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교회사!!

그림으로 본 10대박해

하나님아들 2022. 1. 19. 18:12

제목 : 그림으로 본 10대박해

저자 : 김광채

Ⅰ. 네로황제의 박해

 

1. 네로(37-68) : 로마제국 제5대 황제

칼리굴라 황제의 외조카

어머니 아그립피나가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결혼함으로써 황제의 양자가 되었다.

클라우디우스(독살됨)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권력 남용, 악행 - 의붓형제 브리탄니쿠스, 어머니 아그립피나, 부인 옥타비아를 죽였다.

역사상 최초로 기독교를 박해

후기 스토아 학파 철학자 세네카(BC 4-AD 65,『양선론』)의 제자 - 세네카가 충언을 하자 자살을 명령함.

 

2. 로마의 대화재

 

주후 64년 여름(7월 18일 밤 ~ 19일 새벽 사이 발생) : 27일간 계속되었다.

소방대원 7천명, 경찰병력 4천5백명, 네로황제의 친위대(9천명)상당수 투입

결과 : 로마의 14개 구 중 10개 구가 잿더미로 변했고, 시가지 2/3 이상이 불에 탔다.

화재로 집을 잃은 사람 25만 명.

원인 : 시민들은 화재의 책임자로 네로 황제를 지목

평소 네로황제는 로마를 재개발하고자 했다(도시계획)

문제는? -> 골목길, 판잣집, 토지보상 등

화재 당시 네로 황제는, 로마에서 50km 떨어진 휴양지 안티움에서 휴가 중이었다. 로마에 불이 났다는 소식에도 휴양지에 더 머무르 다가 궁굴이 불에 탈 지경이라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로마로 갔다.

소문 : “황제가 높은 탑에 올라, 불타는 로마를 보며 현악에 맞추어 노래했다”

“그 노래는 ‘불타는 트로이’에 관한 것이었다”

소문을 낸 사람들 : 네로 황제에 반대하는 원로원 의원들

네로의 대응 : 기독교인에게 누명을 씌움

로마의 유대인 : 주전 2세기부터 거주, 네로 당시 만2천~만5천 명.

유대인의 조언->폽패아->네로의 결정 : 대화제의 책임을 기독교인에게 지게 했다.

3. 박해

바티칸 공원의 원형경기장(당시 이재민 수용) - 짐승 가죽을 씌운 다음 사나운 개가 물어뜯게 하였다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였다,

구멍 뚫린 바가지로 물을 푸게 한 뒤, 황소의 뿔에 묶어 죽을 때까지 끌고 다녔다.

4. 네로의 최후

민심이 나빠지자 원로원은 네로를 황제의 자리에서 쫓아내고, 네로는 자살하였다.

* 초대교회의 박해를 말할 때 가장 먼저 네로황제의 박해를 말하게 되는데, 이는 박해받은 기독교인의

숫자가 많아서가 아니라 고소 없이도 기독교인을 체포하거나 재산 몰수, 사형에 처하게 만든 최초의

황제라는 점에 그 이유가 있다.

그 전에는 유대인이나 로마인의 고소가 있을 때(황제숭배 반대 등) 심문한 뒤 처벌했고, 심문과정에서

배교하면 풀어주기도 했다.

-------------------------------------------------

Ⅱ.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

1.도미티안(도미티아누스 *51, 재위 81-96)

사도 요한을 밧모섬으로 귀양 보냄, 요한계시록의 배경

 

- 네로 황제의 몰락에서 도미티안 황제의 등극까지

: 네로 황제 자살(대화재 이후 4년만인 주후 68년)

1년 동안 네 명의 황제 난립(군인황제들)

최후의 승자 베스파시안(도미티안의 아버지)

* 유대 전쟁( 66-73년, 베스파시안 장군 -> 티투스 장군 ), 예루살렘 멸망

성전 파괴, 예언의 성취(막 13:2), 성전의 보물 약탈 -> 콜로세움 건립

 

2. 도미티안의 내치와 외치

내치 : 서민층에게 생활비 지원, 제대군인 연급지급 확대,

중산층 및 해방노예들 에게 관직에 오를 기회 확대

외치 : 게르만족 격퇴, 영국 정복

 

3. 황제숭배와 기독교 박해

로마 사람들은 황제가 죽게 되면, 그를 신으로 모시는 것이 관례였다

(주전 42년 율리우스 신, 주후 14년 아우구스투스 신 등)

살아 있는 황제를 신으로 숭배(도미티안 - “주 하나님”)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기독교인을 박해(교부 터툴리안은 도미티안 황제를 ‘제2의 네로’라고 불렀다.)

