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들 설교 모음

왜 성경이 중요한가요? (딤후 3:15-17)

하나님아들 2020. 1. 10. 11:39

김학중목사/왜 성경이 중요한가요? (딤후 3:15-17)


오늘은 여러분과 성경에 대하여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말씀을 나누기 전에 여러분의 성경 상식을 한 번 테스트 해볼까요? 
1) 인류 최초로 수술대에 오른 사람은? 아담 (하나님께서 아담을 잠들게 하신후 갈빗대를 취하심) 
2) 인류 최초의 동물원은? 노아의 방주 
이 질문들이 시시했던 분들을 위하여 좀 더 수준 높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3) 이 세상에서 제일 빨리 왕이 된 사람은? 바로 왕 
4) 시험만 보면 100점 맞는 사람은? 미리암 (모세의 누이)

인류가 책을 만들고 보급한 이래, 가장 많이 생산하고,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책은 기독교의 성경입니다. 
공식적인 자료에 의하면, 2011년 12월 현재 성경은 2,5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위클리프 성경번역선교회’는 2025년까지 세계 6,900여개의 언어로 성경번역을 완료한다는 계획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런 통계들은 성경책이 인류 역사상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가장 사랑 받는 책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실제로도 웬만큼 신앙생활을 하신 가정에서는 식구 수보다 성경책이 더 많고, 
심한 경우에는 한 사람이 10권 이상의 성경책을 가진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집에는 아예 포장도 뜯지 않은 성경책들이 여러 권 있습니다. 
그리고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은 일주일에 한 번 성경 위에 앉은 먼지를 털고 주일예배에 참석합니다. 
이처럼 이제 성경은 너무 많이 보급되어 가장 흔해 빠진 책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언제나 이렇게 흔했던 것은 아닙니다. 
중세시대에만 해도 책 자체를 만들기도 힘들었고, 책값도 비쌌고, 글을 아는 사람도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예배인도자가 낭독하는 성경을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또한 중세시대 천주교에서는 라틴어 이외에 다른 말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실제로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이라는 사람은 성경을, 
당시의 일반 사람들이 쓰는 영어로 번역했다가 화형을 당했습니다.

지금도 어디에나 성경이 흔한 것은 아닙니다. 
앞에 영상에서 보셨던 것처럼, 
지금도 북한의 지하교회에서는 목숨을 걸고 성경을 봅니다.

이처럼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에 목숨을 바쳤고, 지금도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기독교인들은 이토록 성경에 목숨을 거는 것일까요? 
도대체 성경은 무엇이 그리고 특별한 것일까요?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의 의미와 그 중요성을 밝히 깨닫게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 성경은 모든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묻습니다. 
‘왜 현대인들이 수천 년 전의 고대문서를 읽어야 하나요?’ 
‘이 옛날 이야기들이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요?’

이 질문들 속에는 엄연한 사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적어도 1,900년 전에 쓰여진 고대문서입니다. 
그것도 중동지방의 강원도 크기밖에 안 되는 <팔레스타인>에서 쓰여진 책입니다. 
한마디로 우리와는 시대도, 장소도, 문화도 완전히 다른 민족에 의하여 쓰여진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 
당시의 관습과 문화, 그리고 역사와 정치제도까지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기독교인들은 왜 이 ‘고대 문서’를 그토록 열독(熱讀)할까요?

오늘 성경본문 16절을 읽어봅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여기 등장하는 ‘하나님의 감동’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영 또는 숨을 불어 넣으셨다’는 뜻입니다. 
즉 사람이 ‘하나님과의 영적 교감’ 속에 쓴 글이 성경이라는 뜻입니다. 
비록 글을 쓰는 당사자는 사람이었지만,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이끌던 주체는 바로 하나님이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태초에 사람을 처음 만들었을 때는 흙덩이에 불과했지만,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자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 된’ 이치와 같습니다. 
하나의 고대 문학작품이나 역사서에 불과할 수 있었던 글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해 하나님의 뜻을 담은 ‘거룩한 말씀’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최근 2012년 종말론이 세계적인 이목을 끌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고대 중남미 마야문명의 달력 때문이었습니다. 
그 마야문명의 예언적 달력이 바로 올해 2012년에 끝난다는 해석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긴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최근 발견된 마야문명의 또 다른 달력에서 2012년이 끝이 아니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천 년 전의 고대 달력 하나에 울고 웃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그 달력 속에 ‘신의 뜻’이 들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일부 사이비 종교인들의 헛된 신념일 뿐입니다.

