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서론-아더핑크
AN EXPOSITION OF HEBREWS by ATHUR W. PINK 히브리서 서론 제1강-서론 이 중요한 서신을 연구해 나가기 전에 먼저 이 강해서의 저자와 독자는, 이 서신을 영감하신 성신께 머리를 숙이며, 인격과 직무들과 영광들을 이처럼 고상하게 드러내고 있는 분과 교제하기에 합당한 마음이 되도록 열심히 간구해야 한다. 우리는 각자 성도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려는 목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복된 성령의 도움을 명백히 구하도록 하자. 성령은 그리스도께 속한 일들을 성도들로 하여금 밝히 깨닫게 하기 위해서 보내심 받았다. 우리는 누가복음 24:45에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총명을 열어 “성경을 이해하도록”하셨음을 배우게 된다. 주께서 우리에게 그와 같이 은혜로우시다면, 그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추어 깨닫게 할 것이고(시119:130), 우리는 “그의 광명 속에서 광명을 보게 될 것이다”. 이 강해서의 초두에서는 서론적인 것들에만 관심을 집중시키려 한다. 상세한 부분들을 다루기 전에 그것들을 고려해 보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우리는 이 서론에서 이 서신의 수신자들, 서신을 쓴 목적, 이 서신의 테마, 이 서신의 내용 분해, 히브리서의 특징들, 히브리서의 가치, 그리고 히브리서를 쓴 저자 등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러기 전에 먼저, 우리는 가능한 다른 강해자들의 말을 자유롭게 인용할 것임을 미리 말해 둔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저자의 말을 인용할 수 없을 때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난 20년 동안 길고 먼 여행을 하느라고 장서를 다섯 번이나 매각처분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20여년 동안 본인은 히브리서에 대한 30내지 40권의 주석서를 읽었다(그 주석서들을 거의 소장하고 있었다). 본인은 그 주석들의 요점들을 성경 속에 표해 놓았다가 이 서신을 강해하는 동안 도움을 받았다. 그 주석들 중 거의 모두가 매각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죤 오웬, 죤 길, 모세스 스튜아트, 앤드류 보나, 그리피스 토마스, 메소스 프리디암, 리다우트, 터커등에 의해서 쓰여진 주석서들 중에서 받았던 도움을 밝히는 일밖에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서론적인 요점들을 생각해 보자. 1. 수신자들 영어 성경에 보면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라고 되어 있어 수신자들을 히브리인들로 말하고 있다. 아마 이 책을 읽는 독자들 가운데에는, 성경의 다른 책들 머리에 쓰여 있는 제목이 신적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라서 내용과는 달리 성경적인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러한 제목들은 초기 필사자들에 의해서 붙여진 것들이다. 원본을 베끼는 과정에서 곧 사본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제목의 모든 흔적들이 오래 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이 제목들이 만족스럽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한 일은 거의 없겠지만 크게 잘못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대표적인 경우가 이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이라 할 수 있다. 그 제목은 “하나님의 사람 사도 요한의 계시”이다. 그러나 그 책 자체의 첫 문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되어 있다. 우리가 성경의 각 책제목을 일반적으로 취급하여 말한다면, 신적 영감으로 말미암아 거의 모든 서신들마다 첫 구절에 수신자들이 언급되어 있다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각 서신의 내용들이 가장 처음 그 서신을 받았던 그 지역 수신자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부연하여 말할 수도 있다. 믿은 지 오래지 아니한 그리스도인은 이점을 확고히 붙잡아 극단적이 세대주의적 가르침에 현혹되지 않아야 한다. 그 점은 중요하다. 오늘날 성도들 중 크게 깨달았다고 주장하면서 야고보서를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려는 사람들이 얼마간 존재하고 있다. 그 서신은 ‘흩어진 열두 지파’에게 보내진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식의 주장이다. 같은 주장으로 빌립보서와 골로새서는 그 빌립보나 골로새의 성도들에게만 보내진 것이니 우리는 볼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주장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사실은 주님께서 마가복음 13:37에서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이 전체 성경에 잘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주님은 거기서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성경이 우리에게 다 필요하다(딤후3:16.17), 모든 성경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울이 디도서 초두에서 디도 혼자만 그 편지를 받는 사람처럼 말한 다음(1:4) 서신의 끝에서는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3;15)라고 분명히 말했음을 유의 깊게 주목하라! 우리는 히브리서 초두에서 사람이 붙여 놓은 제목은 무시하지만, 그 서신의 처음 몇 구절들에서 하나님께서 그 편지를 처음 받도록 지정하신 수신자가 ‘없다’는 것을 보고 대번에 충격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신의 첫 문장은 능히 우리로 하여금 이 서신을 처음 받았던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알아내게’ 한다. 