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전도 지도
바울은 디모데와 누가를 빌립보에 남겨 두고 실라와 함께 데살로니가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데살로니가로 가려면 두 도시를 지나야 되는데 빌립보에서 53km 정도 가면 암비볼리가 나온다.
암비볼리에는 초기 기독교 바실리카의 초석들이 많이 있다.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는 공회당과 마차 경주장까지 갖추었던 큰 도시였으나 지금은 수백 명이 사는 작은 마을이 되었다.
암비볼리의 고속국도를 따라 스트림몬강의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1km 정도 가면 BC 4세기 경에 나오메돈 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자상이 서있다. 그러니까 이 사자상은 바울이 태어나기 훨씬 전에 세워진 것으로 바울이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로 가는 도중에 암비볼리를 지날 때 이 사자상 앞을 지나갔다. 이 사자상은 바울 일행을 보았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나오메돈 장군 기념 사자상
사자상이 있는 암비볼리에서 데살로니카 방향으로 43km 정도 가면 아볼로니아라는 작은 마을에 당도하게 되는데 바울이 아볼로니아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하였다는 작은 돌산 언덕이 있는데 돌산 앞에는 우거진 큰 나무가 있고 바위 돌판에는 "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는 행 17: 1절 말씀이 그리스어와 영어로 새겨져 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한 언덕
바울이 복음을 전하였다는 언덕 옆에 있는 고대 로마식 목욕탕 유적
바울과 실라는 아볼로니아를 지나는 길에 복음을 전하고 아볼로니아에서 남서쪽으로 64km 떨어진 마게도니아의 수도인 데살로니가에 도착하였다.
데살로니카 화이트 타워
니끼스 거리 오른쪽에 높이 30미터 정도의 화이트 타워가 있다. 15세기에 베네치아인이 세운 방벽의 일부로 18-19세기의 터키 시대에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당시 이곳에서는 대량 학살이 자행되어서 ‘피로 물든 탑’이라고도 불렸는데 후에 탑의 표면을 하얗게 칠하고 공원으로 정비하여 시민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데살로니가는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이복 누이동생인 데살로니가와 결혼하여 마게도냐 왕위에 오른 카산드로스가 BC315년 이 성을 재건하고 아내 데살로니가에게 경의를 표시하기 위해 붙여진 도시 이름이다. 데살로니가는 도시가 급성장하여 마게도니아의 수도가 되였고 BC42년 악티움해전에서 옥타비우스의 편을든 충성심으로 자유도시가 되어 자체시민권을 누릴수가 있었다.
데살로니가에는 그리스사람과 로마군인들 그리고 이방인들과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에서 유대인의 회당이 없어 복음을 전하지 못한 것에 비해 데살로니가에는 유대인 공동체와 회당이 있어 복음을 전할 수있는 조건이 좋았다. 바울이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에 대한 애증이 있고 회당이라는 기도처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효과적으로 선교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선호하는 것이다.
바울은 안디옥과 이고니온등에서 복음을 전하던 방식으로 안식일에 유대인의 회당에서 율법서와 예언서를 읽고 성경을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복음의 핵심은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였다. 바울이 3주동안 회당에서 복음을 전한 결과 경건한 헬라인 아리스다고와 세군도(행 20:4)를 비롯 많은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이 바울이 말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되였고 바을을 따르게 되였다.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할 때 빌립보 교회 형제들이 바울에게 선교비를 두어차례 보내여 바울을 도왔는데 아마도 루디아가 주관이 되여 보낸 것으로 추측이 된다
바울은 선교비에 의존하지 않고 될 수 있으면 형제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과 낮으로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전심을 다하였다(살전2:9)
이러한 바울과 실라의 행동은 유대인들에게는 못 견딜 일이였고 다른 곳에서와 같이 유대인들이 바울을 시기하여 시장에서 불량배들을 모아 폭동을 일으켜 도시를 혼란에 빠지게 한 후 그 이유를 바울과 실라를 지목하여 해치고자 하였다.
