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박해의 역사 <10대 박해>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주로 황제들의 주도하에 일어났는바 그중에 대표적인 것을 요약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네로<Lucius Domitius Ahenobar-37-68.>의 박해.
기독교에 대한 로마의 박해 서곡은 네로황제<54-68재위>에 의하여 울려 퍼졌다.
네로의 본명은 루키우스도미티우스아헤노바르부스<Lucius Domitius Ahenobar-37-68>로서 클라우디우스황제의 양자였다.
클라우디우스황제는 가이우스도미티우스아헤노바루스의 부인이었던 아그리피나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아 들였는데 네로는 가이우스도미티우스아헤노바루스와 아그리피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었다.
네로의 어머니인 그리피나는 황제의 근위병들을 매수하여 남편인 클라우디우스황제를 독살하고 17세의 네로를 황제로 추대했다.
네로는 즉위 후 초기5년 동안은 근위대 장관이었던 브루루스와 철학자이며 스승이었던 세네카의 후원을 받아 훌륭하게 황제의 직무를 행사했다.
그는 해방된 노예들을 정부 기관에 등용했고 세금을 감면했으며 매관매직을 근절시키고 원로원의 의견을 존중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네로는 여자를 좋아하고 술과 가무를 즐겨하게 되면서 타락하기 시작했다. 네로는 점점 잔인하고 폭력적인 사람이 되어가면서 재위 5년째인 58년부터는 국정을 돌보지 않고 문란한 생활에 빠져들었다.
네로는 포페아사바나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하여 의붓 동생인 브리타니쿠스와 황후인 옥타비아와 어머니까지 살해했고 나중에는 포페아사바나마져 살해했다.
네로는 특히 근위대장관인 브루루스가 병사<病死>하고 세네카마저 은퇴하자 거의 반미치광이가 되어갔다.
네로는 헬라문화에 크게 심취하여 헬라의 체육, 예술을 로마에 도입했고 스스로 예술가를 자처하여 직접 무대에 섰다.
그는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4대제전<四大祭典>을 개최하고 직접 경기에 출전했다. 네로는 당시의 로마시를 없애고 헬라니즘적인 예술적 로마시를 건축하겠다는 야심에 불타 64년에 로마시 전체에 불을 질렀다.
이때에 네로는 로마로부터 수마일 떨어진 안티움궁전의 옥상에서 시인의 복장을 하고 칠현금을 뜯으며<트로이의 파괴>를 노래했다.
로마의 화재는 무려7일간이나 계속되었고 불길이 잡힌 뒤에도 3일간이나 계속되었다. 이때에 로마시의 14구역 중 10구역이 화재로인 하여 소실되었다.
로마의 화재가 진압되는 과정에서 네로가 헬라니즘적인 새로운 로마시를 건설하기 위하여 계획적으로 방화했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그가 시적 감흥을 얻기 위하여 방화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로마 시민들은 분노하였고 네로의 궁전으로 달려갔다. 범시민적 폭동이 일어나게 되자 네로는 당황하여 그것을 부인했으나 시민들은 납득하지 않았다.
이때에 네로의 측근들 중에 기독교인들을 증오하는 자들이 계책을 내 놓았다.
그것은 방화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씌우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네로는 로마의 화재가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각종 우상숭배를 증오하여 방화한 것이라고 선포하고 기독교인들에 대한 체포명령을 내렸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체포되었고 그들은 네로의 잔학한 방법들에 의하여 죽어갔다.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때로는 짐승들에게 찢기워 죽게 했고 때로는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거나 또는 화형에 처했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정원에 나무를 세워 그들을 묶어놓은 후 기름을 발라 화형에 처함으로서 그들이 인간봉화가 되게 하였다.
