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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종말론 양신혜

하나님아들 2019. 12. 28. 15:21

칼빈의 종말론 양신혜-안양대학교 교수

 

칼빈의 종말론 이해에서 제기된 논쟁은 그가 종말론에 관심을 보였는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의문이 제기된 이유는 우선 칼빈의 대표적인 저서 기독교 강요에서 종말론과 관련된 부분은 제9-이하 강요라고 하며 권과 장수는 숫자로 표기한다. -미래의 삶에 대한 묵상25장의 최후의 부활, 다른 주제들과 비교할 때 그 비중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칼빈이 성서의 각 권에 대한 주석서를 남긴 반면에 유독 종말론과 관련된 주요 책인 요한계시록에 대한 주석서를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는 요한계시록을 어둠에 가린 책이라 간주하였고 이해하기 힘든 책이라고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종말론 이해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칼빈이 처음 기록한 신학저서인 싸이코파니키아”(한국에서는 영혼수면으로 번역되었으나 본래 이 뜻은 영혼의 잠듦이 아니라 영혼의 깨어 있음)”을 뜻한다.-이다

왜냐하면 이 문서에서 칼빈이 종말론과 관련하여 재세례파의 연혼수면설을 주제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또한 칼빈은 히브리서 주석(1549)과 요한복음 주석(1553), 공관복음서 주석(1555)”에서 종말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칼빈이 종말론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기는 힘들다.

그러면 칼빈은 종말을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를 종말에대한 칼빈의 정의, 죽음 이후의 영혼의 상태, 몸의 부활, 역사와 종말의 관계를 주제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종말이란?

 

칼빈은 강요,8,7에서 마지막 때” , “말세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바울이 의도하는 바는 아니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바는 곧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행하신 것처럼 이사람 저 사람을 통하여 간헐적으로 말씀하지도 않으실 것이요, 이 예언 저 예언을, 혹은 이 계시를 저 계시를 계속 덧붙이지도 않으실 것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안에서 가르침의 모든 기능들을 성취해 놓으셨으므로 우리는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최종적이며 영원한 증인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새 언약의 시대 전체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복음을 선포하신 그 시점부터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의 시기를 마지막 때”(요일2:18), “말세”(벧전1:20). “마지막 날들”(2:17, 딤후3:1, 밷후3:3) 등으로 부르고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가르침을 만들어 내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이 고안해낸 다른 어떤 가르침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법을 배우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칼빈은 종말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으로부터 심판의 날까지 아루르는 시기로 규정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후의 모든 시대는 종말의 역사에 속하게 된다. 이 종말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포괄하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시이기 때문에 그의 종말론은 하나님의 주권사상 그리고 예정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둘째, 칼빈에게 있어서 구원사역의 정점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모든 만물은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되며 세상의 합당한 질서가 회복된다. 이로써 칼빈의 종말론은 역사적 현재성과 더불어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된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한편은 역사적 차원에서의 영적 부활을 제험케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세상의 본래 창조 질서를 회복하게 되는 우주론적 차원으로 승화된다.

 

셋째, 칼빈의 종말은 그릿도의 교훈만이 선포되는 시기로 그가 다스리는 시기에 속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훈 이외의 어떤 것도 만들어 내서는 안 되고 조작도이어도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이 완전하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만으로 이루어져가기 때문이다.

 

2. 영과 육에 대한 이해

 

빈의 종말 이해의 중요한 점은 예수의 성육신으로 이미 종말이 시작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 승천하여 지금 이 순간 하늘에 계시며 다스린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이 땅에 오셔서 마지막 심판을 행할 때 그때까지 이 땅에 살아가는 자들은 하늘로 승천한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그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렇다면 이 땅에 살아간 자들은 사후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면서 그 마지막 날을 기다리게 되는가,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영혼은 어떤 상태로 머무는가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이는 칼빈이 재세례파와의 논쟁에서 다룬 주요 주제이다.

