 보이지 않는 양식을 상징하는 표징"이라고 한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상징으로서 빵을 받을 때 빵이 신체에 영양과 생명을 주어 신체를 유지하는 것 같이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영혼에 힘과 생명을 주는 유일한 양식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칼빈은 성찬의 중요한 기능은 "그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그의 피는 참된 음료며(요한 6:55), 그것을 먹는 우리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요한 6:54) 선언하신 그 약속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약속에 대한 인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찬은 그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보낸다"고 칼빈은 설명한다. 그는 또한 성서 주석에서 "성찬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려고 준비된 기념물"이라고 설명한다. 칼빈은 1542년의 제네바 신앙 문답서 제 362문에서 성찬은 "우리의 신앙고백의 표이며 표시이다. 즉 이러한 예전에 의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선언하고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성찬의 목적과 효과
성찬 제정의 목적에 대해 칼빈은 "주님이 그의 몸과 피를 주셔서 우리의 영혼이 영원한 생명 안에서 양육되도록 보장하기 위해서 이를 제정하셨다"고 말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도록 우리를 훈련하는 것"이며 더 나가서는 "주께서는 우리에게 한편으로는 순결하고 거룩한 생활을,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과 평화와 화목을 권장하며 고취하는 방법으로 성찬을 제공하셨다"고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성찬은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자라며 믿음 안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의도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받으신 고난이 모두 우리를 살리기 위하신 것이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며 우리는 일생 동안 끊임없이 이 빵에 의해서 자라고 힘을 얻고 보존되므로 그 살리는 일이 영원하다는 확신도 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칼빈은 성찬의 효과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구속과 의와 성화와 영생과 그 밖의 모든 은혜들이다"고 말한다. 또한 칼빈은 신자간의 일치의 효과가 있음을 설명한다. 즉 "주께서는 성찬에서 자신의 몸을 우리들에게 주셔서 우리와 완전히 하나가 되시며 우리도 그와 하나가 되게 하시는데, 주께는 한 몸이 있을 뿐이며 우리를 모두 그 몸에 참여하게 하시므로, 이 참여에 의해서 우리가 모두 한 몸이 될 필요가 있다. 성찬에서 제시되는 빵은 이 단결을 표시한다"는 것이다.
성찬에 있어서 말씀과 믿음과 성령
칼빈은 우선 "말씀이 없으면 성찬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우리가 성찬에서 받는 은혜에는 모두 말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성례를 마술같이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하면서 "믿음과 관계없이 받아들인 성례는 교회를 가장 확실하게 멸망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례는 믿음으로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칼빈은 "성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과 그의 모든 복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를 받는다"고 표현한다. 또한 성령이 동반하지를 않으면 성례는 유익이 없게 된다.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져오며, 성례가 우리 사이에서 자리를 얻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믿음이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이며, 우리의 지성을 성령의 빛으로 비추시며 우리의 마음을 여셔서 말씀과 성례를 들어오게 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며, 성령의 능력이 우리와 멀리 계신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의 살이 우리 속에 들어와 영의 양식이 되도록 결합시킴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칼빈은 불신자의 성찬 참여를 반대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임재
칼빈은 그리스도의 몸이 공간적으로 임재 한다는 것을 부인한다. 따라서 화체설을 반대하며, 쯔빙글리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계시므로 그리스도의 편재 설도 있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반면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성만찬에 임재 함을 말한다. 그는 "성찬에 대한 소고"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이 거룩한 의식의 효과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하며 이적 적인 능력으로 그것이 효력을 발생하게 된다고 주장해야 하며,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안에 참예의 띠가 된다"고 주장해야 한다.
성만찬 실제
칼빈은 "성찬을 자주,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 집행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는 1537년 제네바의 소 의회의 대표로서 제네바에 있어서 교회와 예배의 조직에 대한 문서에서 성만찬을 자주 - 일주일에 한 번씩 - 집행하기를 주장했었으나 그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를 않았다. 그러나 칼빈은 Stra burg에서는 월 1회씩 성찬식을 집행하였다. 그는 1541년에 재차 제네바의 소 의회에 성만찬을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씩 행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다시금 거절되었고 이에 대해 의회는 일년에 4회의 성만찬 집행을 결정하였다.
4. 구약성서의 희생 제사와 예배
I. 들어가면서
인간은 지상에 존재한 이후로 계속하여 다양한 신들을 예배하여 왔다. 인류의 역사는 곧 예배의 역사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예배는 그만큼 인간의 종교 생활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예배야말로 인간과 신을 관계 맺는 가장 소중한 연결고리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예배가 없이는 인간과 신 사이의 관계가 형성되지 못한다. 예배를 통하여 인간은 비로소 신을 만나고, 신은 인간의 예배 행위를 매개로 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참으로 예배는 인간과 신 사이의 관계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이는 인류가 지상에 존재해 온 이후로 지금까지 변함없이 적용되는 진리이다. 어느 종교이건 예외가 없다. 예배 없는 종교란 존재하지 않는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세상에서 예배를 배제한 종교라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구약성서는 이 점을 가장 분명하게 확증하는 책이다. 구약성서를 읽어보면, 이스라엘 주변 세계의 여러 민족들, 곧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이집트 및 시리아-팔레스타인 등지의 거주민들이 오랜 세월 동안 매우 다양한 신들을 섬기고 예배해 왔음을 알 수 있다(삿 16:23; 삼상 6:4; 왕하 3:26-27; 5:17 등). 그들은 대체 어떠한 신들을 섬기고 예배했던 것일까? 이는 그들이 어떠한 종교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그들의 종교는 자연계 안에 있는 각종 피조물들을 신적인 존재로 보거나 숭배의 대상으로 여기는 이른바 '자연 종교'(nature religion)의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섬기고 예배하던 신들은 하늘과 땅과 물과 바다와 공기와 해와 달과 별들 및 각종 동식물 등일 수밖에 없었다. 비록 구약성서가 이러한 자연 숭배 행위를 야웨 유일신 신앙의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기는 하지만, 고대 근동 세계의 무수한 민족들이 그들 나름의 방식을 따라 여러 신들을 섬기고 예배해 왔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이스라엘 민족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구약성서는 민족사의 시작에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야웨 하나님만을 섬기고 예배해야만 했던(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사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공식적인 예배 행위는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으로 옮겨간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가나안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렀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자손의 약속과 땅의 약속을 확인받은 후에 그곳에 제단을 쌓고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창 12:7-8).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이끌어내신 후에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비롯한 각종 율법 규정들을 주셨는데(출 19장 이하), 그 중에는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할 것인지를 상세하게 지시하는 제사 규정들(레위기, 특히 1-7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민족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면서부터, 그 지역 사람들이 섬기고 예배하던 다른 신들을 마음대로 섬기기 시작했다. 이른바 우상 숭배에 빠진 것이다.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 행위는 사사 시대를 거쳐(삿 2:11-13, 19; 3:7; 6:25, 28, 30 등) 왕정 시대에까지 이어졌으며(왕상 11:4-8; 16:32-33; 18:19; 왕하 17:16-17; 21:3, 23:4 등), 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지속되었다(왕하 17:24-34). 진실한 마음으로 야웨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이 훨씬 많았던 것이다. 이스라엘 나라가 남북으로 분열되고 마침내는 완전히 멸망에 이르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하나님 아닌 다른 신들을 예배하고 섬긴 것이야말로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대체 어떠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해야만 했던 것일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예배는 참으로 많은 구성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예배를 드리기 위한 공간인 성막 또는 성전, 그리고 진설병이나 그룹, 등대, 제단, 향단 등의 각종 예배용 물품들, 예배에 사용되는 노래(시편)와 음악 및 각종 악기들, 성서 본문 읽기와 기도 및 설교 등의 다양한 예배 순서들, 십일조를 포함한 각종 예물들, 예배를 위해 봉사하는 제사장과 레위인 및 성가대 등의 사람들, 예배에 참여하여 희생 제사를 드리는 자들, 안식일이나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등의 각종 절기와 축제 등이 그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을 여기서 다 다룰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그것들 중의 일부는 오늘날의 예배에서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이 글에서 그것들 모두를 상세하게 다룰 필요는 없다.
도리어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예배의 구성 요소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하는 자들의 마음가짐이나 삶의 자세에 있다. 구약성서는 시종일관 이 점을 강조한다. 물론 이러한 강조점은 구약 예배의 핵심을 이루는 동물 희생 제사와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은 동물을 제물로 잡아 드리는 희생 제사에 초점을 맞추되,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삶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오늘의 우리에게 어떠한 교훈을 주는지를 중점적으로 논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바람직한 예배의 원형에 해당하는 아벨의 제사를 살핀 후에, 레위기가 규정하는 이스라엘의 5대 제사에 대하여 논하기로 한다. 이어서 이스라엘의 잘못된 예배 행위를 우상 숭배와 형식주의(mannerism, 본질에는 관심이 없고 형식에만 치우친 제사 행위)의 측면에서 살피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바람직한 예배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종합적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II. 바람직한 예배는 이러한 것이다: 아벨의 제사
구약성서는 어떠한 제사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바람직한 예배인지를 처음부터 분명하게 밝힐 필요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그 가장 뚜렷한 증거를 우리는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본문은 하나님을 향한 이상적인 예배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 소개된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사실 하나님께 제물을 바친 인간의 첫 제사 행위로 기억된다. 그 중심 내용은 이렇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첫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아들을 낳는다. 가인은 나중에 커서 땅을 경작하는 자(농업)가 되었고 동생 아벨은 양을 치는 자(목축업)가 되었다. 이 둘이 어느 날 똑같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었는데, 농사를 짓고 사는 가인은 그가 수확한 농산물, 곧 자신이 경작하던 땅의 열매를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드렸고, 양을 치는 아벨은 그가 가지고 있는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런데 묘하게도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를 물리치시고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셨다.
왜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던 것일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히브리어 본문을 좀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히브리어 본문은 흥미롭게도 가인과 아벨 두 사람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를 똑같이 히브리어 '미느하'로 표현하고 있다. '미느하'는 '선물'(膳物)이라는 뜻과 '소제'(素祭; cereal offering)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낱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드린 제물이 무엇이었느냐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다음 항목에서 살필 이스라엘의 제사법에 의하면 곡물로 드리는 제사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위기 2장에 있는 소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스라엘에서는 양이나 염소가 아닌 송아지나 비둘기를 제물로 삼아 드리는 경우가 더 많았다. 레위기에 규정된 번제나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이 이를 잘 보여 준다.
따라서 두 사람의 제사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 곧 가인은 곡물을 드린 까닭에 그의 제사가 안 받아들여진 것이고 아벨은 피를 흘리는 양의 제사를 드린 까닭에 그의 제사가 받아들여진 것이라는 해석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러한 해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의 속죄 제물로 보는 신약성서의 관점에서 생겨난 것이다("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 9:22). 그러나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이것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양자 사이에 있는 제물의 차이는 문화권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지, 결코 제사의 정당성을 보증해 주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순전히 자신의 노동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예물로 드린 것이었다. 생각해 보라. 농사짓고 사는 가인에게서 어떻게 양의 제사를 바랄 수 있겠는가를! 하나님께서 어찌 땅을 갈고서 그 열매로 사는 가인에게서 무리하게 양이나 염소의 제사를 원하시겠는가? 하나님은 결코 사람의 직업이나 그 직업과 관련된 제물의 종류를 차별하는 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진짜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창세기 4장 4절과 5절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이 본문을 표준새번역 개정판(2001년)으로 읽으면 다음과 같다:
주님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히브리어 본문을 직역하면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반기셨으나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가인과 그의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다.
이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은 아벨이 바친 제물뿐만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제물보다 먼저 받으신 것은 아벨이라는 한 인격이었다. 그래서 본문은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아벨과 그의 제물')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대해서 설명하는 히브리서 11장 4절 본문에 의해서 뒷받침된다. 이 본문은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린 것은 순전히 그가 가진 믿음에 의해서였다고 말한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아벨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과 그를 경외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까닭에, 흠 없고 순전한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 달리 말해서 아벨의 제사는 그의 정결한 생활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었다는 얘기다. 따라서 그가 하나님께 드린 제사는 사실 그의 삶 전체를 드리는 제사라고 할 수 있다. 즉 아벨은 생활 속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려고 애썼고, 그러한 삶의 연장선상에서 정성스러운 제사를 드린 것이다. 참으로 그의 제사는 기쁨과 감사가 있는 제사였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였다.
다소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하시는 다음의 말씀(4:7)이 이를 잘 보여 준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가인에게 주어진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역으로 아벨이 평소에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 제사도 바른 것이었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러한 결론은 제사가 공의롭고 바른 삶과 같은 차원에 속한 것임을 강조하는 예언자들의 메시지와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사 1:10-17; 호 6:6; 암 5:21-24; 미 6:6-8; 렘 7:3-7 등). 제사는 곧 그것을 드리는 자의 삶이요 인격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삶과 인격 전체가 곧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요 예배인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그렇지 못했다. 그에게는 아벨만큼의 성숙한 믿음이 없었던 까닭에, 자연히 그의 제사는 흠 없고 순전한 것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아마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바친 아벨처럼 정성을 기울여 제물을 준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제사였던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를 경외하는 마음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그가 자기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당장에 성을 내면서 얼굴색을 바꾼 것에서 그대로 드러난다(창 4:5). 만일에 그에게 정말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나 경외심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무슨 이유로 자신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으셨는지를 헤아리고서 자신의 잘못된 상황을 개선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러한 반성이 없었다. 도리어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크게 분노할 따름이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제물이 아벨의 경우처럼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제사가 아니라 의무감에서 비롯된 억지 제사였음을 드러낸 셈이 되었다.
또한 가인은 평소의 생활 속에서 올바른 행동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에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그는 죄의 유혹에 너무도 쉽게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이었다. 죄의 지배를 받고서 사는 불경건한 사람이었던 것이다(4:7). 그의 이러한 성향은 마침내 동생 아벨을 시기한 나머지 그를 들에서 쳐서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다(8절). 그는 동생을 죽이고서도 뻔뻔스럽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숨기면서 하나님께 대드는 파렴치한 사람이었다(9절). 이러한 그가 하나님께 아무리 좋은 제사를 드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하나님은 가인이라는 인격과 그의 삶을 받지 않으신 것이고, 당연히 그의 그릇된 인격과 삶으로부터 비롯된 그의 제물까지도 받지 않으신 것이다. 가인의 이러한 모습을 두고서 요한일서 3:12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참조, 유 1:11).
III. 이스라엘의 다섯 가지 주요 제사
1. 레위기 제사법의 배경
구약성서는 여러 군데에서 이스라엘의 제사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지만(출 20:24ff.; 34:25ff.; 민 15장; 신 12장 등), 그래도 가장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책은 레위기이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레위기는 출애굽 사건과 그 이후에 주어진 시내산 계약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출애굽 사건은 고통에 찬 이스라엘의 신음과 부르짖음 소리에 대한 야웨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출애굽 사건을 묘사하는 출애굽기 2:23-24; 3:7-9; 6:5; 민수기 20:16; 신명기 26:6-8; 느헤미야 9:9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본문들은 한결같이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의 고역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그들의 탄식과 신음 소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생각하시고서 그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고 보고한다.
이스라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결국 압제와 속박 속에서 신음하는 그들을 이집트로부터 '내보내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이러한 출애굽의 은총은 그들로 하여금 구원과 해방의 하나님을 잘 '섬기게' 하려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가지고 있다("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 3:12, 18; 4:23; 5:1, 3; 7:16; 8:1, 20; 9:1, 13; 10:3 등). 이를 위해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비롯한 각종 율법 규정들을 주셨다. 이것을 우리는 시내산 계약(법)이라 칭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시내산 계약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은총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시내산 계약은 그러기에 의무이기 전에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 감격하는 마음으로 지켜야 할 자발적인 응답의 규정인 셈이다. 레위기도 그 중에 하나에 속하는 것으로서, 구원 받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고 예배할 것인지, 곧 하나님께 어떻게 제사를 드리고 또 생활 속에서 성결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는 책이다. 레위기의 이러한 가르침은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백성이 되며 이방 나라들을 위한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인가(출 19:5-6)를 목표로 하고 있다.
2. 번제
레위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1-10장)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과 관련되며, 둘째 부분(11-27장)은 일상생활 속에서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과 관련된다. 그리고 이 둘은 다음과 같이 세분할 수 있다: 제사 제도(1-7장), 제사장 위임식(8-10장), 부정함과 그 처리 방법(11-16장), 실제적인 성결을 위한 규정들('성결 법전'이라고 함; Holiness Code, 17-26장), 서원 예물에 관한 규정(27장). 여기서 우리가 취급하고자 하는 것은 이른바 이스라엘의 5대 제사라고 알려진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의 제사들이다(레 1-7장). 이 제사들은 여러 가지 의미들을 가지고 있지만, 한 마디로 요약해서 말하자면 희생 제물을 통해 개인과 백성의 잘못을 용서받고(속죄), 더 나아가서 향기로운 제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계약 관계)를 유지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들 주요 제사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번제를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번제(燔祭, Burnt Offering; 히브리어로 '올라')는 그 이름이 뜻하는 바와 같이 남김없이 다 태워서 드리는 제사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번제는 전반적인 속죄를 위하는 제사요, 온전한 헌신을 다짐하는 제사라고 할 수 있다. 번제는 그 제물의 내용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누인다. 소의 번제(1:3-9)와 양이나 염소의 번제(1:10-13), 그리고 비둘기의 번제(1:14-17) 등이 그러하다. 물론 이러한 구분은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재물의 내용이 달라져야 한다는 평균의 원칙에 기인한다. 즉 재산이 아주 많은 사람은 소를 제물로 드리고 중산층 정도에 속하는 사람은 양이나 염소를 제물로 드리며, 그러할 경제적인 여유가 전혀 없는 사람은 비둘기를 제물로 드리도록 규정한 것이다. 세 가지의 번제가 그 절차에 있어서 대동소이하므로 여기서는 그 첫 번째인 소의 번제만을 정리해 보자.
예배자, 곧 헌제자(獻祭者)가 소를 가지고 번제를 드릴 경우에는 일정한 순서를 따르는데, 흥미로운 것은 헌제자와 제사장들이 하는 일이 명확하게 구별된다는 점이다. 먼저 헌제자는 제물의 머리에 안수함으로써(4절) 자신의 죄를 고백함과 동시에(참조, 16:21) 그 제물이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죽을 것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이는 자신의 죄를 희생 제물에게 전가(轉嫁)하는 행동에 다름 아니다. 제물의 머리에 안수한 그는 자신의 죄와 죽음을 대신할 그 제물을 죽이고, 죽은 제물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를 그릇에 담아 제사장들에게 전달한다(5절). 이어서 그는 희생 제물의 가죽을 벗기며, 그 다음에는 죽은 제물의 몸을 불에 타기 쉽게 조각을 낸다(6절). 마지막으로 그는 오물이 많이 묻은 제물의 내장과 정강이를 깨끗하게 씻는다(9절). 그렇다면 제사장들은 어떠한 일을 하는가? 그들은 먼저 헌제자가 그릇에 담아 온 죽은 제물의 피를 회막 문 앞 사면에 뿌린다(5절). 이어서 그들은 단 위에 불과 나무를 준비하고(7절), 헌제자가 가져온 제물의 조각들과 머리와 기름을 단 위에 놓는다(8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단 위에 올려진 모든 것들을 불살라 하나님께서 흠향하시도록 한다(9절).
이러한 역할 분담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번제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사람은 제사장들이 아니라 헌제자라는 사실이다. 희생 제물을 죽이고 피를 받고 가죽을 벗기고 몸을 토막 내고 내장과 정강이를 씻는 모든 자질구레한 일들은 헌제자의 몫으로 돌아가고, 제사장들은 그 헌제자가 가져다 준 것을 제단에서 하나님께 바치는 일을 맡는다. 이는 헌제자가 제사장의 제사(예배) 집전을 그냥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써 제사장 집전의 예배에 적극 참여하였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제사는 제사장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을 다 도맡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헌제자의 적극적인 협조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얘기다. 어찌 보면 이스라엘의 제사는 처음부터 끝가지 헌제자가 주도하는 예배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이 점에서 오늘의 우리는 설교자 중심의 예배 구조를 개선하여 회중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예배 참여를 유도하는 예전 프로그램을 개발하여야 할 것이다.
3. 소제와 화목제
번제에 바로 이어서 소개되고 있는 소제(素祭, Cereal/Grain Offering; 히브리어로 '미느하')는 다섯 가지 희생 제사들 중 유일하게 곡물을 불로 태워 드리는 제사로서, 야웨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충성을 표현하는 제사이다(2장). '미느하'가 '선물 또는 공물'이라는 뜻을 아울러 가지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소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소제에 쓰이는 재료에는 고운 (밀)가루나 볶은 곡식과 기름, 유향 등이 있다. 소제물에 누룩이나 꿀을 넣는 대신에 소금을 넣는 것은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소제는 예물의 성격에 따라 요리하지 않고서 드리는 예물(1-3절)과 요리하여 드리는 예물(4-10절)의 둘로 나누어진다. 요리하여 드리는 소제물은 화덕(oven)에 굽는 경우와 번철(frypan/griddle)에 부치는 경우 및 솥에 삶는 경우 등의 세 가지 방식을 사용할 수 있다. 불로 태우고 남은 것은 제사장의 몫으로 돌리는 것이 기본 원칙이었다.
소제의 이러한 특성은 오늘의 예배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기본 정신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출애굽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이스라엘의 제사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예배도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구원 은총에 감사하는 태도를 수반해야 하는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는 자야말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시 50:8-15, 23). 또한 시편 기자가 노래하는 바와 같이, 찬양과 감사야말로 짐승을 잡아 죽이는 희생 제물보다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시 69:30-31). 요컨대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일상 생활 속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무수한 은총들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 없는 예배는 올바른 예배라고 할 수가 없다.
세 번째 제사인 화목제(和睦祭, Peace/Fellowship Offering)는 유일하게 복수형으로 표현되는 제사이다. 히브리어로 '제바흐 슐라밈'인데, 여기서 '슐라밈'이라는 낱말은 우리가 잘 아는 '샬롬'의 복수형다. 따라서 '화목제'로 번역되는 '제바흐 슐라밈'을 직역하면 '평화들의 제사' 또는 '평화들을 목적으로 하는 제사'라는 뜻이 된다. 이 제사는 일차적으로는 하나님과 예배자 사이의 화해와 친교 및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서원을 위해서,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예배자와 가족을 포함하는 그의 이웃과의 화해와 친교를 위해서 드리는 제사이다(3장). 화목제는 제물의 종류에 따라 소(1-5절), 양(6-11절), 염소(12-17절) 등의 셋으로 나누인다.
화목제의 제물은 소나 양이나 염소의 내장, 콩팥, 간 등에 있는 기름을 반드시 드리며, 양의 경우에는 기름기가 많은 꼬리 부분을 드린다. 제물의 가슴과 오른쪽 다리는 제사장의 몫으로 돌아가며, 나머지는 제사 드리는 자가 친지들을 비롯한 이웃들과 나누어 먹는다. 친교의 제사이기 때문에 다섯 제사 중에서 유일하게 공동 식사를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의 예배는 화목제의 이러한 요소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하고 있다. 가능하다면 화목제가 화해와 친교를 목적으로 하는 제사라는 점에 기초하여, 예배가 끝날 무렵이나 끝난 후에 성도들로 하여금 예배의 연장선상에서 화해와 친교의 순서를 갖게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친교의 식사를 나누게 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이 점에서 볼 때 화목제의 실현은 대규모 교회보다는 소규모 교회에서 보다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음이 분명해진다. 대형화를 추구하는 교회는 거기에 알맞는 친교의 프로그램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4. 속죄제와 속건제
속죄제(贖罪祭, Sin Offering; 히브리어로 '핫타아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부지중에) 야웨의 계명을 위반했을 경우에 그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이다(4:1-5:13). 고의로 또는 일부러 지은 죄는 제사를 통해서도 사함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민 15:22-31), 속죄제에 해당하지 않는다. 속죄제를 위한 제물에는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소나 염소 또는 비둘기나 곡식 가루 등이 있으며, 하나님께 드리고 남은 것을 제사장의 몫으로 돌려야만 했다. 물론 제사의 형태는 죄를 지은 사람의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서 달라진다. 제사장(4:3-12), 이스라엘 온 회중(4:13-21), 이스라엘 회중의 지도자인 족장(4:22-26), 이스라엘 일반 백성(평민, 4:27-35) 등이 그렇다.
마지막으로 속건제(Guilt/Trespass Offering; 히브리어로 '아샴')는 하나님(5:15-19)과 사람(6:1-7)에게 잘못한 일이 있을 경우에 드리는 제사이다(5:14-6:7). 속건제는 범죄 행위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자에게 보상할 것을 요구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속죄제와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한 예로 레위기 5:6은 이 두 제사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보아 속죄제가 하나님께 대한 죄에 더 많이 치중하고 있다면, 속건제는 사회적인 측면에서의 위반 행위를 더 많이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 보상의 법칙이다. 레위기 6:1-7은 만일에 이웃에게 잘못하여 물질적인 손해를 입혔을 경우에는 반드시 피해액의 오분지 일을 더해 보상할 것을 명하고 있다.
오늘의 예배는 속죄제와 속건제의 이러한 예배 정신을 충실하게 반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잘못을 범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삶이 속죄제와 속건제의 요건에 해당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배자는 누구나 하나님과 사람에게 잘못한 모든 것들을 사함 받으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에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서는 안 된다. 이웃에게 잘못한 일로 인해서 어떤 형태로든 손해-그것이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간에-를 입혔을 때에는, 어떠한 방법으로든 그것을 충분히 보상해 주어야 한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면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그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는 예수의 가르침(마 5:23-24)도 같은 맥락에 속한 것이다.
IV. 하나님을 잘못 섬기는 이스라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 은총을 경험한 이스라엘은 오직 그만을 예배하고 그에게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지도층 인사들을 포함한 다수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를 오래도록 간직하지 못한 채로 서서히 야웨 신앙의 기본 틀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탈선은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그 하나는 하나님 아닌 다른 신들(우상)을 섬긴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되 예배의 본질을 망각한 채로 형식주의에 빠진 것이었다. 첫 번째 것을 먼저 살피기로 하자.
1. 하나님 아닌 것들을 예배하는 잘못
(1) 우상 숭배로 점철된 역사
하나님 아닌 것들을 예배하려던 이스라엘의 잘못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제반 율법 규정들을 전달하시던 바로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금송아지 사건이다. 출애굽기 32장에 의하면,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은 아론을 사주하여 금송아지를 만들게 하고서는, 그 금송아지야말로 출애굽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그를 향하여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으며, 그 앞에서 기쁨의 잔치를 열었다(1-6절). 그러나 금송아지 숭배는 피조 세계에 속한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을 형상화해서는 안 되고, 그것을 섬기거나 예배해서도 안 된다는 십계명의 엄한 금지(출 20:4-5)를 위반하는 행동이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탈선은 가나안 정착 이후로 한층 심화되었다. 유목 이동 문화에 친숙해 있던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풍요와 다산(多産)을 추구하던 바알 종교에 깊숙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이야말로 가나안 땅에 비를 내려주는 신이라고 생각했으며, 바알과 그의 배우자인 아세라 사이의 부부 관계가 풍요와 번영을 약속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바알 신전에 이른바 신전 창기(temple prostitute)를 두고서 그들과 성 관계를 맺음으로써 바알과 아세라의 부부 관계를 재현하고자 했다. 인간의 성 본능에 기초한 바알 종교의 이러한 매력은 야웨 하나님의 성적인 파트너를 허용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유혹으로 작용하였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쉽게 그 유혹에 넘어갔는가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초기인 사사 시대의 혼란상에 잘 반영되어 있다(삿 2:11-13; 참조, 호 4:13-14). 비록 사사들의 열정적인 활동이 끊임없이 이어지긴 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사사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바뀌었어도 이스라엘의 바알 종교 밀착은 여전하였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주변 나라들과 활발하게 무역 거래를 하던 다윗-솔로몬 시대의 국제화, 개방화 정책이 본격화되면서부터 바알을 비롯한 다른 신을 숭배하는 일이 한층 빈번해지게 된 것이다. 특히 솔로몬의 무분별한 정략 결혼은 예루살렘을 이방 종교의 전시장처럼 만들어 버렸다(왕상 11:1-8). 이러한 분위기는 분열왕국 시대에도 변함이 없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경우, 여로보암 1세(주전 922-901년)는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단을 쌓고서는 그 송아지 신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분향하기까지 하였다(왕상 12:28-33). 이스라엘 역사가들이 북왕국의 왕들을 설명할 때마다 18왕들 가운데 15명이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갔다"고 비판하는 것을 보면(왕상 15:26, 34; 16:19, 26, 31 등), 송아지 숭배가 북왕국에서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는지를 금방 알 수 있다. 이방 여인 이세벨과 결혼한 후로 바알 숭배를 온 백성에게 강요한 아합의 행동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사당 속에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니....(왕상 16:31-33).
남왕국 유다에서는 어떠했는가? 남왕국에서는 바알 종교 외에도 다른 많은 이방 종교가 폭넓게 유통되었다. 그 이유는 남왕국이 주변 나라들에 대하여 북왕국보다 훨씬 개방적인 태도를 취한 때문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강대국이던 앗수르와 바벨론 및 아람(시리아) 등의 종교가 주류를 이루었다. 남왕국에서 유행하던 이방 종교의 실상이 어떠했는가는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종교개혁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히스기야가 집권하던 때에 유다 백성들은 모세가 광야에서 만들었던 놋뱀을 숭배하기까지 하였으며(왕하 18:4), 요시야 초기에는 므낫세 때부터 유행하던 바벨론 지역의 각종 점성술과 해와 달과 별들을 숭배하는 이른바 천체숭배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왕하 21:4-6; 23:5-14). 나라가 바벨론에 망한 다음에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바벨론 종교에 더욱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2) 예언자들의 눈으로 보는 우상 숭배의 현실
다른 신들을 부지런히 섬기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다 못한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로 하여금 당시의 우상 숭배를 강하게 비판하게 하셨다. 그 첫 예로 엘리야의 예언 활동을 들 수 있다. 가뭄 예언(왕상 17:1)과 갈멜산 대결(왕상 18:20-40)에서 정점에 이른 엘리야의 예언 활동은 북왕국의 잘못된 바알 숭배를 겨냥한 것으로서, 바알이 아니라 야웨 하나님이 유일한 참 신이요, 비(또는 풍요)를 내려주시는 분임을 널리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북왕국의 여로보암 2세(주전 786-746년) 말기에 활동을 시작했던 호세아는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함으로써 당시에 북왕국 백성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종교에 빠졌는가를 자신의 삶으로 직접 보여 주었다. 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부부 관계로 묘사하면서, 이스라엘의 바알 숭배가 남편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것임을 여러 차례 고발하였다(호 2:5-8; 4:11-14; 10:1-2 등).
호세아의 이러한 메시지는 남왕국의 예레미야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예레미야의 고발에 의하면 유다 백성은 수풀이 우거진 곳(신전이나 산당)에서 신전 창기와 더불어 제사를 드렸으며, 돌과 나무로 된 헛된 우상을 향해 절하였다(렘 1:16; 2:20-28; 3:6-10; 10:1-11 등). 그들이 섬기고 예배하는 이방 신들의 수는 너무도 많아서 남왕국 성읍들의 숫자와 맞먹을 정도였다(렘 2:28; 11:13). 남왕국 멸망 직전에 활동했던 에스겔의 메시지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지적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유다 백성들은 도처에 지은 산당을 여러 가지 색깔로 꾸미고서는 그곳에서 여러 신들을 섬기는 음행을 저질렀으며, 태양상을 비롯한 각종 우상들을 만들거나 벽에 그려놓고서는 그 앞에서 경배하였다(겔 6:4-6; 8:3-16; 16:15-18 등).
(3)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인신 제사
이상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예언자들은 남북 왕국의 우상 숭배 행위를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특히 하나님의 진노를 샀던 행동이 하나 있었다.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예배 행위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무거운 범죄 행위였다:
"또 네가 나를 위하여 낳은 네 자녀를 가져
그들에게 드려 제물을 삼아 불살랐느니라.
네가 너의 음행을 작은 일로 여겨서
나의 자녀들을 죽여 우상에게 붙여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였느냐?" (겔 16:20-21)
당시에 가나안 사람들은 사람들 죽여서 제물로 바치는 이른바 인신 제사(人身 祭祀; human sacrifice)야말로 신에게 드리는 최고의 예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이스라엘 자손에게 원하신 것은 레위기 1-7장의 제사 규정에 명시된 바와 같이 짐승과 곡물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였다. 사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제물로 바치지 못하게 하시고 이삭 대신에 수양을 제물로 바치게 하신 것은, 인신 제사라는 그릇된 예배 행위를 교정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것은 결국 이스라엘의 야웨 하나님이 가나안 지방의 신들처럼 아들의 생명을 요구하는 비도덕적이고 저급한 신이 아니라,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지극히 윤리적인 신임을 강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자기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인신 제사의 악습에 빠져들곤 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들(왕하 17:17) 및 남왕국 유다의 아하스 왕(왕하 16:3)과 므낫세 왕(왕하 21:6) 등이 그러했다. 예레미야(7:31)나 에스겔(16:36; 20:26, 31; 23:37)의 메시지 역시 마찬가지이다.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케 말아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명하는 레위기의 제사 규정(레 18:21; 20:2-5)도 따지고 보면 인신 제사가 이스라엘 전역에서 얼마나 널리 행해졌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 한 예에 해당한다.