당시에 로마화재의 현장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역사가 타키투스는 당시의 상황들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황제의 거듭된 부인과 신들에게 바쳐진 희생제사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화재를 명령했다는 의심은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네로는 이 소문을 없애기 위하여 이미 배덕적 행위로 인하여 시민들의 증오를 받고 있던 기독교 신자들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이들을 잔혹하게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네로가 희생양으로 삼고자한 그리스도인들은 티베리우스<디베료>재위 기간 중에 폰티우스필라티우스<본디오빌라도>에 의해 처형된 인물을 추종하는 자들이다.(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악한 미신은 한동안 주춤했으나 곧 유대뿐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사교들이 모여들었던 로마에 다시 출현하였다. 그리하여 우선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했던 자들이 체포되었고 이들의 증언에 의하여 더 많은 숫자가 정죄 받게 되었다. 그 이유는 화재 자체라기보다는 이들이 인류를 증오했기 때문이었다.>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죽이기 전에 시민들을 위한 오락에 이용했다. 신자들 중 일부는 털옷을 덮어씌워 개들이 찢어 죽이게 하였고 또 다른 자들은 십자가에 처형하였다. 또 다른 이들은 몸에 불을 질러서 밤에 등불처럼 밝히게 하였다.
네로는 자기의 정원을 열어 이러한 쇼를 연출하였고 그는 마치 전차경주자처럼 옷을 입고 전차를 타고 돌아다님으로서 원형경기장에서 비참한 광경을 연출하였다.
이 때문에 시민들은 벌을 받아 마땅한 이 사람들에게 자비심을 느끼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일반인들의 분노를 가라 않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잔인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죽어갔기 때문이다.>
타키투스는 친 로마적인 역사가였으나 대체적으로 공평한 역사가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런 그가 예수님에 대해 언급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실존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그는 비록 기독교인들에게 우호적인 입장은 아니었으나 네로에 의한 기독교의 박해가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만행이었음을 증언했다.
그러나 네로에 의한 기독교 박해는 로마시로 한정되었다. 로마시 외의 기독교인들은 네로의 박해로부터 면제되었다.
그러나 로마시 외의 기독교인들이 네로의 박해에서 면제되었던 것은 네로의 칙령이 로마시내로 한정되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네로의 칙령은 당연히 전 로마적인 칙령이었다.
그러나 화재가 로마 전역의 화재가 아니라 로마시 만의 화재였기 때문에 로마시 외의 기독교인들이 로마시의 화재에 대한 책임을 질 이유도 없었지만 네로의 통치권은 이미 로마시내를 벋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로마의 원로원을 비롯한 지식인들은 드디어 네로를 불신하였고 따라서 네로를 더 이상의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와중에서 68년에 갈리아에서 네로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고 그 반란 이전 로마지역으로 확산되어 갈 때에 히스파니아<스페인>총독이었던 갈바가 로마로 진격했다.
이때에 원로원을 비롯한 각계각층이 갈바를 지원했고 심지어는 황제의 근위병들까지도 이에 합세했다. 네로는 측근 몇 명의 도움을 받아 시골로 달아나 어느 지하실에 숨어 있다가 군대가 몰려오자<세상이 나 같은 예술가를 잃는 구나>하고 비통해 하면서 부하의 칼에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2),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81-96 재위>의 박해.
네로가 퇴위된 후 정치적인 불안이 계속되는 가운데 69년 한 해에 네 명의 황제가 교체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불안정은 베스파시안<Vespasian>황제에 의하여 종식되었고 로마는 안정을 되찾았다.
네로의 기독교탄압에 대한 칙령이 철회된 것은 아니었으나 베스파시안황제는 더 이상 기독교를 탄압하지 않았다.
기독교는 베스파시안황제 치하에서 평안을 누렸으며 이 평안은 그의 아들 티투스<Titus>의 치하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티투스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가 황제에 등극하였을 때 상황이 달라졌다.
도미티아누스는 처음에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무관심했다. 그러나 그가 로마의 종교적 전통을 고집하면서 자신을 신격화 했을 때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다.
도미티아누스는 로마의 전통적인 종교를 자신의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리하여 로마 시민들에게 로마의 전통적 신들을 특별히 섬기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신으로 선포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그는 우선적으로 로마의 시민들이 로마의 전통적 신들을 특별히 섬기게 한 후 황제가 신들의 신이라고 선포하여 황제숭배를 강요했다. 로마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각종 서약서들에는<황제의 천재성에 걸고>라는 문구가 관습적으로 사용되었는데 도미티아누스는 그 문구를 황제의 공문서에 의무적으로 적용했다.
