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 교수의 성서문화와 역사- 가장 끔찍한 사형법이었던 십자가 처형 |
신약시대 유골서 철제 못 박힌 유골 나와 1968년 말 이스라엘 문화재청의 실험실에서 최근 출토된 신약시대의 유골을 분석하던 한 연구원은 철제 못이 박혀있는 발뒤꿈치 뼈를 확인하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신약성서를 비롯해서 로마시대의 여러 역사기록에서 자주 언급된 십자가 처형의 고고학적인 증거가 처음으로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과연 이 비운의 주인공은 누구이고 왜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을까? 부활신앙과 유골함 십자가형의 역사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사형방법은 돌로 쳐 죽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리스 통치자들의 영향으로 서기전 87년경 알렉산더 야나이는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800명을 한꺼번에 십자가형에 처하기도 했다. 서기전 1세기말 로마 당국은 식민지 사람들의 형벌로 십자가형을 공식적으로 택했다. 처음에 십자가형은 사형방법이 아니라 채찍질같은 형벌 중의 하나로 적용되었다. 대부분 중죄를 저지른 노예에게 부과된 십자가형은 우선 노예의 목과 양팔에 걸쳐 큼직한 나무 기둥을 묶어서 형장에까지 지고 가도록 함으로써 전시효과를 노렸다. 당시만 해도 십자가형은 못을 밖아 죽음에 이르도록 한 것이 아니라 나무에 묶어놓고 고통을 증가시키는 형벌로서 채택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기 1세기에 들어와 십자가형은 차츰 로마 정권에 대항했던 반란자들에 대한 잔인한 사형방법으로 정착되었다. 서기 70년 유대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포위한 로마의 장군 티투스는 여러 달에 걸쳐서 매일 유대인 포로 500명씩을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당시의 광경을 생생하게 전해들은 역사가 요세푸스는 티투스가 일부러 예루살렘 성안의 유대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성벽 주위에 포로들의 십자가를 세웠는데 ‘더 이상 십자가를 세울만한 공간과 나무 기둥을 구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기록하였다. 십자가형의 고통 십자가형의 주인공 요한 이것은 유대인들의 장례법을 지키려했던 결과로 해석된다. 즉, 해가 지기전에 시신을 거두어 매장해야 하는데 죄수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에 커다란 나무망치로 정강이 뼈를 부러뜨려 빨리 죽게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던 두 강도의 경우에도 그들이 아직 살아 있었기 때문에 다리를 꺾었다고 볼 수 있다(요 19:31,32). 십자가형을 당했던 주인공의 나이는 24∼28세의 남자로 추정되며 함께 발견된 유골을 통해 키가 167cm로 밝혀졌다. 유골함에는 이 주인공의 이름이 히브리어로 ‘요한난 벤 하그콜’, 즉 하그콜의 아들 요한난으로 새겨져 있다. 요한난은 요한의 히브리어식 이름이다. 주인공이 어떤 종류의 정치적 반란 음모를 꾸몄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의 가족들은 무덤을 갖추어 정식으로 매장할 수 있었던 중산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십자가형의 고고학적인 증거는 오늘날 더 이상 박물관에 보존돼 있지 않다. 이스라엘 장례법에 의해서 발굴된 모든 유대인들의 유골은 현대식 방식으로 예루살렘 묘지에 재매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뤼네발트 Grunewald, 십자가 처형, 1502년경, 61.5*46cm, 나무에 오일, 워싱턴 국립 미술관-
못이 박힌 발뒤꿈치 뼈<사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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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06.04.16. am 10:26 (편집) 이미나기자 (mnlee@fgtv.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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