2. 하나님께 예배만 드리면 된다는 잘못된 생각
(1) 삶과 유리된 제사
우상 숭배 못지않게 이스라엘의 예배를 빗나가게 한 것은 예배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과 전혀 무관한 것인 양 생각하던 태도였다. 대단히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지배 계층이나 일반 백성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일상 생활이야 어떻든 많은 제물을 준비하여 정해진 시기에 하나님께 예배만 드리면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처럼 잘못된 생각을 통렬하게 비판한 자들이 바로 예언자들이었다. 특히 주전 8세기 이후로 활동하기 시작한 문서 예언자들이 그러했다. '문서 예언자'(the written/writing/literary prophets)는 자기 이름으로 기록된 책(또는 문서)을 가지고 있는 예언자들을 일컫는 바, 후기(後期) 예언자라고 불리는 그들은 왕을 비롯한 지배 계층이 강화된 왕권을 이용하여 힘없고 약한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는 현실을 고발하였으며, 권력층의 사치와 향락 풍조를 비난하였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예언자가 바로 최초의 문서 예언자인 아모스였다(암 3:7-8; 7:14-15). 북왕국의 여로보암 2세 말기에 활동한 아모스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현저한 도덕성의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것을 통찰하고서, 지배층의 착취와 억압(암 2:6-8; 3:9; 5:11; 8:4 등) 및 사치와 향락(암 3:15; 4:1; 5:11; 6:4-6 등)을 매우 강경한 어조로 비판하였다. 그는 또한 언론(암 2:12; 5:10, 13)과 사법(암 5:12)까지도 왜곡시킴으로써 공법을 인진(쓴 풀)으로 만들고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의 악독함을 준열하게 고발하였다(암 5:7). 아모스의 이러한 메시지는 그보다 약간 늦게 남왕국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사야(사 1:21-23; 3:14-26; 5:8-12, 22-23 등)나 미가(미 2:1-2, 8-9; 3:1-9; 6:10-11 등)의 경우에도 거의 똑같이 나타나고 있다. 남왕국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에 활동했던 스바냐(습 1:4-9; 3:1-7), 하박국(합 1:2-3), 예레미야(렘 5:1, 26-28; 9:3-9, 13-14 등), 에스겔(겔 7:23; 8:17; 9:9; 22:6-12, 23-31) 등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언자들은 이렇듯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로운 삶이 배제된 제사를 드리는 모든 행동을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그들이 보기에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삶과 유리된 제사를 드렸으며, 희생 제사 그 자체의 효력을 믿고 있었다. 달리 말해서 제사 의식을 행함으로써 그들 자신을 위한 복지와 행복을 보장받겠다는 주술적인 생각이 그들의 마음 속에 있었던 것이다. 일종의 제사 만능주의인 셈이었다. 그러다 보니 토라(율법)에 순종하는 삶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도리어 정해진 때에 하나님께 제물만 많이 갖다 바치면 모든 죄악이 사함을 받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생각이 사람들의 예배 의식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갈수록 형식에 치우치게 되었고, 믿음도 없고 정성도 없는 예배, 곧 하나님을 향한 진실하고 정직한 삶이 배제된 '가인의 제사'가 널리 행해지게 되었다. 말라기 예언자가 비난해마지 않던 불성실한 제사, 곧 하나님의 단에 더러운 떡을 드리는가 하면, 눈 먼 것이나 저는 것, 병든 것들만을 골라 주께 드리는 제사가 그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말 1:7-8).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정성, 그리고 토라에 순종하는 진실한 삶을 제물과 묶어 드리는 '아벨의 제사'는 정말 찾아보기 어려웠다.
(2) 지나친 형식주의: 북왕국
하나님은 이러한 예배의 변질 내지는 탈선을 매우 싫어하셨다. 그는 제사 만능주의도 원치 않으셨지만, 예배의 본질을 잃어버린 지나친 형식주의도 원치 않으셨다. 그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아모스의 입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표준새번역 개정판):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 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히브리어로 '미슈파트,' justice)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츠다카,' righteousness)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암 5:21-22, 24).
아모스의 이 예언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바르고 의로운 삶을 살 때에 비로소 그들의 제물과 예배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것임을 뜻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아무리 많은 제물을 바쳐도, 그리고 아무리 열심히 절기를 지켜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제물과 절기를 인정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아모스보다 약간 늦게 북왕국에서 예언 활동을 시작한 호세아도 이 점에 있어서는 예외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를 촉구하시면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하시는 분임을 강조한다(호 6:6). 여기서 이스라엘에게 인애(히브리어로 '헤세드')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나 충성심이 없고, 또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서 실천에 옮기려는 노력이 없음을 뜻했다. 한 마디로 토라에 순종하는 삶이 그들에게 없었다는 것이다. 호세아는 또한 이스라엘의 변화된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들이 말씀을 가지고서 야웨께로 돌아오되, 불의한 일들을 버리고 선한 일에 힘쓸 것이요, 수송아지를 대신하는 입술의 제사, 곧 삶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새롭게 변화시키기로 다짐하고 맹세하는 제사를 드릴 것이라고 말한다(호 14:2).
(3) 지나친 형식주의: 남왕국
아모스나 호세아와는 달리 주전 8세기 후반에 남왕국 유다에서 활동한 이사야도 거의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그는 유다 백성이 무엇하러 하나님께 많은 제물을 드리는지 알 수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수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을, 그리고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수염소의 피를 싫어하시며 지겹게 여기신다고 말한다(사 1:11). 하나님은 또한 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제사의 날, 곧 월삭(초하루)과 안식일과 각종 절기들까지도 싫어하신다. 하나님께서 진정 그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들이 제사를 드리기에 앞서 먼저 악한 행실과 태도를 고치는 일이었다(1:13-14). 또한 하나님은 그들이 옳은 일 하는 법을 배우고, 공의를 구하며, 억압받는 자들을 도와주되, 특히 고아와 과부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기를 원하셨다(1:16-17).
이사야와 거의 같은 시기에 남왕국에서 활동한 미가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이스라엘 백성의 올바른 삶이 서로 구분되어 있지 않음을 강조한 바가 있다. 그는 일 년 된 송아지를 번제물을 성별하여 하나님께 드린다 해도, 그리고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 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을 드린다 해도, 주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말한다. 심지어 죄 용서를 구하기 위하여 자기 몸의 열메, 특히 자기 맏아들을 제물로 바친다 해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제사가 그러한 것들에 있는 것이 않으며, 도리어 공의('미슈파트,' justice)를 행하고 인자('헤세드')를 사랑하며 겸손히 주와 함께 행하는 삶에 있음을 강조한다(미 6:6-8).
남왕국 유다의 멸망 직전에 활동한 예레미야는 또 어떠한가? 그는 하나님께 최상의 제물을 드리기 위해 멀리 떨어진 나라로부터 값비싼 유향과 향품을 수입하는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러한 것들을 곁들여 번제와 희생 제물을 드린다 해도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기뻐 받으실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렘 6:20). 더 나아가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출입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강한 어조로 설교하기까지 한다(표준새번역 개정판):
"'이것이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 하고 속이는 말을,
너희는 의지하지 말아라.
너희가 모든 생활과 행실을 참으로 바르게 고치고,
참으로 이웃끼리 서로 정직하게 살면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지 않고,
이곳에서 죄 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겨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으면....
그래,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이,
너희의 눈에는 도둑들이 숨는 곳으로 보이느냐?
여기에서 벌어진 온갖 악을 나도 똑똑히 다 보았다.
나 주의 말이다"(렘 7:4-6, 11).
예레미야의 이 설교는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곳이 무조건 성전으로 불리는 것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만일에 유다 백성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하고 의로운 삶을 살지 못한 채로 성전에 와서 무턱대고 제사만 드리겠다고 한다면, 그곳은 더 이상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라 '도둑의 소굴'(개역개정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논지였다.
(4) 예배와 삶은 하나다
이상에서 보듯이, 주전 8세기 이후의 예언자들은 토라에 순종하는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제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줄기차게 강조하였다. 예배와 삶이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깨우쳐 그들로 하여금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살게 하고자 애썼다. 그들이 보기에 제사나 예배라는 것은 단순히 희생 제물을 드리는 행위를 의미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삶 전체-희생 제물을 포함한-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을 의미했다. 신정(神政) 공동체의 생활 규범인 토라에 순종하는 삶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기쁘시게 받는 제사라는 얘기였다.
이것은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제사가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즉 예배는 삶 전체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사무엘이 사울을 책망하면서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한 말(삼상 15:22)도 넓게 보면 같은 맥락에 속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비난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을 무시하고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기 위해 일부 재물을 탈취해 왔다고 변명한 사울을 겨냥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정말로 소중히 여기시는 것은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이지, 좋은 것들을 취하여 그에게 제물로 바치는 것이 아님을 뜻했다. 제사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예언자들의 제의 비판과 같은 어조로 표현되어 있는 잠언의 일부 가르침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 15:8). 이 격언은 악인의 제사와 정직한 자의 기도를 대비시키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제사가 기도보다 못한 것일 수도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잠 16:6)는 격언은 인자와 진리 및 야웨 경외를 통하여 속죄가 이루어진다고 봄으로써, 우회적으로 제사 만능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고는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잠 21:3)는 격언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찌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전 5:1)는 전도자의 가르침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에 순종하려는 지혜자의 태도와 무조건 제사만 드리면 된다고 하는 미련한 자를 대비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형식에 치우친 제사보다 더 나은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V. 올바른 예배를 실천하려면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은 주로 짐승을 제물로 잡아 드리는 희생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예배해 왔다. 곡물을 제물로 드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동물 제사에 비하면 그 비중이 훨씬 적은 편이었다. 그리고 사람을 제물로 잡아 바치는 인신 제사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구약 시대의 예배를 구성하는 많은 요소들, 이를테면 예배 장소인 성막이나 성전, 등대나 제단과 같은 중요한 예배용 물품들과 기구들, 예배용 노래와 음악 및 악기들, 찬양과 기도와 설교, 성가대와 제사장, 십일조를 비롯한 각종 예물, 각종 절기 등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지만, 희생 제사만큼은 신약 시대 이후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인류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써, 구약 시대의 희생 제사를 마감하셨기 때문이다(히 9:11-28). 더욱이 신약성서가 율법의 행함이나 제사 행위 자체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그에 수반되는 선한 삶을 통하여 구원을 얻고 그것을 완성해 간다고 가르치는 까닭에, 사람들은 오늘날 구약 시대의 희생 제사에 대해서 규정하는 레위기를 그렇게 즐겨 읽지 않는다.
그러나 비록 레위기에 규정된 희생 제사들이 오늘의 교회에서 문자 그대로 행해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적지가 않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구약 예배의 핵심을 이루는 희생 제사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매우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만일에 구약성서에서 희생 제사의 요소를 빼버린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는 형체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위에서 보았듯이 레위기의 제사법은 하나님의 구원 은총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상세하게 규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각종 제사에 대한 규정은 하나님의 구원 은총에 대한 이스라엘의 응답을 기본 특징으로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오늘날의 예배 역시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모름지기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는 자신의 예배 행위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번제로부터 속건제에 이르기까지의 다섯 가지 주요 제사가 오늘날의 신자가 갖추어야 할 예배의 기본 정신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오늘의 예배가 이스라엘의 5대 제사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의미들을 구현하는 데에 힘써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마다 전반적인 속죄와 온전한 헌신, 감사와 충성, 화해와 친교, 부지중에 지은 범죄와 남들에게 입힌 손해를 속죄하는 태도 및 손해 배상 등의 기본 정신을 반드시 실천에 옮길 수 있어야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오늘의 예배에 부족한 것은, 화해와 친교를 목적으로 하는 화목제의 요소와, 이웃에게 입힌 손해를 배상할 것을 규정하는 속건제의 요소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많은 노력이 앞으로 필요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스라엘의 잘못된 예배를 통해서도 훌륭한 교훈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이스라엘은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섬기고 예배하는 잘못을 범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제사를 지나치게 형식적으로 드리는 경우가 너무도 많았다. 특히 후자의 경우, 이스라엘 백성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공법과 정의를 실천하지 않아도 제사만 드리면 모든 죄악과 잘못이 면책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중세의 면죄부 매입 행위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예언자들은 바로 그 점을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삶과 유리된 제사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예배와 삶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다시금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예배는 자신의 삶을 제물로 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삶 전체가 곧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에 해당하는 바, 그 삶 전체를 정해진 날에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곧 제사요 예배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배는 삶의 결정체요 삶의 열매라 할 수 있다. 한국 교회의 맹점 중의 하나는 예배 만능주의에 빠져서 예배와 삶을 분리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바울의 예배 이해(롬 12:1-2)에 잘 나타난 바와 같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예배 자체를 거룩하게 드리려고 노력해야 할 뿐만 아니라, 예배를 유효하게 하는 것은 결국 그의 삶이라는 인식에 기초하여 자신의 삶 전체가 곧 예배라는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야 할 것이다.
5. 예배 및 예전
교회의 예배
초대교회 교인들은 정기적으로 안식 후 첫날(일요일)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사도행전 20장 7절에는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라고 씌어있고, 고린도전서 16장 2절에는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하였다. 구약 시대에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예배를 드렸다. 그래서 바울이 안식일에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은 군중들에게 설교했던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예배를 드리기 위한 목적으로 모이는 날은 안식일이 아니라 안식 후 첫날이었다. 안식 후 첫날에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 요한은 이 날을 "주의 날"(계 1:10)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유대인의 안식일은 폐해졌다. 골로새서 2:14를 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모세의 율법을 폐한 것을 알 수 있다. 계속해서 바울은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삭이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골 2:16)는 교훈을 준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예배를 드려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미 폐한 것을 지키 라고 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은 두 가지 요소를 갖춰야 한다. 요한복음 4:24를 보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in spirit)과 진정으로(진리로, in truth) 예배할지니라"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신령한 마음으로, 즉 온 마음을 다 해 예배를 드려야 하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법(진리)대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마음으로부터(신령으로) 우러나는 예배는 기계적인 것이 아니다. 만약 예배드 리는 사람이 온 마음과 진정(진리)으로 예배드리지 않는다면, 그가 행하는 중언 부언하는 기도나 감상적인 노래 등은 참된 예배의 요소가 될 수 없다.초대교회의 예배에 대해 사도행전 2:42에 단적으로 나와있다. "저희가 사도 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했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사도행전 20:7에 보면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첫날에 떡을 떼었다. 떡을 떼는 것을 다른 곳에서는 "주의 만찬"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경에는 이것을 가리켜 "성례전(sacrament)"이라고 언급한 적이 없다. 영어 성경에 보면 주의 첫날 앞에 정관사 "그(the)"가 붙어 있어서 여기서 말하는 주의 첫날은 매주의 첫날임이 확실하며 이것은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매주 마다 주의 만찬을 행했음을 말해주는 것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계명 중 "그"(정관사)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명령과 성격이 같다. 실지로 주의 날에 모여 예배하는 것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행하신 만찬을 기념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이 만찬에서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떼고, 그의 피를 의미하는 포도나무에서 난 것(포도즙)을 마셨다. 이 단순한 만찬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항상 기도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 가운데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며(고전 14:15)"라고 말한 것에서도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감사함으로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고, 그의 선하심을 찬양하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위해 간구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의 예배는 가르치거나 설교하거나 성경 읽는 것을 통해 사도들의 교훈을 들려주는 것이 포함된다. 예를 들어 바울은 드로아에서의 모임(행 20:7)을 하나 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기회로 이용했다. 이와 같은 설교나 가르침 속에는 정치 나 경제적인 내용을 주제로 삼지는 않았다. 오직 우리들의 영혼 구원과 관계된 내용이었다. 초대 교회 예배 모임에서 그들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찬양을 했다(골 3:16). 이들이 노래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서로 화답하기 위해서였다. 신약시대의 교회에서는 마음으로 하는 노래를 말했지 악기를 사용해서 하는 것을 말하지는 않았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9). 초대교회의 음악은 모두 육성이었다. 그 당시에도 악기 음악이 성행했지만 초대 교회는 악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악기가 교회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주후 670 년경이었다. 악기를 사용하는 일이 중세 교회에 일반화되기까지는 그 때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후였다. 또, 그 당시 악기를 다른 목적에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교회에서 는 의도적으로 악기 음악이 배제된 것이 명백하다.
기독교 예배의 원형
예배의 원형이 언제 어떻게 태동하게 되었는가를 추리하고 추적해 보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에서 그리스도교 예배의 원형을 찾아보고자 하나 그것이 결코 여의치 않다. 예수의 생애에서 그것을 추리하려는 의도도 마찬가지이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초대교회의 예배유형이 먼저 태동했고, 그 예배 형성의 와중에서 신구약의 정경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둘의 발전이 역사적으로 병행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교회의 태동도 그렇지만 그리스도교 예배의 출현도 예수의 부활 후 그를 따르던 제자들의 공동체적인 모임에서 비롯된다. 예루살렘 다락방의 경험도 그렇고, 엠마오 도상의 경험, 갈릴리 해변에서의 경험도 그리스도의 교회와 예배의 태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그런 예배 경험이 결코 획일적인 것은 아니었다. 갈릴리 변방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아 보려고 모여든 제자들의 공동체(예를 들면 Q공동체)에서는 기도와 말씀의 명상, 그리고 가르침에 역점을 둔 예배를 반복했던 흔적이 있다. 그런가 하면 당시 예루살렘 다락방에서는 다른 예배 행위도 모두 반복했지만 특히 '떡을 떼는 일'을 중요시했던 것 같다. 초대교회의 이러한 예배경험들이 확대되고 심화되면서 '말씀의 명상'과 '떡을 떼는 일'이 통합되어 하나의 예배 유형을 태동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2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공동식사가 예배로부터 완전히 이탈하였다. 그것은 빵과 포도주의 예식에 의해 대체되었는데, 이는 2세기 중엽의 예전의 본질적인 특징으로 남아 있었다. 이 시기의 문서들 중 어느 것도 왜 공동식사가 주의 만찬으로부터 분리되었는지를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다. 맨 처음의 설명은 바울의 고린도 전서에 나타나 있는데, 여기에서는 그 이유가 분명하다. 고린도인들은 공동식사를 남용하고 있었다. 디다케 뿐만 아니라 플리니의 편지도 공동식사와 주의 만찬의 분리를 상징하고 있는 듯하다. 플리니의 시대에 공동식사는 박해 때문에 생략되었다. 다른 경우들에 있어서 공동식사는 어떤 실제적인 이유들로 인하여 생략되었는지도 모른다. 점차 성장하는 교회에게 있어서 점증하는 교인들을 공동식사에 다 수용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 여러 개의 식탁들이 빵과 포도주를 올려놓은 한 개의 식탁으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공동식사와 주위 만찬은 주후 150년경의 저스틴(Justin)의 글에서 보는 것과 같은 단일한 예배행위로 혼합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예배의 기본적인 유형은 아래와 같다. 초대교회의 예배에서 이 성경적이고 성례전적인 요소들의 균형은 불가분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어느 한 요소를 제외한 예배란 생각할 수가 없었다.
고대와 중세의 예배
4-5세기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회심으로 인하여 교회의 위치가 극적으로 변화하였다. 이처럼 혜택받은 상황 속에서 교회는 급속도로 성장하였으며 여러 가지 신조들을 통하여 자신의 신학을 규정하고 보다 확고한 형태의 예배를 발전시켰다. 이 시기는 고전 기독교의 시기요, 교부들의 황금기였으며,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독창적이고 생산적인 시기였다. 그중 한 가지 중요한 요인은 로마제국의 유력한 도시들 안에서 교회 중심지가 출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중심지들은 이 시기의 신학과 예배에 반영되어 있던 특별한 예배양식을 점차 발전시켜 나갔다. 물론 각 지역은 나름대로 독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기본적인 구조에 있어서는 모든 예전들이 말씀과 성례전이라는 두 가지의 중심을 갖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차이점이 발생하는 것은 각각의 지역 문화를 반영하는 예식과 양식에서이다.
동방교회의 예배
4세기의 예배는 그 시대의 문화를 반영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특히 동방교회의 예배에 해당한다. 동방의 세계관은 미학적인 것은 사랑하는 헬레니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 문화의 커다란 공헌은 시, 문학, 미술, 철학 등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러한 모든 관심사들은 시적인 정서와 비유 감각 및 예술적인 표현능력을 신장시켜 주었다. 이때 당시의 예배가 헬레니즘적인 상상력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동방의 예배에서 예배 의식적인 기호들과 상징들이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는 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비잔틴(Byzantine)의 예배는 고도로 의식적이며 화려하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매우 신비적이었다. 요한 크리소스톰(St. John Chrysostom)의 예전에 있는 의식은 소입당(Little Entrance)과 대입당(Great Entrance)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소입당은 복음서의 낭독을 중심으로 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강조하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 대입당은 빵과 포도주를 중심으로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대입당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강조하기 때문에 소입당보다 그 의식이 훨씬 풍부하다. 이 의식을 바탕으로 동방의 예배는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된다.
준비예배(Proskomidie)
이 순서는 예배 전의 준비예배에 해당된다. 교회 안에서는 시편과 기도의 낭독이 계속된다. 세례청원자의 예배(Liturgie des Katechumen)이 순서는 초신자들. 즉 비세례자들의 예배로 찬양이 시작되고 복음서 낭독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믿는 자들의 예배(Liturgie des Glaubigen)이 순서는 세례받은 자들의 예배로서 성찬 중심이다. 교회는 양자의 모습(빵과 잔) 안에서 성례를 받는다. 물론 믿는 자들의 성찬이 진행되기 전에 성례 청원자들의 퇴장이 먼저 이루어진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것이 순서에 있지 않고 자유롭게 이루어진다. 예배순서 사이에 여러 가지 형태의 중보기도가 동방교회 예배의 한 특색을 이루고 있으며, 또한 입장행렬과 관계된 예배유형의 발전이 콘스탄티노플의 예전에서 비잔틴의 예전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동방교회) 예배 유형 발전의 큰 흐름을 좌우하고 있다.
서방(로마) 교회의 예배
지금까지 집약한 동방교회의 예배유형과 아주 대조를 이뤄온 것이 이른바 '로마의 예배유형'이다. 전자가 헬라어와 그 문화를 포용한 것이라면 후자는 라틴어와 그 문화를 포용한 예배의식이다. 로마의 도시에는 콘스탄틴 황제 이전에도 꽤 발전된 그리스도교 예배유형이 있었다. 312년(A.D)에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자마자 콘스탄틴 황제는 당시 가장 보편적인 공공건물이었던 공화당(basilica) 건물을 교회로 사용하도록 허용했다. 뿐만 아니라 그 이듬해에 자신이 '그리스도교 회당'( Lateran Basilica)을 하나 건축하도록 도왔다. 후에 사도요, 순교자였던 베드로를 기념하는 사원(shrine)을 짓고, 그 외에 '바티칸 회당'(Vatican Basilica)이 증축되기에 이른 것은 로마의 예배 유형 발전에 큰 계기가 되었다. 로마에서 발전된 특유의 요소는 사순절(Lent)을 비롯한 교회의 절기 행사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모든 교회당과 가정교회들이 이 예배의 거점이 되었다. 가정교회마다 성회수요일(Ash Wednesday)로부터 금식기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거룩한 주간의 행사를 포함한 예전적인 행사는 교회당에서 거행되었다. 부활절 주간에는 매일 로마에 있는 주요 교회당을 방문하며 그 곳의 기도회에 참여하였다. 예배 행진도 로마의 예배유형의 특성 가운데 하나였다. 비잔틴 예배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틀림없겠으나
후엔 로마 특유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중세에 이르러 서방교회의 예배유형은 초대교회의 예배의 원형에서 멀리 이탈되어 있었다.
동·서방교회가 갈라지고 난 다음부터 점차 서방교회 예배에 변이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에 한 예가 바로 미사(mass)이다. 미사의 근본 목적은 만민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재현하기 위함이다. 이 희생의 재현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고 의로워지며 그리스도를 가까이 따르기 위함이다. 이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영성체의 전례는,
가능한한 주님께서 쓰신 말(words)과 행동(actions)을 그대로 사용하도록 짜여졌다. 그러나 점점 예배가 성만찬(미사) 중심이 되었고 그 역점도 빵과 포도주를 나눔에 있지 않고 그 물질의 성체화(transubstantiation)에 미신적인 요소까지 곁들일 정도가 되었다. 미사도 이해 못할 라틴어로 행해졌고, 회중들의 참여는 별로 문제시하지 않았다. 게다가 설교는 예배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성경봉독마저도 생략되고 성자들의 생애에 관한 몇 구절을 읽는 것으로 대치되었다. 돈을 내고 미사에 참여하거나 면죄부를 사야 하는 정도에까지 전락한 예배 현실이었으니 종교개혁운동은 시대적으로 필요불가결한 것이었다.
교회력의 시작
기독교의 교회력(The Sacred Calender)이라고 하는 것은 1년을 한 주기(cycle)로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삶, 즉 그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고, 또 주로 의식교회(liturgical churches)에서는 성자(Saints) 가 된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준 그리스도의 덕성을 배우고 기리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특별한 날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날을 기념하고 싶어하는 깊은 본능이 있는데, 교회력은 바로 인간의 이러한 종교적 내지 심리적인 본능으로 부터 시작 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을 포함해서 자연속의 모든 생물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신비스러운 힘에 의하여 둘러 쌓여 있고, 그들의 힘으로는 어쩔수 없는 빛과 어둠이 반복되고, 일하는 시간과 쉬어야 하는 시간이 있고, 탄생과 성장과 늙음과 죽음이 필연적으로 오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계절을 감지하고, 생일과 죽은 날을 기념하여 1년을 싸이클로 하여 주기적으로 기억할려고 하는 본능이 있다. 이와 같은 인간의 심리적이고도 종교적인 본능에다 유대교의 전통이 접목되어 기독교의 교회력은 시작하게 되었다고 본다. 유대교의 명절은 율법에 의하여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이것이 교회력의 기초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 시작은 유월절부터이다. 레위기 23장을 보면 유대인들이 지켜야 할 6개의 명절이 나오는데 곧 유월절, 초실절, 칠칠절, 나팔절, 속죄절 그리고 초막절이다.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들어 온 이후 이 날을 교회력으로 지켰는데 팔레스타인에서는, 이날이 바로 "농업신 축제"의 날이었고, 또 그곳의 기후에 따라 비가 일찍 오는 비도 있고 늦게 오는 비가 있어서 (농사도 두번 추수하는 모양) 첫 과일 열매로 유월절을 지냈던 것이다. 또 첫 추수로 감사절(초실절이라고 함)을 드린후 7주가 지난 50일째 (그래서 이날을 칠칠절이라도 함) "나중에 추수한 다른 곡식으로 여호와에게 새 소제를 드려야 한다"(레 23:16)고 하여 칠칠절을 지켰다. 칠칠절이 무교절(the feast of unleavened) 이후 50일 되는 때에 지켰기 때문에 희랍어의 "50"을 의미하는 Pentecost 곧 성령강림절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기독교를 역사의 종교라고 한다. 역사 속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건들이 많이 있고, 그 사건들은 1년을 주기로 재현시켜 반복 기억하는 것이 역사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의 본능이다. 따라서 유대교는 율법에 따라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해서 매 7일마다 안식일을 지킨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여 매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르고 이날을 지킨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역사적인 사건은 출애굽 사건이다. 이 사건을 기억하기 위하여 그들은 유월절을 지킨다. 공교롭게도 유대교의 유월절은 기독교의 부활절과 그 시기가 같다. 뿐만 아니라 유월절 이후 50일째 되는 날에 유대인들이 지키는 오순절도 자연히 기독교의 오순절과 같은 기간에 있을 수밖에 없다. 부활주일 이후 50일이 되는 날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나시어 기독교에서는 성령강림 주일을 부활 후 7주가 되는 주일에 지키고 있다. 유대교에서는 유월절 후 50일을 맥추 감사절로 지키는 동시에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감사절로 지키고 있다. 율법을 주시는 것과 성령을 주시는 것과는 신학적으로 또 하나의 좋은 대비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이방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이 약탈되어 이방신을 섬기게 되어 더렵혀진 성전을 마카베오 유다 장군이 이방인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성전을 되찾아 이를 재건하고, 깨끗이 한 다음 성전 재 봉헌식을 드렸다. 그것이 유대 월력 아홉번째 달인 Chislev(오늘의 12월)의 25일 이었다. 그들은 이 날을 하누카(Hanukkah)라고해서 축제를 갖는데 이것 역시 우리 기독교의 크리스마스와 같은 시기에 온다. 유대인들이 갖는 감사절인 장막절은 9월에 있으나 기독교에서도, 비록 그 날짜는 다를 지라도 감사절을 지킨다. 이와같이 기독교는 역사의 종교이기 때문에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로 이루어진 특별한 날을 무시할 수 없고 이들을 기억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교회력은 1년이라고 하는 싸이클 (cycle)을 통하여 우리 주님의 구속 사업의 역사적인 날을 기억하므로써 인간 구속 사업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우리의 신앙을 더욱 강화하자는데 그 의미가 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와같은 역사적인 날을 유대교로부터 전수 받았으나 그 후 마리아를 비롯한 많은 성자들의 성일이 교회력에 추가되어 하나님의 인간 구속사의 기념일이 인간들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일로 타락하여 교회력으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결과를 초래 하였다. 이로 인해서 종교개혁자들은 성탄절과 부활절을 제외한 모든 교회력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교회력을 앞장서서 부정했던 사람들이 바로 Scotland의 장로교파 사람들과, 영국의 청교도(Puritan)들 이었다. 그 후 Scotland 장로교에서는 교회력에 관한 관심이 다시 커져서, 결국 1940년에는 교회력에 근거한 성서 일과가 담긴 예식서를 발간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개신교회에서도 차츰 교회력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60년 제2 바티칸 공의회가 개신교에게도 공개되고, 초청됨에 따라 천주교의 예배 의식에 까지 개신교는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후 미국 감리교와 장로교회에서 개정한 의식서를 보면 천주교회의 의식으로 부터 대단히 큰 영향을 받은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영향은 천주교회에서 개신교회로 만 온 것이 아니다.개신교로부터 천주교로 간 영향 또한 지대하다.
주 일
기독교의 주일은 물론 유대교의 전통인 안식일로부터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안식일을 정하셨고, 이 날을 엄숙히 지키라고 십계명을 주시면서 명령하셨기 때문에 유대교는 이 날을 엄숙히 지킨다. 뿐만 아니라 이날을 엄숙히 지키는 또 다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집트에서 종살이 할 때 모세가 에집트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나온 날이 바로 안식일 이였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해서 더욱 안식일을 지키라고 모세는 호소 하였던 것이다. (신 5:15) 이와같은 율법의 안식일이 주일의 첫날인 일요일로 바뀔수 있었던 것은 예수가 구약에 기록된 율법과 안식일과 축일에 지배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수의 목회와 가르침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것은 율법이 완성되었을 때 "천국이 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외형적인 법과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그 율법의 본래의 중심 사상과 정신과 내용에 충실하라고 했다. 마가복음에서 하신 말씀은 바로 이 정신을 잘 드러낸 예수의 중심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다" 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안식일의 지배를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안식일을 지배하는 주인임을 선언하셨다. 또한 초대교회 사람들은 예수께서 약속하신 "새 왕국, 새 하늘나라"는 "주일의 첫 날"에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시작 된다고 믿었다. 이 부활 사건으로 율법이 완성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초대교인들은 매 일요일을 주께서 죄와 죽음에서 승리하신 날로 기념하고 축하하기 위하여 그날을 거룩한 날로 지켰다. 이상과 같은 근거에서 초대교회는 안식일을 종래의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변경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도들은 계속해서 유대교의 교회력을 지켰다. 그러나 이방인으로 있다가 개종한 새 기독교인들에게는 더 이상 유대교의 교회력이 그들에게 의미와 필요를 주지 않았다. 사도 바울도 유대교의 전통과 교회력을 엄격히 지켰다. 그러나 그는 유대교의 전통과 교회력을 지키든 안지키든 "주님을 위하여 하는 일"(롬 14:5-9)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별 문제가 아니라고 가르치면서, "여러분은 먹고 마시는 것이나 명절이나 매월 초하루나 안식일에 관해서 아무도 여러분을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골 2:16-17)고 말 했다. 사도의 시대가 끝나기 전(AD 1세기)까지 교회 신도들의 대부분은 이방인들이었다. 일주일의 첫 날인 일요일을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기념하기 위하여 함께 모임을 가질수 있는 가장 좋은 날로 선정하였다.(행 20:7; 고전 16:2) 2세기의 신학 저술가들은 일요일을 "주님의 날"로 보고, 이를 유대교와 다른 상징(symbol)으로 삼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인들이 "주님의 유월절" (부활절)을 유대교의 유월절이 지난 후에 기념하였다. 또 지방 교회에서는 순교자의 죽은 날을 "영원으로의 탄생일"로 정하고 해마다 이 날을 기념하는 전통이 시작 되었다. 왜냐하면, 순교자들이야 말로 교회 신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의 승리를 증거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날인 "주일"은, 곧 그리스도께서 말세에 영광으로 다시 오시는 바로 그날이라고 생각 하였고, 우리의 구속자시요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즐거움과 기쁨이 넘쳐 흐르는 약속의 나라로 들어가는 "영원에로의 탄생일"로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주일은 교회력의 핵이요, 기본이다. 이날은 일주일의 첫날이요, 주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날(막 16:2)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제 8일에 함께 모였고, 성만찬을 가졌으며, 얼마 후에는 예배까지 갖게 되었다(요 20:26). 사도 바울도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주일의 첫 날에 모임을 갖는 것으로 했고(고전 16:2), 그러한 기록이 사도행전에 나타난다.(행 20:7) 씨리아어(Syriac)를 사용하는 지역에서는 이날을 일요일이라고 했지만
희랍어(Greek)를 사용하는 지역에서는 이날을 "주일"(the Lord's Day)이라고 했고(계 1:10), 라틴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도 이와 같은 뜻인 "Dominica"라 했다. 150년경 순교자 유스틴(Martyr Justin)은 그의 Apology에서 "기독교인들은 시내에 살든 시골에 살든 모두 해의 날(일요일)에 한곳에 모입니다. 우리가 일요일에 모임을 갖는 이유는 이날이 한 주의 첫날이요, 하나님께서 어두움 가운데 빛을 창조하신 우주 창조의 날이요, 바로 이 주일의 첫날에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다시 사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로마의 Constantine 황제는 321년 기독교인들의 예배일을 휴일로 선포 하였다. 일요일은 성경에서도 대단히 의미있는 날이다.