히브리서 1:1,2를 보라.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통해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도 역시 그들이다. 3:1에서 우리는 원래 이 서신을 받았던 사람들이 작은 부류의 사람들임을 나타내는 말을 발견한다. 이 서신은 이스라엘 나라 전체에 보내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 중에서도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에게만”보내졌던 것이다. 베드로 시선들에서 이 점을 분명히 확증해 주고 있다. 베드로전서 지역적으로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주어졌다9헬라어로는 ‘에클레크 토이스 파레피데노이스 디아스포라스)’. 베드로후서(3;1참조) 역시 같은 수신자들에게 국한되어 전해졌었다. 베드로후서 3:15에서 사도 베드로는 특별하게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다”라고 언급한다. 그러므로 히브리서가 처음 누구에게 보내졌느냐는 데 대한 모든 의문은 사라진 셈이다. 히브리서 자체가, 수신자들이 누구인가를 밝혀줄 더욱 상세한 요점들을 내포하고 있다. 이 히브리서가 믿음을 가진 지 얼마 안 되는 성도들에게 쓰여지지 않았다는 것이 5:12로 명백해지고, 또한 이 서신이 격렬한 핍박을 받았던 성도들에게 보내졌다(행8:1참조)는 것이 10:32에서 명백해진다. 히브리서가 상당한 규모의 기독교 사회에 전해졌다는 것이 13;24로부터 명백해진다. 바로 13:24에 언급된 바를 기초하여 이 서신이 처음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전해졌고(행11:22), 그렇지 않으면 유대에 있는 교회들에게 전해졌는데(행9:31), 그 여러 사본들이 외국에 나가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송달되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따라서, 히브리서는 처음에 은혜로 말미암아 자기들의 구주 메시야를 믿었던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전해진 것이 분명하다. 2. 기록한 목적 한 마디로 히브리서는 유대의 신자들에게 기독교로 인해서 유대교가 폐해졌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믿음을 가졌던 첫 회심자들 중 상당수가 혈통상으로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유대교적인 선입관들 때문에 고통당해 왔다. 사도는 그의 초기 서신에서 이 점에 대해서 여러 번 언급했었다. 그리고 부당하고 때에 맞지 않게, 그리고 모세의 의식에 집착하는 태도에서 그들을 건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 문제를 온전하고 조직적으로 다룬 것은 히브리서뿐이다. 이 서신이 쓰여질 당시, 주 예수를 믿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하기란 상당히 어렵다. 과거 오랜 세기 동안 참되신 하나님을 아는 모든 지식을 가지지 못하여 우상을 섬겨왔던 이방인들과는 달리,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예배 처소를 두고 있었다. 천여 년 동안 자기 조상들이 숭상하던 것들을 ‘버리라’고 촉구 받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대단한 요구 사항이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 중에도 어릴 때부터 지켜 왔던 형식과 의식들을 그대로 전수시켰으면 하고 바란 자들이 있었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성전은 여전히 존재하고, 레위의 제사제도가 아직도 시행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와 유대교를 묶으려는 열심 있는 시도가 시행되기도 하였다. 사도행전 21:20은, 초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의식법에 열심인’ 사람들이 수천이나 되었다고 말해 준다. 사도행전 21:20이하의 여러 구절들은, 초기 유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의식법’에 대하여 열심을 부리는 자들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일의 새로운 경륜 아래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따로 없다는 것을 지각하는 대신, 외적인 차이들을 무시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모든 신자들은 이제 거룩한 공회 속에서 가장 긴밀한 영적 결속의 띠로 함께 매어져 살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메시야를 통해서 이방인들이 유대 교회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꿈꾸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외면적인 경륜이 세상 끝까지 바뀌지 않고 남아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의 혈통적인 선입관 이외에, 믿는 유대인들의 ‘잠정적 환경’이 갈수록 어렵게 되었다. 아니, 그 어려운 환경은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대한 신앙고백을 버리도록 시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도행전 8:1에서 언급된 핍박 다음에 일어난 일을, 탁월한 유대인 학자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아돌프 사피어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 다음에 또 다른 신자들에 대한 핍박이 일어났다. 특별히 사도 바울을 대적하여 그 어려운 핍박이 일어났던 것이다. 베드로는 63세쯤 죽었다. 사두개인들 편에 섰던 대제사장 아나니아 때에 그리스도를 믿는 히브리인들은 율법을 범하는 범법자라고 지목되어 핍박받았다.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돌에 맞아 죽었다. 