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란! 예배 기타!!!

교회의 역할과 사명

하나님아들 2024. 4. 29. 08:49
교회의 역할과 사명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위에는 거리마다 골목마다 십자가 달린 건물이 여기 저기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제는 길을 가다가도 수없이 눈에 띄는 것이 식당과 옷가게 커피 집과 함께 십자가 달린 건물이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대단위 아파트 단지에도 빠짐없이 들어서는 것은 복덕방, 슈퍼마켓 그리고 십자가가 달린 건물이다. 이 건물을 사람들은 교회라고 부른다. 바로 이 교회가 기독교의 상징이 되고 있다. 이 교회가 우리 나라에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약 백년 전부터인데 우리 나라의 근대화에 지대한 공헌을 해왔고 지금도 우리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은 일부 교회들이 사회에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런 교회들을 보고 실망한 사람들이 교회로 상징되는 기독교에 등을 돌리기도 한다. 우리들의 삶의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실제로 교회가 무엇이며, 무엇을 하는 곳이며,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지 또한 우리 사회에 왜 교회가 필요한지에 대해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기에 기독교의 겉모습만 보고 등을 돌리거나 아예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것은 그릇에 약간의 흠이 있다고 그 안에 있는 보물이 무엇인지 알아 볼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느낄 수 있는 안타까움이다.

이 장에서는 우리 삶의 자연스런 부분이며 우리 사회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매김 되어있는 교회를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어느 한 종교의 입문서도 아니고 위대한 사상을 소개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이 장을 읽으면서 종교적이나 철학적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사실을 인정하고 이해하려는 열린 마음만 있으면 충분하다.


1. 교회란 무엇인가?

1.1. 원어의 의미

교회라는 말의 영어(church)나 독일어(kirche) 단어들은 본래 그리스어 큐리아코스(kuriakos)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는데 그 뜻은 "주께 속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교회라는 말을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말이 생겨난 성경에서 원어를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구약성서에서는 교회를 카할(qahal)이라는 히브리어로, 신약성서에서는 교회를 에클레시아(ekklesia)라는 고전 그리스어를 사용하였는데 두 단어는 본래 종교적, 사회적 집회(集會)를 뜻하는 포괄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특히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이란 의미로서 본래 고대 희랍 도시국가 시대에는 시민모임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그 말이 성경에 사용되면서 교회, 즉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아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 공동체"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1.2. 성경적 의미

성경은 교회의 본질에 관해 여러 가지를 보여주고 있으나 그 중에 대표적인 특성 세 가지를 간략히 생각해 보기로 하자.

1)하나님의 사람들

"내가 그들과 함께 살며 그들과 함께 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고린도후서 6장 16절).

교회는 본질적으로 건물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의미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서 구성되고 존재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하나님은 그들(교회) 에게 속해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차적인 존재이유는 "사람들"이며 존재의 궁극적 목적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심어주고 그 생명이 자라게 하여 "하나님의 사람들"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헨드릭 크래머(Hendrick Kraemer)라는 신학자는 교회의 본질적 주체가 되어야 할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냉동된 자산"이 되어 있다고 말했다. 교회가 "사람들"의 존재와 가치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정립하고 그들의 "냉동된 자산"을 일깨워 "활동하는 자산"으로 변화시킬 때 교회는 비로소 그 사회에 진리의 빛을 비추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2)그리스도의 몸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은 그 몸의 각 지체입니다"(고린도전서 12장 27절).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예수님은 이제 이 세상에 육신의 형체를 가지고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고자 할 때에는 예수의 몸이 되어 그 일을 대신 해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무언가 말씀을 해야 할 때에는 예수의 입이 되어 그 말씀을 전할 사람이 있어야 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려고 할 때에는 그분의 손과 발이 되어 그 일을 대신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그 일을 대신할 사람이 있어야 하고, 병든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의사가 필요하며 사람들을 교육하기 위해서 그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필요하다. 예수께서는 이 모든 일을 예수의 몸이 되어 대신 해 줄 사람들을 모으셨는데, 이 공동체를 가리켜서 "교회"라고 부른다. 예수께서는 그 교회에 자신의 영(성령)을 불어 넣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지닌 자신의 몸으로 만드셨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예수의 영을 지닌 예수의 몸이 되었으며 그 교회에 속한 모든 교인들은 제각각 그 몸의 지체가 되었다.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교회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사상이다. 왜냐하면 우리 몸의 특성을 이해함으로 교회의 특성도 쉽게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몸은 여러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다음의 세 가지 대표적인 특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1) 다양성(diversity)

"몸은 한 지체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고린도전서 12장 14절).

