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의 나타나심과 그의 능력으로
성경본문: 고전1:1-5절
우리는 전도가 참으로 힘들고, 안되는 말세에 살고 있습니다. 주의 복음을 전하다가 보면 사람들에게 조롱과 비웃음을 받기도 하며, 친구들에게 광신도라고 비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매우 힘들고, 머뭇거리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지상명령을 순종해야 합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교회를 세우신 목적도 복음 전도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현장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고, 하나님의 임재와 그의 충만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의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람이 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바울이 아덴 지역에서 전도에 실패한 경우와 고린도 지역에서 전도에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된 비결이 무엇인지를 집중하여 전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고전2:1)”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그는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고전2:4)”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복음전파의 행위는 사람이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성령님의 감동과 그의 능력의 역사임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오늘 본문의 역사적 배경이 무엇입니까? 아덴의 성에 가득찬 우상을 보고 격분하여 사람의 말과 지혜로 아덴성의 사람들을 설득하는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스토아학파의 고향인 다소(타르수스) 출신으로 엄격한 유대인의 교육을 받았지만 헬라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로마 시민이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가말리엘 1세 밑에서 랍비로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복음전파사역을 나서기 전에 갖추어 놓았던 뛰어난 지식과 능력을 아낌없이 발휘합니다. 아덴성의 회당과 장터에서 날마다 예수님과 부활에 관해 변론하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말쟁이’ 바울의 이상한 신에 대한 변론을 듣고자 철학자들은 그를 아레오바고 언덕으로 초청합니다. 그는 자기를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철학적 지혜와 이성의 논리를 거침없이 토해냅니다. 이 사건이 바로 그 유명한 ‘아레오바고 설교’입니다. 바울은 이 자리에서 창조주 하나님, 회개와 심판, 예수 부활의 메시지를 열정적으로 전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참으로 냉담했습니다. 조롱하는 자들과 나중에 다시 들어보겠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소수의 사람만이 그를 믿었습니다. 우리가 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논쟁으로 전파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논쟁에서 이기면 상대방은 논쟁에서 진 불쾌감 때문에 오히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또한 상대방이 논쟁에서 이기면 이긴 사람들은 우월감으로 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는 오로지 기도와 겸손, 인내와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어느 과일장수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교인들이 열심히 전도했지만 도무지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아주머니가 어느 날부터 옷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교회에 출석하였습니다. 교인들이 놀라 물었습니다. “성도님, 그렇게 전도하여도 안 나오더니 어떻게 교회에 나오게 되었어요?” 그 아주머니 대답이 일주일에 세 번씩 가게에 들러 과일을 사가는 신사가 있었는데 그 분은 항상 못생기고 좋지 않은 사과만 골라가더랍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지금 당장 먹을 것이기 때문에 괜찮다고 하면서 좋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팔라고 하더랍니다. 미안해서 사과를 몇 개 주었지만 손을 흔들면서 받지 않아 그 분에 대해 조금씩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어느 날 그 신사가 조그만 소리로 말하더랍니다. “예수를 믿으세요.” 그 소리에 그 분이 믿는 예수님이라면 믿고 싶어서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사가 이렇게 한 이유는 성령의 감동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 그 복음을 전할 때 누구의 능력으로 전해야 하는가?
