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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의 종말론 이석규 교수

하나님아들 2019. 12. 28. 15:19

신약성서의 종말론 이석규 교수 서울신학대학교 강사

 

서론

 

신약성서의 종말론은 예수의 설교와 연설 가운데 이미 구원의 메시지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구약과 전통과 유대인 이스라엘의 예수에 기초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구약과 유대교의 묵시문학과는 다른 차원의 종말론으로 성립되었다.

다시 말해 복음서 안에서 신약성서의 종말론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사상에 정초하고 있음은 틀림없다. 바울 역시 유대인이지만 메시아 사건으로서 예수의 기독론이 종말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증거한다.

 

그런데 현대적 의미에서 종말론과 이에 관한 연구는 성서신학자 요한네스 바이스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선포안에서 처음으로 학문적으로 정초되었다.

그의 주장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신약성서 종말론의 시사하는 바에 큰 의미를 지닌다. 바이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관념이 전적으로 종말론적 특성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규명하였다.

여기서 종말론적 특성이라는 것은 임박한 현 세계의 우주적 파멸, 최후의 심판, 저주받은 이들의 멸망, 구원받은 이들에 대한 영원한 축복과 관련하여 예수의 선포와 교훈의 특징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교의학자 푈만에 따르면 신약성서에서 종말론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종말이 현재적으로, 미래적으로 어니면피안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말은 종말이 우리의 시간 안에 있던가, 우리의 시간 앞에 있던가, 아니면 우리의 시간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이다. 첫 번째의 시간은 우리의 경험 안에서지만, 두 번째는 아직 경험하지않은 그리고 마지막은 우리의 이성과 감성의 경험을 넘어선다. 요약하자면 신약성서의 종말론은 현재적으로, 미래적으로 또는 초월적으로 구분 될 수 있다.

 

본 글의 주제 신약성서의 종말론은 이러한 관심을 가지고 우선 복음서 전체의 예수의 설교와 연설에 나타난 종말론적 차원을 살펴볼 것이다.

그런 다음에 이에 따른 예수의 종말론적 차원의 조직신학적 특징으로서 신약성서의 종말론적 기독론에 연관해서 전개할 것이다. 결국 좀 더 구체적으로 공관복음서 안에 나타난 종말론과 바울 대표적인 서신 가운데 나타난 종말론을 소개하여 신약성서 종말론의 각각의 특징과 의미를 소개하고 마지막에 신약성서 종말론의 전체적인 의미를 밝힐 것이다.

예수의 종말론

 

1. 예수의 설교와 연설

 

1)예수의 설교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통치) 종말론의 핵심적인 내용으로 정당하다. 이는 예수의 연설이 전형적으로 유대-묵시문학적 성격에 같혀 있지 않고, 또한 유대-예언자 세례요한으로부터도 적은 영향을 받았고 랍비적 전통으로부터도 중요한 의미를 넘겨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특별한 점은 예수의 설교와 연설 안에는 하나님 나라의 전환점이 등장한다는 것이다.)9:47, 10;15, 23, 25, 5:20) 이는 하나님의 왕국의 물려받기(계승이며)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통치의 자녀들로의 전환이다.)8:12)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적 차원으로 부합하다는 점은 분명하다(6:10, 10;23, 9:62)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는 하나님의 통치에서 현재의 삶으로의 투신이기도 하다.(9:43,45

 

2)예수의 종말론적 설교와 연설은 그의 마지막 시간이며 또한 그의 마지막 시간에 대한 내용이다.

이는 그가 예루살렘의 올리브 산에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행한 길고도 이와 연관되는 설교에 기인한다. 이 연설은 마태복음 24-26장에, 마가복음 13장에 그리고 누가복음 21:5-36에서 전승된다.

이 종말론적 연설은 마지막 사물들과 종말론적 설교, 즉 세계의 심판이라 불리는 세계의 미래를 예고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더구나 이 설교는 수많은 비유들을 통해서 자신의 즉음에 직면하는 사실과 재림할 것을 암시한다.