역사가들 중에는 도미티아누스의<황제-신>발상이 유대교인들이 예루살렘에 보내던 헌금을 황제에게 드리게 하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역사학자들은 고대 애굽왕 바로의 신격화를 모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유지를 위하여 매년 또는 수시로 예루살렘에 헌금을 보냈는데 기원70년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자 도미티아누스는 유대인들에게 그 헌금을 황제에게 바치라고 명령했다.
황제의 강압에 의하여 일부 유대인들이 황제에게 헌금했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것을 거절했다. 황제는 유대인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자신을 신으로 선포하고 황제 즉 신에게 헌금을 바치지 않는 자들을 가차 없이 처형하겠다고 선포했다.
황제는 자신의 명령의 지엄함을 증명하기 위하여 자신의 인척 중에 기독교인이었던 플라비우스 클레멘스<Flavius Clemens>와 그의 아내 플라비아도미틸라<Flavis Domitilla>를 처형했다.
이때에 로마에 다시금 기독교 박해의 열풍이 불어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했는데 유대교도 황제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에 함께 탄압받았다.
기독교인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로마를 떠나거나 또는 지하로 은둔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도미티아누스의 박해를 통하여 또 하나의 특별한 역사를 이루시었다. 그것은 황제의 박해에 의하여 밧모섬에 유배된 요한을 통하여<요한계시록>을 집필하신 것이다.
3)트라야누스<Trajanus-97-117.재위>의 박해.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트라야누스황제 때에 이르러 더욱 극심했다. 이때에 새로운 법령이 발표되었는데 기독교인만 아니면 아무리 극악무도한 흉악범이나 살인범이라 할지라도 극형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순교자 저스틴<Justin>은 자신의 저서인 변명론<apologia>에서<기독교인이라는 단어는 곧 죽음이라는 단어의 대명사가 되었다.>라고 증언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부의 대명사.. 형통의 대명사로 알고 있습니다. 어느새 복음은 쓰레기가 됐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가해진 박해는 점점 극심해져서 심지어는 그들을 산채로 소금에 절인 때도 있었고 길가의 높은 나무에 매달아 밤새도록 불로 태워 죽인 일도 있었다.
그러나 트라야누스황제의 기독교박해는 비시니아지방 총독의 기독교 박해에 대한 사건으로 인하여 크게 완화되었다.
기원112년 소아시아의 비시니아<Bithynia-비두니아-현재의 터키북부지방의 해안도시>지방 총독이던 소<小>플리니<Pliny the Younger>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처벌을 시행하는 와중에서 로마의 법치주의와 종교적 현실이 대립하게 됨에 따라 갈등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트라야누스황제에게 기독인들에 대한 처벌문제를 문의하는 공문을 보냈다.
전승에 의하면 플리니는 전형적인 로마인으로서 로마의 법과 전통을 존중하였던 공의로운 귀족이었다. 그가 비시니아지방 총독으로 부임했을 때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비시니아 지역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었고 기독교 이외의 이교도들은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이교도들의 신전이 남아 있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가 부임했을 때 기독교를 증오하는 어떤 자가 새로운 총독에게 환심을 사기 위하여 기독교인들의 명단을 고발했다.
총독은 기독교가 불법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사에 들어갔다. 이때에 소환된 자들은 자신들이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또는 과거에는 기독교신자였으나 현재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총독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들로 하여금 황제의 신상에게 향불을 피운 후 절하고 그리스도를 저주하라고 했다.
총독은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차라리 목숨을 버릴지언정 그와같은 배교 행위는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이런 존재입니다)
이때에 소환된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주장한 자들은 총독이 하라는 대로 한 후에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는 자들은 목숨을 버릴지언정 배교행위를 하지 않았다.
총독은 그들에게 세 번의 구명 기회를 주었으나 그들은 끝까지 배교를 하지 않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다. 총독은 그러한 자들을 처형했고 그 중에 로마시민권을 가진 자들은 로마법에 따라 처결하기 위하여 로마법정으로 이송했다. 당시에 로마시민은 오직 로마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어있었다.
이때에 총독은 두 가지의 의문을 갖게 되었다. 하나는 과연 기독교인들의 범죄 한 내용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과 다른 또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자신들의 신앙을 고수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총독은 기독교인들의 신조와 신앙생활을 자세하게 추적했다.