거기에 반하여, 기독교의 성경은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붙들고 이끄시며 남기신 글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증명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밝히신 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고대 인간의 글’인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씀 드리면, 적지 않은 분들이 이렇게 반박할 것입니다. 
‘마야문명의 달력이나 성경이나 고대 문서이긴 매 한 가지인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단언하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모든 고대 문서가 다 성경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하여 쓴 글이라고 다 성경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이 참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명하셨던 대표적인 방법은 바로 ‘예언과 성취’였습니다. 
하나님은 수천, 수백 년 전부터 미래의 일들을 말씀하시고, 그 말씀하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짐을 보여주심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증명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예루살렘의 멸망과 예수님의 생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우상숭배의 끝은 멸망’임을 선지자들의 글과 외침을 통해 경고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들은 안전하다고 큰소리쳤습니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는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히 적중했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수천 년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실 것을 계속하여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장소에서 태어나셔서, 어떤 삶을 사실지, 
그리고 어떤 대속의 죽음과 승리의 부활을 하게 될지’까지 모두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반복적으로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마태복음 1:22)라고 말씀합니다.

이렇듯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미리 말씀하시고, 그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하신 것을 이루시며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명하십니다. 
“이 일이 이루어지면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에스겔 24:24). 
그래서 예수님도 자신을 가리켜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요한복음 8: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런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다른 고대 문서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책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씀 드리면, 적지 않은 분들이 또 이렇게 여쭐 것입니다. 
‘그래도 성경은 현대인들과는 직접적으로 상관 없는 2,000년 전의 글이잖아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고대인들에게 말씀하신 글이지 우리 현대인들에게 말씀하신 글이 아니잖아요?’ 
맞습니다. 옆집에 날아온 세금고지서가 저와는 상관 없듯, 
아무리 하나님의 글이라도 수신자가 2,000년 전의 지구 반대편에 살았던 민족이라면 성경의 가치와 중요성은 당연히 반감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성경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쉬지 않고 묵상해야 하는 이유들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하나님은 영원히 변치 않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약 4,000년 전 아브라함에게도 말씀하셨고, 
약 3,000년 전 다윗에게도 말씀하셨고, 약 2,000년 전 교회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말씀하신 바를 바꾸거나 취소하지 않는 신실한 분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생각은 태초부터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원리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원리도 변함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으려면, 오히려 수천 년부터 검증되어 전해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둘째, 과거의 사건을 통해 내일을 살아갈 지혜를 얻게 됩니다.

많은 청소년들은 역사 과목을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외워야 할 인물, 사건, 년도, 제도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외워야 할 것이 더 많아지기 때문에, 후대의 사람일수록 역사를 공부하기가 더 골치 아파집니다.

그러나 미국이나 유럽 등 소위 선진국일수록 역사 교육을 철저하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역사 속에서 오늘날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 그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대처했기에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를 이해하면, 
반복된 잘못을 피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락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 끊임없이 반역의 죄를 저지른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등을 보며, 다시는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성경의 수많은 믿음의 영웅들을 보며, 어떻게 하면 칭찬 받고 성공하는 삶을 살 수 있는지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고대인들뿐만 아니라 우리 현대인들 역시 참 행복과 참 능력의 길로 인도해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시대, 장소, 문화와 상관 없이 한 성경을 읽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입니다. 
삶이 힘들고 어려워질수록,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와 중요성은 더 분명해집니다.

2. 성경은 기독교 신앙의 기준(standard)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렇듯 성경이 중요한 것을 알았어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살아계신다면, 무엇하러 귀찮게 성경을 봅니까? 
그냥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면 간단하고 분명하지 않을까요?’