 

이에게 종말론적 설교와 연설은 제자들의 질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예컨대 마태복음 24:3(예수께서 올리브 산에 앉아 계실 때에, 제자들이 따로 그에게 다가와서 여쭈었다. 이런 일들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선생님께서 오시는 때와 세상 끝 날에는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인지를,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을 중심으로,

마가복음 13;4)”우리에게 말씀해주십시오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이런 일들이 이루어 지려고 할 때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를 중심으로

그리고 누가복음 21:7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그러면 이런 일들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또는 이런 일이 일어나려고 할 때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약하자면 예수의 종말론적 설교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언제 이 종말론적 사건이 발생할 것인가(성전의 파괴-24:1-2)

2) 예수의 재림과 세계의 종말에 대한 이 징후(징조)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하는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기독교 종말론의 중심적인 신앙내용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즉 성육신과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 나라는 제도적으로 규정되기 전에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사실은 단지 미래의 사건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건이며 과정으로서 이와 더불어 시작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전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부분적으로 이미 발생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한다면, 이와 동시에 이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적 사건인데, 그리스도의 재림, 부활, 심판, 모든 악의 제거, 모든 슬픔의 종지부, 그리고 영원한 심판, 파괴될 수 없는 영의 몸 안에서 영원한 삶이며 포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와 존재하심의 현실화이다.

 

2. 지금 이미 그리고 아직 아님의 종말론적 차원

 

1) 기독론적 토대

 

예수의 묵시적 임박한 기다림은 처음부터 바울 신학의 단서였다. 따라서 바울의 종말론은 하나님의 다른 기초 위에 정초한다. 이는 데살로니가전서 4:14절 이하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예수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바울의 종말론적 주제를 기독론과 구속론으로 소급하는 방법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희망은 신앙 안에서 의존됨으로 공동체는 미래의 차원에서 신자들의 운명에 대한 실제의 문제를 영원한 그리스도-공동체의 확실성으로 고양했고, 여기에서의 현재를 두려움을 해소하는 시간으로 규정한다. 또한 현재에 대한 그러한 종말론적 승격은 바울의 같은 서신 5:1-11에서 관철되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리스도인들의 현재의 종말론적 실존으로 정초하는 가능성의 토대로 이해한다. 이런 초기의 종말론적인 인식개념은 구체적으로 벌써 현재를 미래의 구원의 출현 시간으로 정립시킨다.

이는 주의 날이라는 의미에 대한 매우 분명한 이해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래에 대한 신앙은 바울에게 묵시적인 차원보다는 종말론적 성격으로 통일된다. 그리하여 바울이 기독론의 종말론을 묵시문학에서 기획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즉 이미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모든 인간의 죽음과 삶에 대한 기존의 세계관에 반전되는 결합은 기다림의 세계관에 대립하는 운명적인 전달로 형상화된다. 이는 곧 기독론적 전망에서 중요성을 말해준다.

 

2)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기능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기능은 복음서 안에서 역사적으로 제기된다.

고린도후서 5:20에서 그리스도는 현실적으로 선언되며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시대의 출현으로구체화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단지 묵시적으로 선취만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성취되는 하나님의 정의에 계시가 발생한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으며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은 성서에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1;17) 이는 곧 십자가에서 구원받고 상실된 말씀으로 발생하며(고전1:18-), 그분의 십자가에서의 따름과 삶과 죽음의 마주침으로 결정된다(고후2:14)

 

이 말씀은 마지막 구원을 완전히 성취하는 그리고 벌써 현재에 완전히 충족하는 실재이다. 그리하여 말씀은 종말론적으로 고양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은혜의 때에, 나는 네 믿음을 들어 주었다. 구원의 날에, 나는 너를 도와주었다 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고후6:2) 이는 곧 묵시적으로 사유된 것으로 갈라디아서 4장 그리고 에스라 4:37의 부르심(소명)에 의해서, 따라서 단순히 시간의 충족이 아니라,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파송의 구원사역이 토대라는 것이다.

 

결국 바울은 종말론적 차원의 기독론-구원론적으로 충만하고 완성된 지금-시간을 역사가 진행하는 그리고 이로부터 발생하는 시간의 해결열쇠와 매개로 이해한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세상에 맞선 대립된 하나님의 보존자선포한다면, 이는 하나님이 세상에 아직 굴복당하지 않고 이 종말로 세상을 정복하는(고전4:20, 14:17) 것으로 해석된다.

 

3. 마가의 종말론

 

마가복음에는 임박한 종말론이 등장한다.

요한계시록을 큰 묵시록이라고 한다면, 마가복음은 특히 13:5-37은 이른바 작은 묵시록으로 통한다.

묵시록의 상징의 언어를 통하여 미래의 시간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 안에서 구체적으로 폭로시킨다. 다라서 여기서 묵시록은 종말론적 특성을 가지며 현재와 미래를 통합한다.

 

마가복음은 이를 구체적으로 계시하기 위해서 인자의 도래를 예고하고 암시한다.