재세례파는 죽음 이후에 인간의 영혼은 수면 상태에 들어간다는 입을 취한 반면, 칼빈은 인간의 영혼이 불멸의 상태로 들어가 죽음 이후에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교제를 지속하며 그 상태에서 복된 안식을 누리고 그리스도의 심판을 즐겁게 기다린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있어서 개인적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가 이루어지는 시간이자 영혼과 육체의 갈등이 끝나는 시점이다.

 

여기에서 영과 육을 구분하는 칼빈의 이원론적 사고를 엿볼 수 있다. 칼빈은 육체를 썩어 없어질 것으로 여겼고 영혼은 죽은 이후에도 존재하는 것으로서 불명성을 지닌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육과 영혼과의 대립구도에서 영혼의 불멸성을 주장함으로써 영혼의 우위성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러면 칼빈은 영혼의 불멸성의 근거를 어디에 두었는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그는 우선 창조론에서 그 우위성의 근거를 찾았다. 칼빈은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형상의 장소라는 점을 근거로 주장하였다.

이러한 이해는 칼빈이 네오플라토니즘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반증한다. 하지만 칼빈은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창조의 부산물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주장함으로써 플라톤과 네오플라토니즘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한다.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을 창조했다는 것은 영혼이 시간 안에서 시작이 있다는 것과 잠재적으로 시간의 흐름에서 그 끝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인간은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죄로 인해 하나님이 창조한 영혼의 상태가 파괴되었다. 만약 아담이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았더라면, 그는 영적으로 불멸의 존재로 계속하여 살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영혼의 죽음을 야기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영혼의 죽음이란 영적인 생명으로서의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실했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연합될 때에만 오직 참된 생명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그 연합의 토대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불멸성을 주기 위해서 인간의 죽을 생명을 취하셨다. 이것을 칼빈은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은 놀라운 교환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인자가 되셔서 우리를 자기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고, 스스로 이 땅에 내려오심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일을 준비하셨으며, 친히 우리의 유한한 운명을 취함으로써 자기의 영생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으며, 우리의 연약함을 받아 취하시고서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강건케 하였으며, 친히 우리의 궁핍을 취하시고서 자기의 부요하심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으며, 우리는 억누르는 그 무거운 우리의 불의를 스스로 지시고서 자기의 의로 우리를 옷 입혀 주신 것이다.

 

따라서 칼빈에게 있어서 영혼불멸의 토대는 그리스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은 구속의 사실에 달려 있다.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주는 결과로서의 영혼의 중생은 첫 부활의 시작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영혼의 영적인 부활을 낳는다. 하지만 이 영적 부활은 그리스도의 형상과의 일치로 나아가는 종말론적 과정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미 모든 부분이 완성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죄를 사하기 위해서 단 번에 제물이 되었고 그 구원을 오나성하기 위해서 두 번째 나타나 최후의 심판을 행하셔야 한다. 그러므로 그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어떤 어려움이 괴롭힌다 할지라도 견뎌야 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시작되는 구원의 종말론적 과정에서 나타난 이미아직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3. 중간상태

 

칼빈은 인간의 죽음 이후의 예수님의 재림으로 육체가 부활할 때까지 육체없이 영혼만 존재하게 되는 중간상태를 인정하였다.

그는 재세레파와는 달리 이 기간 동안 인간의 영혼은 잠이 드는 것이 아니라 영원성을 가지고 천상의 평안을 누리게 된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이 평안은 잠정적인 것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것으로. 몸이 부활할 때 완성된다. 여기에서 죽목해야 할 것은 이 시기 동안 영원한 생명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에게 잠정적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단지 이 완전한 즐거움과 평안은 약간만 경험할 뿐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누리게 되는 평안은 이 땅에서의 삶과는 비교되지 않는 쉼, 기쁨, 위로다. 그래서 완전한 평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인간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둘째, 인간의 영혼은 죽음과 더불어 즉각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평안에 들어간다. 여기에서 시간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칼빈은 재세레파의 영혼수면설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로마 카톨릭교회의 연옥설도 거부한다.