그리스도를 비난하는 유대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군중 앞으로 끌어 내려고 바울이 머물고 있는 야손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야손은 성난 유대인들이 바울을 해치려는 계획을 간파하고 미리 바울과 실라를 대피시켜 놓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몰려 왔을 땐 바울과 실라가 간 곳이 없자 유대인들은 바울 대신 야손과 바울로 인해 그리스도인 된 몇 사람을 붙들어 관청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관원들에게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던 사람들이 여기에도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야손이 그들을 자기 집으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가이사의 법을 어겨가며 예수라 하는 다른 왕이 있다고 말하면서 황제의 명령을 거스르는 행동을 합니다." (행 17: 6~8)라며 무시무시한 반역을 도모하는 자들로 고발을 하였다.
유대인들이라는 작자들의 상투적인 수단은 자기 민족의 일을 꼭 가이사의 힘을 빌어 같은 동족을 응징하려는 나쁜 습성이 있는 것 같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일제시대에 친일 조선사람이 조선인을 멸시하고 억압한 것 처럼 그렇다
유대인들이 반역에 해당하는 죄목으로 고발한 내용을 들은 다른 무리들과 관원들은 매우 당황하였다. 왜냐하면 황제의 명을 어기면 예외없이 처벌해야 하기 때문이다.
권원들은 야손과 그리스도인을 문초하고 야손과 그리스도인들이 다시는 바울과 실라를 만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보석금을 낸 후에 풀려 나게 되였다.
보석금을 주고 풀려난 야손과 그리스도인들은 밤이 되자 곧바로 바울을 만나 다시는 바울을 만나지 않는 조건으로 풀려 난 것과 사태가 위급함을 알리고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게 되였다.
그러한 연유에서 인지는 모르나 그 후로 바울은 다시 데살로니가로 가지 않았다.
살전 2:18에서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고자 하나 '사단이 막음'으로 해서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두고 한 말이며 특히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야손과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의 안전을 염려한 사랑의 배려 때문이였다.
데살로니가 디미트리우스 교회
데살로니카와 베레아에서 바울과 관련되는 동시대의 유적은 거의 없다. 그러나 데살로니카에서 찾아볼 만한 곳 중에 하나가 이 지역 교회 중 가장 규모가 큰 디미트리우스 교회가 있다. 성 디미트리우스는 303년 디오클레시아누스 치세 때 아니면 306년 막시미아누스 치세 때 헝가리 시르미움에서 순교한 분인데, 어쩌다 데살로니카의 수호 성인이 되었다. 5세기에 지은 성당은 7세기에 재건되었으나 이것도 1917년 화재로 타버리고 1948년 지금의 성당이 재건되었다.
데살로니가 디미트리우스 교회의 지하층 부분으로 410년대에 건축된 원형이 많이 보존되어 있다
데살로니가에서 쫓겨난 바울과 실라는 베뢰아로 향하였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힘든 여정을 눈앞에 보는 듯 처연하다.
베뢰아는 데살로니아가에서 남서쪽으로 80㎞ 떨어진 베르미우스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마게도냐의 도시이다.
오늘날의 지명은 베리아이다. 베뢰아가 데살로니가처럼 상업 도시의 번성함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장색 세공업과 농업 석공업의 중심지로 유명하다.
바울과 실라는 베뢰아에 도착하여 다른 곳 과 마찬가지로 유대 회당을 찾아 갔다.
바울은 유대 회당에서 율법과 예언서를 읽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전하였는데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과 달리 정치적인 편견없이 진리에 대하여 호의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바울과 실라의 말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였으며 바울이 한 말이 사실인지를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였다
그들 가운데 믿는 사람이 많이 생겼을 뿐아니라 그리스의 귀부인과 남자들, 그리고 유대인들도 적지 않게 믿게 되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바울이 베뢰아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는 것을 듣고 베뢰아까지 쫓아와서 데살로니가에서 처럼 사람들을 선동하고 소란을 피웠다.
