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선교

[스크랩] 그리스도의 사신 - 고후 5장 18-21절

하나님아들 2012. 10. 8. 23:10

이사야 45장 22-23절은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내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하였노라.”

 

오직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 외에는 다른 존재가 없으며 전 세계는 하나님만을 경배할 때가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빌립보서 2장 10-11절에 예수님께 적용해서 하십니다. 모든 무릎이 예수님의 이름에 꿇게 되고 모든 입이 예수님을 주라 시인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계획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부터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공동체요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도록 하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도록 하는 메시지를 항상 가지고 있으면서 전해야 할 사명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본문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살고 있는지를 말씀해주십니다. 우리는 이 땅에 어떤 사람으로 서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자신이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지를 평가해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직분

 

18절은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다”고 하십니다. ‘모든 것’은 17절에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는데 그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은 사람이 스스로 이루어 낸 업적이 아니고 하나님께로서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 된 사람”입니다. 18절에 “그가(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우리에게 주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화목하게 하는 직분”이라고 하십니다. 일차적으로는 바울이 자신과 함께 사역하는 사람들에 관해서 한 얘기이지만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어야 할 생각입니다.

 

‘화목’과 반대가 되는 것은 ‘불화’입니다. ‘불화’는 ‘벽/ 담’을 쌓고 있는 상태입니다. 적대의 담을. 로마서 5장 10절에 이런 관계를 ‘원수 관계’라고 했습니다. 누구와 누구 사이가 이렇다는 얘기입니까?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이렇다는 뜻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온 땅을 통치하시는 하나님과 피조물이요 하나님에 의해서 살고 있는 사람 사이가 이렇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존재였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잠깐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소외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화목하다”는 말은 이제 이런 적대의 담이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르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소외되도록 했던 죄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시고 하나님과 화목 관계를 이루도록 하셨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렇게 하신 것이죠. 그리고 화목하게 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위임하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는 바울의 직분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에 “그이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다”고 하십니다. 만물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직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19절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신다고 하십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그 존재나 사역하는 것이 일치가 됨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0장 30절에 말씀하신 대로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이 ‘화목’은 일시적인 관계가 아니고 영원한 관계입니다. 영원한 화목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셨습니다. ‘돌리다’는 말은 ‘계산하다. 계산해서 대금을 청구하다’는 뜻입니다. 죄에 대한 요구를 그들에게 요구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다.”고 하십니다. 18절의 “화목하게 하는 직분”은 바로 19절의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가진 사람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은 다 이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직분을 받았습니다.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감당하는 것은 곧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전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얼마나 위대한 직분으로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 하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가치가 있고 놀라운 일인가를 깨닫지 못하면 이 직분을 맡은 것도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직분의 위대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6장 3-10절에 죽 말씀하고 있지요.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했음을 말씀하시면서 온갖 고난을 다 견디고 이런 고난 가운데서도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산 이유는 이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신

 

바울은 20절에 자신이 어떤 존재로 살았는가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Christ′s ambassadors)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일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파견한 사신으로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왕이 어떤 얘기를 하면 사신이 그것을 전하는데, 사신이 하는 얘기는 왕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대사’는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보낸 분의 말을 하는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통해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고 있다”고 하고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한다.”고 합니다. 즉 이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메시지입니다. 이 메시지를 간청하는 마음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 간청하는 내용은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간절히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너희가 하나님과 화목 하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고린도후서 1장 1절에 이미 성도임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성화의 개념으로 보는 해석입니다(핫지). 이미 그리스도와 화목했는데 그 관계를 매일 확인해야 한다는 의미로 봅니다. 또 하나의 해석은 중생으로 보는 해석입니다. ‘너희’를 고린도 교회 교인이 아니라 일반 세상 사람들로 보는 것입니다(휴스).

 

이 말씀을 하시고 21절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놀라운 일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을 누구라고 하셨습니까?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라고 하십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 예수님의 생 전체를 놓고 결론적인 말씀을 하셨는데 예수님은 죄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46절에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그랬는데 아무도 예수님을 책잡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을 죄로 책잡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고 죄로 삼으신 것입니다. 죄가 없지만 우리의 죄를 대신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영원한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신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되는 것, 이 거룩한 교환이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 복음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신’은 보낸 자의 메시지를 반드시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신의 책임입니다. 역사 드라마를 보면 그런 일이 많이 있지요. 다른 나라와 아주 대적 관계에 있다고 해도 사신은 갑니다. 적에 들러 싸여 있어도 사신으로 온 사람은 해야 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이십니다(계 19장 16절). 온 땅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창조주이시오 장차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심판주이십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신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바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우리도 그리스도를 대신한 사신입니다.

 

예수님께서 직분을 맡길 때는 항상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디모데전서 1장 12절에 바울이 “나를 충성되이 여겨” 그랬는데 바로 이 마음이십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직분은 그 어느 것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 직분을 우리에게 맡기실 때는 항상 “충성되이, 신실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께서 직분을 맡기면 그것은 주님의 뜻에 맞게 할 것을, 믿을만하게 감당할 것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맡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 시대에 태어나게 하시고 이 시대에 함께 살아갈 사람들을 관련시켜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먼저 부르셔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이제 우리를 중심으로 일을 하시는데 이 땅에 태어나서 우리와 관련시켜 놓으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획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충성되이 여기시고 이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사신으로 보내었더니 맡기신 일은 하나도 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으로 비칠 수도 있고, 열심히 산 사람으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섰을 때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 예를 들어서 어떤 일을 맡기고 사신으로 보내었더니 그 지역만 실컷 구경하고 시간이 다 되니까 왔다고 해보십시오. 사신으로 왔다는 것은 다시 사신으로 보낸 사람 앞에 서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보낸 뜻을 제대로 시행했는지 보고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세상 구경만 실컷 하고 왔다고 해보십시오.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 마태복음 25장 26절에 말씀하신 대로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도록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신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으면 영원히 하나님과 화목할 수가 없고, 영원히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형벌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 5장 20절에 “간청하노니” 그랬는데, 이 말이 ‘청하다’(마 9장 38절. ‘청하여’) ‘구하다’(눅 5장 12절. 8장 28절 등) 등으로도 번역되었고, 주로 ‘기도하다’(눅 21장 36절. 눅 22장 32절. 행 8장 24절. 행 10장 2절 등)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의미를 가지는 말인데 이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서 기도할 때 얼마나 간절히 기도합니까?

 

예를 들어서 누가복음 5장 12절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 사람은 나병이 걸린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구합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고. 이때 이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구했겠습니까? 나병이 걸린 사람이 나병을 낫고자 했을 때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나병이 걸린 사람은 예배에 참여할 수도 없고 사람들의 사회에서 떨어져 살아야 했고, 사람들이 접근할 때는 자신이‘부정하다’고 소리쳐야 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떤 심정으로 구하겠습니까?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이런 기도하는 심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원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의지하여 복음을 전하는데 이런 간절한 마음이 없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간절한 마음이 성령님을 의지하는 데서도, 복음을 듣고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원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서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서 맡기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전하는 직분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 늘 자신을 돌아보고, 신실하게 이 일을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출처 : 목자의음성교회
글쓴이 : 이남수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