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차 례
Ⅰ 네 개의 복음서
가. 왜 4복음서인가? .......... 3
나. 기록된 순서와 강조점 .......... 5
다. 공관복음 .......... 6
라. 복음서의 특징적인 끝냄 .......... 6
Ⅱ 마가복음 서론
가. 제목 .......... 6
나. 기자 .......... 7
다. 기록연대 .......... 7
라. 개요 .......... 7
마. 중요한 특징 .......... 7
바. 기자 마가에 대하여 .......... 11
사. 표적과 표적이 주는 영적 교훈 .......... 12
Ⅲ 마가복음의 교훈
가. 종의 준비(막1:1-13) .......... 12
나. 종의 초기 갈릴리 사역(막1:14-3:12) .......... 16
다. 종의 부르심과 제자훈련(막3:13-8:38) .......... 34
라. 종의 예루살렘 여행(막9:1-10:52) .......... 70
마. 종의 예루살렘 사역(막11:1-12:44) .......... 87
바. 종의 감람산 강론(막13:1-37) .......... 100
사. 종의 수난과 죽음(막14:1-15:47) .......... 101
아. 종의 승리(막16:1-20) .......... 106
Ⅰ. 네 개의 복음서
가. 왜 4복음서인가? - 예수님을 4가지 모습으로 조명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4복음서는 서로 구별되는 다른 특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이야기의 초점을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에 맞춥니다. 그러므로 마태는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시며(마1:1) 그 분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라던 그 메시아임과 아울러 유대인의 왕이심을 마태복음의 여러 부분에 걸쳐서 강조합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절대로 복종하기 위해서 오신 ‘종’이심을 강조합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특별히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계보를 아브라함을 지나서 아담에까지 이르고 결국은 하나님에게까지 이끌어갑니다.(눅3:38)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서 죄를 범해 하나님 앞에 실패한 대표이고, 예수님은 처녀의 몸에 태어나셔서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고 사망과 죄를 처리하신 대표입니다. 누가복음은 바로 예수님이 아담처럼 인류의 대표로서 육신을 입은 사람이심을 강조합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의 어린 시절까지도 기록하고 있습니다.(눅2:42-52)
요한복음은 이 세 복음서보다 더욱 특별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첫 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이시라고 증거하고 요한복음 20장에 도마는 예수님을 가리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요한복음 강해서 발췌>
1. 네 생물의 모습
이 사복음서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것이 요한계시록 4장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네 생물이 있는데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계4:7-8) 같다고 했습니다. 이것들은 만물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이 만물의 으뜸이시고 또한 만물의 대표가 되신 것입니다. 이 네 생물은 4복음서의 성격을 잘 나타내주고 예수님의 모습을 잘 표현해 줍니다. 사자는 왕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을 ‘사자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소는 종을 가리키며 소가 묵묵히 멍에를 메고 주인의 뜻에 순종하듯이 하나님의 뜻에 묵묵히 복종하는 종으로서 예수님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 마가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을 ‘소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인자되신 예수님을 나타내기 때문에 누가복음을 ‘인자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푸른 하늘을 나는 독수리는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의 신성을 표현합니다. 이 때문에 요한복음을 ‘독수리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겔1:10)
2. 서로 다른 네 부류의 사람들 -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한 방법
복음서가 4개인 이유는 성령께서 서로 다른 네 부류의 사람들(오늘날도 여전히 그렇게 분류되는 고대인의 네 부류)에게 접근하기 위해서이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위한 복음서’이다. 마태복음에 나타나 있는 ‘구약의 인용문들 그리고 상세한 강화, 예수님의 족보, 일반적인 셈족의 논조’등은 마태복음을 처음 대하는 독자들의 눈에도 쉽게 띤다.
마가복음은 ‘로마인들을 위한 복음서’이다. 그리고 로마인들처럼 사고보다는 행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기적들은 많으나 비유는 적다. 이 복음서는 아무런 족보도 없는데 그것은 로마인들이 활동적인 종의 유대적인 족보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은 ‘헬라인들을 위한 복음서’이다. 그리고 헬라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고 탐구하는 많은 로마인들을 위한 복음서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미(美)와 인간과 문화와 문학의 가치를 사랑한다. 누가는 그 모든 것들을 제공해 준다. 헬라인과 가장 비견되는 현대인은 프랑스인인데 누가복음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이라고 말한 사람이 프랑스인이라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요한복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우주적인 복음서’이다. 그것은 복음적이면서도(요20:31) 생각이 깊은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아마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제 3의 인종 - 초기에 안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지칭해 부른 표현)을 염두에 둔 듯하다.
3. 구약에 예언된 예수님에 대한 4가지 칭호
구약성경은 예수님에 대한 예언을 4가지 칭호(왕, 종, 사람, 하나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시2:6) “평강의 왕”(사9:6)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사32:1)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단9:25)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사42:1)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사52:13)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사7:14)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사9:6)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단7:13)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사9:6)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사40:3)
4. 가지
예수님을 ‘가지’로 묘사한 구절들인데 4가지 칭호로 표현됩니다.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렘23:5-6
“....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슥3:8)
“.... 순이라 하는 사람이 ....”(슥6:12)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사4:2)
5. 보라
구약에는 복음서의 주요 주제와 꼭 일치되는 네 차례의 ‘보라’가 나온다.
“....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슥9:9)
“....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사42:1)
“.... 보라 순이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슥6:12)
“....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사40:9)
6. 성막에 사용된 4가지 색깔
“너는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공교히 수 놓아서”(출26:31)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는 성막 재료의 네 색깔도 우리 주님의 속성에 대한 복음서 기자들의 4중적인 묘사와 부합된다.
‘자색’은 왕으로서 오실 예수님과 부합된다. 그리고 자색 의복은 왕들이 입었던 옷이었다. “미디안 왕들의 입었던 자색 의복과”(삿8:26)
‘홍색’ 염료는 고대에 연지벌레를 짜서 만든 것으로 이 색깔은 “벌레요 사람이 아닌”(시22:6) 종으로서 오실 예수님과 부합된다.
‘가늘게 꼰 베실’은 흰색으로 죄 없으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사람)을 강조한다.(계19:8)
‘청색’은 요한복음의 주제인 그리스도의 신성(하나님)을 훌륭하게 묘사해 줍니다.(출24:10)
7.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을 표시했던 깃발도 네 가지(전승에 의함)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중심해서 동서남북으로 12지파가 3개의 지파씩 그룹을 형성해서 진을 쳤다.(민2) 전승에 의하면 동쪽 진의 깃발에는 사자가 서쪽에는 소가 남쪽에는 사람이 그리고 북쪽에는 독수리가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나. 기록된 순서와 강조점
복음서는 사건들이 항상 발생한 순서대로 기록되지 않았음을 발견한다. 성령께서 종종 사건들을 가르침의 내용을 따라 한데 묶으셨다는 것을 처음부터 아는 것이 필요하다.
‘이제 곧 알게 되겠지만 누가복음은 근본적으로 도덕적인 순서로 엮어져 있으며, 누가는 예수님에 대한 사실과 예수님의 대화와 질문, 답변 및 강화들을 단순히 발생한 사건 순이 아닌 그 내적인 관련성에 따라 분류하고 있다. 사건을 발생한 순서대로 기록하는 것은 가장 엉성하고 가장 초보적인 기록 형태이다. 반면에 사건들을 그 인과관계의 측면에서, 그 도덕적인 순서대로 한데 묶는 것은 단순한 연대 기자와 구분되는 역사가에게 주어지는 훨씬 더 어려운 과제이다. 하나님께서는 누가를 사용하여 그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게 하실 수 있으셨다.’ <윌리엄 케리>
이러한 상이한 강조점과 접근은 복음서의 다양성을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공관복음으로 불리는 앞의 세 복음서는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접근에 있어 유사하나 요한복음은 다르다. 요한은 후에 기록했으며 이미 잘 다뤄진 내용을 반복하기를 원치 않았다. 요한복음은 주님의 생애와 말씀을 한결 그리스도의 신성이라는 관점에서 제시해 준다.
다. 공관복음 문제(마태, 마가, 누가)
앞의 세 복음서 간에는 왜 많은 ‘유사점’(심지어 비교적 긴 단락의 내용 뿐 아니라 어순까지도 거의 같을 정도로)이 있으면서 많은 ‘상이점’이 있는가 하는 문제를 가리켜 흔히 ‘공관복음 문제’라고 부른다.
공관복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적절한 방법은 요한복음에 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여기에는 마태와 요한이 직접 목격한 기억들과, 교회 역사가들이 증거 하는 것처럼 마가(베드로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마가가 기록)의 기록도 포함될 것이다. 성령께로 오는 직접적인 도움과 누가복음(“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눅1:1-2)에 언급된 기록된 자료들과 셈족의 놀랄 만치 정확한 ‘구전’을 추가해 보라. 그러면 공관복음 문제는 해결된다. 그러한 자료들을 뛰어넘는 일체의 요긴한 진리들과 세부 사항 혹은 해석들은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고전2:13) 직접적으로 밝혀졌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명백한 불일치나 세부적인 차이를 발견할 경우에는 ‘왜 이 복음서가 이 사건 혹은 말을 생략하거나 포함하거나 강조하는가?’라고 묻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마태는 두 사람이 치료받은 사실(마20:29-34)을 기록하는데 비해 마가와 누가는 한 사람만 언급한다.(막10:46-52, 눅18:35-43) 어떤 이들은 이것을 모순으로 본다. 그러나 유대적인 복음서인 마태복음은 율법이 ‘두 세 사람의 증거’를 요구하는 까닭에 두 사람 모두를 언급한 반면에 다른 복음서들은 대표적인 인물로 이름이 밝혀진 사람(바디메오)만을 언급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다음에 소개하는 실례들은 복음서에 나오는 외관상의 중복기사들이 사실은 중요한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1)눅6:20-23은 산상수훈의 중복으로 보이나 사실 이 교훈은 들에서 한 설교이다.(눅6:17) 마5장의 8복 강화는 왕국의 이상적인 시민의 성품을 묘사하는데 반해 누가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2)눅6:40은 마10:24과 동일한 말씀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주인이고 우리는 그분의 제자인데 비해, 누가복음에서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가 선생이고 가르침을 받는 자가 제자이다.
3)침례요한은 제자들만 있을 때는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시리라”(막1:8, 요1:33)고 말한 반면에, 바리새인을 포함한 혼합된 무리가 있을 때는 “그는 성령과 불(심판)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실 것이요”(마3:11, 눅3:16)라고 말했다.
4)“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이란 표현은 마7:2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판단하는 자세’를 가리키는 반면에, 막4:24에서는 우리의 ‘말씀에 대한 주의력’을 그리고 눅6:38에서는 우리의 ‘관대함’을 가리킨다.
요컨대 이러한 차이들은 모순이 아니라 의도적인 것으로 사려 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신령한 묵상의 소재를 제공해 준다.
라. 복음서의 특징적인 끝냄
4복음서는 각각의 끝내는 방식이 다르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부활과 지상 최대의 명령으’로 끝내고 있다. 마가복음은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승천’으로 끝내고 있다. 누가복음은 더욱 더 전진해서 ‘성령의 약속’으로 끝내고 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재림에 대한 약속’으로 완성하고 있다.
마태복음은 왕의 능력을 나타내는 부활로, 마가복음은 순종의 종이신 분이 높아진 승천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누가복음은 사람으로서 삶을 사셨던 분이 이제 사람에게 성령을 주셔서 위로와 도와주시겠다는 약속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을 가지신 그분의 재림으로 완성되는 이 마무리는 걸작이 아닌가?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막16:19)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 울 때까지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24:49)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할지라도”(요21:22)
Ⅱ. 마가복음 서론
가. 제목
헬라어 원전에서는 본서의 표제로 ‘카타 마르콘’ 즉 ‘마가에 의한’으로 되어 있다. 본서는 기록한 기자의 이름에다 후에 복음(헬-유앙겔리온)이라는 말을 덧붙여서 ‘마가복음’이라는 표제로 사용하고 있다.
나. 기자
마가복음은 요한 마가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이 초기 교회의 일치된 의견이다. 그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마리아의 아들이었으며 예루살렘에 집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곳은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장소로 사용되었다.(행1:13)
객관적 증거로는 사도 요한은 ‘베드로의 동역자였던 마가가 마가복음을 기록했다.’고 언급했으며, 그리고 파피아스 및 져스틴 마이터,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등도 마가에 의해 기록되었음을 증거 한다.
내적 증거는 마가복음의 기자는 팔레스타인 지역, 특히 예루살렘 지역을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다락방의 기사는 다른 복음서보다 더욱 상세한데 이는 다락방이 마가의 소년시절의 거처였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의 일부는 아람 방언(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언어)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유대인들의 관습이 이해된 상태로 제시되고 있을 뿐 아니라 생생한 현장 묘사는 목격자와 긴밀한 교제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마가복음의 개요는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와 흡사하다.(행10:34-43)
마가는 신약성경에서 ‘마가’라는 이방인의 이름(라틴어)으로 10번 언급되고 있으며, ‘요한 마가’(유대+라틴)라는 복합 이름으로 3번 언급되고 있다. 마가가 처음에는 바울의 수행원이었고, 그 다음에는 자기의 삼촌인 바나바의 수행원이었으며 믿을 만한 구전에 의하면 베드로가 사망하기 전에 베드로의 수행원이었음을 감안 할 때 그는 온전하신 종의 복음서를 기록하는데 최적격자로 볼 수 있다.
다. 기록연대
마가복음의 기록 연대는 분명치 않다. 막13:2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예언한 것으로 보아 주후 70년 이전에 기록된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하지만 초대교회 전승들은 이 복음서가 베드로의 순교(주후68년경) 이전에 기록된 것인지, 아니면 그 후에 기록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불분명하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기록 연대를 주후55-68년 사이로 잡을 수밖에 없다. 현재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르치는 대로 마가복음이 4복음서 중 제일 먼저 기록되었다면 누가는 마가복음도 참조하였을 것이다.
라. 개요
1.종의 준비(1:1-13)
2.종의 초기 갈릴리 사역(1:14-3:12)
3.종의 부르심과 제자 훈련(3:13-8:38)
4.종의 예루살렘 여행(9:1-10:52)
5.종의 예루살렘 사역(11:1-12:44)
6.종의 감람산 강론(13:1-37)
7.종의 수난과 죽음(14:1-15:47)
8.종의 승리(16:1-20)
마. 중요한 특징
1. 기록의 목적
마가복음은 가장 짧은 복음서이며, 그 내용 중 93%정도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동시에 나오거나 혹은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 중 적어도 한 곳에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마가는 어떠한 면으로 독자적인 공헌을 하고 있는가?
본서가 기록된 목적은 ‘예수님의 행적’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의 행적이야 말로 주께서 어떠한 분이신가를 증명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행적은 그 가르침의 권위를 주고 있다. 즉 예수님의 활동과 초자연적인 사역에 눈을 멈추어 보면 확신이 주어지게 된다.
그래서 마가는 곧바로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라는 증거로 시작한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행적에 대한 복음서이다.
2. 탄생기사의 생략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생략되어 있다. 다른 3복음서의 서론에 해당하는 것이 전혀 없다.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다윗의 가계, 동방박사들의 방문, 누가복음에 있는 하늘의 천사들의 베들레헴 목자들에게 탄생의 고지 및 경배, 요한복음에 있는 예수님의 선재에 관한 서론 이러한 기록들이 전혀 없는 것은 왜일까?
마가복음에 이것들을 생략하고 갑자기 갈릴리에서의 선교활동에 들어가는 것은 ‘종’임을 강조하는데 가장 적합하다는 의도에서일 것이다.
3. 생략된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도 철저하게 생략과 요약이 되어 있다. 마가복음서는 16장이고 마태복음서는 28장인데 길이로 말하면 마태는 마가의 두 배의 분량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족보와 유아기이야기, 가르침과 비유로 이루어지는 장을 제외한다면 사건의 기록으로서는 마가의 편이 길다. 이와 같은 것도 ‘종’은 행동을 우선한다는 것에 맞추어진 것이다.
4. 유대 종교가들에 대한 책망의 생략
다른 복음서에 있는 것 같은 책망이 없다. 회개 없는 갈릴리 도시들에 대한 책망(마11장),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책망(마23, 눅11), 그리스도를 거절한 예루살렘의 멸망(마23, 눅13)등이 없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종에게는 ‘화 있을진저’라고 하는 엄한 말과 왕의로서 고발하는 말을 제외하는 것이 적합했을 것이다.
5. 종으로서의 특징이 강조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손으로 일하시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 베드로의 장모를 치료할 때에 예수님은 “그 손을 잡아”(막1:31) 일으켜 세우셨다. 벳새다에서 예수님은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 안수하시고 .... 다시 안수하시매”(막8:23-25)라고 기록되어 있다. 귀신들린 자를 치료하셨을 때 “그 손을 잡아”(막9:27) 일으키셨으며, 귀머거리 되고 벙어리 된 자를 치료하실 때는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막7:33) 넣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가로되 ....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막6:2)라고 외쳤다. 이와 같이 주님의 손이 반복되어 강조된 것은 손은 종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에는 ‘곧’(헬-유두스)이라는 단어가 자주 반복되어 있다. 이 단어가 42회나 반복되어 나온다. 마태복음에는 7회 누가복음에는 1회에 것에 비하면 아주 많다. 종은 활동적이며 기민하고, 피곤을 모르며 신속히 일을 하는 것이 특징이기 때문이다.
6. 세밀하고 생생한 묘사
‘마가복음의 생생하고 풍부한 회화적 묘사는 다른 복음서 기자를 능가하는 것이다.’ <엉거 성경 핸드북>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막1:13)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막1:33)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막2:1-4)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막4:36-38)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떼로 혹 백 씩 혹 오십 씩 앉은지라』(막6:39-40)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막6:48)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단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채로 메고 나아오니 아무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막6:53-56)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막8:2-3)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 밖에 저희에게 없더라』(막8:14)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막9:3)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막9:36)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막10:17)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막10:32)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막10:50)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막11:4)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막12:42)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막15:29)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 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막16:3-4)
7. 이름, 때(Time), 수, 장소에 대한 정확한 기록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막3:17)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막10:46)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막15:21)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1: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막4:35)
『매양 저물매 저희가 성 밖으로 나가더라』(막11:19)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막15:25)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막2:3)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막5:13)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막6: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막14:30)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막14:72)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막2:13)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막12:41)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막15:39)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막16: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막1:45)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막4:8)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막14:68)
예수님의 입에서 아람어로 말씀하시는 것이 마가에 의해서 기록되었고, 때로는 해석이 더해져 드라마틱한 묘사가 되어지고 있다.
『 .... 달리다굼 ....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막5:41)
『 ....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막7:11)
『 ....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막7:34)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 』(막14:36)
『제구시에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막15:34)
예수님의 모습, 몸의 움직임, 감정의 움직임 ... 등 거의가 이 짧은 복음서에 담겨져 있다.
바. 기자 마가에 대하여
마가는 사도행전 12장에 처음 언급이 된다.(행12:12,25) 어머니의 이름은 마리아로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가는 ‘요한’이라는 유대인의 이름과 ‘마가’(라틴어)라는 로마명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큰 집에서 거했고 초대교회 집회장소로 사용되었다.(행1:13) 외숙부 바나바와 마찬가지로 유복했었을 것이다.(행4:37)
바나바와 사울은 마가를 데리고 안디옥에 갔다. 그리고 최초의 선교여행에 마가를 데리고 간 것은 그를 신뢰하고 있었던 것 같다.(행13:5) 그러나 버가에 도착하자 마가는 용기를 잃고 귀국해 버렸다.(행13:13) 바울의 2차 전도여행 시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려고 했고, 결국 의견이 대립되어 바나바는 바울과 갈라져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갔다.(행15:36-41)
그리고 20년 가까이 이름이 언급되지 않다가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골로새 교회에 보낸 서신에 마가의 이름이 등장한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 이들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골4:10-11)
마가는 여전히 그리스도를 위하여 활동하고 있고, 바울의 인정을 받고 있다. 사실 마가는 이전에 자기가 등을 돌렸던 소아시아로 전도여행을 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마가의 여행 예정에 들어있던 골로새 사람들에게 이르거든 환영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이 부가한 말 중에 ‘이런 사람들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역사하는 자들이라고 말하며 그가 나의 위로자고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4:11)
마가는 또한 바울의 순교를 앞 둔 최후의 편지에도 등장하고 있다. 바울은 마지막 순교 직전에도 마가를 가까이 두고 싶어 했다. 그리고 마가는 로마에서 바울에게 충성했을 것이다.
마가에 대해서는 베드로도 언급하고 있다.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벧전5:13)
마가는 베드로의 영향을 받았다. 마가복음의 시작(막1:1)은 베드로의 신앙고백(마16:16)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설교한 내용(행10:34-43)의 순서대로 마가복음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어쩐 일일까?
마가는 버가에서의 실패 후 무엇을 했을까? 전승에 의하면 마가는 애굽에서 선교활동을 해서 많은 회심자를 얻고, 알렉산드리아에 최초의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마가는 처음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그는 그 실패의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주를 바라보고 회복했다. 그리고 그는 순교자가 되었다. 즉 과거의 겁쟁이와 실패자가 순교자의 대열에 오른 것이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사람들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고 실패한 자리에서 일어나 주를 바라보고 앞으로 나간 사람들이다. 과거의 실패로 현제의 삶을 망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일깨우고 있다. 그리고 과거의 실패는 현제를 살아가는 나를 겸손하게 하는 내 삶의 가시라는 것을 ....’
