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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와 기독교 교육철학

하나님아들 2020. 6. 9. 12:52

교사와 기독교 교육철학

- 한춘기 교수(총신대)

트럼블( H.C.Trumbull )은 그의 “가르침과 교사”라는 책에서 “ ‘교사’의 자격이 없으면서 ‘교사’라 칭함을 받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오직 경력으로만 그를 ‘교사’가 되게 할 수 있을 뿐이지 실제적으로 그를 ‘교사’가 되게 할 수는 없다.“ 고 하였다. 이 말은 우리로 하여금 여기에서 다시 한번 교사의 본질에 대하여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이 글에서 논의 하고자 하는 주제는 교사에게 교육철학이 필요한지의 여부와 필요하다면 그것은 어떠한 교육철학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먼저 교사의 본질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1. 교사란 누구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은 세 가지 측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어원적, 본질적, 기능적인 측면이 그것들이다.

먼저 그 어원을 살펴보자. “디다스칼로스”는 ‘가르친다’에서 왔다. 이 ‘가르친다’는 말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무엇을 받아들이게 한다.” 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러한 의미는 현대교육철학자 Israel Scheffler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곧 그는 가르침을 “bringing someone to know"라고 정의함으로서 이 어원적 개념과 같은 정의를 내리고 있음을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디다스칼로스”의 어원적 정의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게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가르친다”또는 “교사”를 이러한 의미에 파악한다면 소크라테스가 자신은 선생이 아니라고 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이해 곧 소크라테스에 대한 이해는 두 가지 측면에서 가능한데, 하나는 덕(virtue)을 전하는 그로서는 이러한 덕은 가르침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지식을 갖게 되는 것은 가르침에 의한 것이 아니요 회상(re-collection)에 의한 것이라는 관점이다. “가르침”에 대한 이러한 의미에서의 이해는 선생의 역할에 대한 이해도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생에 대한 이해는 성경적이라기 보다는 인본주의적인 것으로서 “교사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올바른 해답을 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교사에 대한 개념은 먼저 위에서와 같이 그 어원에서 단서를 가져와야 할 것이다.

위에서와 같은 의미를 갖고 있는 “디다스칼로스”는 신약에서 59회 사용되었는데 대부분이 복음서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 각기 12회, 누가복음이 17회, 요한복음이 9회 합계 50회 ) 이 단어는 주로 예수님에게 대하여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주님의 사역의 성격은 이러한 “교사”의 함축적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로 교사의 본질적 측면을 통하여 살펴보자. 교사의 본질을 말함에 있어 두 가지를 강조할 수 있다. 즉 그는 하나님의 도구라는 것과 그는 소명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교사의 본질을 살펴보자. 사도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가가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롬 12:6-7)하라고 하셨다. 바울의 이 말을 보면 가르치는 일과 능력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말이 함의하고 있는 것은 가르치는 일의 주체적인 사역자는 하나님이시오 실천하는 사역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은사를 받은 사람인 교사라는 것이다.(엡 4;11) 그러므로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교사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떠한 지식을 갖게 하거나 무엇을 알게 하는 원인자가 아니요 그러한 일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세상의 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작동적인(operative)것이요 다른 하나는 협동적인(cooperative)것이다. 여기에서 작동적인 일이라 함은 마치 구두짓는 사람이 구두를 지을 때처럼 그것의 재료만을 필요로 하는 일과 같은 것이다. 반면에 협동적인 일이라 함은 농사일과 같은 것이다. 곧 농부가 농사를 지을 때 씨뿌리고, 물주고, 비료주는 일을 한다. 그리고 이 일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농사가 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자라나게 하시는 사역이 필요하다. 이것이 농사일과 구두짓는 일과의 차이요 협동적 사역과 작동적 사역의 차이이다.

교육은 둘 다 필요로 한다. 곧 교육에는 하나님의 사역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역도 필요하다. 따라서 교육이란 하나님과 협동하는 인간의 사역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바울의 말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즉 바울은 이에 대하여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전 3:4-6) “어떤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바울의 이러한 말은 교사는 교육을 행함에 있어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도구임에 불과한 것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주는 교사에 대한 함의는 다음과 같다.

