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계시록!!! 마라나타!!!

루터의 종말론 권득칠

하나님아들 2019. 12. 28. 15:21

루터의 종말론 권득칠 루터대학교 교수

 

 

1. 들어가는 말

 

21세기를 맞이한 오늘날 과학기술의 진보와 발달로 인하여 도래된 과학기술시대는 우리 인간의 삶의 조건과 형태를 급속도로 변화시켜 가고 있는데, 과학기술의 발달은 절정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기술의 진보가 초래할 결과로써 오늘날 인류가 처해 있는 현실인 과학기술의 인간에 대한 비인간적인 지배모습과 생태계 파괴의 는 바로 과학기술의 바탕 위에 세워진 현대문병의 자제붕괴를 가져올 만한 대재난이 예상되는 절박한 상황이다.

이렇듯 모든 생명들이 생존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 속에서 현대인들은 다시금 종말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종말에 관한 생각은 이미 모든 종교가 내포하고 있는 것인 동시에 인류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상이다. 더욱이 종교들이 장래에 대하여, 죽음 이후에 대하여, 세계의 종말과 목표에 대하여 다양한 표상과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종교들에 있어서 필수적 요건이다.

 

기독교 종말론은 하나님이 역사의 틀 속에 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사건을 다룬다.

종말은 그 핵심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이 지금 이미 경험하고 있고 언젠가는 온전히 이루어질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이다. 이렇게 볼 때 종말은 현재적이면서 동시에 미래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종말의 도래가 그의 신학적 사고를 부정적으로 지배하지 않았던 중요한 이유는 그가 자유하게 하는 복음의 능력을 발견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위협적인 것으로만 이해하지 않는데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종말에 대한 루터의 신학적 이해는 죽음과 최후 심판에 대한 사상과 함께 특히 종교개혁의 선봉에 선 루터 자신의 삶 속에뿐 아니라 그의 신학 전체 가운데 항상 종말론적 배경을 가지고 나타난다.

 

2. 역사적 배경과 루터의 종말론 이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16세기 중세 후기는 이성과 신앙의 이층구조를 강조하면서 이성적 사변을 바탕으로 하는 스콜라주의 신학으로 인하여 나타난 신학적 회의와 신앙적 체험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하여 영적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였으며, 교황중심의 카틀릭교회 권위도 추락할 대로 추락한 상태였다. 여기에 영적 갈급함으로 인한 대중적인 경건의 열망은 뜨거웠지만, 이를 충족시킬 만한 신앙적인 대안이 없던 시대였다.

더욱이 십자군 전쟁이나,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의 창궐, 그리고 도처에서 벌어진 농민봉기 등의 역사적 사건들과 더불어 사회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중세 후기의 종말론적 사회적 혼란은 루터의 글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세상은 그것의 종말에 다다랐다. 로마제국은 거의 지나갔고 조각들로 갈라졌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탄생이 가까웠을 때 유대 왕국이 있었던 것처럼 현재 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왕국의 어떤 것도 거의 가지지 않았다. 헤롯은 이별의 증거였다. 로마제국이 거의 지나간 거서처럼 그리스도의 오심은 문 밖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티키인은 제국의 종말의 증거요, 로마제국에 주는 고별 선물이다-터키에 대한 전쟁에 관하여-루터전집 제5, p118.

 

이와 같이 볼 때에 루터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종말의 기대는 터키족의 위협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1529년 가을 터키군은 신성로마제국의 수도 빈을 침입하여 1개월 이상 포위하였는데, 터키 군이 서유럽 깊숙이까지 들어와 위협했던 이 사건은 당시 유럽 국가들에겐 큰 충격이었다.

