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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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아들 2012. 11. 26. 00:21

역사의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 


                                                                     요약: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경영학과 이태영

 

제 1편. 예수의 역사적 배경

1. 중간시대의 역사

예수는 유대인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유대인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여호수아, 곧 '야훼가 도움이시다'를 뜻한다. 유대교의 역사는 바빌론 포로시대와 함께 시작한다.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정복한 후, 유대인은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사마리아와는 불화로 왕래가 없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집권할 때도 별 충돌없이 지내왔으나 알렉산더 대왕 사후, 후계자들의 정권투쟁으로 희랍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유대인들의 희랍의 문물에 대한 반응도 가지각색이었다. 하스몬 왕가는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였다. 그러나 하스몬 왕가도 죽고 죽이는 세력다툼에 휘말렸다. 또한 하스몬 왕가는 다른 민족을 강제로 유대교化 시켰으나 유대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예수는 헤롯의 통치기간 말기에, 세례 요한과 같은 시기에 태어났다. 여기까지가 이스라엘 민족의 중간사이다.

2. 예수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

팔레스틴 전역을 통치하고 있던 헤롯 왕은 그의 생애 말기에 후계자를 정하고자 하였다. 죽기 직전 유서를 통하여 그는 자기의 왕국을 다른 세 아들에게 나누어 준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땅을 다스리는 왕을 가장 미워하였다. 예수가 살던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적 상황은 매우 불안하였고, 로마제국의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탄압과 착취, 로마와 결탁한 이스라엘 지도층의 횡포와 매국적 행위에 분개한 백성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수많은 농민들이 빈곤에 찌들리고 빚을 갚을 수 없게 되자 농토를 포기하고 산적의 무리에 가담하였다. 그들은 기회가 있을때마다 로마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로마 황제는 장군들을 보내어 반로마 혁명을 진압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였고 그 흔적도 없애버렸다. 그 후 유대인들은 1813년동안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 그 당시의 이스라엘 사회는 불안하였고 경제적으로 매우 빈곤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는 소수의 권력층과 갈릴리의 대지주들은 부유한 생활을 하였다. 직업에 귀천이 있었고 많은 세금과 고리대에 많은 사람들이 시달렸으며, 수직적인 신분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백성들은 억압과 소외를 견디지 못하여 도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3. 예수 당시의 종교적 상황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배타적 유대주의를 세우기 시작한다. 그들은 야웨 하나님만이 참 신이요 그들은 야웨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모든 다른 백성들과 구별된다고 확신하였다. 그들은 성전을 재건하고 율법을 강화하였다. 성전의 대제사장은 막강한 권한과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율법은 계약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이었고, 성전은 야웨의 '집'이었다.
예수가 생존하던 당시 유대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일군의 사람들은 사두개파였다. 그들은 율법의 글자 자체의 뜻을 고집하였다. 그리고 더 엄격하게 안식일을 지킬 것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모든 정치 권력자들을 인정하였다. 이에 반해, 바리새파는 율법을 정확하게 지키고자 했다. 특히 그들은 정결과 십일조의 계명을 엄격히 지켰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은 물론 율법의 해석까지 외우고 지키게 하며, 지키지 않는 이는 무조건 죄인으로 간주하였다. 한편, 젤롯당원들은 '철저히 자유를 지켜야하며 하나님만을 그들의 주와 왕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로마황제에 대한 복종을 거부한다. 그들은 폭력을 불사하는 적극적 행동을 선호하고 그의 표시로 단검(sica)을 지니고 다녔다. 그리고 엣세나파는 세속과의 관계를 피하면서 경건한 생활을 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작은 마을에 모여서 공동생활을 하였다. 쿰란 공동체는 속세로부터 도피하는 은둔생활을 하고, 이원론을 주장하며 엄격한 율법주의와 금욕생활, 엄격한 계급제도와 상급자에 대한 복종을 강조한다. 서기관들은 모세의 율법을 보존하고 가르치며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랍비'가 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묵시사상을 출현시켰다. 묵시사상은 이원론적 역사이해를 가지고, 비관론적이며 결정론적 세계관을 가진다. 메시아의 오심과 최후의 심판을 믿으며 그 후에 온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다. 시간의 수를 계산하고 이 시대의 역사가 끝난 다음에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며, 하나님이 역사의 주(主)이심을 믿는다. 이로서 묵시사상은 유대교의 민족주의적 한계를 깨뜨려 버린다.

