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하는 믿음[4] 성경: 약1:19-27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19)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20)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 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21).
“듣는 것을 속히 하고 말하는 것과 성내는 것을 더디 하라고 합니다. 성내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여야 바른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22)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23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24)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25)
“그러나 귀로써 듣기만 하는 것은 거울을 보기는 하고 잊어버리는 사람처럼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정말 듣는 것은 행동을 고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26)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27).
“고친 사람은 혀를 재갈 먹이는 사람이요, 자신만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실재로 도우는 실천을 하고, 또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의 중심에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것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올 김용옥은 자신의 책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마가복음의 역사성을 부정합니다. 그런데 공자의 생애를 기록한 사마천이 쓴 공자의 기록은 역사성이 있다고 높게 평가합니다. 공자의 생애에 관한 유일한 책인 사마천의 공자 이야기는 공자가 죽은 지 400년 후 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마가는 예수님 당대 사람이며, 예수님을 눈으로 본 사람입니다. 그의 생애 중에 마가복음은 기록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죽은 후 400년 후에 쓴 것과 당시대 함께 산 목격자의 기록 중 어느 것에 더 역사성이 있습니까.
헬라의 영웅 알렉산더 대왕의 전기는 죽은 지 약 400년 후에 ‘아리안’과 ‘플루타크’에 의해서 쓰였습니다. 지금 아이들이 읽고 있는 책은 바로 이 기록에 의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시대 로마 황제는 ‘디베리우스’입니다. 그에 관한 역사 기록은 ‘디오 카시우스’에 의해 기록된 디베리우스 황제의 역사는 그의 사망 190년 후에 쓰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관한 기록은 언제, 누가 썼습니까. 복음서는 당시에 살던 사람들이 그 당시에 기록했습니다.이런 사실은 예수님에 관한 성경의 기록은 고대 동·서양의 문헌 중에서 가장 탁월한 역사성을 가졌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이야기입니다. 그것에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이 감동을 하신 특별한 책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한번만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직접 한번 들으면 진짜로 잘 믿겠다. 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주신 성경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부터 인류의 마지막 심판까지 또 여러분 개인의 문제에 이르기 까지 하나님이 세세히 답을 주고 말씀을 하고 계시는 현장이요, 생생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알베르토 망구엘은‘`읽기의 역사’에서 인류사는 읽기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망구엘은 `읽기'를 `의미를 알아내는 행위'라고 설명했습니다. 농부들은 날씨를 알기 위해 하늘을 읽었고, 어부들은 바닷물의 흐름을 읽어야 했습니다. 의사들은 환자의 증상을 통해 병을 읽어냈습니다. 사랑이 열매를 맺으려면 연인의 마음을 읽어야 했고, 음악은 악보를 읽어야 연주가 가능하지 않습니까. 데카르트의 어법대로 말한다, 면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말이 됩니다.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읽기가 미흡하면 곧 퇴보입니다. 국민 독서 율을 보면 그 나라의 선진화, 국격을 알 수 있다는 게 정설입니다. 무엇을 읽고 있는가, 그것이 그의 미래를 만듭니다.성경입니다. 여러분은 성경말씀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여깁니까.
야고보서 전체의 핵심은 온전한 믿음입니다. 온전한 믿음은 무엇이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이것은 성숙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성숙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앞에 있는 18절을 읽습니다.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우리는 말씀으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벧전1:23절 말씀을 읽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거듭난 것은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태어난 거듭나 신자는 자라야 하고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거듭나는 것을 대단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출발이며, 시작입니다.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절은“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거듭남은 신앙의 시작이며, 문제의 해결이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거듭난 사람이 자라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새 생명이요, 갓 난 어린 아이들 같은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자라는 길은 젖입니다. 젖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먹을 줄 모르고, 말씀을 묵상할 줄도 모르고, 말씀이 갈급하지 않고, 깨달아 지지 않으면 결단코 자랄 수 없다. 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핵심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당시 교회는 개인에게 성경을 주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라틴어입니다. 천주교는 말씀이 없었습니다. 많은 의식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개인적으로 성경을 묵상하고, 연구하고, 읽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말씀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자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할 것입니까,
1. 말씀을 받아라.
어머니가 방을 향하여 "애야, T. V를 끄고 네 방에 가서 자거라." 아이는 말합니다. "알았어요" 그러나 그 아이는 T. V를 끄거나 자러 갈 낌새가 전혀 없어 보입니다. 한 5분 후에 어머니는 다시 소리를 지릅니다. "내 말 들었니?" 아이는 “예 알았어요,"라고 대답함으로 자신이 어머니의 말을 들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내 말 들었니."라고 물은 진정한 의도는 아이가 말의 핵심을 알았냐, 를 물은 것입니다. 그 다음 어머니의 할 말은 “야 당장 T. V를 끄고 네 방으로 올라가지 못 하겠니," 라는 말입니다. 듣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따르는 것이요, 말을 따르는 행동을 말합니다.
19절을 읽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들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말씀을 시작합니다. 속히 들으라고 하십니다. 말하는 것은 더디 하라, 고 하십니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들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제노라는 희랍의 철학자, 듣는 것은 말하는 것보다 배로 하라고 귀둘 입 하나를 주셨다. 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성들은 양 귀로 듣고 한입으로 나옵니다. 남성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나갑니다. 잘 듣는 것이 성장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잘 들읍시다.
21절에는 “그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하십니다. 온유의 반대가 분노입니다.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는 사람을 온유한 자라고 하십니다. 분노가 있는 사람은 남의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온유한 자가 듣습니다. 20절을 봅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화를 내고 성을 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그분을 닮는 것이며 그것은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알랙산드 대왕은 평생 후회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친구이자 자신의 참모인 클레토스를 술김에 모욕을 했다고 창을 던져서 죽였습니다.