루터는 터키의 침입에서 하나님의 징계 곧 마지막 때의 싸움을 벌이는 사탄의 무리를 보았다. 그리고 루터에게는 교황과 터키 모두가 본질적으로 같은 적그리스도일 뿐이었다. 교황은 적그리스도의 영이요, 터키는 적그리스도의 육체이다. 이 둘은 우리를 죽이고자 서로 협력한다. 후자는 검을 가지고 육적으로, 그리고 전자는 교리를 통해 영적으로, 그러나 루터는 이미 항상 스스로 종말 앞에 서 있다고 느끼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는 강한 종말론적 신앙자세를 지녔기 때문에 저들이 아무리 하나가 되어 달려든다고 할지라도 교황과 터키족과 같은 종말론적인 적들 앞에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오히려 루터는 무서운 심판의 날이 구원의 날이 된다는 사실을 종말론적 희망가운데 깨달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하나님의 공의에 따른 심판이 있은 후에 하나님은 그의 섭리에 따라 그의 통치를 완성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최후 심판의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희망과 기쁨의 때가 되지만, 악인들에게는 공포와 절망의 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터는 종말론을 역사 안에 가두어 한시적이거나 국한된 종말론으로 이해하지 않았으며, 종말의 시점을 알고자 하는 것을 신학적인 이유에서 항상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마지막 때의 징조처럼 보이는 사건들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때와 시기가 정확히 언제 일것인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종말의 시점에 대해서는 하나님 아버지 아무도 외에는 알 수 없다고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24:36)

루터는 그 때문에 종말을 예고하려는 시도에 동의하지 않았다. 또한 루터는 천년왕국 신앙을 거부하였는데, 천년왕국 신앙은 그리스도의 이중재림을 말하는데, 그리스도는 천년왕국을 위해 오시고 또다시 세계 심판을 위해 오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과 동시에 종말이 있을 뿐 지금의 상태도 아니고 최후 심판 이후의 상태도 아닌 이 세상에서의 또 다른 별도의 통치기간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며, 성서적 기반이 없다. 그러나 루터는 천년왕국 신앙이 최후 심판이 있기 전 이 세상에 있을 천년 동안의 평화를 말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에 대해 잘못 인도하는 것으로써 그 자체가 비성서적으로 역사에 대한 성서의 뜻을 단편적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루터는 종말 역사의 절대화를 배격하였기 때문이다.

 

루터 당시 중세 후기 사람들은 마지막 때에 있을 진노의 날을 두려워하여 전전긍긍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시대의 질문은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묵시적이기에 충분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종말의 때가 임박해 있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루터 역시 임박한 종말의 공포 가운데 살았던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 집에 갔다가 에르푸르트로 돌아가는 길에 슈토테르하임 근처에서 무시무시한 벼락이 옆에 떨어지는 순간 갑작스런 죽음의 공포를 체험하고 나서부터 심판의 날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법학공부를 중단하고 에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은둔자 수도회소속 검은 수도원들어가 수도사가 되었으며, 진노의 하나님이 아닌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은총을 얻을 방법을 모색하는 삶을 살기 시작하였다.

그 역시 심판하시는 그리스도의 이미지와 최후 심판 날에 관한 사상으로 불안해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로마서1:17 말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에서 복음의 참된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경험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인하여 죄인이 의롭다고 강조하시는 의이며, 인간을 이것을 복음 안에서 믿음으로 받는다. 루터는 더는 하나님이 두렵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오심과 세상 종말의 도래를 원했다.

이제 루터는 이 세상의 맹렬한 싸움은 끝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구속이 완전하게 이 땅 위에임할 것이었다.

루터는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주님이 저에게 한 좋은 시간을 주시고 속히 더 속히 더더욱 속히 주님 자신이 그의 가장 영광스러운 날과 함께 오시옵소서

이처럼 루터의 신학은 철저하게 종말론적이다.

그의 종말론에 대한 사고는 전통적인 신학의 맨 마지막 장으로서 단순히 최후의 일들에 관한 장이 아니라 그의 신학의 본질의 결정적 부분에 정위하고 있다.