우리의 몸은 하나이지만 우리 몸에는 눈, 코, 입, 손, 팔, 다리, 발과 같은 다양한 지체들이 각각 독특한 기능을 가지고 다양하게 활동한다. 이 다양한 기능 중에 어느 한가지라도 멈추게 되면 몸은 당장 이상이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지체가 위치와 모습과 기능은 서로 달라도 그들의 존재가치는 몸에게 있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의 교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들이다. 예수께서는 이들에게 성령을 통해 각각 다양한 은사(恩賜: Spiritual Gift)를 부어 주셨다. 어떤 이에게는 눈의 기능을, 다른 이에게는 입의 기능을 또 어떤 이에게는 손과 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교회 안의 모든 지체들에게 다양한 재능을 부어 주셨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생존하고 정상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지체인 교인들이 각자 자신이 받은 은사가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자신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해야 한다. 다양한 은사의 궁극적인 목적은 교회의 대내외적 활동, 즉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개혁해 나가는 사명과 책임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다.

다양성에서 중요한 것은 타인의 독특성과 개성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성과 기능의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는 그 다양성의 넓이와 깊이만큼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체주의적이고 획일적인 사회는 다양하게 발전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가 지니는 다양성은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시사하는바가 크다.

(2) 조화성(harmony)

"하나님께서는...몸의 조화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몸 안에 분열이 없이 모든 지체가 서로 도와 나갈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2장 24-25절).

몸이 지녀야 하는 다른 중요한 특성은 조화 또는 상호성이다. 몸의 지체들이 독특하고 훌륭해도 그 지체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그 몸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병들게 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의 구성원들 사이에 의견의 불일치로 인한 불화와 다툼, 대화의 단절과 같은 일들이 자주 발생하여 지체사이의 원활한 흐름이 막히게 되면 교회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 모든 지체의 상호 필요성이 존중되고, 지체사이에 활발한 교제가 이루어져야 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돌보는 정신이 교회 안에 있어야 한다. 교회의 이러한 조화성은 우리 사회에도 필요하다. 사회의 다양한 제도, 신분, 직업, 계층에 대한 상호 필요성에 대한 인식과 존중, 그리고 이들간에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는 사회는 다양하게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직업이나 신분사이에 편견이나 불화로 인해 상호 교류가 막혀 버리면 그 사회는 사회 구조가 불균형하게 발달함으로 조화가 깨지고 불안정한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1) 연합성(unity)

"지체는 많아도 몸은 하나입니다"(고린전서 12장 20절).

인간의 몸은 따로 따로 떨어진 조각들의 모임이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기능적인 지체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몸이다. 이 연합이 없이는 인간의 몸은 기능하지 못함은 물론 존재할 수조차 없다. 우리 몸 중에서 눈이 손에게 "너는 내게 필요 없다"고 하거나 머리가 발에게 "너는 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들을 잘라 버리면 그 지체들은 죽어 버리고 그 몸은 불구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립과 분열은 몸을 죽이는 독소이며 연합은 몸을 살리는 본질적인 힘이다. 연합을 통해서 몸의 다양한 지체들은 그들의 기능과 역량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 교인간의 친밀한 협동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의 나눔이 이루어지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교인들의 연합이 이루어 질 수 있다. 이러한 교회의 특성은 인간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 사회에 아무리 유능하고 특출한 인물이 많을지라도 그러한 특출한 능력들이 사회적 기능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기 위해서는 사회 안의 다양한 요소와 계층들을 연합시키는 사회적 기능이 발달되어야 한다. 국민들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위해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고 국민들의 자유로운 사회 참여를 위해 다양한 대중문화가 개발되어 자유로운 만남의 기회가 마련되어야 하며 종교, 정치, 사회, 문화의 다양한 분야들간의 협력관계가 적극적으로 모색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에 사회의 모든 요소들이 원활한 교류를 통해 조화와 연합을 이루어 기능이 극대화되며 안정된 사회를 이루어 나갈 수 있다.