산헤드린 공회가 이러한 극형을 자주 부과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형제들로 고통과 여러 힐책을 받게 할 수는 있었다. 그들이 믿는 자들의 물건을 압수하는 것은 아주 작은 일이었다. 그들은 믿는 자들을 거룩한 곳에서 추방했다. 이제까지 그들은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특권을 누려 왔다. 그들은 성소에서 드리는 예배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부정하고 배도한 사람들로 취급받게 되었다. 그들이 예수를 믿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함께 모이는 일을 하지 않는 한, 그들에겐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제단과 희생제사와 대제사장과 여호와의 집 등 모든 특권으로부터 추방당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들의 처참한 아픔을 상상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들이 메시야에게 찰싹 달라붙음으로써 메시야의 백성들로부터 심한 학대를 받아야 된다는 것은 실로 크고 복잡미묘한 시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영광된 소망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장소에서 추방되어야 했고, 하나님의 임재가 계시된 곳에서 쫓겨나야 했다. 그곳은 여러 상징들과 규례들로 자기 조상들의 기쁨과 힘을 주었던 곳이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언약의 자손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방 사람들보다 더 나쁘게 바깥뜰에도 서 있지 못하고 이스라엘 나라 밖으로 추방되었다. 이러한 일은 실로 지독하고 신비로운 시험이었다. 조상들에게 하나님의 맺으신 약속들을 고수하고 자기들의 나라가 메시야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부단하게 기도하며 소망을 키우는 것, 바로 그것이 그들의 믿음이 겪어내야 하는 가장 격렬한 시금석이었으니 말이다. 기독교가 유대교에 대해서 진실로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권위있고 명료하고 조직적으로 밝혀내는 일이야말로 매우 ‘긴박한’ 과제였다. 사단은 이 히브리 사람들을 설득하여 나사렛 예수를 믿는 것이 실수요 환각이요 죄라고 생각하게 할 절호의 기회를 놓칠리 없다. 육체를 따라 너희의 형제된 대다수의 사람들이 산헤드린 공회와 제사장직을 거의 장악하고 있는데, 너희가 옳다면 그들이 잘못된 것인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따르니까 하나님께서 너희를 ‘번성케’하던가? 그리고 너희의 외적인 환경이 하나님께서 정말 너희를 향해 얼마나 불쾌해 하시는지 분명히 나타내지 않는가? 더구나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그리스도가 재빨리 지상에 돌아오시기를 고대하였다. 그러나 30년이 지났지만 그리스도는 다시 오지 않았다! 그렇다. 그 히브리인들의 입장은 정말 난처하였다. 그들의 믿음을 강화시킬 것이 긴박하게 필요했다. 곧 그들의 총명을 밝혀 주고 구약에 비추어 기독교를 더욱 온전하게 설명할 필요가 절실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긴박성에 부응하여 인애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을 감동케 하사 이 편지를 써 그들에게 보내게 했던 것이다. 3. 테마 히브리서의 테마는, 유대교에 비하여 기독교가 지극히 탁월하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요약과 본질과 중심과 구심점과 빛과 생명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의 중심적인 테마를 발전시켜 나감에 있어서 성령께서 이 서신에서 사용하신 방식은, 그리스도가 전에 있었던 모든 이보다 말할 수 없이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자랑하던 여러 인물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거론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초자연적인 영광으로 데리고 간다. 그때 그 인물들은 그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 앞에서 무색하게 된다. 1:1-3에서는 그리스도가 선지자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맨 먼저 밝히고 있다. 둘째로, 1:4-2:18에서는 천사들보다 그리스도가 우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셋째로 3:1-19절까지는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넷째로 4:1-13에서 여호수아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다섯째로 5:14-7:18에서 아론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여섯째로 7:19-39에서는 전체 유대교의 의식(儀式)보다 우월(優越)하신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 유대의식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우월하시다는 것은 옛언약에 대하여 새 언약이 지극히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러써 논리(論理)가 전개된다. 일곱째, 구약(舊約) 성도 각(各) 개인보다 그리스도께서 우월하신 것을 11:1-12:3에서 밝히고 있다. 유대교가 그림자와 모형으로 밖에 갖지 못했던 것을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 안에서 그 실체를 갖게 된다. 만일 주께서 우리로 이 서신을 다 연구 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면-오, 주께서 우리를 위해 앞서 가소서-히브리서의 테마를 규정해 나가기 위해 많은 예화와 예증이 사용될 것이다. 그때마다 우리는 ‘더 낫다’는 비교급의 어휘가 굉장히 많이 쓰여짐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구약의 성도(聖徒)들이 유대교 안에서 누렸던 것보다 우리들이 기독교 안에서 누리는 것이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게 된다. 