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문 소논문

[스크랩] 바울의 성

하나님아들 2013. 7. 30. 22:54
바울의 성(性) 이해

최세창 교수
오늘의 한국 사회에도 성 문란은 아주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향락 사업의 번창과 성을 상품화할 목적인 인신매매와 마약 남용 등은 다 성적 타락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다. 따로 성을 사고 팔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언제 어디서나 성을 사고 팔 수 있는 현실이 되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 사는 기독교인들이 이 성적으로 병든 사회에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성적 타락으로 특정된 세계 속에서 복음을 들고 일했던 사도바울에게서 그 문제에 대한 좋은 해결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동시대의 성적 타락에 대한 배경을 나타난 학자들의 견해

초대 교회 당시의 성적 타락에 대해 바클레이가 잘 설명하고 있다. "고대 세계는 성적 다는 것은 사실이다. 남자가 첩을 두는 것은 당연한 일로 간주되었다. 고린도와 같은 곳에는 신전에 수백 명씩이나 되는 여사제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소위 거룩한 매춘부였으며, 그들의 수입은 신전의 유지비로 사용되었다.
헬라인들에 의하면, 아덴에 공창 제도를 제일 처음으로 도입하고, 창녀굴을 짓게 한 사람은 솔론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사업의 소득으로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위하여 새 신전을 짓게 하였다. 매춘 행위에서 얻어진 수입으로 신전을 짓는 것이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헬라인들의 견해가, 바로 음행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어떠했던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순결이란 기독교가 이 세계에 끌어들인 하나의 새로운 미덕이었다고 할 수 있다"(엡 5:3의 주석).
데모스테네스(Demostenes)는 "당시의 남자들의 성적 타락에 대해, 창기는 향락을 위하여 두고, 정부는 나날의 육체의 욕구를 위하여 두고, 아내는 자녀를 얻기 위해, 또 충실한 가정주부로서 두었다."라고 설명하였다.
네일은 "많은 이교도들로 구성된 기독교 공동체에 있어서, 개종자들 성과 결혼에 대한 기독교적 태도를 수용한다는 것은 복음 윤리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대체로 이교도들은, 본능적인 수준에 근거한 성행위란 자연스럽고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성례적 음행과 남근 숭배는 많은 예배 의식들의
필수적 요소를 형성하였다. 로마서 1:24 이하의 바울의 기술은
과장이 아니다. 그러한 이교 도시의 환경에서, 엄격한 일부일
처주의 또는 금욕의 환경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기독교인의 직무, 즉 자기 탐닉의
반대인 자기 통제 곧 결혼에 대한 신실성과 순결에 대해 명백
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최세창, 데살로
니가전서, pp. 124 -125).
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당시의 성 문란은 당시의 종
교 및 도덕 의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한 성 문란
은 남녀 사이에서만 발생한 것이 아니라, 동성간에서도 행해
졌다. 이점에 대해 바울은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롬 1:26)라고 하였다.
여인들이 결혼하여 남편과 성생활을 영위하여 자녀를 낳는
것이 자연스런 일인데, 그에 반하여 같은 여인과 더불어 성적
쾌락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동성애는 하나님께서 정하
신 자연 법칙을 거스르는 것이다.
남자들의 동성애에 대해, 바울은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
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롬 1:27)고 하였고, 또
"남색하는 자"(딤전 1:10)라는 말을 쓰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악덕은 천박한 부류의 인간들에게만 국한된 것
이 아니라, 의심할 것 없이 모든 계급에 퍼져 있었다. 키케로
(Cicero : Tuscul. Ques. iv. 34)는 '디케아르쿠스(Dicearchus)
가 그 짓에 대해 플라톤(Plato : 427? - 347? B. C.)을 비난했는
데, 아마도 정당한 것이리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말하기를
(Tuscul. Q. iv. 33), 그 행위는 헬라인들 사이에 흔했으며, 그
들의 시인들과 위인들 그리고 심지어 박식가들과 철학자들까
지도 행하며 자랑하였다고 하였다....... 크세노폰(Xenophon :
434? - 355? B. C.)은 "소년들의 비자연적인 사랑이 매우 흔했
으며, 그 일이 많은 지역에서 공법으로 제정되었다."라고 말하
였다..... 디오게네스 라엘티우스(Diogenes Laertius)는 "이 악
덕은 스토아 학파의 시조인 제노(Zeno : 336? - 264? B. C.)에
의해 행해졌다."라고 말하였다....... 세네카(Seneca : 4 B. C. -
65 A. D.)는 자기 시대에 동성애가 로마에서 공공연하게 실행
됐는데, 전혀 수치심을 갖지 않았다고 말했다.
바클레이는 초기 15대까지의 로마 황제 가운데 14명이 동성
연애자들이었다}(최세창, 로마서, p. 82). 한 마디로 말해, 고대
세계는 간음의 분위기로 꽉 차 있었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앞에 언급한 모든 형태의 성 문란을 가
리켜, 바울은 바로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숭배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라고 하는 것이다(롬 1:24, 26). 그러한
성 문란은 바울 당시 뿐 아니라, 훨씬 더 오랜 시절에도 있었