이렇게 교회는 하나의 작은 이상사회(理想社會)로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교회가 존재하는 곳에 이상적인 사회가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인류역사를 돌이켜 볼 때 이천여년 동안 기독교 정신의 영향을 받아온 서양사회에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안정된 사회가 실현될 수 있었던 사실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라고 할 수 없다.

4)성령의 성전(The Temple of the Holy Spirit)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 계신다는 것을 모르십니까?"(고린도전서 3장 16절).

기독교의 교회가 다른 사회단체와 구별되는 가장 독특한 점은 성령의 존재와 그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발생은 이천여년 전 예루살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대교의 큰 명절중 하나인 오순절 백이십여명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모여 있었다. 그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성령(聖靈)이 그들 위에 강림하였다. 성령의 충만을 받은 그들은 새로운 능력을 부여받았고 그 능력에 의해 그날 삼 천명의 새로운 신자들을 얻게 되었다(사도행전 1:12-2:13). 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곧 기독교의 교회가 탄생되는 역사적 사건이다. 교회는 이렇게 성령에 의해 세상에 태어났고 그 성령은 계속해서 교회 안에 또한 모든 교인들 안에 존재하면서 활동하고 있다.

교회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계시고 활동하는 곳이기 때문에 언제나 거룩하게 유지되어야 하고 성령의 이러한 활동의 외적 결과들이 교인들의 삶을 통해 밖으로 나타나야 한다. 성경은 성령활동의 외적 결과들을 "성령의 열매"라고 부르는데 그 열매들은 "사랑, 기쁨, 평안, 인내, 친절, 선을 행함, 신실함, 온유, 절제"와 같은 덕목들이다. 교회와 교인들이 성령의 능력을 받고 그 지시를 따라 살게 되면 그들의 삶 속에 이러한 열매들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러한 고상한 덕목들의 존재여부가 그 교회와 교인의 삶의 순수성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진정한 평가기준은 외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성경이 제시하는 내적인 기준들, 즉 성령의 열매가 그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신앙적인 삶을 통해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의 질과 가치를 높이는 일에 기여해야 할 책임과 사명이 있음을 의식하여야 할 것이다.


2. 교회의 목회적 기능은 무엇인가?

2.1. 복음전도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복음 28장 19절).

어느 바닷가에 작은 마을이 있었다. 마을 인근의 바다에는 험한 암초들이 솟아 있어서 지나다니는 배들이 난파되는 사고가 종종 일어나곤 했다. 언덕 위에 등대가 하나 있었지만 악천후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를 못했다. 어느 날 마을의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마을의 제일 높은 언덕 위에 초라하지만 해난 구조소를 세우고 구조작업을 펼쳤다. 이 마을의 해난 구조대에 관한 소문은 곧 널리 퍼지기 시작했고 많은 기금과 자원 봉사자들이 모여들었다. 그 해난 구조소는 늘어나는 자원 봉사자들을 더 이상 수용할 수가 없어 적립된 기금으로 새로운 해난 구조소를 신축하고 대원들을 위한 오락시설도 마련하였다. 회원들이 더욱 늘어나면서 회원들의 친목을 도모하는 사교행사가 빈번하게 개최되었다. 그렇게 되자 그들의 본연의 업무인 인명구조에 대한 관심은 점점 시들어 가기 시작했고 해난 구조대는 서서히 회원들의 사교클럽으로 모습이 바뀌어 갔다. 그렇게 되자 몇몇 의식 있는 회원들이 사교클럽으로 변질된 그 해난 구조대를 탈퇴하고 그곳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바닷가에 다시 새로운 해난 구조단을 세웠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명령은 "가서 모든 민족으로 내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었다. 기독교의 구원사역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그 중 한 가지는 누군가가 인간들의 죄를 대신 지고 죽는 일이다. 그 일을 예수님이 대신 하셨으므로 인간들은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죄의 값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 구원사역의 두 번째 요소는 세상에 나아가 이 기쁜 복음의 소식을 널리 선포하는 것이다. 이 두 번째 사역이 바로 예수께서 교회에게 맡긴 사명이다. 예수께서는 또한 제자들에게 "성령님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행전 1:8)라고 말씀 하셨다. 교회의 복음전도는 자신의 안방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은 국경을 넘어 땅 끝까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의도이다. 현재의 기독교는 이천년 기독교의 헌신적인 선교의 결과이다. 한국 기독교의 눈부신 발전은 100년 전 서양교회들의 헌신적인 선교가 밑거름이 되었다. 선교는 교회의 존재 이유이며 또한 목적이다.