1.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에 자신의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바울은 제 2차 전도여행 중 고린도에 와서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 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바울이 이런 작정과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아덴에서의 경험 때문입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철학적인 말과 지혜로 복음을 전하다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들어오면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알고 전하고자 작정했습니다. 바울은 말과 전도함에 있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했습니다. 복음 전도는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인간의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죄의 권세에 붙잡힌 사람을 도울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나타날 때, 죄에 매이던 사람이 회개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람의 지혜로운 말 대신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복음을 전할 때, 아름다운 생명의 역사가 꽃피어나고, 세상에 빛을 발하는 교회가 탄생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무엇을 철저히 배제하였습니까? 1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바울 당시 헬라 사람들은 자기의 주장을 펴고자 할 때 세련되게 다듬어진 철학, 화려한 수사학, 치밀한 논리학 등을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언어와 자신의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세련되고 탁월한 내용으로 흔히 말하듯 '시청각적으로 잘 전달될 것 같은 내용으로 복음을 재구성하여 전달하면 더 잘 전달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의 유일한 내용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파할 때는 훌륭한 말, 그럴듯한 말이 별도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는 언제나 성령이 함께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면 설교자가 아무리 말주변이 좋고, 전도자가 아무리 웅변술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그 복음에 힘이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 방식으로 '말이 되고' 세상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더 있도록' 매력적으로 복음을 재구성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나타나시면 다 끝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설교시에나 전도의 방법을 어떻게 구성합니까? 사도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 전할 때, 당시 유행했던 웅변이나 철학이나 논리성을 가지고 사람들을 설득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귀로 듣기에 아름다운 말이나 화술 같은 인간적인 지혜와 방법을 쓰지 않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이렇게 결심하게 된 배경에는 지난날의 몇가지 경험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 중 한가지는 바울 자신이 유대교에서 개종할 때의 경험입니다. 바울이 무슨 철학이나 논리에 굴복돼서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잡으러 가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순식간에 변화를 받고 믿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던져주는 교훈은 무슨 철학이나 논리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가지는 철학적인 지혜로 설교했다가 실패한 아덴에서의 쓰라린 경험 때문입니다. 바울이 우상의 도시, 아덴에서 철학적인, 논리적인 설교를 해봤습니다. 그러나 반응이 신통치가 아니했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의 철학적인 설교를 듣고 새로운 인생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설교를 거부하며, 교회가 세워지지 아니하였습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선교사역에 큰 실패를 맛보게 된 것입니다.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이란 무슨 철학이나 지혜나 지식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가 논리적으로 말을 잘해서 또는 인간의 지혜에 설득이 돼서 믿음을 갖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은 성령께서 주신 믿음이 아닙니다. 참 믿음이 아닙니다.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 십자가의 복음은 인간의 지혜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이 순수 복음을 전할 때 믿어지는 믿음이라야 참 믿음인 것입니다.
어느 새신자의 간증입니다. 자기에게 전도한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는 것입니다. 언변이 좋은 사람들, 성경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 와서 복음을 쉽게 전해주어서 알아듣고 이해는 되는데 믿어지지는 않고 자꾸 의심만 커지더랍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분이 찾아와서 복음은 전하지 않고 다짜고짜 기도하자고 해서 같이 기도를 하는데, 마음에 감동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가슴으로 느껴지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즉석에서 예수를 믿고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힘으로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기도하십시오.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십시오. 여러분의 어눌한 전도라 할지라도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귀한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인간의 지혜와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그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집중한 것입니다.
2.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발견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림으로 주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항상 어떤 마음과 자세로 주의 복음을 전하였습니까? 3절에 보면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탁월한 복음을 가지고 있고, 수많은 기적과 표적을 행한 바울이 왜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습니까? 세상적인 지식이나 능력이 부족하여 두려워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없을까봐 심히 떨었던 것입니다. 경험이 많은 대사도가 떤 것은 지식이 없어서, 언변이 부족해서, 능력이 부족하여 벌벌 떤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사역 가운데 성령의 나타남이 없을까봐 떨었습니다. 즉 바울은 복음 전하는 현장에 성령의 나타남이 없을까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까봐 심히 두려워하고 떨었습니다. 성령님의 나타남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입니다. 기껏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사람의 일이 돼버리면 어쩝니까? 그래서 그는 심히 두려워하고 떨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나타나고, 그의 능력이 발휘하기 위하여 바울은 고린도 전도에 임하면서 인간의 지혜와 수단, 방법, 즉 웅변이나 철학이나 논리성, 그리고 귀로 듣기에 아름다운 말이나 화술 같은 인간적인 방법을 다 포기했습니다. 오로지 예수 십자가만을 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나타날 것을 믿고 그 무서운 영적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이때 성령의 나타남이 없으면 바울은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떨었던 것입니다. 즉 자신의 지식과 교만함으로 인하여 성령의 나타나심과 그의 능력이 임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두렵고 떨림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만 실제로 예수를 믿게 하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우리속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성령의 나타남이 없이는 복음을 전할 수도 없고 전해야 믿는 사람도 없습니다. 고전12:3절을 보면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복음 사역자들은 오로지 성령의 나타남을 사모했던 것입니다. 능력 있는 설교가 스펄전 목사님은 말하기를 “복음의 능력은 전도자의 웅변에 달려 있지 않다. 만일 웅변에 있다면 전도는 사람이 믿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복음의 능력은 설교자의 학식에 달려 있지 않다. 만일 그렇다면 전도는 인간의 지혜로 하는 것이 될 것이다. 