음란하고 죄가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8:38, 13, 36) 이는 하나님의 통치, 즉 현재와 미래의 이중성을 암시한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의 추종자들의 첫 세대의 기간에 권능과 함께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9:1)

 

예수의 구원(치유)의 말씀의 현재를 선포하는 것은 묵시문학적 신앙의 결단의 사건으로 중대성을 가진다.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나의 말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13:31) 이는 곧 말씀의 신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정초하고 이에 저항하는 영원한 삶의 역설적인 선언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음란하고 죄가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8:34-38)

 

4. 마태의 종말론

 

마태복음은 마가와 더불어 또 하나의 종말론적인 임박한 기다림의 견해를 묘사하고 있다.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서 올 때에 그는 자기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않을 것이다. 그는 모든 민족을 자기 앞으로 불러 모아서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라서 양은 그의 오른쪽에 염소는 그의 왼쪽에 새울 것이다...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것이다?(25:31-46)

 

일반적으로 엄밀히 평가하자면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마태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종말론적 신학으로 완전하지 못하다. 그런데 여기서 결정적인 해결 열쇠는 마태복음의 종말론에서 부활한 자의 게시말씀으로서 모습이 등장한다.(28:18-20) 여기서 종말론적 근본노선이 분명하게 묘사된다. 이는 부활한 자가 세계의 통치자이며, 그의 통지방식은 자신의 항존의 권위를 통해 새겨진 제자도를 통한 세계선교이다.(7:21-23)

 

마태복음 안에서는 현재를 종말론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기독론에 의해서 윤리학으로 지배된다. 예수의 시간은 세상의 것과 모든 것이 다르다. 즉 세상의 것과는 구별된다. 예수의 시간은 유한한 시간성의 조건들 아래 지배당하면서도 구원의 역설적 현재를 정초하고 이와 더불어 시작한다.

 

5. 누가의 종말론

 

누가복음에서는 예수의 재림 전에 있을 그리고 종말의 다른 사건 전에 있을 재림의 지연 가능성을 수용하고 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잇을 때에 예수께서 덧붙여서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이 비유를 드신 것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데다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9;11)

그러나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온다고 생각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고 먹고 마시고 취하기 시작한다면 생각지도 않는 날 뜻밖의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 종을 몹시 때리고 신실하지 않은 자들이 받을 벌을 내릴 것이다”(12:45-46)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으니,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17:20-21)

 

그러나 인자의 오심과 최후의 심판 때에 그리스도의 권위행사를 확실한 것으로 삼는다. 누가복음은 5:12이하에 종말론적 차원에서 역사와 자연의 대참사와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인의 박해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는 유대전쟁의 사건에 대한 역사적 해석을 통하여 내면의 역사로부터 현재의 역사로 주목하게 한다.

너희가 예루살렘에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로 알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다”(21:20-22)

 

6. 요한의 종말론

 

요한복음은 고유한 종말론을 가지고 있다. 요한의 종말론은 우선적으로 현재적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한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란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3;15-18, 3:33, 5:24, 6:40, 47,54, 10:28, 17:2-3)

 

요한계시록이 우주적, 보편적 그리고 미래적 종말론을 전개한다면(19:11, 20:1) 이와 비교해서 언급한 구절들에서 증명되듯이 요한의 종말론은 개인적 실존적인 차원이 특징적으로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요한의 종말론은 미래적 관점을 포함하고 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듣는 사람은 살 것이다(5:25, 28, 29, 6:27,30-40, 44, 54, 21, 22-23)

 

바울의 종말론

 

익히 알려진 바대로 바울 서신은 전체적으로 종말론적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을 중심으로, 고린도전서 15장을 중심으로 바울의 종말론이 대표적으로 잘 모사되고 있다.

여기서는 주님의 재림(도래), 죽은 자의 부활이 대표적이다. 특히 바울의 종말론의 특징은 임박한 기다림의 종말론이다.

 

특히 바울의 종말론은 메시아적 사건과 관련이 깊다.

바울도 마찬가지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임재가 이미아직 아님사이에서 긴장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이는 복음서의 종말론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바울에게서 이는 구원의 사건으로서 그리스도 임재에서 더욱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구원의 사건으로서 메시야의 사건이 이미 일어나고 있다. 이는 현재적이면서도 미래를 암시한다.

 

바울 공동체의 신도들에게 이미 구원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구원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사건이 필요하다. 이는 곧 세상의 시간을 넘는 그리스도의 사건(카이로스)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이미 새로운 피조물”(고후5:17)이 되는 것이다.

 

앞에서 이미 전제했지만 바울의종말론은 특히 기독론적 케리그마 속에서 해석된다.

즉 이는 지금 이미 그리고 아직 아님이라는 긴장의 관계 속에서 현재를 변증접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바울의 기독론적 토대는 데살로니가전서 4:14이하에서 밝혀진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이것을 말합니다. 주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이미 잠든 사람들보다 절대로 앞서지 못할 것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말로 서로 위로하십시오”(데전4:15-17)

여기서 미래에 대한 질문은 과거에 대한 추론과 더불어 종말론적인 주제가 되면서 이는 기독론적이고 구속론(구원론)적으로 해석된다.