 

그런데 루터의 종말이해와 관련하여 우리가 주의 깊게 바라보아야 할 측면이 있는데, 루터가 종말에 대하여 언급할 때에 하나님을 창조물인 자연세계와 관련된 것들이 발견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루터에게 있어서 창조론에 나타난 창조의 계속성은 루터의 종말론과 깊은 관계를 형성하면서, 창조의 계속성 안에 내재된 본질인 하나님의 계속된 창조의 역사가 루터의 종말론 안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루터의 종말론 이해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의 터전인 자연과도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태양은 그것이 처음 창조됐을 때처럼 그처럼 아름답고 밟고, 선명하지 않고 인간의 죄 때문에 반쯤 어둡고, 거무스름하고, 손상되었다. 그러나 그날에는 하나님이 다시 불을 통해 그것을 깨끗하고 정결하게 하실 것이다.(벧후3) 그리하여 그것은 처음에 그랬던 것보다 더 밟고 더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죄를 자연 안에 투영시킴으로써 자연을 통해 인간의 죄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죄의 소멸에 대한 확신 역시 자연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루터의 종말론 이해는 종교개혁 신학이 자연에 대한 체계적이고 상세한 자연관을 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고, 종교 개혁가들의 저술들 가운데 자연 철학을 그 자체로는 거의 다른 적이 없다는 이해와 비판에 대해 전적으로 배치될 뿐만 아니라 루터의 종말론 이해 안에서 인간과 하나님의 자리 안에 자연의 지리 역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나타내어 준다.

 

3. 죽음과 최후 심판

 

죽음이란 궁극적으로 삶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누구나 관심을 갖게 되며 동시에 죽음이란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닥치는 개인적인 사실이며 너무도 엄청나고 놀라운 사건이다.

모든 사람은 다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인간은 죽음과 죽음 이후에 있을 심판에 대하여 불한해하며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종말론의 관심은 죽음과 최후 심판의 문제에서 출발해야 된다는 말을 할 수 있다. 특히 중세 후기에 있어서 죽음은 큰 관심의 주제였으며 루터 또한 죽음에 대하여 많이 말하고 있다.

죽음에 관한 사상은 루터 신학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죽음에 대한 사상은 그가 이해하고 믿는 구원관인 칭의론과 율법과 복음이해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 그리하여 루터의 종말론에는 중세 후기의 죽음과 최후 심판에 대한 공포와 오직 믿음을 통한 칭의의 형태를 띤 복음의 출현이 집약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죽음과 최후 심판에 대한 종교개혁적인 관점은 루터가 죽음을 율법 그리고 복음과 연관하여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데, 루터의 1534/1535년의 시편 90편 해설에서 루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따라서 인간의 죽음은 동물의 죽음과 같지 않다. 동물은 자연의 법칙 때문에 죽는다. 인간의 죽음은 우연히 발생하거나 단지 시간적인 면만 내포하고 있는 사건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인간의 죽음은 나의말로 한번 해본다면 하나님에 의해 위협당한 것이며 화가 나고 소원해진 하나님에 의해 생긴 것이다....인간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죽는다. 죽음은 이 경우에 있어 그의 죄와 불순종에 대한 불가피하고도 당연한 결과이다

이와 같이 죄와 죽음은 같은 사실의 두 면이다. 둘 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사실을 말하며, 이 사실을 인간으로부터 보면 그것이 죄요, 하나님으로부터 보면 죽음이다. 또한 루터는 죽음이 죄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라는 것을 설명하면서, 이 시편도 역시 인간의 유한성을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비교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신성은 하나님의 진노와 죄인들의 죽음으로 이끌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은총으로도 이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위협적인 권면으로 쉽사리 바뀔 수도 있는 시편을 위로와 힘의 근원으로 바라본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전지전능하시고 광대무변하시고 무한하신 분으로 보는 이 묘사로부터 두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그의 거주하시는 곳, 혹은 그를 경외하는 이들에게 향한 은총이 무한하다는 것.

둘째, 은밀한 죄인들을 향한 그의 분노와 노여움도 광대무변하고 무한하다는 것.

 

루터는 죽음의 세 가지 면을 구별하였다.

먼저, 생물학적 죽음, 즉 우리가 다른 모든 생물의 공통적으로 갖는 물질적 육체의 자연적인 부패가 있다.

다음으로, 영원한 죽음이 있는데 이에는 다시 두 가지면이 있다.

하나는 죄의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죽음이다.

마지막으로, 완전히 영원한 무속으로 사라지는 최종적인 죽음이다.