2.2. 교육과 훈련

교회의 두 번째 중요한 기능은 복음을 받아드리고 그리스도인이 된 교인들을 신앙적으로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일이다. 교회의 교인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들이 교육받고 훈련되지 못하면 그들은 다만 냉동실 안의 냉동된 자산에 불과한 것이다. 교회 안의 모든 교인들이 신앙적인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그들의 가슴속에 기독교의 고상한 가치관을 확립하게 될 때 그들의 삶이 바뀌고 그들이 속한 사회가 변화되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된다.

어린 아기들의 모습은 모두 아름답고 귀엽다. 그러나 그들이 성장하면서 어떠한 가치관을 따라 사느냐에 따라 히틀러도 될 수 있고 테레사 수녀도 될 수 있다. 가치관은 삶의 방향과 질을 결정해주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가치관을 가져야 하느냐는 문제는 인간에게 너무도 중요한 과제이며 그러므로 교회 교육과 훈련의 영원한 화두가 되어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지녀야할 가장 고상한 가치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린도전서 13장 13절). 교회의 교육과 훈련은 이 가치관이 궁극적 목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1)믿음(faith)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신념을 가지고 살아간다. 히틀러는 자신의 신념대로 육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했으며 테레사 수녀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인도의 캘커타 빈민굴에서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다가 그의 삶을 마쳤다. 신념은 귀중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신념은 상대적이고 변화하며 잘못되어질 수도 있다. 히틀러나 김일성 주체사상가였던 황장엽씨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기에 우리들에겐 절대적이며 영원한 가치를 지닌 신념이 필요하다. 절대적이며 영원한 가치는 절대적이며 영원한 존재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 그러한 신념을 신앙이라고 한다. 테레사 수녀의 신념이 바로 그러한 신앙이다. 이러한 믿음의 고상한 가치관을 지니고 살아갈 때 인간은 비로소 세상적인 모든 것을 객관화 할 수 있게 된다. 세속적인 것을 절대가치화 할 때 인간은 절대 부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 인간의 영혼과 사회적 삶의 부패와 죽음을 막아주는 생명력 그 자체이다.

2)소망(hope)

단테의 신곡에 보면 단테를 안내하던 베르길리우스가 지옥에 이르러 그곳은 죽을 수 있는 희망조차 없는 곳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소망이 없는 현실의 삶은 지옥과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들에겐 본능적으로 미래를 바라는 소망이 있다. 그것은 각국의 작별인사말에 잘 나타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헤어질 때 "다시 보자"(see you again)든지 "내일 만나자"고 인사를 나눈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기대와 소망을 보여준다. 인간에게 있어 소망은 오늘을 살아가는 힘이며 역경을 견디고 이기게 하는 원동력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기대와 소망은 종종 실망과 좌절을 가져온다. 그 기대와 소망이 세상적인 조건이나 약속 같은 것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조건과 약속은 항상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확실하고 변치 않는 소망은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해야만 한다. 그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꿈과 비전과 소망이 있을 때 인간은 오늘의 장애를 넘어 미래 지향적인 삶을 살 수 있다.