던 죄악으로 종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밥(O. J. Baab)은 "고대의 팔레스틴과 성서 시대의 그 부근
지역에 예배 의식의 관리였던 매춘부들은 중요한 기능을 발휘
하였다. 이러한 종교는 자연의 과정들이 남신들과 여신들 사
이의 관계에 의해 주관되고 있다는 신앙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들 자신의 성행위에 대한 이해를 투사함으로써, 이러한 우
상 숭배자들은 모방적인 마법사용을 통해 신전의 광신적 숭배
자들과 성 관계를 맺었는데, 이는 그러한 행위가 그 남신들과
여신들로 하여금 그와 같이 성 관계를 맺도록 부추기는 것이
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직 신들 사이의 성행위에 의해서만,
인간 자신의 가족과 가축들 그리고 논밭의 증산을 위한 욕망
이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최세창, 로마서, p. 78).
크란필드는 "동성애란 헬라와 로마만의 독점품은 아니었다.
셈족 세계에서도 흔했으며, 유대인들에게 그것은 추행이었다
(창 19:1-28, 레 18:22, 20:13, 신 23:17, 왕상 14:24, 왕하 23:7,
사 1:9, 3:9)}라고 설명하고 있다(최세창, 로마서, p. 82).
아무튼, 이성 . 동성 사이의 성 문란은 영 . 정신 . 육체의 파
멸을 초래하게 되며, 따라서 가정과 사회의 붕괴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성적 타락은 하나님께서 친히 빚은 영적
존재인 인간을 단순히 성적 쾌락의 도구로 이해함으로써, 말
할 수 없는 인간 경시 풍조를 만연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사실상, 당시의 사회에서는 인신매매와 경기장에서 합법적인
살인 그리고 맹수와 인간의 싸움등을 모두가 즐기고 있었다.
특히, 심각한 것은 사회의 기본 구조인 가정의 붕괴였다.
이 점에 대해 바클레이는 {로마 공화국의 최초의 500년간에
는 한 건의 이혼도 없었다. 기록에 남아 있는 최초의 이혼은
주전 234년에 있었던 스푸리우르 카빌리우스 루가의 사건이었
다. 그러나 바울 당시의 로마의 가정 생활은 파괴되어 있었다.
세네카는 "여인들은 이혼하기 위해 결혼하고, 결혼하기 위해
이혼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롬은 "로마에는 스물 세 번째
의 남편과 결혼했는데, 그 여자는 그 남편에 대해 스물 한 번
째의 아내이었다."고 하였다}(엡 5:31-33의 주석).
이러한 성적 타락의 세계를 위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
해야 할 교회에게 준 바울의 교훈을 통해, 그러한 죄악에 대
한 바울의 비판적 견해를 찾아볼 수 있다.
첫째, 바울은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
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니"(롬 1:23, 24)라고 하여, 음
행을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정
적 원인은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기 때문이라
고 하였다. 또한, 그는 동성애에 대해서도 똑같이 이해하고 있
다(롬 1:26-27).
둘째, 바울은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니
라 곧 음란은 버리고"(살전 4:3)라고 하여, 성적 타락을 인간
이 거룩해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정면 거역으로
이해하고 있다. 사실상 거룩함과 관련하여, 당시의 가장 큰 문
제는 성적인 타락이었다.
셋째, 바울은 성령과 대립되는 육체, 즉 죄 된 인간성의 소
행들을 열거함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
색을 제시하고 있다. 이 세 가지 죄는 다 성적 죄라 할 수 있
다. 그는 이 성적 죄를 포함하여 모든 육체의 일들을 하는 자
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하였다(갈
5:19, 21).
넷째,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
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3:5)고 하여, 죽여야 할 심각한
죄 된 욕구 속에 음란을 포함시키고 있다. 그는 또 로마 교회
에 보낸 편지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
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8:13)라고 하였다.
우리는 성령을 좇음으로써만 몸 곧 죄 된 욕구를 지닌 자아의
행실을 죽일 수 있다.
다섯째,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아비의 여자를 취한 교인에
대해 통한히 여기지도 않고, 물리치지도 않은 사실을 알고 몹
시 질책하였다(고전 5:1-2).
바울의 의도는, 비록 사랑의 주를 머리로 하는 교회라 할지
라도 그러한 음행을 저지른 자는 형제로 여기지 말고 출교시
켜야 한다는 것이다.
여섯째, 바울은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밖
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
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서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
5:18-19)고 하여, 음행을 특별한 죄로 규정하고 있다. 즉, 음행
이란 다른 죄들과는 달리, 성령의 전인 몸 자체에 죄를 범하
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일곱째,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5:3)고 하여, 음행을 성도들이 마
땅히 말해서는 안 될 것 중 하나로 제시하고 있다.
위와 같은 바울의 견해는, 움행이란 아담과 이브 이래 인간
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 및 창조 방편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상적 배경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가 고찰해 온 바울의 성 문란에 대한 비판적 견해는 그
의 성 이해에 근거한 것이다.