제 3편 사회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6. 예수와 함께 일어나는 하나님의 나라

예수는 세례 요한을 대신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소식을 전하였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자비가 실천되며, 세무원들의 횡포가 없고, 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는 세계다. 예수와 세례 요한은 제도화된 종교 밖에서 활동하였고, 이러한 행동은 제도화된 기성종교에 대한 비판을 가져왔다. 그러나 예수는 심판보다는 용서를 하고, 묵시사상을 무시한다. 그리고 보통사람과 같이 먹고 마신다. 예수가 당한 세 가지 유혹은 그의 메시야적 선포와 활동의 틀을 형성한다. 그는 자기가 누구인가에 대하여는 침묵을 지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면서 공적활동을 시작한다.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표상은 구약으로부터 유래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선포는 묵시사상적, 보편적 메시야니즘의 전통에 속하고, 자기자신과 함께 지금 현재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예수가 행한 병 치료와 귀신추방의 기적은 예수가 누구인가를 보이는 '그리스도적 기능'과,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종말론적 기능', 메시야 예수의 구원이 무엇인가를 해명하는 '신학적 기능', 소외된 자들,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하는 자들의 인간적 가치를 회복하고 그들을 사회로 통합시키는 '사회적 기능', '새 창조의 기능'을 가진다. 하나님의 나라는 씨 뿌리는 자, 고귀함, 잔치, 청지기, 분리, 찾음, 일꾼등으로 비유되고, 이러한 비유는 인간이 취해야 할 태도를 결단케한다. 그것들은 하나님 나라의 사건이고, 예수 자신의 존재가 문제시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다 가지고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와 미래의 긴장관계 속에서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현재적인 것으로 말하는 동시에 미래적인 것으로 말했다. 즉 미래적 현재인 동시에 현재적 미래이다.

7. 하나님 나라의 사회성

예수에게서는 본 훼퍼가 '옥중서신'에서 들었던 종교의 일반적 특징이 부정된다. 그는 철저히 그가 살고있는 세계의 현실 속에서 이 현실의 문제들과 대결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다. 또한 예수는 희년을 선포한다. 희년은 50년째마다 오는 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빚과 노예화, 그리고 자연의 착취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개혁의 프로그램'인 동시에 '생태계의 개혁 프로그램'이다. 즉 메시야적 시간의 시작이요,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 형태이다. 예수는 희년법의 정신에 입각한 정치, 경제, 사회적 개혁을 요구한다. 그는 여러 사회적 관계와 사귐에서 많은 갈등에 빠진다. 하나님의 메시야 예수는 '종교적 존재'인 동시에 철저히 '사회적 존재'이다. 또한 그의 사회적 존재는 철저히 당파적 존재로 나타난다. 그는 인간 영혼의 구원자인 동시에 '생태계의 구원자'이다. 율법에서도 인간 생명의 보호를 기본정신으로 가질 뿐 아니라, 자연의 보호를 그 기본 정신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선포에서도 생태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안식일에서도 자연의 훼손을 중단하라고 말한다.