사. 표적과 표적이 주는 영적인 교훈
1.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막1:21-28) - 사단의 권세에서 구원
2.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심(막1:29-31) - 안식이 없는 죄로부터 구원
3. 문둥병자를 고치심(막1:40-45) - 감각이 없는 죄로부터 구원
4. 중풍병자를 고치심(막2:1-12) - 무기력하게 만드는 죄로부터 구원
5. 안식일에 한 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심(막3:1-6) - 쓸모없게 만드는 죄로부터 구원
6. 거라사인 지방의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심(막5:1-20) - 사단의 권세에서 구원
7.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고치심(막5:25-34) - 생명의 활력을 빼앗아 가는 죄로부터 구원
8.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림(막5:21-24, 35-43) - 죽음의 권세로부터 구원
9.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치심(막7:24-30) - 사단의 권세에서 구원
10.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심(막7:31-37) -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죄로부터 구원
11. 벳새다의 소경을 고치심(막8:22-26) -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하는 죄로부터의 구원
12. 귀신들린 소년을 고치심(막9:14-29) - 사단의 잔인한 지배력으로부터 구원
13. 소경 거지 바디매오를 고치심(막10:46-52) - 영적인 소경과 영적인 거지를 만드는 죄로부터 구원
Ⅲ 마가복음의 교훈
가. 종의 준비(막1:1-13)
1.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 증거(막1:1-13)
마가복음의 주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이다. 마가복음의 서론 부분인 본문은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 증거로부터 시작한다. 요한복음에 예수님은 자신이 스스로 자신을 증거 하면 그 증거가 참되지 않다고 하셨다. 구약에는 어떤 사건에 대한 증거로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요구되었다. 예수님은 사도 요한의 증거, 하나님의 직접적인 증거, 구약성경의 증거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를 하나님께로 보냄 받았다는 증거로 제시하셨다.
(요 5:31-39) 『[3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32]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 [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마찬가지로 마가복음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하는 여러 증거가 있다.
1)마가의 증거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막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2)구약성경의 증거(이사야) - ‘주’
(막 1:2-3)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3)세례요한의 증거 - ‘능력 많으신 이, 성령으로 침례를 주시는 분’
(막 1:7-8) 『[7]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침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시리라』
4)하나님의 증거 -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막 1:10-11) 『[10]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5)예수님이 이루신 역사
마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이 이루신 많은 역사(막1-16장)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2. 예수님을 증거 하는 자로서 모범을 보인 세례요한
세례요한은 예수님 앞에 보냄을 받은 선지자로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도록 예비하는 역할을 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구원받은 사람들의 역할도 동일한 것이다. 각 사람 속에 역사하는 것은 성령이시지만 전도하는 자는 그 성령이 역사하시도록 예비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요한의 모습은 오늘 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좋은 모범이다.
1)소명을 이루는 삶
세례요한은 자신이 ‘외치는 자의 소리’였습니다. 그는 소명을 받았고 소명을 이루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소명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과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회개한 사람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사 40:3-11)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11] 그는 목자 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외친 내용은 ‘모든 육체는 풀이며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는 것’이며,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될 것과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이심을 외쳤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해서 회개와 구원 그리고 구원에 합당한 삶을 외쳐야 할 것이다.
(마 3:1-2) 『[1] 그 때에 침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
(막 1:4) 『침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눅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행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높였다.
(막 1:7)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신발의 끈을 풀고 발을 씻겨주는 일은 종이 하던 일이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한 것은 자신은 예수님 앞에서 종으로서의 가치도 없는 하찮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던 사람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을 하셨다.(마21:7) 나귀를 타고 입성할 때 나귀가 자신의 위치를 알지 못하고 일어서서 그 환호를 자기가 취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요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한은 예수님이 높아지는 것으로 만족했다. 예수님이 나타나신 이후에는 자신이 사라져야 할 때인 것을 알았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했는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증거 하는 삶 속에 주님이 높임을 받으시는 동시에 우리도 존경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주님이 높아지기 위해서 우리가 낮아져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때도 요한처럼 마땅히 주님이 높아지시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성령 충만한 삶은 항상 주님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우리의 생애는 주님을 최고로 높이는 삶이 되어야 한다.
3)사람들을 예수님과 연결시키는 중매자로서 기쁨을 누렸다.
(요 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고후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세례 요한에게 꽤 많은 사람이 회개의 세례를 받았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고 했는데 어떤 학자는 30만 명 이상의 사람이 세례를 받았을 것이라는 말도 한다. 아무튼 세례 요한은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음에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이 예수님을 증거 한 이후로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갈 때, 그는 신랑의 친구로서 신랑이 신부를 취하는 기쁨 즉 중매쟁이로서 기쁨이 충만하다고 했다. 그리스도인은 잃어진 영혼이 주님께로 가는 것을 보는 기쁨이 있다.
4)소명을 이루기 위해 단순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다.
(막 1:4-6) 『침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 ....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요한은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한 삶의 목적이 분명했으므로 세상에서는 단순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다. ‘광야에서’의 삶은 '나그네로서의 삶'을 그림자로 보여주고 있다. 그가 입은 옷은 화려하지 않은 낙타의 털로 만든 평범한 옷과 가죽 띠였다. 그리고 그의 음식은 자연식이었다. 그 당시의 일반적인 평민의 음식이었던 메뚜기와 자연에서 취한 꿀이었다. 그는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고 그 당시의 제사장들과 같이 좋은 환경에서 자라고 그것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소명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그 모든 것을 포기했다. 단순(Simple life style)하고 검소한 삶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특징이 되어야 할 것이다.
(히 11:9-10) 『[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히 11:24-26)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3. 성령의 세례
(막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요한이 물로 베푼 세례는 회개했다는 외적인 증표로서 준 것이었을 뿐 사람들의 생애를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주님의 증인이 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연합시킨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어진다.
2)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3)성령을 받으면 교회를 사랑하게 된다.
4)성령을 받으면 형제자매를 사랑하게 된다.
5)성령을 받으면 성경을 알고 싶어진다.
6)성령을 받으면 내세가 믿어지고 삶의 가치관이 바뀐다.
7)성령을 받으면 잃어진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다.
4.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막1:9-11)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 것은 30년의 침묵의 기간을 깨고 공생애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며, 예수님의 진짜 세례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예표하신 것이다.
(눅 12: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예수님이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며 하늘로서 사랑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다.
이것은 우리를 위한 것으로서 예수님이 물에 들어가셨다가 올라오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처리하실 것을 나타낸 것이다.
성령이 비들기 같이 내려온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 성령이 임할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증거 하신 것은 구원받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며 기뻐하는 자라고 증거 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5.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막1:12-13)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신 것은 아담이 실패한 것을 회복하러 오셨기 때문에 먼저 아담이 실패했던 시험을 예수님은 통과하시고 이기셔야 했다.
아담은 풍족한 중에 실패했지만 예수님은 극한 어려움 속에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고 승리하심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실 자격을 있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며 기뻐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자마자 성령에게 이끌려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신 것은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기뻐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으면 동일한 시험이 찾아올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믿는 자들에게 시험은 필연적이며, 주님을 가까이 따를수록 더욱 심해진다.
‘사단은 이름뿐인 신자들에게 폭약을 허비하지 않으나 영적인 전투에서 영토를 넓혀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거대한 포문을 연다.’ <윌리엄 맥도날드>
시험을 받는 것 자체가 죄가 아니라 시험에 굴복하는 것이 죄이다.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는 죄를 이길 수가 없지만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그 시험을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은 이제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마귀를 이기기를 원하신다.
나. 종의 초기 갈릴리 사역(막1:14-3:12)
1. 사역의 시작
(막 1:14-15)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1)마가는 예수님의 유대 사역은 생략하고,(요1:1-4:54) 갈릴리 사역에서 시작하는데 이 기간은 1년 9개월이다.(막1:14-9:50) 그런 다음에 베뢰아 사역의 후반부를 간략하게 다루고,(막10:1-45)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주간을 기록하고 있다.
2)“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라는 말씀은 요한은 구약시대 마지막 선지자로 이제 무대에서 사라지고 동시에 예수님이 등장한다. 옛 시대가 지나가고 새로운 시대가, 구약 시대가 지나가고 신약 시대가 밝아 왔다. 이제는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믿음으로 그리로 침입한다.
(눅 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3)“때가 찼고”에서 “때”는 헬라어로 ‘카이로스’인데 이 단어는 흘러가는 시간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고 결정적인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시간표에는 왕이 공적으로 출현하는 날짜가 예정되어 있었을 것인데 그 날짜가 도래한 것이다.
4)왕인 예수님께서 나타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라는 말씀이 성립이 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며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가져오신 것이다.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곳이 하나님 나라이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구원받는 사람마다 그 속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영원한 천국은 왕이 통치하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곳이다.
(눅 17:20-21) 『[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5)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사람들은 회개하고 신앙을 가지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먼저는 하나님을 떠난 삶을 돌이키고 그리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요즘 사람들은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회개가 없이 예수님이 자신의 구세주라는 것만 좋아한다. 진정한 회개가 없다. 물론 구원받아야 진정한 회개가 될 것이다.
(행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행 20: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2. 예수님께서 하신 중요한 두 가지 일
하나는 복음을 전하는 일이고(막1:14-15) 다른 한 가지는 제자들을 불러서 복음을 전할 사람으로 훈련시키신 것이었다.(막1:16-20) 전도자도 이 두 가지 일을 하러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마 9:37-38)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딤후 2: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3.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제자들의 특징(막1:16-20)
1)자기들의 일에 성실한 사람들이며, 일터에서 부름을 받았다.
2)현세에 만족하지 않고 영원한 것을 바라고 소망하는 사람들이었다.
(막 10:28-30) 『[28]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평범한 어부였지만 더 나은 삶을 추구한 사람들이었다.
(막 1:1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사람이 고기 잡는 일도 필요한 일이고 더 좋은 직업도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는 일은 더 높고 원대한 일이다.
4)믿음의 사람들이었다. 주님을 따를 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주겠다는 그 약속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따랐다.
5)잡을 것을 잡고 버릴 것을 버릴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약속의 말씀과 주님을 붙잡고 배와 부친을 버렸다. 그들은 더 높은 것을 붙잡기 위해서 가치 없는 것들을 버릴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6)충성되고 복종하는 사람들이었다.
7)주님과 고락과 운명을 같이한 사람들이었다.
(눅 22:28-30)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8)형제들과 연합할 줄 아는 조화의 사람들이었다.
(눅 5: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9)즉각적인 순종의 사람들이었다. 주님의 부름을 받을 때 ‘곧’ 그물을 버려두고 좇았다.
10)고기잡이 업이 하나의 기술인 것처럼 영혼을 얻는 일도 그렇다. <윌리엄 맥도날드>
①그것은 인내를 요구한다. 외롭게 기다려야 할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②그것은 기술을 요구한다. 미끼나 그물을 적절히 사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③그것은 분별과 상식을 요구한다. 고기가 어디에 많이 있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④그것은 끈기를 요구한다. 능숙한 어부는 쉽사리 낙담하지 않기 때문이다.
⑤그것은 차분함과 온유한 성품을 요구한다. 최선의 방책은 안절부절 하는 마음을 버리고 자아를 뒤로 물러앉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라감으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 가면 갈수록 다른 사람들을 더욱 예수님에게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책임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며 나머지는 예수님이 책임지실 것이다.
4.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막1:21-28) - 사단의 권세에서 구원
1귀신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있었다.
(막 1:23-24) 『[23]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①“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말씀이다.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귀가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욥의 재물과 몸을 치면 하나님을 배도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실제 그렇게 되지 않았다.
(사 40:25) 『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하시느니라』
(사 57:15)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행 2: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행 3: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행 4: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막 5:7)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②“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마귀는 예수님이 심판의 권세를 가진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것은 사단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를 건지시러 오셨다는 사실을 증거 하신 것이며 최후 승리의 모형이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요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히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요일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계 12: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③귀신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과 상관이 없었다.
(막 1: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셨다.
(막 1:25-26) 『[2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만물을 다스리시고,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 주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도 구원하시고 말씀으로 우리의 모든 삶을 이끌어 가신다.
(히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시 119:89-91) 『[89]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90]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91] 천지가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니이다』
(약 1:18)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3)예수님이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그 회당 안에서 귀신들린 사람이 소란을 피웠다. 즉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때 사단의 방해역사도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초림은 땅에서 마귀의 활동을 더욱 증가시켰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4)귀신은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두려워한다.
우리가 승리하는 비결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분을 가까이하며 말씀을 가까이할 때 마귀를 능히 대적할 수 있는 승리의 비결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부모님들은 빨리 손을 쓰기 바랍니다. 마귀가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죄를 가르치기 전에 자녀들에게 먼저 예수님을 가르치시오.’ <윌리엄 부스>
(약 4:7-8)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엡 6:10-11) 『[1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5.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심(막1:29-31) - 안식이 없는 죄로부터 구원
1)예수님이 한 사람 생애 속에 들어오면 안식이 이루어지며 문제가 해결되어져간다.
(막 1: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예수님이 베드로와 안드레의 집에 들어오심으로 인해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이 고침을 받았다. 누구든지 그 사람의 생애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시면 영혼의 안식이 이루어지며 문제가 해결된다.
2)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섬김의 삶을 살게 된다.
(막 1: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열병이 떠나간 것은 즉각적인 치료를 나타내기 위해 과거형으로 기록을 했고, 수종을 드는 것은 현재형으로 기록했다. 이것은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 섬김의 삶을 지속적으로 살게 되는 것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현장에 많은 갈릴리에서 온 여자들이 있었는데 그 곳에 시몬의 장모도 있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치료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봉사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신다. 구원을 받은 사람의 외적 증거가 되는 변화는 하나님을 섬기고 형제자매와 이웃을 섬기는 모습이다.
(마 27:55-56) 『[55]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 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살전 1:9)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3)예수님이 베드로의 집에 들어오심으로 인해서 베드로의 장모에게 영향을 미쳤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할 때 그 가족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행 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6. 예수님의 기도와 전도(막1:35-39)
1)바쁘기 때문에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은 피곤한 하루를 보낸 다음날 새벽에 기도를 드렸다. 예수님은 안식일 하루 종일 바쁜 일정을 보내셨습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그 회당 안에서 소란을 피우는 더러운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 내셨으며,(막1:21) 시몬의 집으로 옮겨 시몬의 장모에게 있는 중한 열병을 치료하여 주셨고,(막1:29) 저물어 해 질 때까지 많은 병자를 치료하여 주셨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 우리는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 그 다음은 쉬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하는 교제의 즐거움을 아셨다.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도의 시간을 의무가 아닌 특권과 안식의 시간으로 삼는 마음이 필요하다.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범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과오는 하나님의 일에 너무 바빠 하나님과의 교제를 게을리 하는 것이다.’ <A.W 토저>
‘요즘 내가 바빠진다 더 기도해야겠다.’ <마틴 루터>
(시 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예수님은 사역을 위해서 기도하셨다.
우리는 하루하루 인도하심과 사역을 위해 우리의 귀를 하나님께 열어 놓아야 한다. 예수님이 그 날 하루의 인도하심과 사역을 위해서 기도하시고 하나님과 교제하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그러한 시간이 필요하겠는가? 우리에게서 더 많은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대한다면 더 많은 시간을 주님과 보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사 50:4-5) 『[4]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행 6:4)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3)주님과 만나기 위한 최적의 시간 최적의 장소를 준비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막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4)기도는 매일 매일 우리에게 무엇이 더 우선적인 일인지를 깨닫게 해 주고, 내 생활을 더 중요한 일에 투자하며 내 삶을 지배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한다.
5)제자들이 모든 사람이 주를 찾는다고 할 때 왜 다른 마을들로 가자고 하셨을까?
(막 1:37-38) 『[37]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①주님은 방금 전에 기도의 시간을 가지셨으며, 하나님께서 그 날 자신을 통하여 무엇을 하시기를 원하시는지를 아셨다.
②주님은 가버나움에서 일고 있는 자신의 인기에 대한 움직임이 천박한 것임을 아셨다. 사람들의 이면 속에 숨어 있는 마음속의 동기를 아셨다.
③주님은 인기의 위험을 아시며, 모든 사람이 좋게 말할 때 경계하라고 말씀하셨다.
(눅 6: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④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자기에게 왕관을 씌울지도 모르는 피상적이고 감정적인 표현들을 어떠한 것이든지 끊임없이 경계하셨다.
⑤주님의 가장 큰 관심사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병 고치는 기적이 사람들의 비참함을 덜어 주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⑥더 많은 지역에 전도를 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다른 마을로 가기를 원하신 것이다.
(막 1: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
7. 문둥병자를 고치심(막1:40-45) - 감각이 없는 죄로부터 구원
1)우리는 문둥병이 들린 사람의 기도에서 응답하시는 기도가 어떤 기도인지를 발견한다.
(막 1:40)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①경외함이 담긴 기도였다. - “꿇어 엎드리어”
②간절하고 필사적인 기도였다. - “간구하여 가로되”
③겸손하고 순종적인 기도였다. - “원하시면”
④믿음의 기도였다. - “하실 수 있나이다.”
⑤필요를 알고 드린 기도였다. - “저를 깨끗케”
⑥개인적인 기도였다.
2)주님은 그 문둥병자가 깨끗해지기를 원하셨다.
(막 1:41)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께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2:4)
3)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해진 것은 구원이 즉시 이루어짐을 말한다.
(막 1:42)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시 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4)문둥병자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처럼 구원을 받은 사람은 삶이 새로워진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8. 중풍병자를 고치심(막2:1-12) - 무기력하게 만드는 죄로부터 구원
1)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다.
(막 2:3-5)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 [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환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사람들은 중풍병자를 예수님에게만 데려오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저희의(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죄를 용서해주시고 병도 고쳐주셨다.
지금도 믿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때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은 소돔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건져주셨다.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의 믿음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의 통로가 된다.
(창 19:29)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행 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2)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고 방해물을 극복하도록 한다.
(막 2:3-4)『[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
예수님이 고쳐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은 그 중풍병자를 메고 오는 행함으로 나타났고, 그리고 많이 모인 무리가 방해물이 되자 결국은 지붕을 뜯어서 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렸다.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주변의 시선을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우리가 죄 사함의 축복을 경험했다면 다른 사람들을 예수님 앞으로 실제로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방해물이 있다고 그만두겠는가?
(약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마 17: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슥 4: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3)예수님은 육신적인 필요보다 더 필요한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셨다.
(막 2: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네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라는 말씀은 중풍병자가 기대하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중풍병자는 병이 치료되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이 죄 사함이라는 것을 아셨다. 이 땅에 모든 질병을 가져온 원인이 죄였고, 예수님은 그 증상보다는 원인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가 무엇인지 먼저 살펴야 한다.
4)예수님은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시는 동시에 그에게 믿을 수 있는 힘도 주셨다. 중풍병자는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즉시 죄 사함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수가의 우물가의 여인에게 ‘내가 그로라’고 하시는 동시에 메시야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하도록 하셨다. 우리에게도 완성하신 사역을 증거 하는 동시에 그 말씀을 믿도록 성령께서 사역하심을 믿을 수 있다.
(요 4: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살전 1: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5)예수님은 자신이 죄 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려고 하셨다.
(막 2:9-10)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죄를 사하는 일은 중풍병을 고치는 일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죄가 사함을 받으려면 독생자가 죽어야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치료하는 것보다 어려운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임을 알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바로 예수님은 그 죄를 처리해주러 오신 분이심을 사람들이 깨달아야 된다. 그것을 바르게 깨달으면 구원을 받는다.
6)예수님이 중풍병자의 죄를 처리해 주신 것은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거 하신 것이다.
(막 2: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예수님이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실 때 유대인들은 그 말뜻을 잘 이해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선언하신 것이었다. 그것을 안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참람하다고 생각했다.
7)예수님의 전지하심
(막 2:6-8)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말씀을 듣고 속으로 예수님을 참람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셨다. 이것은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신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전지하심이다.
(왕상 8:39)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유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시 33:13-15) 『[1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14] 곧 그 거하신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을 하감하시도다 [15]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로다』
8)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이 중풍 병을 고쳐주심으로 드러난 것처럼 우리의 변화된 삶이 주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구원하시는 능력이 있음이 알리는 것이다.
(막 2:11-12)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중풍병자는 즉시 죄 사함의 확신을 가졌지만 주변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그 사람의 죄가 실제적으로 용서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서기관들에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외적인 증거로 중풍병자의 병을 치료시켜서 상을 들고 가게 하셨다.
9)중풍병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처럼 구원을 받은 사람은 구원 받기 전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힘이 있다. 믿음은 행함으로 드러난다.
9. 레위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서 음식을 드심(막2:13-17)
1)예수님은 세리인 레위에게서 사도로서의 재능을 보시고 부르셨다.
(막 2: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님은 레위라는 이름을 가진 이 세리를 보았을 때 그 안에 있는 위대한 전도자 마태를 보았다.’ <윌리엄 바클레이>
당시의 세금에는 정세와 관세가 있었는데 정세로는 인두세(사람의 머리수대로), 토지세(가진 토지에 따라), 소득세(얻는 소득에 따라 12-65세)가 있었다. 이 정세만 해도 힘이 들었는데 세리들은 관세라는 이름으로 동족에게 많은 세금을 물렸다. 이 관세(길을 통과할 때 내는 통과세, 마차를 사용하는 마차세, 그리고 물고기를 잡으면 내는 물고기세 .... 등)는 거의 세리들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이었다고 한다. 세리들은 부당한 세를 받음으로 백성들에게 많은 원성을 받았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에 세리는 창기들처럼 사회의 쓰레기 취급을 당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속에서 전도자 마태를 보았다. 수가의 우물가에서 죄 많은 여인을 불러서 사마리아 지역에 많은 사람을 믿음으로 이끄시는 도구로 사용하셨다.
