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2. 28. 13:33 |
요한복음 14장 8절 이하
에디 리컨베커 선장과 두 선원은 태평양을 횡단하다가 배가 파선되어 20일간이나 뗏목을 타고 표류하다가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그들이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작열하는 태양과 그로 인한 목마름, 밤이면 추위, 그리고 상어 떼들이었다. 탈수와 기갈, 뜨거움과 상어의 공포 때문에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며칠이 지나자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베커 선장은 하나님은 물 가운데로 지날 때 물이 침몰치 못하고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불이 거스리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하심 그리고 기도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께 계속 기도로 매달렸다.
드디어 하루는 갈매기가 날아와서 선장의 머리 위에 앉았다. 그들은 그 갈매기를 잡아서 오랜만에 요기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고기를 미끼로 낚시질을 하였다. 계속 끼니가 이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비가 내림으로 물도 마셨다. 불볕더위도 해소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인하였고 더욱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 후 두 주일 만에 기적적으로 구조되었다. 그들에게 신문 기자들이 어떻게 그 엄청난 공포와 역경, 배고픔과 뜨거움, 무서움과 초조함을 이겼느냐고 물었다. 선장의 대답은 꼭 한 마디였다.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하였다.'
마태복음 4장에는 예수님의 유명한 말씀이 있다. “마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이러한 류의 말씀은 성경 곳곳에서 발견된다.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도 “나를 따라오려거든”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신앙 생활을 진지하게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거쳐 가는 관문 중에 하나가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고민이다.
이것은 어떤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고민이 아니다. 성경을 보다보면 자연스럽게 그러한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 자체, 또는 예수님의 메시지 자체가 그러한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닮는 것을 요청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수많은 계명들을 말하고 있지만 그 계명이 지향하는 방향은 분명하다. 바로 하나님 자신이며, 예수 그리스도다.
우리가 성경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의 모습은 분명히 하나님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라고 말씀하시며, 18절에서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라고 말씀하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현시하신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오늘 본문 속에서 빌립이 “주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옵소서”라고 예수님에게 요청을 하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아마도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늘 잠재되어 있는 기도의 제목이 아닐까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면’, 이러한 욕구들이 늘 우리의 마음 속에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과 신앙이 더욱더 증진이 되고 좋을 텐데.’ 어떤 이들은 자신이 예수님 당시에 태어났으면 신앙생활을 잘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과연 그럴지 의문이지만, 어째든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는 빌립과 같은 그러한 마음이 내재되어 있을 것이다.
오늘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눈으로 보기를 원하지만,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그렇게 신비할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 분은 그들의 눈앞에 있는 30대의 청년 남성이었다. 그러니 신비하게 보일 리가 없다. 그들이 정말 보기를 원했던 것은, 그들이 어릴 때부터 믿어왔던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라고 말씀하시니 그러한 생각이 더욱 더 들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씀하시지만, 빌립은 예수님께서 보았다고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 아버지를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보여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자신이 곧 하나님의 아버지의 현시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제자들에게 더 자세히 설명을 해 주신다.
요 14: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성부와의 신비한 연합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사역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사역이고,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이며 그의 형상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을 본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본 사람들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이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요일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요일 1: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오늘 본문의 말씀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더욱 더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 준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현시라고 말씀하시면서 말씀하신 증거 중에 하나가 바로 자신이 행한 일을 들고 있다.
요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곧 자신이 행했던 일들이 성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다는 증거이고 자신이 하나님 모습을 보여준 증거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에는, 자신을 믿는 자, 곧 우리들과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과 같은 일들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요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에 부활 승천하셔서 우리들 가운데 보내 주실 성령을 말씀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성령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인격에 대해서 배우게 되고, 하나님을 닮아가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12사도들은 사역의 초기부터 예수님을 따랐을 것이지만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까지 예수님의 사역을 잘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것은 그들이 지혜가 없어서도 아니고, 많은 배우지 못했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의 수준이 그들이 이해하기에 지나치게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으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야기는 그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3년 반씩이니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도 예수님의 메시지와 삶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던 것은 부활 때도, 승천 때도 아니다.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해한 것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의 역사가 있고 난 후였다.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일들은 하나님의 영만이 알 수 있고 분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닮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령께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셔야 한다.
그 때에야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을 닮아가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했던 내용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셨다. 그것을 특히 자신의 행함을 통해서 보이셨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동일한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구원의 역사, 곧 죄인들을 위한 죽음과 부활, 재림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을 부어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 나타내는 귀한 사역을 맡기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1930년대 미국에 큰 공황이 찾아왔을 당시, 법률가 출신이자 무정부주의자인 클래런스 대로라는 유명한 무신론자가 있었다. 그는 미국이 경제 공황에 들어가자 자기의 무신론을 선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강연을 할 때마다 “여러분, 이 사태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이 어려운 상황을 우리에게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만 보아도 분명히 하나님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정부를 비판하면서 무정부주의적인 자기의 신념을 선전했다.
하루는 흑인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그가 무신론 강연을 하고 있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잃어버렸습니다. 꿈과 재산을 잃었고 노래까지 잃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노래를 부를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소리치니까 갑자기 맨 뒷자리에 앉아있던 한 할머니가 손을 번쩍 들면서 “저는 노래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그는 “아니 어떻게 우리가 이 지경이 됐는데 노래할 수 있단 말입니까?”했더니, 그 할머니는 큰소리로 “예수님 때문에 노래할 수 있습니다”라고 외쳤다. 그런데 할머니 한 사람이 자신만만하게 외치자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맞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 때문입니다”라고 동조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금새 한 무신론자가 하나님이 없다고 외치던 강연장의 분위기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인정하는 군중들로 인해 바뀌었고, 그는 이런 군중들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어렵고 힘든 역경 가운데서도 우리들 마음에 노래를 빼앗기지 않고 기쁨과 평안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 때문이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이다. 그곳에는 절망이 물러가고 희망이 증오가 물러가고 사랑이 임재한다.
신앙이란 어쩌면 굉장히 간단하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 신앙이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성으로 신앙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높은 곳에 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은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이해시키려고 신앙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기 위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세상은 하나님의 살아계신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꿈과 비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위대하고 원대하다. 그는 우리를 통해 당신의 살아계심이 나타나고 당신의 위대한 역사들이 나타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그렇게 살아왔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었다. 이제는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가야 할 때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하나님에 의해서 통치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갈 때 이러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많은 설교가 다양한 모습으로 진행된다. 지금 한 설교도 어쩌면 복잡한 논리를 담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내용은 간단하다. 주님을 따르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를 때 하나님의 모습은 나타난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영광의 현시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를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기도 역시 그러하다. 요한 일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요일 5: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 요일 5: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이 구절에서 핵심은 “그의 뜻대로”라는 구절이다.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구하면 주님께서는 들어주신다는 말씀이다. 오늘 본문도 그러한 내용을 품고 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라는 말 속에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모습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발견되어지기를 소원한다.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과 교통한다면, 예수님 속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난 것처럼, 우리들 속에서도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게 될 줄로 믿는다.
이러한 것을 위해 우리의 생각이 동원되고, 또 우리의 계획이 짜여지기를 소원한다.
우리의 마음의 계획들이 이러한 것이 가장 먼저이기를 소원한다.
[출처]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작성자 예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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