①하나님이 빛을 창조한 날이요, ②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때 만나를 내리신 날이요, ③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으로 오신 구세주께서 부활하신 날이요, ④그리고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나려주신 날이다. 기독교가 박해를 받던 시절에도 주일을 지키는 것은 엄격했다. 많은 순교자들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우리의 규칙이다" "우리는 주일을 지키지 않고 살수 없다" "성찬을 거절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주님으로부터 끊어 버리는 것이다. 주일의 성찬은 주님과 함께 드는 것이요, 형제들과 함께 드는 것이다" 라고 증언한 것을 여러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주후 9세기부터 서방교회에서는 성자의 기념일을 지키는 것이 주일을 지키는 것 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수요일과 금요일
기독교에서는 수요일에 저녁 예배를 드리고 금요일 저녁에는 감리교인 경우 속회를, 장로교인 경우엔 구역예배를 또는 철야기도회를 갖는다. 이와 같은 전통도 유대교회에서 부터 시작 되었다. 유대교에서는 월요일과 목요일을 금식의 날로 정해서 지켜 왔다. 3세기 중엽에 기독교에서도 금식의 날을 수요일과 금요일로 택했다. 수요일은 주님께서 배반당하신 날이기 때문이고, 금요일은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이기 때문이다. 서방교회에서는 금식이 의무가 아니라 자발적인 것으로 바뀌었고, 그러면서 수요일의 금식이 없어졌다. 다만 사순절 때에만 수요일의 금식과 금요일의 금식이 철저히 지켜졌었다. 현대 기독교에서 수요일에 기도회를 갖고 금요일에 구역예배 또는 속회를 갖는 것과 금요일 철야 기도회를 갖는 것은 초대교회에서 금식을 하던 전통이 금식 대신에 기도회로 그 모양이 달라진 것이다.
부활절 기독교에는 이동 명절과 고정 명절이 있다. 크리스마스는 고정 명절이어서 12월 25일을 고정으로 지키고, 부활절은 이동명절이어서 매해 그 날짜가 변동된다. 부활절의 날짜가 변동됨에 따라 교회력의 많은 날이 또한 달라진다. 부활절과 함께 기독교의 가장 큰 명절 중 하나인 크리스마스는 336년 또는 354년에 시작 되었고, 부활절은 기독교가 시작된 첫 해 부터 시작 되었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가장 오래된 명절이 바로 부활절이다. 부활절은 기독교의 유월절이라고도 말 하는데 그이유는 부활절이 유대교의 유월절과 같은 계절에 있을 뿐만 아니라 신학적인 의미에 있어서도, 두 명절이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출애급기 12장을 보면 "흠이 없는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써 죽음의 천사가 이스라엘 백성의 집을 유월 (passover)하여 그 집의 장자를 구해 준 것" 처럼, 기독교에서는 흠이 없으신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가 속죄의 어린양이 되어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를 죄악의 죽음에서 구원 하셨던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안식일 까지 죽음속에서 안식하시다가 안식일을 지내고 일주일의 첫 날인 일요일에 부활하심으로써 예수의 제자들은 이날을 "주의 날"이라고 하고,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매 일요일에 모임을 갖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매 일요일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행사로 주일 모임을 갖게 되었고, 안식일 대신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전통이 이때 부터 시작 되었다. 그럼으로 초대교회에서는 매 일요일을 "주의 날"로 지켰고, 부활절을 대 명절로 지켰으며, 매 주일 드리는 주일 예배는 소명절, 즉 작은 부활절로 지켰던 것이다.
6. 장로교 예배
I. 들어가는 말
장로교는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된 개신교의 한 줄기이다. 당시 종교 개혁 사상에 영향을 받은 스코틀랜드는 영국 교회의 감독제에 반대하면서, 자신들의 교회직제를 장로제로 하기로 하면서, 장로교라는 이름이 자연스럽게 붙게 된 것이다.
이 장로교회는 청교도들의 신대륙 이민 이후 자연스럽게 미국으로 상륙하게 되었고, 그 곳에서 뿌리를 내리면서 독자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후 제 1, 2차 대각성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미국 장로교회는 크게 성장을 계속하였고, 그들의 선교열은 기독교 복음을 세계로 확산시키는 놀라운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의 복음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80%가 장로교회인 것을 볼 때, 그들의 장로교 예배를 공부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예배의 뿌리를 아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먼저 장로교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보고, 미국에서의 정착과 성장 과정을 정리한 후, 그들의 예배에 대하여 두 시간에 걸쳐 공부하도록 하겠다.
II. 몸 말
1. 장로교회의 역사적 배경
장로교회는 종교 개혁 이후 등장한 개신교의 한 전통이다. 신학적으로는 존 칼뱅의 사상을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존 낙스에 의해 스코틀랜드에서 정착된 교회이다. 지금까지 교회는 감독제에 근거한 직제를 전통적으로 지켜 왔으나, 장로교회는 감독제를 거부하고, 장로제를 주장하게 되었다. 이런 장로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 개혁기의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를 추적해 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1) 영국과 종교 개혁
16세기 영국은 정치 종교적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지금까지 영국은 로마 카톨릭 교회 소속으로서, 로마 교황청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헨리 8세가 즉위한 후, 그의 이혼과 결혼 문제로 교황청과 갈등을 빚으면서, 1534년 영국 의회는 수장령을 선포하고 로마 교회와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이제 영국 내에는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계열, 로마 카톨릭과 계속 관계를 유지하려는 계열, 그리고 종교 개혁의 영향을 받아 교회를 개혁하려는 개신교 계열--특별히 청교도들--로 나뉘게 되면서 영국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은 아주 복잡하게 빠져들게 된다.
헨리 8세 이후 에드워드 6세는 개신교를 옹호하는 입장에 선다. 그러나 1553년 그가 죽고 피의 여왕 메리(Bloody Mary)가 등장하면서, 다시 상황은 바뀐다. 그녀는 에드워드 6세에 의하여 이루어진 모든 개혁 조치들을 폐지하고, 로마 교회에 돌아가, 1554년 영국에 대한 교황권을 회복시킨다. 한편 메리의 박해는 역으로 영국 내에서 백성들로 하여금 반 카톨릭 감정을 더욱 고조시키고, 유럽에 망명한 사람들에게는 대륙의 종교 개혁 사상을 보다 확실하게 배워 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들이 돌아온 후 영국에서는 보다 거센 개혁의 물결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1558년 메리 여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서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하였다. 그는 다시 개신교 쪽으로 기울었다. 그녀는 로마 교황청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에드워드 6세의 기도서를 개정하여 예배에서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모든 교회 안의 장식이나 성직자의 복장 등은 에드워드 재임시의 규정을 따르도록 하였다.
1603년 엘리자베스가 죽자 영국에는 왕위를 계승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영국은 스코틀랜드의 왕이었던 제임스 6세를 데려다가 영국왕 제임스 1세로 즉위하도록 하였다. 그는 영국과 스코틀랜드 두 나라의 이름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한 나라를 만들고자 하여, 영국교회의 감독제를 수용하도록 함으로써 장로 직제를 주장하는 스코틀랜드 교회와 갈등을 일으켰다.
1625년 제임스 1세의 아들 챨스 1세가 왕위를 계승하여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었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절대 왕권 정책을 계속 추진하였고, 특별히 William Laud를 기용하여 종교 정책을 펴는데 도움을 받았다. 그는 영국 교회를 강화하고, 모든 의식과 복장과 예배를 통일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챨스는 영국 의회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고, 나아가 스코틀랜드에서는 거센 저항이 일어나게 되었다. 특별히 그는 1633년 라우드를 동행하고 스코틀랜드를 공식 방문하였는데, 그곳의 교회 구조와 예배 형태가 영국교회와는 너무 다른 것을 놀랐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1636년 스코틀랜드 교회가 존 낙스의 예식서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대신 영국 교회의 기도서(Laud 예전)를 사용하도록 하고, 즉석 기도와 장로 제도는 금지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교회는 이를 수용하지 않고, 1637년 마침내 에딘버러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1638년 "국민 계약"(National Covenant)을 맺고 자유를 선포하였다. 그 해에 그래스 고우 대성당에서 총회가 소집되어 1610년 이래로 지속되어오던 감독제를 폐지하고, 장로제도를 다시 확립하였으며, 왕의 예식서를 거부하는 대신에 "공동 예배 규범서"(The Book of Common Order)를 사용토록 하였다. 이에 챨스 왕은 군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려 하였으나, 결국 패배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면서 영국 내부 사정도 더욱 악화되어, 왕을 지지하는 세력과, 개혁 세력 중심의 의회파 나뉘어 싸우게 되었다.
2) 스코트랜드 교회의 개혁
중세 후반기를 지나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스코틀랜드에도 종교 개혁의 물결이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의 아버지는 바로 John Knox(1515?-1572)이다. 그는 1553년 영국에 친 카톨릭 정권인 메리 여왕이 등장하면서, 프랑스의 프랑크 포트로 망명해서 영국인들을 위해 목회를 하다가, 에드워드 기도서에 대한 그의 비평적 입장 때문에 분열이 생겨서 칼뱅이 종교개혁을 하던 제네바로 가서 칼뱅의 열렬한 제자가 되었다.
1555년 후반 낙스는 잠시 스코틀랜드에 귀국하여 머물렀는데, 약 9개월이 체류 기간 동안 그는 스코틀랜드 국민들 사이에 퍼져 있는 개혁에 대한 열망을 확인하게 되었다. 다시 제네바로 돌아온 낙스는 스코틀랜드 개혁 세력의 요청에 따라 1559년 5월 귀국을 하게 된다. 그는 귀국하여 개혁 운동을 열렬히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개혁 세력은 이제 국회의 지배 세력이 되어 1560년 낙스가 기초한 칼뱅주의적 신앙고백을 신조로 채택하고, 1주일 후에는 교황권을 배격하고 미사를 금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이 때부터 스코틀랜드의 교회는 왕과 귀족의 손을 떠나 평민의 교회로 자리를 잡게 된다.
1560년에는 소위 제 1회 스코틀랜드 총회(General Assembly)를 열고, 그 다음에는 "제 1 교회 치리서"(First Book of Discipline)를 국회에 제출하여 장로교회 조직을 전국적으로 실시하려 하였다. 또한 성서적인 근거가 없는 모든 축일은 폐지하고, 주일만 지키도록 하였으며, 공중 예배를 위해 일명 "낙스의 예전"이라 부르는 "공동 예배 규범서"(The Book of Common Order)를 작성하여 1564년 총회에서 승인 받았다.
낙스는 1572년 사망하게 되는데, 그 이후 스코틀랜드는 제임스 6세가 영국의 왕(제임스 1세)이 되면서 두 나라가 같은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된다. 그러나 낙스의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에는 Andrew Melville(1545-1623)이 개혁을 계속하면서, 장로교를 정립하고 체계화하는데 공헌하게 된다.
3) 웨스트민스터 회의
1603년 제임스 1세가 즉위하자, 영국 청교도들은 "1000인 청원서"(Millenary Petition)를 제출한다. 그 결과 1604년 Hamton에서 회의 가 열리게 되었고, 그들은 거기서 감독제도보다 장로제를 도입할 것과 개혁을 수용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직 성경 번역만 허락되어 "King James Version"이 나오게 되었다.
1625년 챨스 1세가 즉위하면서 "감독 없이는 참 교회도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절대 왕권과 감독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그는 라우드 주교를 기용하여 영국 내 모든 교회의 의식과 복장과 예전을 통일하려 하였다. 그의 종교 정책과 세금 제도는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지배를 하고 있는 의회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챨스는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1629-40년까지 국회를 소집하지 않았다.
마침내 1637년에 에딘버러에서 폭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1638년 국민 계약을 맺고 감독제를 폐지하고, 스코틀랜드 교회의 자유를 선포하였다. 이에 격분한 챨스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군대를 동원하고, 1640년 국회를 소집하였으나, 국회가 비협조적이자, 이를 바로 해산하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손해 배상을 해야 하는 챨스 왕은 1640년 다시 국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국회에서 향후 20년간이나 지속되었다.
당시 의희에는 청교도 세력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의회 내의 종교위원회를 설치하기 위하여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회의이다. 이 회의는 1643년 7월에 시작하여 1648년 2월까지 계속 되었다.
처음 회의가 소집되었을 때 위원의 수는 총 151명이었다. 위원은 121명의 성직자들과 30명의 평신도로 이루어졌는데, 평신도 중 10명은 상원 의원이었고, 20명은 하원 의원이었다. 그들은 대부분이 장로교 계열의 청교도들이었고, 회중 교회파와 영국 국교회에서 몇 명 참석하였으며, 특별히 스코틀랜드에서는 참관인 자격으로 목사 4명과 평신도 2명이 참석하였다.
회의 장소는 웨스트민스터로 하고, 그 이름은 "웨스트민스터 성총회"(Westminster Assembly of Divine)로 칭하였으며, 폐회 때까지 1163회의 모임을 가졌다. 이 회의에서 저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신조"와 "대. 소 요리 문답" 그리고 "공중 예배 모범"(Directory of the Public Worship)등을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후에 스코틀랜드 장로교에 그대로 수용되어 장로교의 기본적인 교리와 예배로 사용되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특기해야 할 사항은 그 동안 우리는 이 회의가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과 요리 문답을 대표적으로 만든 회의로 먼 생각하는데, 사실 이 회의는 예배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여겼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이 회의는 무엇보다도 예배 모범을 최우선적으로 취급하게 되어서, 70회가 넘는 회의를 거치면서 1644년 예배 모범을 국회에 제출하여 1645년 1월 국회를 통과하게 된다.
그 내용은 전문 위원 자격으로 참관했던 스코틀랜드 교회 대표들이 자기의 총회에서 연구되어진 것들을 가져와서 제출한 것은 거의 만장일치로 채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교회는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통과된 예배 모범, 신앙고백, 교리문답 등을 즉각적으로 받아들여 총회에서 통과시킴으로서, 장로교회의 신앙과 예배와 조직을 정립하게 되었다. 이로서 스코틀랜드 교회는 모든 면에서 확고한 장로교에서의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이다.
2. 미국 장로교의 정착과 성장
미국에 대한 식민지화가 유럽의 여러 족속들을 미국 땅에 유입시켜 놓았듯이, 유럽의 여러 교파들이 신대륙에도 그대로 이식되었다. 그러므로 북미 대륙에는 유럽의 다양한 기독교 교파들이 그대로 전해지고, 이러한 현상은 교파간의 종교적인 자유를 그 땅에서 허용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 장로교가 그 중의 대표적인 교파이다.
1) 장로교의 정착과 조직
신대륙의 장로교는 크게 두 가지 경로를 통해서 들어왔다. 첫째는 17세기 영국의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이민하면서 들어오게 된 것이고(청교도 장로파 계열), 두 번째는 18세기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대이민 때 들어온 경우이다. 스코틀랜드-아일랜드 대이민은 18세기 초에 시작되어 중엽 이후까지 계속되었는데, 이들이 미국 장로교의 주된 구성원을 이룬다. 이들은 주로 뉴햄프셔, 버몬트와 메인, 메사츄세스, 펜실바니아, 메릴랜드, 버지니아, 캐롤라이나, 조지아 등으로 그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그 후 유럽으로부터 계속 흘러 들어오는 이민들로 인해 장로교인들은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1716년 장로교는 자체적으로 필라델피아 대회(Synod)를 조직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네 개의 노회, 즉 필라델피아, 뉴캐슬, 롱아일랜드, 그리고 스노우 힐 노회로 나뉘게 되었다.
2) 대각성 운동과 분열
1730년 이후 독립전쟁까지의 기간은 장로교가 미국의 토양에 깊이 뿌리를 내려가면서, 영적 각성을 체험하고, 기관들을 설립하고, 지도자들을 양성하면서 발전해 나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전 17세기 말은 신대륙이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태였고, 종교적인 열성도 청교도 후손들에게서 식어져 가고 있었으며, 교회에는 형식적인 신자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런 현상들은 새로운 영적 각성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1730년대를 기점으로 조나단 에드워드(1703-1758)와 조오지 휘필드(1714-1770)같은 인물들을 통해서 대각성 운동을 일으키게 하셨다. 휘필드의 영향은 미국 장로교에도 크게 미쳤다. 그 결과 장로교인들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의 숫자는 놀랍게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런 발전과 함께 장로교는 분열의 아픔을 겪어야 했는데, 그것은 영적 대각성에 대한 입장의 차이 때문이었다. 영적 대각성 운동에 대하여 두 가지 입장이 나뉘어졌는데,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과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이었다. 여기에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New Side(신파), 부정적인 사람들은 Old Side(구파)라 하였는데, 이들은 1741년 구파의 구성원들은 필라델피아에서 대회를 열고, 신파의 구성원들은 뉴욕 대회를 열어 각각 결별하고 말았다. 그 결과 미국 장로교는 최초로 나뉘어지면서 1758년 다시 통합될 때까지 두 개의 진영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이 전반적인 분위기는 대각성 운동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장로교 지도자들 중에서도 젊고 유능한 사람들이 대부분 신파에 있었기 때문에, 1758년 두 측은 결국 신파를 중심으로 다시 합의를 하여 통합을 이루게 되었다.
3) 독립전쟁기의 교회
18세기의 마지막 25년은 미국의 혁명시기였다. 영국과 식민지 주들간의 갈등은 1775년 전쟁으로 발전되어, 1776년 미국은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고, 전쟁은 1783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의 미국의 종교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종교의 자유였다. 그 동안 유럽의 대부분 교회들은 국가 교회의 형태로 국가의 간섭을 받아왔으나, 이제 미국은 종교의 자유를 헌법에 명시함으로써, 각 교파들은 완전한 종교적 자유를 보장받는 획기적인 변화를 맞게 되었다.
장로교인들은 포함한 많은 미국인들이 이 기간 동안에 미국의 독립과 독립 전쟁을 위해서 지원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장로교회는 사무관이나, 군인으로, 또는 군목으로 전쟁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장로교인들은 영국에서 이민을 오게 된 동기가 종교적인 박해와도 관련이 있기 때문에, 영국에 대한 적개심이 상당히 높았다.
1780년대 미국의 종교적인 상황은 전쟁 중에 있는 국가처럼 자신들도 매우 어수선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국가의 독립은 교회에도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도록 하였다. 교회들은 각기 조직을 새롭게 정비하면서 체계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장로교회도 마찬가지로 미국 장로교 총회를 구성하기 위한 대회를 필라델피아에서 모였다. 여기서 대회와 노회들은 공중 예배와 교리, 직제, 치리의 내용을 포함한 장로교회의 헌법과 함께 새로운 "미국 예배 모범"(American Directory for the Worship of God)을 채택하였다. 1786년 필라델피아 대회에서는 노회 수를 12개에서 16개로 늘렸고, 4개의 대회로 편성하였으며, 총회를 구성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1789년 제 1회 장로교 총회가 모여, 뉴욕 제일 장로교회의 John Rodgers(1727-1811)를 총회장으로 선출함으로써, 역사적인 미장로교 총회가 출발하게 되었다.
독립 전쟁은 미국의 정치적인 면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사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시기였다. 미국이 정치적 독립과 자유를 얻었듯이 미국의 교회들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과 미국 내에서의 종교적 자유를 얻게 되었으며, 미국이 국가 체계를 위해 헌법을 제정한 것처럼 교회들, 특별히 장로교회도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교회 정치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4) 제 2차 대각성 운동
대각성 시기에 미국 전체는 종교적인 새로운 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독립 전쟁 이후 전쟁의 시기를 거치면서, 종교적인 관심들이 식어져 버렸다. 합리주의적 사고가 확산되고, 이신론적인 영향으로 기독교에 대한 도전들이 심화되고 있었다. 교회는 영적으로 침체되고 있었다.
이 때 기독교의 영적 각성을 위한 새로운 움직임들이 동부를 중심으로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제 2차 대각성 부흥운동이다. 이 운동은 차츰 서부로 퍼져 나가게 되었는데, 1795년 예일 대학의 학장 Timothy Dwight를 중심으로 일어난 부흥의 물결은 다른 대학으로 옮겨갔으며, 19세기 초 20년 동안 미국의 영적 상태를 새롭게 하였다.
특별히 이 운동은 서부로 전파되면서 크게 부흥하는 역사를 이루었다. 순회 전도자들이 나타나 설교를 하고, 야영집회와 영적인 체험 현상들이 나타나고, 특별히 이 운동의 영향은 장로교에 많이 나타났다. 이 때 활동했던 대표적인 부흥사가 바로 Charles G. Finney(1792-1875) 같은 사람이다. 이 운동의 결과로 선교 활동이 활발해져서 많은 젊은이들이 해외 선교를 위해 헌신하게 되었으며, 많은 대학과 신학교들(Union, Columbia, McCormick...)이 장로교를 중심으로 세워지고, 초교파적인 연합 기관들과 자선 단체들이 조직되고, 기독교 신문이나 잡지들이 발간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초 장로교는 두 번의 중대한 분열이 일어났다. Cumberland지방에서 부흥운동에 대한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나뉘게 되는데, 찬성하는 세력들을 중심으로 컴버랜드 장로교회가 형성되었다. 두 번째는 켄터키 지역에서 부흥회 지지 세력인 New Light파가 중심이 되어 이탈하기도 했다.
5) 남북 교회의 분열, 그리고 재연합
제 2차 대각성 운동이 지나고, 미국 교회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교회의 내적인 문제도 아니요, 신학적인 문제도 아니었다. 미국 사회의 문제가 교회 안에 들어와 교회의 문제가 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노예 제도였다. 노예문제는 급기야 남북 전쟁으로 비화되었고, 교회도 남북으로 나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1837-38년 미국 장로교회는 또 다른 분열의 고통을 당하는데, 그것은 구학파(Old School)와 신학파(New School)의 대립이었다. 분열의 원인은 신학과 교회 정치와 개혁 등의 입장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노예 문제가 큰 문제였다. 1836년 뉴욕 유니온 신학교가 신학파의 영향으로 설립되고, 프린스톤 신학교는 구학파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결국 이들은 1837년과 1838년 총회를 거치면서 나뉘어지게 되었다.
그 후 시민 전쟁(1861-65)이 다가오기 전인 1857년에 신파 장로교회가 다시 분열을 하고, 1861년 구파 장로교회가 나뉘어졌다. 그러다가 남쪽의 신구파가 1864년에 연합하여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 S. 로, 북쪽의 두 파는 1861-1870 사이에 연합하여,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로 부르게 되었다. 남쪽 교회들은 남북 전쟁 기간을 통해서 노예 제도를 찬성하는 입장에 섰고, 북쪽 교회들은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서 싸웠다. 전쟁은 북쪽의 승리로 끝났으나, 그들의 상처는 쉽게 아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장로교 연합 운동은 계속해서 일어나 1906년에 PCUSA와 CPC(Cumberland Presbyterian Church)가 다시 결합을 하는 결실을 맺기도 하였다. 1950년대 초까지 미국은 PCUSA, PCUS, 그리고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장로교회인 UPCNA(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 of North America) 등 세 계열이 장로교회로 존속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58년에 PCUSA와 UPCNA가 연합하여 UPCUSA(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를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1983년 조지아주 아틀란타에서 남북 장로교 총회가 연합으로 모여 통합을 선언하므로써, 미국 장로교회는 모든 분열의 역사를 매듭짓고 새로운 출발을 이루게 되었다.
3. 미국 장로교의 예배
1) 장로교 예배의 신학
장로교의 예배 신학은 개혁교회의 사상을 기초로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장로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예배를 드리려고 노력했으며, 예배의 초점은 언제나 하나님의 초월적인 주권(majesty)과 그 앞에 선 인간의 연약함과 죄성에 맞추어졌다. 이것은 마치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과 부르심 앞에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사 6:1-8) 이런 기본적인 개혁교회의 근본 사상에 근거한 장로교 예배 신학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장로교 예배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시한다.
장로교회는 칼뱅의 전통에 따라 교회와 예배와 모든 생활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삼았다. 그들은 기록된 말씀으로서의 성경과 선포된 말씀으로서의 설교를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았다. 그래서 장로교 예배에서 성경을 봉독하는 것과 설교를 하는 시간은 예배의 가장 중심 부분을 차지하였다.
둘째로, 장로교의 예배는 계약신학(covenant theology)에 근거를 두고 있다.
칼뱅에 의하여 만들어진 선택 교리는 인간들의 어떤 공로나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적인 선택에 의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이 관계를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에 의하여 성립이 된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우리는 그 분 앞에 나아가 예배를 드리고 그 분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므로 장로교의 세례는 하나님의 계약 공동체로서 주님의 몸인 교회로 들어오는 의식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 자손들이 할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과 같다. 성만찬 역시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에 이루어지는 계약식사(covenant meal)요, 주님이 임재하신 계약의 표징(covenant sign)이다.
셋째로, 장로교 예배는 성령의 역사를 중요시한다.
선포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지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성경의 권위를 확증시키는 분도 성령이시오, 선포되어지는 설교도 성령의 능력과 자유 안에서만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
성례전 신학에 있어서도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만이 성례전들은 유효하게 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세례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사와 성만찬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사는 매우 중요하다. 성만찬도 성령님의 임재에 의해서 우리는 주님을 체험하게 된다는 영적 임재설을 믿는다.
넷째로, 장로교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이성이나 이해력으로 알 수 없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이다. 믿음은 우리의 감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높고 비밀스러운 것들을 보게 한다. 믿음은 계시에 대한 통로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 수 있도록 하고, 그것을 통하여 주어지는 선물들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 이것은 사람의 입을 통하여 다가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세례도 믿음이 없이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세례는 믿음의 종속물이여...만일 세례가 믿음이 없이 주어진다면 이것은 사악하고 신성 모독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이루어진 세례는 강력하고 실제저긴 은총의 수단이 된다. 세례와 함께 성만찬에 있어서도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받는다. 믿음에 의하여만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장로교의 예배 신학에 있어서 신자들의 믿음은 예배의 핵심 요소가 되고 있다. 칼뱅은 모든 예배의 근거를 사도행전 2:42에 두고, 초대 교회 성도들이 드렸던 예배를 모델로 하여, "말씀, 기도, 성만찬, 교제(구제헌금)"를 예배의 가장 기본적인 틀로 생각했다.
이상과 같이 장로교 예배 신학은 말씀의 신학, 계약 신학, 성령의 역사, 믿음, 초대 교회의 진통에 근거한 역사적인 예배를 중요시 한다.
4. 미국 장로교 예배의 변천사
미국 장로교는 예배에 관한 두 가지의 중요한 것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예배 지침(Directory of Worship)이고, 또 하나는 예배서(Service Book)이다. 예배 지침은 교회 헌법에 실린 것으로서 교회의 법적 권위를 가지고, 장로교 예배 신학과 예배를 위한 적절한 지침들을 제시한다. 이것은 예배 순서를 예시하지는 않고, 예배 순서를 위한 기준과 규범을 제시한다. 그러나 예배서는 예배 지침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예배에 관한 순서(order)와 예문(text)들을 제시해준다. 개혁 교회에 있어서는 예배서가 예배 지침 보다 훨씬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미장로교의 예배의 변천 과정을 공부하는 가운데 한국 장로교 예배의 뿌리를 살펴보도록 한다.
1) 16-17세기의 예배
16세기의 개혁 교회들은 예배서들을 사용하였다. 쯔빙글리, 부처, 칼뱅 등은 회중들을 위한 예배 형식들을 모두 준비하여 사용하였다. 칼뱅의 후예인 존 낙스 역시 스코틀랜드에서 "기도 예식서"(The Formes of Prayers)를 발간하여 사용하였고, 그것은 곧 "공동 예배 순서집"(The Book of Common Order)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무렵 영국에서는 "예배서"로 말미암아 영국 국교회와 정부측과 이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졌던 청교도 간에 갈등이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이는 스코틀랜드와도 갈등을 가져 왔다. 영국 국교회와 정부는 자신들의 예전으로 영국 전체를 통일시키려고 한 반면에, 대륙의 종교 개혁 사상에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예배를 개혁하려 했던 청교도들과 스코틀랜드 교회는 국교회의 예전에 대하여 반대하는 입장을 가졌다. 이런 결과는 전쟁을 치르면서까지 심화되었고, 드디어는 청교도 측의 승리로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열리게 되었고, 1644년에 그 유명한 "The Westminster Directory for the Public Worship of God"를 만들게 되었다.
이 예배 지침(모범)은 미국 장로교 예배 지침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청교도들과 스코틀랜드 인들이 신대륙에 정착하게 될 때, 이들은 미국 장로교회를 형성하는 핵심적인 사람들이 되었다. 이들은 신대륙에 이주하여 예배서에 대하여는 반대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고, 그 대신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을 기초로 하여 예배를 드렸다. 식민 시대의 미 장로교회는 1644년도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1788년 미국 장로교를 위한 개정판이 나와 총회에서 채택되어 그것을 사용하게 되었다.
2) 19세기의 예배
19세시 중반에 미국 장로교와 기타 개혁교회들 사이에는 하나의 새로운 운동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은 예전 전통을 회복하고, 예배서를 활용하는 가치를 깨달은 것이다. 이 때 장로교에서는 개인적으로 예배서들이 쓰여지기 시작하였다. 그 좋은 예가 1855년 Charles W. Baird(1828-1887)가 "장로교 예배서"(Presbyterian Worship)를 발간한 일이다. 이러한 것은 19세기 말에 이르러 북장로교의 출판사들을 자극하여 예식서들을 발간하려는 움직임을 일게 하였다. 그러나 예식서가 정식으로 먼저 나온 곳은 1894년 남장로교에서였다. 북장로교는 9년 후에 총회에서 예배서를 요청하는 긍정적 반응들이 나오게 되었다.
3) 20세기의 예배
(1) 공동 예배서(The Book of Common Worship, 1906, 1932, 1946)
1903년 북장로교(PCUSA)는 예배서에 대한 요구가 차츰 증대되어가자 예배서를 발간하기 위한 준비를 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06년에 "공동 예배서"가 출간되었다. 이것은 미국 장로교회로 하여금 예배를 만드는데 있어서 예전적인 순서(order)와 예문(text)의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1906년 공동 예배서는 미국 장로교 예배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이것은 주일 아침과 저녁 예배 순서를 포함하고, 그리고 성만찬 집례, 교회력에 따른 절기, 세례와 입교 문답에 대한 순서와 예문, 시편송과 찬송 등이 포함되어 있다. 1906년판은 1932년에 다시 개정되었는데, 여기서는 절기에 대한 예문이 첨가되고, 기초적인 성서일과가 포함되었다. 특별한 것은 남장로교 총회가 이것을 사용하도록 승인하였다는 사실이다.
1946년이 이 공동 예배서는 다시 개정되는데, 여기서는 에큐메니칼 예전학자들과 종교개혁가들의 예배에 대한 보다 깊은 지식들이 반영되었다. 이것은 주일 낮 예배와 밤 예배 그리고 성만찬 집례에 관한 자료들이 더 보강되었다.
(2) 예배서(The Worshipbook, 1970)
1955년 북장로교 총회는 또 다른 개정판을 요구했다. 여기는 남장로교 뿐만 아니라. Cumberland 장로교회도 함께 참여하여, 1970년에 "The Worshipbook Services"라는 이름으로 발간되었다가, 2년 후에 "The Worshipbook-Services ad Hymns"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것의 공헌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용어를 현대화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주일 예배를 말씀과 성만찬 예배로 분명하게 규정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예배서는 제 2차 Vatican 공의회 이후 각 교회들이 예배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하게 됨으로써 다시 개정해야 할 필요에 직면하게 된다
(3) 1993년 공동 예배서 (Book of Common Worship)
1980년 미북장로교 총회는 새로운 예배서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Cumberland 장로교회와 함께 새로운 예배서를 만들려고 계획을 하였다. 그러나 이 때 남북 장로교회가 연합하는 일이 1983년에 일어나게 되었다. 그 결과 연합된 미 장로교회(PCUSA)는 1989년에 예배 모범(지침)을 다시 개정하고, 이 예배 모범과 조화를 이루는 예배서를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1993년에 출간된 가장 최근의 미 장로교의 예배서인 "Book of Common Worship"이다.