(삿 6:11-12) 『[11]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미디안 사람들을 두려워해서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는 기드온을 여호와의 사자는 그를 ‘큰 용사여’라고 불렀다. 그것은 앞으로 하나님의 손에 잡힐 때 크게 쓰임을 받을 미래를 보시고 그렇게 부르신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을 불러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에게 편견을 가지지 말고 대하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2)영원한 것을 위해 육신적인 것을 포기했다.
(눅 5:27-28) 『[27]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28]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레위의 헌신이 그 당시에는 대단한 희생이었을지 모르지만 영원 속에서는 결코 희생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사용하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되는 것이다.
‘영원히 소유 할 수 없는 것을 내던져 버리고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을 것을 취하는 삶은 결코 바보가 아니다.’ <짐 엘리엇>
3)레위는 즉각적인 순종의 사람이었다.
우리 각자도 레위처럼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순종의 사람이 되기를 ....
4)레위는 주님의 부름을 받은 후 자기 집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열었다.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고 예수님을 섬겼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눅 5: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눅 17:8)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5)레위는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려 주기를 원했다.
(막 2: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예수님을 위한 잔치에 세리와 다른 많은 사람이 함께 앉았다고 했는데, 물론 그곳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도 있었다. 그와 동시에 레위는 자기가 세관 일을 하면서 인간관계를 익혀온 많은 사람을 초청했을 것이다. 그것은 더 많은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알려주기 위한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6)예수님은 영혼을 구원하시는 의사로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죄인들과 가까이 하셨다.
(막 2:16-17)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이 죄인들을 가까이 하셨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있는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접촉해야 한다. 불신자들과 개인적으로 접촉하는 일을 꺼린다면 어떻게 전도할 수 있겠는가? 나는 형제자매들과 가까이 하는 동시에 믿지 않는 불신자와 어느 정도의 접촉을 시간을 사용하고 있는가?
7)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막 2:17) 『 ....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구원을 받게 하려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도와주어야 하는데, 몇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①아담 안에서 죄 씨를 부여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증거 한다.
②율법을 정확하게 제시함으로 하나님의 법에 저촉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한다.
(롬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③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제시함으로 하나님과 비교된 자신의 추악함을 발견하게 한다.
(롬 3: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④율법을 생활 속에 실천해 보려고 하는 사람은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더욱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재물을 많은 가진 청년에게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다. 그것은 지키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지켜보려고 하면 못 지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8)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제사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긍휼을 원하신다.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예수님의 말씀은 호세아서를 인용한 것인데 먼저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를 바란다는 것이고,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긍휼을 베풀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사랑을 경험한 일이 없기 때문에 죄인을 긍휼히 여기는 예수님을 비난했다.
10. 금식에 대한 논쟁(막2:18-22)
1)바리새인의 금식과 세례요한 제자들의 금식은 다르다.
바리새인들은 금식은 그들의 공로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으나,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금식하는 것은 죄를 뉘우치는 회개의 금식이었다.
(눅 18:9-12)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마 6: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2)예수님은 복음의 기쁜 소식을 가지고 오셨다.
(막 2:19)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세례 요한은 회개를 위해 왔으며, 예수님은 복음을 가지고 오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들은 기뻐함이 마땅하고 금식이 필요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은 사람은 애통과 슬픔이 기쁨이 된다.
(시 30:11)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살전 5:16-18) 『[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마 22:1-2)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신랑을 빼앗기는 날이면 금식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막 2: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에는 금식하지 않았지만,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기까지 3일간은 애통하고 금식하였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에 그들은 너무나도 큰 기쁨이 있었고 복음을 전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주님과 멀어질 때 가까이 하기 위해서 금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도와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한 목적으로 금식을 할 때가 있을 것이다.
3)구약과 신약 그리고 율법과 은혜를 섞으면 안 될 것을 말씀하고 있다.
(막 2:21-22)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구약적인 것을 낡은 옷과 낡은 가죽부대로 표현했고, 신약적인 것은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 와 새 부대로 묘사하셨다. 구약의 율법과 세례 요한의 가르침은 예수님에게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므로, 예수님을 받아들인 이후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만 따르면 된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신약의 새로운 것이 시작되었으니 구약적인 것을 붙잡을 것이 아니라 신약적인 것을 붙잡아야 한다. 그림자적인 것을 붙잡지 말고 실체되신 예수님을 붙잡아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과 신약의 말씀에 근거해서 구약을 보아야 한다.
그래서 낡은 가죽부대인 유대교의 형식과 의식은 새 포도주인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능력과 기쁨으로 바뀌어야 한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갈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4)예수님은 새 것이며 새 것을 가지고 오셨다.
①예수님은 새 것이다.
(왕하 2:20) 『엘리사가 가로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사 42:9)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었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렘 31:22)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②주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진 것들이 있다.
(막 1:27)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렘 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골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시 103: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엡 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사 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계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11. 안식일에 관한 논쟁(막2:23-28)
1)배고파서 이삭을 잘라 먹는 행위는 죄가 안 된다.
(막 2: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신 23:25)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들어갈 때에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가하니라 그러나 이웃의 곡식 밭에 낫을 대지 말지니라』
마태복음 12장에는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면서 시장해서 이삭을 잘라 먹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구약 율법에 기록된 대로 낫을 댄 것이 아니라 손으로 이삭을 잘라 먹었기 때문에 죄가 아니었다.
2)바리새인들은 이삭을 잘라 먹는 행위를 노동으로 규정했다.
(막 2: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바리새인들은 자신들 앞에 나타나신 메시야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전통과 유전을 근거로 해서 이삭을 자르는 행위를 노동으로 규정하고 제자들의 행동을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비난했다. 물론 그것은 성경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유전을 근거로 비난한 것이다.
(막 7: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3)예수님께서 구약성경을 통해서 그들의 잘못과 무지를 책망하셨다.
(막 2:25-26)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핍절되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삼상 21:6) 『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안식일)에 물려낸 것이더라』
안식일에 시장해서 이삭을 잘라 먹은 것에 대해 문제를 삼는데 구약에 다윗이 주릴 때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은 것도 하나님은 아무런 문제를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4)성전 안에서 안식일에 일하는 것은 죄가 아니었다.
(마 12:5)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민 28:9) 『안식일에는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 둘과 고운 가루 에바 십분지 이에 기름 섞은 소제와 그 전제를 드릴 것이니』
안식일에 일하지 말아야 하는데 성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은 예외였다. 우리 시대 구원을 받으면 성전보다 더 큰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므로 안식을 범할 수 없다.
5)안식일을 제정하여 주신 목적을 망각한 바리새인들
(막 2:27)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안식일은 멍에가 아니라 사람의 유익을 위해 제정되었다. 안식일보다 사람이 중요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안식일은 사람이 쉬도록 제정하여 주신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39가지 규례로 만들어 각 계명마다 세칙을 6개씩 두어 총 234개의 유전을 만들었다. 그러니 안식일에 무엇을 할 때마다 이것에 걸리는지 안 걸리는지를 확인해야 했으니 안식일은 축복이 아니라 무거운 종교적 멍에가 되었다.
6)예수님은 안식일에 주인이시다.
(막 2: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안식일에 주인이라고 하신 것이다.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모든 날의 주인이시다. 결국 안식일을 제정하여 주심도 인간이 하나님의 안식을 범한 죄인임을 깨닫게 해서 하나님의 참 안식에 들어와야 함을 안식일마다 생각하게 한 것이다. 결국 안식일도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기 위한 통로로 주신 것이다. 인간은 구원을 받아야 하나님의 안식 안에 들어오게 된다.
(골 2:16-17)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7)안식일과 주일
일곱째 날에 하나님은 안식하셨다고 했는데, 아담이 범죄 함으로 하나님의 안식이 깨어졌으며, 그 후로는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말씀이 없다. 오히려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깨어버린 안식을 회복하기 위해 일하시고 계신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인간이 깨어버린 안식을 되찾은 것이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 안에 들어온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쉰다고 했다.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히4:3-10)
그리고 안식일은 일곱째 날이고 주일은 첫째 날 즉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다.
12. 안식일에 한 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심(막3:1-6) - 쓸모없게 만드는 죄로부터 구원
1)왼손은 자유로우나 오른 손이 말라있었다
(눅 6: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성경에 오른 편은 의로운 편, 하나님의 편, 능력의 편을 말한다. 왼손은 자유로웠는데 오른 손이 말라 있어서 쓸 수가 없는 상태가 구원받기 전의 우리의 모습과 같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오로지 세상 것을 추구하고 살아왔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쓸모없는 존재였다.
(전 10:2)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느니라』
(마 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출 15:6)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 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시 118:15) 『의인의 장막에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사 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2)주님이 양 손에 못이 박히신 것은 우리의 손과 발을 주님의 것으로 구별해서 주님을 위해 봉사하게 하기 위함이다.
(막 3:5)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시 22: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요 20:19-20)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요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주님이 양손과 발에 못이 박히신 것은 우리의 손과 발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하시기 위함이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통하여 오른 손이 회복된 것이다.
(레 8:22-24) 『[22] 또 다른 수양 곧 위임식의 수양을 드릴새 아론과 그 아들들이 그 수양의 머리에 안수하매 [23] 모세가 잡고 그 피를 취하여 아론의 오른 귓부리와 오른손 엄지가락과 오른발 엄지가락에 바르고 [24] 아론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 오른 귓부리와 오른손 엄지가락과 오른발 엄지가락에 그 피를 바르고 또 그 피를 단 주위에 뿌리고』
구약성경에도 제사장들을 구별시킬 때 오른쪽 귀와 손가락과 오른 발 엄지가락에 피와 기름을 발라 구별시켰다. 제사장은 성별된 이후 하나님을 위한 생애를 살았다.
3)주님은 어떤 손을 회복시키시는가?
①기도의 손을 회복시키신다.
(시 77:2) 『나의 환난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며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②죄를 씻는 손을 회복시키신다.
(시 26:6)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③믿는 도리를 굳게 붙잡는 손을 회복시킨다.
(히 10: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
④다른 사람을 붙잡아 주는 손을 회복시키신다.
(살전 5: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⑤베푸는 손을 회복시키신다.
(잠 3:27)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⑥부지런한 손으로 회복시키신다.
(잠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⑦봉사의 손을 회복시키신다.
(롬 6:12-14)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⑧원수인 마귀를 대적하는 손으로 회복시키신다.
(미 5:9) 『네 손이 네 대적 위에 들려서 네 모든 원수를 진멸하기를 바라노라』
⑨자기의 신앙을 건축하는 손으로 회복시키신다.
(고전 3:10-15)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그리고 손이 수고한 대로 하나님의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4)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막 3:4)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선이고, 죽이는 것이 악이다.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는 분이셨지만 바리새인들은 죽이는 사람들이었다.
①생명을 죽이는 바리새인들
바리새인들은 말로서 다른 사람들을 죽이는 사람들이었다. 이것은 모두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 때문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공로로 받아들이므로 인해서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함으로 인해서 사람들을 죽이는 역할을 했다.
(마 15: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가감해 전통과 유전을 만들어서 무거운 짐을 지움으로 사람들을 죽였다.
(마 23: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바리새인들의 관심은 정죄할 것을 찾아내는 것이었고, 손 마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없었다. 정죄할 것을 찾아내어 말로 사람들을 죽였다.
(막 3:2)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말만 하고 행하지 않음으로 사람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데 걸림이 되게 함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다.
(마 23:2-3)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했고 실제로 예수님을 죽였다.
(막 3: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②생명을 구하는 예수님
예수님은 생명을 구하는 분이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사람의 죄를 처리해 주심으로 인해서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 구원받은 사람은 복음을 증거 함으로 사람들을 살린다.
다. 종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훈련시킴(막3:13-8:38)
1. 열두 제자를 공적으로 세우심(막3:13-19)
1)열두 제자를 세우신 목적
(막 3:14-15)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①주님과 함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고전 1: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요일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출 24:9-11) 『[9]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10]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11]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
주님과의 친교 즉 교제와 사귐의 대상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구원을 받은 사람을 친교의 대상으로 삼아주신다는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함께 있으므로 인해서 주님의 가르침을 받고 주님에게 훈련을 받을 수 있다. 같이 있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분의 음성을 듣고, 가르침을 받고, 삶의 모습을 본받고, 그분을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기도와 말씀을 통한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 훈련받지 않으면 전도를 할 수도 없고 능력을 공급받을 수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대사로서 세상으로 나가기 전에 먼저 그분과 함께 하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②전도하도록 보내시기 위해서
세움을 받은 것은 전도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말씀의 선포를 최우선적으로 삼아야 하고 복음을 최우선적으로 증거 해야 한다.
③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소유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능력이다. 그리고 이것은 전도와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도를 하자면 하나님의 능력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전도는 마귀의 손에서 잃어진 영혼을 건져내는 것이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2)평범한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비범한 일을 이루셨다.
예수님의 제자로 공적으로 세워진 사람들은 주님께서 원하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특징은 뛰어난 사람들이 아닌 내세울 것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 평범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릴 때 주님의 영광스러운 비범한 일에 쓰임을 받았다.
우리가 착각하면 내가 특별해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특별한 일에 쓰임을 받는 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
(고전 1:26-29)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①반석이 된 시몬
베드로는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이었는데 그에게 반석(베드로)이란 이름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런 베드로를 변화시켜서 초대교회가 세워지는데 기초로 사용하셨다.
②우뢰의 아들이 된 야고보와 요한
야고보와 요한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릴 때 하늘이 보낸 강력한 메신저로 사용하셨다. 한 때 사마리아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자 ‘하늘에서 불을 내려 도시를 멸하기를 구하리이까?’(눅9:54)라고 예수님에게 물음으로 책망을 받았지만 그들을 변화시켜서 강력한 복음의 사랑의 메신저로 쓰임을 받도록 하셨다.
③예수를 판 가룟 유다
유다는 열 두 제자 중에서 육신적으로는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매우 똑똑했고 비판적이었으며 계산에 밝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주님을 배반했다. 우리의 경계로서 세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2. 하나님 나라 역사와 방해하는 역사(막3:20-30)
1)예수님은 친족들에게 ‘미쳤다’라는 소리를 들었다.
(막 3:21)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수님의 특별한 열심은 복음을 경험하지 못한 친척들이 볼 때 미쳤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 말고는 예수님의 열심을 설명할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친족에게 배척을 받았다. 지금도 그리스도인의 특별한 헌신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비춰진다. 우리가 돈 버는 일에 열심이라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격려하겠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일에 열심 낸다면 그들은 우리를 조소할 것이다.
(고후 5: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2)사단의 나라
아담 이래로 마귀는 자기의 나라를 건설해 왔다. 이 세상은 사단에게 넘어갔으며 사단은 세상 임금이다. 마귀는 온 천하를 꾀어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그 세력으로 하나님과 복음을 대적하고 있다
(눅 4:5-6)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요 12: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계 12: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3)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오셨다.
사단의 나라인 세상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오셨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사단의 세력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막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행 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벧전 2:9-10)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3)하나님의 나라를 고의적으로 배척하는 서기관들에게 대한 답변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 즉 성령의 역사를 보면서도 그것을 사단의 역사로 돌리고 주님을 대적하였다. 예수님이 귀신이 들려서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대적했다.
①나라가 서로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함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지금 나타나고 있는 역사는 마귀의 역사가 아닌 하나님의 역사임을 말씀하셨다.
(막 3:23-26) 『[23] 예수께서 저희를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단이 어찌 사단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25]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26] 만일 사단이 자기를 거스려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이에 망하느니라』
②하나님의 역사
(막 3: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집’은 사람의 육체를 말한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속에 영혼을 넣어 주셨다. 사람의 육체는 일종의 흙집이다.
(욥 4:19)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마귀는 ‘강한 자’이다. 그 강한 자 마귀가 사람 속에 들어와서 그 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 집에 들어가시기 위해서는 먼저 강한 자인 마귀를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차지하실 수 있다.
사람은 누구든지 그 속에 사단을 받아들이든지 예수님을 주인으로 받아들이든지 해야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냈다는 것은 그 속에 예수님이 들어가셨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구원받은 사람 속에 들어가 주인이 되시면 그 사람은 새로워지고 변화된다.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님이 ‘강한 자를 결박’했다는 것이나 한 사람 속에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훗날 마귀를 결박하여 영원한 불 못에 넣을 것과 최종 승리를 선언하신 것이다.
(계 20: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③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를 대적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의 영원한 운명을 선언했다.
(막 3:28-29)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29]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성령 훼방 죄는 복음의 역사를 대적하는 것이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죄이다. 사람의 모든 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하셨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죄는 사할 방법이 없다.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분명한 역사를 보고 고의적으로 사단의 역사라고 대적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경고하신 것이다. 믿지 않는 죄는 ‘영원한 죄’라고 하셨다. 이 얼마나 무서운 경고인가?
3.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족관계(막3:31-35)
1)거듭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족관계가 형성이 된다.
(막 3:33-35) 『[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 둘러 앉은 자들을 둘러 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먼저 구원을 받는 것이다. 구원을 받지 않은 사람은 영생을 얻으라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모친 마리아에게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요한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라는 말씀을 하셨다. 물론 부탁하신 것도 되지만 그것보다는 십자가 아래에서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들은 새로운 가족이라는 사실을 일깨우신 것이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단 한 가지의 조건은 거듭나는 것이다.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 19:26-27) 『[26]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2)예수님은 영적인 관계가 육적인 관계보다 우위에 있음을 말씀하셨다. 땅에서의 육적인 모든 인연보다 주님이 우선순위에 있음을 말씀하셨다.
(눅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3)믿는 자들은 구원받지 못한 혈연관계 안의 가족이나 친척들보다는 같은 그리스도인과 더 강력한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4)믿는 자는 한 가족이기 때문에 공동의 목표가 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한 가족이기 때문에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 정말 가족처럼 합심 협력해야 한다. 나는 가족으로서 주님의 기준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가?
(막 3: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4. 씨 뿌리는 비유(막4:1-20)
예수님은 공생애 당시에 많은 비유를 사용하셔서 말씀하셨다. 씨 뿌리는 비유는 모든 비유 중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비유이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비유는 반드시 확실히 이해해야 할 비유이다.
(막 4:13) 『또 가라사대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씨 뿌리는 비유에는 마음의 상태에 따라 어떤 사람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를 밝히고 있으며, 이 말씀은 구원과 신앙생활에 동시에 적용할 수 있다. 여기 중요한 세 단어는 씨, 밭, 그리고 열매이다.
1)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막 4:14)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렘 23:2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씨에는 생명이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 있다. 특별히 복음은 생명의 씨이다. 겨자씨 는 작지만 생명이 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어도 칭찬하셨다.
2)밭에 비유된 사람의 마음
세상에 밭의 종류가 여러 가지가 있듯이 사람의 마음도 종류가 다양하다. 그런데 여기 4종류의 밭을 대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길바닥 같은 마음, 흙이 얕은 돌밭 즉 흙 밑에 바위가 있는 마음(눅8:13), 가시 떨기 같은 마음, 그리고 좋은 땅 같은 마음 등 여러 종류의 마음이 있다.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인에게 3가지 대적이 있다고 했는데 마귀, 육신, 세상이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3가지 밭을 3대 대적과 연결시켜보면 길바닥 같은 마음은 마귀와 흙이 얕은 돌밭은 육신과 가시 떨기 밭은 세상과 연결시킬 수 있다. 3대 대적은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 되는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열매가 맺힐 수 없게 하는 것들이다.
3)마음이 길 가인 사람
(막 4:15) 『말씀이 길 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길가에 씨가 뿌려지면 씨가 땅에 묻히지 못하므로 새들이 쪼아 먹는다. 어떤 사람의 마음은 단단한 길바닥과 같다. 그래서 도무지 말씀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마음에 씨들이 뿌려지지만 마음속에 들어가지 못하므로 아무 유익이 없다.
①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은 말씀을 들어도 감각도 없고 찔림도 없다.
(벧후 2:14)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엡 4:18-19) 『[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②마음을 금강석 같이 굳게 하는 사람도 있다. 죄를 고의적으로 지으면 지을수록 굳어지고 나중에는 강철같이 굳어지고 급기야는 금강석 같이 된다.
(슥 7:12)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신으로 이전 선지자를 빙자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노가 나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나왔도다』
③강퍅한 마음
(신 29:19)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위로하여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을 강퍅케 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을 멸할지라도 평안하리라 할까 염려함이라』
④교만한 마음
(잠 16:5)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
⑤완악한 마음
(마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⑥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속에 진리가 들어갈 수 없다.
(렘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4)돌밭과 같은 마음
(막 4: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막 4:16)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눅 8: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흙이 얇게 깔려 있으므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땅인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길 가 같은 사람보다 무서울 수 있는 것은 그 밑에 바위가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바위가 있는 사람이 있다.
자기 삶의 방식이라는 바위를 끝까지 고수하는 사람이 있다.
자기의 철학과 자기의 전통이라는 바위를 마음 깊이 박아놓고 있는 사람도 있다.
무신론과 진화론이라는 바위가 너무 크게 자리 잡고 있는 사람도 있다.
현세주의라는 바위가 너무 크게 자리 잡고 있는 사람도 있다.