루터는 이것들에 대하여 로마서 강해에서 6:3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시간적인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이다. ...영원한 죽음도 두 종류이다. 하나는 좋은 것으로서 매우 좋은 죽음이다. 그것은 죄의 죽음이며 죽음의 죽음으로서, 영혼은 조로부터 해방되고 분리되고 육체는 부패로부터 분리되며 은총과 영광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께 연결된다....다른 종류의 죽음은 영원하고 매우 두려운 것이다. 그것은 저주받은 자들의 죽음으로서, 의인은 구원을 받는 한편 죄와 죄인은 죽지 않으며, 육체는 죽지만 죄는 계속 살아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

이처럼 죽음이 있다는 것은 성서적으로 보아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범죄로 인한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죽음이란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요, 영이 육을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루터는 단순히 육체적 죽음이나 생명 자체의 소멸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인격적 중심과 깊이에 관심을 고정시킨다. 이는 곧 그리스도인이 소망하는 미래를 주로 죽음 안에서 죽음을 넘어 개인에게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죽음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삶이 있을 것이라는 루터의 확신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하는 전체적인 사역 위에 근거해 있다. 루터는 죽음 너머의 상황에 대한 모든 확신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존한다. 이러한 이유로 루터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가 죽을 때 어디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안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11:25-26)

이 말씀은 인간이 죽을 때 붙들어야 하는 것이며 동시 이것 안에서 그는 평화롭게 안식할 자리를 발견한다.

그때 그는 마지막 날까지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유지되고 보존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죽음에 관한 루터의 통찰과 이해는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될 소망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 배후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이 있음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그래서 루터에 따르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믿음으로서의 신앙과 연관된 죽음과 죄 그리고 율법이라는 멸망의 세력들에 대한 승리를 획득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루터는 죽음으로 영혼은 육체로부터 분리된다는 사고와 함께 주님의 부활과 연결시켜 생각하면서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죽음으로 영은 주께로 돌아온다. 죽음으로 영혼은 육체로부터 분리된다는 것은 모든 교회가 가르치는 것이다. 그렇지만 육체와 영혼이 완전히 분리된 사물인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이에 대하여 루터는 죽은 자의 영혼은 하늘과 땅에서동시에 잠들어 있으며, 최후 심판의 날에 새롭게 깨어난다는 의견을 표명하였다. 그때 일어난 자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그들이 잠들었고, 어디에 있었는지를 전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죽음을 성서는 잠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마치 잠이 들었는데 그가 일어나 보니 어느새 아침이 된 것을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마지막 날에 갑자기 일어나는 사람들도 그러므로 이와 같이 어떻게 우리가 죽었는지 그리고 죽음을 통과했는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루터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원으로 들어갈 때 건너게 되는 경계선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이란 있지 않으며 다만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은 비록 이 세상 가운데 나그네의 삶을 살지만 믿음 안에서 이 세상을 떠날 때 돌아 갈 하늘의 본향(11:16)인 영원한 생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후 심판에 대한 성서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의 부활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이 세상에서 구세주로 일하신 그리스도께서 심판자로 오시는 최후 심판 때에는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을 것이며, 심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서 영생이 있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최후 심판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 최후의 목표인 우리에게 유일한 문이기 때문에, 최후의 심판에는 진지함과 엄격함이 철저하게 드러나면서도 위로와 소망의 측면이 있다.

루터는 자신의 삶 가운데 영적 시련을 겪으면서 마지막 때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인 최후 심판에 대하여 공포와 두려움을 느꼈지만, 영적 시련 후에는 오히려 최후 심판을 기쁨으로 기다리면서 기도하였다.

오소서, 최후 심판이여, 아멘

루터는 요한복음 3:18 저를 믿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지 아니할 것이요를 근거로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이미 심판에서 벗어났음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최후 심판은 우리가 지금 부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완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고린도전서 13:12에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한편 루터는 우리가 이 땅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시간 개념은 죽음 이후의 상황에 적용되지 않음을 강조하면서 모든 개개인은 죽은 후 바로 최후 심판을 경험한다고 그는 말한다.

여기서는 시간을 무시해야 하며 그 나라에는 때도 시간도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모든 것이 시간인 것이다.”