Ⅲ. 바울의 성 이해

바울에게 있어서 성이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오묘하신 솜
씨의 산물이며, 또한 인간을 인간답게 그리고 즐겁게 살아가
게 하시는 섭리의 방편이었다. 이 점은 바울이 익히 알고 있
던 창세기 2-3장에 근거한 이해하였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서 아담에게 또 하나의 남자가 아니라 여자를 만들어 주셨다
는 것이다. 즉, 남성과 남성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이 조화를
이루며 살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만남의 중대성은
에덴을 소유하고도 만족하지 못했던 아담이 이브, 즉 여성을
만났을 때 말로 다 할 수 없이 기뻐했다는 데 있는 것이다.
이 남녀의 관계는 상하나 종속 관계가 아니라 서로 도움으로
써 조화를 이루는 상호 동등의 관계인 것이다(갈 3:28, 엡
5:31).
문제가 될 수 있는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는
말씀은, 그가 도움이 필요한 존재임을 전제하는 것이므로 문
제가 될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한 남성과 여러 여성 또는 한 여성과 여러 남성
또는 여러 남성과 여러 여성으로 짝짓지 않으시고, 한 남성과
한 여성을 짝지어 주신 것을 미루어 보면, 성이란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결혼을 통해 이뤄져야 할 즐거운 육체적 조화
임을 알 수 있다(창 2:24, 엡 5:31, 딤 3:2, 12).
여기서 우리는 일부일처제의 성서적 근거를 볼 수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성이란 하나님의 생명 창조의 질서요 방편
이다. 우리는 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의 역사에 동
참하는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인간과 만물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된 선언인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성이란 하나님
의 뜻대로 유용하게 써야 할 복이라 할 수 있다.
끝으로, 하나님께서 남성과 남성 또는 여성과 여성이 아니
라, 한 남성과 한 여성을 짝지어 주셨다고 한 말씀은 동성애
를 부정하는 성서적 근거가 되는 것이다. 바울은 동성애를 가
리켜 역리로 쓰는 것이라고 정죄하고 있다(롬 1:26).

Ⅳ. 맺는 말

현대의 아주 심각한 병폐 중 하나는 분명히 성 문란과 그로
인한 영 . 정신 . 육체의 파멸 그리고 가정 및 사회의 붕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우리 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이
때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바울과 초대 교회가 견지했던 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정립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
해야만 할 것이다. 단순한 이론적 정립에 그칠 것이 아니라,
부부가 성을 하나님께서 생명 창조의 방편과 남녀의 신비로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주신 복으로 받아들여
누림으로써 세상의 모본이 되어야 한다.
!!! 정말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들!!!