 

4. 사도 요한(에베소의 기독교 지도자)의 밧모섬 유배

유배 당시 90세,

밧모섬(에베소에서 90km, 화산도, 요한계시록 기록)

 

5. 박해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처형)와 플라비아 도미틸라(유배)

(로마교회 교인, 왕족, 도미틸라 카타콤)

 

6.최후

박해 시작한지 3년만에 암살당함(주후 96년)

수도방위 사령관, 경호대장, 황후 도미티아 롱기나 등이 공모하였다.

----------------------------------------------

. 트라얀 황제의 박해

 

1. 트라얀(트라야누스 53?, 재위 98-117)

5현제 중 두 번째 황제, 스페인 출신

루마니아 지역, 메소포타미아 지역 정복

 

주후 73년 로마군 장교(시리아 안디옥) 20

주후 78년 재무관

주후 84년 법무관

주후 86년 스페인 타라코넨시스 지방 주둔 제7군단 사령관

주후 91년 집정관

주후 97년 네르바 황제의 양자 겸 후계자가 됨

 

2. 트라얀 황제의 칙재서

 

비두니아와 본도의 총독이었던 소 플리니우스의 서한에 대한 답신

: 기독교인 박해에 대한 법률적 효력

 

플리니우스의 서한(질문) : “소신은 그동안 기독교인이라 고발당한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처리했습니다. 먼저 그들에게 기독교인인지 여부를 물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렇다고 대답하면, 사형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두 번, 세 번 같은 질문을 던졌나이다. 그래도 그들이 똑같은 대답을 하면 그들을 형장으로 보냈나이다” “고발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은 한때 신자였지만 신앙을 버린지 오래되었다고 하며, 폐하의 초상과 신들의 상에 경배하였고 그리스도를 저주하였나이다” “소신은 그들은 어느 정도로 처벌해야 할지 알지 못하나이다

 

트라얀 황제의 대답(칙재서) : “이러한 성질의 문제에 대해 보편타당한 규칙을 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을 검거하지 말라. 그러나 그들이 고발을 받아 죄가 드러난다면 처벌할지니라. 그러나 그들이 기독교인임을 부인하고 우리들의 신들 앞에 경배한다면 사면할지니라. 고발자의 이름이 없는 고발장은 접수하지 말라. 이러한 일은 우리 시대의 정신에도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3. 대표적 순교자

 

시므온(예루살렘 교회의 감독) - 이단자들이 고소하였다, 십자가형

이그나티우스(안디옥 교회의 감독) - 속사도 교부, 원형경기장에서 순교했다.

순교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하나님의 밀알, 그리스도의 순전한 떡,

하나님의 제물, 그리스도와의 합일)

---------------------------------------------------------

. 하드리안 황제의 박해

 

하드리안(*176, 재위 117-138) - 오현제 중 세 번째 황제, 스페인 출신,

트라얀 황제의 조카

1. 치적

감군정책 - 30개 군단을 28개 군단으로 줄임

하드리안 성벽(주후 122년 착공)-길이 117km,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국경

베누스(비너스) 신전 건설 - 미의 여신, 그리스신화의 아프로디테,

로마인들은 주전 4세기부터 숭배

만신전(판테온) 건설 - 그리스, 로마의 모든 신을 숭배

 

2. 바코크바 전쟁(주후 132-135) - 2차 유대전쟁,

유대인들이 로마의 압제에 대항하여 일으킨 최후의 대규모 독립전쟁

 

원인 : 하드리안 황제의 반유대인 정책

할례 금지법 제정 추진

예루살렘 성전 자리에 제우스 신전을 건축하려 함

예루살렘을 로마의 식민도시로 만들려 함

'바 코크바' - ‘별의 아들이라는 뜻, 유대인들이 정치적 메시아로 믿고 따름.