하나, 교육은 교사자신의 생각이나 방법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방법대로 하는 것이다.
둘, 교재보다 교사 자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는 소명을 받은 사람이다. 위에서 인용한 로마서 구절은(12;6-7) “부르시는 자”와 “부르심을 받은 자”의 관점에서 볼 수도 있다. 곧 교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되는 것이지 자신의 의지와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의지와 능력으로 교사가 될 때에는 트럼블이 지적한 바대로 그는 명칭과 경력으로는 그렇게 될 수 있다 할지라도 그는 참 교사는 될 수는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소명과 사명의 차이를 느낄 수가 있다.

여기에서 사명이라 함은 자신의 뜻이나 결정에 따라 어떤 일을 행하는 것이요 반면에 소명이라 함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사의 본질에 근거하여 정의를 내린다면 교사는 이 교사직분을 위하여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의식이 투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세는 결과적으로 교사로 하여금 긍지를 갖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사의 긍지는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위와 능력으로 감당하고 있다는 의식에서 온다. 즉 교사가 갖고 있는 권위는 그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되는 것이다.

마태는 주님의 가르침과 바리새인 및 서기관들의 가르침과의 차이를 말할 때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9) 고 하였다. 이 말은 권위와 권위주의가 어떻게 다른가를 잘 말해준다. 곧 권위주의란 바리새인, 서기관의 가르침과 같이 그 가르침 자체에 능력이 있지는 아니하고 무조건적인 복종만을 요구하는 것이요 반면에 권위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와 같이 사람들로 하여금 순종하지 아니할 수 없도록 말씀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과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교사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것은 그가 소명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근거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교사의 기능적 측면을 통하여 살펴보자.
교사의 기능을 말함에 있어 두가지를 강조할 수 있다. 즉 그는 지도자의 일을 한다는 것과 양육자의 일을 한다는 것이다.

먼저 그는 지도하는 자의 일을 한다. 교사의 주된 사명은 자신에게 맡겨진 학생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사람으로 잘 지도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ale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웹 4;11-13) 여기에 교사의 지도에 대한 사명이 잘 나타나 있다. 첫째는 온전케 함(회복시킴)을, 둘째는 봉사의 일을 하게 함을, 셋째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움이 그것인데 이는 학생들이 교사의 지도함에 따름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학생들은 이러한 목표로 지도해 가는 교사들을 따라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장할 수 있다. 여기에서 교사가 지도한다는 것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영향력이 없이는 지도력을 발휘할 수도 지도자가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사란 자신이 설정해 놓은 기준을 향하여 그의 영향력을 통하여 학생들을 인도하고 지도해 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그는 양육자의 일을 한다. 양육 자로서의 일은 주님의 대위임령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여기에는 제자를 삼고, 세례를 줄 뿐 아니라, 가르치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양육의 개념을 좀 더 좁혀서 가르치는 일만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왜냐하면 교사는 누구나 잘 가르치기를 원한다. 문제는 “무엇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에 있는 것이다. 즉 문제는 어떻게 하면 그들을 잘 가르칠 수 있는 교사가 될 수 있는가 하는데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그 가르침의 준비의 조건들을 살펴보자.

하퍼(Harper)는 다음의 다섯 가지 요소를 지적하고 있다.
1) 기독교 인간관, 세계관, 문화관에 입각한 사고력이 있어야 한다.
2) 교과 자체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3) 아동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4) 교수 - 학습과정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5) 교수법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들이 구비됨으로서 교사는 양육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양육 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다. 이러한 양육으로서의 가르침은 교사들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땅히 주의 종은... 가르치기를 잘하며”(딤후 2;24)라고 하였는데 물론 이는 우선적으로 교역자들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또한 주교교사들에게도 주어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제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하는 의미에서 나이트의 글에서 ‘교사’란 누구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말하기를 “기독교 교사는 구원사역의 요원이다. 그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일을 하도록 불림을 받은 자이다. 그는 기꺼이 그리스도의 영 가운데서 사역하여 자기의 학생들이 예수님의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하는 자이다.“라 하였는데 그의 말은 우리에게 교사에 대한 개념을 좀 더 분명하게 해주고 있다.


2. 교사에게 철학이 필요한가?