그러나 총독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은 범죄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모범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보십시오. 이것이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직을 받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얼굴에 똥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소문대로 인육을 먹거나 영아를 살해하여 제물로 바치거나 하지 않았으며 근친상간을 비롯한 부도덕한 성행위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동이트기 전에 함께 모여서 그리스도라는 사람을 찬양하고 그에게 기도하며 절도와 간음과 폭력 등등의 부도덕한 범죄들을 저지르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며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 것을 피차에 맹세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또한 과거에는 공동식사를 하기 위하여 함께 모였었으나 로마당국이 비밀집회를 금지한 후로는 그 모임도 중지했다. 총독은 조사결과에 만족할 수 없었다. 소문과 조사결과가 너무 대조적이었기 때문이다.
총독은 진실을 알아내기 위하여 두 명의 여신도들을 심하게 고문해 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총독은 매우 당황했다.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고 오히려 사회에 유익한 모범적 삶을 사는 자들을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처벌한다는 것은 로마의 법 정신에 위배되는 일이 거니와 로마의 정의로움에 크게 위배된다는 것이 그의 개념이었다.
총독은 기독인들에 대한 처벌문제를 일단 중지시킨 후 황제의 의견을 알아보기 위해 트라야누스황제에게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린 소년소녀들도 어른들처럼 가혹하게 처벌해야 합니까? 누구든지 기독교도가 되면 꼭 그렇게 처형되어야만 합니까? 그들은 실제로 무슨 나쁜 일을 한 것이 틀림없는 사실입니까? 만일 피고 스스로 기독교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를 놓아 주어도 되겠습니까?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시인하는 자들에 대해 저는 그들이 로마시민일 때에는 로마로 보내도록 하고 로마시민이 아닐 경우에는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허나 저는 그들은 고집이 너무 세기 때문에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바 입니다. 저는 그들이 폐하의 제단에 분향하고 그리스도를 욕하면 살려주려고 세 번이나 기회를 주었습니다. 저는 진짜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들어 왔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어떤 특정한날 동이트기 전에 서로 만나서 그리스도에게 찬송을 드리는 것 외에는 결코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남의 것을 훔치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제가 비밀집회를 금지한 후 그들이 그것을 포기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공동식사를 하기 위하여 계속 모입니다. 제게는 집사라고 불리 우는 여자 노예들이 몇 명 있는데 저는 그들을 고문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서 몇 가지 미친 생각들 이외에는 나쁜 것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어리석은 것에 감염되어 우리의 신전은 거의 텅 비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비시니아총독의 질의 공문에 대하여 트라야누스황제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황제의 답변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로마통치 영역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들은 로마의 법령에 따라야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처벌에 관해서는 별도로 규정한 법이 아직은 없다. 따라서 그들이 특별한 죄를 범하지 않는 한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색출해 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시간과 국력을 낭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고발된 자들은 로마법대로 처벌하라. 황제 신상에 분향하고 예를 올리는 자는 방면하되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은 처벌하라. 그러나 익명으로 고발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말라. 그것은 로마의 법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트라야누스황제의 칙령은 고도의 정치적인 방책이었다. 황제는 정치적 차원에서 로마의 법을 세워 로마제국과 황제의 위신과 자존심을 세우는 한편 불필요한 학정을 시행한다는 논란의 여지를 제거하였고 동시에 계속되는 기독교인들과의 마찰을 피했다. 황제신상에 예를 갖추지 않는 자들을 처벌해야 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절대 필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비록 그것이 황제들의 욕심에 의해서 세워진 비진리적인 법령이라 할지라도 일단 세워진 이상에는 지켜져야 로마제국의 권위가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황제는 로마제국과 황제의 권위를 위하여 그것을 여전히 고수하게 하는 반면에 특별한 죄를 범하지 않는 한 기독교인들을 고의적으로 색출하여 탄압하지 않게 함으로서 정치적인 안정을 도모하였다.
트라야누스황제의 칙령은 비시니아총독에게만 전달되었을 뿐이었고 다른 지역에는 전달되지 않았으나 그것은 비시니아에만 적용되지 않고 다른 지역으로도 확산 적용되었다.
