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러의 종말론 이찬석 협성대학교 교수
Ⅰ. 들어가는 말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1703년 6월 7일에 영국의 엡워드에서 태었났다. 그의 아버지는 영국 국교회의 성직자이었던 사무엘 웨슬리이고, 어머니는 수사나 웨슬리이며, 19명의 자녀 중에서 15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웨슬리는 1725년 영국 국교회에서 성직자 안수를 받으므로 4대째 목회자가 되었다. 1735년에는 북미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1738년에 영국으로 귀국하였다. 웨슬리는 1738년 5월 24일 런던 시내의 올더스게잇 거리에 있는 한 채플에서 예배의 사회자가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는 도중 구원의 확신을 체험하는 올더스겟잇의 체험을 하였다. 1740년 런던에서 메도디스트 신도회를 시작하고, 1742년에 최초로 속회를 시작하였고, 1791년 3월 2일에 88세로 소천하였다.
그리스도교 종말이란 마지막 때의 일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기대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에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재림, 죽은 자들의 부활, 최후 심판, 천국 지옥 등 이와 관련된 주제들을 포함한다. 일반적으로 종말은 최후의 심판, 파국, 징벌, 두려움 등 어둡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종말은 크게 두 가지, 즉 “마지막”과 “완성”의 의미를 가진다. 종말은 어두움, 두려움, 파멸, 절망 등 부정적인 의미지로 보게 되는 주된 이유는 종말을 마지막으로 이해하는 데서 비롯된다. 마지막, 끝은 절망을 가리키기 때문에 두려움과 공포를 야기하고 그래서 종말 사건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비관적으로 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종말의 또 다른 의미는 “완성”이다. 현존하는 사물의 목적이 완전히 성취되는 것을 종말로 인식하는 것이다. 성서는 종말적 완성을 새로운 시작으로 선포하는 특징이 있다. 완성은 하나님의 창조적 행도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종말을 완성 또는 새로운 시작으로 이해할 때, 종말에 대한 느낌은 승리, 희망 등 긍정적인 것이 된다.
존 웨슬리의 종말론은 “마지막”과 “완성”이라는 두 가지 차원을 모두 공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 글에서는 존 웨슬리의 종말론의 마지막의 측면을 미래적 종말론-실현된 종말론으로 완성의 측면을 현재적 종말론-실현된 종말론으로 기술하려고 한다.
Ⅱ 미래적 종말론-실현된 종말론
웨슬리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3년 전 1788년에 쓰여진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설교에서 인간의 삶의 목적은 “영원”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현재의 삶보다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을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만 하고 숙고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삶의 목적이다. 무슨 목적 때문에 인간들에게 생명이 부여되었습니까? 왜 우리가 세상에 보냄을 받았을까요? 다른 목적이 아닌 오직 한 가지 이유 바로 영원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살고, 다름 아닌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이 부여되고 연장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이 영원을 분비하는 것이라는 언급은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 현세에 있지 않고 내세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웨슬리는 종말의 현재적 측면보다는 미래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적으로 웨슬리는 그의 설교 “산상설교 Ⅳ”에서 하나님께서 시간을 재촉하사 그의 은혜의 나라가 곧 임하게 하시며...라고 기도하면서 종말인 하나님의 나라는 시간적으로 미래에 속하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실현되어질 미래적 종말론의 모습은 그의 천년왕국, 죽음, 황천, 대심판 등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드러난다.