이 물음은 교육철학이 있어야 하는가 하는 것과 마찬가지 질문이다. 이제 이 질문에 앞서서 먼저 철학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현대교육철학의 대표자들인 R.S.Peters와 Israel Scheffler에 따르면 철학이란 교육에 관계된 용어들의 개념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이트도 “근본적으로 피터스와 그의 동료들은 교육철학의 역할이 새로운 교육적 ‘주의(ism)이나 이념(ideology)을 계발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이데올로기의 의미를 보다 잘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러면 과연 교사에게 철학이 필요한가? 라는 물음을 살펴보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생각해 보자. “성경은 학교교과목과 연관이 있는가?” 또는 “주일학교 교사로서 성경을 학생들의 현실생활에 적용하도록 하고 있는가?” 여기에서 질문해 볼 수 있는 것은 위의 질문들과 교사의 철학이 관계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서 학교의 교과과정을 구성할 때에 그 조직자는 무엇이 중요한가를 정하고 그에 따라 교과과정을 구성해 가는 것이다. 무엇이 중요한가를 정할 때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교과과정을 구성하는 사람의 철학인 것이다. 다시 위에서 주어진 질문에로 돌아 가보자. 다시 말하여 그리스도인 교사는 성경과 교과목을 연관시켜 교육해야 하는가? 또는 그리스도인 교사로서 성경을 생활에 적용시켜 교육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하여 다음의 세 가지 반응이 예상된다.

1)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는가?
2) 그러한 필요성은 느끼나 방법이 없다.
3) 그러한 필요성을 느끼고 노력하고 있다.
먼저 1)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는가? 라는 부정적 반응에 대하여 논의해 보도록 하자.

그 이유로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첫 번째로는 성경은 구시대의 유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경 기록자의 문화, 습관, 지식수준이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르고 또한 성경을 받은 사람들도 지금의 우리의 형편과는 매우 다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교사라 하여 성경과 학교의 교과목을 연결 지으려는 태도는 잘못이라는 견해이다. 그러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그리스도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견해는 단순히 성경을 교과목에 적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 이상이라 할 수 있다. 곧 우리가 무엇보다 아끼는 기독교 신앙 자체에 반대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 하신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생각의 원인은 무엇인가?

① 이원론적 사상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지식 즉 신앙과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지식 즉 문화를 구분하는데서 온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의 생활은 이렇게 하고 주중의 생활은 저렇게 하는 이중적인 생활을 하는데 그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우리 한국교회는 선교 100년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믿음의 양식은 그리스도인이나 생활과 사고방식과 언어에는 이교도적인 요소들이 남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② 잘못된 기준의 설정 때문이다. 성경이 기준이 되어 다른 것을 판단할 때 올바른 성경적 교육이 확립되고 시행될 수 있는데 도리어 그 반대로 되어 왔기 때문이다. 즉 사람의 생각이 “신적”위치에 놓이고 그것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음으로서 성경을 “구시대적인”것으로 격하하여 파기하는 현상이 생기게 된 것이다.

두 번째로는 성경은 교과서도 아니고 현실생활의 지침을 위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즉 성경은 교과목을 가르치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그에 필요한 모든 원리와 지식을 말해 주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교과서”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 결코 성경이 “교과목”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르치는 사람의 신앙과 관련된 문제이다. 같은 자연세계를 바라볼 때에도 믿음이 없는 사람은 외면적 현상으로서의 아름다움만을 보고 노래하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 아름다움을 주시고, 유지시키시는 내면적인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도 함께 보고 노래하게 된다.(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이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교사로서 교과목을 가르칠 때도 마찬가지다. 가르치는 사람의 신앙에 따라 단순한 지식으로만 이해하고 가르치기도 하고, 반대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깨닫게 하고 가르칠 수도 있다. 이는 성경을 현실생활에 적용하는 것도 마찬가지 문제이다. 현재의 생활환경과 문화는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상황에서는 상상도 못하였을 정도로 발달되었는데 그 때의 기준을 지금도 적용시키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특히 당시의 유대인과 그들의 문화에 맞게 주어진 것이므로 지금은 관련을 지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과목에 대한 생각과 마찬가지로 생활하는 사람의 신앙문제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시의 의식법은 따르지 아니한다 하여도 진리에 대한 가르침은 지금도 적용하여 가르쳐야 한다.

