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6장 1절-8절
소아시아에 있었던 일곱 교회는 첫사랑을 버렸고, 우상의 제물을 먹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간음을 행했고, 영적 나태와 영적 자기만족과 같은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오늘 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마치 사데교회처럼 성결한 척, 평화스러운 척,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스스로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죄악으로 인해 죽은 교회나 다름이 없는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요한계시록을 주신 이유는 죄악에 물든 당시 일곱 교회를 향해, 그리고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말씀의 거울을 통해 자신의 실체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며, 더 나아가 악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부터 살펴볼 세 개의 심판 시리즈는 바로 이같은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 보좌에서부터 시행되는 세 번에 걸친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심판의 공포를 조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확실성과 안정성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한 의도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말씀 한 마디로도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번에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세 번까지 심판을 연장하십니다. 왜 이처럼 지연시키실까요? 회개하고 돌아설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세 번이라는 심판이 의미하는 바는 돌이키지 않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심판이 임하고 멸망하게 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물론 성경을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공의 이 두 가지 관점으로 묵상해보시기를 권합니다.
6장부터 16장까지는 크게 세 가지 심판 이야기, 즉 일곱 봉인에 담긴 심판. 일곱 나팔에 담긴 심판. 일곱 대접에 담긴 심판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심판 이야기는 각 심판마다 일곱 개의 심판 내용이 있으며, 일곱 개 심판 내용은 처음 네 개 심판과 나머지 세 개 심판으로 구성되어 있고, 나머지 세 개 심판은 처음 두 개와 나중 한 개가 서로 구별되는 일정한 패턴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유의해야 생각해보아야할 패턴은 일곱 개 심판과 네 개의 내용과 대상입니다. 성경에서 일곱은 완전수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개 심판은 하나님의 심판 자체의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또한 성경에서 넷은 동서남북 자연계 전체를 뜻합니다. 따라서 네 개의 내용과 대상은 심판이 미치는 대상에 있어서의 완전성을 뜻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은 완전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대상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심판 시리즈에 대해 오해하기 쉬운 부분이 있는데 본문 속에 등장하는 ‘이 일 후에’ 또는 ‘내가 보니’라는 표현을 통해 요한계시록을 ‘시간적 또는 연대기적 흐름으로 해석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각각 일곱 시리즈로 구성되어있는 인 심판, 나팔 심판 그리고 대접 심판은 시간적 순서의 개념이 아니라 논리적인 순서로 이해해야 합니다.
헨드릭슨(W. Hendriksen)과 같은 신학자는 이를 ‘점진적 평행주의’라고 불렀습니다. 즉 본문이 단순히 직선적 또는 연대기적으로 쓰였다기 보다는 반복의 원리에 의해 쓰였다는 견해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반복이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심판의 강도가 심화되고 확장되는 나선형 구조를 가졌다고 이해합니다. 또한 넬슨 크레이빌(N. Kraybill)은 세 개의 비유는 같은 사건들을 다른 관점으로 묘사하는 것이며, 각각의 마지막 때의 고통을 점점 더 시각적이고 포괄적인 모습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신은철, ‘요한과 함께 하는 요한계시록 시간여행’, 그리심, p.165~169)
즉 심판의 각 시리즈는 순차적으로 차례대로 진행된다는 개념이 아니라, 심판의 강도가 점점 더 강화되어 간다는 논리적인 순서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 심판 시리즈보다 나팔 심판 시리즈가, 나팔 시리즈보다는 대접 심판 시리즈가 점층적으로 그 심판의 강도가 심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심판의 메시지는 결국 바벨론의 멸망(17:1-19:10)과 새 예루살렘의 찬란한 등장(21:9-22:5)에서 그 최종적인 성취에 도달합니다. 따라서 심판의 의미는 악의 제거와 그 악을 제거함으로써 그것에 의해 더럽혀졌던 땅과 하늘과 바다와 산을 새롭게 하여 새 예루살렘이 그 새로워진 새 창조의 주인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은 성도들에게는 은혜이지만, 대적하는 불신자 또는 악에게는 종말이라는 이중적인 개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1-2) 첫째 심판 :
(1a)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중의 하나를 떼시는데 ...