자기의 아집과 자기의 고집 자기가 고수하는 죄라는 큰 바위가 놓여있는 사람도 있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겉으로는 부드러운 흙이 있는 것처럼, 부드럽고 겸손하고 온유하게 보일지 모르나 사실은 완전히 다르다. 복음의 말씀을 듣고 좋아하고 기뻐하였으나 근본적인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잠시 후에는 거짓인 것이 드러난다.
(사 55:6-7) 『[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딤후 3:6-7) 『[6]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7]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5)가시덤불과 같은 마음
(막 4:18-19) 『[18]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19]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이 사람의 마음에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일락이 가득하다. 세상 죄에 대한 욕망이 가득하고 오직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것과 세상적인 유혹에 마음이 빼앗겨 있다.
가룟 유다는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이었다. 그는 재물에 대한 유혹으로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판 것처럼 세상의 욕심과 유혹으로 자기의 영혼을 팔아버린다. 재물을 많이 가진 청년도 그 재물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주님께 나오지 못했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일락이 마음에 가득하므로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결실할 수 없다.
(히 12:16-17) 『[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17]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딤전 5:6)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6)좋은 땅
(막 4:20)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눅 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하나님을 향한 확실한 신앙과 죄에 대한 회개가 좋은 땅이 된다. 성령의 역사로 부드러운 마음, 낮아진 마음, 겸손한 마음,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는 마음, 세상의 허무함을 알고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좋은 땅인 것이다.
①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마음 밭이 갈리어지고 돌들이 제거되고 세상의 것이 제거되어 부드러워진 마음, 말씀을 어린아이와 같이 받을 수 있는 마음을 가리키며,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을 말한다.
②듣고 지키어
스스로 조심하는 마음의 자세를 말한다. 마귀가 틈을 타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 신령한 것을 잘 간직하도록 지켜야 한다. 세상 것이 들어오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
③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열매가 맺히기 위해서는 인내로 가꾸어야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결실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인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인내로 말씀 가운데 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열매를 맺어 주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
(요 15: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골 1: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7)제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보여주셨다.
(막 4:11-12) 『[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12]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하나님은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는 더 많은 신령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는 감추신다. 외인 즉 구원을 받지 못한 자에게 감추기 위한 방법으로서 비유를 베푸셨다.
(고전 2:9-10) 『[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렘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5. 자라가는 씨의 비유(막4:26-29) - 성장의 비유
신앙생활의 과정을 잘 설명해주는 비유이며, 3가지 구원(영혼구원, 생활구원, 성품구원)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이 비유는 신앙생활의 과정을 설명해주기 위해서 주신 좋은 비유이다.
(막 4:26-29) 『[26]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1)영혼구원 - 싹
씨가 심기면 처음에 싹이 나는 것처럼 복음의 말씀이 한 사람 속에 심기면 구원을 받게 된다. 이것은 죄 사함을 받음으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평생에 단 한번 뿐인 분명한 경험이다. 그래서 이 영혼 구원은 이미 각 사람 속에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
(벧전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2)성품구원(생활 구원) - 이삭
구원을 받은 사람이 이제 성령의 도우심으로, 주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순종함으로 인격이 바뀌고 그리스도인답게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구원받은 그날부터 주님 앞에 설 때 까지 지속적이고 반복적이다. 이것은 단번에 되는 것이 아니고 항상 복종함으로 이루어 가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생활의 여정이다.
(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3)몸의 구원 - 이삭에 충실한 곡식을 거둠
구원을 받은 모든 사람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는 부활이 있다. 이것은 미래의 일이며 이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망으로 바라보고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다.
(롬 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4)성장의 과정에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막 4:27)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고전 3:6-7)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5)낫을 대어 추수하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막 4: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6.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심(막4:35-41) - 고난 속의 위로
1)예수님의 인성과 신성
(막 4:38-39)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예수님께서 주무시는 모습은 우리와 같이 연약한 육체를 입으신 주님의 인성을, 바람과 파도를 꾸짖어 잔잔하게 하신 것은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준다. ‘저희가 심히 두려워했다고’ 했는데 바람과 바다가 순종하는 모습을 통해 자연을 다스리시는 권세를 보고 경외심을 갖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신 동시에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다.
2)제자들이 배를 타고 바다에 있는 것처럼 구원을 받은 사람은 안정되지 못한 험악한 세상에 있다.
우리는 요동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그들 앞에 험악한 광야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환난이 있는 세상에 있다.
갈릴리 바다에 갑자기 광풍이 일고 파도가 친 것처럼 신앙생활 속에 갑자기 여러 광풍이 닥칠 수 있다. 물질의 광풍, 건강의 광풍, 사업의 광풍, 가정의 광풍, 직장의 광풍 ..... 등 예기치 않았던 인생의 풍랑이 믿는 사람에게 닥쳐올 수 있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벧전 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3)주님께서 광풍이 일어 물이 찬 배 안에 계셨듯이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 주님과 함께 배를 타고 세상을 통과하고 있다. 주님이 계시는 배는 절대 침몰시킬 수가 없다.
고통의 현장, 낙심의 현장, 불안의 현장, 시련과 역경의 현장에 주님이 함께 계신다. 주님과 함께 험악한 세상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다른 이름이 임마누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해서 건져내신 것이듯이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 건져주셨다. 우리는 주변의 환경을 볼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의지해야 한다.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4)예수님은 폭풍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면 상황이 바뀔 수 있다. 예수님이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고 책망하셨다. 제자들은 죽음 앞에서 주님을 향한 믿음이 얼마나 적은지 들어났다. 사람이 자기의 믿음을 평가받는 가장 좋은 때는 환난의 때이며 역경의 때이다. 욥은 큰 시련을 통해서 그의 믿음을 평가받았다. 환난의 바람이 불 때 자신이 겨인지 물가에 심은 나무인지가 드러난다.
(롬 8:38-39)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5)예수님이 계획하시고 함께 계신 배에 광풍이 찾아왔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계획하신 신앙생활의 여정이고, 그 속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만 역경과 환난은 있다. 그렇다면 그 역경과 환난은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막 4:35-37) 『[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6)하나님이 침묵하시고 계신 것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때가 대면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신다.
(막 4:38-39)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응답이 더디고 앞이 캄캄해 보일 때 영혼에 많은 생각이 일어나며 마음에 근심이 올라온다.
(시 13:1) 『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이 기도는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바라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곤란이 지속될 때 나올 수 있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 개입하신다. 그리고 주님이 개입하실 때 환경이 바뀐다. 주님이 개입하시면 우리의 마음의 풍랑도 잔잔해진다. 형통과 곤고함이 반복되지만 결국은 평안을 주신다.
(민 10:35-36) 『[35]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36] 궤가 쉴 때에는 가로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 인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7)험악한 세상에서 주님을 더욱 체험하고 주님의 능력을 알아간다.
(막 4:41)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주님의 신성을 알아간다.
환경을 극복하시게 하는 주님을 통해서 실제적으로 삶에 함께 하시는 주님을 알아간다.
7. 거라사인 지방의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심(막5:1-20) - 사단의 권세에서 구원
예수님은 자연의 광풍을 잔잔케 하신 것 뿐 아니라 우리 영혼의 광풍도 잔잔케 하신다.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심으로 우리 영혼 속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을 보여주셨다.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인간을 제어할 그 어떤 것도 없다. 윤리나 도덕 세상의 어떤 법과 제도도 사람을 제어할 수 없다. 이 말씀을 통해서 인간의 무력함과 주님의 능하심 그리고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눅 8:27)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1)옷 벗고 있었다.
구원을 받지 않은 사람은 수치를 수치로 모르고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다. 구원을 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다 옷을 벗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 부끄러움을 가리는 옷을 입는다.
(계 16:15)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사 61:10)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2)집에 거하지 않고 무덤 사이에 거했다.
집과 친족을 떠나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 것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있는 인간의 모습이며, 귀신이 쫓겨나고 집에 돌아와 거하는 것은 구원을 받을 때 하나님이 우리의 거처가 되시며 하나님이 거하시는 교회 안에 거하게 된다.
(시 90:1)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딤전 3: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시 84:10)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3)쇠고랑을 깨뜨리는 그를 아무도 제어하지 못했다.
(막 5:3-5) 『[3]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구원을 받지 않은 사람은 윤리, 종교, 도덕, 사회의 어떤 규범으로도 제어할 수 없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어떤 노력으로도 하나님의 법을 순종 할 수 없다. 죄가 그 사람을 주장하고 죄악이 그 사람을 끌고 다닌다. 인간은 죄의 종이다.
마음이 제어 안 되며,(잠25:28) 입술이 제어가 안 되고,(잠10:19) 육체의 정욕이 제어가 안 된다.(벧전2:11)
쇠사슬을 깨뜨린 것처럼 우리 시대는 모든 법칙과 질서 하나님이 매어두신 것을 완전히 끊는 시대이다.(시2:3) 인간은 하나님의 법아래 있을 때 안전한 것인데, 하나님을 법을 벗어나려 한다.
개조로는 불가능하며 성령을 받고 새사람이 되고 새 생명을 받아야 한다. 거듭날 때 성령의 다스림을 받을 때 하나님 말씀의 범주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
4)귀신의 지배를 받았다.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은 사단의 지배하에 있다. 구원을 받으므로 인해 사단의 권세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긴다.
(엡 2:2-3)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행 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5)늘 소리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했다.
하나님을 등진 인간은 영육 간에 자기 자신을 해롭게 하고 있다. 이제 거듭난 후에는 영육 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게 된다.
6)사나웠다.
마지막 시대에는 더욱 사람이 사나와진다. 노아 홍수 때의 특징도 사나움으로 폭력이 난 무했다. 거듭나면 사나운 빛이 바뀐다.
(전 8:1) 『지혜자와 같은 자 누구며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 누구냐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7)친척들에게 일일이 고하게 하셨다.
(막 5:18-20) 『[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신대 [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사단의 세력에서 놓임을 경험한 사람은 그것을 큰 경험으로 여기게 된다. 구원을 받은 것보다 큰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증거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증거는 자기의 가까운 주변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8)군대귀신 들린 자가 나간 것을 본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떠나기를 간구
했다. 사회적인 손해나 경제적인 손해 혹은 개인적인 손해를 두려워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멀리한다. 그들은 자기의 소유를 건지고자 자기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막 5:17) 『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8.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고치심(막5:25-34) - 생명의 활력을 빼앗아 가는 죄로부터 구원
영혼이 병든 사람은 어떤 사람도 고쳐줄 사람이 없다. 세상에 있는 영혼의 의사는 피상적인 치료만 하지 궁극적으로 낫게 해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더 중하게 만든다.
1)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
(막 5: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혈루증이 12년이나 되니 고질병이고 만성이 된 병이다. 피는 생명인데 피가 몸에서 계속 빠져나감으로 인해서 생명의 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인간은 아담 이후로 혈루증을 앓는 여자와 같이 죄로 말미암아 생명을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2)병을 고치기 위해 육신적으로 최선의 노력을 했다.
(막 5: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①영혼의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의사를 찾아갔지만 고침 받지 못했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영혼을 믿지 않으므로 영적인 문제를 전부 심리적인 문제로 다루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철학자들이 영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데 어떻게 영혼의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많은 부흥강사들이 영혼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
*강도만난 자를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닌 사마리아인이 고쳐주었듯이 예수님만이 해결해 줄 수 있다. 어떤 종교적인 열심도 영혼이 구원받게 해 주지는 못한다.
*예레미야 당시에도 의사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으나 못 고쳤다.(렘8:11,22)
(렘 8:11)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렘 8:22)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찜인고』
②있는 돈도 다 허비하였으나 아무 효험이 없었다.
재산을 다 바쳐도 영혼이 구원받지 못한다. 혈루증을 돈으로 해결할 수 없듯이 영혼의 문제는 더더욱 그렇다.
(시 49:6-8) 『[6]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7]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8]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벧전 1:18-19)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③도리어 더 중하여졌다.
종교가를 잘 못 만나게 되면 훨씬 더 잘못된다. 주님을 바로 만난다는 것은 축복이다. 약을 잘 못 쓰면 오히려 더 중하여질 수 있다. 잘못된 교회를 다니면 구원을 받기가 더 어려워진다. 율법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데 오히려 장애가 된다.
(마 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3)예수의 소문을 듣고 와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다.
(막 5:27-28)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절망 중에 있을 때 예수님에 대해서 들었다. 믿음은 들음에서 시작된다. 믿음은 그녀로 예수님에게로 나아오게 했고 믿음으로 옷가지를 만지게 했다. 약을 쓴 것도 아니고 주님이 안수해 주시기를 바란 것도 아니고 옷가지에만 살짝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옷에 손을 대었다. 이 여인의 믿음은 큰 믿음인데 들음에서 시작되었다.
여인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만졌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에 손이 닿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떤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혈루증이 고침 받는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예수님과 우리를 연결시키는 통로는 믿음이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해결해 주신 죄 사함을 믿을 때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받는다. 신기한 역사다.
4)혈루 근원이 즉시 나았다.
(막 5: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즉각적인 고침을 받았고 자신의 나은 줄을 그 몸에 깨달았다. 구원은 즉각적이며 받은 사람 자신이 안다.
(골 1: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요일 5: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5)고침을 받은 사실을 공개적으로 시인을 하게 했다.(간증, 전도)
(막 5: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눅 8:47)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하니』
손을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는 주님을 믿게 된 연고와 어떤 삶의 변화가 생겼는지를 모든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시인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주님에게 영광이 된다. 시인한다는 것은 간증이 되는 동시에 복음 증거이다. 이 여인은 고침을 받은 후에 주님을 굳게 붙잡고 살았을 것이다.
(롬 10:9-10)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막 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9.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막5:21-24, 35-43) - 죽음의 권세로부터 구원
죽은 자를 인간이 살릴 수 없듯이 죽은 영혼을 인간이 고칠 수 없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다.
1)회당장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었다.
(막 5:22-23) 『[22]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회당장의 위치는 당시에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회적 위치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딸의 병 앞에서 마음이 낮아졌다. 그래서 마음을 낮추고 예수님 앞에 나아와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리어 많이 간구했다. 그의 간절한 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간구에 주님은 함께 동행을 해 주셨다.
2)주님이 함께 계신 상황에서 더 중한 상황이 생겼다고 해서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막 5:35-36) 『[35]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 때문에 주님의 발걸음이 지체가 되었다. 회당장의 집에서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왔다. 최악으로 절망이 되는 상황이었다. 예수님은 그 상황에서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다. 계속 믿음을 가지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이틀 더 유하시다가 죽은 이후에 찾아가서 고치셨다. 주님이 지체하시는 것은 이유가 있다. 계속해서 의지하는지를 시험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이 지체가 되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었다.
(롬 4:19-20)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3)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것은 예수님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눅 8:55)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영이 다시 돌아올 때 야이로의 딸이 살아났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다. 주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죄와 허물로 죽은 영혼을 살리실 것을 그림자로 보여주는 것이다.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것은 더 큰 기적이다.
4)말씀으로 아이가 살아났다.
(막 5:41-42)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죽은 아이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살아난 것처럼 죽은 영혼은 말씀을 들을 때 살아난다.
(요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5)살아난 것은 믿음의 역사다.
(막 5: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6)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
(막 5: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고』
세 사람을 특별히 가까이 하시고 세 사람에게 더 많은 것을 보여주셨다. 그 이유는 더 귀하게 사용하시기 위함이다. 이 세 사람 중에 베드로 요한은 초대교회의 기둥 같은 존재였고(갈2:9), 야고보는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우리도 더욱 주님을 가까이 해서 주님께로 더 많은 것을 배우면 더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막 9:2-3)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막 14:32-33) 『[32] 저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7)부활의 모형이다.
(막 5:39)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구원을 받은 사람은 죽었을 때 잠들었다고 했다. 스데반이 순교를 했을 때 ‘이 말을 하고 자니라’고 했다.
구원받고 징계 받아 죽었을 때에도 잔다고 했다.(고전11:30) 구원받고 죽은 성도들을 자는 자들이라고 했다.(살전4:13)
반면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살았든지 죽었든지 죽은 자다.
(마 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8)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었다.
(막 5:40)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지금도 사람들은 자기들의 합리적인 사고로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는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최종진리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는가? 그들은 내세가 있다는 주의 말씀도 재림의 약속도 비웃는다.
(벧후 3:3-4) 『[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4]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9)살아난 자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
(막 5: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육신이 살아난 자에게 음식이 필요하듯이 영혼이 살아난 사람은 신령한 말씀의 젖이 필요하다. 말씀의 떡을 먹여야 한다.
생명을 주신 것은 주님이 하셨는데 먹을 것을 주는 것은 사람에게 시키셨다. 나사로를 살리실 때도 생명은 주님이 주셨으나 배로 묶여 있는 것을 푸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시키셨다.
먼저 구원받은 사람들과 일꾼의 역할이 여기에 있다.
요셉이 7년 흉년을 대비하여 창고에 많은 양식을 준비해 두어서 7년 기근에서 사람들을 도와주었듯이 우리는 생명의 말씀을 풍성히 간직하여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어야 한다.
(벧전 2:2)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마 13:52)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 오는 집 주인과 같으니라』
(마 24:45-46) 『[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창 6:21) 『너는 먹을 모든 식물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식물이 되리라』
막5장에서 사탄의 권세에서 건지시는 예수님, 영혼의 의사 되시는 예수님,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본다.
기독교는 ....살리시고......죄를 사하시고.....사탄의 권세를 폐하고......성장케 하는 일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제로 벌어진다(골2:12-19) 예수님 안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있음을 말해준다. 예수님은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다. 예수님은 모든 것의 해결자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10. 고향에서 배척당하신 예수님(막6:1-6)
예수님은 이미 나사렛에서 활동하시면서 배척을 당하신 적이 있었다.(눅4:16-30) 예수님은 다시 고향에서 안식일이 되어 말씀을 가르치셨으나 배척을 당하셨다.
1)인간의 이성과 사고를 통하여 구원의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나사렛 사람들은 믿음의 눈으로가 아닌 세상적인 안목으로 예수님을 판단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잘못하면 익숙함으로 인해서 편견을 가질 수 있다. 신앙은 이성적 사고가 아니라 겸손한 마음과 구원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있을 때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진다.
2)예수님이 비천한 신분과 겸손한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배척을 받으셨다. 예수님이 강력한 정복자 영웅으로 오셨다면 사람들은 즉시 영접했을 것이다.
(막 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님의 비천하고 볼품없는 모습이 멸시와 배척의 원인이 되었으나 오히려 그것은 인간은 구원하시는 길이었다.
(사 53:2-3)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3)믿지 않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막 6:5-6)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마 13:58)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이와 같은 불신은 나쁜 결과를 엄청나게 가져온다. 이것은 은혜와 자비의 수로를 막아버리기 때문에 곤고한 사람들에게 겨우 몇 방울의 물만 전달될 뿐이다.’ <J. G 밀러>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히11:6)
4)나사렛에서의 배척은 그 주변의 많은 촌에 두루 복음을 전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막6:6)
한 곳에서의 배척으로 너무 실망할 필요가 없다. 그로 인해서 주변의 촌들에 복음이 더 널리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스라엘의 배척으로 이방인에게 복음이 더 빨리 전파되었다. 예루살렘의 큰 핍박은 초대교회 복음이 더 빨리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행 8:1-4)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행 13:45-46) 『[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11. 열 두 제자의 파송(막6:7-13)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능력도 주시고 지침서도 주셨다.
1)둘씩 짝을 지어 보내셨다. “둘씩 둘씩 보내시며”(막6:7)
①구약에 증인으로서의 효력은 두 사람 이상이기 때문에
(신 19:15)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②위로와 격려와 힘이 되게 하기 위해서(합심협력)이며 두 사람이면 유혹을 적게 받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합심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전 4:9-10) 『[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합심협력)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③교회의 단위도 최소가 두 사람이다.
(마 18:19-20)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2)하나님이 보내실 때는 능력도 따라간다.
(막 6:7-13)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 고치더라』
‘부르사 ..... 보내시며 ..... 권세를 주시고’라고 말씀하셨다. 권세를 주셨다는 것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는 것이다. 일군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하나님이 그 능력을 주실 것에 대한 믿음도 필요하다.
3)전적으로 주님을 신뢰해야 한다.
(막 6:8-9) 『[8]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9]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신 것은 주님께서 채워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일군은 자신의 생활을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을 믿는 철저한 신뢰가 필요하다. 자신들의 필요를 공급받기 위해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해야 했다.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4)단순한 삶을 요구한다.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는 것은 탐욕을 경계한 것이며, 또 많이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잘 활용이 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가 될 것이다. 즉 단순한 삶을 요구한 것이다. 데마의 탐욕이 일군의 길에 실격자가 되게 했다.
5)전도는 드려진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
(막 6:10) 『또 가라사대 어디서든지 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두 세 사람 최소의 단위가 가정이다. 초대교회 각 지역에 복음이 전해질 때 개방된 가정 드려진 가정을 중심해서 복음이 증거 되었다. 지금도 새로운 지역에 드려진 가정이 있으면 활발하게 복음이 전파될 것이다.
6)떠나기 까지 거기 머물라고 하신 것은 더 나은 대접을 받기 위해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것을 금하신 것이다. 오르지 일군의 사명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7)복음을 거절하는 것에 대한 경고가 필요하다.
(막 6:11)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야고보와 요한은 사마리아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자 하늘로서 오는 불을 구했다가 책망을 받았다. 그것은 다분히 자존심이 상한 것으로 인한 보복의 성격이었다. 그러나 여기 증거를 삼으라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얼마나 큰 심판이 있다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경고하라는 것이다.