이 질문 역시 분명히 일리 있고, 중요한 질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현대인들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 훨씬 더 명료하고 효율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신다면, 굳이 고대인들의 언어를 빌리지 않고도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말씀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저 같은 설교자도 필요 없겠지요?

오늘 말씀의 15-16절을 봅시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즉 하나님은 성경을 신앙을 위한 ‘표준 교과서’로 주셨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초자연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맞습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기도 하고, 환상을 보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예언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 밖에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온갖 방법으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아니 이전보다 훨씬 더 중요해졌습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 사람의 감각은 부분적인 진실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체험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감각을 통하여 느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광대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우리의 감각이 너무 부분적이라는 점이 문제입니다.

시각 장애인들을 모아 놓고 코끼리를 만지게 한 후, 코끼리를 그려 보라고 지시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코끼리 다리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는 원통처럼 그릴 것입니다. 
코끼리 귀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가 커다란 피자 반죽처럼 그릴 것입니다. 
코끼리 코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는 뱀처럼 길게 그릴 것입니다.

어떤 것이 올바른 코끼리의 모습입니까? 
모두 틀렸습니다. 다만 부분적으로만 맞았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이 시각 장애인들의 그림들을 모두 모으면 코끼리의 온전한 모습이 나올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상상도 못했던 괴물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감각은 부분적인 진실만 말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진실과 동떨어진 결론까지 내게 됩니다.

둘째, 사람의 감각은 매우 불안정하고 자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감각처럼 들쭉날쭉하고 불안정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같은 물건을 보아도 어떤 사람에게는 세련되게 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촌스럽기가 짝이 없습니다. 
같은 음악을 들어도 어떤 사람의 취향에는 맞고, 어떤 사람에게는 거부감을 일으킵니다. 
같은 것을 맛보아도 어떤 사람은 맛있어 하고, 어떤 사람은 역겨워 합니다.

그래서 김장철만 되면,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신경전을 벌입니다. 
서로 선호하는 김장재료와 김장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시어머니가 담근 익숙한 맛의 김치를 선호하지만, 며느리는 친정 어머니의 손맛이 그립습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똑 같은 대상을 다르게 느끼는 이유는 감각이 결국 ‘뇌의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감정조차 사실상 뇌가 결정합니다. 
결국 사람의 생각이 다양한 만큼, 사람의 느낌과 감정도 다양해집니다. 
사람은 결국 원하는 것을 보고, 원하는 것을 느끼고, 원하는 대로 이해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사람의 뇌는 얼마든지 조작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현대 ‘뇌과학’의 연구결과입니다. 
현대 뇌과학 기술은 뇌에 인위적인 충격과 자극을 줌으로써, 그 사람의 생각과 기억, 그리고 생생한 느낌까지도 조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 사람들이 흔히 ‘초자연적인 계시’의 통로로 이해하는 꿈은 어떨까요? 
지난 5월20일, 뉴욕의 두 젊은 과학자들이 꿈을 조종하는 ‘레미’라는 수면 눈가리개를 개발하였습니다. 
이 수면 눈가리개의 원리는 상당히 간단합니다. 
이 수면 눈가리개는 사람이 깊은 잠에 빠지면 6개의 빨간 LED 등들이 반짝여서 ‘당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알려줍니다.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그때부터 자신의 꿈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결국 이제는 꿈을 놓고 길조냐, 흉조냐를 따지던 시대도 끝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원하면 얼마든지 돼지꿈도, 돈벼락 맞는 꿈도 꿀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토록 불안정하고 조작가능한 인간의 감각과 감정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의 감각을 통하여 하나님을 체험한 것을 토대로 하나님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편견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을 다르게는 ‘정경’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정경’은 ‘기준 또는 표준’이라는 뜻입니다. 
즉 성경은 우리의 체험과 사상이 올바르고 건전한지를 판단하는 신앙의 절대적 기준입니다. 
마치 인감증명서를 통해 정당한 법적 능력이 있는 인감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듯, 
성경은 우리의 체험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경험인지 아닌지를 알려줍니다. 
성경은 기독교 신앙의 표준이며, 모든 신앙적 체험은 성경에 기초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비주의’는 매우 위험한 사상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 신앙은 신비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우리의 이성과 경험을 넘어서는 새롭고 놀라운 사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 신비한 체험을 앞세우는 ‘신비주의’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가지게 합니다. 
이런 잘못된 ‘신비주의’의 영향으로 기독교 안에서 온갖 불건전하고 광적인 현상들이 벌어집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신비한 체험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신앙생활 중에는 기적을 비롯한 신비한 현상과 사건들이 벌어집니다. 
하지만 그런 체험이 성경의 권위를 앞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성경의 권위와 가치를 조금도 손상시키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하나님은 오히려 더욱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세대가 악해질수록 더욱 성경을 손에서 놓지 않습니다.