책의 인봉을 뗀다는 것은 종말을 의미하며, 그 종말은 곧 심판을 초래합니다. 앞서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5:3) 말씀을 통해 어떤 인간도 뗄 수 없는 종말의 비밀을 어린 양 자신이 여심으로 심판을 주관하시는 주체는 바로 예수님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1b) ...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우렛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앞서 설명드린바와 같이 인 심판에서 첫 네 개와 나머지 세 개가 구별되고 있습니다. 처음 네 개 심판은 5:8에서 책의 인을 떼기에 합당하신 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했던 네 생물에 의해 도입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네 생물(사자 같고, 송아지 같고, 사람의 얼굴 같고,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_4:6)은 피조물 전체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피조물의 전체를 대표하는 네 생물의 등장은 하나님의 심판이 피조 세계의 파괴를 초래할 것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처음 네 개의 인 심판에 등장하는 네 마리의 말들은 ‘스가랴 1장의 홍마와 백마와 자마를 탄 네 명의 말 탄자들’과 ‘스가랴 6장의 네 병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스가랴서에서 네 병거들은 성전에서 나와 땅을 살피기 위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두루 다니도록 보내심을 받은 자로, 이들의 파송은 곧 열방에 대한 심판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처음 네 개의 인 심판에서 네 마리 말의 등장은 세상에 대한 심판을 도래했다는 선포입니다.
(2) 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당시 로마 제국이 점령하고 있는 소아시아의 동쪽,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파르티아 대국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파르티아는 기원전 53년에 지금의 터키 땅인 카레에서 로마 대군을 화살비로 궤멸시켰을 정도로, 이들은 활쏘기와 기마전투로 유명했으며 특히 말을 타고 달리며 뒤로 돌아 쏘는 기술인 파르티안 샷(shot)으로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들은 로마제국의 동부전선에 포진하여 로마에게 큰 위협을 주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 당시 죽임을 당한 네로 황제가 사실은 죽은 것이 아니라 파르티아에 피신해서, 막강한 파르티아의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침공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로마 제국 전역에 퍼져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당시의 이러한 상황을 본문에 적용해서 파르티아 군대의 용맹성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 맹렬할 것임을 암시했습니다. 특히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라는 표현은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파르티아 군대의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실제로 파르티아 군으로 인해 로마가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 같은 소문을 사용함으로써 파르티아 군의 용맹성을 강조하고, 그 용맹성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맹렬할 것임을 알리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첫 번째 인 심판은 심판의 위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3-4) 둘째 심판 :
(3-4)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니 / 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둘째 인을 떼자 붉은 말이 나와서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전쟁을 일으켜 서로 죽이는 일이 일어납니다. 구약에서 전쟁을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처럼 본문에서 하나님은 전쟁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전쟁을 일으키도록 조장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악함을 제한하지 않으시고 화평을 제하여 버림으로, 인간은 서로 죽이고 죽이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지난 주 금요일인 8일에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한 모스크에서 금요예배를 드리고 있는 중에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해서 100여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이날 폭발의 배후를 자처한 세력은 수니파 극단주의 조직인 IS의 분파인 아프간 지부(IS-K)이었습니다.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자 전세계 지하디스트(Jihadist)들과 이슬람 단체들은 미군의 철수는 탈레반이 끈질기게 대항한 끝이 이룬 승리라며 자축했습니다. 그런데 탈레반이 점령하고, 미군이 철수하고 있는 와중에 IS-K는 카불 공항 외곽에서 폭탄 테러 공격을 가해 철수하는 미군 13명을 포함, 17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탈레반과 IS는 같은 수니파입니다. 그럼에도 IS-K는 탈레반이 미국과 평화협상을 벌인 점 등을 비난하면서 무지막지한 폭탄테러를 자행하고 있습니다. 같은 종교, 같은 분파라 할지라도 화평이 사라지면 서로 죽이고 죽이는 참혹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16세기 종교개혁 운동 중에는 구교와 신교가 서로 자기들의 신앙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총과 칼을 들고 수많은 생명을 살상하기도 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서구에서는 아시아계 대상 증오범죄가 자행되고 있습니다. 칼과 창, 폭력으로만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하계올림픽에서 양궁 3관왕에 오른 안산 선수를 온라인상에서 반페미니스트 운동의 표적으로 삼지 않았습니까! 우리 사회는 점점 더 반목과 증오가 심화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화평이 없다면, 우리 역시 서로 죽이고 죽이는 일들이 벌어질 것임을 자명합니다.