(눅 9:54-55)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딤후 2:25-26) 『[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26]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12. 세례 요한의 죽음과 헤롯 왕(막6:14-29)
제자들의 활동으로 인해서 예수님의 이름이 더욱 드러나게 되고 그 소문이 헤롯왕에게 들리자 헤롯은 전에 자신이 죽인 요한이 살아났다고 생각했다.
1)세례요한이 헤롯의 죄를 지적하므로 인해서 결국 목이 잘린 것은 예수님이 유대 종교가들의 죄와 위선을 폭로하심으로 인해서 십자가에 죽으실 것에 대한 암시이다.
(막 6:18)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2)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의 분봉 왕 헤롯 안티파스
①헤롯은 자신의 죄에 대해 책망을 받고 돌이킬 기회가 있었지만 돌이키지 않았다.
(막 6:20)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
②헤롯은 죄를 고집한 사람이었다.
③헤롯은 허영심이 있고 탐욕스런 사람이었다. 누군가 허영심을 속 빈 영광이라고 했다. 자신은 분봉 왕이었기 때문에 나라를 자신이 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높이고 허세를 부렸다.
(막 6:18)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막 6:22-26)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및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여아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저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④헤롯은 죄의 결과로 인한 양심의 가책과 두려움에서 고통을 당했다. 예수님의 활동을 보고 세례 요한이 살아났다고 한 것은 그만큼 세례 요한을 죽인 죄책감이 그를 붙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막 6:16) 『헤롯은 듣고 가로되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⑤작은 죄를 받아들인 것이 큰 죄로 확장되어 결국은 자신을 죽였다.
탐욕스런 마음 때문에 동생의 아내를 취했고 결국 그 아내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의로운 세례 요한을 죽임으로 인해서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⑥잘못된 말은 또 다른 죄를 파생시킨다. “맹세한 것과 ......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막6:26)
⑦중심에 동기가 바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마 14:5)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민중이 저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민중을 두려워하더니』
중심에 세례 요한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는 양심의 증거로 인해서 죽이지 못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맹세와 사람들로 인하여 결국 죽였다.
13. 오천 명을 먹이심(막6:30-43) -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님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긍휼하심과 백성들을 향한 긍휼하심을 본다. 그리고 5000명을 먹이심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생명의 떡 되심을 보여주셨다.
1)예수님은 제자들의 연약한 체질을 아신다.
(막 6:30-31)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열두 제자가 돌아와 예수님에게 전도의 결과에 대해서 보고했다. 제자들은 피곤한 몸과 부르튼 발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주님은 그런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일군에게 재충전을 위한 휴식이 필요함을 아신다.
2)반납된 휴식으로 인해서 오천 명을 먹이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다.
(막 6:32-33)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33] 그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저희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
한적한 곳으로 배를 타고 이동을 하려 했는데 사람들이 알아보고 제자들보다 먼저 도착하게 되었다. 휴식은 반납되었다. 그러나 그 반납된 휴식으로 인해서 5000명을 먹이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다. 어린 아이의 도시락이 드려진 동시에 제자들의 휴식도 주께 드려진 것이다. 제자들은 휴식이 반납되므로 인해서 모여든 많은 무리들을 귀잖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때때로 휴식의 시간에 찾아온 사람들이 성가시게 느껴지지 않는가? 휴식을 고집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다.
(막 6:35-36) 『[35]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36]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생명의 떡 되신 예수님
①생명을 찾기 위해 예수님 외에 다른 곳에 갈 필요가 없다. 인간의 생각으로 어떻게 그 많은 무리를 먹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주님은 그 많은 무리를 먹이시고 공급해 주셨다. 우리는 주님의 능력을 신뢰해야 한다.
(마 14:1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생명의 떡 되시는 예수님이 함께 계신 곳으로 나아오는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보낼 필요가 있겠는가?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생명을 줄 수 있는 곳이 없다. 오직 예수님만이 생명을 줄 수 있다. 구원받은 이후에도 더 풍성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주님 안에 있으면 된다.
(렘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②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핍절되기를 원치 않으신다.
(막 6:42-43) 『[42] 다 배불리 먹고 [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주님의 생명의 떡은 모든 사람이 먹을 수 있다. 주님은 우리의 영적인 핍절을 원치 않으시고 모든 필요를 넘치도록 채워주신다.
(요 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엡 3: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시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③주님은 생명을 나누어주는데 일군을 도구로 사용하신다.
(막 6:37)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나누어 주는 도구가 되자면 어찌해야 하는가?
*주님께로부터 받아야 한다.
(막 6: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주님께 받은 것을 거저주어야 한다.
(마 10: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야 한다.
(마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4)주님은 인간이 드리는 작은 것을 사용하셔서 큰 역사를 이루신다.(순종)
(막 6: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구원을 받은 사람이 주님 앞에 작은 것을 드릴지라도 그것이 주님의 손에 들어가면 주님은 큰 역사를 이루신다. 드린다는 것은 순종이다. 우리의 작은 순종이 큰 역사를 이룰 수 있다.
주님의 손에 붙잡힌 한 사람이 큰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삼손은 손에 잡힌 나귀 턱뼈는 천명을 죽였다. 다윗의 손에 잡힌 물매 돌은 골리앗을 죽이고 큰 승리를 이루었다.
5)기도는 큰 역사를 이루신다.
(막 6: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떼어주시기 전에 하늘을 향해 기도하셨다. 우리의 기도는 사역을 더 능력 있는 사역으로 만들어 준다.
6)예수님은 양식을 나누어줄 때 체계적으로 하셨다. 양식을 주시기 전에 편리하게 받을 수 있도록 떼를 지어 앉게 하셨다. 오늘 날 우리가 전도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계획이 필요할 것이다.
(막 6:39-40) 『[39]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 떼로 혹 백 씩 혹 오십 씩 앉은지라』
7)떡이 떼어짐(쪼개어)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어 부서짐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생명의 떡이 되어 주셨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기꺼이 희생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아직도 쪼개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막 6:41) 『 ....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8)낭비되지 않도록 하셨다.
남은 것을 모으도록 하신 곳에서 주님은 낭비되는 것을 싫어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생애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낭비하고 있는 것이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14. 바다 위를 걸으신 예수님(막6:45-52)
1)예수님은 오병이어의 자리에서 서둘러 떠나셨다.
(막 6: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본문에는 왜 그 자리를 속히 떠나려 했는지가 분명치 않으나 요한복음에 보면 임금 삼으려 했기 때문이다.(요6:15)
예수님은 사람들의 물질적 욕구와 현세의 만족을 채워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적인 만족과 하나님 나라를 가져다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그러기에 군중들의 임금 삼으려는 시도를 물리치시기 위해서 속히 그 자리를 떠났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합당한 위치가 아니면 복음을 위해서 그 자리를 서둘러 떠날 줄 알아야 한다.(잠23:1-2)
(시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고난과 역경이 있다.
잠시 전에 예수님이 주신 떡을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배를 타고 벳새다로 가라는 주의 말씀에 순종해서 가는 도중에 바람으로 인해서 제자들은 괴로이 노를 젓고 있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생명을 얻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애에 축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순종의 결과 더 큰 어려움과 고통과 시련이 올 수도 있다.
3)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시는 예수님
(막 6: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제자들은 바다에서 괴로이 노를 젓고 있는데 예수님은 혼자 뭍에 남아 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이것은 우리를 위해 하늘에서 중보기도를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예시하고 있다.
(롬 8:34-35)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4)바다위로 걸어서 오신 예수님
(막 6:48)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①바다 위로 걸어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을 말한다.
②세상과 구별되신 예수님을 말한다.
바다가 세상을 표현하는 용어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단7, 계13) 바다위로 걸어오셨다는 것은 세상과 구별됨을 뜻한다. 예수님의 생애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구별된 생애였다.
③베드로도 바다위로 걸었다.
*‘오라’는(마14:29) 주의 말씀에 의지해서 걸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이 세상과 구별되어 살 수 있는 방법은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믿음이다.
*주님을 계속해서 바라봄으로 세상과 구별될 수 있다.
5)우리의 고통을 돌아보시는 예수님
(막 6:48)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①전지하신 예수님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아신다.
“제자들의 괴로이 노젖는 모습을 보시고” 때로 어려움 속에 혼자 있는 것 같아도 주님은 우리의 모든 형편을 보고 계시다.
(사 40:27-28) 『[27]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②도움의 손길을 주시러 오신다.
“저희에게 오사”(막6:48)
③도움을 구하는 자에게 그 손을 펼치신다.
“지나가려고 하시매”(막6:48) 예수님은 부활하신 이후 엠마오로 내려가는 길에서도 ‘더 가려하는 것 같이 하셨는데’ 제자들이 함께 있기를 강권하자 집에 들어가셨다. 우리는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도움을 바라야 한다.
(눅 24:28-29) 『[28]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④목적이 이루어지면 바람은 그친다. 예수님은 우리를 시련하고 단련시키신다. 시련과 단련을 통해서 우리의 연약함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을 더욱 알게 한다. 그 목적이 끝나면 환난은 끝난다.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막6:51)
(마 14: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⑤우리들의 마음은 자주 둔해진다.
(막 6:51-52) 『[51]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52]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잠시 전에 떡 떼시던 일을 통해서 주님의 능력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바다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이 배에 타심으로 바람이 그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놀랐다. 제자들의 마음이 둔하여진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함에도 불구하고 문제 앞에서 좌절하는가? 과거에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경험한 것들을 더욱 일깨우자 그러면 오늘의 어려움 속에 함께 하시는 주를 의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더욱 말씀을 상고해야 한다.
(시 77:10-12) 『[10]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11] 곧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하리이다 [12] 또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
16. 게네사렛 땅에서 병을 고치심(막6:53-56) - 영혼의 병인 죄에서 구원
사람들이 병을 고침받기 위해서 어떻게 했는가? 오늘 날 우리가 영혼의 병을 고침받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1)예수님을 찾아야 한다.
(막 6:55)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단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채로 메고 나아오니』
사람들이 예수님이 어디 계신 줄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찾아야 했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예수님에게 나아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디 계십니까? 어디든지 계시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곳에 계신다. 구원받지 않는 사람이 모이는 거짓된 곳에는 역사하지 않는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이 바르게 증거 될 때 거기 계신다. 우리는 말씀이 증거 되는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받는 많은 경우를 체험하고 산다.
2)그분이 계신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과거에는 자신의 길로 갔지만 돌이키고 예수님을 향해 나아와야 한다. 많은 사람이 고침을 받았지만 나아오지 않은 사람은 고침을 받지 못했다.
3)손을 댄다는 것은 믿음의 행동이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막 6:56) 『아무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4)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영혼이 치료되는 것을 경험하려면 그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막 6:55)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단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채로 메고 나아오니』
17. 참된 경배(막7:1-23)
본문은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계명(유전)을 대조하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경배와 입술로만 드리는 헛된 경배를 구별하며, 마음에서 나오는 것과 외적으로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을 대조해서 보여주고 있다.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높이고 마음에서 우러나와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1)형식과 전통의 문제점
①형식과 전통은 마음을 멀어지게 할 수 있다.
(막 7:3-6) 『[3]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4]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전통과 형식에 집착하다 보면 내용은 잊어버리고 그로 인해서 우리의 내면은 소홀하게 된다. 정결 규례는 제사장들이 손을 씻는 데서 유래되었고 손을 씻는다는 것은 우리의 행동을 씻는다는 뜻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마음과 행동을 깨끗한 상태로 나아간다는 뜻으로 손을 씻는 것이다. 따라서 손을 씻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깨끗한 마음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본질적인 것은 무관심하고 규칙을 세분화시켜 그것에 집착하는 동안 그들의 마음은 멀어져갔던 것이다.
우리의 외적인 규례가 반드시 내면의 성결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②전통과 형식이 말씀을 대신할 위험이 있다.
(막 7:5-7) 『[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6]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은 어느 새 말씀의 자리에 전통이 올라와 있었다. 전통이 말씀으로 둔갑한 것이다. 사람들은 전통을 지키는 것이 곧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착각 속에 살아간다.
집회시간에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이 중요합니까? 그 정신이 중요합니다. 정신을 배우지 못한다면 외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십자가는 기독교의 표식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건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십자가의 내용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생명은 형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말씀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지금도 말씀이 있어야 될 자리에 형식과 전통이 차지하고 있는 수많은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다.
③하나님의 말씀을 폐한다.
(막 7:8-13) 『[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9]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10]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11]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13]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이스라엘에 ‘고르반’이라는 말이 있었다. 이것은 처음에 어떤 어렵게 사는 사람이 하나님께 헌금을 하고 나니 부모님에게 드릴 돈이 없었다. 그럴 때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으니까 괜잖다.’는 뜻에서 ‘고르반’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런데 나중에 그것은 부모님께 드리고 싶지 않은 마음을 자신들이 만든 종교적 제도로 숨기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해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폐했다.
그들은 성경을 자신들의 마음대로 축소 확대해서 규례를 만들었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만든 전통을 따랐던 것이다.
2)하나님을 향한 참된 경배
(막 7: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①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고전 4: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②마음으로 경배해야 한다.
(막 7:6)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잠 23:26)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③진정한 경배에는 순종이 따라야 한다. 공의와 인자와 겸손으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
(미 6:6-8)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3)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켰다.
(막 7:1-2) 『[1]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2]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의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왔다면 예수님의 구속의 역사를 보고 기뻐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큰 것은 걸러내고 손을 씻지 않고 먹는 작은 것에 지나치게 집착했다. 지금도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작은 것으로 흠을 잡고 구속의 귀한 역사는 보지 못한다. 우리는 더 큰 것에 주의하고 진력해야 한다. 예수님과 예수님이 완성하신 복음 그리고 그것을 전하는 것보다 귀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마 23:23-24) 『[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4)마음의 변화가 없이는 하나님을 경배할 수 없다.
(막 7:15-16) 『[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란 음식물인 동시에 바리새인들의 유전이다. 즉 외적인 것이 마음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타락된 기질을 깨닫고 구원을 받아 마음이 변화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을 경배할 수 없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의 타락된 마음을 일깨워 주신 것이다.
18.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치심(막7:24-30) - 사단의 권세에서 구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의 대화 다음에 두로 지역에 사는 이방여인의 딸을 고쳐주셨다. 두 사건을 대조하심으로 인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부각시킨다. 그리고 형식을 준수함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보여주셨다.
1)여인은 불리한 조건을 극복했다.
(막 7: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헬라인이면서 수로보니게 족속인 이방인 여인이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앞에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이방인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믿지 않은 예수님을 수로보니게 여인은 믿은 것이다. 여인은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마15:22)이라고 불렀는데 즉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다는 것이다.
(엡 2:11-12)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마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2)간절하고 끈질긴 믿음이었다. 자신의 요청이 즉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마 15:22-23)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눅 18: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3)겸손함이 갖춰진 믿음이었다.
(막 7:27-28)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님은 먼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마1:21)하시러 오셨기 때문에 그 자녀(유대인)에게 베풀 은혜를 취하여 이방인에게 베푸는 것이 합당치 않음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여인은 자신을 ‘개’라고 취급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불쾌할 수 있지만 자신의 처지를 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예수님은 여인이 얼마나 끈질기게 구하는지를 보기를 원하셨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자존심을 내세우고 주님에게 오지 않는다. 자신의 비참함을 인식하는 사람이 주님에게 나아올 수 있을 것이다.
4)큰 믿음을 가졌다고 칭찬을 받았다. 어떤 믿음이 큰 믿음인가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즉시 응답이 없더라도 이루어 주심을 믿고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믿음은 응답을 반드시 받는다.
(마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19.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심(막7:31-37) -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죄로부터 구원
1)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없다. 그리고 듣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도 없다.
(막 7:32)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주님의 능력으로 치료받음으로 인해서 듣고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이해가 된다. 그리고 자신이 깨달은 내용을 이야기할 수 있다.
(요 8: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고전 2:11-13)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행 4: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구원을 받은 사람은 십자가의 은혜를 말할 수 있다. 소망에 관해서 말할 것이 있다. 하나님에 대해 들고 깨달은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교회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신앙생활에 대해 말할 것이 있다.
2)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셨다.
(막 7: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①주님은 우리를 무리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각각 부르신다. 각각 인도한다.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 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②개인적인 교제를 원하셨을 것이다.
③귀먹고 어눌한 자에 대한 배려를 하셨을 것이다.
3)능력은 하늘로부터 온 것이다.
(막 7: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하늘로부터 오신 그분의 명령에 귀가 열리고 말이 분명해졌다. 지금도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린다. 그리고 말이 분명해진다.
4)탄식하신 것에서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는 주의 사랑을 볼 수 있다.
(마 9:36)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막 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20.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막8:1-10) - 생명의 떡 되신 예수님
1)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과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의 차이점
오천 명을 먹이심 1.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는 필요를 제기한 것은 제자들이었다.(막6:35-36) 2.모인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다. (요6:14-15) 3.주님과 함께 하루 있었다.(막6:35) 4.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다. (마14:17) 5.여자와 아이 외에 남자만 오천 명이었다. (마14:28) 6.먹고 남은 조각 열두 바구니를 거두었다.(마14:20) 7.장소가 갈릴리 지역이며 푸른 잔디 위였다. (막6:39) 8.반응은 예수님을 왕을 삼으려 했다. (요6:15) | 사천 명을 먹이심 1.예수님이 먹을 것이 없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다.(막8:2) 2.모인 사람들이 이방인들이었다.(이 지역은 데가볼리 지역으로 추정됨) 3.함께 있은 지가 사흘이나 되었다.(막8:2) 4.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였다. (막8:5-7) 5.여자와 아이 외에 남자만 사천 명이었다. (마15:38) 6.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다.(막8:8) 7.장소가 광야라고 했다. (막8:4-갈릴리 동북쪽) 8.이방인들이었기 때문에 왕을 세우자는 반응은 없었다. |
2)데가볼리 지역에서 이 일을 행하셨다면 많은 이방인들이 있었을 것인데 이것은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베푼 은혜가 ‘부스러기’라면 이방인들에게 떡을 먹이신 것은 많은 이방인들이 돌아올 것에 대한 예시일 수 있다.(데가볼리 지역이 맞는다는 가정에서)
‘이 기간에 일어난 첫 번째 기적은 이방인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상에서 떡 부스러기가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여기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배척당한 그리스도가 자기 생명을 세상을 위해 내어주고 그리스도 자신이 모든 나라를 위한 생명의 떡임을 암시해 준다.’ <어드먼>
21.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막8:11-21)
1)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막 8:15)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마 16:11-12) 『[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것은 바리새인과 헤롯의 교훈을 삼가라고 하신 것이다. 누룩은 빨리 부풀어 오르는 특징이 있다. 이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는 나쁜 영향력의 확산을 경계하신 것이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사두개인들의 누룩이라고 했고, 마가복음에는 헤롯의 누룩이라고 했다. 사두개인들은 종교적인 외형은 가지고 있었지만 부활과 영과(행23:8) 천사세계를 믿지 않았다. 이것은 현세를 지향하는 삶이란 의미에서 사두개인과 헤롯은 같다.
①바리새인들은 부활과 천사와 영의 세계를 믿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스스로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천국에 율법을 지키는 ‘자기 의’로 말미암아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킬 수 없는 인간이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보이려다 보니까 점차 외식(꾸미게)을 하게 되고 형식주의로 빠져들었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거룩하고 의로웠지만 내적으로는 부패하고 더러웠다.
(마 23:23-28) 『[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②헤롯의 누룩은 부활과 천사와 영의 세계를 믿지 않고 오로지 이 세상의 것에 관심을 가지는 삶의 태도이다. 즉 보이는 세상이 전부이고 보이는 세상만을 위해 살아가는 현세주의의 삶이다. 헤롯의 누룩은 무신론적인 삶, 세속적인 삶, 물질적인 삶이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물질관이 바르게 되어야 한다. ‘나는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의 회개는 신용하지 않는다.’ <요한 웨슬레>
2)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막 8:16-21) 『[16]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17]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19]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둘이니이다 [20]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21]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말씀하실 때 자신들이 떡을 준비하지 못했음을 인하여 말씀하시는 줄 생각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의 잘못됨에 대해 9번이나 반복된 질문을 던지신다.
①제자들의 둔해진 마음으로 인해서 영적인 것을 알아듣지 못한 것을 책망하시고 있다. 우리는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면서도 얼마나 자주 마음이 둔해지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과 광야에서 많은 능력을 경험하면서도 끊임없이 마음이 둔해졌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②두 번이나 주님의 능력을 사용해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지시는 것을 경험했다. 그런데 공급자로서의 주님을 의심할 필요가 있었을까? 우리는 온전히 신뢰하고 있는가?
22. 벳새다의 소경을 고치심(막8:22-26) -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하는 죄로부터의 구원
1)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신령한 것에 대해서는 눈이 감겨있다. 눈을 열어 주신 것은 죄를 처리해 주심으로 인해서 신령을 것을 밝히 볼 수 있게 해 주신 것이다.
(요 9:39-41)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계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2)소경을 치유하시는 과정 속에 두 번에 걸쳐서 치유해 주셨다.
(막 8:23-24) 『[23]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①이것은 복음서에 기록된 단계적으로 치료된 유일한 예이다. 어떤 사람은 한 번에 완전해지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처음에는 희미하다가 나중에 완전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 사람도 있다. 구원이 여러 번에 걸쳐 단계적으로 된다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단번에 되는 경험이다. 다만 구원을 받기까지 과정 속에 여러 번에 걸친 주님의 도우심에 의해 완전해질 수 있다.
