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충만⑾
성경: 엡5:15-21절
금메달은 은으로 만든 원판에 금을 도금해 만드는데 금값은 한 돈을 10만원으로 칠 경우 16만 원가량 되고, 은메달은 10만 원 정도 됩니다. 우리는 올림픽이 끝난 후 금메달을 딴 선수들에게 쏟아지는 박수와 영광을 봅니다. 수영에서 금메달을 8개를 딴 멜포스는 17억짜리 호화 콘도를 구입했다는 소식입니다. 우리 선수들도 금, 은, 동 메달 하나만 따면 병역이 면제 됩니다. 중국은 이번에 선수 한사람을 키우는데 70억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반대로 이집트 무라바크 대통령은 동메달 한 개만 달랑 따온 선수들에게 진노해서 태만한 선수들을 가려내서 처벌 하겠다고 분노하고 있으며, 브루나이라는 인구 35만의 나라는 행정실수를 해서 선수를 참가하지 못해서 체육부 장관의 목을 날아갔습니다.
이번 올림픽에도 세계 205개국에서 1만500여명의 선수들이 참가해서 15일 동안 40억의 사람들이 처다 보고 있는 중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다 금메달을 따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금메달을 따는 것은 그 사람에게 영광이고 국가의 명예를 한 없이 높여 줍니다. 오늘 성경은 신앙인들의 금메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세월은 순식간에 지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광도 지나고 오욕과 슬픔도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모릅니까? 그런데 왜 성경은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그것을 잊고 산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 세월을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사는 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 이것이 세월을 아끼는 것이요, 세월을 이기는 것이다. 금메달을 딴 선수처럼 명예로운 성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현상을 봅시다.
1, 주의 뜻입니다.
사람들은 열이면 열백이면 백 다 자신의 뜻이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소망합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애를 씁니다. 그런데 성경은 너의 뜻이 무엇인가? 너의 생각이나 소원이 무엇인가? 를 묻는 것이 아니라 너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내가 아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하나님이 자기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사람을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어리석은 자라는 것은 “아포르네스라”는 헬라 말인데 유혹에 넘어 가는 자, 판단을 못하는 자, 바보 같은 자라는 말입니다. 누가 바보인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철이 든다는 것은 생각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생각하고 부모의 뜻을 알면 철이 들었다고 합니다. 신자가 신앙이 드는 것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어린아이와 같을 때는 하나님의 생각이나 뜻에 대하여 관심이 별로 없고, 또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고 신앙이 자라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생각하는 것을 따르려고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세월을 아끼는 것이요, 참으로 지혜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도 상대의 뜻을 모르고, 생각을 읽지 못하면 대화가 안 되고, 나아가서는 관계가 안 됩니다. 상대가 나를 사랑하다, 는 것을 알면 나는 그것에 대해서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고, 상대가 나를 공격하려고 하는 것을 안다면 나는 방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성령 충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 하라, 는 동사는 현재 계속적인 명령입니다. 특별한 경우에 일시적으로 임했다가 사라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 하라는 명령입니다. 행전 2장의 성령 충만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실 때 받는 것입니다. 오늘 에베소서 5장의 성령 충만함은 우리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기를 원하시는 성령 충만함을 받아들일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이 하나님의 책임입니까? 우리 책임입니까? 4장 30절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갈 5:17에서 “육체의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들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육신의 소욕을 따르거나, 죄를 짓는 생활을 한다면 성령을 근심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령이 그는 나를 인도하지 않습니다. 그는 스스로 뒤로 물러나 앉습니다. 성령을 소멸해서도 안 됩니다. 성령은 나를 깨우치시고 아이디어를 주시고 생각들을 유발하시고 암시해 줍니다. 이것을 거절하거나 무시할 때마다 성령을 소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 충만 에서 우리의 태도와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태양은 엄청나지만 작은 손바닥으로 내 눈을 막으면 가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역사하시기를 원하시지만 자신이 그것은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문을 잠거 놓고 사람 초청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의 생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1. 시와 노래를 하는 사람이 됩니다.(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사람이 기분이 좋다는 것은 얼굴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입술에 나타납니다. 한 주간 동안 한 번도 집에서 찬송을 부르지 않은 사람도 있고 매일 찬송을 부르며, 들으면서 일어나고 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19절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화답한다는 것은 한 사람이 시를 보내면 자신도 시를 써서 보내고 아이들이 방에서 노래를 부르면 부엌에 있는 엄마가 2절을 부르고 서제에 있는 아버지가 3절을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시를 잃어버린 지 얼마입니까? 찬송을 잃어 버렸지 않습니까? 어려우니까? 정신없이 사니까? 그렇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시편의 다윗이 어떤 때 시를 쓰고 노래를 불렸습니까? 다윗의 시편을 한편 소개드릴까요?