그래서 형제들은 급히 바울을 바닷가로 보냈다. 하지만 실라와 빌립보에서 올라와 합류한 디모데를 베뢰아에 그대로 남겨두어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을 지도하게 하였다.
베뢰아에있는 사도 바울 기념교회
바울이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는 모습의 성화
예수님과 사도바울의 모자이크화가 대리석 건축물과 조화롭다
베뢰아에서 바울을 바닷가로 데려갔던 사람들은 바울을 도와 아테네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였다. 바울은 그들에게 베뢰아로 돌아가면 거기 머물고 있는 실라와 디모데를 가능하면 빨리 아데네로 돌아 오라는 부탁을 한 후 돌려 보냈다.
아크로 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바울은 아테네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온 도시가 우상들로 가득 찬 것을 보고 마음에 분을 품게 되였다
그래서 바울은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리스인들과 토론을 하고 광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도 날마다 토론하였다.
그러다 바울은 에피쿠로스파의 철학자와 스토아파의 철학자들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논쟁을 하게 되었다
철학자들이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을 전하는 것을 듣고 어떤 사람은 "이 수다쟁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가?"라고 말하기도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그가 외국의 다른 신들에 관해서 말하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들이 바울을 붙잡아 아레오바고에 있는 시의회로 데려가서 바울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전하고 있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라 고 하였다.
아레오바고는 법정 또는 아레스의 평의회 라는 뜻으로 주로 종교와 교육, 그리고 도덕적인 문제에 재판권을 행사하던 일종의 권력 기구인데 바울 당시 아테네 시의 모든 행정관들은 이 평의회의 구성원이였고 면책 특권을 가졌었다.
바울이 철학자들에 이끌려 간 아레오바고 언덕. 동판에는 사도행전 17: 22~31절이 새겨져 있다
아레오바고에 선 바울은 철학자들과 시의회 앞에서 당당하게 말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종교심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여러분이 섬기는 것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그 중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글을 새긴 제단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섬기는 그 신에 대해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라고 운을 뗀 바울은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그분은 온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서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며, 사람이 지은 신전에서 살지 않으십니다. 또한 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겨야 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으로부터 세계 모든 인류를 만들어 땅 위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살 시대와 지역의 경계를 정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찾을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고 하나님 안에서 움직이며 존재하고 있습니다. 시인 가운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하나님 자신을 사람의 생각으로나 손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금이나 은이나 돌 같은 우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서나 온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정하신 한 사람을 시켜 온 세상을 의롭게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이에게 그 증거를 보이셨습니다." 바울이 마지막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말을 마쳤다.
바울이 전한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바울이 전한 말을 믿고 바울을 따르게 된 사람이 몇 사람 있었는데 그렇게 믿게 된 사람들 중에는 아레오바고 시의회의 의원인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는 여자와 그 밖에 몇 사람이 더 있었다.
바울은 베뢰아에서 돌아온 실라와 디모데를 만나 그동안 선교보고를 받고 디모데는 데살로니가로 실라는 빌립보로 파송하여 그들의 신앙을 돌아보고 굳게하라 하고 바울 자신은 고린도로 갈 것을 알리고 그 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아테네를 출발한 바울은 아테네에서 90km떨어진 고린도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고린도는 북쪽으로 중부 그리이스와 남쪽으로 펠로폰네수스를 연결시키는 고원 위에 위치했다. 이 도시의 동서쪽에는 각각 항구가 있어 전략상 요충지였다. 이 도시는 B.C. 8세기에 크게 번성하여 B.C. 6, 7세기경에는 영화와 세력이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B.C. 146년 고린도는 로마의 장군 무미우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고 주민들은 노예로 팔려갔다.