2) 그러한 필요성은 느끼고 있으나 방법이 없다는 반응이다.
이러한 반응의 이유는 분명하다. 지금까지 학문따로, 신앙따로의 생활을 해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의 결과는 우리의 학문에 우리의 신앙이 구체적으로 적용이 되지 못하여 왔고 또한 영향도 끼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 교사라 할지라도 기독교 교육을 할 수 있고 또 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는 현실이 되지 못한 것이다. 즉, 성경을 듣고 배우되 그것을 지적인 것으로 받아 들였지,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던 것이 가져다 준 결과인 것이다. 자연히 신앙을 생활에 적용하는 방법, 자세, 교육에 대한 노력이 부족하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기독교 교육이 발전하지 못하여 그 방법을 제시하여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교육이 발전하지 못하였나를 생각해 보자.
① 피상적인 신앙생활 때문이다. 곧 신앙이 생활과 삶에 영항을 미칠 정도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② 지적인 면에서 진보가 없기 때문이다. 곧 무조건적 신앙으로 만족하였지 학문적인 연구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기독교사회 공동체의 풍토 때문이다.

즉 성경에 입각한 학문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신앙 또는 신학과 학문성의 양자가 같이 구비되어야 한다. 결과론 적으로 말하자면, 말씀에 기초한 신학 없이 학문만 발전할 때는 성경을 떠난 학문이 되고, 학문적 연구 없이 신앙만 깊어질 때는 영성이 개발되기는 하나 신비주의적으로 흐르게 되어 학문에 미치는 영향은 미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무엇보다도 마음속에 의가 없이는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말씀(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 늘....)을 생각한다면 이는 학문의 미개발의 문제라기 보다는 근원적으로는 영적인 면의 문제라 할 수 있다.

3) 이제 마지막으로 그러한 필요성을 느끼고 노력하고 있다는 반응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바로 기독교교육자들이다. 왜 노력하나? 교과목을 가르치되 성경적 관점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과학발전이 느리고 한계를 느끼는 것은 기초과학이 취약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독교교육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기초가 되는 철학의 부실이 기독교교육의 근본적인 왜곡과 취약성을 초래하였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인구의 약 1/4이 그리스도인이지만 아직도 온전한 의미에서의 기독교 학교가 없고(일부에서는 미션스쿨을 기독교하교로 오해하고도 있다) 기독교관점에서 쓰여진 책이 문교부의 검인정을 받으려 하여도 정부에 의하여 거부되는 것은 사회와 정부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책임과 문제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서 우리 총신대학 종교교육과와 기독교교육 연구소 그리고 총회 교육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매우 희망적이다. 그것은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문제를 의식하고 그것의 해결을 위하여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의 근거는 무엇인가? 곧 그러한 노력의 전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그것은 “성경은 모든 교과목 학습과 생활의 기초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바울의 말씀이다.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고 하셨다.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충분”하다는 것이지, “완전하다”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어느 학문에 대해서도 또한 현실생활에 대해서도 완전하게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다. 그것이 과학이나 역사나 사회학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신학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예; “삼위일체”의 의미는 성경에 충분히 나타나 있으나 그 용어는 말하고 있지 않다) eh한 모세도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다”(신 29;29)고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모든 것에 대하여 완전하게 알려 주신 것은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교과목의 기초가 되기에는 충분하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의 반응을 생각해 볼 때 우리 그리스도인 교사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상당히 까다로운 것이나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가능한 일이며 또한 그리스도인 교사가 해야할 일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바르게 판단하고 바르게 적용하며 바르게 나아갈 수 있을까? 그것은 올바른 철학으로 교사들이 무장함으로서만 가능한 일이다.
교사에게 있어서 철학의 필요성은 교육철학의 기능을 살펴봄으로서도 판단할 수 있다. 나이트는 “교육철학의 주된 과업은 교육자들로 하여금 전체적인 교육적 과정과 삶의 과정에 관한 의미 있는 사고를 할 수 있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학생들의 바라는 목표에 도달하도록 도와주는 지속적이고도 종합적인 프로그램을 계발할 수 있는 보다 나은 위치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러한 나이트의 철학의 목적과 기능을 살펴 볼 때 철학은 교사에게 본질적이며 교육사역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학문의 발전과 교육을 위해서는 교사 자신이 먼저 올바른 철학으로 정립하여야 한다.


3. 교사에게 어떤 철학이 필요한가?

위에서 교사가 철학을 필요로 함을 살펴보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 교사가 가져야 할 철학은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여기에서 어떤 철학이 필요한가라는 말은 선택의 대상이 다양함을 함의하고 있는 것이다.