3. 성경은 실천적(practical)이고 역동적(dynamic)인 말씀입니다.

사실 성경에 대해서는 많은 성도들도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성경을 더 잘 공부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성경을 읽어야 성경을 제대로 배우는 건가요?’

사실 이 질문은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고마운 질문입니다. 
성경에 대하여 이전보다 더 큰 관심과 열정을 가지겠다는 뜻이고,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질문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마치 청소년들이 학교 교과목을 공부하듯 성경을 배우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영어, 수학, 국어 등 소위 ‘학교공부’는 ‘머리’로 배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공부는 결국 ‘지식을 쌓는 것’입니다.

이 말을 성경공부와 접목시키면, 결국 성경공부도 성경에 대한 지식을 잔뜩 쌓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인물, 지리, 역사, 문화, 줄거리 등을 줄줄이 꿰는 것을 좋은 성경공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성경공부를 제일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암기력과 문장 이해력이 뛰어난 사람이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공부’하고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의 17절을 읽어 봅시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즉 성경공부의 최종 목적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어 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공부의 최종목적은 ‘지식 쌓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착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한 율법교사, 즉 ‘성경을 매우 잘 아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성경박사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거꾸로 묻습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가르치느냐?’ 
그러자 성경박사는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최선을 다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칭찬하십니다. 
‘그래, 네가 정답을 말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말을 덧붙이십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누가복음 10:28).

하지만 이 성경박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럼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입니까?’ 
결국 이 성경박사는 계속 성경을 지식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할 뿐, 그 성경말씀을 실천하는 데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야기 하나를 해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도로 한복판에서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쓰러져 있었다. 
그 곁을 ‘믿음 좋고 성경 잘 아는’ 사람들이 지나갔지만, 아무도 그 사람을 도와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 동네에 사람들이 평소에도 깔보고 무시하는 사람 하나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도 그 강도 만난 사람 곁을 지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앞서 지나간 ‘믿음 좋고 성경 잘 아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부축하여 여관으로 데려가 눕히고 치료하였다. 
이 사람은 그 강도 만난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호주머니를 아낌 없이 털었다. 
누가 이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인가?’ 
이 이야기를 다 들은 성경박사는 대답합니다. 
‘평소에 동네에서 무시당했지만 강도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누가복음 10:37).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으면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지으면 어떻게 될까요? 
기초가 되는 땅이 부실하여 높은 건물을 지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폭풍우가 몰아 닥치면 집이 기초부터 흔들려 무너지게 됩니다. 
반면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은 기초가 튼튼하기에 큰 홍수가 나도 조금도 끄떡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아는 것보다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할 때 기적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아도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은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많은 분들이 자신의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다고 답답해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그런 분들의 근본문제는 성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을 실천할 의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적지 않은 분들이 ‘성경공부’를 하겠다고 외부로 돌아다니다가 신천지 같은 이단들의 먹잇감이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공부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직접 몸으로 실천해서 여러분들의 삶에서 ‘살아 움직여야 하는 글’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성경에 대하여 말씀을 살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사용하십니까? 
바라기는 성경이 여러분의 삶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드는 기초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