??? 정말 예수 오시기 이전의 구원 문제가 율법 행위(유대인)
나 양심 행위(이방인)에 의해 결정되는 겁니까? 그렇다면 메시
야가 오실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또, 한 구원의 종교에 서로
상반되는 구원의 교리가 양립할 수 있는 겁니까? 또, 니느웨
성의 구원은?
??? 원죄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는 교만이라고 합니다. 그 결정
적인 근거로 "하나님처럼 되리라"라고 한 뱀(사단)의 유혹에
넘어갔다는 점을 드는데, 실은 정확한 이해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의지 또는
욕망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만물을
다스려야 할 인간이 지배해야 할 뱀(사단)의 "하나님처럼 되리
라"라고 한 유혹의 소리에 대한 복종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리
면 원죄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교만 동시에 자기 비하'입니다.
???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막 1
0:14)이라고 하신 말씀을, 어린아이의 단순함, 순수함, 겸손함
등을 염두에 두신 것이라고들 해석하는데, 그렇다면 인격 수양
에 의한 구원(자기 의, 또는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또, 원죄는 아이에게는 예외라는 모순에 빠지는 것
이 아닙니까?
??? 영생 문제로 찾아온 부자 청년에게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막 10:21)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자선 행위 혹은 사랑의 실천을 의미하신 것으로들 해석하는데,
그렇다면 행위 구원이 되는 것 아닙니까? 성경의 대진리요 근
본 진리는 믿음에 의한 구원인데….
???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예수의 메시야성에 대한 정확한 고
백이라고들 하는데, 그렇다면 예수께서 고난당하실 것을 예고
하셨을 때 "그리 마옵소서! 하고 펄쩍 뛰면서 만류한 것은 어
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또, 예수께서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책하신 것은 어떻게 설명해
야 합니까?
???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
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딤
후2:20)의 나무 그릇이나 질그릇은 귀하지는 않지만, 더 많이
사용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용되는
그릇이 천하다는 결론이 되지 않습니까? 또 이어지는 문장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
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
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라고 하신 말씀이 정말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을 없애는 것입니까? 그 정확한 해석
은?
???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벧
전3:19)는 난해구 중의 난해구입니다. 그 정확한 해석은?
??? 기독교의 부활 사상은 영혼불멸? 육체의 부활? 신령한 몸
의 부활?
??? 현대를 가리켜 말세지말이라고들 합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종말론적 신앙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 등등 많습니다.

※※ 위에 거론한 문제들에 대한 설명이 아래 소개하는 주석
서들 속에 있습니다.

「신약성경 주석 시리즈」

저자:최 세 창
(1948년 인천 광역시 출생/감리교신학대학·동대학원 졸업/
풍성교회
담임/협성신대 강사 역임/인천여신 교수/☎02 426-30
51)
총 12권 4660쪽(바울의 13서신<고전 2판, 514쪽;롬 2판, 4
90쪽;딤전·후·딛 3판, 441쪽;고후 438쪽;엡 3판, 282쪽,
골·몬 3판, 282쪽;갈 5판 278쪽;살전·후 2판, 276쪽;빌 3
판, 250쪽>, 마가복음, 760쪽;야고보서 4판, 284쪽;베드로전
·후서 365쪽) // 글벗사간 ☎ 02 481-5763

♣집필 기간:약 18년(목회와 강의 겸)
♣신구약 통독:153회(주석된 성경들:약200회)
♣정독한 주석서들:총 722권(진보와 보수:롬 59권, 고전 44
권, 고후 46권, 딤전 40권, 딤후 40권, 딛 40권, 골 36권, 몬
34권, 갈 34권, 살전 40권, 살후 40권, 엡 42권, 빌 43권, 막
43권, 약 19권, 벧전 61권, 벧후 61권)
♣정독한 바울 신학서:22권
♣참고한 문헌들:연 1000여 권