주님, 언제까지 나를 잊으시렵니까? 영원히 잊으시렵니까?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시렵니까? 언제까지 나의 영혼이 아픔을 견디어야 합니까? 언제까지 나의 영혼이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하여야 합니까? 언제까지 나의 영혼이 내 앞에서 의기양양한 원수의 꼴을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나를 굽어 살펴 주십시오. 나에게 응답하여 주십시오.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나의 두 눈에 불을 밝혀 주십시오. 나의 원수가 "내가 그를 이겼다"하고 말할까 두렵습니다. 내가 비틀거릴 때에, 나의 대적이 기뻐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나는 주의 한결같은 사랑을 의지합니다. 주께서 구원하여 주실 그 때에, 나의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입니다. (시편13편)
이것은 우리들에게 어려운 환경이 우리의 노래를 빼앗아 갈 수 없고 고난이 우리의 기도를 중단 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고난이 너무 심하면 사람들은 신음을 하고, 비명을 지릅니다. 그리고 악을 씁니다. 심하면 기절합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참습니다. 견딥니다. 아무 말하지 않고 그저 그 고난을 몸으로 맞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이 오고,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 올 때 노래를 부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시간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바울과 신라는 빌립보 감옥에서 한 밤중에 모든 죄수들이 다 들을 수 있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가면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좋을 때만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서 하나님을 향하여 노래를 불렀던 그 힘이 바로 성령의 힘이요, 믿음의 힘입니다. 원망과 불평이 찬송으로 기도로 바꾸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됩니다. 오, 성령님이시여! 우리 가정에 노래를 주옵소서. 나에게 잃어버린 시를 찾고 내 입에 하늘 노래를 담아 주옵소서. 하고 기도해야합니다. 가끔 핸드폰에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유행가를 넣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 찬양이 많습니까? 세상에 소망을 잃은 사람이 있습니까?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믿음이 약한 사람이 있습니까? 이 몸의 소망 무언가를/ 구원에 감사합니까? 405장을/ 여러분 잃어버린 찬송을 찾으세요, 잃어버린 시를 찾으세요. 이것이 성령 충만의 모습이고 충만한 길입니다.
2. 감사입니다.(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령이 충만하면 원망과 불평은 달아납니다. 그리고 감사가 집을 짓습니다. 감사가 들어옵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사람들이 당연하게 할 신앙고백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감사를 하셨습니까? 그 감사는 무엇으로 표현되었습니까? 감사도 원망도 세끼를 칩니다. 울고 싶은 사람은 자꾸 울 일이 생깁니다. 죽고 싶은 사람은 죽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은 좋은 일, 감사할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스펄 전은 "촛불을 보고 감사하면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보고 감사하면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면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면 천국을 주신다." 라고 말했습니다. 감사가 넘쳐나면 우리의 삶은 행복해집니다. 감사는 행복을 창조합니다.