그는 평생에 후회하였다, 는 것입니다. 화, 열, 분노가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나, 우리가 성장하는 것을 가로 막는 것입니다. 좋은 분노가 있습니다, 마딘 루터나 예수님은 그런 분노를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조절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파괴적인 분노를 말하는데 화를 내는 것, 성질을 부리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함부로 성내면 우리 속에 악한 것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입니다. 물통의 오물처럼 다 나온다. 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에게 옛사람 육이라는 것이 있는데 분노는 이것을 흔들고 움직여서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무너지게 합니다.
21절을 보면 마음에 심긴 말씀이 라고 하십니다. 잘 심어야 합니다. 순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말씀을 들으면 마음에 심어집니다. 그리고 자라는 것입니다. 말씀은 세상의 어떤 정보나 지식과 다릅니다. 말씀은 우리 신앙의 모든 것입니다. 말씀을 제쳐두고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고, 구원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대하면 우리를 책망하는 많은 말씀을 만납니다. 그때 받아들이고 순종하면 마음의 잡초가 뽑혀집니다. 그리고 말씀이 심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고후1:20) 이것이 듣는 것의 실상입니다.
2. 말씀을 행하라.
25절을 읽습니다.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실천하는 사람이 복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22절에는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라고 하십니다. 듣기만 하면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정말 이 말씀을 붙잡고 살겠다는 의도가 없으면 변화가 없습니다. 행하지 않는 사람은 23-24절에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나오는 말씀처럼 거울을 보고 잊어버리는 사람과 같다. 는 것입니다. 머리와 입,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보고 씻고, 닦아야 하는데 보기만 하고 딱지 않고, 바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성전에 발을 디디면 첫 번째 번제 단과 마주칩니다. 여기서 피를 취합니다. 그리고 조금 앞으로 나가면 물두멍이 나옵니다. 이것은 놋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그것에 자신의 얼굴이 보입니다. 그는 물두멍에서 몸을 씻습니다. 그리고 성소 안으로 들어갑니다. 신앙인이 행함이 없다면 거울을 보기는 했으나 바로 자신의 모습을 잊은 자입니다. 25절을 봅니다.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주님은 우리를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을 순종할 때이며 이때 진정한 자유가 주님으로부터 주어집니다. “들여다보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태도이어야 합니다.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지식을 얻기 위해서, 형식으로 말씀을 보거나 듣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적용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복을 받을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 목사님이 부임했습니다. 두 번째 주일 또 그 설교를 하십니다. 세 번째 주일 또 그 설교 했습니다.교인들이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행하셨나요, 실천하셨나요, 여러분이 그렇게 살 때 나는 다른 설교를 하겠습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사실 듣기만 하는 것, 공부만 하는 것, 읽기만 하는 것이 행하지 않는 다면 무슨 뜻이 있습니까. 시간 낭비 아닙니까.
3. 말씀을 나누라.
행하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오늘 성경은 나누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숙이요 온전한 믿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입니다. 거룩한 것이 경건과 같은 것인데 첫째는 언어를 다스리는 것 (26절) 둘째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27절). 구별된 사람, 세상과 다른 것이 있어야 매력이 있고,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이 있어야 나눌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성경은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무엇을 안 하는 것이 경건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들에 대한 돌봄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예: 명절에 곤지암의 소머리 국밥) 한 영국 사람이 고아들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많아 져서 사역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오만번이나 응답을 받은 물러 라는 사람입니다. 복을 받은 사람은 복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적극적인 실천입니다. 우리는 크게 도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무엇을 하지 못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할 때 미국 교인들이 주머니에다 무엇을 넣어줍니다. 나중에 보면 1불 2불이라는 것입니다. (예: 정남수교수 대학원 지영림권사 토큰) 매달 5불씩 보내준 사람도 있었다. 고합니다. 크게 약속을 해놓고 감당하지 못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성경은 그것이 바로 성숙한 삶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김민태형제: 스승의 날 카드 한 장, 손수건 선물, 권영국 장로 난닝과 팬티)
결론
어느 의사가 개인병원을 개업하였습니다. 그는 늦은 밤 문을 닫으면 직원들을 퇴근시키고 금고 앞에 앉아 그 날 번 돈을 세면서 하루의 피곤을 씻곤 하였습니다. 매 순간의 관심은 돈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 책상 위에 돈을 쌓아 놓고 열심히 세던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가면 무엇이라 보고 드릴 것인가? 환자들을 고치고 돈만 세다 왔다고 보고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할 때 부끄러워 얼굴이 뜨거워짐을 느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이 말씀이었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단12;3) 그 의사는 그 후부터는 환자들이 오면 가장 약할 때를 이용하여 사랑하여 주고 정성을 다 하여 치료하여 주고 전도하였습니다. 병과 죽음과 내세에 대하여 말하면서 치료하였습니다. 밤이 되면 돈도 세고 그 날 영혼 구원받은 명단을 놓고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부터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은 생각하니 그렇게 일이 보람되고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병원도 잘 되고 있다는 간증입니다.
오늘 성경은 거듭난 어린 아이에서 성장하고 자라라고 하십니다. 듣는 귀와 절제하는 입술, 분노를 자제하는 것, 고아와 과부를 돕는 것은 우리가 당연히 할 일이지만 이런 실천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영적인 성숙은 순종하면 그냥 순식간에 찾아옵니다. 중요한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마음에 심기고 자라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를 맺습니다.
조영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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