 

결론

 

1. 신약성서 안의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중요한 점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발생하고 출현한 그리고 현재 진행형인 구원에 대한 집중된 관심이다. 만약 신약성서의 종말론적 차원들이 완료형태의 종말론으로 미래를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면, 이는 예수의 미래의 기다림과 동시에 참다운 묵시록의 구성적인 작업도 단절시키는 셈이다. 이에 비교해 역전된 즉 초기 기독교의 열광주의로부터 이러한 종말론적 차원들이 배제된다면 신약성서의 어떤 종말론적 기획도 시간으로나 공간적으로 구원의 전제가 될 수 없으며 이 구원은 현재에 의존될 수 밖에 없다.

 

2. 종말론적 기다림과 그리고 재림의 지연

 

신약성서 종말론의 통일적인 계보는 임박한 기다림과 주님 재림지연 사이에 대해 발생하는 경쟁적인 논쟁들이다. 임박한 기다림은 초기 기독교 종말론 사상에서 출발하여 2세기 중엽에 예외적인 상태가 되었다고 주장된다. 임박한 기다림에 대한 급속한 긴장의 해소는 바울에게서 이미 간과 되어진다. 그리고 이는 마지막 시간들에 관한 당시 상황에 의해 각인된 연설로 자리잡는다(요일2:18. 벧전 3;3)

교회를 통한 임박한 기다림에 대한 지연의 위기는 뒤늦은 시간을 언급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가장 초기의 신약성서 본문들조차도 주님의 재림지연의 문제를전제로 깔고 있기 때문이다.

 

임박한 기다림이 새로운 것에 의해 타오른다는 사실은 논쟁적이지도 않고 데살로니가후서와 누가복음 21장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임박한 기다림이 지속되고 확장되고 그리고 강도를 가지고 신학적으로도 어떻게 미래적 종말론이 얼마나 오래 임박한 기다림으로 강조되었는지 심문하는 것만큼 그 가능성은 적다. 그러한 정신사적 전망을 넘어서 중요한 점은 임박한 기다림이 묵시적 또는 종말론적 지평을 통합 할 수 없을지에 대한 해석학적질문이다. 현재적 종말론이 임박한 기다림 대신에 또는 그와 나란히 명분을 포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언급은 필연적인 대안을 만든다. 그 전제는 가장 긴장된 임박한 기다림이 이미 성취된 하나님의 구원활동에 정초할 때, 미래의 기다림이 계속적인 기다림에 대해서 어떤 명분을 주지 않을 때이다.

 

따라서 도래한 구원자에 대한 신앙에 의해 각인된 미래상으로서 임박한 기다림은 자세하게 앞에서 능가되었기 때문에 마지막 때의 지연 경험을 추진하는 것은 부수적으로 파악된다.

 

3. 종말론의 구체적 의미

 

신약성서의 종말론은지금 이미 그리고 아직 아님의 변증법적 구도에 의해서 즉 이는 예수의 설교에 나타난 하나님의 통치와 관련하여 변증법적으로 전개된다.

이는 변증법적 구도는 현재의 종말론적 위상을 세속적인 사건의 한가운데서 세상 권력에 대해 저항하는 기독론적인 종말로 성령 안에서(14:17), 정의, 평화, 그리고 기쁨을 존재하게 하는 시간으로 이해된다. 동시에 이는 영원한 삶(영생)”을 시간성의 상황 아래서 정초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재에 대한 종말론적인 유보는 현재의 종말론적 성격을 상대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종말론적 유보는 신앙을 하나님의 모든 역사 위에서 관리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를 제공하며 인간의 미래와 하나님의 구원(치유)의 미래를 구별한다. 그리하여 영원한 구원과 사건의 행복은 하나님에 의하여 구별되며, 내세의 구원계획에 대한 하나님의 약사로 세상의 이데올로기들은 비판된다.

 

 

추천도서

 

 

마커스 버그/도미닉 쿠로산/오희천 옮김, “마지막 일주일”, 서울:다산복스, 2012.

 

g.아감벤/강승훈 옮김. “남겨진 시간: 서울:코나투스, 2008.

 

이신건. “종말론의 여사와 주제”, 서울:신앙과 지성사, 2011

 

폴 밴뷰런/최인식 옮김. “이스라엘의 예수 교회의 예수를 만나다부천:에루살렘 아카데미, 2010.

 

 

 

  발췌한 것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