혀가 녹이 슬 때까지 전하고 허파가 다 소모되어 죽을 때까지 증거 한다 할지라도 성령의 나타남이 없다면 영혼을 변화시킬 수 없고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두려워하며 떨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였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령의 능력을 구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겠는가? 드디어 바울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얻게 된 것입니다. ‘약할 때 강함의 역설적인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고후12:9절을 보면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허드슨 테일러는 “모든 하나님의 거인들은 약한 사람들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약할 그 때에 주의 능력이 강하게 되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행18:9-10절을 보면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바울은 성령의 나타남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고린도전도에서 승리하고 수많은 영혼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주의 복음을 전할 때에 심히 두려워하고 떨었다면 부족한 우리는 더 떨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 같이 능력이 많은 사람도 떨었다면 우리 같이 연약한 사람들은 더 떨 수밖에 없지요. 바울이 떨었는데 안 떠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울보다 월등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바울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누가 감히 바울의 권위에 도전할 자가 있는가? 그럼에도 우리가 주의 일을 하며 떨지 않고 두려워하지 이유는 두 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첫째, 바울이 포기한 것, 즉 ‘사람의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해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주의 일을 해보겠다고 것입니다. 어리석은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성령의 나타남이 없는 일을 그냥 하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일을 하는 것으로 족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시는 역사가 없다면, 모든 수고는 헛된 것입니다. 사실 이 설교는 저에게 하는 설교입니다. 저도 저의 목회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나타남이 없을까봐 떨지 아니했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수단을 더 많이 의지했습니다. 다윗이 던져버린 사울 왕의 군복과 놋 투구와 갑옷을 의지했습니다. 바울이 버린 ‘배설물’들을 아직도 보물처럼 여기고 그것을 가지고 뭔가를 해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되 제가 설교를 할 때나, 모든 사역을 할 때 성령의 나타나게 해달라고 기도해 주십시오. 여러분은 어떠한가? 여러분의 사역현장에, 신앙생활 현장에 성령의 나타남이 없을까봐 떨어본 적이 있는가? 조금 떨었는가? 아니면 심히 떨었는가? 자신을 체크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3. 바울은 자신의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그의 능력으로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도할 때 어떤 방법으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성령님이 주신 권세와 능력으로 전도하라고 하셨습니다.(마10:1) 즉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할 때 어떤 테크닉이나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주신 것은 권세였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말로써 불신자의 굳어진 마음을 풀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더욱이 굳어진 오랜 신앙의 적폐를 청산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방법이나 수단을 의존하지 말고 성령의 능력을 의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하고 그 마음이 변화되게 하는 것은 인간적인 방법이나 수단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인줄 믿습니다. 그러기에 복음을 증거하기 전에 성령이 내게 충만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성령의 나타나심과 그의 능력이 임하게 하려면 첫째,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전적으로 인정하며, 의지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께 성령충만하기 위하여 간구해야 합니다. 셋째, 주의 복음을 전할 때 성령께서 나타나시고, 그의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바울은 주의 복음을 전할 때 어떤 방법을 사용하였습니까? 4절에 보면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여기서 성령의 나타나심과 그의 능력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성령의 나타나심’이라는 표현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어성경을 보니까 “the demonstration of the holy Spirit”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엉뚱한 이해일지는 모르지만 이 말을 요즘 우리가 쓰는 표현으로 다시 번역해 보면 “성령의 시위”,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이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더 이상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숨기거나 억압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뜻대로 우리를 이끄시고 주관하시도록 그 분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능력을 감추고 적극적으로 성령을 드러내려고 했을 때에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도 성령의 나타나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통하여 적극적으로 역사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 전할 때에 사람의 기술이나 전도의 방법에 너무 치우쳐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열정과 노력은 성령님이 스스로 복음을 전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능력과 나타남으로 복음이 증거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에 나의 지혜와 능력이 때로는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보다 앞서지 말며, 나의 약함을 통하여 성령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도록 돕는 역할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지 않으면 절대로 예수를 그리스도이시다고 시인할 수도 믿을 수도 없습니다.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바울은 자신의 지혜로운 말이나 경험으로 하지 않고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그의 능력으로 전도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이 왜 복음을 전할 때 이렇게 자신의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사람의 믿음이 땅의 것에서 나오지 아니하고 오직 위에 계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진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가 전도함에 있어서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전도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생각처럼 안됩니다. 그러면 왜 안되는 것입니까? 결국은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결국 전도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성령님이 주시는 충만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에덴에서의 선교사역이 실패를 경험하고 고린도 지역에서 실패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고린도의 사역에서는 성령의 능력있는 나타나심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실패의 과정을 통하여 놀라운 전도의 비밀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오직 성령님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사람이 거듭나게 될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새 사람이 되어집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현장이며, 나의 믿음을 더욱 강하게 무장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에 이런 놀라운 사실을 현장에서 수없이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와 찬양이 넘치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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