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해석의 7대 원리
요한계시록 해석의 7대 원리
이번 계시록 강해는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도들이 계시록을 가르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즉, 작은 책을 먹어버리자는 의미가 있습니다. 왜 계시록을 먹어야 하는가? 세계 교회 역사에서 고난이 왔고, 어려움이 왔을 때 이겼던 것은 무엇보다 재림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6.25때도, 일제하에서도 우리 선진들이 그 어려움을 이겼던 힘은 바로 재림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주기철 목사님이 하신 "깨어라 성도여, 징조를 보라, 신랑 예수 구름 타고 오시리라"는 찬송 가사도 있지 않습니까. 재림신앙이 그토록 중요합니다. 역사는 재림신앙의 위력을 얼마든지 증명해 줍니다. 일차적으로 초대교인들이 로마 황제의 핍박아래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1세기 크리스챤들은 저 지하 카타콤으로 도망갔습니다.
언젠가 '밧모섬의 위기'라는 비디오를 보았습니다. 밧모섬은 죽음의 장소입니다. 이제 거기에서 마지막으로 죽어갈 입장에 놓여있는 요한에게, 그 핍박과 고통과 굶주림 속에 있는 요한에게 하나님은 특별한 계시를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요한을 들어 이 계시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지금 왜 요한이 밧모섬에 있습니까? 아무리 세상을 호령하는 황제라 할지라도 신앙만큼은 양보 못한다는 일사각오의 신앙때문이 아닙니까. 이 정도의 핍박이라면 위기 의식을 느낄만합니다.
요한과 같이 있던 사람을 10일 동안 굶겨서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온갖 조롱을 퍼부어 댔습니다. "요한, 네가 예수를 거역하고 황제를 숭배한다고 하면 저 사람을 살려주겠다" 그러니까 요한이 어떡하겠습니까. 당장 눈앞에 보이는 저 고통속에 죽어가는 성도를 살리자니 예수 사랑이 끊어지고,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자니 현실속에 10일 동안 자기와 같이 있던 성도가 다 죽어가면서 있는 모습을 볼 때 요한의 심정이 어땠겠어요. 그 장면을 보니까 정말 요한도 무너지겠다는 위기의식이 생겼습니다. 물론 요한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영화이지만, 실제로 요한의 고통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계시록은 이런 고통가운데서 탄생했습니다. 때문에 그러한 신앙적 고통과 아픔을 체험한 자만이 이 계시록의 영감이 열리는 것입니다. 부요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 중심적인 삶속에서는 단순한 지식일 뿐이지, 하나님 말씀으로 내 속에 역사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계시록을 막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말씀인데도 2000년 역사 속에서 계시록이 증거되려 할 때마다 막아버렸습니다. 그래서 계시록을 손대는 사람들은 잘못되기가 일쑤였고, 광신주의자들이나 이단으로 빠지기가 일쑤였습니다. 계시록을 잘못 해석해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건전하게 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핍박이 많아서 다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계시록을 하지 않는 교회가 정상적인 교회고, 계시록을 하지 않는 목사가 옳은 목사라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재림이나 종말, 천국이나 지옥을 말하지 않는 목사가 더 고상하고 의롭게 여겨지고, 계시록을 말하고 종말을 말하고 천국이나 지옥을 말하면 이상한 목사, 잘못된 목사로 취급됩니다. 이 시대가 이렇게 사탄이 좋아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성경 계시록 어디에도 그런 말씀이 없어요. 계시록을 덮어놓으라는 말씀은 눈을 씻고 보아도 없어요. 오히려 계1:3에는 "이 예언의 말씀(계시록)을 읽는 자와 듣는자와 가르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어요. 22장에서는 "이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고 했어요. 계10:11에는 "이 작은 책(계시록)을 먹어 버리라" 계14:6에는 이 계시록을 전 세계에 국가를 초월해서 증거하라고 했어요.