전통적으로 종말의 미래적 차원은 천년왕국에 대한 이해와 관련되어 있었다. 콜린스에 다르면 웨슬리는 시간을 두고 생각에 변화가 있긴 했지만, 천년왕국의 통치의 실재를 인정하였다. 초기에는 영국 종교개혁 전통의 맥락에서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통치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웨슬리는 전천년설(천년왕국 이전에 그리스도가 오셔서 천년을 통치한다는 설)보다는 후천년설의 입장에 서 있었다. 천년의 통치는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웨슬리는 천년왕국의 통치가 도시에서 도시로, 국가에서 국가로 증가해가면서 신-인 협력은총을 보여 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의 도래는 신-인 협력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개인적인 종말의 미래적 차원은 죽음과 더불어 시작한다. 초기의 웨슬리는 죽음이 영혼을 정결하게 하는 것으로 이해한 적이 있었다. 그의 초기 설교인 “선한 사람들의 고뇌와 쉼”에서 죽음이 우리를 아픔과 병으로부터 뿐 아니라....죄로부터도 구원할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역시 그의 초기 설교라 할 수 있는 1725년에 작성된 “죽음과 구원”이라는 설교에서도 죽음을 행복한 삶으로 가는 입구로 설명한다. “우리는 죽음이 안식처일 뿐 아니라 지상의 가나안과 같이 젓과 꿀이 흐르는 곳이 아니라 끝을 모르는 기쁨이 흘러넘치는, 휠씬 더 바람직한 나라로의 입구라는 것을 성서를 통해 압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시간이 지나 후기로 접어들면서 죽음을 텅하여 인간의 영혼과 몸은 분리되고, 영혼을 죽지 않는다는 측면을 강조하였다. 1786년에 쓰여진 “영원에 대하여”라는 설교에서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죽음이 육체뿐만 아니라 영의 죽음이라는 어떤 자들의 생각은 허망한 것입니다. 죽음은 육체도 영도 끝나게 하지 않습니다.....몸이 그 본래 있던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따라서 죽음의 순간에 영은 말할 수 없이 기쁘거나 말할 수 없이 비참할 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비참함은 끝날 날이 없을 것입니다.”
1788년에 쓰여진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설교에서도 영혼불멸을 주장한다.
“나? 대체 나는 어떤 존재란 말입니까? 두말할 나위 없이 나는 내 몸과 다른 존재입니다. 내 몸이 필연적이지 않게 내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 이유는 내 몸이 죽어도 나는 죽지 않고 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후에도 존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몸이 썩어 흙이 되어도 이 스스로 움직이고 생각하는 원리는 자신의 정열과 기질을 가지고 계속 존속할 것임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진실로 이 몸은 영과 아주 긴밀히 결합되어 있어 나는 이 둘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의 현재의 존재 상태가 나는 확실히 영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부활 이후 영원토록 다시 영과 육을 가질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이 죽음 이후에 곧바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향한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웨슬리에 따르면, 인간은 죽음 이후에 천국이나 지옥으로 직접 향하지 않고 황천이라는 중간지대를 거친다고 보았다. 웨슬리는 황천, 하늘나라, 지옥을 구분한다. 황천은 지옥과 하늘나라에 이르는 대기실이며 지옥은 믿음에서 떠난 자들, 즉 저주받은 이들만이 거하는 곳이라면, 황천은 믿음에서 떠난 자들과 의로운 영혼들이 거하는 공간이다. 웨슬리는 후자를 낙원이라 불렀고, 골고다 언덕에서 회개한 강도에게 하신 말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에서의 낙원이다. 그러나 전자에 대하여 웨슬리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타르투스라는전통적인 이름을 사용하였다. 즉 웨슬리에 따르면 인간이 죽으면 영혼은 죽지 않고 황천이라는 곳을 향한다. 황천에는 낙원과 타르투스라는 두 공간이 있고, 믿음에서 떠난 자들은 타르투수라는 공간으로, 의로운 영혼들은 낙원으로 향한다.