◆월간 목회:여러 주석서들을 보지 않아도 수많은 주석가들
의 주장과 비평에 접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 또, 사본 비평,
원어 해설, 문법적·문학적 해석, 배경 연구, 역사적·신학적·
영적 해석을 거쳐 규명된 말씀의 속뜻을 오늘의 상황에 잘 적
용시켰으므로 손쉽게 (강해나 설교로) 이용할 수 있는 주석이
다.
◆교회연합신보:깊은 영적 이해를 체계적으로 기술한 위 주
석서들은, 처음으로 수십여 주석서들을 비교 분석한 것이다.
◆홍현설 박사(감신대 명예 학장)의 서평 중:놀랍게도 신구약
성경을 150회 이상 읽은 저자는, 성서의 복음의 내용을 파악하
여 될 수 있는대로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공정한 입장을 취했
다. 책의 특징은 책 날개에 써 있는 그대로인데, 그 외에도 본
주석서는 교인들의 신앙 성장을 위한 깊은 관심이 내포되었다
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한마디로, 올바르고 건전한 성서
연구에 대단히 귀중한 역할을 감당한 탁월한 주석서이다.

※일부 내용이 교계 신문이나 잡지 등에 '특집 논문'이나 '성경
연구 시리즈', 또는 '중요 성구 및 난해구 해설'로 실렸고, 또
실리고 있으며, 약 10여 신학교와 목회자 교육 연구소 및 교회
들의 연속 성경 강해 교재로 사용되고 있을 정도로 초교파적
으로 인정받고 있는 위 주석서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사본 비평, 원어 해설, 문법적·문학적, 해석, 배경 연구, 역
사적·신학적·영적 해석을 거쳐 규명된 속뜻을 현실에 잘 적
용시켰으므로 그대로 강해나 설교로 활용할 수 있다. .
⊙유수한 주석가들의 주장과 비평에 접할 수 있고, 취해야 할
입장을 정립할 수 있다.
⊙세계적인 주석서들의 특징과 장점을 고루 갖추고 있다.
⊙성서는 성서로 하여금 해석하도록 하였다.
⊙위 주석서들의 기저를 이루는 신학은 복음주의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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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 천 사

Ⅰ. 김 봉 록 감독(정동제일교회 담임 목사)

최세창 목사께서 목회를 하고, 신학도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유명한 석학들의 주석서들을 정독하며 인용하여 대조 연구한
신약주석시리즈는 목회자들은 물론, 평신도들에게도 대단한 호
평을 받고 있다.
이 주석서들은 깊이가 있고, 이해하기 쉬울 뿐 아니라 현실
에 적용하여 집필하였기 때문에, 교역자들이 본문에 충실한 강
해 설교를 준비하거나 제목 설교를 준비하는 데 꼭 필요하다
고 생각된다.
또한 교회에서 성경 공부를 하는 데 교과서로 사용해도 좋
을 만큼 치밀하게 분석하여 저술하였기 때문에 교역자는 물론,
평신도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끝으로, 최세창 목사의 주석서들은 신앙과 기도와 학구적인
노력에 의해 집필 출판된 것이므로, 이 주석서들을 참고하는
분들에게 학적·영적인 면에서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Ⅱ. 김 철 손 목사(감신대 명예 교수:신약학)