다른 성경에는 전도하라는 정도의 메시지가 있을 뿐이지요.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라는 말씀을 한번 하십니다. 그런데 계시록만큼은 여러나라, 국가를 초월해서, 언어와 언어를 초월해서, 민족과 족속을 초월해서, 임금과 백성과 신분을 초월해서 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만큼 강렬한 호소가 또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보통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한다고 말합니다. 옳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심령속에 역사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데 무슨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무슨 말씀인지 알아야지요. 알아야 내 속에서 뜨거운 역사가 일어나는 거지요. 이 요한계시록을 완전히 먹어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이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1) 전 성경의 요약이며, 결론이다.
계시록은 전 성경의 요약이요 결론입니다. 제가 7가지 계시록 해석법에 대해 세미나 때마다 소개합니다. 저는 이 7가지 해석법이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제가 이 계시록을 해석하는 방향입니다.
여러분 계시록은 전 성경의 액기스입니다. 결론입니다. 그러니까 계시록을 초림으로 풀면 안됩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가르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를 알면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전도할 때 좀 더 구체적으로 로마서, 갈라디아서 등 교리적으로 가르쳐 줍니다. 그것 알았으면 나중에는 어떻게 행할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야고보서, 유다서, 요한 일․이․삼서,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전부 행함입니다.
그런데 계시록은 무엇이냐? 그런 정도의 수준이 아닙니다. 무엇을 해라, 하지 말라는 차원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니까 갖춘 자와 갖추지 않은 자가 둘로 딱 나눠져서 믿음의 열매 맺는 자가 용의 권세와 마지막 한판 싸워 버리고 천국에 들어가 버리는 것이고, 열매 맺지 못한 쭉정이들은 용의 권세와 미혹에 떨어져서 저 유황불에 들어가는 마지막 결론 부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는 사람은 "새벽예배 좀 드려라. 십일조 좀 드려라. 예수 믿으면 축복 받는다."는 수준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그것이 좋은 것이로되 거기서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최종적인 죽음의 신앙이고, 순교의 신앙입니다. 구약은 죽으라는 얘기가 없어요.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라고 했어요. 구약은 잘 믿으면 축복 받는다고 합니다. 신약은 잘 믿으면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고. 계시록은 잘 믿으면 "자금 이후로 예수 안에서 죽는 자가 복이 있다" 이런 수준이니까, 요한계시록의 수준은 기복적인, 신비적인, 일차원적인, 유치원생, 초등학생의 수준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그러면 무엇입니까? "죽을래, 안 죽을래?" "네 생명까지 바칠래, 안 바칠래?" 이런 차원입니다. '바쳤냐, 안 받쳤냐'는 차원이지, 다른 차원이 아닙니다.
이제는 주님의 어린양의 신부가 될 것이냐, 안 될 것이냐 하는 차원입니다. 그러니까 계시록 신앙은 최종적인 신앙입니다. 여기서 성경을 마감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누구냐 그것도 안 나옵니다. 예수는 나의 구세주요, 사랑에 대해서, 성령에 대해서 일체 안나옵니다. 결론입니다.
계시록 404절 가운데, 278절이 구약을 인용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은 65권을 모르고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부터 유다서까지 전 성경의 배경을 가지고 요한계시록을 해석해 나가면서 그렇게 나가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 계시록은 결론이라는 것을 기억하세요. 신앙의 초보적인 단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순교적 단계, 삶을 바치는 단계이지, 과정이 아니라는 각도에서 계시록을 보세요. 요한계시록 해석의 원리는 다음의 일곱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는 실낙원이에요. 다 잃어버렸어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성스럽게 만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는데, 그냥 뱀에게 넘어가 버렸어요.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이 범죄해서 그랬지요. 세상에 창세기가 보면 다 잃어 버렸어요.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도 못 먹고 낙원도 끝나버립니다. 가나안 땅에 가라고 했는데, 못가고 끝나버렸습니다. 결혼도 실패한 것입니다. 전부 실패, 실패, 실패입니다. 왜 실패냐? 예수가 없기 때문에 실패입니다.