공간과 시간은 우리의사고와 우리가 사는 세계의 범주에 있는 것이요, 그러나 이러한 범주는 하나님의 영원성에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이란 생각을 본질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최후 심판은 한편으로는 마지막 때에 발생하는 하나의 사건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각기 개인이 죽은 후에 맞게 되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죽음은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지만 시간 세계에서 시간 밖으로 옮기우는 과정에 죽음과 최후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루터는 최후 심판의 날에 있을 새로운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영적으로 영양을 취할 것이며, 그에게서 양육을 받을 것이며, 그의힘을 얻어 살아갈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영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살 때, 우리는 또한 하늘과 땅에서 그로부터 나갈 것이며, 태양과 달과 그 밖의 모든 창조물과 함께 놀 것이며, 그 안에서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이러한 루터의 통찰에서 루터는 종말에 대한 기대와 기쁨이 현실 속에서 인간에게만 한정하지 않고, 종말을 기대하는 시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넘어서 하나님과 전체피조물의 관계의 차원에까지 확대되기를 소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볼 때에는 루터는 인간의 역사의 종말만이 아니라 자연을 포함한 우주의 역사의 종말까지도 관심한다.

 

4. 나가는 말

루터는 이 세상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이 세상을 하나님의 공의로 심판하시면서, 세상의모든 적그리스도의 세력을 없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최후의 승리를 거두고 하나님의 통치를 완성하신다는 성서의 묵시문학적 전통에 따라 자신을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한 시대에 살고 있는 존재라고 믿는 종말론적인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루터는 터키족을 종말론적 적대자로 여겨 적그리스도로 보면서 그들의 서유럽 진출을 그 시대의 말세적 징조로 여겼다.

만일 터키인들이 로마를 정복하면 그 때는 모든 것이 무너진 것이며, 심판의 날 이외에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루터의 종말론은 전체적으로 신앙 안에서 현재의 요소와 미래의 요소의 결함으로서 이해되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신앙이란 본질적으로 종말론적 사건으로서 언제나 현재이면서 동시에 미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종말론적 현재는 루터 신학의 전체를 관통하는 그리스도의 날로 정위된(8:56) 종말론적 소망으로서 입증 될 수 있다.

루터의 이러한 종말론에 대한 견해는 종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야기시키지도 않았고, 최후 심판 날에 대한 억측으로 이끌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반대로 묻는다. “왜 신자들이 두려워해야 하며 극도로 기뻐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그들은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오실 것이며 또한 그들의 기업이 되시는 심판자를 신뢰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듯 루터에 있어 신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종말의 날짜가 아니라 종말이 있다는 사실 자체였으며, 시대적 불안이나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종말에 대한 기대는 바로 루터의 이러한 종말론적 사고를 이해할 때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루터의 종말론적 사고의 핵심이면서 기독교 종말론의 결정적인 마지막 일의 표상은 그리스도가 심판자와 구원자로서 올 것이라는 사실이다.

 

초월적인 하나님은 이 세상에 대하여 내재자로서 관계를 맺기 때문에, 그분은 자신의 나를 역사 안에서 역사를 통하여 세운다. 그분이 예수의 성육신을 통해 인간 속으로 낮아졌기 때문에, 종말은 결코 역사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으로 들어온다.

그분은 심판받은 심판자로서, 희생당하였기 때문에 승리자로서 올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재림과 동시에 있을 종말이 파국으로서 절망의 미래가 아니라 희망임을 깨닫게 함으로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아 아닌 소망을 갖게 한다. 바로 이러한 복음적 이해를 가졌던 루터의 종말론적 이해가 그로 하여금 종말의 기대를 가질 수 있게 하였던 것이며, 오늘날 지구적 차원의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에 직면하여 개인의 종말은 물론 역사의 종말의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여전히 올바른 신앙이주는 종말론적 희망을 지세하고 있다.

 

 

 

추천도서

 

지원용, “루터의 사상서울:컨콜디아서, 1982.

 

전경연, “루터신학의 제문제”, 서울:한신대학교출판부, 1986

 

Heinrich Ott/김광식 옮김, “신학해제”, 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87.

 

Hans Schwarz, “종말적인 시대의 위로-말틴 루터의 종말론의 교훈루터연구 2003.

 

Hugh T, kerr/ 김영환 옮김, “루터신학 개요”, 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 1991.

 

 

  발췌한 것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