5. 미국 장로교 예배 순서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미국 장로교 예배서에 나타난 예배 순서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지금까지 우리가 공부한대로 미 장로교회의 예배 예식서는 1906년부터 시작하여, 1932, 1946, 그리고 1970년, 1993년 판으로 되었다. 그 중에 1906, 1932, 1946년판은 거의 차이가 없고, 그 이후에 1970년과 1993년은 대폭 수정이 이루어졌으므로, 우리는 그 중에 대표적으로 1946년과 1970년 그리고 1993년판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1) The Book of Common Worship(1946)
1946년 "공동 예배서"는 크게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예배를 위한 준비로서 예배자와 집례자의 준비, 개회 기도와 성가대 기도문을 제시한다. 2장은 공중 예배를 위한 순서들을 주일 아침 예배, 특별 예배, 저녁 예배, 아동 예배, 청년 예배, 연도 등으로 나누어 기록하고 있다. 3장은 성례전과 교회의 예식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유아 세례, 성인 세례, 입교, 타교인의 수찬, 성찬 준비, 성만찬, 환자에 대한 성만찬과 심방시의 성경, 결혼, 장례, 목사 후보생 승인, 목사의 안수와 취임, 장로의 안수와 취임, 집사의 안수와 취임, 교회 건축 및 봉헌, 오르간이나 성물 봉헌 등을 취급하고 있다. 4장은 기도에 관한 것으로서, 교회력에 따른 기도와 국가 기념일에 따른 기도, 특별 용도나 은혜를 위한 기도, 봉헌 기도, 축도, 용서를 위한 기도, 가족 기도, 등을 예시하고 있다. 마지막 5장에서는 성서 일과를 간단히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주일 낮 예배 순서는 다음과 같다(참고로 본 예배서는 주일 낮 예배에 관하여 5가지 형태를 예시하고 있다)
주일 낮 예배 성만찬 예배
예배의 부름 예배의 부름
경외의 기도(Adoration) 기원
십계명
죄의 고백 죄의 고백
용서의 확인
시편송 영광송이나 송가 또는 찬송
제 1성경 봉독 서신서 봉독
찬송이나 교송 복음서 봉독
제 2 성경 봉독
신앙고백
찬송이나 교송 찬송
감사기도 설교
간구 찬미
중보의 기도 봉헌
성도의 교제 초대사
봉헌 성물 현시(uncovered)
찬송이나 교송 성찬 제정사
설교 예비 기원
찬송 떡을 들어 쪼갬(성체분할)
축도 잔을 듦
집례자 수찬-장로수찬-회중수찬
감사기도
찬송
축도
2) The Worshipbook(1970)
"예배서"는 미국의 Cumberland 장로교회와 남장로교회(PCUS), 그리고 북장로교회(UPCUSA)가 연합하여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예배서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미국 장로교회가 연합하여 만든 장로교 예배서라는데 그 의의가 크다. 그리고 이 예배서는 현대 영어를 예배에 사용하도록 채택하였으며, 찬송도 현대적인 것들로 하였다.
예배의 구성은 첫째, 예배를 위한 준비에서 예배 전 기도, 십계명 등을 기록하고, 둘째, 공중 예배를 위한 순서에서는 성만찬을 포함한 예배, 세례를 포함한 예배, 성례전이 없는 예배에 대한 순서를 먼저 제시하고, 다음으로 순서에 대한 해설이 이어진다. 해설과 함께 된 내용은 주일 예배, 세례, 입교, 성만찬, 아침 기도회, 저녁 기도회, 애찬식, 결혼식, 장례, 안수와 취임식 등이다. 셋째는, 연도가 한 장으로 취급되면서 보다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공동예배서"와 다른 점이다. 연도에는 산상 수훈, 고백의 기도, 중보기도, 감사기도, 교회를 위한 기도, 교회의 일치를 위한 기도, 교회의 이름들을 위한 기도, 세계 평화를 위한 기도, 국가를 위한 기도, 근로자를 위한 기도 등이 제시되어 있다. 넷째로 교회력에는 강림절, 주현절, 사순절, 종려주일과 성주간, 세족 목요일, 성금요일, 부활절, 승천절, 오순절 등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다섯째로 기념일로서 새해, 교회 연합 주일, 세상과 나눔 주일, 종교개혁 주일, 추수감사절, 국가 기념일 등에 관한 예배를 기록하고 있다. 그 다음에 성서일과, 기타 기도문, 가정에서 사용할 기도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일예배 성만찬 예배
예배의 부름
찬양의 찬송
죄의 고백
용서의 선언
응답송 (영광송, 찬송, 시편송)
성령 임재기도
구약 봉독
신약 봉독
설교
신앙고백
회중을 위한 기도
평화의 인사
봉헌
감사의 기도 초대사
주기도문 감사기도
찬송 주기도문
위탁 성만찬
축도 응답송
찬송
위탁
축도
3) Book of Common Worship(1993)
이 공동 예배서는 1983년 남북 장로교회가 연합한 후, 1989년에 예배 모범을 개정하고 여기에 맞추어서 나온 예배서로서 그 가치는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예배서의 특징을 보면,
첫째, 예전적이면서 자유로움을 인정한다(form and freedom). 예배의 순서를 제시하되 어디까지나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둘째, 에큐메니칼적이다(ecumenical convergence). WCC의 B.E.M. 과 함께 이 예전은 교회의 일치를 추구하고 있다.
셋째, 개혁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reformed and catholic). 이 예배는 종교 개혁가들의 정신을 따르면서도 기독교의 보편성을 지향하고 있다.
넷째, 지역적이면서도 우주적이다(local and universal).이 예배는 미국 회중들의 관심을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공을 초월하는 기독교 예배의 우주성을 갖고 있다.
다섯째, 이 예배서에는 다른 예배서에 포함된 안수나 취임, 기타 절기에 따른 예배는 포함하고 있지 않다.
이상과 같은 특징을 가진 이 예배서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예배를 위한 준비: 예배 전 기도, 십계명, 예배 인도자를 위한 기도
(2) 주일 예배: 주일 예배 순서와 각 순서에 따른 세부 예문이 제시되고 있다
(3) 교회력: 교회의 절기에 따른 예배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4) 세례
(5) 매일 기도회
(6) 시편송
(7) 기도(연도)
(8) 결혼식
(9) 장례식
(10) 목회 예식: 환자 사역, 불참자에 대한 성찬 등
(11) 성서일과
그리고 주일 예배 순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주일 예배 성만찬 주일 예배
모임(Gathering)
예배의 부름
오늘의 찬송 또는 개회 기도
찬송, 시편 또는 영가
죄의 고백과 용서
평화의 인사
송가, 시편, 찬송 또는 영가
말씀
성령 임재를 위한 기도
첫 번째 성경 봉독
시편송
두 번째 성경 봉독
교송, 찬송, 시편송, 송가 또는 영가
복음서 봉독
설교
초청
찬송, 송가, 시편송, 또는 영가
신앙의 확증(신앙고백)
(목회 예식: 세례등)
회중의 기도(중보 기도)
평화의 인사
성만찬
봉헌
성만찬 초대
감사기도 대감사기도
주기도문 주기도문
분병
회중의 수찬
파송
찬송, 영가, 송가 또는 시편송
위탁과 축복 기도
이 예배의 몇 가지 특징을 보면, 첫째로, 찬양의 형태를 다양하게 하여 찬송가나 시편송이나 영가나 송가 중에서 선택하여 부르게 함으로써, 예배 인도자의 선택의 폭을 넓혀놓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개혁 교회의 전통에 따라 죄의 고백과 용서가 예배의 시작 부분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평화의 인사가 앞부분과 뒷부분에 등장하고 있는 점은 회중과의 교류적인 측면에서 좋다고 본다. 셋째로, 칼뱅의 전통에 따라서 성경 봉독 전에 성령의 임재를 구하는 기도가 있으며, 성경은 현재 전세계의 개혁교회가 함께 쓰고 있는 "공동 성서일과"(The Revised Common Lectionary, 1992)를 따라 세 번 나누어서 봉독하도록 하고 있다는 점이다. 넷째는 설교 후에 초청의 순서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대각성 부흥운동의 영향이 아닌가 한다. 다섯째는 봉헌, 신앙고백, 찬송 등의 모든 순서들을 설교 후에 둠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하나님께 응답하도록 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섯째로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 예배가 성만찬을 하지 않을 때에도, 그 형식에 있어서는 성만찬의 순서를 갖는 예배처럼 짜여져 있다는 점이다. 즉 성만찬이 없는 때에라도 그 예배의 순서에서 봉헌 후에 감사기도를 넣음으로써, 원래 주일 예배는 성만찬이 있는 예배가 원칙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칼뱅을 비롯한 모든 개혁가들이 회복하고자 했던 초대교회의 예배의 모습이다.
III. 나가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 장로교 예배의 신학과 그 역사에 대해서 공부했다. 결론은 장로교예배는 개혁교회 전통에 가장 우뚝 교회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예배가 말씀을 중심으로 서 있다는 것이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칼뱅을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이 그토록 회복하고자 했던 초대교회의 말씀과 성례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 예배의 모습을 회복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지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렇게 개혁교회의 전통에 가장 굳게 서 있는 미국 장로교회의 예배를 전수 받은 한국교회의 예배가 그 실제적인 모습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우리가 공부한 미장로교회의 예배의 모습 내지는 개혁교회의 예배의 모습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미국에서 일어난 대각성 부흥운동과 특별히 19세기에 미국 대륙을 풍미했던 Frontier Tradition에 대해서 공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개혁교회의 예배 전통은 미국에서의 두 번에 걸친 대각성 부흥운동과 19세기의 "변방전통"에 의해서 많이 왜곡되고 변질되어 버렸고, 바로 그 변질된 예배의 전통이 우리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7. 열린예배의 이해
들어가는 말
최근 수 년 동안 한국교회 예배에 일어났던 가장 큰 변화는 소위 열린예배의 도입과 보급이다. 강남의 몇몇 교회들을 주축으로 하여 도입된 이 예배는 마치 열풍처럼 전국 교회에 퍼져 많은 한국교회들의 예배를 바꾸어 놓았다. 예배당에 있어서 높고 접근이 불가능하던 강단들은 마치 연극 무대처럼 낮고 넓어졌으며, 강단 부분에는 드럼과 앰프, 그리고 기타와 신디사이저 등 온갖 종류의 악기들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뿐만이 아니다. 종래의 예배는 오직 성직자만이 강단에 올라갈 수 있었으나, 이제는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강단에 올라가 각자 마이크를 하나씩 잡고 율동을 하면서 찬송을 하는가 하면, 때로는 강단에서 드라마나 촌극(skit) 또는 각종 발표회 등이 행해지는 일도 다반사가 되었다. 지금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에게는 이것이 현대 예배의 추세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많은 목회자들이 이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고민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여기에 동참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고민 중에 있다. 교회와 목회자의 이러한 당면함에 비해 그 동안 학계에서 내 놓은 이에 관한 의견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열린예배에 대한 예배학적 분석을 통해 그 본질을 규명하고 올바른 이해를 갖도록 함에 그 목적을 둔다고 하겠다.
I. 열린예배의 기원
한국교회에 열린예배가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이유는 미국의 성장하는 교회들 다수가 이 예배를 실시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며,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다. 현재 미국에서 열린예배를 실시하고 있는 대표적인 교회로는 본산지인 윌로우크릭 교회 외에도 미시간주에 위치한 갈보리 교회(Calvary Church in Grand Rapid, Michigan)와 인디아나주에 위치한 "그랜져 커뮤니티 교회"(Granger Community Church in South Bend, Indiana), 그리고 아리조나주에 위치한 "기쁨의 공동체 교회" (Community Church of Joy, Phoenix, Arizona)와 미시간 주에 위치한 "삼위일체 감리교회" (Trinity United Methodist Church, Lansing, Michigan)등을 꼽을 수 있다. 물론 열린예배는 원래 빌 하이블스(Bill Hybels) 목사가 1992년 미국 일리노이주의 남부 배링톤(South Barrington) 지역에 윌로우크릭 교회(Willow Creek Church)를 세우면서 시작한 구도자 예배(Seekers service)가 그 시초이다. 그러므로 열린예배는 구도자 예배(Seekers Service)라고 불러야 정확한 이름이 된다. 그러나 한국교회에는 이것이 열린예배로 알려져 있으므로 본 논문에서는 열린예배 혹은 구도자 예배를 혼용하기로 하겠다.
빌 하이블스 목사는 교회를 개척하면서 제일 먼저 자기가 개척하게 될 교회의 회중을 파악하고 결정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가 생각한 자기 목회와 선교의 주된 대상은 교회가 위치해 있는 배링톤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 중에서도 특히 25세에서 50세까지의 연령층으로서 전문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비 기독교인들이었다. 일단 대상을 정한 후에는 그들이 왜 교회에 나오지 않는가를 조사하였는데 빌 하이블스 목사가 파악한 이유는 다음의 다섯 가지였다: 첫째, 교회는 언제나 돈(헌금)을 요구하는데, 그것이 얼마나 요긴하게 사용되는지는 알지 못한다. 둘째, 예배가 지루하고 생명력이 없다. 셋째, 예배가 매우 단조롭고 똑같은 것을 매번 반복한다. 넷째, 설교가 일상생활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 넷째, 예배에 참석하러 온 사람들로 하여금 죄의식을 느끼게 하고 무지하다는 생각을 갖게 함으로써 결국 집에 돌아갈 때에는 교회에 들어올 때보다 더 참담한 심정이 되게 한다.
특히 예배에 관하여는 문제가 더 복잡하였는데, 불신자들의 눈으로 볼 때에 기존의 예배는 용어와 분위기와 동작 등에 있어서 모두 낯설기 때문에 불신자들이 이러한 예배에 적응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불신자들이 전통적 예배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음의 여섯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전통적인 예배는 초신자들을 당황하게 한다. 예컨대 초신자들은 성경책이나 예배집을 사용할 줄 모르며, 또 언제 일어서고 언제 앉는지 알지 못한다. 둘째, 전통적 예배는 교회의 용어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초신자들은 이를 알아들을 수 없다. 예컨대 "사도신경," "복음," "사순절" 등의 용어들이다. 초신자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용어들은 피부에 와 닿지 않으며 자기들과 관계없는 말들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다음에 또 참석할 마음이 사라진다. 셋째, 전통적인 예배는 실제의 삶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예를 들면 목사가 입고 있는 가운은 실제 생활에서는 전혀 입지 않는 것이며, 교회에서 사용되는 다른 상징이나 제스쳐들도 비 기독교인의 이성적인 사고로는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다. 넷째, 전통적인 예배에서 불려지는 노래는 따라 부르기가 어렵다. 예전적인 노래들은 지나치게 산문적이고 우아하며 신학적이다. 이 노래들은 고전음악에 익숙하며 고도로 훈련된 사람들에 의해서 작사되고 작곡되었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노래들은 따라부르기가 어려워서 찬송시간에 초신자들은 멍청하게 앉아있는 경우가 많다. 다섯째로, 예전적인 예배는 고전음악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미국 음반시장에서 팔리는 고전음악의 비중은 단 2 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데 이는 고전음악을 듣는 사람이 아주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특히 1946년 이후에 출생한 세대들은 음악적 취향이 완전히 바뀌어서 현대음악을 선호한다. 록큰롤(rock and roll)등 현대음악이야말로 오늘날 세대들의 마음을 표현하는 음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이 단지 2퍼센트의 인구만을 대상으로 하여 고전음악을 강조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대들에게 다가가려면 새로운 형태의 음악과 새로운 형태의 예배가 필요하다. 그리고 다행히도 하나님께서는 팝음악과 록음악에 종사하는 작곡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영감을 주셨다고 믿는다. 여섯째로, 예전적 예배는 친밀감이 떨어진다. 예전적 예배는 본질적으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며,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또한 예배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과의 수평적 관계보다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더 강조한다. 이러한 예배에서는 친밀감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예배가 시작되기 전의 예배당은 대화보다는 침묵과 명상이 더 지배한다. 높고 아치 형태로 된 천장과 예전적으로 디자인된 예배당 구조와 장식물들은 차갑고 비인격적인 것으로 보인다. 의자의 배열은 다른 예배자들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이 오직 앞만 바라보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러한 형태의 예배당공간은 친밀감과 따뜻함이라는 측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다.
이러한 판단 하에서 빌 하이블스 목사는 불신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과거 교회로부터 얻은 부정적인 경험과 교회에 대한 그들의 선입관을 제거하고 기존의 예배에 대한 낯설음을 극복하는 방안에 대하여 고민하였다. 이는 동시에 어떻게 하면 교회가 기독교 메세지를 가지고 그들에게 접근할 수 있을까 하는 것데 대한 고민이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오직 새로운 형태의 예배만이 이러한 모든 장벽을 극복하고 새로운 느낌과 새로운 경험으로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기존의 예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태의 예배를 계획하기에 이르렀는데, 그에 의하면 새로운 형태의 예배는 다음의 이념들을 포함하여야 하였다: 첫째, 세계 복음화에 대한 성서의 명령을 현재 교회가 위치한 지역에서부터 이루어 나간다는 믿음. 둘째,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나라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열정. 그러므로 현대적이고도 창의적이 되려는 헌신이 있어야 한다. 셋째, 구도자의 익명성을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 넷째, 구도자들이 신자가 되기로 결단하는데는 시간을 필요로 하므로 너무 조급하게 결과를 강요하지 말고 과정에 충실한다. 다섯째, 모든 예배의 진행을 뛰어나게 하기 위한 필요성을 인식하며, 특히 하나님의 성품과 본성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점에 유의한다. 여섯째, 사람들은 교회가 자기들의 동기를 정직하고 성실하고 훌륭하게 다루어 줄 때 비로소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들여서 헌신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마지막으로, 기독교를 구도자들의 일상생활과 연결시켜서 복음을 제시하려는 헌신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이념의 토대 위에서 빌 하이블스는 구체적이고도 세심하게 새로운 예배를 계획하였다. 윌로우크릭 교회의 예배는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이러한 전략들을 반영하고 있다. 하나는 구도자들이 교회에 들어왔을 때 느낄 수 있는 낯선 감정을 최대한 제거하려는 노력이다. 예컨대 교회당에 있는 일체의 기독교적 상징을 제거하고, 예배에서는 기독교적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성례전도 실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구도자들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일체의 예배행위가 인도자들에 의해서만 진행된다. 구도자들은 말하거나 행동할 필요가 없으며 그냥 앉아만 있으면 된다.
윌로우크릭 교회가 예배의 전략을 현장에 적용하려는 또 하나의 노력은 예배를 구도자들의 문화에 맞추려는 시도이다. 심지어는 예배당 건물의 외관이나 또는 내부를 구도자들의 취향에 맞게 설정하고 예배 중에 사용되는 음악도 구도자들의 취향에 맞도록 세심하게 배려한다. 매번 예배에서 드라마를 보여준다든지 또는 멀티 미디어를 사용하는 것은 모두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설교는 당연히 구도자들의 일상생활과 직결되는 주제를 설정하여 접근하게 된다.
II. 열린 예배의 형식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구도자 예배는 그 형식에 있어서 매우 단순한 것이 특징이다. 윌로우크릭 교회의 구도자예배는 다음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밴드의 전주
환영의 인사
보컬 듀엣
드라마
보컬 그룹의 연주
드라마
성경봉독
밴드가 곁들여진 노래
헌금(이때에 구도자들은 헌금을 하지 말도록 광고한다)
메시지(설교)
토론 및 교제
구도자 예배는 이외에도 여러 가지의 형식을 취할 수 있는데, 그 중 몇 가지 패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형태 A : 이 예배형태에서는 헌금이 메시지 바로 뒤에 온다. 여기에서 전반부는 메시지를 위한 준비가 위주이고, 후반부는 메시지에 대한 응답이 주된 요소이며, 헌금은 이 두 가지 사건을 연결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예배에의 부름
환영인사
예배합창
성경봉독과 기도
특별순서
특별찬송
메시지-메시지가 끝난 후에는 부드러운 음악이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헌금으로 연결.
헌금
특별음악
폐회
형태 B와 C : 이 형태에서는 환영의 인사 앞에 예배합창이 옴으로써 예배에의 부름이 주는 분위기가 힘차게 유지될 수 있도록 한다.
예배에의 부름
예배합창
환영의 인사
예배합창
성경봉독과 기도
특별순서
특별음악
헌금 메시지
특별음악 헌금
메시지 특별음악
폐회
형태 D와 E (이 형태에서는 드라마 또는 인터뷰가 메시지 바로 앞에 옴으로써 메시지를 위한 준비로 활용된다).
예배에의 부름
환영의 인사
합창
성경봉독과 기도
특별음악
헌금 드라마/인터뷰
특별음악 메시지
드라마/인터뷰 헌금
메시지 특별음악
폐회
열린예배들은 이렇듯 약간씩의 변화를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크게 보아서는 별반 차이점이 없다. 특히 예배의 역사적 측면에서 보면 워낙 큰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 여러 예배형태들을 꼽을 수 있기 때문에 위에 열거된 예배형태들은 다양한 여러 가지의 예배형태라기보다는 오히려 한가지의 같은 예배형태라고 보아도 틀림이 없다.
III. 열린예배의 문제점
열린예배를 예배학적으로 살펴볼 때에 다음 몇 가지의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먼저, 열린예배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예배가 아닌 일종의 전도집회라고 보아야 한다. 기독교 예배의 정의는 무엇보다도 예배의 이중성(duality of worship)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는 "하나님의 계시와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말하는데,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회중에 대한 하나님의 봉사와 하나님께 드리는 회중의 봉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열린 예배를 면밀히 들여다보면 이 두 가지 요건이 충족되지 않는다. 윌로우크릭 교회의 열린예배를 살펴보면 광고시간에 스태프 중의 한사람이 나와서 말하기를 "이 예배는 구도자들을 위한 우리의 선물"(This service is our gift for the seekers)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이 한마디는 구도자 예배의 본질과 정체성(identity)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구도자예배는 "하나님을 위한 회중의 봉사"라기보다는 "구도자를 위한 회중의 봉사," 다시 말해서 인간을 위한 인간의 봉사라는 사실이다.
원래 기독교 예배는 그 대상과 목적과 지향하는 바가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에서 절정에 이른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행위와 그 주체인 하나님이다. 다시 말하여 삼위 일체 하나님의 현존과 행위가 예배의 중심이다. 정교회 신학자인 니시오티스(Nikos A. Nissiotis)는 기독교 예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예배는 인간에게 주도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초점이 있다." 이 말은 기독교 예배의 절대적인 주도권과 우선권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님의 행위에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예배를 드리며, 이 예배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삼위일체 하나님께로 귀속되는,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행위이다.
이에 비해 열린예배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것보다는 참여한 불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소개하여 주는 것을 일차적 목적으로 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이것은 하나의 전도집회이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예배라고 볼 수 없다. 이는 윌로우크릭 교회의 지도자들 스스로가 주말에 열리는 구도자 예배를 예배라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둘째로, 열린예배는 하나님 중심적 예배가 아닌 인간 중심적 예배 다시 말해서 고객 지향적인 예배(consumer-oriented worship)라고 볼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열린예배는 처음부터 특정 지역에 거주하는 특정 연령의 대상으로 하여 고안된 예배이다. 이 예배의 참여자는 신자(believer)가 아니라 불신자(non-believer)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피조물로서 당연히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한 동기에서 모인 회중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도 알지 못하며 예배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교회에 와 앉아 있는 사람들이거나, 심지어는 마치 이 가계 저 가계를 다니면서 필요한 물건이나 흥미로운 물건을 쇼핑하듯 이 교회 저 교회를 다니면서 교회와 예배라는 "종교상품"을 고르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한번 예배에 참석해 보고는 그 예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다음 주일에 이 교회에 다시 올지 안 올지를 마음속으로 결정해 버린다.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에 그들을 붙잡을 만한 두 번째의 기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흥미를 유발시키지 않는 예배나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지 못하는 예배로는 이들의 관심을 끌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배의 최대 기준과 가치는 참여자들의 "흥미"이며 "관심"이다. 이런 점에서 열린예배는 흥미 위주의 예배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고객 즉 구도자들이 예배를 참석한 후에 흥미를 느꼈느냐 아니냐, 그들이 다음에 또 오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느냐 아니냐가 좋은 예배 혹은 성공적인 예배의 판단 기준이다. 그러므로 구도자들이야말로 예배의 모든 기준과 가치가 된다. 그러기 위해서 예배를 계획하고 진행하고 인도하는 사람들의 최대 관심은 구도자들의 취향과 관심사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피조물인 예배자가 창조주 하나님께 초점을 두고 그분께 모든 가치와 영광을 돌리는 것과는 매우 거리가 있다.
물론 구도자 예배 진영도 이를 잘 알고 있다. 미국 아리조나주의 푀닉스에 위치한 "기쁨의 공동체 교회"(Community Church of Joy) 부목사인 티모시 라이트(Timothy Wright)는 그의 저서 {기쁨의 공동체: 어떻게 현대적인 예배를 고안할 것인가?}(A Community of Joy: How to create Contemporary Worship)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전통적(예전적)인 예배는 하나님 중심이다. 이러한 예배에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개념이 있으며,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또 하나님이 전능자이시며 우주를 통치하시는 분이심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예전적인 예배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권능과 놀라우심으로 이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에 열린예배는 본질적으로 한계점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열린예배는 수단으로 전락한 예배(Worship as a means of evangelism)이다. 예배학적 관점에서 볼 때에 예배는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하나님을 대하여 행할 수 있는 최고의 행위이다. "예배"(worship)라는 말 자체가 고대 영어의 Weorthscipe에서 온 것으로서 weorth 즉 존경할만 한이라는 뜻과 -scipe 즉 신분을 뜻하는 말의 합성어이다. 그러므로 종합하면 "어떤 사람, 혹은 어떤 대상에게 최고의 존경과 가치를 돌린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사탄을 물리치시면서 하신 말씀 "주 너희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 4:10; 늑 4:8)에서 사용된 "경배"라는 말은 헬라어 "프로스쿠네세이스"(proskuneseis)인데 이는 "경의를 표하기 위해 엎드리는 행위 즉 부복하는 행위"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그 자체로서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여기에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예배는 다른 어떤 것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배는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다.
그러나 열린예배는 어떠한가?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열린예배는 선교적 관점에서 고안된 예배형태이다. 열린예배를 계획하는 사람은 "어떻게 비기독교인들을 붙잡아 예배를 통하여 그들에게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일차적 관심을 둔다. 이들에게 있어서 최대 관건은 예배를 통해 어떻게 성공적으로 구도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으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예배는 복음전달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하게 될 뿐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인식될 뿐이다.
이는 전통 예배학에서 말하는 것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을 불러모으기 위한 예배, 사람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예배, 교회의 양적 성장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예배는 온전한 예배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때에는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하지 못하게 되거나 아니면 교회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게 될 경우 그 예배는 가차없이 용도 폐기될 수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배는 진정한 예배라고 볼 수 없다. 물론 예배는 시대와 사람들의 문화에 따라 그 형식을 달리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배가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넷째로, 열린예배는 회중의 수동적 참여(passive participation)를 극대화하는 예배이다. "회중 참여의 결여"는 열린예배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취약점이다.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열린예배의 회중들은 대부분 예배가 무엇인지 찬송이 무엇인지 기도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찬송과 기도와 예배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 예배를 계획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사람들에게 일어서라 앉아라 이것을 해라 함으로써 그들을 귀찮게 하거나 힘들게 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 그 결과 음악 연주, 드라마 공연, 초대 손님에 대한 인터뷰, 그리고 메시지 등 예배의 모든 행위는 대부분 무대 위에서 행해지게 되고, 회중은 그저 의자에 깊숙이 앉아서 이러한 것들을 감상하게 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배가 회중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회중을 위해 되어진다. 따라서 회중이 예배에 참여한다고 보기보다는 구경한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그러나 이는 좋은 예배가 아니다. 좋은 예배란 회중의 "온전하고 의식적이며 능동적인 참여"(full, conscious, active participation)를 유도하는 예배이다. 회중의 입장에서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예배, 그리고 예배의 순간 순간마다 무엇이 진행되고 있으며 지금 이 순간 내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 참여하는 예배가 좋은 예배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열린예배는 예배로서는 부족한 점이 많은 예배라고 할 수 있다.
IV. 열린예배의 가능성과 실효방안
이러한 예배학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열린예배는 그것을 통해 교회가 불신자들과 과거 교회생활에 식상한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장점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이것이 열린예배가 급속도로 퍼져 나가는 이유이다. 라이트 목사가 말했듯이, 열린예배는 "잃어버린 백성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변화시키려고 하나님께서 주신 열정"이다. 그러므로 구도자 예배는 계속적으로 실천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에서 실천되고 있는 열린예배들을 보면 아쉬운 점이 매우 많다. 열린예배가 성공적으로 실천되기 위해서는 다음의 사항들을 고려하여야 한다.
첫째, 열린예배를 계획하는 교회는 먼저 이 예배가 신자들의 예배인지 아니면 구도자를 위한 예배인지를 분명하게 구분하여야 한다. 신자들의 예배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신자들(believers)이 그 회중이다. 여기에서 예배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취하는 응답의 행위이다. 반면에 구도자를 위한 예배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비기독교인들이 그 대상이다. 이들은 구도자들이며 다른 말로 하면 교회에 온 손님(guest)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들을 위한 예배는 신자들을 위한 예배와 근본적으로 달라야 한다. 열린예배는 먼저 이것을 분명히 한 후에 비로소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구도자들을 위한 예배로 방향이 잡히면 그 예배는 철저하게 회중에게 초점이 맞추어 져야 한다. 음악과 메시지와 드라마 등 모든 면에서 이들이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계획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예배는 일종의 낚시바늘의 역할을 한다. 예배에 참석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흥미를 갖고 계속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도록 유도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모든 것을 계획하여 구도자들이 일단 이 낚시 바늘에 걸린 이후에는 성경공부나 수련회, 그리고 교회의 다른 행사들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성장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둘째로, 구도자라고 해도 다 같은 구도자가 아니다. 그 중에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이 있고 낮은 사람도 있다. 연령이 10대부터 70대까지 천차만별이다. 그들의 경제적 수준, 문화적 차이 등 고려해야 할 점들이 너무 많다. 그러므로 열린예배를 계획하는 교회는 먼저 그 예배의 회중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설정하여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윌로우크릭 교회는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에 미국에서 출생한 25-50세까지의 전문직 종사자들을 그 대상으로 설정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좋아하는 팝 음악을 사용하고 그들이 주말에 가기 좋아하는 카페 같은 분위기로 예배당 환경을 꾸몄다. 물론 메시지도 그들의 관심사들과 그들이 당면한 현안문제을 풀어나가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이에 비해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되어지는 열린예배는 어떠한가? 한국교회의 열린예배들은 대부분 불신자가 아닌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그 연령층은 누구이고 그들의 문화적 경제적 교육적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도 정확하게 구분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냥 열린예배가 현대의 예배형태니까 하면서 도시교회든 지방에 있는 교회든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그리고 천편일률적으로 전자기타와 앰프, 그리고 키보드를 설치하고 빠른 곡조의 복음송가들을 부르다가 적당한 때에 기도하고 설교하는 것이 열린예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해 기존의 장년 신자들은 겉으로 말은 못하지만 속으로는 내심 못 마땅해 하는 사람이 많다. 결국 구도자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가려는 시도에서 나온 열린예배가 실제로는 회중들로 하여금 예배로부터 더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만다는 뜻이 된다. 이는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열린예배가 성공하려면 회중을 분명하게 설정해야 하며 그들의 문화적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여야 한다. 그 다음에 그들을 대상으로 한 예배프로그램을 작성해야 한다. 한국의 상황에서라면 한국 사람들의 심성에 맞는 예배환경과 예배음악을 설정하여야 한다. 만일 회중이 50-60대가 대부분이라면 전자기타가 아니라 오히려 북치고 장구치면서 찬송하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곡조도 빠른 서양풍의 복음성가보다는 트로트 가락이 그들에게 더 맞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회중이 30대 후반에서 40대가 주류를 이룰 경우에는 전자기타보다는 오히려 통키타가 더 친숙하게 느껴질 것이다. 물론 10대-20대에게는 빠른 록음악이나 랩음악이 더 어필할 것이다. 이렇듯 철저하게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열린예배, 그리고 회중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들의 취향에 맞게 접근하는 열린예배라야만이 성공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의 토대 위에서 한국의 교회들이 한 달에 한번 또는 분기별로 한번씩이라도 구도자 예배를 실천해 나간다면 그 효과는 지대할 것이다. 물론 인력과 자원에서 여유가 있는 대형교회라면 매주일 실시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나가는 말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열린예배는 엄밀한 의미에서 예배가 아니다. 그것은 비신자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한 일종의 전도집회이다. 뿐만 아니라 예배의 형태로 볼 때에도 문제점이 많은 예배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기존의 예배가 줄 수 없는 장점을 열린예배가 분명히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선교적 열정과 함께 복음을 가지고 교회가 비신자들과 세상 속으로 다가가는 강력하고도 효과적인 수단이다. 그러므로 열린예배의 한계점과 가능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나아간다면 열린예배는 대단히 효과적인 선교의 수단이 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열린예배를 활성화해야 한다. 그래서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교회마다 열린예배를 활발하게 추진할 때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땅에 충만하게 전파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에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은 저절로 따라오게 될 것이다.