B.C. 46년 로마 황제 시이저는 이 도시를 재건하여 B.C. 44년 로마의 식민지로 삼았고 B.C. 27년에는 로마의 아가야 행정 구역의 수도가 되게 하였다. 주민들은 대개 헬라인, 이탈리아 출신의 자유민, 로마군의 퇴역 장군, 상인, 정부 관리 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도시는 특히 육상 및 해상 무역로가 집중되어 상업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유해 경제적으로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였으며 이러한 윤택(潤澤)한 생활은 결국 주민들의 윤리적, 도덕적 타락의 원인이 되었다. B.C. 5세기 초 고린도 사람들의 문란한 생활 때문에 '고린도 사람이 되다'는 뜻의 헬라어 "고린디아제스다이" 라는 말이 생겨났는데 이는 성적으로 부도덕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아울러 이곳은 많은 이방 신전들이 있는 우상 숭배의 도시였다.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에 이른 바울은 이 같은 사실들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테네에서의 소중한 경험을 바탕으로 우상 숭배와 타락의 중심지인 고린도에 합당한 선교 전략을 구상하였다.
아크로코린토스 성채의 위용
고린도 아폴로신전
당시 고린도는 AD45년 로마에서 유대인의 폭동으로 인해 글라우디오 황제는 반 유대주의 정책을 펼쳤는데 그 일환으로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모두 쫓아 내였는데 쫓겨난 유대인 중 2만5천명 가량이 고린도로 와 정착을 하게 되였다.
그 사람들들 중에 소아시아 본도 지방에서 태어난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도 고린도로 왔는데 아굴라는 천막 만드는 업을 하고 있었다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은 크고 번창한 도시에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이 새로이 전도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생계 문제를 조속히 해결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 다소에서 학창시절에 익혀 둔 천막 만드는 기술을 이용하여 생계와 선교비용을 마련하고자 수소문한 끝에 업이 같은 아굴라의 소식을 듣고 아굴라를 찾아가게 되였다.
바울과 아굴라의 만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였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이미 그리스도교를 믿고 잇었기 때문에 바울과 훌륭한 동역자가 되였기 때문이다.
바울과 아굴라는 낮에는 천막 만드는 일을 하고 안식일이 되면 회당에 나가 강론을 하며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한 첫 열매는 스데바나와 그의 가족이었다(고전 16:15)
그럴 무렵 실라는 빌립보에서 디모데는 데살로니가에서 고린도로 오게 되였고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의 형제들이 환난 가운데 굳건히 믿음을 지키며 있다는 반가운 소식도 전하여 주었다.
특히 실라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마련한 연보를 가져왔고 그 연보는 고린도에서의 선교에 매우 유용하게 사용 되였다.
빌립보 교인들이 보낸 연보로 바울은 천막 만드는 일을 그만 두고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며 복음을 전하는데 전념하게 되였다.
바울이 유대교는 이스라엘의 민족종교로 이방인에게 폐쇠적이고 할레의 중요성 때문에 할레 받지않은 이방인들을 무시하므로 진정한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율법도 할례도 강요하지 않고 부활하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임을 전하고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전하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기를 원했고 믿었다.
그리스도교가 날로 왕성해지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
들이 대적하기 시작하였고 갈수록 노골적으로 비방하자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 하고 회당을 나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으로 갔다.디도 유스도라의 집은 바로 회당 옆에 있었다.
디도는 로마식 이름으로 이사람이 로마 시민임을 나타내 준다. 추측건대 그는 B.C. 44년 로마 황제 가이사가 고린도롤
재건할 때 이곳에 정착했던 로마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리하여 회당 옆에 있던 디도 유스도의 집은 고린도 전도 사역의 본부가 되었으며 고린도 교회의 최초 집회 장소가 되었다.
바울의 전도로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그리스도를 믿고 바울이 세례를 베풀자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바울의 복음을 받아드려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 세례를 받았다.