(랍비 아키바는 이 이름을 민 28:17과 연관시킴)

주후 132년 봉기 - 예루살렘에 주둔하던 로마 제 10군단을 몰아내고 독립국가 건설

엘르아살을 제사장으로 세우고 성전터에서 제사

성전 복구 공사, 금속화폐 발행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일부 지배(3년간), 게릴라전

 

경과 : 하드리안의 공격 - 10개 군단 동원, 1000개 유대인 마을과 요새 점령

유대인 50만 명 사망, 로마군 제22군단 거의 전멸

주후 134년 예루살렘 함락, 주후 135년 베테르 요새 함락(최후 항전)

바코크바 전사, 랍비 아키바는 로마군에 잡혀 사망

전쟁 후 : 유대인 축출(예루살렘과 주변 지역에 출입 금지) -> 세계 유랑민으로 전락

이스라엘 땅이 팔레스티나’(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이름 변경

제우스 신전 건설,

예루살렘이 콜로니아 앨리아 카피톨리나로 도시 이름 변경

 

3. 예루살렘 교회

바코크바 전쟁 때 요단강 동편으로 피난 (바코크바에 의한 기독교 핍박)

-> 유대인의 교회에서 이방인의 교회로

 

4.순교자

로마의 감독(재직 125-136) 텔레스포로스(헬라인)

----------------------------------------------------------

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박해

 

1. 안토니우스 피우스(*86, 재위 138-161)

 

하드리안 황제의 후계자

순교자 - 속사도 교부 폴뤼캅(“나는 86년 동안이나 그를 섬겨 왔는데, 그동안 그분은 나를 부당하게 대우한

일이 없다. 그런데 내가 어찌 나를 구원해 주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겠느냐?

나는 크리스챤이다.” ),

변증가 유스틴 - 『제일 변증서』를 안토니우스 황제에게 바쳤다.

 

 

2.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121, 재위 161-180)

(영화 ‘글레디에이터’에 나오는 황제)

 

하드리안 황제의 이종조카손자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의 양자 겸 사위

철학자 황제(후기 스토아 학파) - 『명상록』

스토아 철학 - 범신론, 하나님의 초월성보다 내재성 강조

인본주의 - 인간의 이성을 ‘신’으로 여겼다

(“인류를 사랑하라, 하나님을 따르라”)

 

기독교 박해 - 기독교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처벌하는 것을 원치 않았 다.

(로마제국의 통치에 명백히 반항하는 경우는 제외)

기독교인에 대한 생각 - 로마의 국가종교 거부, 지상 나라에 대한 애국심 결여, 비밀집회에서 혼음

순교자 - 유스틴과 6명의 교우들(주후 165년)

대규모 박해 - 갈리아 지방의 수도였던 루그두눔(주후 177년), 블란디나 등

 

----------------------------------------------------

Ⅵ.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박해

 

1. 콤모두스 황제(*161, 재위 180-192)

 

오현제 시대 마감, 레슬링 교사 나르키소스에 의해 암살.

역사가 유세비우스의 평가 - “그리스도인들의 형편은 좀더 편안해졌다”

카르타고 지역 박해 - 12명(남자 7명, 여자 5명) 재판

총독 사투르니누스 : “우리도 종교를 믿으니 우리 종교는 단순하도다(오류가 없도다).

우리는 황제폐하의 영령을 두고 맹세하며, 그의 만수무강을 위하여 기도와 제물을 드리니

이는 너희도 해야 할 의무라”

순교자 스페라투스 : “당신이 만일 잠잠히 듣는다면, 참된 단순함이 무엇인지 그 비밀을 전하리라”

순교자 도나타 : “황제는 황제로 받들라, 그러나 경외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라”

순교자 나르트잘루스 : “오늘 우리가 순교자로 하늘에 있게 되었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2. 황제의 난립

페르티낙스 황제(*126, 재위 193.1 - 193.3) - 노정치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황제(*133, 재위 193.3-193.6) - 북아프리카 총독

셉티미우스 세베루스(판노니아 총독),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영국 총독), 페스켄니우스 니게르(시리아 총독)

 

3. 셉티미우스 세베루스(*145, 재위 193-211)

팔레스타인 여행 도중 ‘메시아 대망사상'을 알게 되었다.

: 기독교, 유대교 개종 및 권유 금지

순교자 레오니데스 -교부 오리겐의 아버지,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사로 활동

순교자 페르페투아와 여종 펠리키타스(주후 203년)

: 카르타고의 원형 경기장에서 소와 검투사에게 죽음

황제의 작은 아들 ‘게타’의 생일 기념 행사였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주후 211년 영국 원정 도중 사망했다.

게타는 211년, 형 카라칼라에 의해 죽었다.

------------------------------------------------

Ⅶ. 막시미누스 트락스 황제의 박해

 

1. 막시미누스 트락스(군인 황제 시대의 시작, *173, 재위 235-238)

 

트라키아(발칸반도 동남부, 불가리아 그리스, 터키) 출신, 최전방 군대의 사령관

황제 알렉산더 세베루스와 황제의 모후 율리아 마매아(기독교에 우호적)를 살해하고 황제가 되었다.