황천은 우주의 어느 공간에 있는가? 에 대하여는 어떤 판단이나 추측이 불가능하다고 웨슬리는 말한다. 그러면 의로운 영혼들은 황천, 즉 낙원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갈까?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수행하거나 주의 일을 하면서 주를 기쁘시게 한다. 그들은 모든 천국의 동료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과 대화하는 동안 더욱더 성결해지고 그들에게 전적인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다. 즉 낙원에 있는 자들, 아브라함의 품속에 있는 자들, 모두 태초로부터 오늘날까지 육에서 해방된 거룩한 영혼들은 천국을 향해 날로 성숙해지며 마침내 태초로부터 예비된 왕국을 받기까지 끊임없이 더욱 거룩하고 행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황천의 비참한 곳(타르투스)에 남아 있는 악인들은 예비된 영원한 불에 던져지기까지 울부짖으며 하나님을 모독하고 저주하며 위를 쳐다보고 있을 것이라고 웨슬리는 보았다.
웨슬리의 이해에 따르면, 죽음 이후에 황천에 거하던 인간들은 “대심판”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하늘나라”와 “지옥”으로 나누어진다. 그는 1758년에 쓰여진 “대심판”이라는 설교에서 마지막 심판에 대하여 세 부분(심판대 앞에 서기 전에 있을 일들, 대심판, 대심판 후에 될 사건들)으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우선 대심판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땅에 표징이 보일 것으로 본다. 이 세상 모든 곳에 큰지진이 일어나고 대기는 폭풍과 거센 바람으로 변할 것이며 지축을 흔드는 우렛소리와 번개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이 소란은 땅 위에서만이 아니라 하늘에서도 계속될 것이다. 행성과 유성의 구별이 없을 것이고 해는 칠흙같이 어두워지고 달은 ㅍ핏빛같이 되고 별은 빛을 잃어 버린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하늘에 있는 성도들이 천사장의 소리에 따라 하나님의 강림을 선포할 것이며 하나님의 나팔을 불어 땅속에서 잠자는 자를 깨울 것이다. 모든 무덤이 열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것이며 모든 사람이 자신의 옛 몸으로 살아날 것인데 그 몸은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변화되어 썩지 않고 죽지 않는 몸으로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천사들을 이 땅에 보내어 그분의 택하신 자를 불러 모을 것이며 주님께서 영광의 보좌에 좌정할 것이다. 주님은 그들을 분별하여 양, 즉 선한 사람은 그분의 오른편에, 염소 즉 악한 사람은 왼편에 둘 것이다.
대심판에서 성부 하나님은 심판의 권세를 인자에게 일임하신다. 인자이신 주님은 이 세상에 강림하셔서 생존자나 이미 죽은 자를 다 심판하신다. 심판받을 숫자는 바다의 모래처럼 무수하게 많아 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땅 위에 살다가 죽은 자들이 다 그 앞에 나타날 것이며 각 사람은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생전에 행한 모든 일이 선하거나 악한 것에 관계없이 모두 진실하게 말하게 된다. 여기에서 인간의 행동만이 폭로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온 모든 말도 폭로된다.
이 심판에서 “의인은 그의 지난날의 죄과 때문에 고민하고 부끄러워하기보다 오히려 즐거워한다. 왜냐하면 그의 죄과는 어린양의 피로 깨끗이 용서받아 없어졌기 때문이다. 의인을 판단하신 이후에 주님은 왼편에 있는 무리를 심판하신다.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면죄와 축복의 선언을,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와 심판의 선고를 할 것이고, 이 선언은 다시 변하지 않는다. 대심판에서 이루어진 형벌이나 상급은 영원히 계속된다.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고 아버지의 오른편에 있는 즐거움의 강물을 마신다. 반대로 악인들은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 그들은 자만심, 악의, 분노, 공포심, 절망 등으로 끊임없이 고통당하게 된다.
웨슬리에 따르면 심판 이후에 펼쳐지는 세계는 새 하늘과 새 땅이다. 모든 사람은 다 즐거움으로 충만할 것이며 하나님은 모든 눈물을 씻겨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짓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성품이 그들의 모습에서 역실히 나타날 것이다.