3)사랑(love)

위를 바라보는 믿음과 앞을 바라보는 소망은 우리의 삶을 고상하게 해주는 귀중한 가치들이다. 그러나 그 두 가지만으로는 우리의 삶이 아직 이기적이요 자기 중심적이 될 수밖에 없다. 믿음과 소망의 가치가 진정으로 고상한 가치가 되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계명은 첫째,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고 둘째,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이것을 경천애인(敬天愛人)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아간다. 그 사랑의 대상이 부모, 자녀일 수도 있고 친구 혹은 이성일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들의 사랑은 대부분이 "때문에"(because of)의 사랑이다. 부모이기 때문에, 친구이기 때문에, 마음에 들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사랑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despite)의 사랑이다. 그 사랑은 상대방의 어떠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주어지는 자기 희생적 사랑이다. 이 사랑이 예수께서 보여주신 사랑이며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랑이다. "불구하고"의 사랑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때 비로소 흘러나올 수 있다. 테레사 수녀의 사랑이 바로 그러한 사랑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사랑의 사명이 주어져 있다. 교회는 교육과 훈련을 통해 교인들을 사랑의 제자들로 만들어야 하고 그들을 통해 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사랑과 평화의 나라로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사랑과 평화가 있는 곳,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2.3. 예배

교회의 다른 기능은 예배이다. 교육과 훈련이 교인들의 삶의 질에 초점을 두는데 비해 예배는 그들의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에게 초점을 두는 것이다. 기독교에 있어 예배란 신앙의 불가결한 표현이다. 그것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하나님의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예배는 예배자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기독교에 있어서 예배는 또한 인간의 삶 그 자체이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의 예배가 수평적인 관계 즉, 나와 너의 역동적인 만남의 관계로 표출되어져야만 한다. 사도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예배는 삶과 분리되어질 수 없는 전인적인 드림을 의미한다. 교회가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그들의 삶 전체가 드림의 예배가 될 때 교회는 진정한 진리의 등대가 될 수 있다.


3. 교회의 사회적 기능은 무엇인가?

기독교의 신앙은 삶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신앙은 곧 삶이요 삶은 곧 신앙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신앙적 삶은 사회적 삶과 분리되어 질 수 없다. 여기에 바로 교회의 사회적 기능의 중요성이 있는 것이다. 교회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서 성경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살펴보자.

3.1. 샬롬(평화)사상

"그리스도의 평안이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평안을 위해 여러분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골로새서 3:15)

신약성경의 세 번째 책인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태어나시던 첫 번 성탄절 밤에 천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 메시지를 선포하는 장면이 나온다.

"가장 높은 하늘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에게 평화!" (누가복음 2장 14절)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목적은 첫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둘째, 그를 고대하던 땅위의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한 것임을 천사들의 메시지는 의미하고 있다. 평화란 말은 히브리어로 샬롬(shalom)이라고 한다. 이 단어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구원(이사야 53:5), 내적 평안(시편 4:8 ; 요한복음 16:33), 건강(창세기 37:14), 안전(사무엘하 17:3), 번영(이사야 48:18), 복지(창세기 41:16 ; 43:28), 평화(마태복음 5:9)와 같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 복합적 단어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평화는 바로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샬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땅위에 계시는 동안 이 샬롬을 전하셨고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남아있는 제자들로 하여금 교회를 세워 이 샬롬의 사역을 계속하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면서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에게 평안을 주고 간다. 이것은 내가 너희에게 주는 내 평안이다.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르다"(요한복음 14:27)고 말씀 하셨다. 초기 기독교 교회의 지도자였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평화를 위해 여러분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라고 샬롬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오늘날 현대 교회는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종교집단으로 급속히 변질되어 가고 있다. 교회의 설립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위임하신 샬롬의 사명을 소홀히 하고 개인의 축복과 교회의 권익을 보호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늘어나고 있지만 교회의 사회적 기능인 샬롬의 확장을 위해서는 적극적인 기여를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교회는 그러므로 복음전파를 통한 개인의 영적 구원과 내적평안은 물론 사회적 안전과 번영, 복지와 건강, 이웃과의 화평을 위해 그 사회적 기능을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할 것이다.

3.2. 소자(小者)사상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요...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다"(마태복음 25:40, 45).

소자사상은 곧 "작은 자 생각"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특권과 영광을 포기하시고 이 땅에 오셔서 33년간의 그의 삶을 죄인들과 병들고 굶주리며 소외당하는 작은 자들과 함께 사셨다. 자신의 죽음을 목전에 둔 어느 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 날의 심판에 대한 강론을 하셨다.