8. 예배의 요소와 순서
예배는 예배 공동체의 행위이기 때문에 하나의 공통된 순서를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 공통된 예배 순서를 따라 어떻게 드리느냐에 따라 예배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을 더욱 정확하게 표현하고 많이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공통된 예배 순서가 어떤 요소들로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어떤 예배의 요소가 절대적인 것이며 상대적인 것인지를 구분하고 그 요소들을 어떻게 배열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성경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우리가 초대교회의 예배로부터 회복할 수 있는 것은 사도행전 2:42-47에 나오는 예배의 4중 구조--날마다 모여,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떡을 떼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세상으로 나가는--이다. 초대 교회는 예배를 하나님에 의해 부름을 받은 공동체의 모임으로 이해하였다. 첫째, 그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함께 모일 때 하나님의 백성들로 아버지의 집에 초청되었다. 둘째,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함께 행할 것을 깨달았다. 셋째, 그들은 함께 떡을 뗌으로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로 연결됨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은 예배를 통해 최고의 사도 공동체가 되어 성령의 능력을 받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세상으로 보내졌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배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경험으로부터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로서 그의 증인이 될 것을 다짐하였다. 이처럼 예배는 다양한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 그리스도의 지체로 변화시켜 공동체를 만든다.
다음에 소개하는 예배의 요소와 순서는 예배의 4중 구조--모이는 공동체, 말씀 듣는 공동체, 응답하는 공동체, 파송 받는 공동체--에 기초한다. 예배 공동체는 예배의 4중 구조의 각 부분으로부터 예배자들이 기대하는 경험과 분위기는 다음과 같다: 1) 기쁨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공동체, 2) 묵상하는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공동체, 3) 성만찬을 통하여 축제를 경험하는 공동체, 그리고 4) 세상으로 파송되는 공동체. 이 기본적 예배 구조는 다양한 예배들 배후에 있는 공통성을 보여준다. 이 기본적인 예배 구조를 중심으로 개 교회의 특성에 맞는 예배 형태를 제시할 수 있다.
모이는 예배(The Gathering)
"모이는 예배"는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올라가는 예배의 시작 부분으로 우리의 개인적인 생활로써의 예배로부터 공동체(교회) 생활로써의 예배로 넘어가는 문지방과 같다. 우리가 모일 때, 우리의 개인적인 예배가 공동체 예배로 바뀌면서 자기 중심으로부터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간다. 결국, 모임의 예배 성격은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늘의 보좌, 영원한 예배의 장소, 하나님 나라의 영역, 하나님이 계신 곳의 영광을 향하여 여행하는 것처럼 위를 향한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곳에 항상 계신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는 동안 그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끼게 된다. 그래서 예수는 약속하셨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태 18:20). 이런 이유로,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곳에로 들어가는 내적 경험을 일으키는 "모이는 예배" 부분의 내용과 구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모임의 예배가 넓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으는 기능을 가지며, 좁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준비시키는 기능을 가진다. 모임의 예배에서 개인적으로 모인 자들은 자신들이 더 큰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정체성을 경험하는 기회를 가진다. 모임의 예배에서 회중들은 자신들이 세례를 받았을 때 그리스도의 몸인 신앙 공동체의 일원(교회의 지체)이 된 정체성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임의 예배를 위해 필요한 순서들은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누는 인사, 경배찬양, 그리고 기도이다. 이 기도는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치료와 용서의 말씀을 듣는 예배 행위를 포함하여 종종 다음 단계인 "말씀 받는 예배"의 순서에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어떤 교회들은 찬양 전에 고백 순서를 둔다).
1. 모임 찬양(Gathering Songs)
예배는 항상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올라감을 경험하는 "모임 찬양"으로 시작한다. 예배에서 올라간다는 예배 형식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전으로 올라갈 때 부른 시편 찬송에서 표현된 것처럼 예루살렘에로 들어간다는 구약성경의 형식에서 유래한다. 세상에서 지내다가 하나님의 자녀들의 공동체로 한 곳에 모여 그 분으로부터 오는 위대한 힘을 재발견하여 새로워지려는 성도들에게는 시편 95편이 모이는 교회를 위한 한 본보기가 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시편 95:1). 이 시편 기자가 말하듯이, 모이는 교회(구원받은 자들의 공동체)는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부터 자신이 구원받은 것에 대한 기쁨과 즐거움을 노래부르며 한 곳에 함께 모인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인 예배자들은 구원받은 자들로서의 기쁨을 서로 나누며 여호와께 노래할 수 있다.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변화된 생활을 보여주는 하나님 백성들의 "즐거운 함성"은 같은 성도들뿐만 아니라 처음 만나는 자들에게도 즐겁게 감염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모임 찬양의 중요성이 결코 간과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시편 찬송은 모임 찬양으로 매우 적합하다. 많은 시편들은 성전에 올라갈 때 부른 신앙인들의 찬송이었기 때문이다. 각자 세상에서 흩어져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다가 하나님의 부름에 의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성전으로 함께 모이는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시편을 읽거나 시편송을 부르는 것은 예배의 축제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자연스러운 예배 준비가 될 수 있다. 이 때 교회력에 맞춘 성서일과로부터 시편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모이는 예배"에서 모임 찬양을 위해 시편을 사용하기 때문에 "말씀 듣는 예배"에서 시편봉독은 생략할 수 있다.
예배를 준비하는 시간은 10-15분이 적절하다. 모임 찬양의 순서를 인도하는 자는 먼저 시편을 읽고 그 주일 예배의 주제를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 다양한 삶의 현장으로부터 한 곳에 모인 회중이 서로 하나님의 가족으로 느끼도록 한다. 시편은 세상과 교회를 연결하며 회중이 같은 목적을 가지고 모인 것을 경험하도록 한다. 시편의 주제, 즉 예배의 주제를 살리는 찬송이나 복음송을 부름으로 자연스럽게 예배안내를 한다. 모임 찬양을 진행하는 동안 그 주일 예배의 필요에 따라 교회소식, 인사, 환영사, 묵상기도, 그리고 찬송 미리 부르기 등을 함께 진행할 수 있다. 모임 찬양의 분위기는 성도의 교제와 환영과 같은 순서들로 밝고 명랑하게 시작하여 전주나 침묵기도와 같은 순서들로 예배 준비를 마무리한다. 모임의 찬양을 마침과 동시에 다음과 같은 말로 예배의 시작을 선언할 수도 있다: "이제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아 우리의 하나님께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
모임송들은 회중이 성전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예배를 준비하는 동안 불려진다. 회중이 들어올 때 자동적으로 모임송을 부를 수 있도록 분위기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이유로 모임송은 누구나 외워서 부를 수 있는 쉬운 곡이어야 한다. 이 때 간단한 움직임과 함께 다양한 악기를 사용하여 찬양할 수 있다. OHP 또는 액정 비디오 등을 사용할 수도 있다.
1) 인사와 환영(The Greeting & Welcome):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로를 환영하는 것이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가 영적인 집(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 그리고 하나님에게 찬양의 제사를 드리려는 예배자들이라면, 서로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환대는 필수적이다. 그래서 세상에 흩어져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버지의 집에 즐겁게 모이는 경험을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시편 95:2).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인사하고 환영하는 시간은 논리적으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감사와 찬양하는 시간으로 흘러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교회에 모이는 것은 위대하신 권능자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서로가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이다.
2) 전주(Prelude): 우리는 이미 예배를 시작할 때의 전주에 익숙하다. 그러나 예배 장소로 모여들며 서로 인사를 나누는 자들의 대화가 종종 전주에 방해가 된다. 이것은 우리가 전주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전주(prelude)는 예배 도입부를 위한 연주, 행위 또는 사건임으로 예배 시작 전에 추가된 준비 찬송과는 매우 다르다. 전주는 그 주일의 주제나 분위기에 맞는 곡으로 약 2분 정도의 짧은 것이 가장 좋다. 전주는 예배에서 첫 번째 말이나 첫 번째 찬송 직전에 진행된다. 또는 교회소식이 예배 시작 전에 진행된다면, 예배를 조용히 준비하는 시간과 연결되거나 그 대신으로 사용될 수 있다.
전주를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들이 있다. 전주에 사용되는 곡이 그 주일 예배의 중심이 될 찬송들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으며, 전주와 함께 중세기의 채색 유리창과 같은 시각 자료를 사용하여 예배에서 무엇이 진행될 것인지에 관심을 갖고 묵상할 기회를 주거나, 짧은 드라마를 전주와 같이 보여 주거나, 어린이들의 노래, 또는 리듬 악기를 연주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와 같은 전주를 통해 회중은 가장 의미 깊고 조용한 시간을 가지며 엄숙히 제단 앞으로 나아가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품안에 있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신의 모습을 체험할 수 있다. 입례 순서가 없는 경우에는 예배위원이나 성가대가 전주하기 전이나 또는 전주를 하는 동안 조용하게 그리고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옆쪽으로부터 들어가서 의자에 앉는다.
2. 입례 찬송(The Entrance Hymn with Procession)
많은 교회들의 경우 예배위원과 성가대원이 전주와 함께 또는 전주에 이어 첫 찬송을 부르며 입례송 순서를 가진다. 입례송의 역사적 기원은 주후 5세기에 로마의 시민관들이 법정 안으로 들어갈 때 취한 예식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교회는 이 예식을 채택하여 성직자가 성경을 봉독대(lectern)에로 가져가는 데에 사용하였다. 성직자가 성가대원과 함께 입례하는 의식은 19세기 영국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입례 순서가 예배에 강한 영향을 줄 수 있지만, 매 주일 진행할 필요는 없으며 특별한 예배를 위해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다.
축제적인 입례 순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로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선언하는 다양한 기독교의 상징을 나타낸다. 예로, 잘 준비된다면 축제적인 입례 순서로 십자가, 예배의 주제에 따른 기, 세상의 빛인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촛불, 성가대, 성경(바로 세워서 성경이 읽혀질 강단이나 봉독대에로 들고 들어가지만 성찬상 위에 올려놓으면 안 된다) 등의 순서로 담당자들이 앞서 입장하고, 그 다음에 성경 봉독자와 예배위원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회자가 따라서 입장한다. 어린이가 십자가, 기, 또는 성경 등을 들고 입장하게 할 수도 있다. 입례 순서를 맡은 자들은 군인같이 절도 있는 입장을 흉내낼 필요는 없지만 똑같은 거리를 두고 같은 속도로 들어감으로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진리에 어울리는 품위와 은혜를 표현한다. 입례 순서가 없다고 해도 예배를 시작하기 직전에 성경을 봉독대에로 가져갈 수도 있다. 입례 순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준비와 연습을 필요로 한다.
교회력에 따라 특별한 주일이나 절기에는 다양하게 입례순서를 진행할 수도 있다. 예로, 성탄절 전야에는 촛불로 입장하는 예배를, 사순절 첫 번째 주일에는 침묵의 입장으로, 종려주일이나 교회의 중요 기념일에는 회중들이 함께 교회 밖 한 곳에 모여 있다가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서 예배 장소에로 입장할 수도 있다.
입례찬송은 예배위원들의 입례행렬과 함께 진행됨으로 본 예배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입례찬송은 하나님의 임재에로 나아가는 내적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무게와 내용이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합창곡이나 복음송은 입례행진을 위해 사용되지 않는다. 그런 곡들은 찬송의 무게와 내용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입례찬송은 다음과 같이 찬송가에서 선택하는 것이 좋다: 9장(거룩 거룩 거룩), 21장(다 찬양하여라), 29장(성도여 다 함께). 그러나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나아감을 충분하게 표현한 것이라면 현대의 곡(복음송)들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3. 인사(The Greeting)
최근에는 예배에로의 부름 순서가 인사(예배 인도자가 회중에게 하는)와 함께 이루어진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예배 부름과 같은 성격으로 진행한 인사(Greeting; Salutation)에 근거한다. 그러나 항상 인사가 예배에로의 부름보다 앞서 진행된다. 많은 교회들이 종종 인도자와 회중 사이의 간단한 대화 인사 직후 회중을 예배에로 부르거나 그 주일에 적절한 성경을 읽는다.
하나님에게 드리는 예배에서 인사는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하는 첫 번째 순서이다. 사회적인 모임이 시작될 때 자연스럽게 인사하는 관습을 가진 시대에서는 더욱 형식을 갖추어 예배를 여는 인사순서가 예배의 독특한 성격을 강조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안녕하세요"와 같은 일상적인 인사는 교회 소식이나 예배 안내와 준비를 시작할 때에 적절할 것이다.
예배 인사는 서로가 이해할 수 있도록 짧고 단순한 형식을 취한다. 이 때 인도자가 성경 구절을 읽거나 성가대가 입당송(introit; 첫 송영)을 부르는 것으로 대신할 수도 있다. 예배에로의 부름은 간단하게 회중을 향하여 "우리 함께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립시다" 또는 "이제 우리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아 우리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립시다"라고 초청하거나 적절한 성경 구절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인사와 예배에로의 부름 순서는 인도자와 회중 사이의 대화로 진행되었다.
모든 회중이 착석한 뒤 예배 인도자와 회중이 서로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따뜻하고 생동감이 넘치도록 그러나 자연스럽게 환영하면서 대화로 주고받는 인사가 이루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는 예배에서 인도자는 여러 다양한 구슬들을 하나같이 이어주는 줄처럼 예배의 일치감을 주어야 한다. 이런 인도자의 역할은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는 예배일수록 더욱 중요하게 된다. 예배를 드리는 동안 나누는 인사는 예배 인도자와 회중이 서로 인사를 교환하는 순서이기 때문에 예배 준비를 위한 모임 찬양에서 회중들의 인사 교환과는 다르다. 이 인사 교환은 인도자와 회중이 서로 일어서서 간단한 인사말을 나눌 수도 있으나 친숙한 말들을 적절하게 상호 교환할 수도 있다. 모임의 예배 순서 전체와 함께 인사는 간단하면서도 가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직접 인도하는 것이 좋다.
입례송을 부르면서 입례를 한 후, 예배 인도자는 회중을 바라보면서 강단 중앙, 설교단, 성경 봉독대, 또는 성찬상에서 인사한다. 인도자는 마치 회중을 감싸듯이 손바닥을 편 채로 회중을 향하여 두 팔을 벌리면 더욱 온화한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다. 대화식 인사에서 회중이 응답할 때에는 사회자는 두 팔을 접는다. 인사는 여러 가지의 형식으로 진행될 수 있다. (1) 인도자는 회중을 예배에로 부르면서 "우리 모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시다"라는 말과 함께 적절한 성경구절을 사용한다. (2) 인사나 예배에로의 부름 순서가 없을 때는 시편이나 찬송으로 시작한다. (3) 전주에 이어 예배에로의 부름을 진행할 때는 적절한 전주가 자연스런 예배에로의 부름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입례 순서가 없을 때는 예배 인도자와 성가대는 눈에 거슬리지 않게 조용히 옆 통로를 통해 들어가서 전주가 끝나기 전에 자리를 잡는다. 인도자가 회중에게 인사하기 위해 일어설 때까지는 회중이 일어 설 필요는 없다. 서로가 일어서서 인사를 나누는 행위에서 이 인사 순서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게 만든다. 인도자와 회중이 서로 서서 인사를 나누는 것은 새로운 손님이 방에 들어온 것을 맞이하는 것처럼 그리고 순서 진행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것처럼 서로의 예배 참석을 인식하는 것이며 예의와 환대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성경의 보기(겔 2:1, 신 18:5)는 서 있는 것이 다양한 목회를 인정하는 한 방법으로 제시한다. 회중이 일어서는 순서를 위해 주보에 표시를 한다. 인도자가 회중에게 일어서기를 요구하는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경의를 요청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예배에서 사용되는 첫 대화(opening dialogue)로 불리는 인사는 모든 회중에게 예배에서 자신들의 다양한 역할을 확인하는 기회를 준다. 고대 교회에서 사용된 사도들의 인사에서 사회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성령의 교제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이 때 회중은 "주의 종(목사님)과도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라고 응답한다. 이와 같이 기독교의 유산인 고대 교회의 인사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들의 예배 이해를 확대시킬 수 있다. 우리가 확신하는 바는, 예배에 참여한 우리는 우리 이전에 참석하여 여러 세기를 통해 신앙의 증언을 제공해 온 신앙인들과 함께 모이는 것이다.
인사는 교회력이나 그 주일의 주제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 부활절의 인사로 할렐루야를 말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는 사순절에 할렐루야를 후렴 즉, 인사에 대한 회중의 응답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다양한 인사를 주보에 실어 너무 문자에 의존하는 것은 눈과 눈이 마주치는 자연스럽고 생동감 있는 인사를 상실할 수 있는 단점이 있다. 인사가 매 주일 동일할 때 암기된 회중의 응답은 서로를 공동체로 묶어 주는 증거가 되며 다양한 연령층의 참석자들을 확보할 수 있게 한다.
4. 예배 부름(The Call to Worship)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모인다. 교회사를 통해 모임의 예배 순서들이 주기적으로 변화되어 왔으나 항상 하나님의 임재에로 들어가는 특징으로 이해되었다.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행위는 인간의 의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예배 공동체에 의해 주문되거나 만들어질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늘 보좌에로 부르시고 하나님의 초월적 타자성의 눈부신 빛 속으로의 여행을 명령하신다. 여기에서 예배 공동체는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사들에 둘러 싸여 있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초월적 타자성을 깨닫게 된다. 그때 그리고 그때만이 모인 예배 공동체가 하늘의 무리들과 합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엄을 잘 나타내는 찬양을 부른다.
예배 부름은 예배 공동체를 부르는 행위이다. 이 부름은 하나님의 임재에로 이끌림을 받는 행위를 표현한다. 그래서 예배 부름은 예배자들의 경험 속에 예배 공동체 안에 계신 하나님을 강하게 느끼게 한다. 예배 부름을 위한 말은 모임송들과 관련되어 사용될 수도 있다. 또는 단순히 회중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인 것을 선언할 수도 있다. 때로 모임송을 합창으로 부를 때는 합창 부분은 후렴 같이 같은 구절이 되어야 한다. 예배 인도자는 예배 부름의 말을 읽기보다는 외울 필요가 있다. 또한 예배 부름을 OHP나 슬라이드 등으로 나타낼 수도 있다.
(1) 인도자: 저와 함께 주께 영광을 돌립시다.
회 중: 우리 함께 하나님의 이름을 높입시다.(시 34:3)
(2) 인도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회 중: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인도자: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함 께: 여호와에게서로다. (시 121:1-2)
(이 예배 부름 후에 찬송 23장[만 입이 내게 있으면]을 부를 수도 있다.)
1) 예배 부름을 준비할 때: 예배 부름은 익숙한 노래나 그 주일의 성경 본문, 특별히 시편과 같은 자료들로부터 선택하여 주보나 OPH에 적을 수 있다. 예배 부름을 준비할 때 다음의 지침이 도움이 될 것이다: 1) 예배 부름은 부름과 응답의 구조를 가져야 한다. 2) 간단한 형식으로 준비하되 지시가 아니라 환호가 되도록 한다. 3) 창조적인 예배 부름이 되도록 찬송이나 복음송, 또는 합창곡 등을 같이 사용한다.
2) 예배 부름을 노래로 진행할 때: 성가대나 찬양팀이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간구를 노래할 수도 있다. 그런 간구가 회중에 의해 불려질 수도 있다.
5. 기원(The Invocation of Gathering Prayer)
예배 인도자가 드리는 기원은 일반 기도와는 성격과 내용이 다르다. 이 기원은 예배 속에 성령으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현존으로 예배에 임하는 성도들을 성결하게 해 달라는 것과 우리의 부족한 백성들이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영광을 받아 달라는 매우 짧은 기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드리기 위한 기원의 내용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받아주옵소서라는 기원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정결하게 하옵소서라는 기원이다.
6. 경배찬송(Hymn of Praise)
일반적으로 입례송이 없다면 경배찬양은 집례자의 인사나 예배 부름 다음에 위치한다. 이 때 회중이 부르는 경배찬송(Sursum Corda; "마음을 드높이는" 찬송)은 예배 부름에 대한 응답을 나타낸다. 경배찬송은 첫 번째의 찬양 행위로 참석자 모두를 더욱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한다. 이 찬양은 하나님에게 드리는 인사말로서 이해되기 때문에 이 찬양으로 우리는 하나님에게 인사와 경배할 뿐 아니라 교회력의 계절까지 적절하게 반영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인 것들에 집중하기보다 찬양과 감사를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품성에 집중한다. 이 첫 찬송은 가사와 곡이 모두 강하고 쉽게 불려지는 곡으로 회중이 하나님에게로 "함께 나오는 것"을 돕는다.
찬송 번호가 주보에나 찬송가 번호 판에 적혀있다면 사회자가 그 번호를 말할 필요는 없다. 부를 찬송을 말로 알리는 것은 예배의 흐름을 방해하는 경향이 있다. 부를 찬송은 충분한 전주와 주보를 참고로 간단히 알려질 수 있다. 잘 알려진 곡을 위한 전주는 전 곡을 다 연주할 필요는 없다. 회중이 부를 곡의 전주는 자유로운 형식으로 그 곡의 멜로디 부분을 소개하고 곡의 정신을 알릴 수 있다. 전주곡의 빠르기에 관한 두 가지 주장들이 있다. 한 쪽은 곡의 빠르기가 원래의 속도와 같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또 다른 한 쪽은 찬송의 속도를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주곡의 빠르기가 회중으로 하여금 함께 찬송을 부르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해도 찬송의 속도를 의심 없이 따를 때 우리는 찬송을 가장 잘 부른다.
7. 고백과 용서(Confession and Forgiveness)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예배자는 눈부시고 신비로운 빛에 의해 비춰진 자신이 의존적인 피조물, 창조주를 거슬리는 자녀, 상처받고 깨지고 죄 많은 인간임을 발견한다. 이 때 유일하게 적절한 반응은 전능하신 분을 거슬린 피조물로서의 겸손한 고백뿐이다. 그 이후에 하나님은 말씀을 들으려는 마음에 용서와 치료에 관한 위로의 말씀을 주신다. 이런 행위들이 한번 일어나면 기도(Opening Prayer)가 모임의 예배로부터 말씀을 듣는 예배에로 적절하게 넘어가도록 한다.
모임의 예배에서 드리는 기도는 이 부분을 결론짓고 말씀의 예배에로 직접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죄의 고백과 용서의 확인을 개회기도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 기도 순서는 권면, 참회, 용서, 그리고 영광송으로 이어짐으로 길어지거나 복잡하여 말씀을 듣는 순서에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1) 권면과 침묵회개(Call to & Silent Confession): 죄의 고백은 다음과 같은 순서들과 함께 연결성을 가진 예배 행위로 이해된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우리에게 확인시키는 말들을 근거로 고백하기를 권면하는 형식의 초청; 그 다음 예배자들에 의한 고백기도; 개인적 고백을 위한 침묵; 자비송; 용서의 확인; 그리고 찬양이나 영광송. 소리를 내어 함께 고백하는 기도에는 특정한 죄들을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개인적 실수들을 들어내지 않는 일반적인 내용이 가장 적합하다. 특정한 죄들은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완전히 깨달아진다고 생각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선포된 말씀을 통해 밝혀지는 어떤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교회와 세계의 죄들에 대한 후회를 표현한다;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새로운 생활로 인도하는 은혜를 요청한다. 개인적 죄들을 침묵으로 고백할 수도 있다. 고백 순서의 길이 때문에 예배자들이 앉아서 진행하고 찬양을 위해서는 일어선다. 각자가 약 1분 정도의 회개의 기도를 할 때는 침묵으로 진행하여 직접 하나님에게 고백하는데 어떤 소리(사회자나 악기연주까지도)도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매 주일 고백기도를 모임의 예배 순서에 넣을 필요는 없다. 고백기도가 참회하는 기분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데 적절하지만 꼭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시편기자가 말하듯, "이 날은 주가 지으신 날일세; 그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하세." 또는 "사람이 네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시편 122:1). 고백기도는 주일 예배의 다른 순서에서 진행할 수도 있다. 목회기도에서 그리고 설교 후에 고백 순서를 포함하거나 봉헌하기 전에 고백하고 바로 후에 서로에게 용서와 화해의 행위로 평화의 인사를 교환한다.
참회의 계절인 대림절과 사순절에는 고백기도를 특별히 고백적인 행위와 함께 예배를 시작하는 것이 적절하다. 성탄절과 부활절(그 후의 주일)의 주된 분위기가 찬양임으로 고백은 다른 예배에 포함시킬 수도 있다.
2) 자비를 구하는 기도(Kyrie): 자비를 구하는 기도 "끼리에"(Kyrie)는 다음과 같이 전통적으로 연도(連禱; litany)나 응답기도(responsive prayer)로 이루어졌다:
인도자: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회 중: 그리스도여, 자비를 베푸소서.
인도자: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구하는 기도는 고대 유대인의 예배 형식에서 나왔다. 그 이름 Kyrie는 "주는 자비로우시다."를 의미하는 헬라어 "Kyrie eleison"의 줄인 말이다. 문둥병자들을 고치는 누가복음의 이야기에서 문둥병자들이 멀리 떨어져 서서 예수에게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외친다(누가 17:12이하). 이 말은 "지금 우리를 구하소서"를 의미하는 아람어의 "Hosanna"와 비교된다. 끼리에는 4세기 예루살렘에서 주기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교회를 통하여 중보기도의 간구에 대한 하나의 응답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이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에게 드려진 일반적인 기도라기보다는 예수에게 직접 드려진 특별한 기도이다. 그 기도는 다양하게 3회, 6회 그리고 9회 반복되는 형식의 기도이다.
끼리에는 말로나 노래(자비송)로 표현할 수 있다. 자비송은 교회와 회중에 따라 다양하다. 집례자가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한 후 곧 이어 자비송을 부르도록 소개한다. 자비송은 성가대, 회중, 또는 독창이나 회중과 함께 교창으로 부를 수도 있다.
3) 용서의 확인(Assurance of Pardon): 사회자와 회중이 기도를 하는 동안 머리를 숙이는 반면, 사죄의 확인을 위해서는 서로의 눈과 눈이 마주치는 것이 좋다. 사회자는 전체 회중을 대신하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용서를 선언한다. 확인의 말씀은 사회자와 회중이 함께 제창이나 대화 형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예배에서 우리가 말하는 사죄의 확인은 우리가 먼저 행한 것에 따르는 조건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우리의 의지보다 이전에 먼저 존재한다. 용서의 말씀은 기꺼이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에 관한 성경적 확인에 주로 의존하거나 기도의 형식이 될 수도 있다. 그 후에 회중이 용서받았음을 선언한다. 조건적인 은혜에 관한 한 예를 포함하여 용서에 관한 확신들은 많다: "그리스도 예수는 죄인들을 구하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하나님]는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또는 다른 가능성도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 자매 여러분, 복음의 기쁜 소식을 믿으세요."
8. 찬양(Acts of Praise)
고백기도와 용서의 확신 뒤에 나오는 찬양의 순서로는 영광송, 찬송, 또는 성가대의 찬양이 불려질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영광" 또는 "찬양"이라는 말들은 노래 가사에 나오는 단어들이었을 것이다. 이 때의 찬양으로는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을 찬양하는 (누가복음 2:14에 나오는 천사의 노래와 같은) 곡들이 회중에 의해 불려지거나 성가대의 영광송이나 찬양으로 대치할 수도 있다.
특별한 예배에서는 이 찬양 순서 다음에 행사에 대한 설명이나 손님 소개가 진행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안수, 취임, 추대, 장립 등의 예식에서는 후보자를 소개하는 시간이다.
9. 기도 또는 목회기도(Opening Prayer; Prayer for Illumination)
예배행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임으로부터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음악도 찬양으로 소리를 내는 목소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도록 만드는 쪽으로 변해야 한다. 이런 분위기 변화는 회중이 말씀 듣는 것을 돕는 묵상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
말씀의 예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한 곳에 모인 예배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시 한번 경험하게 된다. 어떤 까다로운 문제들이 예배자들 각자를 갈라놓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려는 우리의 공동 목적에 의해 부차적인 것이 된다. 전자 올갠의 익숙한 소리와 삐걱거리는 의자, 설교단, 세례반, 성만찬상, 십자가와 같은 상징물들, 사회자와 다른 예배위원들의 말들과 우리의 찬송 소리, 위엄 있는 행동과 따뜻한 기도 등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연합된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모을 준비가 되어 있다.
설교 전에 하는 기도는 성경봉독과 설교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 위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열어주도록 간구하는 기도이다. 시편 19:14은 설교하기 전의 기도로 적절하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말씀 듣는 예배(The Hearing)
예배의 4중 구조에서 두 번째 부분인 "말씀 듣는 예배"는 첫 번째 부분인 "모이는 예배"와 매우 다르다. 이 두 번째 부분에서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에로 들어가는 단계로부터 그의 임재 가운데 머무는 단계로 옮겨진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 로비(lobby; 현관의 홀)에서 그 분의 거실로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주된 예배행위는 대화로 하나님께서 설교(말씀)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그 다음 그 주신 말씀에 대해 우리가 응답한다. 하나님과 예배자 사이의 대화 내용은 성경 자체로부터 나온다.
말씀의 예배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이야기(말씀)를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의 예배 구조는 모임의 예배에서와 같은 과정이나 여행이 아니라 말씀선포와 응답의 신학에 근거한 대화이다. 또한 이 구조는 마치 거실에서 나누는 주인과 손님들 사이의 대화처럼 하나님과 예배자 사이의 대화 나눔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사람들이 응답한다. 그러므로 말씀의 예배는 수세기 동안 말씀을 선포하고 이에 응답하는 구조로 이루어졌다. 말씀 선포와 응답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짝을 이룬다:
말씀선포 응답
1. 구약성경 봉독 2. 시편송(또는 말씀송)
3. 서신서 봉독 4. 할렐루야송(또는 말씀송)
5. 복음서 봉독 6. 찬양(성가대)
7. 설교 8. 응답송(결단찬송 또는 사도신경)
9. 응답기도(또는 묵상기도)
10. 평화의 인사
(성만찬이 없을 때는 8, 9. 10은 응답/감사하는 예배 속에 포함된다)
예배를 이루는 두 가지 중요한 부분들 중 첫 번째가 성경을 봉독하고 해석하는 것이다(두 번째 부분은 성만찬 예식이다). 고대 유대인 회당에서 진행된 안식일 예배는 성경, 시편, 성경에 대한 해석과 기도 형식을 가진 응답으로 구성되었다. 예수는 이런 예배 중의 하나에 참석하여 누가복음 4장에 나타나는 대로 성경을 읽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초대 기독교인들이 안식일 말씀 중심의 회당예배를 성만찬 중심의 주일예배와 결합시켰을 때, 각 예배가 본질적으로 손상되지 않고 보존되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중 첫 번째를 말씀 예배라고 부른다.
말씀 예배는 성경봉독, 성경을 해석하는 설교, 그리고 설교에 대한 응답을 포함한다. 우리에게 설교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은 성경봉독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 두 순서 모두 하나님에게 찬양하고 섬기는 행위이다. 그 두 순서 모두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말씀 예배는 성경봉독으로부터 설교에로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성경봉독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표현하고 설교는 우리의 상황과 시대를 위해 그 읽은 성경을 해석한다. 전체 예배 순서에서 성경봉독이 중간에 위치하고 설교가 마지막에 위치하면 이와 같은 자연스런 예배의 흐름을 경험하지 못한다. 이 두 순서를 서로 멀리 위치시키는 것은 고속도로를 가운데 두고 두 쪽으로 나누어진 공원의 이 쪽에서 다른 반쪽을 즐기기 위해 복잡한 고속도로를 건너가는 것과 같을 수 있다. 이처럼 간격이 넓은 두 순서 사이에서 말씀을 해석하는 시간이 되면 이미 앞에서 읽은 성경말씀은 종종 잊혀지게 된다 (때로는 설교자가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성경봉독과 설교는 하나의 흐름을 형성할 수 있다. 그래서 예배 순서상 서로가 가까이 위치하는 것이 가장 좋다. 두 순서 모두 함께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게 하며 그래서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의지가 우리에게 나타난다.
예수 당시 회당 예배는 성경봉독과 설교 다음에 청중의 응답이 따랐다. 이와 비슷하게 오늘날 말씀의 예배는 응답 순서를 가질 수 있으며 들은 말씀에 대한 응답은 뒤에 진행되는 성만찬 예배에 대한 응답과 매우 다르다. 설교는 이미 우리의 삶에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응답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그 응답은 다양한 형식을 취하여 (예로, 세례예식) 필히 설교와 대화를 해야하는 목회기도(설교자의)에서 결론이 난다. 이 기도는 우리가 들어 온 복음("기쁜 소식")의 빛에 비추어 우리의 상황을 보며 세계, 교회, 지역사회와 개인적인 요구들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표현한다.