여러분들 믿음 생활에 예수가 없으면 실패하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을 알지만, 예수 이름으로 기도는 하지만 여러분 심장 속에 예수가 꽉 박히지 않으면 실패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마지막 성경은 말라기죠? 말라기는 비참하게 끝나버립니다. "이 도둑놈들아, 십일조 떼어먹은 도둑놈들아 가만 안 두겠다. 내가 크고 두려운 날에 와서 전부 때려버리겠다" 성경이 이렇게 끝나야 되겠습니까? 무엇인가 이상하죠? 지금 도대체 왜 이런 것입니까? 거기까지 예수님 안 오셨지요? 예수님 안 오시면 다 실패한다 그 말입니다. 예수 없는 말라기, 예수 없는 창세기 예수 없는 출애굽기, 전 인생이 실패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뭡니까? 1장 1절부터 예수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할렐루야! 마지막 절에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에게 있을지어다" 예수로 시작해서 예수로 끝나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안에서는 실패나 저주가 없고 계시록 안에서는 성공하는 것입니다.
2) 성경의 완성이다.
요한계시록 신앙을 가지면 신앙이 완성됩니다. 할렐루야! 계시록은 주님의 재림, 천국, 지옥이고, 결혼이고 하는데, 성도들이 잘 자라는데, 미스가 40 나이를 먹어도 시집을 못 가면 우울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40이 되었으면, 그리스도와 계시록을 통해서 영적으로 영적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신앙을 가져야만 해결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자기 자신의 인격하나, 말 하나, 언어하나, 주일성수 하나, 십일조 하나, 행동 하나를 해결 못하는 수준은 아직도 어린양과 영적 결혼식을 못했기 때문이에요. 아직도 갈팡질팡하고,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물론 선한 절망과 좌절과 아픔은 있지요. 예수님도 "고민하여 죽게되었으니"그랬어요. 저도 왜 아픔과 고민과 갈등이 왜 없겠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천번 만번 이길 수 있어요. 완성의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은 완성된 차원에서 말씀을 들으셔야 합니다. 결론의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에 와서는 전부 승리합니다. 교회가, 성도가 요한계시록에서는 지는게 없습니다. 여기서 끝내 버립니다. 신기한 것은 이것은 열어도 열어도 끝이 없고, 깊이가 한이 없습니다. 정말로 신비합니다.
3) 예언의 말씀이다.
1:1에 "이 예언의 말씀은"하고 계시록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을 묵시문학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묵시문학은 B.C200년에서A.D100년까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 많은 서양의 학자들이 묵시문학적 해석을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묵시문학이 아닙니다. 이것은 문학이 아닙니다. 이 때 문학은 한 40편 정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완전히 다른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저자가 없어요. 그런데 계시록은 저자가 분명했어요. 그 때 묵시문학은 상징이 조금밖에 안 나오는데, 계시록은 거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이 때 묵시문학은 염세적이고,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승리와 축복입니다. 그러니까 묵시문학적으로 해석하면 안됩니다. 이것은 예언서입니다. 예언적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미래에 대한 예언입니다. 문학적으로 풀어버리면 아무것도 안 나와버립니다. 이것을 가지고 지금 핸드릭슨이 세계 최고의 영향을 끼쳤는데, 요한계시록을 또 초림부터 해석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이 종말론적이 해석이 안되버리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성경 맨 마지막에 있는 하나님 말씀이니까 결론이고, 완성이고, 예언의 말씀이니까 예언서로 풀어야 되는데, 다시 과거 초림으로 풀어버리니까 계시록이 맛이 안 나버립니다. 헨드릭슨은 위대한 신학자입니다. 그 분을 인격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계시록 해석만큼은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분이신데, 거기에 대해서 제가 조목조목 반박하고 조목조목 반대 이론을 내세웁니다. 저는 성경대로 하자는 것입니다.