"내가 영광 중에 모든 천사들과 함께 와서 내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을 내 앞에 모으고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 사람들을 갈라놓아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세울 것이다. 그때 왕이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너희를 위해 준비된 나라를 물려받아라. 너희는 내가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 집으로 맞아들였고 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 간호해 주었으며 갇혔을 때 찾아 주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의로운 사람들이 "주님, 언제 우리가 주님의 굶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또 언제 우리가 주님의 병드신 것을 보고 간호해 드렸으며 갇혔을 때 찾아갔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 왕은 그들에게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너희가 이들 내 형제 중에 아주 작은 자 하나에게 한 일이 바로 내게 한 일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받은 사람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 부하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 집으로 맞아들이지 않았고 벗었을 때임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병들고 갇혔을 때 돌보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주님, 언제 우리가 주님이 굶주리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갇히신 것을 보고 돌보지 않았습니까?"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 왕은 그들에게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너희가 이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일이 곧 내게 하지 않은 일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는 곳에 의로운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에 들어 갈 것이다."(마태복음 25:31-46)

예수님의 소자사상에 의하면 우리의 이웃은 모두 작은 예수들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취하는 관심과 행동이 곧 예수님에게 하는 것이 된다. 예수님은 또한 크게 되고 싶은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 싶은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 하셨다(마가복음 10:43). 공자님은 제자들이 평생의 좌우명이 될 교훈을 가르쳐 달라고 청했을 때 "己所不慾 勿施於人(기소불욕 물시어인)"이란 말씀을 들려주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다른 이에게 행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다른 이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성숙하고 고상한 사랑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남에게 먼저 베푸는 적극적인 자세를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소자사상이다. 그러한 사랑의 모범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며, 산길에서 강도 만나 신음하는 나그네를 구출해준 선한 사마리아인이며, 인도의 캘커타에서 빈민들을 위해 헌신한 테레사 수녀의 삶인 것이다. 오늘날 자기 중심적 이기주의가 팽배한 현대 사회에서 예수님의 소자사상은 더불어 살아가는 복지사회 구현을 위한 기초석이 되어야 하며 교회는 이 예수님의 소자사상을 실천하는 신앙 공동체로서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 할 것이다.

3.3. 빛과 소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런데 그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어떻게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취게 하라."(마태복음 5:13-16)

교회에게 주어진 또 다른 중요한 사회적 기능은 빛과 소금의 역할이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며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빛은 어둠을 밝히고 모든 사물을 올바로 볼 수 있게 한다. 오래 전 뉴욕 시에 정전사고가 일어난 적이 있었다. 도시가 암흑으로 변하자 온갖 약탈과 절도, 강도 사건이 일어났다. 긴급 수리 후에 다시 전기가 들어왔을 때 뉴욕 시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빛은 인간의 양심을 지켜주지만 어둠은 인간의 양심을 마비시킨다. 교회는 사회의 불의와 타락에 대하여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구약성서의 선지자들은 그 사회의 불의와 타락에 대해 맹렬히 비판하였다. 신약성서의 세례요한은 당시 헤롯왕의 죄악을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그로 인해 죽음을 당하기까지 하였다. 사회의 불의와 타락에 대해 책임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적 기능이다. 교회가 이 기능을 소홀히 하게 될 때 사회는 급속히 부패할 수밖에 없다. 이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교회는 먼저 교인들이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정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계속적으로 영적 훈련을 통해 고상한 가치관을 정립 시켜야 할 것이다. 기독교인 각자가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정의롭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은 곧 불의와 죄악에 대한 비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빛과 소금의 역할은, 죄를 짓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죄악과 불의를 방지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궁극적으로 전 인류의 구원과 축복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개인의 구원과 축복은 물론 그들이 속한 사회에 대해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을 기우려야 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고 말씀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 인간들이 추구하는 낙원은 정치나 사회제도, 조직의 개혁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하고 그 사랑 안에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가 될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이 소중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교회는 오늘도 문을 활짝 열고 이웃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1. 교회의 성경적 의미를 현대사회에 적용해 보시오.

2. 교회가 가르쳐야할 기독교적 고상한 가치는 무엇이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3. 샬롬사상을 현대사회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4. 예수의 소자사상이 한국사회의 과거에 어떻게 기여하였으며 현재와 미래에 어떻게 기여해야 할 것인가?




김진호. 예배. 예수전도단,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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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순 (강남대학교, 교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