 

2. 기독교에 대한 막시미누스 황제의 입장

 

군인 출신으로서, 기독교의 평화주의을 증오함

당시 로마제국은 징병제가 아닌 모병제였다.

당시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군 복무 반대하였다.( 교부 터툴리안, 힙폴뤼트, 오리겐 등)

3. 박해

 

교회 지도자들(감독, 장로, 집사) 처형 - 이유는 ‘복음 전파’

로마 교회의 감독이었던 폰티안과 힙폴뤼트를 사르디니아 섬으로 유배 -> 광산에서 중노동 -> 순교

오리게네스의 『순교론』 - 당시 오리겐은 팔레스타인의 가이사랴에서 신앙입문학교 운영

막시미누스 황제의 박해로 가이사랴 교회의 장로 프로텍토스, 집사 암브르시오스가 투옥됨

그들에게 헌정한 책이 『순교론』 -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제국 위정자들의 요구대로 이방신을 섬긴다거나

황제를 숭배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러한 요구는 순교를 하더라도 끝까지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갑바도기아 지방(소아시아 반도 중부)에 대한 박해

- 주후 235년 짧은 기간에 몇 차례 지진

그 지방의 이교도들이 지진의 책임을 기독교인에게 돌려 총독에게 고소했다.

총독 세레니아누스는 이를 받아들여 교회를 불태우고, 기독교인을 핍박했다.

 

4. 막시미누스의 최후

 

원로원이 반기를 들어 내전 상태에 들어갔다. -> 부하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

Ⅷ.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1. 데키우스(재위 249-251)

 

일루리곤(오늘날 세르비아) 출신, 원로원 의원, 서반아 총독, 로마 판윤 등

전통주의자(로마의 신 숭배, 황제들 숭배)

내우외환의 원인을, 로마가 '로마인 고유의 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복고주의 추진 : 로마의 전통적 종교를 활성화하였다.

기독교 등 외래종교에 대해서는 로마 정신의 쇠퇴라고 보았다.

 

2. 기독교 박해의 기본적 성격

 

로마제국 전체에 걸쳐 행해진 대규모의 조직적 박해였다.

광산 등에서 강제노동, 사형

 

3. 순교자

 

로마의 감독 파비안(재직 236-250) - 참수형

안디옥 감독 바뷜라스(재직 238-250) - 투옥 후 순교

예루살렘의 감독 알렉산더(재직 211-250) - 가이사랴 감옥에서 순교

교부 오리겐 - 가이사랴에서 신앙입문학교 운영하다 붙잡혀 고문당함, 후유증으로 순교

 

4. 배교

 

북아프리카 - 수도 카르타고, 교부 퀴프리안 피신

(『배교자론』 - “몇몇은 심문을 받기도 전에 주를 부인하기에 바빴다.

많은 사람을 미혹한 것은 자기 재산에 대한 맹목적 사랑이라”)

(구분) 순교자 - 고백자 - 도피자 - 배교자

로마(배교자 처리 문제로 분열)

감독 코르넬리우스(퀴프리안이 지지) : 교회는 노아의 방주, 방주에는 정결한 짐승과 함께 부정한 짐승도

들어갔다. 감독에게는 죄사함(배교자를 용서)의 권세가 있다.

반립감독 노바티안(고백자) : 교회는 성결한 사람들의 공동체

알렉산드리아 감독 뒤오니시오스(재직 247-265)의 증언 :

“어떤 이는 비겁함을 드러내어, 죽지도 못하고 제물을 바치지도 못하였다

어떤 이는 자기가 기독교인이었던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잡힌 자들 중 몇몇은 고문을 받은 후에, 앞으로 받을 고통을 생각하고 믿음을 버렸다”

----------------------------------------

Ⅸ. 발레리안 황제의 박해

 

1. 발레리안(190, 재위 253-260)

 

이탈리아 에트루리아의 귀족가문 출신, 집정관, 상부 게르마니아 사령관,

애밀리아누스의 반란 때 갈루스 황제를 도우려고 출정했다가 부하 장병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

 

2. 발레리안 황제의 기독교 박해 칙령

 

주후 257년 8월 칙령 반포 : 모든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이방 신전에서 제사지낼 것을 명함