8. 약한 자의 편에 서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가난한 사람, 즉 약하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전하여진다. 이 기쁜 소식은 지혜 문학적 금언이 아니라 예언가적 부르심과 약속의 형태로 전해진다. 예수는 그들과 친구가 된다. 그는 편파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서로 물질을 베풀며 나누는 세계이다. 그렇다고 예수가 사회주의자나 직업혁명가라고 말할수는 없다. 그는 이데올로기를 따지지 않는다. 소유의 차이는 있으나 부의 과도한 독점이 사라지며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 생존권이 보장받는 사회, 이것이 예수가 목적한 '평지'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계시며 그들의 고난을 함께 나누신다.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는 단지 사회적 조건들의 변화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함께 일어난다. 예수가 말하는 마음의 가난은 소유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하나님은 여자와 어린이에게도 관심을 가진다. 여인들의 섬김을 받는 동시에 여인들을 섬기는 예수의 사역은 이혼금지 명령에서 철저화된다. 그는 남자가 여자를 하나의 물건처럼 취급하는 것을 금지하며 여자들의 존엄성과 권리를 보호한다. 또한 그는 여자들 가운데 가장 천한 여자들을 가장 높은 자리에 세웠다. 예수는 어린이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명령한다. 이 명령은 어린이의 권리와 존엄성에 대한 예수의 인정이다.

9. 회개와 죄 용서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회개는 하나님의 나라가 앞당겨 오는 가운데에 있는 삶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동시에 각 사람의 거듭남, 곧 회개를 요구한다. 회개는 하나님 없는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의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히 사회, 정치적 개혁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는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예수가 요구하는 회개는 먼저 하나님을 자기의 생명과 온 세계의 주(主)로 승인하고 그에게 자기의 삶을 맡기며 이웃을 자기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삶으로 전환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의 여러가지 윤리적 명령의 핵심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데 있다.

예수는 개인의 죄를 전제하고 있으며 죄를 용서하는 분으로 행동한다. 그런데 예수는 죄가 무엇인가에 대해 보편적, 절대적 정의를 말하지 않는다. 인간의 수 많은 죄는 그 사회의 불의한 체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수는 죄된 행위만을 보지 않고 인간의 죄된 본성과 마음을 보신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위에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의 변화와 사회의 변화를 동시에 요구한다. 예수는 죄의 용서와 함께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선다. 그는 모든 죄를 용서한다. 세리와 창녀의 죄도 용서한다. 그러나 부유층의 죄는 낱낱이 밝힌다. 이러한 예수의 죄 용서는 당시 이스라엘 사회 지배층 사이에 갈등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10. 하나님 나라의 물질성

하나님의 나라는 말씀만 있는 곳이 아니라 물질이 있는 곳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굶주림이 없는 세계이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 배고픔의 서러움을 당하는 사람이 먹을 것을 얻으며 그들의 서러움을 위로 받는 곳이다.예수는 그들과 함께 식사한다.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공동체 의식과 삶을 함께 나눔을 뜻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구원의 물질적 차원을 시사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잔치 혹은 만찬에 비유한다. 우리는 성찬식의 역사적 근원을 최후의 만찬에서는 물론 죄인들과 세리들과의 만찬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와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가 앞당겨 일어나는 것을 시사하고, 만찬의 모든 사람들이 한 형제된 새로운 인류의 공동체임을 나타낸다.

11. 하나님 나라의 인간성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세속으로부터 분리된 어떤 종교적인 신비한 특별영역이 아니라, 세속 안에서 인간이 참으로 인간다운 인간으로 변화되고, 인간다운 인간들이 모여 사는 세계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계의 낮은 사람들, 멸시와 천대를 받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새 사람으로 변화하며,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존엄성을 인정받는 세계이다. 또한,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권을 보장하며, 사회의 가치체계를 상대화 시킨다. 우리는 누가 악하고 불의한 자인지 외적행위를 가지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기준은 오늘 여기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에 있다. 의와 불의, 선과 악, 의인과 악인의 분별기준은 사회적 통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 여하에 있다.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지역적 감정과 대립은 물론 인간의 모든 파벌에 얽매이지 않으며, 오히려 이 대립과 분리에 있어서 약한자의 편에 선다. 어디에서 예배를 드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참되게 예배드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예수가 보여주는 하나님의 나라의 인간성은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인간성과 일치한다. 구약의 율법은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자비를 중요한 요소로 가지고 있다. 이것은 안식년과 희년의 계명에서 가장 분명히 나타난다. 이는 하나님의 의지와 상통한다. 복음서의 예수도 먼저 그 사회의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시고 그들의 상실된 인간적 가치와 존엄성을 회복하고자 한다.