요약하면, 신실한 자들의 영혼은 죽음 이후에 즉각적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의 기업에 대한 약간의 즐거움을 맛본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왕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종말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참된 완성을 뜻하는 육체의 부활이 이루어지는 그날이 도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 이 시기의 불의한 자들의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이들에게도 잠정적으로 저주가 행해지게 된다. 이들도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되겠지만 영혼으로만 존재하는 이 기간 동안에도 고통 가운데 머물게 된다. 왜냐하면 불의를 행한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에 이미 영적인 죽음과 더불어 영원한 저주를 기다리는 두려움 속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그들에게 주어질 지옥의 불에 던져지는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며 처절한 공포 속에서 지내게 되기 때문에 그들은 이미 벌을 받은 것이다. 이들은 정해진 최후의 처벌에 처해질 때까지 쇠고랑에 결박되어 있으며 자산들의 그늘에 묻혀 있게 된다. 이 시기에 그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이미 늦었다는 사실뿐이며 죽음 안에서 안식을 누린다는 것은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하지만 칼빈은 인간이 죽은 후 어떤 상태로 머물고 있는지 지나친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는 것은 유익하지 않다고 한 권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 우리 영혼의 중간 상태에 대해서 지나치게 호기심을 갖고서 탐구한다는 것은 정당하지 않을뿐더러 유익하지도 않은 일이다. 영혼이 어디 있는가. 아니면 영혼이 과연 하늘의 영광을 이미 누리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따위의 문제에 대해서 지나치게 논란을 벌이느라 수많은 사람들이 쓸데없이 고통을 받고 있다. 그러나 알려져 있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한계를 넘어서 더 깊게 알려고 탐구해 들어간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또한 경솔한 짓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해 놓으신 한계로 만족하도록 하자. 곧 경건한 자들의 영혼이 이 세상의 싸움의 수고를 마치면 복된 안식에 들어가고, 거기서 약속된 영광을 누리기를 기쁨으로 기대하며 기다리고, 그리하여 구속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까지 모든 것들이 미결 상태에 있다는 사실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칼빈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영적 부활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이 죽음 후에 즉각적으로 잠정적인 안식과 평안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린다는 사실로 만족하라고 권면한다. 그 이상을 탐구하고 논쟁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유익하지 않기 때문이다.

 

4. 육체의 부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영적 부활을 경험한 경건한 자들은 죽음 이후 영혼의 상태로 평안의 상태에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머물게 된다. 이 구속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몸의 부활이 이루어짐으로써 오나성된다.

칼빈은 강요최종판(.25)에서 최후의 부활을 다루는데 여기에 두 가지의 특징이 있다.

우선 칼빈은 몸의 부활로써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의 역사가 완성되는 것으로 보았다.

둘째, 마지막 때의 부활이 예정론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다.

만약에 마지막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도 무의미하게 된다. 마지막 때의 육체의 부활은 영혼의 불멸의 증거이다. 중간상태의 영혼의 행복도 미래의 부활애 대한 소망에 기인한다.

그렇지만 인간의 자연적 감각을 통해서 최후에 이루어질 몸의 부활을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칼빈은 몸의 부활에 대한 인식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찾는다. 다시 말해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리스도인의 부활의 모범이며 기초로 간주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심으로 죽음을 이기신 것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동일한 역사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살리신 것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살리실 것이다.

둘째,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부활의 근거를 하나님의 전능성에 두었다.

인간은 자연의 과정으로 부활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은 한량없기 때문에 죽은 자들을 그의 능력으로 일으키는 것은 심지어 그의 말씀만으로도 될 수 있는 쉬인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한 그리스도인이 몸은 어떤 상태인가?

칼빈은 부활 후 그리스도인이 받게 될 몸은 이 땅을 살면서 입고 있었던 바로 그것이라고 주장하한다. 만약 무덤에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가 그 몸으로 부활하지 않았다면 그 부활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것이 칼빈의 논리이다. 하지만 부활한 몸이 이전의 땅에서의 모모가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은 현재와 동일한 몸으로 부활하지만 거기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 그것은 이전의 것과는 질적으로 새롭고 다른 더욱 나은 최상의 조건이다.