최 목사는 학생 때부터 공부에만 열중하여 별로 사람들 앞
에 나서지 않는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고 있다.
그는 특히 신약성서 주석에 관심이 깊어 오랜 연구 끝에 드디
어 1979년에 신약주석 연구 시리즈 제1권 「야고보서」주석서
를 출판하게 되었다. 책을 하나 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
인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런데 최 목사는 제1권에 뒤이어 계속해서 더 많은 참고서를
구비하여 보다 폭넓고 깊이 있는 신약주석서를 거의 매해 한
권씩 저술하는 정열을 보였다.
지금까지 나온 주석서만도 모두 11권에 이르는데 그 가운데
는 바울 서신 13권이 다 포함되어 있다. 그 밖에 야고보서와
마가복음이 있다. 최목사가 처음에 의도하고 계획하고 추진한
「신약 주석 시리즈」는 그의 손에서 차질 없이 완수될 것을
확신한다.
「고린도전·후서」(1994년)는 가장 최근에 나온 주석서인데,
새로운 체제인 대형판(국판)으로 출판되었다. 1988년 전까지는
소형(4.6판)으로 나왔으나 1988년「로마서」부터 대형(국판)으
로 바뀌었는데, 이는 저자가 연구에 깊이를 더해 아주 정밀하
게 본문을 분석하고 다각적으로 해석하여 신학적 이론과 비판
을 가했기 때문에 이렇게 방대한 문서가 되었다고 하겠다.
원래 「고린도전·후서」는 바울 서신 중에 가장 많은 분량
의 서신이다. 분량이 많은 만큼 내용도 복잡하고 다양하며 다
루어진 문제도 많다. 특히, 고린도전서는 당시 고린도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 바울의 직접
적인 지시와 명령이 많이 있는 훈계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는 바울 자신이 올바른 신앙 태도를 보여 주는 자
서전과 같은 서신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의 집필 방법은 거의 동일하다고 하겠으나 초기 저작에
비해서 근래에 출판된 것이 훨씬 더 숙달되었으며 내용도 충
실하다. 이 두 책의 체제는 비슷하나 전서와 후서의 성격의 차
이와 통일성에 대해서 후자 서문에 잘 밝혀 주고 있다. 그리고
본문의 어구 해설에 있어서 저자는 국내외의 권위 있는 학자
들의 해석을 종합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며 나중에 자
신의 신앙적, 성서적, 신학적 결단으로 결론을 내려준 데 대해
서 매우 좋게 평가하고 싶다.
이와 같이 방대하고 내용이 충실하고 학구적으로나 신앙적
으로 건전한 주석서가 나오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또 자
랑스럽게 생각한다. 교파를 초월하여 우리 한국 교계에 이 주
석서들을 조금도 서슴없이 추천하는 바이다.

Ⅲ. 설교 및 성경 공부를 위한 주석

염 필 형 박사(감신대 교수:실천 신학)

성경 공부란 본문이 지닌 역사적, 문화적 배경이 무엇인가를
살피고, 하나의 사건의 발생과 흐름이 무엇인가를 찾는 일이다.
그리고 그 사건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맥락에서 성경 저자는 이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즉 저자의 신학적 풀이가 무엇인가를
봐야 한다. 그러한 설명이 어떠한 표현을 빌어서 설명되고 있는
가 하는 문학적 흐름을 조사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그 본문이
의미하는 바가 오늘 현대인들에게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찾아야
한다.
여기에 주의해야 할 부분은, 메시지 형성에 있어서 현재 그
것을 듣는 이들에 대한 관심이다. 그들의 요청, 아픔, 고민 등
들어야 할 것들에 대해 말하는 사람을 바로 알아야 바른 메시
지가 바로 전달될 수 있다. 이것이 성경 공부요 설교다.
그런데 성경 공부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으니 곧
좋은 성경 공부를 위한 안내서이다. 다른 말로 하면, 주석서이
다. 바르고 심도 있게 연구된 성경 공부의 안내서가 있어야 바
른 의미 포착이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감리교신학대학과 대학
원을 마치고, 일선 목회자로서 성공적 목양의 길에 있는 최세
창 목사의 '신약 주석 연구 시리즈'는 높이 평가하고 권장할 만
한 책이다. 좋은 설교를 위한 지침서로서, 교회의 성경 공부를
위한 안내서로서 본 주석 시리즈는 충분한 가치와 의미를 지
닌다고 믿는다.
본서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을 사랑하고, 그것을 증거하는 일을 사명으로 하
는 하나님의 종이 참 구도자의 모습으로 진지하게 연구하고
종합하고 새로운 것을 제시해 보려는 참신한 노력이 결집된
책이다.
둘째, 설교와 성경 공부를 위해서 제반 주제, 즉 본문 연구
는 물론, 그 글의 대상에 대한 연구, 어휘, 역사적 배경 등을
소상히 설명해 주고 있다.
셋째, 저자의 목회자로서의 경험과 교인들의 요청을 염두에
두고서 실제로 가르치고 설교하고 고민하면서 모아진 자료가
이 주석 집필 작업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기에 이 책은 목회자
나 설교자들에게 직접 이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현실감 있는
책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넷째, 이 책은 주석 그 자체를 성경 공부는 물론, 설교에 직
접 응용하고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섯째, 현재 한국에 유행하는 인기 있는 주석서들이 외국
것의 번역판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본서는 한국의 한 신학
도의 자기 고백이요, 한국적 노력이라는 데 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자신도 이야기하듯이, 보수와 진보를 망라한 수십 여
권의 주석서들을 기초로 집필한 관계로 어느 특정한, 혹은 자
기 나름대로의 명쾌한 신학 노선이 표명되어 있는 책은 아니
다. 또, 많은 이야기들을 작은 책에 소개하고 정리하려는 노력
에서 부분적으로 저자 자신이 무리와 한계를 경험한 흔적을
찾아볼 수도 있다. 이 책은 아카데믹한 주석 연구의 기능도 가
능하고, 또 설교자와 교회의 성경 공부를 위해서도 적절한 책
이다. 그러기에 그 신학적 성향은 오늘 현재 목회에 임하는 이
들에게 맞는 특성이 있다.
이 책은 번역물이 아닌 한국 감리교회의 중견 목회자가, 그
의 경험과 기도 위에서 소화된 성서를 우리말로 진술하였다는
점에서 이해하기도 쉽고, 또 자랑스러운 책이라 말하고 쉽다.
## 연락처:(02) 426-3051, 481-576(컴퓨터선교회원들에게
는 20% 할인!)