12. 사랑의 구체적 실천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사랑은 용서 속에서 구체화된다. 용서는 상대방과 나 사이의 막혔던 담을 허문다. 용서함으로써 상대방과 나는 화해하며 하나가 된다. 용서 속에는 기쁨이 있다. 용서는 상대방을 과거에 묶어두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과 미래를 향하여 열어준다. 그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용서속에 사랑이 있다.
역사의 예수는 섬김을 받는자가 아니다. 철저히 섬기는 자로 나타난다. 참 사람은 자기의 목숨을 내어주는 섬김에 있다. 그의 섬김은 단순히 '말씀의 섬김'이 아니라, 그 사회의 소외받은 자들, 불의한 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용서하고 용납하며 그들의 상실된 가치와 존엄성을 회복하여 주려는 그의 삶에 있다. 예수는 자기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선포한다. 그는 사람들이 소유에 집착하며 결국 소유의 노예가 되는 것을 경고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기의 소유를 얼마나 많이 베푸느냐에 있지 않고, 자기 마음이 어디 있느냐에 있다. 예수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자기를 비우고 포기하며 하나님에게 자기를 완전히 내어 맡기는 것이다. 사랑의 궁극적 형태는 자기 포기에 있다.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속에서 철저한 자기포기와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신뢰를 나타낸다.

예수는 사랑의 구체적 실천을 요구한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요 목적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그 속에 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예수는 사랑을 궁극적으로 실천한다. 그것은 우리의 허물과 죄에 대한 무한한 용서이다.


제 4편 종교와 하나님의 나라

13. 종교의 형식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나라

예수는 그 당시 종교들이 지킬 것을 요구하는 종교적 관습을 상대화 시킨다. 종교의 형식들은 그 자체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며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기 위하여 존재한다. 이 목적 앞에서 종교적 형식들은 절대적 의미를 상실한다. 또한 예수는 율법을 상대화 시킨다. 예루살렘 성전과 제의를 상대화 시키고, 믿음과 기도와 용서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혈통, 의와 불의의 판단기준도 상대화한다. 하나님과 이웃앞에서 겸손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의 의와 자비를 실천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는 불의하고 불경건하며 선택받지 못하였다고 하는 자에 대한 사회적 억압과 소외를 철폐하며, 비인간화된 자들의 인간화와 비인간화된 사회의 인간화를 꾀한다. 예수가 말하는 구원이란, 그 사회에 통용되는 기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나타나는 회개와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을 믿음에 달려있다. 예수는 엣세네파, 쿰란 공동체처럼 속세와 분리되지 않고, 이원론적이지 않았으며, 엄격한 율법과 금욕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냥 보통 사람들처럼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았다. 이렇게 종교의 형식들을 상대화시킨 원인은 무엇일까? 그 당시에는 종교의 내용보다는 종교의 형식이 너무 비대하였다. 참 의미보다는 형식, 관습, 율법등에 더 많은 비중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고통받고 있었다. 이에 예수는 종교적 형식, 관습등을 상대화시킴으로써 소외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 그들의 상실된 인간적 가치와 존엄성을 회복하게 하였다. 즉, 인간해방의 사건이요 비인간화된 사회를 인간화시킨 사건이다.