한 예로서 나이트는 그의 “Philosophy & Education"에서 철학을 크게 그룹으로 묶어서 다루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네 가지로 나누고 있다.
① 전통적 철학(여기에서는 Idealism, Realism, 그리고 N대-Scholasticism을 포함시키고 있다)
② 현대철학(여기에는 Pragmatism, Existentialism을 포함시키고 있다)
③ 분석철학,
④ 기독교철학 으로 구분하고 있다.

여기에서 논의되어야 할 문제는 이러한 다양한 철학들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함에 있어서 그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선택이 개인의 성향에 따라, 자라난 문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절대적인 기준이 없이 상대적인 기준에 따라 어느 특정한 철학이 선택되어질 수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현대철학의 예에서 보더라도 실용주의나 실존주의의 철학은 주관주의적이거나 상대주의적인 성격을 띄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주관주의적이라는 것은 개인에 따라 다르게 될 수밖에 없음으로 결국에는 상대주의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대주의적 철학 곧 불확실한 형이상학, 주관적이며 상대적인 인식론과 가치관을 가지고 교사는 학생들을 올바로 진리로 인도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가치관이 다름으로 인하여 교사가 참 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학생들이 참 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게 되므로 교육이 성립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바라보는 관점도 다르다. 곧 인간관도 달라지게 된다.

성경은 분명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은 존재일 뿐 아니라(창 1;26-27)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시고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다”(시 8;5-6)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각양 철학들은 사람이 어떠하다고 말하고 있는가? “실용주의자들은 사람을 자신의 현재 경험을 확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행동하는 유기체라고 여긴다. 행동주의자들은 사람은 기계로서, 다른 사람을 조작할 수 있는 존재라고 본다. 실존주의자들은 사람이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건축할 수 있는 자율적인 개인이라고 상정한다.” 이에서 나타나듯이 다양한 철학의 인간관은 성경의 인간관과 분명히 구별된다. 이러한 구별은 필연적으로 교사관, 학생관, 교육목표, 교과과정, 그리고 교육방법론에 있어서도 차이를 가져오게 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 교사가 분명히 가져야 할 인간관과 교육관과는 거리가 있는 관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철학을 가지고 있어도 올바로 성경적 교육을 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분명한 성경적 교육관의 정립이 없이는 교사는 자기의 책임을 온전히 감당할 수가 없다. 따라서 비기독교 적인 철학은 그리스도인 교사에게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없다.

그러면 그리스도인 교사에게 필요한 것은 필연적으로 기독교철학이 될 수밖에 없다. 기독교철학이란 어떠한 것인가? 그것의 형이상학은 자연주의와 인본주의에 근거하지 아니하고 신본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교사는 자신과 학생에 대한 관점에서부터 교육목표, 내용, 과정, 그리고 방법론에 이르기까지 기독교형이상학 곧 모든 것의 출발점을 유일신 하나님에 뿌리박고 있다. EH한 기독교 인식론도 다른 철학의 인식론과 구별된다. 즉 지식의 원천으로는 감각, 이성, 계시, 직관, 그리고 권위를 말하고 있으나 각 철학의 특성에 따라 이것을 강조하기도 하고 저것을 무시하기도 한다. 경험론 자들은 감각을 지식의 원천으로 간주하는 반면에 , 이상주의자들은 이성을 지식의 원천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기독교 인식론에서는 경험주의나 이상주의의 인식론과는 달리 계시를 지식의 최고의 원천으로 삼고 여기에 감각과 이성을 보충으로 삼고 있다. 곧 진리의 근거에 큰 차이가 있음을 본다. 이러한 차이는 결국 모든 교육의 영역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 가치론도 전통적 철학이나 현대철학의 가치관과는 사뭇 다르다.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따라서 시대와 유행에 따라 변하는 다양한 철학가운데서도 영원히 변치 아니하는 근거를 가진 철학을 추구하고 그에 뿌리를 박아야 한다. 기독교 교육철학이 바로 그리스도인 교사들이 필요로 하는 철학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교사의 본분은 참다운 교육을 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의 여건 즉, 학생의 동기, 성숙도, 환경, 자료를 필요로 하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르치는 교사가 어떤 철학으로 무장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의 교육관을 성경으로 재조명할 때 참다운 기독교 교육철학이 가능하다. 또한 우리의 신앙에는 학문성을 더함으로서 참다운 기독교 교육철학이 가능하다. 그리 하므로 서 한국의 교회교육과 기독교교육을 책임진 우리 교사들이 올바른 교육관을 지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