1. 성경봉독(Scripture Lessons)
"말씀 듣는 예배"에서 잘 준비되어 봉독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들이나 성경 본문들이 다시 봉독되는 것을 들을 때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기뻐할 수 있다. 성경이 잘 봉독될 때 각 단어는 다양한 강조, 고저, 그리고 속도를 가진 음악처럼 분명하고 특별하게 들린다. 우리가 귀기울일 때 그 단어들은 살아나게 된다. 하나님이 과거에 말씀하시기 위해 사용하셨던 사건들을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경험하게 된다. 이런 사건들에 대한 증언들을 통해 하나님은 오늘날 계속 우리에게 새롭게 말씀하신다. 그 증언의 말씀들은 귀하게 여겨져 후대의 우리들에게 전달되었다. 우리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자라는 사람들 즉, 성경의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이런 이유에서 강단용 성경은 대체로 크며 예배의 중심에 위치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 예배 공동체의 책이다. 그래서 예배에서 성경은 극적인 제스쳐를 쓰지 않고, 암기되거나 극적으로 표현할 필요 없이 봉독된다. 성경을 봉독하고 그것을 직접 듣는 것은 우리의 예배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러므로 성경봉독 순서는 예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우리는 보통 성경을 3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한다: 구약성경(율법과 예언자들의 기록), 복음서(예수의 삶, 사역, 가르침에 관한 기록), 서신(바울과 다른 사도들의 편지). 한 예배에서 이 세 가지 본문을 읽는 것은 고대 기독교와 현대의 에큐메니칼 예배 모두를 나타낸다. 전통적인 성경봉독의 순서는 복음서에 비중을 두어 구약, 서신, 복음서의 순서이다. 때때로 우리는 이 전통적인 성경봉독의 순서에 담겨있는 의미를 잊어버리고 그 순서를 바꾸려고 시도한다. 복음서가 설교에 제일 가깝게 봉독된 이유는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시편은 원래 노래로 이해되어 보통은 성경봉독의 순서에 포함되지 않고 오히려 구약봉독에 대한 응답으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예배 갱신의 하나로 성서일과로부터 3가지 성경(구약, 서신, 그리고 복음서)을 봉독하거나 2가지 성경(구약과 신약)을 봉독하는 것은 고대 기독교(6세기의 서구 교회)의 전통을 회복하려는 노력이다. 봉독된 성경들을 설교의 본문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 예배자들이 단순히 봉독되는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몇 개의 성경 본문들을 읽는 것은 지나치게 하나의 단순한 본문으로부터 오늘날의 문제들에 대한 성서적인 해답을 찾으려는 위험을 막는 안전장치가 될 수 있다.
성경봉독은 교회 목회의 하나이다. 성경봉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다. 설교가 잘 준비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성경봉독도 잘 읽혀지고 들려지기 위해 잘 준비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성경봉독자는 성경을 읽는 기술이 있어야 하며 준비를 위해 시간을 드려야 한다. 교회(예배위원회)는 교인들 모두에게 균등하게 기회를 주는 것보다는 정기적으로 평신도 가운데서 성경봉독에 은사가 있는 몇 명을 선택할 수도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도 성경봉독 순서를 담당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남녀노소의 다양한 목소리로 읽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교회의 다양한 회중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큰 교회는 특별히 성경봉독을 위해 성도들을 훈련시키고 또한 그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책임을 맡긴다. 이 훈련에서 중요한 부분은 정기적인 성경공부 그룹을 통해 다가오는 주일 예배에 읽을 성경본문을 다루는 것이다. 성경봉독 훈련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훌륭한 자료는 성서일과이다. 현재 세계 교회들은 예배 갱신운동의 산물인 성서일과를 사용하고 있다. 이 성서일과는 교회력에 맞추어 성경 전체를 3년 주기로 구약, 시편, 서신, 복음서의 4부분으로 나누어 매 주일 예배에서 읽도록 만든 것이다. 한국의 주요 교단들은 예식서를 통해 성서일과를 소개하고 있다. 예배 안내위원들과 봉사위원들을 위한 목회처럼, 성경봉독자들을 위한 목회도 교회 안에서 중요한 목회로 생각하고 예배에서 표현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시각 중심의 사회에서 구두로 표현된 말에 대한 관심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러므로 회중이 인쇄된 글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노력하는 것 보다 그들의 듣기 능력을 증대시킬 수 있는 성경봉독자들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예배는 여러 감각들과 관계가 있는데 성경봉독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 가를 보고 듣는 감각에 의존한다. 바람직한 성경봉독을 위하여 좋은 장비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마이크 장치가 방해가 되지 않는 가를 확인해야 한다. 청각 장애자를 위한 준비도 갖추어야 할 필요도 있다.
또한 각 성경본문을 봉독한 후에 들은 말씀에 대해 묵상을 하도록 간단한 침묵의 시간을 가지는 것도 도움이 된다.
성경을 봉독할 때 나타나는 모든 면들은 어떤 나이의 사람들에게도 말할 수 있다: 봉독자의 태도와 몸짓, 봉독대 또는 설교단 위에 놓인 성경의 가시적 상징, 하나님의 말씀이 빛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가능한 성경을 빛(촛불)이 비취는 곳에 두는 것, 품위 있게 읽는 것, 그리고 침묵의 시간 등.
만일 성경의 본문 외에 추가로 성경 본문을 읽을 필요가 있다면, 다음의 3가지 방법으로 가능하다: 1) 말씀과 직접 관련이 있는 찬송과 유사하게 성경 본문에 대한 한 반응으로, 2) 설교 본문의 부분으로, 또는 3) 설교에 대한 반응의 부분으로. 그러나 추가로 읽는 성경이 원래의 본문을 대신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므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성경봉독의 주된 목적은 성경을 읽고 듣는 것이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본문이 암기되거나 연출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변화는 한 사람이, 다같이 한 목소리로, 읽는 부분을 분담해서, 또는 어떤 부분을 회중에게 할당하는 등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런 방법이 본문에 대한 해석으로 구성된다면 본문을 대신한 것보다 더 좋은 성경봉독이 될 것이다. 또한 성경봉독은 경우에 따라 영화, 슬라이드, 춤, 무언극, 또는 노래 등을 동반할 수 있다.
성경봉독은 강단용 성경이 위치한 곳 즉, 설교단으로부터 또는 봉독대와 설교단이 있는 경우에는 봉독대로부터 진행된다.
2. 성가대 찬양(Canticle 또는 Anthem)
이 성가대의 찬양은 서신과 복음서 봉독 사이에 위치하는 응답송이다. 짧은 예배를 위해서는 응답송을 생략하고 직접 서신봉독에서 복음서봉독으로 진행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다른 두 성경본문을 읽는 것을 나타내도록 봉독자도 다른 두 사람으로 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떤 교회는 찬양대신 춤을 추기도 한다. 춤이 예배의 한 표현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찬송이나 봉독과 함께 진행하거나 그 춤이 봉독에 대한 응답이 될 수 있다.
만일 회중의 찬송으로 응답송을 대신한다면 반드시 성경본문의 주제와 관계가 있어야 한다. 이럴 경우 회중 찬송은 성가대의 찬양과 같이 우리가 성경 말씀을 듣도록 도울 수 있다. 그 주일의 찬송이 있다면 성경 본문의 주제에 맞는 새로운 찬송을 부를 수도 있다. 회중은 그 주일의 찬송을 성경공부 시간이나 집에서 준비할 수 있으며 예배 준비시간에 소개받을 수도 있다. 복음서를 봉독하기 전에 찬송을 부르는 것의 선례를 3세기에 시편을 노래로 부른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교회력에서 대림절과 사순절을 제외한 모든 계절에 할렐루야를 후렴으로 부를 수도 있다.
기도서 송가(canticle) 또는 "작은 노래"는 시편이 아닌 성경 구절을 음악에 맞춘 것이다. 이것은 성가대나 회중에 의해 불려질 수 있다. 이런 노래들 중에는 마리아 송가(Magnificat; 눅 1:39-56)와 시므온 송가(Nunc Dimittis; 눅 2:29-32)가 있다. 아직 한국 교회의 찬송가에는 기도서 송가가 소개되어 있지 않다. 전통적으로 기도서 송가는 성만찬 예배에서 불려지지 않고 아침이나 저녁 기도회를 위해 사용되었다.
잘 준비된 성가대 찬양(anthem; 성가)은 성경본문이나 교회력에 직접 연결된다. 그러므로 성가대 찬양은 음악적인 우수함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예배의 주제와 관련이 있도록 선택되어야 한다. 성가(anthem)는 "대답하는(sounding or answering back)" 의미를 지닌 그래서 응답하는 교창(antiphon)에서 온 말이다.
3. 설교
개신교의 예배는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그 성경 본문은 해석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의 "사건" "일어난 일" 또는 "행위"로 잘 이해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쓰여 있는 말들과는 다르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도움으로 회중이 그것을 들을 때 그들의 삶 속에 살아 움직이는 말들을 말한다. 그래서 각 예배는 그 말씀이 육신이 된 것, 성육신을 축하하는 것이다. 좋은 설교는 자신의 사명을 위해 기도하고 연구하고 시간을 투자하는 설교자와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청중들 모두에게 달려있다. 본훼퍼(Dietrich Bonhoeffer)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설교를 들을 때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날 것을 기대하며 들어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설교 사역은 전통적으로 말씀과 성례전 사역을 위한 안수와 훈련을 전제로 한다. (최근에는 말씀과 성례전 뿐 아니라 목회 상담에 대한 안수를 말한다.) 사실, 미국의 대학들은 교회에 의해 말씀과 성례전 사역을 위해 목회자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세워졌다. 설교의 목적은 이해를 통해 신앙을 양육하는 것(faith-seek-understanding)이다. 설교는 고대의 문화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성경 본문을 택하여 최초의 청중들에게 주었던 같은 생명력을 가지고 오늘에로 가져오는 것이다. 성경의 각 절들은 서로 격리된 상태로가 아니라 각 절과 연결된 맥락 안에서 그 의미를 나타낸다.
설교의 권위는 마태복음 마지막에서 모든 나라를 제자로 만들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으로부터 온다. 우리가 설교로 전하는 것은 그리스도이다. 이런 권위를 강조하는 이유는 전통적으로 설교가 복음서를 봉독한 직후에 진행되기 때문이다. 성경봉독이 복음서에서 절정을 이룰 때 설교는 오늘날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려는 것으로부터 직접 흘러나온다. 복음서가 설교의 본문이 아니라도 구약, 서신 복음서로 진행되는 성경봉독의 순서는 동일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관해 이해하는 대로 우리는 성경을 해석하게 된다.
성경이 읽혀지고 해석되는 것이 필수적이지만 봉독된 모든 성경의 본문이 해석될 필요는 없다. 단순히 성경을 듣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설교를 위해 하나의 본문만을 취급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설교는 회당에서 기원되어(눅 4:16이하; 행 13:14이하) 초대교회에 의해 채택되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떡을 떼기 전에 설교하였다. 복음서들이 나오기 전에는 설교를 위한 자료들로 예수에 관한 이야기들이 사용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편지들이 예배에서 읽혀지기를 원했으며(고전 16: 22- 24) 그래서 설교 자료가 되었다.
초기의 설교는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모든 기능들이 예배에서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어떤 기능들은 기독교를 모르는 자들을 가르치려는 목적을 가진 복음전도나 선교적인 설교였다(행 10:42). 어떤 설교의 기능은 이미 그리스도에게 헌신한 자들을 양육시키기 위한 것이었다(예로, 히브리서). 그리고 어떤 기능은 기독교의 교리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설교가 항상 예배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중세기에 잘못 이용될 때까지는 정기적인 예배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중세기 동안에도 도미니칸 수도승들의 위대한 설교들에 의해 설교 회복을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 개신교 종교개혁자들도 설교의 중요성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였다. 많은 종교개혁자들이 예배의 의식적인 순서와 가시적인 요소들을 거부한 결과로 거의 말씀 중심의 예배를 낳았다.
설교는 많은 기능들을 가지고 초대교회로부터 온 유산 가운데 강한 부분을 이룬다. 20세기에 와서 설교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기독교의 교리나 교훈을 전하는 교리적 설교, 성경 본문 때로는 각 절을 다루는 강해설교, 그리고 특별한 주제나 개념을 성경적 이해에 근거하여 발전시키는 주제설교 등. 부분적으로 우리의 자유로운 강단 전통은 설교자가 읽을 본문뿐 아니라 설교의 방법까지도 결정할 수 있게 만들었다. 1970년대에 개신교의 설교에 새로운 형식으로 등장한 성서일과 설교(lectionary preaching)는 설교의 본문 선택을 광범위하게 만드는 수단이 되었으며 또한 설교를 성서적으로 이끄는데 일조를 하였다.
설교는 성경봉독과 다르다. 성경봉독 순서에서 우리는 봉독되는 성경의 단어들에 귀 기울인다. 설교(sermon/ homily)의 원래 의미는 강화나 대화이다. 설교는 책으로부터 온 것보다는 책을 읽은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다. 설교는 대화에 필요한 여러 가지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다양하고 표현력 있는 목소리,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 충분한 음량, 눈과 눈의 마주침, 몸짓. 상자형의 강단은 설교자의 몸을 가로막기 때문에 설교가 지니는 물리적인 영향을 감소시키는 경향이 있어서 최근에는 강단 앞으로 나와서 설교를 하는 설교자들도 있다.
한국 교회에서 설교자들이 가운이나 예복을 입도록 강요받지는 않지만 가운이나 예복 착용은 점차 확대되고 있다. 설교자가 가운을 착용해야 하는 이유의 하나는 설교 시간에 초점이 되는 것은 사람으로서의 설교자가 아니라 설교자의 직무이기 때문이다. 가운이 목사 안수의 표시는 아니다. 스톨(stole)을 가운 위에 입는다. 스톨은 가운과 함께 입도록 만들어진 것임으로 거리 복장 위에 입을 수 없다.
설교의 길이는 10분에서 30분 정도로 다양하다. 최근 예배 갱신의 한 결과는 설교 이외의 다른 순서들이 전통적으로 설교로부터 기대되는 것의 얼마를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예로, 추수감사절의 기도). 설교 중심의 예배에서 그리고 설교가 마지막 순서로 나오는 예배에서 설교가 약하면 예배 전체가 약해질 수 있다. 그러나 예배가 설교에 의해 덜 지배받는 경우에는 다르다. 예배의 다른 순서들이 메시지를 전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간단한 설교가 약한 설교는 아니다. 사실, 간단한 설교가 잘 준비된다면 더욱 강한 설교가 될 수 있다. 긴 설교보다 좋은 짧은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더 어렵다. 그 이유는 오늘날 회중이 집중할 수 있는 평균 시간이 12분이나 13분이기 때문이다. 설교가 더욱 짧아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은 결코 설교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루터(Martin Luther)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viva vox Dei)이라고 부른 설교의 말씀은 예배에서 절대 필요한 부분이다. 설교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부름을 받아 우리의 믿음이 계속 양육되고 새로워진다.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만찬에서와 같이 설교에서도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임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응답하는 또는 감사하는 예배
(The Responding/Thanksgiving)
점차 세계 교회는 성만찬을 축하하지 않는 주일 예배는 적절하지 못한, 충분하지 못한, 또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성만찬 없이 진행된 주일 예배에서 말씀에 대한 충실한 표현으로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렸다. 비예전의 전통으로 이어진 한국 교회들은 설교를 하나님의 이야기가 충분히 제시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성만찬 없이 말씀을 중심으로 드린 예배는 성만찬 이전에 행해진 예배(ante-communion)로 불려진다. 이 말은 성만찬까지 축하해야 충분한 예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교회가 매주일 성만찬을 축하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교회들은 성만찬을 대신하여 들은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해 하나님에게 다양한 감사를 표현한다. 많은 교회들은 다음의 다섯 가지 방법으로 성만찬을 대신하여 감사를 표현한다.
첫째, 말씀 초청에 대한 응답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초청, 세례예식, 목회자 헌신, 또는 치유집회를 진행한다.
둘째,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기억나게 하는, 그리고 성령의 임재를 구하는 응답찬송을 여러 곡 부른다.
셋째, 중보, 감사를 위한 응답기도나 통성기도를 진행한다.
넷째, 말씀을 듣고 은혜 받은 것을 간증한다.
다섯째, 선교(전도) 또는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 등의 행동으로 응답한다.
위와 같이 예배에서 설교에 대한 응답으로 설교 바로 다음에 따라오는 적절한 순서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일반교회에서 실천 가능한 몇 가지만 소개한다.
사도신경, 찬송, 제자도에로의 초청, 세례, 신앙갱신, 간증, 회중의 생활과 일에 관한 광고 등이 있다.
1. 중보기도(Prayers of the People)
성경봉독과 설교는 회중 속에 있는 우리 각자에게 다르게 영향을 준다. 우리는 거의 들을 수 없을지 모르는 한마디의 말이 암으로 고생하는 자에게 새로운 희망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없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한 이웃에게는 들어보지도 못한 것일 수 있다. 중보기도는 말씀 선포를 통해 그리스도를 만난 것에 대한 우리의 응답으로 이해될 수 있다. 중보기도는 성경봉독과 설교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설교자나 사회자보다는 심방이나 선교 목회를 대표하여 성도들의 생활을 잘 아는 평신도 대표나 평신도 목회자에 의해 인도되는 것이 좋다. 이 점에서 중보기도는 목회자에 의해 인도되는 목회기도와 다르다. 중보기도는 교회밖에 대한 관심으로 성도들이 목회상담이나 세계선교에 관한 훈련을 시작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어떤 교회들은 중보기도 대신 목회자가 인도하는 목회기도(pastoral prayer)를 순서로 넣었다. 목회기도는 묵상을 인도하는 형식과 영적 향상을 위한 시간으로 진행되었다. 목회기도는 종종 매우 깊은 목회적 관심을 나타내어 목회자가 성도들의 모든 생활에 깊이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성도들은 종종 자신들의 관심이 목회기도 속에 표현되는 대로 알려진다고 느낀다. 목회기도는 아름답고 거룩한, 그리고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시간일 수 있다. 이 기도의 성공은 종종 목회자 개인의 능력에 달려있다. 목회기도의 위험은 그 기도가 성도들의 관심을 사로잡는 기도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설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설교 후에 들은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기도를 하는 것은 2세기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기도는 점차 중보기도의 형식을 갖추어 성도들의 응답으로 끼리에(Kyrie)와 함께 장로에 의해 인도되었다. 나중에 중보가 사라지고 끼리에만 남았다. 종교개혁자들은 예배 속에 중보기도를 회복하려고 하였다. 장로교 예배의 뿌리를 형성한 1664년의 웨스트민스터 교리(Westminster Directory)는 이 기도를 설교 앞에 위치하였다. 이 기도가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5쪽을 할애하였다(예, "우리의 어두운 생각, 굳은 마음, 불신앙, 완고함, 안일함, 무미건조함, 초라함을 애통합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고백으로부터 고상하고 잘 선택된 언어로 모든 것을 위한 간구와 중보로 움직인다(예, "우리의 기도에 은혜가 넘치도록 응답하심으로 용기를 주시어 은혜의 보좌에로 가까이 이끄소서"). 이 기도는 종종 성경 구절로 가득 차 있다. 목회기도의 길이는 다양하지만 3분에서 5분 정도가 이상적이다.
중보기도의 내용으로 간단한 죄 고백과 용서를 위한 기도(설교가 특별한 어떤 것을 제시하였다면) 그리고 특수한 축복에 대한 감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감사의 내용은 다음에 나오는 성만찬 예배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중보기도의 주요 내용은 중보(intercession)이다. 중보기도는 특별히 다음의 영역들에 주목하면서 관심과 감사를 표현한다: 세계, 하나의 교회, 지역 공동체, 도움이 필요한 자들과 죽은 자들(이런 영역들은 설교를 위해서도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있다). 회중의 생활과 일에 관하여 다양한 면들이 다루어질 수 있다. 회중은 직접 기도제목을 제시할 수 있고 기도를 준비하고 진행할 때 소개될 수 있다. 짧은 기도나 간구로 이루어지는 기도(litany)는 교독문(versicle)과 다음과 같은 응답들과 함께 사용될 수 있다: "하나님, 우리의 기도를 들으소서", "당신의 사랑으로 응답하소서", 또는 "우리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이런 응답들은 말이나 노래로 이루어질 수 있다.
중보기도는 회중이 참여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이고 자발적인 순서가 될 수 있다. 중보기도에는 각 개인의 관심들이 침묵이나 큰 소리로 표현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이런 관심들이 매우 특수한 것일 수 있으나 간단해야 한다. 그 관심들은 하나님께서 해야 하시는 것을 가리키지 않고도 단순히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큰 교회에서는 이런 관심들을 기도요청 카드에 적어 성전 입구에 비치된 기도함에 넣도록 하거나 광고 시간에 적어 내도록 할 수도 있다. 이렇게 모여진 기도요청 카드들의 일부를 크게 읽을 수도 있다. 작은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자신들의 관심을 침묵이나 소리를 내어 제시할 수 있다(각자가 자신의 기도 제목을 "하나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와 같은 교독문 끝에 이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각자가 자신의 기도를 표현할 때까지 기다릴 때 침묵이 필요한데 그 길이는 성도들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해야 한다(최소한 1분). 기도는 인도자가 마지막으로 모든 기도 제목들을 하나님에게 위탁하고 성도들이 "아멘"을 말할 때 끝난다. 이런 기도의 종류는 교회의 모임에서 진행된다면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로가 기도를 나눔으로 친근하게 된다.
이 중보기도를 인도하는 자는 봉독대나 세례탕을 바라보며 복도 중앙에 서거나 머리를 숙일 수 있다. 그것은 기도가 성도들의 생활과 필요로부터 나온 자신들의 것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특별한 경우에는 우리 기도의 관심들을 가시화하는 묵상적인 방법을 제공하기 위해 영상자료들을 사용할 수도 있다.
2. 침묵기도
각 성경봉독 후에 진행하는 것처럼 설교 바로 다음에 나오는 간단한 침묵은 들은 말씀에 대한 묵상을 가능하게 한다. 침묵이 우리의 예배에서 매우 자주 무시되어 왔지만 침묵의 중요성은 하박국에 의해 언급되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 지니라(합 2:2)." 우리가 말로 표현하는 것이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응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그림 표시로 응답할 수도 있다. 침묵의 시간은 성령으로 하여금 비언어 또는 언어가 사용되기 이전의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도록 만든다. 위대한 곡이 소리와 침묵의 혼합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예배도 그 두 가지가 함께 짜여짐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예배는 우리가 침묵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텔리비젼과 함께 사는 우리들은 종종 침묵을 죽은 시간으로 말한다. 예배에서 우리는 침묵의 시간이 될 수 있는 것을 음악으로 채우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시골에서 도시로 올 때는 얼마나 소리에 압도당하는지, 반대로 도시에서 시골로 갈 때는 어떻게 듣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 하는지를 경험한다. 침묵이 효과를 나타내도록 회중은 교육을 통해 잘 준비할 필요가 있다.
3. 신앙고백(사도신경)
설교가 공동체를 대표하는 해석이 되도록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으로는 개인의 해석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위험을 가지고 있다. 그런 설교에 신앙고백은 공동체성을 주어 회중과 연관시킨다.
1세기의 교회에서 매주 행하는 성만찬 전에 드리는 긴 기도(성찬기도 또는 대감사기도로 알려진)가 신경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신경의 내용은 그리스도에 관한 필수적 신앙을 요약하여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에 대해 감사하는 유대인의 감사 형식을 따랐다. 별도의 신앙고백이 없었다. 신경 특별히 니케아신경(Nicene Creed)을 암송하는 것은 4세기의 이단에 대처하기 위한 주요 교리적 논쟁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신경은 기도가 아니라 성도들을 바로잡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신경을 암송하는 것이 11세기까지는 유럽에서 일반적인 예배 순서가 되지 않았다. 사도신경은 세례에 관한 신앙선언으로, 세례 예식에서 말하는 "예수는 주이시다"와 같은 초기의 고백적 선언으로부터 나왔다. 여하튼 사도신경은 특별히 세례 예식과 갱신을 다짐하는 예배에서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적절하다.
가장 충분하게 동시대의 신앙을 표현한 것은 성찬기도들에서 나타난다. 각 성찬기도는 새 신자들을 위한 성경공부를 위한 기초를 제공하였다. 신경을 암송하는 순서의 위치는 성만찬이 집행되지 않는 예배나 다양한 교회 그룹들이 활동하는 예배에서 가장 적절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혹은 다른 나라에서 나온 과거의 신앙 표현이라는 이유로 사도신경을 주일 예배순서에서 생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예배에서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이유는 이단을 바로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의 신앙고백 행위 즉, 우리를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연결시키는 공식적인 신앙 선언으로 사용되는 "고백"을 하기 위함이다. 루터가 한 것처럼 신앙고백을 곡으로 부를 수도 있다.
4. 찬송
설교와 그 다음에 부르는 찬송과의 밀접한 관계는 오랜 전통이 되었다. 설교 전에 부르는 찬송과는 달리 이 찬송은 설교의 주제와 관련하여 헌신에 초점을 두게 된다. 이 때 예배를 준비하는 순서가 있다면 새로운 찬송이나 익숙하지 않은 찬송을 부를 수 있다.
5. 제자도에로의 초청/ 세례와 신앙갱신
제자도에로의 초청은 세례와 신앙갱신(신앙의 확증, 고백, 재확인)과 같은 의식을 포함할 수 있다. 세례는 후보자의 나이에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기독교 공동체의 성만찬을 받는 회원으로 가입하는 유일한 의식이다. 세례 의식은 유아와 성인 세례뿐만 아니라 견신(confirmation)과 신앙고백(profess-ion of faith)을 통해 각 개인과 회중의 세례 신앙을 갱신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이 때의 예배는 기독교의 입회의식(initiation)들--세례, 견신, 첫 성만찬--을 재결합한다.
물론 세례는 유일회의 의식이지만 세례신앙의 갱신은 여러 번 일어날 수 있다. 견신(confirmation)을 일생에 한 번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한국 교회에는 자주 갖는 신앙갱신을 위한 의식이 비교적 생소하다. 신앙을 갱신하는 의식은 여러가지 경우에 이루어질 수 있다. 다양한 이유로 개인들은 세례서약을 갱신하고 축복을 받을 기회를 환영한다: 성인식, 졸업, 장기간의 출타(군입대, 유학, 외국근무 등), 교회 이적, 결혼, 출산, 은퇴 등. 모든 회중은 기념식에서 자신들의 세례신앙을 갱신할 수 있으며 그 때 자신들의 사명선언(mission statement)을 채택하거나 공동체 계약을 갱신할 수도 있다.
6. 간증
예배의 첫 부분은 객관적인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말씀으로 은혜를 받은 후에는 예배가 더욱 주관적인 분위기를 띤다. 이런 이유로 간증은 설교 후에 진행하는 것이 적절하다.
복음주의 계통의 교회들은 개인의 신앙을 간증하는 순서를 진행해 왔다. 특별히 작은 교회의 예배에서는 즉흥적이거나 계획에 의해 간증할 수 있는 기회가 가능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예배가 계획되고 형식을 갖추는 대형교회에서는 간증이 잘 준비될 필요가 있다. 간증이 설교에 포함될 수도 있다. 주일 오전에 신앙간증을 위한 특별 예배를 계획할 수도 있다. 이런 특별예배는 주로 찬송, 간증, 기도로 이어지는 형식을 취하여 일반 예배의 구조와 다르게 진행될 수 있다.
7. 회중의 생활과 일에 관한 광고
광고가 들은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설교 후에 위치할 때는 회중의 생활과 일을 드리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순서는 회중(광고위원)에게 맡겨 공동체의 생활 속에 회중 모두가 참여할 수 있도록 진행한다. 이 때 다음 순서인 중보기도(prayers of the people)를 위하여 개인적 관심을 모을 수도 있다.
그러나 광고가 설교 후에 진행되면 예배의 흐름을 깰 수도 있다. 한편으로 우리는 예배가 자유로우며 자발적인 분위기를 유지하기를 원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예배의 흐름과 통일성(말씀과 성만찬 예배)을 깨뜨리며 여러 가지 도움을 요구하는 광고 순서를 원하지 않는다. 광고를 지루하지 않게 진행한다면 회중의 생활과 일을 대표하는 순서가 될 수 있다.
성만찬이 없는 예배에서는 응답하는 예배 순서들로 위와 같은 순서들 다음에 평화의 인사, 봉헌, 광고가 진행될 수 있다.
파송하는 예배(The Sending-forth)
최근에 주일 예배에 나타난 새로운 경향은 예배의 마지막 부분을 통하여 예배 공동체의 선교적인 기능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 교회의 주보는 이 마지막 부분을 "말씀을 따라 열매를 맺기 위해 세상으로"라는 표제를 붙였으며 또 다른 교회의 주보는 교회의 직원(staffs) 명단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제일 먼저 "목회자: 모든 교인들"로 시작하고 그 밑에 담임목사, 목사, 장로, 고용인 등의 이름을 소개하였다. 어떤 교회는 교회 출구나 주차장 출구에 "당신은 지금 선교 현장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라는 글을 붙여 교회를 떠나는 교인들에게 파송되고 있음을 기억나게 한다. 이런 노력들은 교회와 예배의 현장에 대한 이해가 선교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예배자들에게 세상은 선교의 현장이다.
예배의 마지막 부분인 "파송하는 교회"는 간단하고 목적이 분명하다. 이 부분의 순서들은 예배 전체를 결론짓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예배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과 주를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세상으로 가도록 위임하는 성경 말씀을 기억한다. 이런 순서들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의 고통을 알고 믿음을 실천함으로 우리의 예배가 계속된다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파송하는 예배의 성격은 롬 12:1에 잘 나타난다. 바울은 로마의 교인들에게 예배로부터 위임받은 것의 본질을 말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바울의 이해에 의하면 예배는 생활이다. 예배가 교회의 문을 나오기 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생활 여러 곳(가정, 직장, 여행)에서 계속된다.
만일 파송의 예배가 예배자들에게 더욱 의미를 부여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다음의 간단한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파송 순서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주로 파송은 하나의 축복이다. 우리가 예배에서 하나님에게 찬양과 경배를 드릴 때 이것은 실제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송축(축복)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송축(축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지닌 능력과 역사를 선포하며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찬양과 경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송축할 때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어떤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하나님을 인정하고 섬기는 것)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실 때는 그 분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움과 거룩함에로 부르신 것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는 것은 하나의 선물 즉, 실제적으로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축복을 부어주신다는 의미가 민 6:24-26에 잘 나타난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 말씀과 성경의 다른 모든 축복 말씀들의 핵심은 27절에 있다: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축복을 하실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분의 이름을 부여하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만일 매일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인정한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달라질까?
파송의 예배는 공예배를 끝내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들의 생활 속에서 예배를 계속하도록 파송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이 파송의 내용을 완성시키는 3가지 예배행위가 있다: 축복, 찬송, 파송. 파송의 예배는 축복기도(하나님의 축복), 파송의 찬송(사명을 주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파송하는 찬송이나 복음송), 그리고 파송의 말씀의 순서로 진행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찬송, 파송, 축복의 순서로 진행하는 교회들이 있지만, 각 순서의 의미를 고려한다면 파송이 마지막으로 예배 장소를 떠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가장 마지막 순서로 적절하다. 회중이 세상에서 교회로 부름을 받았음을 먼저 알리기 위해 파송(위임) 순서를 축복 앞에 둘 수도 있다.
1. 축복(Benediction/Blessing)
하나님에게 제단을 잘 쌓았던 아브라함이 세상에서 만나는 자들에게 축복의 근원이 되었던 것처럼 모든 예배자들은 예배의 마지막 순서에서 세상에서 축복이 되기 위해 먼저 축복을 받을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축복 또는 축도는 예배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선언하는 것이다. 축복하는 성직자는 회중을 바라보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두 손을 펼쳐 들고 손바닥을 약간 아래쪽을 향한다.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축복 의식이 교회에 나타난 것은 대다수의 회중이 성만찬을 받지 못하고 교회를 떠날 때이었다.
회중이 곧 세상에서 생활하고 일할 것을 암시하는 의미로 광고 순서를 파송의 예배에 포함할 수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첫 번째 파송의 예배순서는 축복이나 축복기도이다. 오늘날 예배갱신 운동은 축복기도의 참 의미를 재 이해함에 강조를 하고 있다. 축복이 선언될 때 예배자들은 그 축복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식적이고 개인적인 축복선언으로 받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도록 요청을 받는다. 어떤 목사들은 축복기도에서 생활의 특별한 부분들에 대해서도 언급함으로 예배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일상생활의 모든 면에 계신다는 것을 기억나게 한다. 축복 다음에 세상으로 파송되는 것에 관한 찬송이나 노래가 따라온다. 이 때 섬김, 선교, 또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룬 위임에 관한 찬송을 부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복음송이나 폐회송도 어울린다.
2. 파송의 찬송(A Commissioning Hymn)
파송의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함께 모인 교회(하나님의 백성)로서의 회중은 세상에서 계속 교회가 되도록 위임받는 것을 확인한다. 예배가 끝난 후 특별한 축제 행사를 계속할 경우에는 파송의 찬송은 예배 후에 다시 들어올 예배 위원들과 성가대를 위한 폐회송으로 부를 수도 있다. 입례송을 부르며 입례하는 것처럼, 오순절에는 전 회중이 세상으로 나가는 교회를 상징하여 예배 후에 성전으로부터 교회 앞뜰로 나가는 폐례식(閉禮式; 폐회행진)을 가질 수 있다. 대림절이나 사순절과 같은 참회하는 절기에는 침묵이 마지막 찬송을 부르는 것보다 더욱 적절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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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파송의 말씀(Commissioning Words)
파송(sending forth) 또는 위임(commissioning)은 집례자(성직자)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가시오" 또는 "주를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세상으로 평안히 가시오"라는 말을 하는 순서이다. 이에 대해 회중은 "하나님께 감사를"하고 응답한다. 원하는 경우에는 파송사와 응답을 노래로 할 수도 있으며 이미 곡으로 된 위임사가 사용될 수도 있다.