히브리서 1:4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낫다.는 언급이 7:19에서는 ‘더 나은 소망’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7:22에서 ‘더 좋은 언약의 중보’라는 말이 언급(言及)되고, 8:6에서는 ‘더 좋은 언약’, 9:23에서는 ‘더 좋은 제물’, 10:34에서는 ‘더 나은 산업’ 11:16절에서는 ‘더 나은 본향’, 11:35에서는 ‘더 좋은 부활’, 그리고 11:40에서는 ‘더 좋은 것’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그와 같이 역시 우리는 히브리서에 언급된 일고가지 ‘큰’ 것들을 주목할 것이다. 큰 구원(2:3), 큰 대제사장(4:14), 큰 장막(9:11), 큰 싸움(10:32), 큰 상(償)(10:35), 큰 (허다한) 증인들(12:1), 양의 큰 목자(牧者)(13:20). 다시 히브리인들이 포기해야만 되는 것과, 그들이 얻는 것과는 대조하여 생각하게 하는 일이 나타난다. ‘우리의 가진 바’ 라는 말이 얼마나 많이 나타나는지 주목하라. 곧 우리에겐 대제사장이 있으며(4:14; 8:1), 영혼의 닻(6:19), 더 낫고 영구한 산업(10:34), 제단(13:10)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이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뒤의 것은 잊어버리고 앞의 것을 향하여 좇아 나아가라는 권면을 얼마나 자주 받는지 주목할 수 있다. 이 서신 전체에 ‘앞을 바라보라’는 말이 뛰어나게 돋보인다. 1:6과 2:5에서 ‘장차 오는 세상(또는 거처)등이 언급되어 있다.6:5절에서는 ’내세‘가, 1:10에서는 ’새언약‘이 언급되어있으며, 그 언약은 이스라엘 집과 맺어진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9:11과 10:1에서 장차 올 ’좋은 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고, 9:28에서는 나타낸바 된 구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10:38에서는 오시는 구속주에 대하여, 11:14과 13:14에서는 앞으로 나타날 도성(본향)이 언급되어 있다. 이 서신 전체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 유대교의 중심은 그 성전과 제사장이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히브리서를 통하여, 지금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 유대교의 성전과 제사제도가 그림자만 보여주고 있는 것의 실체를 어떻게 소유하고 있는가를 보여주신 것이다. 다음의 구절들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될 것이다. 2:17; 3:1; 1:14,15; 5:6,10; 7:26; 8:1; 9:11; 10:21. “사도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점을 상기시킨다. 그들의 성전과 제사제도와 제단과 제물을 박탈당했지만, 우리는 참되고 진실된 성전과 큰대제사장과 참된 제단과 단 하나의 제사와 모든 제물들과 가장 거룩하신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갈 참된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생각하라고 말하고 있다”(A Saphir) 4.히브리서의 내용 분해 브라운(J. Brown) 박사가 히브리서의 내용을 어찌나 간명하게 주해해 놓았던지 그의 것을 인용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히브리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교리적인 부분이요, 둘째는 실천적인 부분이다. 물론 그 부분이 그렇게 명확하지는 않지만(저자도 거의 그와 방불하게 본다), 교리적인 부분에서 어떤 것을 명령하거나 어떤 의무를 행하라고 권면하는 적이 없다. 도 실천적인 부분에서 교리를 진술하는 적이 없다. 교리적인 부분이 훨씬 더 많아서 서신 추도에서부터 10:18까지 계속된다. 기독교가 유대교보다 월등하다는 것이 사도(使徒)가 가르치는 위대한 교리(敎理)이다. 그러한 종교를 부단히 고백하는 것은 그 종교가 요구하는 큰 의무이다.” 5.히브리서의 특징 여러 가지 면에서 히브리서는 신약의 다른 서신서들과 다르다. 히브리서는 그 저자가 밝혀져 있지 않다. 그리고 이서신서에는 문안인사도 없고, 이 서신을 어떤 사람들에게 보내는 것인지조차 언급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적극적인 측면에서 구약의 모형적인 교훈들이 다른 서신들에서보다 이 서신에서 더욱 상세하게 강해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이 서신에서만 온전하게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배도(背道)에 대한 경고(警告)들이 신약의 다른 어떤 책에서보다 자주 나타나고, 더 숙연하다. 그리고 신약의 다른 책에서보다 ‘견고하여 흔들리지 말고 믿음을 지키라’는 요청을 더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이 서신을 받았던 사람들의 육체적(肉體的), 민족적(民族的) 혈통(血統)을 따라서, 또 그 당시 그들이 처해 있던 환경(環境)을 기초(基礎)로 생각될 수 있다. 우리가 이러한 몇 가지 사실들을 의중에 계속 간직하지 않는 한, 이 서신 중 적지 아니한 부분이 이해되지 못한 채 남게 될 것이 틀림없다. 사용된 언어나 모형어, 또는 인용된 말들이 유대교가 기초로 삼고 있는 구약 성경(聖經)의 빛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우리가 언제나 구약을 근거로 생각하는 방식을 취하지 아니하면, ‘죄를 정결케 한다’(1:3),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4:9)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6:1,2)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10:22),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13:10)등의 표현들은 이해되지 못한 채 남게 될 것이다. |
출처 : 개혁하는 교회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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