4) 재림에 관한 말씀
1:7 = "볼지어다 구름타고 오시리라"
재림입니다. 22:20에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그랬잖아요. 이것은 재림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에서는 완전히 재림 이야기가 되어야 하지, 초림 얘기가 나오면 안되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재림과 종말과 천국과 지옥 이야기가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주제 에요. 그런데 자유주의자들은 이것을 갖다가 초대교회에서 끝내버립니다. 또 은혜복음으로, 은혜, 은혜, 믿음, 믿음, 하면서 교훈적으로 풀어버리면 요한계시록의 참 맛이 안 나오는 겁니다. 완전히 재림에 관한 얘기입니다.
5) 장차 될 일이다.
1장 1절의 속히 될 일, 1장19절에 장차 될 일, 4장 1절에 이후에 될 일, 22장 6절에 결코 속히 될 일이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두가지 에요. 첫째, 시간적으로는 종말이에요. 장차, 종말이에요. 내용적으로는 그렇게 말을 많이 했던 장차 될 일이에요. 요한계시록이 상징이 아니다 그 말이예요. 요한계시록은 상징이란 용어를 썼지만은 될 일이에요. 요한계시록이 영적으로 해석했단 구절은 하나도 없어요. 될 일입니다. 계1장1절에 '반드시 속히 될 일', 1장19절에 '장차 될 일', 4장1절에 '이후에 속히 될 일', 22장1절에 '결코 속히 될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될 사건이에요.
요한계시록은 사건으로 풀어야 되요. 여러분들이 이토록 성경을 분명히 가지고 좌로나 우로나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절대로 흔들릴 것 없어요. 될 사건이에요.
그러면 오늘 이 시대 왜 불안하냐?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사람이 초조하고 고통받는 거예요. 우리는 미래가 분명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될 사건, 승리의 사건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미 이긴 길, 승리의 길을 보고 그대로 걸어갈 뿐이에요. 그러니까 힘이 있고, 용기가 있고, 예수 믿을 가치가 있습니다. 만일에 계시록이 없다고 생각하면 뭐가 어떻게 되는지, 도무지 장차 어떻게 될 건지 이런 것들을 모른단 말이에요. 요한계시록은 전부 투명하단 말이에요. 절대 상징이 아니에요. 절대로 초림의 때가 아니에요. 미래에요.
계시록 6장에 보면 '흰말'이 나오는데 흰말이 초림 예수그리스도냐 적그리스도냐를 가지고 2천년동안 싸워요. 그러면 적그리스도라고 나는 수 십가지 자료를 가지고 설명해요. 그걸 떠나서라도 그런 자료 근거가 없다 할지라도 요한계시록은 장차 될 일이기 때문에 초림 예수가 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 한가지만 생각하더라도 성경자체가 입증합니다. 그러니까 계시록은 될 일, 될 사건. 미래로 해석하고, 예언서고, 재림으로 해석할 것이고, 완성으로 해석할 것이고, 결론으로 해석할 것이고 전부 이렇게 해석하는데 여기서 딴 생각하면 안됩니다.
6) 본 것을 기록한 책이다.
1장 1절과 1장 12절. 내가 본 것을 다 증거하였노라 그랬어요.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랬어요.
저는 요한계시록이 장차 될 일이고 재림에 대한 것이고 본 것을 증거했기 때문에 그대로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바꾸라고 해도 못 바꿔요. 왜, 요한계시록 자체가 그렇게 증거하고 있고, 요한이 미래에 본 것을 기록했기 때문에 본 그대로 나중에 다 꼭 계시록대로 될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러니까 너무너무 확신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다 정해주고, 승리하고 다 해주고 그리 가라고 하시니까 이렇게 쉽지 갈 바를 모르고 그냥 무조건 뛰어들라고 했겠습니까. 말씀 속에 다 비밀이 있고, 말씀 속에 길이 있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받을 자가 없다고 하시는데, 다 그 길로만 걸어가면 영생이 있고 천국이 있고 구원이 있고 다 있단 말이에요. 여러분들 확실한 예수를 믿기를 바랍니다.
저는 성경 예언 중에서 성취되지 않은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적그리스도로 보는데 데살로니가후서 2장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 배도하는 일과 적그리스가 나타나면 주님이 강림하신다고 그랬는데, 배도는 종교다원주의로 보니까 캐톨릭과 WCC 혼합주의로 보니까 이미 시작되었고, 적그리스도는 아직 누구라고 말하기는 곤란해요.