그러자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더욱 거세게 비방하고 위협을 하였는데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힘써 복음을 전파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 는 계시를 받고 바울은 일 년 육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바울은 이곳에서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를 기록하였는데 기록한 목적은 디모데가 보고한 데살로니가의 야손을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격려하고 경건한 삶에 대한 것과 일상생활에 충실하라는 교훈을 적은 서신을 디모데에게 주어 전달하게 하였다.
디모데는 서신을 가지고 가면서 주변 작은 도시인 아가야와 겐그리아에서 복음을 증거하였다(고후 1:1)
그러던 중 갈리오가 아가야 지방의 총독으로 부임하였는데 총독이 새로 부임한 것을 기회 삼아 유대인들이 작심을 하고 바울에게 몰려가 붙들어 그를 재판정으로 끌고 갔다. 바울을 법정으로 데려간 유대인들은 갈리오 총독에게 "이 사람이 우리의 법을 어겨가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라고 유혹하고 있다" 고 고소를 하였다.
그 고소한 것이 잘못 되였음을 변론하려고 바울이 막 입을 열려고 하는데 갈리오 총독이 유대인들에게 " 당신들이 고소하는 것이 어떤 범죄나 나쁜 행동에 관한 것이라면 내가 들어 주겠으나 당신들이 지금 말하는 것은 언어와 명칭과 당신들의 율법에 관한 것들이다. 이런 문제는 당신들 스스로 해결하도록 하라. 나는 이런 사건에 재판관이 되기는 싫다." 는 판결을 하자 유대인들이 항의를 하였고 항의하는 유대인들을 갈리오 총독은 강제로 그들을 재판정에서 몰아 냈다.
이에 헬라인들 중 반 유대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갈리오 총독에게 재판을 강요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유대인의 주동자 격인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렸지만 갈리오 총독은 상관하지 않았다.
고린도 갈리오 총독 때 바울이 재판을 받던 바울의 재판 터
그러한 와중에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 누가와 함께 고린도에 며칠 더 머물다가 그들과 작별하고 수리아 안디옥으로 귀환하기 위해 떠났는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동행을 하였다.
바울은 수리아 안디옥으로 항해하기 전에 그가 고린도에서 선교를 성공적으로 마치면 머리를 깍기로 서원한 것을 지키기 위해 겐그레아 항에서 머리를 깎았다. 겐그리아에는 고린도에서 전도한 여집사 뵈뵈가 살고 있었으며 뵈뵈가 섬기는 교회가 있었다.
바울이 머리를 깍았던 겐그리아 항은 지진과 해일로 바닷속으로 가라않고 지금은 거의 사람이 실지 않고 있다.
바울은 겐그리아 항에서 머리를 깍은 후 배를 타고 브르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에베소로 가서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에 대해 복음을 전고 변론하였는데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원 하였다.
바울은 브르스길라와 아굴라를 그곳에 머물게 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였는데 그들은 5~6년간 머물며 복음을 전하였다.
3차전도 여행때 에베소에 온 바울이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었고 바울의 서신을 통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안부를 전하기도 하였다(고전16:9)
에베소 사람들이 바울이 더 오래 있기를 원 하였으나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그들의 요청을 허락하지 않고 작별하였는데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예루살렘 교회로 올라가 절기를 지내고 그간의 선교내용을 보고 하였다.
예루살렘 교회에 선교보고를 마친 바울은 안디옥으로 내려갔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갈라디아지방에서 목격한 거짓 교사들이 전한 거짓 진리가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을 혼란스럽게한 것을 바로 잡기 위하여 갈라디아 서신을 기록하여 수리아 안디옥과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에 있는 교회로 보내었다.(행18:23)
'사도행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제 4 부 바울의 1차 전도 여행(2) (0) | 2018.07.25 |
---|---|
[스크랩] 제 5 부 바울의 2차 전도 여행(1) (0) | 2018.07.25 |
[스크랩] 제 7 부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0) | 2018.07.25 |
[스크랩] 사도바울의 전도여정표 (0) | 2018.07.25 |
[스크랩] 사도바울의 1차 전도여행 (0) | 2018.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