(막 12:34)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히 6: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②두 번에 걸쳐서 고쳐주신 것은 주님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의 믿음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예수님이 치료해 주시는 것은 치료받는 사람의 믿음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마 13:58)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③구원을 받고 난 이후에 하나님의 신령한 지식을 알아가는 눈은 점차적으로 열린다. 점점 밝아지고 점점 변화되어간다.
(고후 3:17-18)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④다시 한 번 더 안수하신 것은 기회를 더 주셨다는 것도 된다.
우리를 실패의 자리에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재차 기회를 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요나를 실패의 자리에서 다시 불러 쓰셨다. 베드로도 마가도 실패의 자리에서 다시 부름을 받았다. 우리를 향해서 기다려 주시고 참아주시는 주님의 긍휼을 엿볼 수 있다.
3)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처음에는 사람이 나무토막처럼 보였는데 다시 안수함으로 사람을 밝히 볼 수 있었다. 구원을 받으면 사람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생긴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인 것을 알 게 된다. 사람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되고 구원을 받아야 되는 존재인 것을 알게 된다. 구원받은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되는지 알게 된다. 사람이 주님 앞에 섰을 때 영원한 운명도 정확하게 알게 된다. 그리고 사물에 대한 분명한 지식도 생긴다.
(고전 2:14-16)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4)이 사건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인 ‘주는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 앞에 있는 것은 제자들이 주님 자신에 대해서 눈이 열려 밝히 알 것에 대한 예시도 된다.
23. 베드로의 신앙고백(막8:27-30)
1)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막 8:27-28) 『[27]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여짜와 가로되 침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양하게 평가한다. 예수님 당시에 세례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제자들이 언급하지 않은 부정적인 평가도 많다. 귀신들려 미친 자(요10:20-21), 혹은 미혹하게 하는 자(요7:12)라고도 했다.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계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에게 돌려진 이런 좋은 칭송은 오히려 그분에게는 불명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사기꾼이거나 정신병자이거나 전설적인 인물에 불과하다. 다른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윌러엄 맥도날드>
2)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①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알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그들 자신의 의견을 물은 것이다. 사실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보다는 우리 개인이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믿고 있느냐는 더욱 중요하다.
②반드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믿어야 한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믿었다. 즉 하나님인 동시에 우리 영혼을 구원하시러 오신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었다.
③성령의 도우심으로만 알 수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인 동시에 구세주라는 사실이 마음에 깨달아지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안 된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④예수님은 구세주인 동시에 우리의 주이시다.
(막 8: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우리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 삶의 주권이 예수님에게 있다는 것이다.
(롬 14:7-9)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24. 예수님의 첫 번째 십자가의 수난에 대한 예고와 주님을 따르는 길(막8:31-38)
1)주님 사역의 핵심과 성경의 핵심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다.
(막 8:31-32)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예수님이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에 대해서 그 동안은 제자들에게 언급하지 않으시다가 처음으로 들어나게 언급을 하셨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성경의 핵심이며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이다. 구약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여러 예시가 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고 성경대로 살아나셔야 한다.
(고전 15:3-4)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2)사단의 역사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다.
(막 8: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사단은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을 방해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나셨을 때 그리스도를 없애기 위해 2살 아래 어린아이들을 다 죽였다.
공생애를 시작할 때부터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넘어뜨리기 위해 계속 엿보고 있었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막는 세력은 마귀 편에 속한 것이다.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완성하신 복음을 대적하는 것은 마귀 편에 속한 것이다.
3)베드로는 잘못된 메시아 관을 가지고 있었다.
(마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시면 왕이 되어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루실 현제적인 왕을 생각함으로 인해서 잠간 마귀에게 이용을 당했다. 우리의 잘못된 성경지식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될 수 있다.
4)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자기 자신을 구하고자 하는 욕망, 십자가에 이르는 더 쉬운 길을 선택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 근본적으로 우리에게는 시련과 수치, 배척당함,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따라 행하려고 할 때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는 고통으로부터 움츠려드는 마음이 있지 않은가? 안락하고 인정받는 길을 더 좋아하는 마음이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이러한 올무에 빠져들기 쉽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만 행하셨다.
(요 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①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여야 한다.
②위에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③경건하고 옳은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5)주님을 따르는 길
(막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나를 따라 오려거든”은 따라 오려는 소원이 있거든 이라는 말씀인데, 구원을 받은 사람은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마음이 있다.
①주님은 따라가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자신의 ‘주’가 되신다는 신앙고백이 확실해야 한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주님의 뜻과 맞지 않는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막 14:36)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롬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②주님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
③일회성으로 좇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좇을 것을 언급하고 있다.
④값을 치를 각오를 하고 따르는 것이다. 누가복음 14장에는 주님을 따르는데 세워야 할 예산이 기록되어 있다.(눅14:25-35)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목숨까지 각오하고 따르라는 것이다. 세계복음화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라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자기 목숨을 구하는 확실한 길은 없다는 것이다.
(막 8: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⑤죽음까지 각오한 사람은 끝까지 주님을 따를 수 있고 승리할 수 있다. 이것은 최고의 역설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이기에 사실이다. 주님이 이루실 것이다.
(계 12: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⑥올바르고 분명한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주님과 복음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그리고 우리 영혼의 생명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더 귀한 것이다.
(막 8:36-37)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⑦주님께서는 수치를 두려워하는 연약한 마음 때문에 주님과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올무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능욕을 피하려 한다면 재림 때에 주님 앞에서 더 큰 부끄러움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해 주셨다.
(막 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라. 종의 예루살렘으로의 여행(막9:1-10:52)
1. 변화산 사건(막9:1-13)
주님을 따르는 길이 수치와 고통과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가르치셨다. 주님은 이제 동전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신다. 이 세상에서 제자의 길이 값비싼 대가를 치르겠지만 그것은 몇 배의 영광으로 갚아줄 것을 일깨우셨다.
1)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을 대표한다.
(눅 9:30-31)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모세는 율법의 대표이며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이다. 율법과 선지자는 곧 구약성경을 가리킨다. 구약이 말씀하는 바는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었다.
구약은 예수님의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말씀하는 것이다. 구약의 핵심이 “예루살렘에서의 별세”였는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알지 못했다.
(벧전 1:10-11)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눅 24:25-27) 『[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변화산상의 변화된 모습은 예수님의 재림하실 모습이다.
(막 9: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벧후 1:16-18)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를 대동하고 나타나셨는데 모세는 죽은 후에 주님 앞에 서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며, 엘리야는 산체로 들림 받을 사람들의 모형이다.
3)오직 예수
(막 9:8) 『문득 둘러 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베드로는 엉겁결에 무슨 말을 할지 몰라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고 여기 있자고 했다. 예수님을 맨 앞에 언급했지만 잘못된 말을 한 것이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사람들이었고 실제로는 예수님만 따라야 된다.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지고 오직 예수만 보였다는 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롬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후 4: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4)예수님의 말씀이 최종 계시이다.
(막 9:7)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모든 것에 최종 공의의 판단의 기준이다.
(히 1:1-2) 『[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마 5:21-22) 『[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 』
5)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는 영광중에 거하게 된다.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 옆에 선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의 모형이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도 영광중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골 3: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빌 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6)베드로가 즉시 모세와 엘리야를 알아보았듯이 천국에 가면 주님이 주신 지혜대로 모든 것을 알아볼 것이다. 수고와 희생도 알아볼 것이다.
(눅 16: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고전 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7)우리가 주님 앞에 모이게 된다.
(살후 2: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벧전 1: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8)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막 9:11) 『이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마 17:13)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침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①구약에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이라는 예언대로 엘리야가 왔다. 엘리야는 세례요한을 두고 말한 것이다. 개인의 삶에도 회개가 먼저 이루어져야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다.
(말 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말 4:5-6)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눅 1:17)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②엘리야가 왔지만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했다. 엘리야를 임의로 대우한 것은 예수님을 임의로 대우할 것에 대한 예시이다.
(막 9:12-13) 『[12]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13]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③유대인들은 엘리야가 먼저 오고 메시야가 그 뒤에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엘리야(세례요한)을 알아보지 못함으로 메시야가 왔어도 알아보지 못했다. 유대인들은 세례요한이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왔음을 알지 못했다.
2. 귀신들린 소년을 고치심(막9:14-29) - 사단의 잔인한 지배력으로부터 구원
1)귀신들려 간질 하는 아이의 모습은 세상의 여러 가지(분노, 정욕, 물욕, 식욕)에 붙잡혀 이성을 잃은 행동을 하는 구원받기 전의 우리의 모습이다. 아이가 물과 불에 자주 던져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생이 스스로 보이지 않는 힘에 붙잡혀서 자기를 해하는 쪽으로 행동한다.
(막 9:18-22)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전 9:3)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잠 1:10-19) 『[10]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좇지 말라 [11] 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없는 자를 까닭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12] 음부 같이 그들을 산 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게 통으로 삼키자 [13] 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에 채우리니 [14] 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 할지라도 [15]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16]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 데 빠름이니라 [17] 무릇 새가 그물 치는 것을 보면 헛 일이겠거늘 [18] 그들의 가만히 엎드림은 자기의 피를 흘릴 뿐이요 숨어 기다림은 자기의 생명을 해할 뿐이니 [19] 무릇 이를 탐하는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
2)제자들이 고치지 못하자 예수님께 직접 데려왔다.
주의 제자들에게 나아왔으나 고치지 못했을 때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 직접 나아왔다. 일군이 고치지 못할 때 일군을 세우신 분에게 나아가는 것은 현명한 행동이다. 사람은 통로이며 주님을 통해서 고침을 받아야 한다. 예수님이 홀로 진정한 의사요 목자이시다.
(막 9:17-18) 『[17]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3)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막 9:19)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①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이 없는 세대였으며 패역한 세대였다. 세례요한이 회개를 외쳐도 예수님이 복음의 소식을 전해도 무감각한 세대였다.
(마 11:16-17)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②주님이 더 이상 함께 하지 않으시고 더 이상 참지 못하실 때가 온다는 심각한 말씀이다.
노아홍수 전에 하나님이 함께 계셔서 돌이키려 하셨지만 받아들이지 않자 심판이 내려졌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다할 때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다.
(요 7:33-34) 『[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34]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신대』
(창 6:1-3) 『[1]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호 9:12) 『혹 저희가 자식을 기를지라도 내가 그 자식을 없이 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저희를 떠나는 때에는 저희에게 화가 미치리로다』
(마 23:37-38)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4)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막 9:22-24) 『[22]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①아이의 부모는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간청했다. 예수님은 그 부모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다.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
(창 18:14)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②삶에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의 부모는 책망을 받을 때 즉시 회개하고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 믿음은 하나님에게로부터 오는 것이다. 먼저는 구원을 받고 그 다음에는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성장하도록 구해야 한다.
(벧후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살후 1: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위 말씀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얘기하는 동시에 그분의 성품에 대한 믿음도 말씀하신다.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관계된 것이다. 우리는 구원을 받은 믿음 뿐 아니라 그분을 더 깊이 알아가는 믿음이 성장해야 한다. 알아갈수록 그분을 신뢰하게 될 것이다.
③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마 17:19-20) 『[19]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어찌하여 구원받은 이후 우리의 삶에 조그마한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는가?
*어찌하여 죄에게 굴복하고 넘어지는가?
*왜 능력 있는 삶을 살지 못하는가?
*왜 염려와 근심에 빠지는가?
*왜 주님이 맡기신 일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가?
*왜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는가? 믿음이 적은 연고이다.
④구원받은 이후에 어떻게 하면 믿음을 키울 수 있는가?
*말씀을 계속 들음으로 성장하게 된다.(롬10:17)
*기도하는 교통 속에서 믿음이 더욱 자란다.
*성도와의 믿음의 교제 가운데 주님의 역사를 봄으로 믿음이 더욱 자란다.
(몬 1:6)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순종과 복종 속에서 주님이 더욱 큰 믿음을 허락하신다.
*환난과 역경을 통과함으로 믿음이 더욱 자라게 하신다.
5)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막 9:28-29) 『[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마 17:21)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
①기도와 금식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행위이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말씀이며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해야 함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아이의 아버지가 돌이키면서 주님께 간구하자 주님은 아이를 고쳐주셨다. 우리도 잃어진 영혼을 구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해야만 한다.
(왕하 4:33-37) 『[33]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34] 아이의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35]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하고 눈을 뜨는지라 [36] 엘리사가 게하시를 불러서 저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하니 곧 부르매 여인이 들어가니 엘리사가 가로되 네 아들을 취하라 [37] 여인이 들어가서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아들을 안고 나가니라』
②기도와 금식이 필요함을 언급하신 것이다. 어떤 경우에 육신의 필요를 절제하면서 간절히 하나님께 메어 달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6)과거에 쓰임 받았다고 해서 지금도 될 것이라는 안일과 교만은 경계해야 한다.
제자들은 주님에게 마귀를 내어 쫓는 능력을 부여받았고 실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미 그 능력을 체험한 바 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과거에 능력이 나타났으니까 당연히 할 수 있다는 자만심과 무사 안일의 잘못된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 능력의 근원이 주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일군이 과거에 쓰임 받았다고 해서 현제도 쓰임 받겠는가?
(고전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3.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반복하여 가르치심(막9:30-32)
주님은 가이샤라 빌립보 지역을 방문하신 후 이제 갈릴리를 지나 여행을 계속하셨다. 이 여행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십자가에 달리시게 될 여행이었다. 주님은 사람들에 눈에 띄지 않게 여행하기를 원하셨다. 그분의 공적 사역의 대부분은 끝났고 이제 자신이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에 대해서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준비시키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원하셨다.
(막 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막 9: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막 9: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1)예수님께서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신 것은 반복하여 가르치셨다. 우리도 반복하여 가르치을 받아야 한다.
①모세가 여러 각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적으로 쉽게 교훈한 것이 신명기이다.
②이사야도 반복하여 가르쳤다.(사28:9-13)
③시편을 읽으면 이스라엘 역사를 반복적으로 상기시키면서 교훈하고 있다.(시14과53편, 시편108편과 60편, 시편78편과 106편 그리고 107편)
④세례요한도 회개를 반복적으로 외쳤다. 예수님을 반복적으로 증거 했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36)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⑤사도들도 반복된 가르침을 펼쳤다.
(빌 3:1)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고후 1:13-14) 『[13]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끝까지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14]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 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
⑥반복하여 가르쳐야 할 이유
*사람들은 잊기 쉽다.
*중요한 진리는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야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진리는 생활 속에 실천되어야 하므로 실천될 때까지 반복되어야 한다.
*중요한 진리를 반복하는 것이 신앙생활에 안전하기 때문이다.
2)깨닫지 못함으로 오는 당황함과 두려움
(막 9: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먼저 죽으시고 그 후에 영광스럽게 되신다는 사실을 모름으로 인해서 당황하고 두려워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고난과 어려움의 이유와 고난과 어려움 뒤에 하나님이 주실 축복을 깨닫지 못한다면 두려움이 있을 것이다.
4. 천국에서 크게 되는 것(막9:33-37)
1)누가 크냐
(막 9:34-35) 『[34]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①뭇사람의 끝이 된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말한다. 겸손한 자가 신앙생활을 잘하며 겸손한 자가 천국에서 높임을 받게 될 것이다.
②섬기는 자가 천국에서 높임을 받게 될 것이다. 섬김의 예로서 어린아이 하나를 안으셨다. 진정한 섬김은 나보다 못한 자를 사랑으로 대하고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2)주님을 믿는 사람을 영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막 9:36-37) 『[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내 이름으로”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 속한, 주님을 따르는 자를 말한다. 어린 아이를 특별히 안으신 것은 교회 안에서 육신적으로 낮고 천한 자를 사랑으로 영접한다면 그 사람은 주님을 영접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보이는 사람을 영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5. 독선과 범죄에 대한 경고(막9:38-50)
마가복음 9장은 제자들의 실패가 연속된다. 베드로는 변화산 위에서 어리석은 말을 했다. 제자들은 귀신을 내어 쫓는 일에 실패했고, 누가 큰 지에 대한 논쟁을 벌였으며 요한은 당파심으로 인해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다. 우리는 이런 제자들을 가르치는 주님의 열심을 본다.
1)당파주의를 금하심
(막 9:38-40) 『[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예수님께서는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12:30)라고 하셨다. 이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태복음 내용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마태복음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것이다. 즉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 성령의 능력인지 귀신을 힘입어 내어 쫓는 것인지의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하신 말씀이다. 즉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것은 영원한 죄다. 이것은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믿음에 대한 것을 언급하신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의 연합과 교제에 관한 문제이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관용과 사랑이 수반되어야 한다.
2)그리스도께 속한 자라 하여
(막 9:41-42) 『[41]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①‘그리스도께 속한 자라 하여’는 그리스도인을 연합시키는 끈이다.
②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는 이유로 작은 친절이라도 베풀면 결단코 상을 잃지 않는다.
③그리스도를 믿는 한 사람을 실족케 하는 것이 큰 죄이다.
(고전 8:11-13)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지를 짓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3)범죄에 대한 경고
(막 9:43-45)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4] [없음]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①모든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지옥을 피하는 편이 낫다.
②지옥은 이 세상의 어떤 고통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③죄에 대한 단호한 태도를 가져라
손은 우리의 행동을 발은 우리의 삶을 눈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을 의미할 수 있다. 이것들을 엄격하게 다루지 않는다면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된다.
④지옥은 실재하는 곳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결코 죽지 않는 영혼을 제쳐 두고 다른 것을 위해 살지 않을 것이다.
4)희생하는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영향력을 행사하신다.
(막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①본 구절은 33절 이후의 제자의 도에 대한 가르침의 결말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세상의 소금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를 기대하신다. 그들이 참 제자의 삶을 살기만 한다면 그들은 많은 영혼들을 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면 소금이 녹는 것처럼 자기희생의 삶을 살아야 한다.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②화목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이다.
‘소금을 두고 화목 하라’는 것은 화목 하는 근거로서 소금을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주변의 사람들과 화목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한 사람만이 주변의 사람들과 합당한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구약에는 ‘소금언약’이라는 말씀이 있다. 즉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근거해서 화목 하라는 것이다.
6. 결혼과 이혼(막10:1-12)
1)모세의 이혼증서는 사람들의 완악함 때문에 주어졌다.
(막 10:3-5) 『[3] 대답하여 가라사대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4] 가로되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5]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율법에 기록된 이혼 조항(신24:1-4)은 결코 하나님께서 이혼을 허용하시거나 장려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의 완악함을 인하여 자행되는 이혼을 최소한으로 억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2)창조시의 계획을 기억하라
(막 10:6-9) 『[6]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말 2:15)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3)결혼이라는 거룩한 제도를 파괴시키는 행위는 죄악이다.
(막 10:11-12) 『[11]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①결혼이라는 제도를 파괴시키는 행위는 간음이고 하나님 앞에 큰 죄악이다.
②남편의 행위이든 아내의 행위이든 동일한 도덕적 책임이 있음을 강조했다.
③결혼의 신성함과 결혼 생활의 지속성을 가르친 것이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는 것’에서 결혼의 신성함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히 13:4)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4)결혼이란 공동의 목적을 위해 같이 멍에를 멘 것이다.
“짝 짓다”는 ‘함께’란 의미를 갖는 전치사 ‘쉰(헬)’과 ‘멍에를 멘’이란 뜻을 갖는 ‘쥬고스(헬)’의 합성어로서 ‘함께 멍에를 메다’란 뜻을 지닌다. 결혼은 공동운명체로서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함께 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반드시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과만 결혼해야 한다.
(고후 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7. 어린아이들에게 안수하고 축복하심(막10:13-16)
1)천국은 어린 아이처럼 낮추는 겸손한 사람이 들어간다.
(막 10:14-15) 『[14]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천국에 어떻게 들어가는가? 어린 아이처럼 낮추면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발견된다. 역사 속에서 스스로를 높여서 천국에 들어간 사람은 없다.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주님의 복음을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이는 사람이 천국에 간다.
(시 116:6)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2)어린 아이 때부터 주님 앞으로 나오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
(막 10:13-16) 『[13]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 장성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굳어지기 때문에 아이부터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중요하다. 예수님은 아이들이 나아오는 것을 금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신다. 예수님은 그 아이들을 안고 안수하시고 축복해 주셨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당신이 최고의 사람이 되어야 하며, 또한 최고의 것을 주어야 한다.’< W. 그레이엄 스크로키>
(딤후 3:14-15) 『[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잠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3)이 말씀은 어린아이는 무조건 천국에 간다거나 방종과 응석을 무조건 받아주라는 말씀은 아니다.
8. 재물 많은 청년(막10:17-31)
1)청년은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었다.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 정도로 생각했다.
(막 10:17-18)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이 청년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대답하신 것은 예수님이 선하지 않다는 말씀이 아니라 청년이 예수님을 선한 선생 정도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 잘못을 깨우치기 위한 답변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다.
①예수님을 사대 성인 중에 하나로 알고 있다.
②예수님을 물건 나누는 자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눅 12:13-14) 『[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③예수님을 선지자 중에 하나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마16:14)
④미친 자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마10:20-21)
⑤좋은 사람 혹은 미혹케 하는 자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요7:12)
⑥사마리아 사람 혹은 귀신 들린 사람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요8:48)
2)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설명하신 것이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는 말씀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설명한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다.
(롬 3: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전 7:20)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3)청년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오해했다. 영생은 무엇을 해야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게 되는 것이다. 영생을 얻기 위해 우리 편에서 할 수 있는 선한 일을 없다.
(막 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4)율법을 말씀하신 이유
①계명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표준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달할 수 없음을 알게 하고 결국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다.