이로서 로마사회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의 신앙이나 그들의 신앙적 삶이 국가나 사회에 어떤 위험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때문에 기독교를 적대시하던 자들이 오히려 기독교에 입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아울러 기독교에 대한 박해도 당분간은 주춤했다.
4)하드리아누스<Hadrianus-117-138.재위>의 박해.
기독교에 대한 트라야누스의 칙령은 트라야누스의 양자인 하드리아누스가 황제에 등극했을 때에도 여전히 유효했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는 로마의 전통적인 다신론주의 자였고 특히 황제신격화에 주력했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고집하면서 하나님 이외의 어떤 신을 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는 기독교를 심히 증오했다.
그는 소아시아의 총독 미누키우스폰다누스<Minucius Fundanus>에게 칙령을 내려 기독교인으로 고발되는 자들을 반드시 처형하라고 할 정도로 기독교를 박해했다.
그는 로마통치 하의 전역에 황제 신상을 비롯한 신상들을 세우고 그것들에게 경배하라고 명령했으며 그것을 거절하는 자들을 가차 없이 처형했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의 기독교 박해는 황제가 직접적으로 주도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지방 총독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것은 비시니아총독의 질의를 받은 트라야누스황제 때부터 이미 시작된 현상이었는데 이때에 황제들은 명분 없이 무고하고 모범적인 기독교인들을 탄압하는 것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어렵게 한다는 판단 하에 기독교에 대한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지방의 총독들에게 일임했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지방총독들의 통치 개념과 방법에 따라 기독교탄압의 양상이 달랐다. 어떤 지방의 총독은 무조건 기독교를 증오하고 탄압하는가 하면 또 어떤 지방의 총독은 기독교도들에게 뇌물을 받으면서 적당히 그 문제를 조율하였고 어떤 지방의 총독들은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여 기독교도들을 자유롭게 해주었다.
이때에 심지어는 남몰래 기독교를 받아들인 총독도 있었으나 정치적인 이유에서 그것을 철저하게 은폐했다.
5)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161-180.재위>의박해
하드리아누스의 통치가 끝나고 안토니우스피우스<Antonius Pius-138-161.재위>통치시대에 이르러 기독교는 일시적이나마 자유를 누렸다.
안토니우스황제는 기독교에 대하여 관대한 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의 치세 하에서 기독교박해가 재현되었다.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는 오랜 전쟁을 종식시킨 후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하여 로마의 전통적인 종교적 관습을 회복했다. 이러한 그의 정책에 가장 걸림돌이 된 것은 역시 기독교였다.
그는 황제에 의한 군주정치를 종식시키고 원로원에 의한 민주적, 공화적 정치체제를 구축했다. 그의 기독교 박해는 기독교인들이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로마의 전통적 종교관습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의 기독교박해는 처참할 정도로 잔인하고 공격적이었다.
그는 론<Rhone>계곡의 리용<Lyons>과 비엔나<Vienna>에 거주하던 기독교인들을 모두 고문하고 죽이라고 명령했으며 로마시민권을 가진 기독교인들은 목을 베어 죽였고 로마시민이 아닌 기독교도들은 짐승들의 밥이 되게 했다.
심지어는 감옥에서 죽은 기독교인들의 시체를 굶주린 개들에게 던져주어서 장례조차 지내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마르쿠스아울렐리우스 치세 때에는 역병이 극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흉년과 가뭄으로 인하여 기근이 극심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기독교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가중시켰다.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유일신 신앙인들로 보지 않고 신들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들로 보았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신들을 무시하고 섬기지 않음으로 신들이 진노하여 역병과 흉년 가믐 등등의 재난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기독교 박해에는 유대교인들도 한 몫 거들었다.
유대교인들은 기독교와는 달리 로마당국과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기독교탄압에 일조했다.
유대교인들이 기독교탄압에 동조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기독교가 유대교의 모든 전통들과 특히 율법을 무시하고 모독하여 훼파했기 때문이었고, 다른 또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을 메시야 처형의 주범들로 몰아세우면서 유대인들의 국가적, 민족적, 종교적, 멸망과 붕괴의 비극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메시야를 처형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조치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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