14. 율법을 완성하는 하나님의 나라

율법의 근본목적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깨닫게 하는데 있지 않고, 인간을 위시한 모든 피조물의 평화로운 삶의 세계를 실현하는데 있다. 구약의 율법은 작은 자, 연약한 자, 고통을 당하는 자의 입장에서 쓰여졌다. 그러나 유대교는 율법의 본래 목적을 망각하고 그릇된 율법주의에 빠진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라지고 인간의 모든 행동을 규정하는 복잡한 율법체계가 등장한다. 율법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업적과 의를 주장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이리하여 율법은 종교적 지도층 내지 특권층의 전유물로서 그들의 사회적 신분과 특권을 보장하여 주는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예수는 율법체계에 대하여 자유로운 태도를 취한다. 정결과 안식일에 대한 할라하를 상대화시키고, 율법의 권위와 모세의 권위보다 자기의 권위를 더 높이 세우고 모세의 계명을 상대화시키는 입장을 취한다. 또한 모든 제의와 종교적 규정들을 상대화시킨다. 이는 종교적 영역의 상대화일 뿐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상대화이기도 하였다. 예수는 종교를 동요시킴으로써 그 사회를 동요시켰고, 이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지위와 모든 특권을 위험스럽게 만들었다. 율법에 대한 예수의 상대화는 율법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유대사회의 체제에 대한 상대화를 내포한다. 예수는 율법을 완성하고자 한다. 그것은 모든 상황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다. 여기에 율법의 본래 목적이 있다. 하나님의 뜻이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 가운데 계시며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의 평화속에서 함께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인간성이 모든 율법과 제도보다 더 중요하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다.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철저히 이웃사랑과 결합되어 있다. 즉 예수는 먼저 내 곁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요구한다. 그 사랑은 보편적이고 한계가 없다. 예수가 가르치는 이웃사랑은 사회-정치적 차원을 가진다. 생태학적 프로그램의 실천으로 이웃사랑을 구한다. 예수는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삶과 죽음으로써 율법을 완성한다. 즉 예수 자신이 율법의 완성이다.


15. 주의 기도

주기도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대한 지식을 전제하는 동시에 땅위의 현실에 대한 지식을 요구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땅 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이다. 그분은 우리 곁에 계신 동시에 하늘에 계신다. 이는 미래를 향한 역사의 개방성을 말하는 동시에 이 미래를 향한 그의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소서'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구별을 뜻한다. 하늘이란 하나님의 이러한 절대 타자되심과 미래성을 나타낸다. 참하나님으로 인정하며 그의 성품을 닮아가고, 이 땅위에 있는 피조물과 온 우주가 거룩할때 될때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하게 될 것이다.

'당신의 나라가 오소서'는 예수의 궁극적인 의도이다. 그의 선포의 중심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 예수는 이를 밭에 감추어져 있는 보물로 비유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가 사탄을 추방함으로써 세워진다.
'당신의 뜻이 땅위에서도 이루어지소서'는 인간과 이 세계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않고 오히려 역행하고 있음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위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구한다. 땅이 모든 사람에게 환원되며 모든 사람이 생명의 기본 가치와 존엄성을 다시 찾는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들의 삶의 길을 하나님께 맡기는 삶의 태도를 예시한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그의 물질적 기초, 곧 하부구조에 있어서 하나님에게 의존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된 사람만이 참으로 다른 사람을 염려할 수 있고 그를 사랑할 수 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옵소서'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기 때문에 우리도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즉, 우리의 허물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용서의 전제와 근거가 된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는 사탄으로부터 오는 시험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시라는 간구이다.
'악에서 구하옵소서'는 우리 자신이 악한 일들을 하지 않고 오히려 선한 일을 하게 해 달라는 기도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악을 폐기하고 그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기도이다.

제 5편 십자가와 부활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16. 십자가의 고난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복음서의 기록은 예수의 삶의 역사를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초점을 향하여 전개된다. 예수의 죽음의 원인은 우리 죄를 용서하기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으로 제시된다. 십자가의 죽음은 '객관적 보도'가 아니라 '신앙의 증언'이다. 여기서 죄인과 하나님의 중재자는 제사장과 속죄제물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다. 예수는 종교적 기준의 상대화로 다른 종교인의 미움을 산다. 이러한 예수를 가리켜 대제사장은 '하나님 모독자'라고 정죄한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이유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또한 예수가 십자가의 처형을 받은것은 정치적인 죄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대화'라는 것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기존의 종교를 뿌리째 흔들었고, 이는 기득권층의 위기의식으로 이어졌다. 그의 십자가의 형벌은 단순히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종교적 죽음이 아니라, 구체적 상황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할때 당할 수 밖에 없는 정치적 귀결이었다. 예수는 젤롯당원처럼 기존 사회체제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폭력의 사용을 거부하였다. 예수가 묘사하는 하나님은 폭력에 대하여 폭력으로, 죄에 대하여 벌로 응징하는 복수의 신, 응징의 신이 아니라, 죄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분이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시는 자비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폭력앞에서 폭력의 길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길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예수는 사람들의 버림을 받은 가운데서 죽음의 고통을 당한다.이는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자기를 하나님에게 맡기며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행위를 나타낸다.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 예수의 마지막 부르짖음이 예수의 메시야되심을 증명한다. 그는 철저히 고난 당하는 자로 나타난다.