감옥과 수도원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번 들어가면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아침부터 저녁까지 엄격한 훈련과 규율이 있다는 사실도 공통점입니다. 감옥이나 수도원이나 자기 마음대로 눕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먹지 못합니다. 주는 것만 먹습니다. 그러나 감옥과 수도원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감옥에서는 불평과 원망의 소리가 넘쳐나지만 수도원에는 감사와 기도의 소리가 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감옥에서 살 것인가? 수도원에서 살 것인가? 를 스스로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일본의 해군장교가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고향은 무질서하고 사회는 여러 가지로 부패해 있었습니다. 그는 귀향 후에 자신도 모르게 불평과 불만을 하면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서서히 몸이 마비되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해보아도 무슨 병인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한 정신과 의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당신은 앞으로 만나는 사람에게‘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고 말을 하시오. 그런데 적어도 하루에 만 번을 해야 합니다”라고 권했습니다. 그 해군 장교는 이때부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억지로라도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하루는 자기 아들이 감 두 개를 주자 “감사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그 감을 손으로 받았습니다. 이때부터 그의 몸은 서서히 마비에서 회복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그는 완전히 치료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미국의 한 작은 교회 목사가 2년 전부터 시작한 ‘불평 그만 운동(No Complaints Campaign)’이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는 캔자스시티에 위치한 출석 성도 250명의 크라이스트 처치 유니티의 윌 보웬 목사입니다. 그는 우선 자신의 교회 성도들에게 21일(3주) 동안 불평, 비난, 험담 등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도록 요청했습니다. 21일 이라고 정한 이유는, 심리학 이론에 따르면 21일은 새로운 습관이 몸에 배는데 평균적으로 걸리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참여자들에겐 자신의 ‘맹세’를 항상 잊지 않도록 보랏빛 팔찌를 지급했습니다. 참여자들은 자신의 입에서 불평이나 비난이 나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팔찌를 다른 팔목에 바꾸어 껴야 합니다. 목표는 21일 연속으로 나쁜 말을 하지 않아 이 기간에 같은 팔목에 팔찌가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이 목표를 달성하면 팔찌를 풀고 인증서를 주는 의식을 베풀었습니다. 보웬 목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은 하루 평균 15∼30차례 불만을 터뜨리거나 남을 비난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운동으로 통해 의식적으로 불평과 불만을 버리는 노력을 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빠르면 4개월 늦게는 10개월에 걸쳐 불평과 불만을 극복하고 팔찌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성령이 충만하면 감사의 사람이 됩니다. 악령이 역사하면 원망과 저주의 사람이 되는 것이 맞습니다. 여러분은 성령과 악령의 세계를 왕래하고 있습니까? 감사에서 여러분의 별장을 지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아무쪼록 감사를 연습하고 자신의 것이 되게 하십시오.
결론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남자가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이런 진단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기억을 되살리려면 당신의 시력이 손상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법이 없습니다. 선택은 당신이 하십시오. 기억을 되찾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두 눈이 멀쩡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는 심사숙고한 후 대답했습니다. “저는 기억을 되살리기보다는 제 시력을 그대로 유지하겠습니다. 제가 과거에 어디에 있었느냐를 보기보다는 앞으로 어디로 가게 되는지를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일을 바로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문은 이미 닫혀 있지만 미래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실패나 성공에 계속 얽매여 있다면 앞으로 도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가까움과 멈에 대하여- <터키와 러시아 일정 중에서>
천리만리 먼 길/ 돌아 갈 집이 있기에 여행이 된다./
어색함이 재미있고/ 생소함이 두렵지 않는 것은 만날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늘아래 구름 위가 괜찮은 것은 착륙하고 내려갈 땅이 있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 말 못하는 이들이 불편하지 않는 것은 오래 계속 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모든 익숙한 것/ 사랑하는 것들/ 그리고 내 것이라 여기는 것들로부터 떨어지고 멀어져도, 슬프지 않음은 내 마음과 생각이 그곳에 내 사람들에 머물기 때문이다.
멀고먼 떠남 속에서 나는 다시 나를 보고 가깝고 먼 것의 은총을 경험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곳에 있다. 그리고 모스크바의 새벽에 눈을 뜬다.
조영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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