이 변화는 즉각적인 변화로서의 영화를 의미하며 성령의 특별한 사역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킨다. 이로써 육체와 영혼은 더는 분리 되지 않게 된다. 그리스도의 재림 때 살아 있는 사람들도 영화로운 몸으로 갑자기 변화하게 될 것이다. 어떤 본질이 죽지 않고서는 변화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 재림 때 살아 있는 자들에게 일어나는 그러한 변화는 당연히 죽음의 일종으로 간주된다. 그렇지만 육과 영의 분리가 없기 때문에 죽음으로 생각되지 않을 뿐이다.

 

그러면 이 땅에서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입양된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칼빈은 믿음을 그리스도와의 접붙임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으로 여겼다. 그래서 믿음의 동력인 성령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성령이 입양의 보증이며 증인 날인 담보이다. 그러므로 경건한 자들은 스스로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지만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보기 전에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실제적 의미에서 아직 그리스도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참된 그리스도인의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의 참 영광을 보게 될 때 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이 마지막 때에 의로운 자뿐만 아니라 불의를 행한 자들도 함께 부활하여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러면 무슨 권리로 불의를 행한 자들과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들도 부활하게 되는가? 칼빈은 당시 부활을 이 땅에서 의롭게 산자 들에게 주어지는 혜택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 질문을 제기한다. 이에 칼빈은 우선,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을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에게 골고루 비추는 일반은총으로 그들에게 설명한다. 그리고 불의를 행한 자들은 이미 하나님과 단절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최후의 심판을 받기 위해서 부활하기 이전인 영혼의 중간상태에서 이미 생명에서 끊어져 죽음 속에 살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최후의 심판을 받기 위해서 몸이 부활하게 되는 것은 그들의 어떤 특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이다. 그들의 영혼은 이미 중간상태에서 죽음을 맛보게 되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재림 때 단지 몸이 부활하여 마지막 심판에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이므로 그들에게 몸의 부활은 혜택이 아닌 것이다.

 

5. 종말과 역사

 

칼빈은 종말을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를 포괄하는 시기로 규정한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시간도 종말에 속하게 된다. 여기에서 종말과 역사의 관계가 문제로 제기된다.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 우선, 염두에 두어야할 것은 이 시기가 하늘로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다스림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구원이 완전하게 성취되지는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나 그 자녀 됨은 재림 때 실제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때까지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미래의 삶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면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무엇을 의미하며 실제적 구원의 사역이 완성되는 그때까지 이 땅을 살아가는 자들의 삶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하나님의 영은 숨겨진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그의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지만 우리는 결국 죽는다. 축복을 받은 자의 부활이 약속되어 있지만 우리는 멸망에 둘러싸여 있다. 복 있는 자의 부활이 약속되어 있지만 죄는 여전히 우리 안에 살고 있다. 우리는 복 있는 자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한편 무수한 불행에 짓눌리고 있다. 우리는 풍부한 모든 은혜의 약속을 받고 있지만 종종 배고프고 목이 마르다. 하나님께서는 곧 오신다고 선언하고 계시지만 우리의 외치는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소망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만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의 광휘를 통해서 성령에 의해 어둠의 한가운데로부터 세상 위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칼빈은 여기에서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부활의 약속을 받은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당에서의 삶은 불행의 연속이다. 칼빈은 그 원인을 우리 안에서 살고 있는 죄 때문이라고 여긴다. 그 죄로 인해 인간의 본성에는 최고의 선에 대한 갈망이 내재되어 있지만 인간은 그 최고의 선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본성상 이 세상에 대한 강한 애착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쾌락을 최고의 선으로 삼으면 그는 방종으로 썩어갈 것이고, 만약 명예를 최고의 선으로 삼으면 야심이 그를 사로잡게 된다.