Ⅲ 현재적 종말론-실현될 종말론
웨슬리에 있어서 구원은 미래적 차원, 죽음 이후로만 기울어 있지 않다. 그는 “성서적 구원의 길”이라는 설교에서 “구원의 현재성”을 강조한다.
“그러면 먼저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상고하여 봅시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이란 종종 듣는 대로 천국에 간다든지, 영원한 행복이라든가 하는 말은 아닙니다. 구원이란 영혼이 파라다이스 곧 주님께서 말씀하신 아브라함의 품(눅16:22) 안에 안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죽음 건너편, 즉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저 세계에서 누리는 행복은 아닙니다. 여기 본문의 말씀 자체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너희는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은 먼데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것을 말합니다. 곧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지금 가지고 있는 축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구원을 얻어 가지고 있느니라고 현재완료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고 있는 구원은 우리 영혼에 처음으로 은혜의 동이 틀 때부터 그것이 영광으로 완성될 때까지 하나님의 전 역사에 미치는 것입니다.
1789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꿈과 같은 인생”이라는 설교에서 웨슬리는 시간과 영원은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따로따로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하면서 가장 지혜로운 것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즉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 죽는 것과 불멸의 것을 연결하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계속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종교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입니다. 사람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고, 하늘과 땅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유한한 것과 불멸의 것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연합되어 있습니다.” 웨슬리는 임마누엘을 근거로 하늘과 땅,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시간과 영원의 연결을 강조하며, 이 연결을 생각하는 것이 가장 지혜롭다고 주장한다.
웨슬리는 영원한 생명이 인간의 죽음 이후에만 또는 대심판 이후에만 주어진다고만 보지 않는다. 웨슬리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식물과 동물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의 근원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의 긍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소망이 있게 하시며 석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신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영원한 생명은 그의 아들에 의하여 얻어졌고 그의 아들 안에서 소중하게 간직되며 이 아들은 그 자신 안에 있는 그 생명의 근원과 충만을 갖고 있으면서 그의 지체 즉 교회와 사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생이 언제 주어지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성령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게 될 때 영생은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웨슬리는 주장한다. “이 영생은 아버지가 기쁘신 가운데 우리의 심령에 아버지의 아들을 계시할 때 시작됩니다. 그때란 우리가 처음 그리스도를 알아 성령에 의하여 그를 주라고 부르게 될 수 있을 때이며,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우리의 양심이 증거 할 때입니다. 그리고 그때 행복, 즉 참되고 견고하며 본질적인 행복이 시작됩니다. 바로 이때에 천국이 우리의 영혼 안에서 열리고 올바른 천국의 상태가 시작되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이 우리의 심령에 부은바 되어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이 즉각적으로 흘러나오게 됩니다.”
콜린스에 따르면, 웨슬리에 있어서 “영원한 세계는 죽음과 더불어 시작할 뿐 아니라 신생에서 우리의 심령에 자신의 아들을 계시하는 아버지를 기쁘게 할 때 시작한다”고 보았다. 웨슬리 신학에서 신생은 구원의 긴 영정 가운데서 한 부분이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을 천국 가는 것과 동일시하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순간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구원은 천국으로 가는 자격을 얻는 순간적인 것으로 칭의에서 완성된다. 그러나 웨슬리에게 있어서 구원은 순간적이면서 과정적인 것이다. 그의 구원론은 선행은총-회개-칭의/신생-성화-그리스도인의 완전으로 이어지는 계속적인 순례의 과정이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회개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함으로 죄를 용서 받는 것은 칭의이고, 신생(중생)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칭의와 신생의 관계에 있어서 논리상으로는 칭의가 신생에 선행하지만 시간상으로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신생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고 웨슬리는 물으면서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갱신할 때에...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 안에서 일치하는 위대한 변화이다“ 칭의는 성자의 역사로 우리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면, 신생은 성령의 역사로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웨슬리는 또렷하게 말한다. “진실로 진실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당신들도 또한 거듭나야 합니다. 당신들은 거듭나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칭의/신생에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리스도인들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며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으며 영생이 주어진다. 이러한 측면에서 웨슬리에 따르면 구원은 칭의/신생에서 주어진다.