폐회송(또는 성가대의 송영)을 부르는 동안 예배 인도자들은 가능한 성전의 뒤쪽으로 나가는 것이 좋다. 전통적으로 폐장 순서는 입례 순서와 동일하다: 1) 십자가, 2) 기, 3) 성경봉독자, 4) 성가대, 5) 목사(설교자, 사회자) 이 폐장 순서가 의미하는 것은 폐회송을 부르는 동안 목사들은 성전 뒤쪽에 모여 마지막 찬송을 인도한 다음에 파송의 말씀으로 예배의 결론을 내린다. 이 파송의 말씀이 교회에서의 예배 경험을 종결하고 그 예배를 세상에서의 예배자들의 삶과 연결시킨다. 일반적인 폐회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마지막 찬송(또는 성가대의 송영) 2) 목사, 예배위원, 성가대원은 성전 뒤쪽에 선다 2) 목사가 두 손을 들고 "이제 모두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세상으로 나가십시오"라고 외친다. 3) 그 다음 회중은 "할렐루야!" 또는 "아멘!"으로 힘있게 응답한다.
4. 후주
최근의 예배에서 후주는 전형적인 순서가 아니다. 어떤 회중은 후주를 듣지만 다른 회중은 후주를 배경 음악으로 여기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후주가 끝날 때까지 회중이 자리에 앉아서 듣도록 주보나 성가대를 통해 알릴 수 있다. 후주를 듣도록 하는 또 다른 방법은 성도의 교제 및 교회소식을 진행할 수도 있다. 이 때 새로운 찬송을 배우거나 간단한 연주를 진행할 수도 있다. 파송을 받는 자들로서 교회를 떠나기 전에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오르간 연주를 제시하는 것도 좋다.
9 예배와 음악
제 1 절 예배에서 음악은 왜 필요한가?
성경에서 음악에 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창세기 4장 21절이다. 거기에 보면 아담의 7대 자손인 유발이라는 사람이 "수금과 피리를 만들어 사용한 국내 최초의 음악가"(현대인의 성경)라고 기록 되어 있다. 고대의 음악은 오늘날의 음악과는 그 개념이 다르다. 그 때의 음악은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들의 삶에서 절대로 분리될 수 없는 생활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그들은 음악과 함께 일 했고, 음악과 함께 살았다. 그러므로 일 할 때와 축제 뿐 아니라 야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에도 음악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예배에서 음악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인류의 시작과 같이 했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직업적인 전문 음악가가 등장하게 된 것은 다윗왕 때 부터이다. 그 때 이후 교회는 예배 때 마다 찬양대가 반드시 있어 왔고, 언제나 어디서나 모이기만 하면 교회에서는 찬양대가 부르는 아름다운 음악이 있었다. 우리는 왜 예배에서 노래를 불러야만 하나? 예배에는 왜 음악이 필요한가? 예배에는 왜 찬양대가 반드시 있어야만 하나?
1. 찬양은 하나님의 명령
위의 몇가지 질문에 대한 그 첫 해답은 예배에서 음악을 사용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 하셨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구약을 통해서, 특별히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찬양이었던 시편을 통하여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명령을 많이 볼 수 있다. 시편 81편을 보면 "우리 힘이 되시는 하나님께 기쁨으로 노래하고 야곱의 하나님께 소리 높여 찬양하라! 북을 치고 수금과 비파로 아름답게 연주하며 노래하라. 초하루와 보름과 명절에 나팔을 불어라. 이것은 이스라엘의 법이요 야곱의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또 시편 98편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기쁨으로 노래하라. 노래와 즐거운 소리로 그를 찬양하라. 나팔과 양각 (호각)을 불며 우리의 왕이신 여호와 앞에 즐겁게 외쳐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아, 세계와 그 안에 사는 모든 자들아, 다 소리 높여 외쳐라. 너희 강들아, 여호와 앞에 손뼉을 쳐라. 너희 산들아, 기쁨으로 함께 노래하라.
시편 100편도 "온 땅이여, 여호와께 기쁨으로 외쳐라. 즐거운 마음으로 여호와를 섬기고 노래하며 그 앞에 나아가라... 감사하며 성전에 들어가고 찬송하며 그 뜰에 들어가라. 그에게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고 한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시편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노래하라" "찬송하라" 란 명령을 무수히 나리셨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시편에 기록된 것 처럼 "법이요, 명령"이었다.
2. 음악은 기독교의 전통
교회에서 음악을 사용하는 둘째 이유는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 예배에서 음악을 사용 해 온 전통 때문이다. 역대기 상 15장과 29장을 보면 다윗이 찬양대를 조직한 후 예배에서 찬양대는 "주야로 야훼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전심 전력 하였다"(대상 9:33)고 기록하고 있다. 즉 생업을 갖지 않고 다른 사제들과 꼭 같이 찬양하는 일만을 위하여 온전히 살았다는 말이다. 이러한 전통은 신약시대에 와서도 사도 바울에 의하여 강조된 것을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19과 골로새서 3:16을 통하여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합하며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고 우리를 권면하고 있다. 이 말씀을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어 보면,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를 모두 같이 부르십시오. 그리고 진정한 마음으로 노래 불러 주님을 찬양 하십시오"라고 하면서 노래부르는 교회의 전통을 이어 줄 것을 권면 한 것을 읽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사도 바울의 권면의 말 속에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목적으로 음악을 사용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해석 할 수 있다.
첫째, 예배와 찬양을 위하여,
둘째, 교육과 제자훈련을 위하여,
셋째, 전도와 복음선포를 위하여 등 이다.
사도 바울이 성시 즉 시편을 노래하라고 한 것은 예배와 찬양을 위한 것을 말하는 것이요, 찬송가를 부르라고 한 것은 기독교인들의 바른 삶을 가르치기 위하여 즉 교육과 제자훈련을 위하여 찬송가를 부르도록 권했으며, 전도와 복음선포를 위해서는 신령한 노래, 소위 오늘 우리가 말하는 복음찬송(Gospel Songs)을 부르라고 권면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서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할 것인가는 확실 해 졌다. 오늘날 우리 개신교회의 예배에서 아직도 시편교독이 남아 있는 것은 시편은 예배와 찬양의 목적으로 노래 불려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편교독이 시편이 아닌 성경 구절의 교독으로 바뀌어 져서 마치 성경명상 내지는 성경구절의 교육목적으로 활용되는 것은 개신교 예배의 잘못된 경향임을 알수 있다. 이러한 잘못은 시편을 교창하는 방법을 잊어버려 시편을 노래로 부르지 않고 교독하기 때문에 그것이 찬양이라는 개념을 상실하게 된 데 그 원인이 있다. 시편은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으로 다윗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가장 훌륭한 찬양인 것이다. 따라서 시편은 노래로 불려 질 수 있도록 회복시켜야만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 찬송가에 시편이 노래로 되어 있어야만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제 4장 제1절에서 보다 상세히 쓰겠다. 종교개혁 당시 Calvin은 교회의 예배에서 시편만을 부르라고 명령하고, 다른 노래는 절대로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이 세상 어느 곳을 찾아보아도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다윗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시편 이외에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노래는 찾아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찬송가가 갖는 중요한 개념은 성경에서 나온 찬양이 아니라 사람이 쓴 노래라는 데에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하여 찬송가를 쓰기 때문에 자신의 삶이 얼마나 진실되고 성스러우냐에 따라서 그의 찬송이 성스러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더 근본적으로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인간이 쓴 찬송가가 성스러울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저자가 사악한 생각을 갖고 성스럽지 못한 생활을 한다면 그 사악한 생각과 성스럽지 못한 내용이 노래에 스며들게 되고, 노래에 스며든 사악한 내용은 노래를 통하여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심령 속에 깊숙히 스며들어 그 사람을 사악하게 만들게 된다. 이와같은 잘못된 찬송을 많이 부르게 되면 교인들의 신앙도 잘못 될 수 있다. 그리하여 Calvin은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중세 때에는 교황의 칙령에 의하여 교회에서 찬송가의 가창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교황이 교회에서 찬송가의 가창을 금지시킨 이유는 찬송가를 통하여 이단교회의 이단교리가 스며들기 때문이었다. 중세에 인간의 지혜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은 그노시스(Gnostics)의 이단운동과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아리안(Arian)의 이단 운동이 모두 찬송가를 통하여 확산 되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기복적이고, 내세적이고, 신유적인 것이 모두 기복적이고, 내세적이고, 신유적인 찬송가만을 많이 부르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본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찬송을 택하여 부르느냐 하는 문제는 그 교회의 신앙형태를 규정하는데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중요한 문제이다. 찬송가는 인간을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무서운 힘이 있기 때문이다.
Calvin은 시편을 운율시로 개작하여 시편가집을 출판하였고, 영국에서는 Isaac Watts(1674-1748)가 시편을 오늘날의 찬송가 형태로 개작하여 찬송가로 만드는데에 공헌 하였다. 오늘 많은 예배 찬송이 시편을 기초로 해서 쓰여진 것은 이 때 부터 되어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찬송가는 시편을 대신해서 예배찬송으로 불려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찬송가는 어떤 주제를 가지고 신도를 교육하기 위하여 또는 교화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찬송가는 예배와 찬송을 위하여, 그리고 교육과 제자훈련을 위하여 사용 될 수 있다.
복음찬송, 복음가, 영가(靈歌)도 인간에 의하여 쓰여 졌다는 것에는 찬송가와 다를 것이 없다. 찬송가와 다른 것은 그 내용에 있어서 교육적인 내용이 아니라 주로 구원의 놀라운 경험을 이웃에게 선포하는 것이고, 자신의 뜨거운 신앙을 이웃에게 고백하는 것으로 불신자들에게 전도와 복음선포의 목적으로, 그리고 자기자신의 신앙의 갱신을 위하여, 등 인간을 위해 쓰여졌고, 인간을 향해 부르는 노래이지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지어진 노래는 아니다.
그러나 예배를 통하여 이 세가지의 노래는 균형있게 불려져야 한다. 왜냐하면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과 동시에 교인들을 교육하기도 하고, 또 처음으로 예배에 참석한 불신자들을 향하여 전도와 복음선포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과거에 섬기던 새문안 교회와 현재 섬기고 있는 충현교회에서는 예배를 통하여 시편을 교독하는것 외에 이상의 세가지 찬송이 모두 불려지고 있다. 예배를 위한 찬송은 예배가 시작 되자마자 예배의 도입부에서 부르고, 성경봉독 전에 교육적인 두번째 목적을 위한 찬송이 불려지고, 헌금시간에 찬양대에 의하여 혹은 설교 후의 찬송을 통하여 전도와 복음선포를 위한 복음찬송이 불려진다.
3. 음악은 찬미의 제사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주님께 드리는 것"(시 29:2)이라고 했고, Raymond Abba는 그의 저서 {기독교 예배의 원리와 실제}에서 예배란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리는 것"이라고 했다. 구약시대의 예배에서 히브리인들이 바친 "하나님께 드리는 최상의 가치"는 헌물(offering)을 통하여 표현되었다. 시편 96편 8절에 "예물을 가지고 그의 전에 들어 갈 지어다"라고 한 시편 기자의 기록을 보아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헌물이 얼마나 중요했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헌물의 값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람은 값진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징벌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7만명이나 죽게되었을 때에 이 백성에게 나린 재앙을 그치게 하기 위하여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다. 그때 아라우나가 말하기를 "왕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용하십시오. 여기에 불로 태워 바치는 번제물로 소가 있고, 또 제물을 태울 땔감으로 타작하는 기구와 소의 멍에가 있읍니다. 제가 이 모든 것을 왕에게 드리겠읍니다. 아무쪼록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합니다"(삼하 24:22-23)라고 했다. 그러나 왕은 아라우나에게 "아니다. 내가 그것을 거저 갖지 않고 돈을 주고 사겠다. 나는 아무 댓가도 치르지 않은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무상의 제물을 드리기를 거절하였다. 그리고는 은 570 그람을 그에게 주고 그것들을 사서 여호와께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 그때 여호와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으므로 그제서야 그 땅에 내리던 재앙이 그쳤다.(삼하24:15-25) 이처럼 예배는 값없이 드리는 것이 아니라 비싼 값을 치르는 행위, 즉 최상의 가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약시대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심으로 인해 크게 달라졌다. 구약 시대에는 백성들의 죄를 대속받기 위하여 1년에 한번씩 대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속죄양을 잡아 하나님께 바쳤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매번 반복해서 속죄양을 잡아야 했고, 대제사장이 나이가 들어 죽게되면 또 다른 대제사장이 이 일을 행해야만 했다. 어부였던 요한이 쓴 편지에 이런 말이 있다. "만일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죄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해 화해의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요한1서: 2:1-2) 우리의 죄를 속죄 받기 위하여 매번 제물을 바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만 아니라 온세상의 죄를 위하여 화해의 제물"이 되셔서 스스로를 완전 무결한 제물로 바치셨기 때문에 그것으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화해는 완성 된 것이다. 대제사장이 늙으면 새로운 대 제사장이 화해의 제사를 드렸으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우리중에 살아 계시기 때문에 새로운 대제사장이 필요치 않게 되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을 위해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읍니다. ...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사람은 없어지고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 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자기와 화해시키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직책을 주셨읍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해시키시고 사람들의 죄를 그들에에 돌리지 않으셨으며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기셨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에게 우리 죄를 대신 지우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게 의롭다는 인정을 받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쓰고 있다.
헌물로 드렸던 모든 희생 제물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더 없이 값진 자기 자신을 십자기 위에서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 인하여 이미 충분하고 완전하고 흠이 없는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셨으므로 우리는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서 드리는 "최상의 가치있는 제사"는 헌물의 제사가 아니다. 구약시대의 "헌물의 제사"는 그리스도가 오셔서 자신을 직접 산제물로, 즉 헌물로 바쳤기 때문에 우리가 드릴 제사는 헌물의 제사 아닌 "찬미의 제사"인 것이다. 다시말해 구약시대의 "헌물의 제사"는 신약시대에 와서 "찬미의 제사"로 바뀐 것이다.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제사가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제물"이 그 중심이었듯이, 그리스도가 희생 제물이되어 완전한 산 제사를 드린 이후의 오늘날 우리의 제사는 "찬미"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4. 음악의 본질적인 가치
교회에서 음악을 사용해야하는 네번째의 이유는 음악 자체의 음악만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가치관 때문이다. 곧 "음악은 영적인 언어"라는 것이다. 음악이 어찌하여 영적인 언어란 말인가? 우리가 크리스마스 아침 예배 때, 부활절 아침 대 예배 때, 또는 귀한 손님을 모시고 교회창립 기념 예배라든가, 신축된 교회의 헌당식을 가질 때, 왜 찬양대는 대곡을 특별히 준비하여 연주 하는가? 이러한 예배에 찬양대가 없다면 그 예배가 어떻게 되겠는가? 찬양대의 음악이 없는 예배는 대 예배가 아니라 왜소한 예배, 축제의 예배가 아니라 활기가 없는 조용한 예배가 되 버릴 것이다. 축제의 대예배로 만드는 것은 찬양대의 음악 때문이다. 찬양대가 거대한 음악을 울릴 때 예배는 거대해지고, 조그마한 음악을 연주 할 때 예배는 왜소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축제예배 때 마다 찬양대는 특별한 음악, 아주 장엄하고 아주 거대한 음악을 택하여 연주하게 된다. 장엄한 음악과 거대한 음악이 그 예배를 장엄하게, 그리고 거대하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대한 음악이 교인들의 마음을 거대하게 만들고, 장엄한 음악이 교인들의 마음을 장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음악이 사람의 심령에 말하는 영적 호소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악을 영적 언어라고 말 한다.
음악이 영적 언어라고 하는 것은 고대 희랍에서 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고대 희랍에서는 인간의 병은 곧 그 사람의 영혼에 병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 하였다. 따라서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는 그 사람의 영혼의 병을 먼저 고쳐야 한다고 보았다. 영혼의 병을 고칠수 있는 것이 바로 음악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음악이 영적 언어이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음악으로 병을 치료하는 음악료법(music therapy)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교와 병원이 많이 있고 우리 나라에서도 최근에 시행하고 있는 줄로 알고있다.
"영이신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 4:24)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우리는 다 잘 안다.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은 참 마음을 가지고 영이신 하나님께 영적인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이다. 예배가 영적인 예배가 되기 위하여 영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예배가 진정(truth)한 예배, 즉 진리의 예배가 되느냐 안되느냐 하는 것은 목사님의 진리 선포에 책임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예배가 신령 (spirit)하냐 못하냐 하는 것은 바로 찬양대에 그 책임이 있다. 인간의 심령을 들어 올리는 (고양시키는) 것은 음악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회에서 음악이 담당하는 책임은 막중하다.
우리는 모일 때 마다 찬송가를 부른다. 어떤 때는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가 아무런 감응을 일으키지 않을 때도 있으나 어떤 경우에는 우리의 마음에 절실하게 느껴져서 특별한 감동을 갖게 되고 눈물을 흘리게도 한다. 찬송가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이 때 그 찬송은 우리의 잠자는 영혼을 일 깨워 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심령을 뜨겁게 만들어 준다. 필자가 예수를 처음 믿게 된 동기도 부흥회에서 찬양대가 부르는 찬양이 필자의 영혼에 깊은 위로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음악은 인간의 영혼을 위로 할 뿐만 아니라 잠자는 영혼을 일 깨워 예배자들의 영혼을 고양시켜 주기도 한다. 필자가 미국에 있을 때 어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시편을 영창하기 전에 모든 교인들이 일어나자 목사가 먼저 "Lift up your hearts"(여러분의 심령을 들어 올리십시요) 하면, 교인들이 "We lift them up to the Lord"(우리가 우리의 심령을 주님을 향하여 들어 올립니다) 라고 응답을 하였다. 다시 목사는 "Let us give thanks to the Lord our God." (우리 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하니까 교인들은 답하기를 "It is right to give Him thanks and praise."(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 마땅 합니다)하고 난 다음에 찬송을 부르는 것을 보았다. 찬양을 드리고 예배를 드릴려면 우리의 심령을 들어 올리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지 않고는 신령한 예배가 되지 않겠기 때문이다. 우리의 심령을 들어 올리려면 그것은 영적인 언어인 음악을 통해서만 가능 하다.
매 주일 아침 교회에서 필자는 먼저 내 자신의 영혼을 고양시키고 난 다음, 찬양대원들의 잠자는 영혼을 일깨워서 심령으로 노래 할 수 있게 만들고, 심령으로 노래하는 찬양대의 찬양을 통하여 온 교인들의 영혼을 고양(고취)시켜 예배가 신령한 예배가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내 자신의 영혼을 고양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로 준비하고, 그리고 난 다음, 가슴을 펴고 허리를 곧게 바로 세운 다음, 호흡(숨)을 깊게 들여 마시고 뱉음으로 내 속의 심령을 일깨운다. 그리고 깊히 들어간 호흡(숨)을 내 뱉으면서 노래를 부른다. 필자는 찬양대원에게도 똑같은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해서 나오는 노래는 영적인 노래가 된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 하시면서 인간에게 영혼을 주실 때에도 호흡을 불어 넣어 주셨다. 우리의 심령은 호흡을 통해서 운반된다. 에스겔서(37:9)에서도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 넣을 때 이를 "숨"(breath)이라고 했다. 호흡(숨)과 심령은 항상 함께 있는 것이다.
필자는 찬양대의 합창을 지도하면서 늘 에스겔서 37:1-14을 생각한다. 여호와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말라빠진 뼈들을 보여 주면서 "이 뼈들이 살 수 있겠느냐?" 고 물으셨다. 그러나 에스겔은 그 뼈들이 다시 살수 있으리라고 생각 못했다. 그는 "주께서만 아십니다"고 대답 했다. 하나님은 그에게 할 말을 가르쳐 주셨다.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을 들어라. 뼈들에게 주 여호와가 말 한다. 내가 너희 속에 생기(숨)를 불어 넣어 너희를 살리리라. 너희에게 힘줄을 이어 놓고 살을 붙이고 가죽을 씌우고 생기(숨)를 불어 넣어 너희를 살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여호와임을 알게 되리라."(공동번역) 에스겔이 여호와가 가르쳐 주신 대로 말을 하자마자 "갑자기 뼈가 움직이는 소리가 나더니 이뼈 저뼈가 서로 붙어 연결되기 시작 하였다. 에스겔이 보니 뼈들에게 힘줄이 이어 졌고 살이 붙었으며 가죽이 씌워졌다. 그러나 아직 숨쉬는 기척(생기)은 없었다. 이때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또 다음과 같이 외치라고 명령 하셨다. "생기야, 사방에서 와서 이 죽어 있는 몸에 들어가서 이들을 살게 하라." 에스겔은 명령대로 하였다. 그러자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 그들이 살아서 일어나 굉장히 큰 군대가 되었다(현대인의 성경)고 한다. 음악의 악보 그 자체는 마른 뼈다귀에 불과하다. 악보란 작곡자의 영적 사상(idea)이 악보라는 기보법에 결빙(frozen)된 것이다. 결빙된 음악에 영혼의 생기를 불어 넣어 얼어 붙은 것을 녹여야 한다. 그리고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하여야 한다.
주일 아침 필자가 찬양대를 연습시키는 것은 대원들의 해이해진 영혼(잠자는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 움직이게 하는 작업이라고 생각 한다. 즉 말라빠진 마른 뼈와 같은 심령에 살을 붙이고 힘줄을 세우고, 가죽을 씌운 다음 생기(혼)를 불어 넣어 영혼이 살아 움직이게 하는 작업이라고 생각 한다. 그러면 찬양대는 또 입례송과 화답송을 통하여 주일 아침 예배당에 앉아 있는 말라빠진 뼈다귀와 같은 많은 심령을 일깨우고, 그들의 말라빠진 뼈다귀와 같은 영혼속에 살과 힘줄을 붙이고 가죽을 씌운 다음 생기를 불어 넣어 죽었던 영혼을 되 살려주는 일을 한다. 이것이 바로 찬양대의 역할이다. 교회에 따라서는 찬송가를 부를 때 1,2,3,절은 원조(原調)로 부르나 오르가니스트가 반주를 하면서 매 절이 바뀔 때 마다 오르간의 소리를 증폭 시키고 그리고 3절 다음에 간주를 통해서 반음 위나 또는 한음 위로 전조하여 마지막 절을 노래하게 하면 교인들의 심령이 한껏 높아지게(고양)된다. 이 때 찬양대의 소프라노가 떼스칸트(descant)를 부르게 되면 교인들의 심령은 더욱 고조 된다. 이와 같이 교인들의 심령이 고양되고 고취되었을 때 예배는 신령한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10. 예배와 예식 제1장 교회 1.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이는 공동체이다. 이 교회는 성령의 역사 아래서 예배와 그 외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데 그 존재의 목적을 두어야 한다. 2.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신 성부, 성자, 성령되신 하나님의 은총 앞에 경건한 응답으로써 영광과 찬양과 감사를 드려야 한다. 3. 교회는 주님의 몸으로서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계속적으로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전이 바르게 집례되어야 할 것이며 여기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역사와 사회 속에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도록 해야 한다. 4. 교회는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부름받았음을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이 소명은 교회공동체 구성원에게 각각 구별된 분야를 섬기도록 하셨으며, 특히 목사에게는 예배를 인도하며 설교와 성례전의 집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특수한 임무가 부여되었으며, 당회는 모든 회중들을 대표하여 예배의 준비와 질서를 맡아 수행해야 한다. |
제2장 예배 |
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의 역사를 펴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오늘도 예배를 드리도록 성도들을 부르시는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행사에 속한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하여 주시는 용기와 사랑과 새 힘의 근원도 모두 하나님이시다. 2.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의 응답이며 구체적인 행위이다. 이 예배는 인위적인 행사로 되는 것이 아니며 성경말씀의 증거와 성례전 가운데서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보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깨닫는 믿음 가운데서 이룩되어야 한다. 3. 시간을 초월하신 하나님 앞에 성도들은 언제나 예배를 드릴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이 함께 모여 드리는 공중 예배는 주님이 부활하신 주님의 날이 합당하다. 그 이유는 온 성도들이 이 정한 시간에 함께 드린 예배는 죄와 죽음을 이긴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4. 인간의 손으로 만든 지정된 장소에 제한된 하나님이 아니시기에 예배의 장소도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예배는 성별된 장소인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가 필수적이다. 5. 성도들은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드림과 동시에 세상으로 흩어져 영적인 생활을 힘써야 한다. |
제3장 주의 날 |
1. 사도시대부터 우리 주님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일주일의 첫날을 우리 기독교는 거룩한 안식일로 정하여 지켜오고 있다. 이 날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의 생업을 중지하고 모든 가족이 예배당에 나아가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은혜를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을 누려야 한다. 2. 이 날은 주님의 날인즉 이른 아침부터 예배를 드릴 준비에 거리낌이 되는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삼가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예배를 인도할 하나님의 종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그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특별한 은총을 받도록 준비해야 한다. 3. 주님의 날에 드리는 예배는 정한 시간에 한 마음 한 뜻으로 모든 성도가 참여해야 하며 예배의 처음부터 끝까지 경건한 마음으로 질서를 지켜야 한다. 4. 공중예배를 마친 후에는 그 남은 시간을 영적인 성장을 위하여 기도, 찬송, 성경공부를 비롯하여 신앙 담화나 영적 수양지를 읽도록 할 것이며 병자 위문, 가난한 자 구제, 불신자를 위한 전도 등을 하면서 사랑과 은혜의 예배가 연속되도록 해야 한다. |
제4장 예배의 내용 |
1. 성도들이 드리는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모든 예배의 목적과 내용은 인간 중심적인 것이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영광과 감사와 찬송을 드리도록 준비되어야 한다. 2.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는 깨끗한 마음과 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성도들이 감격적으로 드릴 수 있는 예배가 되도록 그 책임을 다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달하는 종으로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3. 모든 성도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는 몸과 마음을 준비하고 나가야 하며 예배의 모든 순서에 처음부터 끝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응답해야 한다. 4. 모든 예배의 참여자들은 한 마음 한 뜻을 가진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은총과 구속의 사랑을 찬양하고 허물과 죄를 뉘우치며 죄의 용서에 대한 감사를 새롭게 하면서 주시는 말씀을 받아 흩어지는 교회로 계속되어야 한다. 5. 공중예배는 가급적 다음과 같은 교회력에 맞추어 진행하도록 하며, 목사는 그리스도의 구속사를 중심한 말씀을 체계화시켜 성도들에게 전하도록 준비해야 할 것이다. 대강절: 주님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심정을 고취시킨다. 성탄절: 평화의 왕으로 찾아오신 우리 주님 앞에 감사와 찬송으로 경배하며 새로운 기쁨과 희망을 갖도록 한다. 현현절: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계시하신 은총을 인식하면서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강조한다. 사순절: 수난절에 있었던 십자가 사건을 정점으로 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앞에 감격스러운 응답을 가져오도록 해야 한다. 부활절: 죽음을 이기신 우리 주님의 권능과 부활의 승리가 우리에게 함께 있을 것을 바라는 소망을 심어 준다. 승천일: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주인이심을 인식시킨다. 성령강림절:교회에 임하신 성령의 임재와 그 역사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의 생동력있는 삶을 강조해야 한다. |
제5장 예배의 배열 |
1. 공중예배는 신령과 진정이 표현되는 질서의식이 내포되어야 한다. 목사는 예배가 성경적이 되도록 신약시대 교회의 예배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져야 한다. 또 교회 전통과 일관성을 가지면서도 고유의 의식을 개발하는 창의성이 있게 하며 목사와 더불어 온 회중이 참여하도록 공동체예배의 성격이 드러나야 한다. 2. 공중예배의 기본 배열은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부분이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순서로 예배가 시작된다. 둘째로, 찬송과 고백과 기도이다. 인간의 마음속에서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시와 찬미로 화답하고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허물과 죄를 고백하는 고백의 기도를 비롯하여 회중의 사죄와 그 사죄의 확증 기도가 있어야 한다. 셋째로, 말씀의 순서이다. 하나님 앞에 나온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부분이다. 이 순서는 성경봉독, 설교, 성례전을 통하여 예배드리는 성도들의 영혼에 새로운 영양소를 공급하는 소중한 부분이다. 넷째로, 감사와 응답의 순서이다. 예배 전체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다. 여기서는 우리에게 선포되어진 말씀에 구체적인 응답으로써 찬송과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새로운 헌신과 결단을 보이는 부분이다. 다섯째로, 예배는 말씀과 성례전으로 이루어지므로 성례전을 포함한 예배가 자주 있어야 한다.끝부분은 찬송과 위탁의 말씀과 축도(降福宣言)이다. 여기서는 신앙적 결단을 촉구하는 찬송을 부르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 것을 다시 한번 부탁한 후 하나님이 내리시는 복을 목사가 선포한다. 이때의 축복기도는 성경의 본문대로 한다. 그리고 성도들은 주안에서의 문안과 친교를 하는 것이 좋다. |
제6장 예배와 말씀 |
1.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계신 생명의 말씀이다.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구속의 역사를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펼치신 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시고 계신다. 2. 이 하나님의 말씀은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계시로서 성경과 설교와 성례전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현존을 선포하시는 삶의 원천적인 근원을 제공해 주신다. 3. 그러므로 기록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예배 가운데 반드시 봉독되어져야 한다. 성경을 봉독할 때에는 구약과 신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전체성을 뚜렷이 회중들이 이해하고 경청하도록 해야 한다. 4. 통독할 성경의 내용은 목사가 작성하되 그 봉독은 목사나 목사의 허락을 받은 사람이 봉독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봉독자는 경건하고 엄숙한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리도록 해야 한다. 5. 설교는 하나님의 부름받은 말씀의 종을 통하여 오늘의 회중들에게 바르게 선포되고 정확하게 해석되고 효율적으로 적용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배 가운데서 선포되어진 이 말씀을 통하여 성도들은 하나님과 늘 새로운 만남을 가져와야 하며 믿음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되는 확신과 구원의 은총을 계속 받아야 한다. 6. 이토록 중요한 말씀의 사역을 맡은 설교자는 부름받은 말씀의 종으로서 소명감과 함께 영적인 생활과 깊은 연구생활을 계속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히 전달되도록 준비가 있어야 한다. 7. 예배 중의 설교는 봉독한 하나님의 말씀을 적당한 시간 내에 강론하여 그 진리를 가르치며 그들의 생활 속에 연결지어 주어야 한다. 결코 인간적인 사상이나 학문이나 재주의 자랑이 아닌 진리만을 전해야 한다. 8. 교회는 당회장이나 당회의 허락 없이는 설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한다. 9. 성례전은 행동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글로 기록되어진 말씀과 설교되어진 말씀과 같이 성례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행동으로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는 말씀의 연속이다 |
제7장 시와 찬미와 음악 |
1. 예배 가운데 모든 성도들이 한 공동체로서 시와 찬미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모든 신자의 마땅한 본분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이다. 2. 시편과 찬송은 모든 성도들의 기도와 찬양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찬송을 부를 때 깊은 이해를 가지고 적극적인 참여를 해야 할 것이며 모든 음악 순서는 그 예배의 목적과 일치되도록 해야 한다. 3. 당회는 예배 순서에 찬양과 연주를 맡을 성도를 정성을 기울여 선정하고 그들의 봉사를 통하여 시와 찬미와 찬양이 하나님께는 영광을, 예배의 참례자들에게는 감격스러운 예배가 되어야 한다. |
제8장 공중예배기도 |
1. 공중예배에서 드리는 기도는 개인적인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한 권위를 숭배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했던 허물과 죄를 고백하는 기도이어야 한다. 이 기도는 성령의 도우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를 용납하시기를 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2.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는 하나님 앞에 회중을 위하여 그들의 용서와 소원을 구하는 중재적 의미를 가진 목회기도를 드려야 한다. 이러한 기도 가운데는 경배, 감사, 자복, 간구, 중재와 같은 요소들이 있어야 한다. (1) 영광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섭리와 성령의 역사 속에서 나타나신 그 영광과 완전하심을 경배해야 한다. (2) 감사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심과 오늘도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심에 먼저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모든 개인과 가정과 단체 속에 주신 은혜를 감사해야 한다. (3) 자복인간에게는 원죄와 그 원죄의 뿌리에서 나오는 죄의 본성 때문에 범하게 되는 죄가 허다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이웃과 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 죄를 비롯하여 순간적으로, 때로는 고의적으로 범한 죄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를 구해야 한다. 이 기도가 자복의 기도로 회중이 함께 드릴 때는 기도 후에 목사는 성경말씀으로 사죄의 확신을 선언해야 한다. (4) 간구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함을 받은 무리들이 성령의 성결케 하시는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는 은혜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간구할 것이며, 어려운 역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우리의 영육간의 생활이 보호받도록 간구해야 한다. (5) 중재기도성도들은 자신을 위한 것보다 먼저 다른 사람을 위하여 드리는 기도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자신들의 주변으로부터 국가와 인류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구원과 평화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드리는 것이다. 3. 설교 후에 드리는 기도는 그 증거한 말씀에 관계되는 기도로서 선포된 말씀이 귀한 결실을 맺도록 성령의 역사에 의탁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4. 공중 예배순서에 평신도가 드리는 기도는 목회기도가 아니므로 그 내용은 감사와 자복과 은혜의 말씀을 사모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5. 공중예배에서 기도를 인도하는 목사나 평신도는 반드시 성경을 숙독하고 기도에 대한 서적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함으로 기도하는 능력과 정신을 얻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언제나 공중예배의 기도를 위하여 자기 마음을 안정하고 기도의 내용을 준비하여 마음과 몸의 자세를 경건하게 가져야 한다. 6. 공식예배의 기도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의 자세는 기도 인도자와 더불어 경건한 태도이어야 하며 한마음으로 기도를 드려야 한다. 7. 모든 기도는 예수가 명하신 대로(요 15:16)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야 한다. |
제9장 예배와 예물 |
1. 예배 가운데 희생의 제물을 대신하여 예물을 드림은 예배자의 당연한 일이다. 사망에 이르렀던 죄인들을 구속해 주신 은총을 비롯하여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었으나, 오늘도 일용할 양식으로 채워 주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몸과 가진 바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예물로 드림은 당연하다. 2. 성도들의 정성어린 이 예물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오직 기쁜 마음과 감사한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3. 이 예물의 봉헌은 예배 중의 순서로 정중히 행해져야 하며 목사는 이 순서 전이나 후에 드리는 기도 가운데 성도들의 정성을 하나님이 받아 주실 것을 기도해야 한다. 4. 이 봉헌된 예물은 당회의 감독하에 주님의 복음사업에 아름답게 사용되도록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것이며 모든 성도들이 그 과정과 결과를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제10장 성례전 |