최세창 '주석설교집' 시리즈

저자 최세창 목사(풍성교회, 02 426-3051)
저서:바울의 13서신 주석서들 외 다수
'임박한 종말 때의 처신', '십자가의 도', '복음 선교의 삶', '신
앙인의 불신앙', '원죄'(글벗사 간. 02 426-3051, 481-5763)
위의 주석설교집들은, 약 20년에 걸쳐 목회와 강의 그리고
때로 부흥집회를 겸해 오면서, 각 성경마다 진보와 보수를 망
라하여 수십 여 주석서들을 비교 분석 종합한 주석서들을 출
간해 온 저자가,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와 철저한 주석
작업 그리고 현실을 파악하여 작성한 후에 외친 낮 설교들을
일년 치씩 묶은 설교집들입니다.
매 설교마다 성경 본문에 대한 사본 비평, 원어 해설, 문법
적.문학적 해석, 배경 연구, 역사적.신학적. 영적 해석을 거쳐
규명한 속뜻을 현실에 잘 적용시킨 설교들입니다. 따라서, 이
설교들은 우리가 알고 있던 기존의 해석들에 대한 오류를 지
적해 줄 뿐만 아니라, 올바른 해석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또, 바울 신학을 전공한 저자의 복음주의 신학이 모든 설교
의 바탕을 이루고 있으므로, 설교마다 읽는 이들로 하여금 신
선하고도 깊은 말씀 이해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새삼 일
깨워 주리라 믿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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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결혼관

목 차

안완구목사(영흥중앙교회)

Ⅰ. 들어가는 말
Ⅱ. 성경에 드러난 결혼
1. 구약에서의 결혼
2. 신약에서의 결혼
Ⅲ. 기독교인과 결혼
1. 결혼의 목표
2. 결혼의 원칙
3. 배우자 선택기준
Ⅳ. 나오는 말

Ⅰ. 들어가는 말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아닌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게 되어 있다. 혼자서는 못 산다. 사람은 더불어 살게 하기 위한 방안 중의 하나로 바로 결혼을 선택한다. 사회학에서는 결혼이란 가족을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결합관계로써 한 쌍의 남녀가 비교적 영속하는 성적관계를 맺고 동침관계를 갖도록 사회적인 인정을 받은 약속으로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하여 한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여 가정을 꾸밀때 올리는 결혼의식은 인륜지대사로 예로부터 엄숙하게 치루어 왔다.

그러므로 결혼은 성인이 된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사회의 최소 단위인 가정을 창설하는 것이며 자손을 번성하게 하는 출발점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현대 산업사회의 성향과 과학기술의 발달과 그 영향에 따른 가치관에 의해 이제까지 내려온 전통적인 결혼에 대한 관념은 이제 도전을 받게 되었다.