“이것(예수 그리스도임-필자 주)을 믿는다면 하나님 나라는 당신의 것입니다. 믿음으로 인하여 당신은 그 약속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으로 회개하고 거짓없이 그 거룩한 복음을 믿는 자를 용서하며 무죄로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에 ”안심하라 네 죄가 사해졌다“(마9:2)고 말씀하시자마자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의와 평화와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롬14:17)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생의 순간에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 임하는가? 웨슬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임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영혼 속에 임한다. “영생은 참 하나님과 그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믿는 사람의 마음속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웨슬리의 구원론은 칭의/신생에서 머무르지 않고 성화와 그리스도의 완전으로 발전적으로 전개되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사회로, 우주로 확장되어진다.
웨슬리에 따르면 “그리스도교는 근본적으로 사회적 종교”이다 그리스도교는 근본적으로 사회적 종교이므로 사회를 떠나서는 전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웨슬리 신학에 있어서 칭의/신생을 통하여 역사 속에서 현재 누리는 영원한 행복은 개인의 내면적 마음속에만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성화로 확장되어 희년 사회의 실현을 통해서 현재적으로 경험된다. 사랑의 구체적 나눔을 통하여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실현해 가는 희년 운동을 통하여 실현된 종말론을 경험한다. 더 나아가서 영원한 행복은 우주적 차원으로 확산해 간다. 작은 겨자씨앗이 순이 돋고 줄기가 뻗고 가지가 자라 능히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새들이 깃들이는 큰 나무가 되듯이 인간의 마음속 내면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사회와 역사를 넘어서 마침내 자연과 우주로까지 확장되어 가는 진보의 과정을 만들어간다.
Ⅳ 나오는 말
웨슬리의 신학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어질 때 미래적인 측면과 실현된 현재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면, 이 둘은 어떻게 연결되어지는가? 웨슬리는 주기도문에서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부분을 해설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측면을 땅 위에 있는 “은혜의 나라”로, 미래적 측면을 영광스러운 “영원한 하늘나라”로 구분한다. 그러나 하늘의 영원한 하늘나라는 땅 위의 은혜의 나라의 연속이요 완성이라고 기술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때 임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을 알 때 임하는 것이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그리스도가 사랑으로 통치하실 때에 즉각적이고 필연적으로 오는 결과”이다. 그러나 주기도문의 이 기도는 수동적인 기도가 아니라 적극적인 기도라고 웨슬리는 강조한다.
천사들이 하나님의 뜻을 기쁘게 듣고, 실행하며 하나님 섬기기를 그치지 않는 것과 같이 “지구에 있는 모든 사람들, 인류의 모든 종족들이 천사가 행한 것처럼 기쁜 마음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게 해 달라”는 기도라는 것이다. 결국 칭의/신생을 통하여 주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영혼 속에 임하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웨슬리에게 있어서 종말은 “이미”와 “아직”의 긴장관계 속에 있다. 종말은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영혼에 이미 현실적으로 실현되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 성화, 사회적 성화, 우주적 성화를 통하여 종말의 충만한 완성을 위하여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웨슬리에 있어서 종말은 기다리는 것보다는 종말9영원)을 준비하며 종말을 살아가는 삶이 소중하다.
추천도서
한국웨슬리학회 편역, “웨슬리 설교전집”,1-7권, 서울:대한기독교서회, 2012.
Kenneth Colins /이세영 역, “거룩한 사랑과 은총:존 웨슬리의 신학” ,기독교대한감리회 출판국, 2012.
Theodore Ryunyon/김고광 역, “새로운 창조” 서울:기독교대한감리회 홍보출판국, 1998.
발췌한 것입니다. 참고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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