인간의 본성에 내재되어 있는 강한 애착심은 인간의 타락에 기인한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인간의 영혼 전체가 육의 각종 유혹에 빠져 지상에서의 행복을 구하게 된다. 인간의 본성은 이 세상과의 애착심이 강하여 그리스도의 나라를 발견하는 것을 막는다. 그러므로 현세 생활 그 자체로서만 본다면, 불안과 동요와 불행이 무수히 많고 순수한 행복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본성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세상에 대한 애착심에 오래 잡혀 있지 않도록 인간을 이끌어내고자 하며 인간의 태만을 없애기 위해서 적당한 방법을 사용하신다. 인간들이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계획이나 노력이나 행동을 검토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인간 자신이 흙에 지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발견하게 이끄신다. 이렇게 자연의 존재를 깨닫게 됨으로써 자기부정의 단계에 이르고 최고의 행복이 하늘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이 확신에 도달할 때 그리스도에게서만 완전한 기쁨을 누리게 되고 그 돌보심 아래에서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칼빈에게 있어서 이 땅에서의 삶은 부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는 현세의 생활을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거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이 땅에서의 삶은 하늘나라 영광을 위하여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이 땅에서의 삶이 인자하신 하나님의 선물임을 확신할 때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동시에 그것을 기억하며 감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외국인으로서의 그리고 나그네로서의 삶이다. 이 땅은 삶의 종착지가 아니라 하늘에 더 좋은 고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나그네로서 살아가는 자들은 이 세상에 붙들려 있지 않는다. 하늘나라에 계신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자들을 이끌어 그것으로 인도해 나가신다. 이 땅에서의 삶의 목적은 십자가의 훈련을 통하여 현세의 불안을 깨닫게 하여 올바로 전진하도록 인도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이 땅에서의 삶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유혹과의 싸움이지만자기부정십자가 훈련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그를 위해 살고 그를 위해 죽어야만 한다.

 

여기에서 이미아직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자들은 실제적인 구원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성령의 간섭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재림하는 그때까지 견디고 나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와 종말의 관계를 이미아직의 역동적 관계로 규정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그의 나라가 지속되는 영우너성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칼빈이 하나님의 나라를 영적으로 이해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왕직이 영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왕직의 힘과 유익을 알 수 있다고 고백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된 행복은 외적인 유익에 있는 것이 아니다. 결코 아니다. 우리의 행복은 하늘나라의 삶에 속한 것이다.”

칼빈은 종말의 관점에서 세상 변혁의 혁신적 활동을 통해서 역사에 전념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나가는 것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고난의 순례의 길에서 참고 인내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에서는 종말과 역사의 역동적 관계가 뒤로 밀려나 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하나님 나라를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 세계가 올바로 정리된 상태로 회복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역사적 시간에는 하늘나라로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 다스림은 이 세상과 거를 둔 초월적인 다스림이 아니라 성령이 역사에 간섭하심으로써 역사성을 띠게 된다.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는 그의 말씀과 영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이끌어나간다.

이 관점은 그리스도인을 통한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로서의 교회론적 관점으로 확장된다. 이전에 선지자에 의해서 선포되고 소망으로 참여했던 역사의 창조의 목표가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성취되고 그 성취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교회를 통해서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이루어져 간다. 이제 승천한 그리스도가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물론 칼빈은 점차적으로 나아지는 낙관론적 역사관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통해서 점차적으로 호학장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진 것은 분명하나 그리스도의 최후의 재림까지 늘 혼동과 갈등이 존재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분명한 것은 칼빈은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였고 그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하지만 성령을 통해서 이 땅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섭리에 대한 인식은 그리스도인들의 역사의식의 근거가 되었고 교회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동참하도록 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추천도서

 

퀴스트로프, H,/이희숙 옮김, “칼빈의 종말론”. 서울:성광출판사, 1986.

 

토란스,T, F./백철현 옮김. “종교개혁자들의 종말론”, 서울:기민사, 1987.

 

발췌한 것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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