(롬 7: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롬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롬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롬 3:19-20)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②청년이 영생을 얻는 것이 무엇을 해야(율법을 지켜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잘못된 생각을 깨우쳐 주셔야 했다. 계명들을 지키라는 것은 지켜서 천국에 간다는 것이 아니라 계명을 지켜보려고 노력한 사람은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막10:20) 청년은 모든 것을 지켰다고 고백했다.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율법을 배워왔고 계명을 지키도록 훈련을 받았다. 청년의 대답은 진정으로 지켰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답변을 한 것이다. 청년은 참으로 자신이 율법을 행할 수 없는 비참한 존재라는 것을 몰랐다.
③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막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이 청년은 외적으로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청년이라는 황금기에 있었고, 관원이었으며(눅18:18), 부자였다. 그러나 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예수님이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요구 조건에 미치지 못하는 비참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야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예수님은 그 청년을 사랑하셨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그에게 자신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하셨다.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어야 천국에 간다는 것이 아니다.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줌으로서 그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청년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못한 죄인으로 들어난 것이다.
5)영생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막 10: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영생의 문제보다 다른 것을 앞세워서는 안 된다. 이 청년은 영생을 얻는 것보다는 재물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가룟 유다는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았다.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았다.
(행 1: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히 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대상 7:20-21) 『[20] 에브라임의 아들은 수델라요 .... 그 아들은 수델라며 저가 또 에셀과 엘르앗을 낳았더니 저희가 가드 토인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내려가서 가드 사람의 짐승을 빼앗고자 하였음이라』
에브라임 후손 에셀과 엘르앗은 가드 사람의 짐승을 빼앗으려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영광을 위해 살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짐승을 빼앗다가 죽임을 당하였으니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가?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가? 인생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세상에 썩어 없어질 것(쾌락, 연예, 스포츠, 학문, 돈)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예수님 말씀에 ‘온 천하를 얻고도 목숨(영혼)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는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6)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막 10:23-25) 『[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25]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당시에 유대 사회에서는 재물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재물을 가진 자는 천국에 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시니 제자들에게도 충격이었다. 부자는 천국에 가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지금은 재물이 주님의 축복의 표시라기보다 헌신의 정도를 측정하는 지표이다.
①부자는 물질이 많음으로 인해서 마음이 가난해지기 어렵다.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②부자는 하나님보다 자기 재물을 더 사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부자는 돈을 포기하기보다 하나님을 포기할 것이다. 부자는 주님을 의뢰하기보다 자기 재물을 의뢰할 것이다.
③부자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돈이라는 신이 그 마음에서 부서져야 한다. 이런 변화는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다.
(막 10:27)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7)구원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이 말씀은 구원은 인간의 어떤 노력과 선행으로 말미암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에게로 말미암는 것이며 오직 은혜로 되는 것이다.
8)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는 사람이 제자이고 그 결과는 금세와 내세에 약속이 있다.
①주님을 좇는다는 것은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다.
(막 10:28-29) 『[28]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②주님을 좇는 데는 나와 관계된 어떤 것보다(사람이나 사물) 주님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막10:29)
③금세와 내세에 약속이 있다.
(막 10: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윌리엄 맥도날드의 글 중에서>
*금세의 상급은 백배 보상을 받는데 돈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것들로 받는다.
집 - 구원받은 다른 가정들
형제, 자매, 부모, 자식 - 교제를 나눔으로서 생애를 풍성하게 해주는 다른 구원받은 성도들
전토 - 세상에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들
핍박을 겸하여 받고 - 이것은 현세의 상급 중의 일부이다. 예수님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은 기쁨의 근원이다.
*내세의 상급은 영생이다. 모든 것을 버려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주님에게 소망을 건 사람은 천국에서 더 좋은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영광은 다르다.
(딤전 6:18-19) 『[18]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9)어떻게 시작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끝내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막 10: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충성스럽고 헌신될 제자처럼 보인다고 해서 다 그리스도의 명예를 위해 자기 부인의 삶을 고수하는 것은 아니다. 후퇴하는 것처럼 보이고 헌신이 미심쩍어 보이던 사람들 중에도 시련의 때에는 참되고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이언사이드>
9. 종의 수난에 관한 세 번째 말씀(막10:32-34)
예수님께서는 앞서 두 차례에 걸쳐서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다시 한 번 수난을 예고하시는데 앞의 두 번의 경우보다는 훨씬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셨다.
1)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
(막 10: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 』
①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는 것은 죽으시러 가시는 것이다. 제자들 앞에 서서 걸어가셨는데 이는 앞에 닥칠 고난을 알고 계셨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확고한 결심을 나타낸 것이다.
②제자들 앞에서 홀로 걸어가시는 걸음에 고독도 있었다.
③아버지의 뜻 가운데 있다는 기쁨과 다가오는 영광을 바라보는 기쁨 그리고 신부를 구속하여 자기에게로 데려오는 그 즐거움을 인하여 그분은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다.
(요 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사 50: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십자가를 향하여 조금도 망설임 없이 나아가시는 저 하나님의 아들, 그 얼굴과 그 모습을 주시해 보자! 그분을 따라가는 우리에게 그것은 새로운 용장의 길로 나아가도록 각성시키지 않는가? 우리를 위한 그분의 죽음이 얼마나 자발적이었던가를 생각할 때에 그것은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각성시키지 않는가?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 죽음의 의미와 신비에 대하여 경탄하지 않는가?’ <어드만>
(행 21:12-14)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2)이것은 주님이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구체적인 예언의 말씀을 주신 것이다. 이 예언은 예수님이 인간에 불과한 존재가 아닌 신성을 가시신 분임을 보여준다.
(막 10:33-34) 『[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①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막11:1-13:37)
②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막14:1-2, 43-53)
③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막14:55-65)
④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막15:1)
⑤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막15:2-38)
⑥저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막16:1-11)
3)미리 말씀하신 것은 그 일이 일어날 때 믿음을 주기 위해서이다.
(요 14:29)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10. 큰 자는 섬기는 자(막10:35-45)
주님이 십자가의 수난을 언급하신 직후에 야고보와 요한은 지상에 그리스도의 왕국이 세워질 것이라는 잘못된 오해로 예수님이 왕이 되면 좌우에 앉게 해 달라고 어머니와 같이 와서 간청했다.(마20:20) 그리고 다른 제자들은 그 소리를 듣고 격분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비장한 각오로 십자가로 나아가고 있는데 제자들의 모습은 한심하다.
1)예수님의 마시는 잔과 받을 세례는 십자가였다.
(막 10: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침례를 받을 수 있느냐』
(눅 12: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2)주님을 따라가는 제자들은 주님이 받은 고난의 잔을 마시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막 10:39)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해서 구원받은 자는 주님을 따라갈 때 주님과 같이 고난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야고보는 이 말씀대로 가장 먼저 순교를 당했고 요한은 가장 나중까지 남아서 복음을 전하다가 일생을 끝냈다. 구원의 잔을 마신 사람은 고난의 잔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시 116:13)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3)섬기는 자가 큰 자이다.
(막 10:43-44)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①세속적인 영광을 포기해야 한다. 세상의 집권자들은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린다. 그리스도 안에서 큰 것은 세상과는 반대이다.
②그리스도 안에서는 자신을 낮추어 섬기는 자가 큰 자이다. 섬긴다는 것은 종의 위치에 서는 것이다. 희생하고 수고하는 위치에 서는 것이다.
4)예수님은 섬김의 모본을 보이셨다.
(막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①이 구절은 마가복음의 축소판이요 성경 전체의 축소판이다.
②최고의 모범은 예수님 자신이시다. 예수님은 온 생애를 통하여 섬기셨다. 발 씻김과 대속의 사건이 섬김의 모델이다.
죽으심을 통하여 죄를 씻어주심으로 우리를 섬기셨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몸을 내어주신 것이 우리를 섬기셨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③서로 누가 큰지로 다투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섬김의 모본임을 제시하시고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신 것이다.
(빌 2:5-8)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④예수님의 죽으심과 섬김은 자발적인 것이다.
⑤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것이다.
11. 소경 거지 바디매오를 고치심(막10:46-52) - 영적인 소경과 영적인 거지를 만드는 죄로부터 구원
1)주님의 자비하심을 본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는 중이었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가시는 중이었다. 이 절박한 상황에서도 부르짖는 소경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고 고쳐주신 모습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간절하게 부르짖는 사람의 기도를 외면치 않으신다는 것을 알려준다.
2)소경거지 바디매오의 눈이 떨어진 것처럼 우리가 구원받을 때 영혼의 눈이 열리게 된다.
3)바디매오의 간절한 마음이 주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했다.
(막 10:47-48)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주위의 사람들의 꾸짖는 소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소리를 질러 주님을 불렀다. 그 간절한 부르짖음은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간절한 마음은 어떤 방해물도 극복하게 한다.
4)소경은 다윗의 자손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했다.
(요 1:46)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나사렛 예수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을 무시하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런데 소경은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다. 즉 구약에 약속한 메시아를 부른 것이다. 그리고 그 메시야가 오면 소경의 눈이 열리리라는 말씀도 믿었을 것이다.
(사 35:5-6) 『[5]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5)천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택하는 모습이다.
(막 10:50)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주님이 부르시기 전에는 겉옷이 소경에게는 귀했을 것이다. 그것을 여러 용도로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부르실 때 그것을 버렸다. 주님에게 나아가는 데 걸림이 된다고 생각했으니 버렸을 것이다.
이것은 천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택하는 모습이다. 육신의 것을 버리고 신령한 것을 택하는 모습이다. 수가 동네의 여인은 물동이를 내어 버리고 동네로 가서 예수님을 전했다.
6)보기를 원하나이다.
(막 10: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 소경은 주님을 만났을 때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부탁했다. 영적 소경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눈을 뜨는 것이다. 누가복음 12장에 한 사람은 모처럼 예수님을 만났는데 재산 분배를 부탁드렸다. 어리석은 행동이다. 주님은 지금도 각 사람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을 것이다.
7)주님의 도우심을 경험한 사람은 주님을 따른다.
(막 10: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지금도 주님의 도우심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주님을 따르게 되어 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영혼의 구원을 받고 눈이 떨어졌을 때 나타나는 결과는 감사함으로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섬기게 된다.
(요 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마. 종의 예루살렘 사역(막11:1-12:44)
1. 겸손의 왕(막11:1-11)
1)예수님이 왕으로 오실 것은 구약에 여러 가지로 예언되어 있었다.
①스가랴의 예언이 성취됨
(슥 9:9-17)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 [11]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12]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너희는 보장으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날도 이르노라 내가 배나 네게 갚을 것이라 .... 16]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면류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17]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소년은 곡식으로 강건하며 처녀는 새 포도주로 그러하리로다』
예수님이 오시기 400년 전에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푸는 왕 겸손의 왕으로 예수님이 오실 것을 예언하였다. 전쟁할 때 사용되는 말을 타신 것이 아니라 나귀새끼를 타신 것은 겸손의 왕, 평화의 왕으로 오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언약의 피로 인하여 갇힌 자들이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이고 해방될 것을 말씀하셨다.
②시편의 예언이 성취됨
(막 11:9-10)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시 118:24-26) 『[24]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2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구원을 위함이었다. ‘호산나’라는 뜻은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이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날짜는 하나님의 계획에 정해져 있었다.
③다니엘의 예언이 성취됨
(단 9:25)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다니엘은 70이레 중 69(483년)이레 후에 예수님이 왕으로 입성(왕이 일어남)하실 것을 예언하였다.
2)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셨지만 예수님을 유대 종교가들은 영접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둘러보시고 저물어 베다니로 물러가신 것은 유대 종교가들과 백성들이 예수님에게 합당한 자리를 내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 118:22-23) 『[22]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23]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3)각 사람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셔 들여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 속에 평강의 왕으로 의의 왕으로 오시기 원하신다. 각 사람이 구원을 받을 때 예수님이 왕으로 오신다. 그리고 왕으로 예수님을 모셨으면 예수님에게 그 주권을 내어드려야 한다.
(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시 24:7-10) 『[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8]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9]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10]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
예수님을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왕 됨을 원치 않는 사람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눅 19:27)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4)예수님은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계셨으며, 절대적인 권위로 말씀하셨다.
(막 11:2-3) 『[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①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벌어질 상황을 상세하게 말하고 거기에 대답할 말까지 주신 것은 전지하신 분이라는 증거다.
②‘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말씀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신 분의 명령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주님이 창조하셨다. 그리고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도 주님의 것이다. 주님이 쓰시기 원하실 때 마땅히 그분에게 드려져야 할 것이다.
(롬 14:7-8)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5)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백마를 타고 오신다. 승리자와 정복자로 오신다.
(계 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6)(막 11:9-10)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①호산나 - 우리를 구원하소서
②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 이것은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야라는 것을 분명히 인정하는 표현이었다.
③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 사람들은 그 나라가 금방 설립이 되고 그리스도가 다윗의 보좌에 앉으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④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 가장 높은 곳 하늘에서 자기들을 구해 달라고 그분께 외치는 소리였다.
2.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막11:12-14, 20-25)
1)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유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와 같다.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지만 형식과 외양뿐이고 주님이 드실만한 열매가 없었다. 그와 동시에 열매 없는 신앙에 대한 경고를 하신 것이다.
(막 7:6-7) 『[6]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마 3:8-9)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2)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말씀을 믿는 믿음을 가질 때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삶의 역경을 이길 수 있다.
(막 11:14)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막 11:20-21) 『[20] 저희가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①제자들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숨은 뜻을 물은 것이 아니라 무화과나무가 말씀대로 말랐다는 사실을 신기해했다. 그리고 어떻게 말랐는지를 물은 것이다. 그 대답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셨다.
②믿음은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는 것 뿐 아니라 산더러 들려서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라고 하셨다.
(막 11:22-23)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③기도할 때 '믿고 구한 것은 다 받으리라'고 하셨다. 구한 대로 받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구하라는 것이다. 기도의 바탕은 믿음이다.
(막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요일 5:14-15) 『[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④기도 응답을 방해하는 것이 인간관계의 갈등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단절시킨다.
(막 11: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3)무화과나무는 두 번 열매를 맺는다.
(막 11: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이 문장에서 어려운 점은 무화과의 때가 아닌 줄 알면서도 그 나무를 열매 없다고 정죄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구주께서 성급하신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스라엘 지방의 무화과나무는 잎사귀를 내기 전에 먹을 만한 이른 과일을 먼저 낸다. 이것은 일반적인 수확을 약속하는 전조였으며, 일반적인 수확은 본문에서 ‘무화과의 때’로 묘사되어 있다. 만약 이른 무화과가 없다면 이것은 일반적인 수확이 뒤따르지 않는다는 전조였다.
무화과가 여름 전, 여름 후 두 번 열매를 맺는 것은 신령한 뜻이 들어 있을 수 있다. 예수님이 초림 하셨을 때에도 유대인들은 열매를 맺어야 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여름 후에 다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환난 속에서 회개하고 구원받는 역사가 있다.
(마 24:32-33) 『[32]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롬 9:27-28)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롬 11:25-26) 『[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4)우리는 주님이 드실 만한 열매를 맺히고 있는가?
(딤후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고전 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5)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예수님이 심판하시는 권세를 가진 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3. 성전을 깨끗이 하시는 종(막11:15-19)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일이 한 번 있었다.(요2) 이제 사역 말기에 다시 한 번 성전을 깨끗케 하시는 일을 하셨다.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신 사건 뒤에 성전을 정결케 하신 것은 외식으로 가득 찬 열매 없는 그들을 심판하실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1)예수님이 계시는 곳에는 깨끗케 하시는 역사가 있다.
(막 11:15-16) 『[15]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①성전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다. 이스라엘의 먼 지방에서 하나님께 바칠 제물을 끌고 오는 수고를 덜어준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것이 이익을 남기고 장사를 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내용이 없는 형식과 상업주의를 정죄하셨다.
지금도 사람들이 신앙적인 것을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딤전 6: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②주님께서 무화과나무를 말라죽게 한 사건과 성전을 정결케 하는 사건은 전부 예루살렘의 멸망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③오늘 날 성전은 교회인데 주님은 교회를 깨끗케 하신다.
(고전 3:16-17)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④구원을 받은 사람의 몸이 성령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성전이다. 주님은 한 사람의 생애 속에서 그를 깨끗하게 하신다.
(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예수님이 계시는 곳에는 기도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막 11: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렘 7: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56:7)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특별히 성전을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신 것은 기도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말씀이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중요한가?
3)예수님이 계시는 곳에는 하나님을 높이는 역사가 있다.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높이는 행위이다. 나의 부족함을 알고 주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4. 권세에 대한 질문(막11:27-33)
유대 종교가들은 예수님이 성전을 깨끗케 하시는 일을 무슨 권세로 하는지 물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지니고 있다고 하면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고소할 것이고 독자적인 권세로 한다고 하면 예수님이 산헤드린의 권세를 도전하는 일을 한다고 광신자로 몰아세우려고 하는 간교한 질문이었다.
1)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믿어야만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다.
(막 11:29-30)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30]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
이것은 예수님이 답변을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요한이 하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회개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회개하는 사람만이 믿을 수 있다.
세례요한의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종교가들에게 답변하지 않았다.
2)세례 요한의 권세는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요 1: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요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침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3)예수님의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마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4)예수님이 부르신 사도들에게 권세를 주셨다.
(막 6:7)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눅 10: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고후 10:8)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5)타락한 종교의 권세는 하나님을 대적한다.
공회가 주동이 되어 예수님을 배척했고 사도들을 핍박했다. 가장 경건해야 할 공회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곳이 되었다는 것은 통탄할 일이다.
6)다른 사람을 헤치기 위해 함정을 파고 올무를 치는 자는 자신이 거기에 빠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정죄하기 위해 올무를 놓았으나 도리어 자신들이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았다.
(막 11:31-32) 『[31]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32] 그러면 사람에게로서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저희가 백성을 무서워하는지라』
(시 37:12-15) 『[12]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향하여 그 이를 가는도다 [13]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그 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 [14]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기어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15] 그 칼은 자기의 마음을 찌르고 그 활은 부러지리로다』
5. 불의한 농부의 비유(막12:1-12)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는데, 실과 때가 되어 종을 보내었더니 한 종을 때리고 다른 종을 보내니 상처를 내고 다른 종을 다시 보내니 그를 죽였다. 그래서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여 보내었더니 이는 상속자니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던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주인은 하나님이고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가르키며 농부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한다. 그리고 종은 구약에 보냄 받은 많은 선지자이다. 아들은 예수님을 말한다.
1)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은 구약 예언의 성취이다. 건축자들은 머릿돌이 될 것을 잘 안다. 유대인들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가 오셨는데 버렸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미리 예고되어 있었다.
(막 12:10-11) 『[10]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11]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더라』
(시 118:22-23) 『[22]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23]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2)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하셨다.
(막 12:9)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3)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신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접치 않음으로 인해서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넘어갈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막 12:9)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행 13:45-46) 『[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열매를 기다렸으나 열매를 맺지 않음으로 인해서 심판을 받을 것을 경고하신 것이다. 반복해서 종을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자비하심 때문이다. 그러나 끝까지 거절하면 하나님도 그들을 거절하신다.
(막 12:2-9) 『[2]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 또 다른 종을 보내니 ....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혹은 때리고 혹은 죽인지라 [6]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마 23:37-38)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롬 2:4-5)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5)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예고되어 있다.
(막 12:8)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 던졌느니라』
(막 12:10)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예수님이 죽으시고 배척받으실 것만 예고된 것이 아니라 그 예수님이 머릿돌이 될 것도 예언되어 있다. 어떻게 머릿돌이 되겠는가? 부활하심으로 믿는 사람들의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교회의 기초가 되셨다.
(행 4:11-12)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6.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막12:13-17)
마가복음 12장에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헤롯당 그리고 사두개인들에게 공격을 당하신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12장은 질문의 장이다. 비록 예수님을 비난하기 위한 질문들이었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답변에서 많은 중요한 진리들을 깨닫게 된다.
1)서로 원수이지만 예수님을 대적하는 것에는 하나가 된다.
(막 12:13)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눅 23: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행 4: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2)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막 12:14-15) 『 ....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 』
세를 바치라고 하면 민족주의자들로 자처하는 바리새인들이 나서서 예수님을 매국노로 정죄할 것이고, 세를 바치지 말라고 하면 헤롯 당원들이 나서서 예수님을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자로 정죄할 것을 염두에 둔 교활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쉽게 그들의 질문을 물리치셨다.
3)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막 12:17)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①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세상에 대한 의무가 있다.
②예수님께서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을 보시면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바치라는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큰 죄는 마지못해 로마에 세금을 내고 있었지만 그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불순종했다. 그 동전에는 가이사의 화상이 새겨져 있지만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온전히 하나님의 것으로 바쳐져야 마땅하다. 분명 우선순위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이다.
③하나님의 것과 세상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④국가의 권위를 인정하신 것이다. 세상에 사는 동안은 국가의 권위를 주신 분이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그 권위에 굴복하라는 것이다.
(롬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벧전 2:13-14) 『[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⑤왜 그들의 나라에서 로마 황제의 화상이 새겨진 동전을 사용했는가? 그 화상을 들어 보인 것은 그들의 죄와 불순종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⑥예수님은 동전 하나도 가지고 계시지 않았다.
(막 12:15)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⑦육체와 영혼 둘을 다 생각해야 한다. 육체를 함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중에 더욱 중요한 것은 영혼이다.
(살전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⑧하나님께 해야 할 일과 일상의 삶에서 해야 할 의무들이 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일상의 삶에서 해야 할 일을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선순위는 하나님의 일이다.