17. 왜 십자가는 구원의 사건인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들 중 가장 널리 통용되는 해석은 속죄제물의 표상이다. 그런데 속죄제물 사상은 예수의 선포 전체를 포괄하지 못하고, 응보의 원리에 근거하는 모순을 나타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고 죄된 인간에 대한 용서와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주기 위하여 속죄제물을 요구한다. 예수의 죽음은 '이 시대의 악'과 '이 시대의 고난'을 계시한다. 예수의 십자가에서 '이 시대의 악'은 그 자신을 나타내는 동시에, 예수의 고난속에서 극복된다. 악을 악으로 갚지않고 그것을 당함으로써 악의 순환을 끊고 악에대한 승리자가 된다. 예수의 삶의 역사는 단순히 한 개체적 존재 예수의 역사가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사회와 세계의 역사를 대변한다. 그의 고난은 단지 한 개인의 고난이 아니라, 예수가 자기와 동일화시킨 사람들의 고난을 대변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예수의 죽음이 구원의 사건이 되는 것은 단순히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한 속죄제물의 죽음을 당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율법의 목적과 완성인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죽음속에서 결정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구원의 사건이다. 죽음의 고통까지 함께 나누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십자가에 계시된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인간이 하나님에게 바치는 제물이다. 예수는 제물인 동시에 새 창조의 승리자이다. 우리는 법적 범주에서가 아니라 '사랑'의 범주에서 예수의 죽음을 '속죄제물'의 죽음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훼손된 의에 대한 '보상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죄로 무한히 고통을 당하면서 그것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이다.

18. 부활의 능력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메시지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에 대한 메시지로 변화된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 분이 선포의 중심대상이 된다. 십자가가 구원의 표지로 선포된다. 하나님은 죽음의 한계를 넘어선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승리에 대한 기다림과 희망에서 생성되었다. 십자가의 죽음은 사회, 정치적 관련 속에서 일어났다. 예수의 부활은 나사렛 예수의 삶의 길과 그것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을 당한 예수의 메시지가 옳았다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증명이다. 그리고 진리가 거짓보다 더 강하며, 정의가 불의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부활과 함께 예수는 모든 인간과 역사의 주님으로 나타난다. 그는 자기의 권위를 하나님의 권위와 같은 위치에 세운다. 따라서 부활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였음을 증명하고, 십자가의 사건이 하나님의 화해와 구원의 사건이었음을 증명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가 가르친 모든 말씀이 그의 십자가에서 육화되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구원의 사건이다. 예수의 부활과 함께 하나님은 자기를 계시하고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를 계시하며 새 창조를 시작한다.

역사적-비판적 방법으로는 객관적, 역사적 사실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하나의 대상을 추상화시키며, 모든 의미에서 대상을 분리시킨다. 이것은 대상과 대상, 사물과 사물간의 모든 관계를 부정한다. 따라서 객관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것만을 인정하고 나머지는 배재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본 부활에 대한 복음서의 진술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역사는 과거부터 있었던, 현재에도 있는 사물들의 영원한 '되어감(becoming)'이 아니라 미래적인 것의 '옴(coming)'을 뜻한다. 예수의 부활은 십자가 죽음에 나타나는 죽음의 세력을 직시케하는 동시에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운 역사와 그것의 미래를 보게한다. 그것은 '신앙의 대상'이지 '증명의 대상', '지배의 대상'이 아니다. 예수의 몸이 부활하였다는 것은 그의 육을 포함한 예수의 자아가 영원히 썩지 아니할 삶으로, 곧 '영적인 몸'으로 변화한 것을 말한다. 또한 예수가 추구한 '일'이 계속되는 것을 말하는 동시에 그의 '인격'이 없어지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을 말한다. 부활은 십자가에 달려죽은 그 예수의 부활과 동시에, 전혀 다른 존재 양식으로 변화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부활은 우리가 알고있는 것과는 달리 '전혀 다른류의 삶', '죽음을 통하여 더 이상 제한되지 않은 영원한 삶'으로 변화되는 것을 뜻한다.