-> 귀양, 집회 금지, 교회묘지 방문 금지

주후 258년 여름 두 번째 칙령 : 제사 거부하는 성직자에게 사형 선고

기독교를 믿는 원로원 의원도 사형, 귀부인은 재산 몰수, 귀양

궁정관리는 재산 압류, 강제 노역

 

3. 피해자

 

디오니시오스(알렉산드리아의 감독) : 리비아(북아프리카 중부)로 귀양 (257-260)

퀴프리안(카르타고의 감독) : 순교(258년)-참형

숙케수스 감독에게 보낸 편지(258년) “믿음에 굳게 서서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하며, 주님 의 도우심과 은혜로 영생의 면류관을 받기를 소원하였도다”

“우리 각 사람이 죽음을 가벼이 여기고, 대신 영생을 생각하며, 믿음이 충만하

며, 힘을 다해 주께 헌신하게 하라”

크쉬스토스 2세(로마의 감독) : 카타콤에서 예배 인도하던 중 체포-> 참형

라우렌티우스(로마교회의 집사장) : 참수형 or 뜨거운 철판(258년)

프룩투오수스(스페인 타라코의 감독) : 원형극장에서 화형(259년)

슬퍼하는 성도들에게 남긴 말 “하나님께서 새로운 목회자를 주실 것이다.

고통의 시간은 곧 지나가니 나 때문에 슬퍼하지 말라”

300명의 순교자(카르타고의 우티카) : 큰 구덩이 속에 불에 달군 석회석

구덩이 옆에 이방신의 제단 -> 선택 강요 -> 순교

4. 발레리안 황제의 최후

 

주후 259년 페르시아 원정 -> 260년 역병 발병 -> 샤푸르 1세와 정전협상

-> 페르시아 포로생활 중 사망(262년)

 

*발레리안 황제가 페르시아의 포로가 된 후, 아들 갈리에누스 황제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였다.

---------------------------------------------

Ⅹ. 디오클레티안 황제의 박해

 

1. 디오클레티안(*245, 재위 284-305)

군인황제 시대의 마지막 황제

사분지배 체제 - 로마제국을 넷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정치적 불안 해소 대책

서남(이태리, 스페인, 북아프리카) - 정제 막시미안 (수도 이태리의 밀라노)

서북(브리탄니아, 갈리아) - 부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동남(서아시아, 시리아, 애굽) - 정제 디오클레티안 (수도 터키의 니코메디아)

동북(발칸 반도) - 부제 갈레리우스

사분지배 체제의 영향 - 로마의 지위 격하, 원로원의 권위 격하

황제 디오클레티안 신격화 작업 : 제우스 신의 아들

공위 황제 막시미안도 신격화 : 헤라클레스(반신반인)

황제 신격화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입장

: 황제숭배 사상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딤전 4:7)에 근거한 것이므로 거부

 

2. 백부장 마르켈루스의 순교

주후 298년 북아프리카의 도시 팅기스(모로코 지역)

공위황제 막시미안의 생일(7월 21일 추정)에 맞춰 신격화 의식 거행

백부장 마르켈루스 의식 참여 거부 - 10월 29일 참수형 => 강경파(기독교 탄압)의 입지 강화

 

3. 장복술사들의 박해 - 태형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짐승의 내장으로 점을 쳐서 앞날을 예견

장복술사의 대표가, 점궤가 잘 나오지 않는 이유로 그리스도를 믿는 궁정의 종들을 지목

-> 이방신에 대한 제사 강요, 거부시 태형

 

4. 박해칙령의 반포

제1차 칙령(주후 303년 2월) - 교회 건물 파괴, 교회 재산 몰수, 성경 불태우기, 고문, 시민권 박탈

제2차 및 3차 칙령(주후 303년 여름, 연말) - 성직자 체포 및 구금, 성직자에게 이방신 제사 강요

제4차 칙령(304년 4월) -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방신 제사 강요, 거부시 강제노역 또는 사형

 

5. 니코메디아 교회의 수난

1차 칙령 반포 된 후 왕궁에 2차례 화재 발생 -> 디오클레티안 황제는 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인 에게 돌려 니코메디아 지역 그리스도인 수만 명을 화형시키거나 바다에 빠뜨려 죽임.

 

6. 게오르기오스의 순교

디오클레티안 황제의 근위대 장교

기독교인을 잡아들이라는 황제의 명령을 거부(주후 303년)

- 고문, 참형으로 순교

7. 데오클레티안이 사망하던 해(주후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 공인(밀라노 칙령)

 

[출처] 10대 박해|작성자 pastor 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