1. 세례와 성찬은 예수께서 친히 세우신 거룩한 예전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은총의 보이는 형태이다. 성례전에 사용되는 물과 떡과 포도즙은 비록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나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과 그 백성들 간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교제를 가지고 그와 성도들과의 구속적 관계를 가지게 된다. 2. 이 예식들은 예수께서 친히 은혜를 베푸시는 방법으로 삼으시고 교회를 위하여 세우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디서나 이 예전을 자주 또 정당하게 거행하여 신령한 유익을 얻어야 한다. 세례와 성찬 이외의 다른 예전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교회는 성례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3. 성례전은 어떠한 형편을 막론하고 평신도가 집례할 수 없고 반드시 하나님의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목사에 의해서 집례되어져야 한다. 그 집례의 장소는 교회가 되어야 함이 원칙이나 특별한 경우 그 외의 장소에서도 당회의 결정에 따라 교회를 대표하는 교인들의 참석하에 집례할 수 있다. |
제11장 세례 |
1. 세례는 죄의 용서와 함께 죄인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하나님의 은총의 표시이다.세례는 그리스도의 피로써 죄를 씻음을 의미하며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자기 자신에 대하여 완전히 죽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새로운 삶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사랑과 용서와 구속을 동시에 선포하시고 우리를 그의 자녀로 받아 주시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 삼아 주신다. 그러므로 세례는 한 사람에게는 한 번만 베풀어져야 한다. 2. 성례전으로서의 세례는 전체 교회의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는 정기적으로 베풀어져야 하며 예배드리는 회중의 참여 가운데서 베풀어지는 것이 마땅하다. 세례를 받는 사람은 물론 증인으로 참여하는 사람에게도 복음을 선포하는 방편이므로 공동예배 가운데 말씀의 순서에 이어서 베푸는 것이 원칙이다. 3. 어린이 세례는 구약시대에 할례를 베풀어 어린이도 은총의 언약 아래 있게 했던 것처럼 예수께서 세우신 새 언약에 들어가는 표인 세례를 어린이에게 주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어린이들이 자기의 입으로 신앙을 고백할 수 없기 때문에 목사는 부모가 그 아이를 믿음 안에 양육하여 장성할 때까지 뿐만 아니라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생활을 하도록 책임질 것을 권면하고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한다. (1) 여러분이 어린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을 믿습니까? (2)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전력하는 것과 같이 이 어린이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함으로 구원얻을 줄 믿습니까? (3) 여러분이 자녀를 하나님께 바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친히 경건한 본을 보이기를 힘쓰며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양육하기로 서약합니까? 그리고 교회의 회중에게도 응분의 책임 이행에 관한 약속을 하고 동시에 목사가 간단히 기도를 드린 후에 다음 같이 말하면서 물로 세례를 베푼다. “(이름),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아멘.” 이어서 세례받은 어린이와 그 부모, 그리고 이 성례전에 함께 참여한 회중을 위해서 기도를 드린 후에 이 예전을 마친다. 4. 입교는 어린이 세례를 받은 사람이 장성해서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개인적인 응답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입교예식을 통하여 교회는 그에게 교인으로서의 특권과 책임을 부여한다. 이 예식은 목사가 어른 세례의 문답을 통하여 당회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도록 하며 회중 앞에서 이 사실을 확인하고 교회의 세례교인 됨을 공포해야 한다. 5. 어른 세례는 어린이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성인이 된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신앙을 고백하여 교인이 되고자 할 때 세례를 받도록 하는 것이다. 이 세례를 받기 전에 당회는 그에게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거기에 수반되는 특권과 책임에 대한 교육을 받도록 한 후 적절한 시취와 당회의 결의를 거쳐서 공중예배에서 세례를 받도록 한다. 세례의 예식은 목사가 회중에게 세례의 의미를 선포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서약을 해야 한다. “공식으로 신앙고백을 하려고 이 자리에 참여한 여러분은 다음의 물음에 진지하게 대답하여 하나님과 그의 교회로 더불어 엄숙한 언약을 맺어야 합니다.” (1) 씨는(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죄인인 줄 알며 그의 진노를 면치 못할 줄 알고 그의 크신 자비하심에서 구원얻는 것 외에 소망이 없는 줄로 믿습니까? (2) 씨는(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죄인의 구주가 되신 줄 믿으며 성경에 말한 바와 같이 당신을 구원하실 이는 오직 예수 뿐이신 줄 알고 믿으며 그에게만 의지하기로 서약합니까? (3) 씨는(여러분은) 지금 성령의 은혜만 의지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되고 모든 죄악을 버리고 그의 가르침과 본을 따라 살기로 서약합니까? (4) 씨는(여러분은) 교회의 치리에 복종하고 교회에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며 교인으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바르게 행사하기로 서약합니까? 이상과 같은 서약에, “예, 믿습니다.” “예, 서약합니다.”라는 대답을 받고, 목사가 이렇게 말하면서 세례를 베푼다:“(이름),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아멘.” 그 후에 그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을 선언한다. 그들이 신앙생활에 충실할 것을 위한 간단한 권면이 있는 후에 축복기도로 이 예전을 마친다. 6. 학습은 원입교인이 신앙의 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복음적인 신앙 안에서 성장하도록 지도하는 과정이다. 그들이 사이비 교리나 이단 사설에 유혹되지 않도록 교회가 그들에게 세례받기 전에 그들을 도와 철저한 교육을 받도록 해야 한다. |
제12장 성찬 |
1. 세례의 예전을 통하여 교회의 일원이 된 우리들은 성찬의 예전을 통하여 보이는 은혜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임하게 된다. 이 예전의 주인은 성령 안에서 임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2. 성찬은 예수께서 제정하신 것으로 그가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하시면서, 떡은 자신의 몸이요, 포도즙은 그의 피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상처를 입어 찢기시고 피를 흘리시게 된 것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려는 약속의 표라고 하셨다. 그리고 성찬을 가질 때마다 그의 십자가와 그가 입으신 상처와 흘리신 피를 생각하고 그를 기념하라고 하셨고 그가 오실 때까지 이것을 행하라고 하셨다. 교회는 예수님과 사도의 이와 같은 명령에 따라 초대교회 때부터 현재까지 성찬을 신령한 예전으로 지켜 오고 있다. 3. 모든 참여자들은 이 성찬의 예전에 준비된 떡과 포도즙을 나누는 가운데 그의 말씀과 성별의 기도 속에 영적으로 임재하신 주님을 뵙는 경험을 갖도록 하며 그의 새 언약에 새롭게 참여하면서 기쁨과 감사와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4. 이 예전을 집례하는 목사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아 집례하게 된 자신의 막중한 사명을 깨닫고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성도들은 올바른 마음가짐 없이 이 거룩한 예전에 참여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죄를 회개하고 성찬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5. 이 성례전은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의 마지막 만찬과(마 26:2629, 눅 22:1520)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고전 11:2329)에 기록한 만찬의 유형을 따라야 한다. 이 유형에 따라 먼저 성찬 예물은 떡과 포도즙으로 해야 한다. 준비된 성찬상 앞에서 집례자는 떡을 먼저 들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선포와 성별의 기도를 드린 다음, 떡을 떼면서 현재적 의미를 간결하게 전하고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너희는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말씀을 전하고 장로들에게 떡을 나누게 하고, 또 잔을 들어 새 언약의 의미와 “이 잔은 내 피로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는 말씀을 전하고 장로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한다. 6. 다음에는 영광과 감사를 드리는 기도와 찬양을 드리고 아래 기록한 축복기도나 또는 다른 축복기도로 끝을 맺는다. “양의 큰 목자 되신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사 평강을 주신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완전케 하여 자기의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움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을 세세에 돌릴지어다. 아멘.” 7. 이 성찬의 예전은 우리의 제한된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역사가 이룩되는 순간이므로 그때마다 성령의 역사 아래서 우리 주님의 그 깊으신 사랑과 풍성하신 은혜를 경험하도록 해야 한다. |
제13장 예배의 분류 |
1.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데 그 일차적인 존재 의의가 있으며, 어떠한 성격의 예배에서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의 말씀을 들으며 그의 은혜를 감사하고 새 삶을 결단하는 기도가 포함되어져야 한다. 2. 주일예배:주님의 날에 드리는 예배는 전통적으로 필수적인 예배로 지켜지고 있다. 주님의 날 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모든 성도들이 함께 정중한 예배 의식을 갖추어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이 예배를 위하여 성도들은 아침부터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영적으로 만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3. 찬양예배:주일 저녁에 모이는 찬양예배는 교회 공동체의 친교와 훈련을 위해서 중요하다. 이 예배에서는 교인들의 신앙체험을 간증하고 고백하며 신앙생활을 통하여 얻은 기쁨을 찬양으로 표현하는 내용을 위주로 하여 예배를 드릴 수 있다. 4. 기도회:기도회도 예배이므로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한 기도회라야 한다. 수요일 저녁에 모이는 기도회를 삼일기도회라고도 부른다. 기도회가 다른 예배와 다른 점은 개인적으로나 공동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는 데 있다. 기도회에 있어서는 자기 개인의 죄의 회개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와 새로운 말씀의 계시를 간구하는 기도를 하는 동시에 가정과 교회와 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위한 기도를 해야 한다. 5. 새벽기도회: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경건되고 성실하게 모든 생각과 정성을 집중해서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시간이 기도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어떤 특정한 시간에만 기도할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시간이 있는 대로 개인적으로나 공동적으로 기도를 해야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좋다. 새벽부터 교회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이나 국가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신앙생활을 더 성장케 하고 풍요롭게 한다. 한국교회는 초창기부터 새벽기도에 힘쓰는 아름다운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 전통을 살리도록 힘써야 한다. 6. 구역예배:주 중의 한 날을 정하여 한 장소에 모여 구역 안에 있는 교인들이 각 가정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사정을 교환하면서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기도로써 신앙생활의 강화를 도모함은 매우 유익한 일이다. 특히 구역예배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끼리의 교제를 두텁게 하는 동시에 교회의 일에도 힘을 합하여 적극적으로 협조함으로써 교회 성장에 큰 도움이 되는 동시에 개인의 신앙생활과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심화시킨다. 7. 가정예배와 개인 기도생활:성도들이 은밀히 기도하는 것과 한 가족이 함께 모여 성경을 상고하면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개인과 가정의 신앙생활에 크게 유익한 일이다. 8. 이상과 같은 정기집회 이외에도 필요에 따라 교회는 특별집회를 가질 수 있다. 이런 집회는 성도들의 성경 지식을 증진시키고 기도생활을 장려하고 새로운 활력소를 제공하여 보다 깊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한 것이다. 특별집회로서 사경회를 비롯하여 철야기도회, 금식기도회, 또는 교회 봉사를 위한 기타 집회를 가짐이 유익하다. |
제14장 교육과 훈련 |
교회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고 교회가 성장하고 확장되게 하기 위한 일꾼이 필요하므로 교인들에 대한 신앙교육을 수행해야 한다.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바르게 교육을 받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진리 안에서 바른 신앙을 가지도록 언제든지 관찰하고 교도해야 한다. 특히 교인들이 바른 신앙교육을 받아 하나님의 품안에서 생활하며 예배를 위시하여 교회의 여러 가지 순서에 열심히 참가하도록 해야 한다. 교회는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하여 아동부, 중·고등부, 대학부, 청년부, 장년부, 노년부 등의 교육 훈련을 가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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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장 교회예식 |
1.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를 바로 세우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사역자들을 세우는 일과 성전의 봉헌 등은 적절한 예식을 통하여 이행함이 타당하다. 2. 이 예식에 필요한 모든 절차는 예식서에 정한 대로 따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며, 모든 예식이 경건되이 실시되도록 기도로 준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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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혼례식 |
1. 성도들은 마땅히 주 안에서 혼인할 것이니 혼인을 특별한 훈계와 적당한 기도로 행하기 위하여 목사나 그 밖의 교역자로 주례케 해야 한다. 2. 주례자는 남녀가 각각 일정한 연령에 도달하여 부모나 그 후견자의 동의를 얻었을 때 이를 확인하고 집례해야 한다. 3. 혼인식은 여러 증인 앞에서 행할 것이며 주례자는 그 요구를 따라 혼인증서를 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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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장 장례식 |
1. 장례식에 행할 예식은 적당한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봉독하고 목사가 적절한 말씀으로 유족에게 하는 것이다. 2. 이 장례식은 집례자가 유족들의 의견을 참작한 순서대로 실시하는 것이 좋으며 구체적인 절차는 예식서를 참고하여 이행할 것이다. |
11. 세례의 의미
1. 세례의 일반적 의미
1) 국어 사전적 의미
먼저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우리말의 국어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① '입교하려는 사람에게 주는 의식의 하나, 물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원죄 와 자범죄를 모두 사하고 성신에 의한 중생(重生), 하나님의 생명에의 참여(參與), 천국의 세사(世嗣), 의무 이행, 영적 은혜를 위하여 행하여지는 의식, 종파에 따라 다르나 대개 안수 목사가 머리에 점수(點水)하여 의식을 행함'
② '죄악을 씻고 새 사람이 되겠다는 표로 행하는 예수교의 의식'이라고 정의했다.
2) 성경 원어적 의미
세례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원래 성경을 기록하던 때 사용했던 용어와 그 뜻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성경에 세례 의식에 용어로는 명사로 ' '와 동사로 ' '를 사용하
고 있다. 그 용어의 원어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
① '밮티스마'로 발음되는 세례의 명사로 '담금, 적심, 기독교의 세례, 에서 유래'이다
② '밮티죠'로 발음되는 동사의 의미는 '빠지다, 깊이 잠기다, 적시다, 가라 앉히다, 잠겨 정결케하다, 목욕하다, 물로 씻어 깨끗케 하다, 세례를 받다, 세례를 주다'
③ '밮티스모스'의 의미는 '1. 잠기거나 적시는 행동 2. 세례,침례(히 6:2) 3. 씻음, 목욕(막 7:4,8; 히 9:10)'
이상의 성경 원어에서 사용된 '세례'는 일반적 의미로는 물속에 잠기는 것이며 그리고 잠기거나 목욕할 대상이 물로 가는 것이지 물이 수세자나 목욕할 대 상에게로 옮겨지는 것이 아닌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으니 세례가 결코 홍수의 침수는 아니기 때문이다. 의식적 의미로는 역사성을 입증하는 사전에 '세례'와 '침례'라는 단어로 동시에 번역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은 단 한 번 (밥티스마)를 받으셨는데 과연 약식 세례를 받으셨을까? 아니면 침수 세례를 받으셨을까가 궁금하게 된다.
또한 (밥티조)에서 발전한 동사형 명사 (밥티스모스)의 번역도 '세례'와 '침례'로 동시 번역한 것으로 보아 원어적 의미의 원형식에 대한 번역이라기 보다는 사용상 의미의 용어로 이해하게 된다. 문제는 원래 '세례( )'의 영적 의미인 물 속에 장사 지냄받는 의식이라는 복음적 형식을 이해한다면 우리말 번역의 '세례(洗禮)라는 용어를 쓰건 침례(浸禮)라는 용어를 쓰건 그것을 문제 삼아 침례교(浸禮敎)에 거부감이나 장로교 전통에 대한 고집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3) 세례의 복음적 의미
세례가 복음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받으시고 명령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세례 의식을 복음적 의미로 인식하고 나아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므로 복음을 전파해야 할 것이다.
⑴ 세례는 회개를 전제한 복음 의식이다.
성경이 말하는 세례는 회개를 전제하는 의식이기는 하지만 속죄를 이루는 사죄권이 있는 것처럼 이해할 수는 없다. 값없이 주신 은혜로 믿고 회개하여 구원받은 사람이 받는 복음 의식이다.
세례( )는 행위임으로 '믿음의 의'를 마치 행위의 의로 사죄받는 것처럼 오해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세례의 행위로 죄씻음받고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성령의 역사로 믿고 회개한 선한 양심이 세례를 향하여 나아가게 되는 것 뿐이다.
⑵ 세례는 예수님의 순종에 대한 모범의식이다.
세례자 요한에게 예수께서 친히 받으신 세례는 모든 의를 이루시려는 사랑의 계명 실천을 위한 모범이셨으며 또한 확실한 신앙고백의 증거였다. 우리가 세례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할 이유는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유언적 교훈 속에 포함하여 명령하셨기 때문이며 또한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마땅히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행하는 모든 일로 복을 받아야 하고 또한 주께서 본 보이신 사랑의 계명을 지켜 순종해야 할 복음이기 때문이다.
⑶ 세례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의미하는 의식이다.
주님의 구속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성경에서 인용하기는 어렵지 않다. 성
경이 구속을 위한 복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속을 상징으로 의식화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한 내용을 찾기는 쉽지 않다.
아래의 성경은 세례 의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으심을 나타내 주는
참으로 놀라운 의식임을 계시하여 준다.
주님은 율법을 완성하시려고 구약의 구약사적 형상인 송아지와 양의 죽음같이 십자가에 죽으심을 나타내 주는 의식으로 세례를 받으셨다. 주님이 받으신 세례가 결코 죄를 씻기 위한 세례가 아니라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죄와 상관없이 받으신 세례였으니 주님이 받으신 세례는 구속의 죽으심을 의미하며 우리의 세례도 주님과 합하여 받은 세례였으니 곧 주님과 합하여 죽어진 영광스런 복음이다.
⑷ 세례는 예수님의 장사지냄을 의미하는 의식이다.
세례는 주께서 십자가상에서 구속의 피를 다 쏟으시고 죽어 아리마데 요셉의 요청에 따라 십자가에서 내려져 세마포로 싸서 바위에 판 새 무덤에 장사되신 역사적 사실을 의미하는 복음적 의식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세례는 주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받은 세례인 동시에
그리스도와 합하여 장사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만 은혜가 되는 복음적 의식이다.
⑸ 세례는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하는 의식이다.
세례의 또 다른 복음적 의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인 주님의 부활을 예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받은 세례는 주님과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되었다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주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실 때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 우리도 그 안에서 함께 살게 하사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시는 영광스런 복음의 의식이다. 죽음이 없이는 부활도 없다.
⑹ 세례는 모든 의를 성취하는 의식이다.
세례는 주님이 지상 초림의 사명인 구속적 사명을 모두 포함하여 완수하신
것을 내용으로 하며 구약의 율법적 의를 완성하시고 믿음의 의를 성취하는 칭의의 사역을 포함한 복음 의식이다.
2. 세례의 영적 의미
구약 성경에는 직접적으로 '세례'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지는 않았으나 신약적 구약 사건 해석에서는 근거가 있으며 해석도 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의미의 세례가 구약성경에 이미 계시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세례의 영적 근원에 관하여 구약 사건에 관한 신약적 해석에 대하여 연구 확인해 보자.
1) 세례의 구약 계시
노아때의 홍수 심판은 당시 세상의 관영한 죄악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으며(창 6:1-8:22) 이 때 구원받은 노아와 그 가족 8식구가 방주를 통하여 구원받은 사건에 대하여 설명하는 사도 베드로는 홍수시의 물을 세례( )로 적용 해석하고 있으며 세례가 육체의 더러운 죄악을 씻음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죄 받은 성도의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서 받게 되는 것이 세례임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 노아의 식구가 받은 세례가 죄사함 받는 것이나 사죄하는 효력과도 무관함도 발견하게 된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첫 번째 편지에서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구름 아래 있던 것과 홍해 바다를 통과한 것을 세례( )로 영적 적용하면서 이 사실을 꼭 알아야 한다고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교회를 신약교회와 다름 없음을 영적 적용하고 있다.
비록 구약 성경에 직접적인 세례의 용어가 쓰여지지는 않았지만 신약 성경의 기록자들은 세례의 기원이 구약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노아때의 홍수 사건이나 모세 때의 홍해 사건의 공통점은 구원과 심판이라는 사실이며 따라서 신약 시대의 세례도 구원과 심판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성경의 통일성에 합치한다.
결과적으로 아벨이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그 외의 족장들이 세례를 받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례가 죄사함받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의 상징적인 의식임은 구약 성경에서도 분명히 입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 성령 세례의 영적 적용
세례자 요한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면서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후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함으로 세례에 성령님의 사역이 관계되어서 '성령 세례'라는 용어가 계시되고 있다.
아래의 성경은 성령과 세례와의 관계를 영적으로 적용한 예로서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받은 물세례를 전제한 내용들로서 성령 세례의 영적 상태도 물세례의 의미에 부합해야 한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요한은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주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을 예언했고(막 1:8) 주님께서도 승천 직전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으로 받을 세례를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으며(행 1:4,5) 사도들도 마가 요한의 오순절 성령 체험을 한 후 주님의 성령 세례 예언을 깨달았으며(행 11:16)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이미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누구든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된 한 몸을 이루도록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였다(고전 12:13)고 기록하였다.
12. 성찬식의 의미
초대교회부터 매주 주의 날에 지켜졌던 성만찬은 기독교 예배의 중심이었다. 주 후 2C 경에 초대 교회교부 저스틴의 증언에 의하며 주의 날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모였던 그리스도인들은 모일 때마다 성만찬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 성만찬은 초기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16C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도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칼빈은 참다운 교 회는 말씀이 바로 선포되어지고, 성례전이 올바르게 집행되어져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성만찬은 기독교가 탄생할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예배의 중심적 행위로서 이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를 다시 뵙고 경험하며 주님과의 계약을 새롭게 다짐하는 예전이다. 그런데 보이는 말씀인 성만찬은 말씀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그래서 칼빈은 말씀이 없으면 성찬은 바르게 집행될 수 없다라고 하였다. 말씀이 진실되게 선포되고, 마음으로부터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공동체가 아니라면 거기에 참된 그리스도의 성례전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독교 예배는 초기부터 두 가지의 핵심적 부분 즉 "말씀의 예전"과 "다락방의 예전"으로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그 러나 역사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기독교 예전은 성만찬 중심(미사)의 예배 전통과 복음 선포(설교) 중심의 예배전통으로 나뉘게 되었다. 서로의 전통을 절대화하는 과정에서 초 대 교회예배 본질에서 어느 한 쪽을 등한시하는 잘못을 범하게 되고 말았다. 그런데 20 세기에 이르러 예배의 갱신운동이 일어나면서 종교 개혁자들의 외침에 눈을 돌리게 되었 고, 그들이 성서와 초대교회의 원형을 회복하고자 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초대 교회의 예배가 설교와 성만찬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확인케 되었고, 오늘의 현대 교회는 이 둘의 조화와 균형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예배에 있어 서 설교와 성만찬은 별개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복음 선포로서 이해되고 실천되어야 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성만찬의 교류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과격한 계획을 시도하였던 쯔 빙글리의 영향을 받아 한국교회는 그 동안 성례전 없는 예배를 시도해 왔고, 오직 말씀만 을 강조하는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토록 소중한 성례전을 일년에 일, 이회로 그쳐 한국 개신 교회는 어느 나라의 개신교회보다 성례전과의 접촉을 가장 멀리한 채 오 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오늘의 한국 성결교회 예배현장에서도 성만찬이 집례되는 때에도 설교는 설교대로 하고 성만찬 예식은 별개의 예전으로 진행되어 말씀과 성찬이 전혀 연결되어지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또한 심한 경우에는 일년에 단 두 번 행해지는 성찬 예배 때에도 설교의 주제가 성찬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진행되어 도무지 회 중들이 성찬을 왜 하는지 그 이유도 모른 채 형식적으로 앉아 있는 경우도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회중들에게 있어서 성만찬이 곁들여진 예배의 경우는 지루하기만 하고 어색한 예배가 되어버리고 마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새 천년을 맞이하여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성장해 나가야할 한국 교회는 기독교인들의 모든 생활에 가장 중 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예배에 있어서 적어도 주일 예배는 설교와 성만찬이 동시에 선포되 는 것이 바른 모습임을 깨닫고 이를 실천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먼저 성만 찬의 바른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고 기독교 대한 성결 교회의 성찬식 예전 순서와 갱신된 새로 만든 성만찬 예배 순서를 제시하고자 한다.
성만찬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 풀어주시는 은사의 성례전이다 그래서 모든 기독교인들은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함으로 이 구원의 은사를 받게 되는 것이다. 성만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과의 영작 교류를 베푸시며, 그리스도의 약속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모든 세례 받은 자들은 성만찬 가운데서 죄 사함을 보증 받으며(마26:28), 영원한 생명을 약속 받는 것이다(요6:51-58).
이 성만찬의 신학적 의미에 대해서는 그 동안에 다양한 전동과 교리의 차이로 인하여 많은 논란이 있어 왔으나, 지난 1982년에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에서 50년 간의 교회 일치를 위한 연구 끝에 [세례, 성만찬, 교역]이라는 소책자를 내어놓음으로써 성례전의 신학적 의미를 공동으로 고백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1. 성부께 대한 감사로서의 성만찬
항상 말씀과 성찬(떡과 포도주)을 포함하는 성만찬은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선포하는 것이며 또한 찬양하는 것이다. 즉 성만찬은 창조와 구원과 성화에서 완성된 모든 것에 대 하여, 인간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이제 교회와 세계 속에서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모든 것에 대하여, 또 하나님께서 장차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킴으로써 이룩하실 모든 것에 대하여 성부께 드리는 큰 감사인 것이다. 성만찬을 보통 '유카리스트'(Eucharist)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감사'를 뜻하는 것으로서 성찬을 받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 베푸신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일에 대하여 진정한 감사를 드리는 것임을 가리킨다. 그래서 초대교인들은 늘 성만찬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 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저 유명한 2세기의 순교자 저스틴의 [제1변증 서]에서 처음으로 초대교회 성만찬의 개요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 다.
"기도를 마치면 곧 우리는 서로 입맞춤으로 인사한다. 그리고 나서 빵과 포도주 섞인 물 한잔을 형제들의 인도자에게 가져간다. 그는 이것을 취하여서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우주의 아버지에게 찬양과 영광을 돌리며 우리가 그로부터 이것들을 받기에 합당하도록 기도 드린다. 인도자가 감사를 드리고 전 회중이 아멘으로 응답할 때 부제로 불리는 자들이 참석한 사람들 각자에게 신성한 빵과 포도주 섞인 물을 나눠주고 또 그들은 불참 자에게 그것을 가지고 간다"
이렇게 초대교회들은 주님의 만찬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총 앞에 감사와 찬양을 드렸다. 그래서 칼빈은 "주님의 만찬은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하나님의 은사"라고 표현을 하였던 것이다. 결국 성만찬의 첫 번째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선물에 대하여 감사하는 감사의 예전인 것이다.
2.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으로의 성만찬
성만찬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기념, 즉 십자가에서 단번에 완전히 완성되었으며 아직도 온 인류를 위하여 작용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생황과 그 희생에 대한 실제의 표징인 것이다.
여기서 '아남네시스'란 말은 과거의 어떤 일을 회상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이 말은 "과거의 한 사건을 하나님 앞에서 재현함으로써 그 사건으로 하여금 지금 여기에서 효력을 발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개신교에 의해서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던 단순한 기념설로서의 성만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성만찬에 적용된 바 성서에서 말하는 기념이라는 관념은 그것이 전례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에 의해서 의식으로 거행될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현재적으로 효용을 가진다는 것을 말하 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하나의 커다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 것은 바로 오늘 교회가 성만찬을 가질 때에 항상 그의 죽으심과 희생만을 강조하고 기념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성만찬 예배는 항상 무겁고 장례식 같은 어두운 분위기로 일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확인해야 할 것은 우리가 단지 살았다 가 죽어서 기억을 남겨준 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단지 과거 안에 자리잡고 있는 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가 우리를 초대해 주 시고 당신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을 위하여 기꺼이 당신의 식탁을 열어 주시는 메시아적 하나님 나라의 향연의 약속을 선포하는 하나님 백성들의 즐거운 축제로서 성만찬을 행해야 할 것이다.
3. 성령 임재로서의 성만찬
성령은 성만찬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참으로 임재하 게 하시므로 성찬재정의 말씀 가운데 포함된 약속을 성취시킨다. 성만찬에 있어서 그리스 도의 임재는 분명히 그 중심이며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인 것이다. 즉 성령께서는 성만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신앙공동체에 임하게 하시고 성찬재정의 말씀 안에 포함된 모든 약속을 성취 시키는 것이다. 또한 성령은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례전적 상징이 되도 록 하시며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게 하는 것이다. 이 를 통하여 교회는 새로운 창조의 생명과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확증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만찬의 전체 행위는 하나의 성령 임재의 기도의 성격을 지닌다. 왜냐하면 이 렇게 성만찬은 성령의 역사 하심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시대 이후 성만 찬 예전에서 성령초대의 기도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왔고 이 기도는 빵과 포도주와 공동체의 성령이 임재하기를 기원하는 기도였다. 그러므로 집례자는 성만찬 예배시에 성 령의 역할에 대한 설교를 함으로서 성만찬의 의미를 더욱 강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4. 성도의 교제로서의 성만찬
교회의 생명을 양육시키는 그리스도의 성만찬 때의 교제는 곧 교회가 되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교제를 의미한다. 한 장소에서 하나의 빵과 공동의 잔을 나눈다는 것을 어느 때 어느 곳에라도 거기에 참여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그들의 동참자들과 하나됨을 말해 주며 그러한 효험을 가지는 것이다. 즉 성만찬의 본질중 한가지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 지체를 이룬 무리들이 동일한 신앙 속에서 삶의 내용과 방향을 같이 한 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하나의 결정체를 이룩하는 특수한 공동체 가 형성되어 진다는 것이 바로 성만찬의 독특한 면인 것이다. 성만찬의 또 하나의 명칭인 '커뮤니온 서비스'는 바로 이런 성도의 교제를 나타내주는 단어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임을 강조하고 있는 바울의 서신(고전10:16-17, 11:17-22)등에서 그 신학적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는 바로 이 성만찬 가운데서 완전히 나타나 진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발생과 계속적인 성만찬의 거행은 바로 이런 깊 은 뜻의 실현이 가져온 결과적 현상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만찬 의식은 항상 전 교 회와 관계되면 전 교회는 각 지역의 성만찬 의식과 연관된다. 즉 성만찬 예전은 개 교회 를 중심한 개체적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어디서나 성만찬을 거행하는 무리들 은 동일한 그리스도의 지체인 것이다. 그래서 성만찬의식은 하나님의 한 가족 안에서 형 제들과 자매들로 간주되는 모든 사람들간의 화해와 참여를 요청하며 사회적, 경제적, 정 치적 삶에 있어서 적절한 관계를 추구하기 위한 하나의 계속적인 도전인 것이다. 그리하 여 결국 성만찬은 삶의 모든 양상을 포괄하게 되는 것이다.
5. 하나님 나라의 식사로서의 성만찬
마지막으로 성만찬은 창조의 종국적인 갱신으로서 약속된 하나님의 통치를 대망하도록 해주며 또한 그것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즉 성만찬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축제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함을 축하하고 예상하는 축제이다.(고전11:26, 마26:29) 그러므로 성만찬은 이미 현현된 하나님 나라와 장차 올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열어 주고 하나님이 통치하는 종국적 왕국의 잔치를 미리 경험케 하는 식사인 것이다. 한스 큉 은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현현해 주는 귀한 예전임을 이렇게 표현 하고 있다."과거의 관점에서 주의 만찬은 회상과 감사의 식사이다. 현재의 관점에서 주의 만찬은 교제의 식사요 언약의 식사이다. 미래의 관점에서 주의 만찬은 메시아의 종말적 식사에 대한 예견이다."
우리는 복음서에서도 성만찬을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메시아의 향연의 예견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막14:25, 눅22:16-18)을 알게 되는데 진실로 성만찬은 종말의 기쁨과 영광 중에서 함께 나누는 하나님 나라의 식사의 예표인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독교성만찬이 갖는 의미는 그것이 창조와 구속의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의 제사요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며 또한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제사요 성령을 초대하는 것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인 성도들의 교제임을 또한 하나님 나라의 메시아적 향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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