## 감상 ##

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다. 그래서 이 책을 처음 대하였을때는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다. 그러나 막상 책을 읽을때는 성서의 이야기가 마치 재미있는 옛날이야기처럼 들렸다. 물론 이스라엘 역사를 전혀 모르고 있던 나에게 많은 왕과 사람들의 이름은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난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기독교를 배척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모든 종교의 종교관을 알고,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교양 수준으로라도 알고 있어야 한다. 이번 기회를 통하여 난 기독교를 제대로 알 수 있었고, 일반교회에서와같이 '예수 믿으시오'라는 강제력이 없어서 좋았다.

우리나라 기독교가 이 책에 쓰인 대로만 나간다면 내가 밖에서 보아왔던 기독교의 이미지를 확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결코 중산층이 아니었다. 지금 우리나라 상황을 놓고 보면 예수는 하류층, 또는 기층민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예수께서 여기에 오신다면 당연히 사람들에게 천대 받을것이다. 기존 교회는 예수를 사탄이라고 몰아붙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국에 있는 큰 교회에서 나오는 '아멘'의 외침보다는 외딴 시골, 종(鐘) 하나와 십자가를 덩그머니 세우고 목사 한 분이 외로이 지키시는 초라한 교회에서 나오는 작은 '아멘'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실 것이다. 신도 수가 많다고, 목사가 설교를 잘한다고 그 교회가 선교를 잘 하는 교회는 아니다. 목사라는 직업을 갖는다면(물론 난 그렇게 될 확률이 거의 없지만) 두메 산골에서 순수하고 인심좋은 주민들과 함께 일하고 복음을 나눌 수 있는 목사가 되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도 그러실 것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도 진정 그것을 바라고 계실 것이다.

예수는 사회를 변혁하고자 했던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 당시의 잘못된 종교적 관습을 모두 상대화 시킨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연히 예수는 기존 기득권 세력의 탄압을 받게 되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 이러한 상황은 예수가 현대에 오셔도 별 다를바 없을 것 같다. 현대종교는 점점 옛날의 순수한 의도에서 벗어나 타락해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의 공통된 현상이다. 종교의 타락은 자연히 악을 깨어나게 한다. 우리가 신문에서 많이 접하고 있는 사건들이 이를 대변해준다. 종교가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벌어진다. 종교제도는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하는 기능을 가지게한다--이 말은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에 나온다--는 말을 윤리 책에서 빼야 할 시대에 살고 있나보다. 말로만 그렇게 쓰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면 그 글은 있으나 마나한 말이 아닐까?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은 사랑의 실천이고 하나님의 나라의 궁극적인 완성이다. 예수가 죽을때의 그 고난과 심정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안다면, 종교가 지금과 같이 타락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예수가 진정으로 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인지를 곰곰히 생각해보자. 난 이 책을 읽음으로써 예수가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려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것 같았다. 그건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건 '사랑'이다. 에로스적인 사랑이 아닌, 아가페적인 사랑, 조건없는 사랑, 어머니와 같은 사랑이다. 현대사회가 삭막해진 이유도 사랑이 메말랐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공동체의식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 이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살맛나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 책을 읽고, 같은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의 제각기 차이를 알 수 있었고, 이 이야기가 과연 다른 교회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일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역사의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는 연세대학교 신학이 자유신학임을 뚜렷이 밝혀주는 책임에 틀림없다. 무조건 예수를 믿으라는 것 보다, 학문적으로 예수에 대하여 논하고 토론하는 것은 종교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한번 알아볼 일이라고 생각한다.

출처...창골산봉서방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 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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