7.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의 질문을 물리치심(막12:18-27)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을 믿었다. 그들은 모세 오경 속에는 부활에 관한 내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 당시로서는 자유주의자 내지는 합리주의자였다. 이들은 자신의 지식으로 부활에 관한 모든 내용을 조롱하려 했다.
(행 23: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1)자연인(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신령한 일들에 대해 알 수 없다. 사두개인들은 인간적인 논리와 지식으로 영적인 문제를 판단했다. 그리고 육신적인 가치 기준으로 내세의 삶을 판단했다.
(고전 2:12-13)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2)사두개인들은 성경을 알지 못함으로 인해서 오해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바르게 알지 못함으로 인해서 오해하고 멸망으로 가고 있다.
(막 12:24-27) 『[2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 [26]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사두개인들은 성경을 세밀하게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모르고 있었다. 그 이유는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깨달을 수 없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미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모세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현제 시제를 사용하심으로 인해서 아브라함 야곱 이삭이 살아있다는 것을 언급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다.
<윌리엄 맥도날드의 글 중에서>
①하나님께서는 그 땅과 메시아에 관한 약속을 이미 그 조상들에게 하셨다. 그러나 이 약속은 그들의 생전에 성취되지 않았다.
②하나님께서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 그 조상들은 육신은 무덤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다.
③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자기 약속을 반드시 이루셔야만 한다.
④그러므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속성상 부활은 필연적이다. 이렇게 하여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사두개인들과의 변론을 끝내셨다.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3)사도개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함으로 인해서 오해했다.
사두개인들은 구약성경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부활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겠는가? 사람들이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해서이다. 부활신앙은 기독교 진리의 초석이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자신의 부활도 믿지 못할 것이다.(고전15:12-19)
4)사두개인들은 내세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
(막 12: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하늘에서는 혼인관계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늘에서의 삶은 질적인 변화가 있는 것이다. 장가가고 시집가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천사와 같다.
5)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 했지만 오히려 그들의 영적무지만 폭로되었다.
6)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아는데 힘 써야 된다.
(딤후 2: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엡 1:18-19) 『[18]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8. 큰 계명(막12:28-34)
1)성경의 모든 계명은 사랑에 기초하고 있다. 하나님을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해야 하며, 우리 이웃은 우리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따라서 참으로 의미 있는 삶이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삶이요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삶이다.
(막 12:30-31)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①이 말씀이 생애 속에 실천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모든 것보다 더 사랑할 수 없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할 수 없다.
(요일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②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별개의 계명이 아니라 실제로는 하나의 계명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도 사랑한다.
(요일 4:20-21)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2)하나님은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외적으로 드리는 의식보다 중요하게 보신다. 마음이 드려진 상태에서 드려지는 외적인 것을 하나님이 받으신다.
(막 12:33-34)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3)물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요하고 사람이 중요하다.
4)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막 12:34)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서기관은 당시에 모든 종교가들이 예수님을 비난하는 상황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동조하고 율법의 내적 정신을 외적의식보다 중요하게 생각함을 표현했다. 그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가깝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런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다면 그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9. 다윗의 자손이자 다윗의 주(막12:35-37)
1)예수님은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소유하신 분이다.
(막 12:35-37) 『[35]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 ....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더라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
(시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인 동시에 다윗의 ‘주’이다. 다윗의 자손은 그분의 인성을 가리킨다. 다윗의 ‘주’는 그분의 신성을 가리킨다. 신성과 인성이 신비하게 결합되어 있는 분이 예수님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의 인성만 강조하는 인본주의자들과 예수님의 신성만 강조하는 신비주의자들 모두를 경계해야 한다.
2)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자신의 신성을 분명히 드러내려고 하셨다.
평상시에 서기관들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하심으로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신성을 부각시키셨다.
3)예수님은 우리의 일상생활의 ‘주’가 되셔야 한다.
(롬 14: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4)예수님의 인성은 우리의 모든 고통과 연약함을 친히 아실뿐 아니라 체휼하신 분이라는 것이며 그분의 신성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능히 해결해 주신다.
(히 4:14-16)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10. 서기관들의 위선과 과부의 바른 헌금(막12:38-44)
본문에 등장하는 서기관들과 과부는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는 너무나 상반되는 신분과 지위를 지니고 있던 자들로 전자는 존경을 후자는 멸시를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신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로서 책망과 칭찬을 하심으로 결코 세상적인 조건이 하나님의 평가 기준이 아님을 보여준다.
1)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서기관들의 외식은 하나님의 더 큰 판결이 있음을 책망하셨다.
(막 12:40)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2)서기관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켰지만 과부는 자신의 물질을 하나님에게 드렸다. 이 얼마나 분명한 대조인가?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로 말미암아 칭찬과 책망을 받는다.
(막 12:40)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막 12: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3)참된 헌금
(막 12:43-44)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①참된 헌금은 얼마를 바쳤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세(동기)로 바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②참된 헌금은 ‘얼마를 드렸는가?’가 아니라 ‘얼마를 남겨 놓았느냐?’로 평가된다. 참된 헌금은 ‘얼마를 드렸느냐?’가 아니라 ‘몇 %를 드렸는가?’로 평가된다.
③참된 헌금은 어떤 희생이 지불이 되느냐로 평가된다. 부자는 풍족한 가운데 넣었기 때문에 헌금을 하고서도 별 불편함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넣었을 때는 자기 생활에 어려움을 감수하고 드린 것이다.
④헌금은 우리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만드시기 위해 정하신 것이다. 과부의 헌금은 모든 것이 그분의 소유라는 확신과 그 분이 모든 것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확신과 그분이 모든 것을 가지셔야 마땅하다는 확신의 표현이었다.
⑤과부의 행동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일에 투자한 후 자신의 장래를 그분에게 맡기는 믿음의 표현이었다.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4)하나님의 전지하심이 나타나 있다.
과부가 자신이 드리는 물질이 생활비 전부라고 얘기한 적이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을 아신다.
바. 종의 감람산 강론(막13:1-37)
1)개요
①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언하심(막13:1-2)
제자들은 성전의 웅장함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성전의 웅장함에 대해서 예수님의 소견을 물었다. 예수님은 그 성전이 파괴될 것을 말씀하셨다.(A.D 70년)
죄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신 동시에 제자들이 웅장하게 보는 눈에 보이는 것들은 일시적인 그림자에 불과한 것임을 깨닫게 해주시기를 원하셨다.
(고후 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②말세의 징조에 대한 질문과 답(막13:3-8)
성전 파괴에 대한 징조를 제자들이 물었는데 단편적으로 보면 예루살렘 파괴의 서기 70년 사건에 대한 대답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7년 환난 중에 세워질 성전까지 미리 보고서 말씀을 하신 것이다.
③유대인에 대한 박해(막13:9-13)
④유대인의 육체의 구원(막13:13)
(막 13:20)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어늘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
⑤환난의 중반기에 유대인들이 감람산으로 도망한다.(막13:14-20)
⑥이적으로 미혹하는 역사(막13:21-23)
⑦환난 후에 있을 일(막13:24-25)
⑧예수님의 지상 재림(막13:26)
⑨유대인들을 모으는 것에 대한 포괄적인 언급(막13:27)
(마 24:31)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신 30:4) 『너의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사 27:12-13) 『[12] 너희 이스라엘 자손들아 그 날에 여호와께서 창일하는 하수에서부터 애굽 시내에까지 과실을 떠는 것 같이 너희를 일일이 모으시리라 [13] 그 날에 큰 나팔을 울려 불리니 앗수르 땅에서 파멸케 된 자와 애굽 땅으로 쫓겨난 자가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산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
⑩이스라엘의 회복(막13:28-31)
⑪재림의 날짜는 하나님의 권한 속에 있음(막13:32)
⑫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자세(막13:33-37)
2)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예수님의 짧은 메시지가 있다.
①주의하라(삼가라)
(막 1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막 13:23)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막 13: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②두려워 말라
(막 13:7)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③기도하라
(막 13:18) 『이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④깨어 있으라
(막 13: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막 13:3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막 13: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3)주님은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사무를 맡기며 깨어 있으라 했다. 홀연히 와서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셨다.
(막 13:36)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구원받은 이후에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다가 주님을 만나지 않도록 하라는 권면의 말씀이다. 우리에게 맡긴 사무가 무엇인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을 세워는 일이 아닌가? 사람들이 주님께 가까이 하도록 도와주는 일이 아닌가? 부지런해야 한다.
주님을 만날 때 어떤 모습으로 만나는가는 중요하다. 그런데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깨어 있도록 힘써야 한다.
(엡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사. 종의 수난과 죽음(막14:1-15:47)
1. 예수님을 살해하려는 음모(막14:1-2)
(막 14:1-2) 『[1]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 [2] 가로되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마 26:1-2)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2]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
종교가들이 예수님을 ‘명절에는 죽이지 말자’고 모의하는 그 시간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유월절에 죽으실 것을 예언하고 계셨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에 정확하게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셨다.
2.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과 가룟 유다의 배신(막14:3-11)
1)마리아의 헌신은 말씀을 주의해서 들은 결과이다.
(눅 10: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막 14:8)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자기의 오라비를 살리는 것에서 예수님은 참으로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해서 듣는 속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사되심 그리고 부활하심을 사실로 믿었기 때문에 나온 행동이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동이 자신의 장사를 준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2)생명이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한 헌신이 허비라고 생각한다.
(막 14:3-4) 『[3]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사람들은 한 사람의 일 년간의 생활비를 주님께 드리는 것을 낭비라고 생각했다. 하물며 한 사람이 온 생애를 주님께 드리는 것은 얼마나 더 큰 낭비라고 생각하겠는가?
3)인생을 주님께 헌신하는 것은 허비가 아니라 진정한 투자이다. 바울사도는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었다. 그것은 허비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삶을 산 것이다.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4)마리아의 행한 일도 기념하라고 하신 것은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제2의 마리아 제3의 마리아가 계속 일어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우리도 또 하나의 마리아가 되어야 한다.
(막 14: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5)예수님에 대한 여인의 아름다운 헌신과 가룟 유다의 예수님을 향한 배신이 대조되고 있다.
(막 14:10-11) 『[10]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1]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가룟 유다는 탐욕과 지상의 메시아 왕국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수포로 돌아간 것에 대한 실망감으로 예수님을 돈을 받기로 하고 팔아 넘겼다. 즉 예수님을 자기 영혼을 구원하실 대상으로 생각지 않고 인간 욕심을 이루는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그는 가룟 유다와 동일한 사람이다.
3. 유월절 만찬(막14:12-26)
1)사람과 물질의 지배자와 주권자 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유월절을 준비하러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앞에 일어날 일을 정확하게 언급하시고, 또 그대로 되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사람과 물질을 지배하시는 주권자라는 사실을 본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주님에 대하여 자기 자신과 자신의 물질을 기꺼이 주님께 드리는 마음들을 볼 때 놀랍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
2)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
(막 14: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①예수님을 따르는 동기가 순수하지 못했다.
②그는 돈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요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
③그는 탐욕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예수님의 능력을 가까이서 경험하면서도 예수님의 영광을 보지 못했다.
④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엄중한 경고의 말씀이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은 화가 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가룟 유다처럼 세상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팔고 있지 않은가?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판 것이 아니라 자기 영혼을 팔아버린 사람이다.
(막 14:21)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3)유월절 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주님의 몸과 피를 상징한다. 그 옛날 애굽에서의 해방시킨 유월절도 예수님이 이루실 것의 모형이었으며 지금 유월절 떡과 포도주도 주님이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실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막 14:22)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①떡을 가지사 - 이것은 인성을 입으신 예수님의 몸을 보여준다.
②떼어 - 이것은 그분이 이제 십자가에서 죽어 그 몸이 부서질 것임을 보여준다.
③주시며 - 이것은 그분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실 것임을 보여준다.
④받으라 - 우리에게 받을 것을 말씀하신다. 받고 안 받고는 자신의 선택이다.
4)하나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막 14: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①“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는 것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만찬이라는 것이다.
②출애굽 시대부터 이어져 오던 유월절 만찬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완성되었다는 의미이다.
③하나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신다는 약속이 있다. 이는 질적인 ‘새 것’을 가리키는 말이 다.
4. 베드로의 자만(막14:27-31)
1)인간적인 용기로서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
(막 14:27-29) 『[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베드로는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했다.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는 말이 진심이었으나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것은 인간적인 용기로 되지 않는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 그 영혼이 구원을 받고 성령을 받으면 참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베드로는 비록 주님을 따르는 길에 실패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죄 사함을 받고 끝까지 주님을 따랐다. 우리도 우리의 힘과 용기로만 주님을 따를 수 없음을 인정하고 주님을 더욱 의지해야 할 것이다.
(요 13:36)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2)허물이 문제가 아니라 그 허물을 회개하고 주님을 받아들이는 모습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
앞의 가룟 유다의 배신과 배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을 각각 언급하셨지만 유다는 회개치 않고 그의 생애를 마감했고, 베드로는 돌이킨 후에 주를 증거 하는 자로 귀하게 쓰임을 받았다.
3)제자들의 부인에도 주님의 자비하심을 보여주고 있다.
(막 14: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갈릴리에서 만나주실 것을 말씀하여 주시고 계신다.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질 것임을 예고하고 계시다.
5. 겟세마네의 기도(막14:32-42)
1)십자가를 앞두고 인성을 입으신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이다.
2)올바른 기도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에 자신의 뜻을 굴복하는 기도이다.
(막 14:36)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기도하는 사람은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다.
‘만일 한 시간만이라도 깨어서 기도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극심한 압박 가운데서 시험에 대항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윌리엄 맥도날드>
(막 14: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6. 예수님의 배반당하심과 체포당하심(막14:43-52)
(막 14:50-52) 『[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51]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마지막에 배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한 사람은 이 복음서 기자인 마가 자신이다. 이것은 마가복음에만 기록이 되어 있는데 예수님이 얼마나 철저히 버림을 받으셨는지를 보여 주기 위함일 것이다. 마가는 자신의 기록에 자신의 실수를 그대로 드러내었다. 이것이 겸손이다. 자신이 실패한 사람이고 지금도 주님을 따르고 있는 것은 주님의 은혜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7. 대제사장들과 공회 앞에 서신 예수님(막14:53-65)
(막 14:54)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안까지 들어가서 하속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베드로는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따라갔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멀찍이서 좇았다. 베드로의 추락은 다음과 같다.
①처음에는 세웠다. - 자기의 열심
②그 다음에는 도망갔다. - 겁쟁이의 후퇴
③나중에는 멀찍이 좇아갔다. - 밤중에 어중간한 제자 그는 하속들 자기 원수들과 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
우리의 주님을 따르는 걸음이 어중간하면 되겠는가? 바짝 가까이서 따라갈 때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시험에 들지 않을 것이다.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이 시험에 넘어지겠는가? 멀찍이 따르기 때문에 주님을 부인한다.
8. 예수님을 부인하고 심히 통곡한 베드로(막14:66-72)
(막 14: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
1)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그리고 생각하고 울었다고 했습니다.
실패한 자리에서 일어서려면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이 신앙을 회복하게 합니다.
2)예수님의 중보기도가 있었습니다.
(눅 22:31-32)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9. 공회 앞에서 받으신 오전 재판(막15:1)
(막 15:1)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로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
10.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막15:2-15)
(막 15: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빌라도는 생명의 주님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인기를 더욱 생각함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내어주었다. 세상에서의 이익과 권세를 잃지 않기 위해서 불의와 타협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자초하는 길이다. 빌라도의 선택은 사람에게 만족을 주기 위한 선택, 출세를 위한 선택, 양심을 외면한 선택이었다.
11. 십자가에 못 박히심(막15:16-32)
(막 15:24-27) 『[24]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25]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26]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12. 예수님의 죽음(막15:33-41)
(막 15: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히 10:19-20)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고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찢으셨다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담을 제거하신 것이다.
13.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심(막15:42-47)
(막 15: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요 19: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1)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을 숨겼지만 죽음 이후에는 담대하게 예수님의 시체를 빌라도에게 요구하여 자신의 무덤에 장사를 지냈다. 그 당시의 공회원이 전부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을 선 상황에서 공개적으로 예수의 제자라는 것이 알려지면 불이익을 당하고 자신의 모든 지위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제자들이 전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상황에서 요셉의 행동은 아주 대조적이었다.
2)예수님이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됨으로 인해 구약 예언이 실현되었다.
(사 53: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3)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기다렸던 자가 아니라 현제도 기다리고 있는 자라는 것이다. 주님이 죽으시고 실패한 것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을 믿고 그의 시체를 자신의 무덤에 모셨다.
아. 종의 승리(막16:1-20)
1. 예수님의 부활(막16:1-8)
(막 16: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죄가 용서되었다는 보증인 동시에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모든 성도의 승리의 부활을 보증하는 기독교 신앙의 초석이자 성도들이 갖는 소망의 원천이다.
2. 부활하신 예수님의 나타나심(막16:9-14)
1)마가복음 16장의 9-20절은 고대 사본들 중 두 종류의 주요 사본에 빠져 있는 관계로 현대의 많은 학자들이 9-20절의 신빙성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9-20절은 성령으로 기록되었다는 증거는 분명하다.
①그 밖의 모든 헬라어 사본과 많은 교부들이 9-20절의 문단을 본문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
②8절만으로 끝맺음이 된다면 대단히 이상스러운 맺음이 된다는 점. 특히 헬라어로는 8절의 마지막 단어가 ‘왜냐하면’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로 끝나고 있다는 점.
③만일 혹자의 주장대로 마가복음의 원본 중 끝부분이 분실되므로 말미암아 9-20절이 나중에 추가된 개요라면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점.
④9-20절의 문단 내용이 정통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
⑤문체 특히 어휘가 마가복음의 1장과 몹시 흡사하다는 점. 이것은 어떤 작품의 시작과 끝을 거꾸로 나열하는 대구법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2)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먼저 보이셨다.
(막 16: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목격하는 영광을 얻었다. 이는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가까이 따랐기 때문이다. 주님의 능력을 경험한 후 그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따르고 섬겼으며, 십자가 밑에도 따라갔고, 장사될 때 무덤에 따라갔으며 부활하신 아침에 가장 먼저 무덤에 왔다. 주님을 가까이 따르는 사람에게 주님은 자신을 더욱 나타내 보이신다.
(눅 8:1-3) 『[1]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3]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막 15:40)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마 27:60-61) 『[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6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막 16:1-2) 『[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
(막 16:12) 『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눅 24:16)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위 내용은 서로 상반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셨다.’고 기록하였고, 누가복음에는 제자들의 ‘눈이 가리워져서 알아보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시는 듯하다.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역사하실 때 다양한 모습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역사하셔도 우리의 영적인 눈이 감겨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알아보지 못한다.
4)여러 증인을 두셨다.
(막 16: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부활의 기쁜 소식을 천사를 통해 먼저 선포하셨다. 그리고 무덤을 찾아온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를 통해서도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이 전해져도 제자들은 믿지 않았다. 이번에는 주님께서 직접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셨다.
3. 예수님의 지상명령과 승천(막16:15-20)
1)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 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마가복음의 시작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로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라는 사실은 구약성경의 증거, 세례요한의 증거, 하나님이 친히 증거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를 통해서 증거 했다. 그리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완성되었다.
주님이 완성하신 복음을 이제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을 하고 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세계 복음화다.
2)복음 전파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날 것을 언급하셨다.
(막 16:16)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고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심판)을 받을 것이다. 믿든지 믿지 않든지 두 부류로 갈라질 것을 말씀하셨다.
3)구원을 받으려면 물 침례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아니다.
‘침례를 받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가 아니라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침례는 구원을 받은 사실을 외적으로 선포하는 행위이다.
①십자가의 강도는 침례를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보장을 받았다.(눅23:43)
②가이샤라의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은 이후에 침례를 받았다.(행10:44-48)
③예수님 자신은 침례를 주지 않으셨는데(요4:1-2) 만약 침례가 필수적이라면 이것은 대단히 이상한 일이다.
④바울은 자신이 극소수의 고린도인들에게만 침례를 준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데(고전1:14-16) 만약 침례가 구원에 필수적이라면 이런 감사를 드릴 리 없다.
⑤신약성경에서 대략 150문단 가량이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압도적인 증거를 어떤 구절이든, 소수의 구절이든 뒤집어엎을 수 없다.
⑥신약성경에서는 침례가 죽음과 장사와 연관되어 있지 영적인 출생과 연관되어 있지 않다.
4)믿는 사람들을 통해 나타날 표적이 언급되어 있다.
(막 16:17-18)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①표적은 말씀을 증거 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셨다.
(막 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행 14: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히 2:3-4) 『[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②표적은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사도들을 통해서 활발하게 나타났다. 신약성경이 완성된 지금은 말씀을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표적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 말씀이면 구원받고 신앙 생활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③그리고 이 표적은 모든 시대에 모든 교회에서 이런 표적이 전부 일어난다는 것이 아니고 교회 역사 속에 한 번만 있어도 이 말씀이 성취된 것이다.
④이 말씀은 믿는 사람들의 삶 속에 순종할 때 나타난다는 것이지 시험하라는 말씀은 아니다.
5)하나님 우편으로 승천하신 종
(막 16: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그리스도의 승천은 주님의 재림의 전주곡과 같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장차 주님께서 구름을 타고 다시 세상에 오실 것을 가리킨다.
성경대로 예수님의 생애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재림도 성경대로 이루어지고 그분의 심판의 약속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열심을 내자
(행 1:9-11)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출처] 마가복음아카데미-|작성자 감사와 찬양을 주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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