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들 설교 모음

누가복음 8 - 새 술은 새 부대에

하나님아들 2020. 5. 13. 15:25

누가복음 8 - 새 술은 새 부대에

누가복음 5장 33절 - 6장 11절

 

지난 시간엔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치시고(5:17-26), 공적 죄인인 세리 마태를 제자를 부르심으로(5:27-32) 바리새인 서기관과 격돌하시는 장면들을 살펴보았는데, 오늘 본문에는 금식과 안식일에 관한 문제로 예수님이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충돌하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런 갈등과 충돌이 쌓여 결국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는데, 이제는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주시는 교훈들을 하나씩 살펴봅니다.

 

I. 금식에 관하여 (5:33-35).

 

어느 날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5:33)라고 말하며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모두가 하는 금식을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하지 않느냐? 라고 비판해왔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셨습니다.

 

1. 먼저, “신랑이 있을 때는 금식할 수 없다.”하십니다(34).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금식을 하지 않느냐?”(33)는 질문에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34)라고 되물으셨습니다. 유대인의 혼인잔치는 보통 일주일 동안 진행이 되는데, 이 잔치에 신랑의 들러리로 참석한 친구들은 일주일 동안 신랑과 함께하며 잔치의 마지막 날 신랑을 신부의 방에 데려다 준 후에야 비로소 잔치 집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잔치 집을 떠난 후에는 집으로 돌아가 금식에 들어갈 수 있지만, 신랑과 함께 하는 일주일 동안은 신랑과 함께 기쁨의 순간들을 같이해야 하는 것이 들러리가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7)하십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은 기본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삶입니다.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하신 말씀처럼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 자체를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2. 두 번째,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라 하십니다(35).

 

“신랑을 빼앗길 날” 즉,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저들의 곁을 떠날 때가 올 것인데, 이때부터는 믿음을 지키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금식이 필요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처럼, 공생애를 마치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제자들의 곁을 떠나셨습니다. 이후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초대교회가 탄생했지만, 제자들에 대한 본격적인 핍박도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선 기도와 금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II. 안식일 이삭을 잘라 먹은 일(6:1-5).

 

6장 1절부터 11절까지는 바리새인 서기관과 같은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예민하게 여기던 안식일에 관한 문제로 충돌하셨는데, 이 과정에서 예수님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6:5)는 파격적인 말씀으로 저들을 격노케 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1절부터 5절까지는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은 일로, 6절부터 11절까지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일로 저들과 충돌을 겪으셨는데,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1.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은 일로 비판을 받으셨습니다(1,2).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여기서 길을 가던 나그네가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남의 밭에서 곡식을 따서 먹는 것은 율법에서도 허용한 것입니다. 따서 가져가는 것은 도적질에 해당되지만, 허기를 채우기 위해 그 자리에서 따서 먹는 것은 율법에서도 허용하고 있는 것입니다(신 23:25).

 

바리새인 서기관이 문제 삼은 것은 이삭을 먹은 것 자체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이삭을 자르고 껍질을 벗기기 위해 손으로 비빈 것을 안식일에 해선 안 될 추수와 타작(탈곡)의 행위로 규정하고 이를 문제 삼은 것입니다. 안식일에 지켜야 할 규례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만들어 놓고는 이를 어겼다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책망한 것입니다.

 

2. 이런 비판에 대해 예수님은 다윗의 사건을 들어 율법에 대한 저들의 편협한 생각을 비판하셨습니다(3,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하십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길 때, 급하게 놉 땅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았다가 성막에 있는 진설병을 먹은 사무엘상 21장(1-6절)의 사건을 일예로 드신 것입니다.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제사장이 아닌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먹은 것은 분명히 율법의 규례들을 어긴 것이지만, 이는 다윗과 그의 부하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기에 당시의 제사장인 아히멜렉도 또 하나님도 이를 문제 삼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은 사랑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십계명으로 요약되는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진설병을 먹고 안식일에 대한 복잡한 규례들을 지키는 것보다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의 법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분명히 선언하신 것입니다.

 

3.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 하십니다(5).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은 사건으로 바리새인 서기관과 논쟁을 벌이던 예수님이 다윗의 일례를 들어 형식주의에 빠진 저들을 비판하시더니,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파격적인 선언을 하셨습니다.

 

a.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는데,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말씀의 첫 번째 의미는 안식일을 제정하신 분이 바로 인자, 즉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시라는 겁니다. 천지 창조에 함께 하신 예수님이(창 1:1-3) 안식일도 제정하셨기에(창 2:1-3)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궁극적인 판단과 기준도 예수님이 내리시는 것이라는 선언인 것입니다.

 

b.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말씀의 두 번째 의미는 안식일은 안식일을 제정하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지켜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초대교회가 탄생하고 유대인이 중심이던 교회가 차츰 이방인이 중심이 된 교회로 바뀌어가면서 이 안식일이 예수님의 부활과 오순절 마가에 다락방에서 성령이 강림하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로 바뀌어가게 되었는데, 주일(主日)이라는 표현 자체가 주님의 날(Lord's Day)라는 뜻입니다.