(5-6) 셋째 심판 :
(5-6)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 내가 네 생물 사이로부터 나는 듯한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
세 번째 인을 떼자, 검은 말이 나오고 그 검은 말을 탄 자가 저울질을 하는데, 한 데나리온에 밀이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가 석 되라고 합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임금에 해당되고, 밀 한 되는 노동자 한 사람의 평균적인 하루 식량의 양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한 데나리온으로 밀 한 되나 보리 석 되를 구입했다는 것은 평상시보다 여덟 배 이상으로 비싸다는 의미이며, 곡식이 이처럼 비싸게 매매된다는 것은 생필품과 물가의 폭등으로 인해 기근이 일어난 것을 나타냅니다.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는 표현을 통해 인플레이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밀이나 보리가 이처럼 품귀현상을 보이면서 비싸게 거래되자, 식용과 종교적 용도에 필요한 기름을 생산하는 감람나무와 석회성분이 많은 물 대신 식수로 마실 포도 음료를 생산하는 포도나무를 제거하고 그곳에 밀이나 보리를 심었다는 의미입니다.
(7-8) 넷째 심판:
(7-8) 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말하되 오라 하기로 /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
넷째 인을 떼자,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말을 탄 자의 이름이 ‘사망’입니다. 본문은 사망의 뒤를 ‘음부(지옥)가 따른다’고 밝힘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가차 없음을 확실히 나타냅니다.
사망은 땅의 1/4에 대해 권세를 얻어 칼과 흉년과 사망(어떤 사본에는 ’역병‘으로 표기)과 땅의 짐승으로 사람을 죽입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에서 심판의 도구로 전쟁과 기근이 사용되었다면, 네 번째에는 전쟁과 기근과 함께 역병과 짐승을 추가로 언급함으로 심판의 강도가 앞서보다 훨씬 강화되고 구체화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사람이 짐승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고 합니다. 짐승은 배가 고프지 않으면 다른 동물은 물론 사람을 공격하지 않고, 일반적으로는 사람을 보면 피합니다. 그런데 네 번째 심판에서는 짐승이 이유 없이 사람을 공격해서 죽인다고 합니다.
또한 역병이 창궐할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중세 유럽 인구의 1/3을 사망에 이르게 한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은 다시는 창궐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의학이 발달할수록 원인을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의해 전파되는 신종 전염병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2002년 사스(SARS)를 시작으로 2012년 메르스(MARS), 2019년 신종 코로나19(COVID-19)까지 바이러스로 인한 피해는 날이 갈수록 규모가 커지고 있습니다. 의료 연구진은 현재로서는 백신이 코로나19를 종식시킬 가능성은 없어 보이며, 이 바이러스는 다소 완화된 채 영원히 우리 주위에 서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살펴본 네 개의 인 심판은 계속해서 다섯 번째, 여섯 번째 그리고 일곱 번째 인 심판과 일곱 개의 나팔 심판 그리고 일곱 개의 대접 심판으로 이어지고, 심판의 강도는 더욱 더 강해져갑니다.
주님의 심판의 시대처럼 지구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분쟁과 전쟁, 그로인한 기근, 자연의 파괴와 더불어 코로나 19가 창궐하고 있는 이 시대에서 주님을 믿는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은 틈만 나면 하나님을 배반했지만, 하나님은 주변 강대국, 전쟁, 기근, 압제 등을 도구삼아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을 택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고,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께서 요한을 통해 요한계시록을 우리에게 전해준 것은 오늘을 사는 나와 내 이웃 모두에게 회개하고 주님께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내 이웃을 향해 더욱 더 눈물로 기도하며, 그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 앞에서 더욱 더 우리의 옷깃을 여미고 말씀과 기도에 전념해야 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하나님의 때를 소망하며 말씀을 삶속에서 실천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나를 향하신 사랑에 흠뻑 취해 내 이웃을 넉넉히 품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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