우리 개혁주의라든가 보수주의에서는 교황이 적그리스도라고 칼빈이나 루터까지 다 얘기했어요. 그런데 교황이 어느 교황이 미래의 적그리스도냐 그것을 우리가 지목할 수는 없지만, 현재 교황이 최고의 신앙의 법을 파괴한 사람입니다. 종교다원주의의 문을 다 연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 교황후에 유태인 프랑스에 추기경이 지금 교황이 된다고 신문에 나오고 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사람을 상당히 주목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적그리스도도 거의 나타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최종적인 적그리스도라고 단정을 할 수는 없지만 그럴 가능성은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예수 잘 믿어야 합니다. 먹고사는 일이 중요하지만 우리가 지금 그까짓 것으로 아웅 다웅하지 말고, 구역장 일 잘하고, 장로일 잘하고, 회장일 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신앙은 육적 삶의 아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험에 볼 수 있습니다. 질병으로, 물질로, 자녀 문제로 던져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시험에서 우리는 오늘 당장 죽더라도, 길가에 나 자빠지더라도 예배관, 교회관, 예수관 철통같이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것 하나 오늘 고를지 몰라요. 본 것을 했기 때문에 앞으로 요한계시록은 본 것을 해석해 나갑니다.
7) 기록의 형태가 상징으로 표현되었다.
요한계시록을 서양의 신학에서는 어떻게 해석하느냐? 2가지가 있습니다. 미국의 세대주의가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려 합니다. 그 사람들은 상징, 영적 세계를 우리만큼 이해를 못합니다. 세대주의가 나와가지고 '문자적' 그것이 세계를 지배했어요. 그런데 또 기존의 신학에서는 상징이니까 무슨 상징인데 될 일이냐고 합니다. 7뿔이 7뿔이지, 영적인 것이지, 그 뿔이 무슨 실제로 나타느냐고 합니다. 그 사고가 서양 사람들은 그렇게 안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서양 사람들의 사고는 그렇게 안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돌려서 헨드릭슨의 영적 해석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상징은 왜 상징으로 했겠는가? 저는 그런 예화를 들어봐요.
마지막 때에 될 일을 하기 때문에 김치도 여름에 먹으려면 짚푸라기로 덮어놓고 땅 속 깊은 곳에 숨겨 놓듯이, 마지막 때 계시록 말씀도 마지막 때 열리게 하기 위해서 상징으로 다 덮어 버렸다. 그래서 그 상징을 열어봐야 한다. 7별, 그러면 그 별이 무엇을 상징했는가 열어보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징을 열면 내용이 복음서나 서신서와 똑같아야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계시록이라고 해서 지금까지 있었던 교리나 신앙에 틀리게 해석하면 안됩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얘기입니다. 지금까지 65권 있었던 내용하고 똑같은 내용이어야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요한계시록 한국에서 일부 이단이라든가 이런 사람들이 잘못 해석한 것을 특수한 용어이니까 지금까지 내용으로 해석하지 않고, 독특한 교리라든가 집단이라든가 형태를 만들어 놓으니까 다 이단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데 복음서나 서신서와 똑같다는 이 원리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견디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은혜가 여기에 있습니다.
벌고프가 말한대로 "계시는 점진적이고 더 분명하게 확대해 나간다" 영적 진리는 시간이 갈수록 더 분명하게 확대해서 나타나요. 그러니까 과거에 요한계시록은 그렇게 열릴 수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은 거의 열려가고 있다고 봅니다. 이것은 거의 요한계시록을 벗기는 작업이 세계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요한계시록이 붐을 이룹니다. 계시록 알기 위해 난리들입니다. 목사님들이 계시록이 위험하다고 한쪽으로는 그러면서도 계시록을 알기 위한 열망들이 마음속에 대단합니다. 이것 깨닫기 위해서 대단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재림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축복이라고 하십니다. 소망가운데 어려움도 극복하고 재림의 축복에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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