 

구약 시대에 지켜지던 안식일이 ‘안식한다.’ 즉 쉰다는 의미가 강조되었다면, 교회가 지키는 주일은 주님을 중심으로 보내는 날이라는 의미가 강조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하신 말씀의 의미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주일(Lord's Day) 성수를 통해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III.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심(6-11)

 

1절부터 5절까지가 예수님과 바리새인 서기관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따서 비벼 먹은 일로 충돌한 사건을 기록했다면, 6절부터 11절까지는 이 일이 있은 뒤, 예수님의 행동을 지켜보던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또 다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예수님과 충돌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1.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행동을 엿보았다 하십니다(6,7).

 

안식일에 관한 문제로 예수님과 논쟁을 벌인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고소할 핑계를 얻고자 안식일에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시는 지를 엿보았다(watched) 했습니다(7). 정황을 살피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일부러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 앞에 오른손 마른 사람을 데려간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하튼 지난 번 안식일 문제로 부딪혔다가 오히려 면박을 받은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마치 함정을 파놓고 빠지기를 기다리는 사냥꾼처럼 예수님을 넘어뜨릴 빌미를 얻고자 미묘한 상황을 만들어 예수님의 행동을 엿본 것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하십니다. 교회에서 운영하는 카페와 블로그에도 가끔 보면 꼬투리를 잡기 위해 지켜보다가,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글들이 올라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비판과 조롱의 댓글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논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댓글을 차단하면 자신들이 운영하는 블로그를 통해 모함하는 글을 남기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행동을 엿보며 공격할 기회를 찾던 바리새인 서기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영적인 대적들이 있다는 겁니다. 이런 영적 대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언제나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 하십니다(8,9).

 

예수님은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안식일에 오른 손 마른 자를 어떻게 하시는 지 엿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심에도(7), 이 사람을 회중 가운데 세우시더니(8) 저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9)라고 질문하셨습니다.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 질문에 바리새인 서기관이 대답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선한 행위나, 악한 행위나 상관없으니 아무 행위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대답을 하고 싶었을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을 이해하는 저들의 생각의 한계인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우리가 안식일이 주일(Lord's Day)로 변하게 된 과정을 살펴보았는데, 안식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선을 행하는 날로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일을 성수하는 원칙이 바로 이래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일은 안식일을 가장 의미 있게 보낸 행위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IV. 새 술은 새 부대에(5:36-39).

 

안식일에 관한 문제, 넓게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어떻게 보고 해석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로 바리새인 서기관과 충돌을 겪으신 예수님은 이 문제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비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바로 ‘새 옷과 낡은 옷’ 그리고 ‘새 포도주와 새 가죽부대’에 관한 비유입니다.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36-38)하십니다.

 

옷을 빨면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는 새 옷을 찢어서 탄력이 없는 낡은 옷에 붙이면 새 옷과 낡은 옷 모두를 버리게 되는 것이고, 발효가 끝나지 않은 새 포도주를 역시 탄성이 사라진 낡은 가죽부대에 넣으면 가죽부대가 찢어져 포도주와 가죽부대를 모두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둘 모두를 보존할 수 있다는 겁니다.

 

1. 새 술은 새 부대에(38).

 

여기서 말씀하는 새 포도주는 예수님을 통해서 주시는 새로운 교훈을 의미합니다. 이 새로운 교훈을 받아들이려면, 율법주의라고 하는 낡은 가죽부대, 즉 낡은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새 포도주, 즉 은혜의 시대에 주시는 새로운 교훈을 받아들이려면, 새 부대 즉 예수님의 생각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새로운 마음을 예비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등장하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도 예수님의 교훈을 수용하는 좋은 마음 밭을 예비해야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을 수 있다 하십니다. 아무리 말씀의 씨앗이 좋아도 이미 율법주의라고 하는 옛 생각으로 단단해진 길가 밭과 같은 단단한 마음 밭에 뿌리면 결실을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겁니다.

 

2.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사람이 없다 하십니다(39).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38)는 교훈을 주시면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39)였습니다. 이미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교훈에 길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관한 말씀을 전할 때도, 이미 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들보다 차라리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훨씬 쉽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블로그를 통해 처음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신학적 편견 없이 말씀을 대하기 때문에 훨씬 쉽게 종말과 재림에 관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38)는 의미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V. 결 론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할 수 없으나(5:34), 신랑을 빼앗길 때가 오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라 하십니다(5:35). 신랑이 떠난 지금은 금식과 기도로 깨어 믿음을 지키고 사명을 감당할 때라는 뜻입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 하십니다(6:7). 안식일, 즉 주일은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님의 뜻을 행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으라(5:38)하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새로운 교훈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편견 없는 새 부대, 즉 좋은 마음 밭을 준비해야 한다 하십니다.

[출처] 누가복음 8 - 새 술은 새 부대에|작성자 예레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