산업화 현상은 직업의 전문화와 더불어 핵가족화를 가져와 부부 사이에 자주성과 자유의식의 폭을 넓혀 주고, 배우자 이 외의 이성과 접촉도 많아지게 하여 이혼의 가능성도 높여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통계수치로도 증명이 되고 있다. 70년대말 연간 3만 쌍이던 이혼 건수가 81년에 4만, 84년에 5만, 85년 6만, 92년 7만, 93년에는 거의 8만쌍으로 늘어났다. 통계청의 발표에 의하면 일곱쌍의 한 쌍꼴로 이혼률이 늘어났다. 심각한 것은 합의 이혼이 꾸준히 늘고 있다는 점과 소위 신세대와 모래시계 세대로 분류되는 20,30,대층의 이혼이 이혼율의 70%을 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혼에 대한 남녀의 반응을 볼때 여자가 남자보다 이혼에 대해 훨씬 개방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공보처가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코리아 리서치에 의뢰, 성인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가족관계 의식조사에 따르면 여자는 응답자의 48.3%가 「이혼할수도 있다」고 응답했다. 「절대 이혼해서는 안된다」는 여자는 49.3%였다. 반면에 남자는 32.7%가 「이혼할 수도 있다」고 했고 63.0%는 「절대 이혼해서는 안된다」 는 태도를 보였다. 연령별로는 젊을수록 이혼에 대해 긍정적 이었다. 「이혼할수도 있다」는 응답자가 20대는 56%, 30대는 45.7%였으나 40대 이후는 20%안 팎이었다. 그러나 남녀 전체로 보면 「이혼불가」가 55.6%로 「이혼가능」의 41.2% 보다 많았다. 결국 높은 이혼률은 심각한 사회문제화 되고 있는 것이다

이혼문제 뿐만이 아니다. 과학기술과 매스미디어의 발달, 그리고 의학의 발달로 인한 임신배제, 낙태시술 등을 쉽게할 수 있어 성개방의 풍조에 편승한 혼전 성관계의 증가도 전통적 결혼윤리체계를 위협하고 있다.

대학전문주간지인 한국대학생신문이 전국의 대학생 1천2백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대학생 사회의식 및 생활실태조사」결과 대학생 4명가운데 3명이 혼전성관계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혼전성관계에 대한 질문에 75%가 가능하다고 응답한 반면 「절대 안된다」는 대답은 15%에 불과했다.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응답자들을 유형별로 보면 「사랑한다면 가능하다」와「 결혼을 약속했으면 가능하다」는 응답이 각각47.1%와 15.8를 차지 했고,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람도 12.1%에 이르렀다.

또 「결혼후 배우자의 성경험을 알았을때 이혼하겠는가」라는 질문에도 이혼을 하겠다는 사람은 9.7%에 불과한 반면 73.9%가 이혼하지 않겠다고 응답, 대학생들의 개방된 성의식을 나타냈다. 한편 성경험에 대한 조사에에서는 남학생33%와 여학생 2.9%가 성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성의식이 개방화 되면서 혼전성관계는 물론이고 이젠 이혼까지도 그리스도인을 위협하고 있다. 이처럼 성에 대한 개방과 이혼이 날로 증가되는 이유는 올바른 성윤리관이 확립되지 못한 결과 라고 할 수 있다. 올바른 성윤리관의 확립을 위해서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한 기독교인의 결혼관 확립이 요구 된다.

그러므로 본 글에서는 성경에 드러난 결혼을 살피고 나서, 기독교인의결혼관 형성을 위해 중요시 될 결혼의 목표와 원칙, 그리고 배우자 선택기준을 제시하고 결할 것이다.



Ⅱ. 성경에 드러난 결혼

1. 구약에서의 결혼

창2:18-25의 말씀을 살펴보면 결혼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직 채워지지 않은 내적갈망을 만족시킬 '돕는배필' 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돕는 배필은 '적합한 반려자', '응답하는 자'(one who answers)란 뜻 곧 성품과 상호 위로와 기쁨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짝' (companion)이란 의미이다.

또한 아담은 하나님께로 인도되는 여자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므로서 여자가 자신의 뼈와 살로 지음받은 존재임을 노래하며 곧 "여자"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 '여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솨'는 '남자'란 뜻의 '이쉬'에 파생된 말이다. 이는 어원적으로도 여자는 남자의 뼈와 살로 지음받은 사실을 시사해 준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란 말씀 속에서 결혼의 3대 원리를 찾아볼 수 있다.

① 육체적, 인격적으로 책임있는 존재로서 이제 상호 부모로부터 홀로 서는 '독립성'이다. 이는 혈연의 완전한 단절을 뜻하지 않는다. 오직 사랑과 성숙과 편의와 경제와 거주의 관점에서의 떨어짐을 가리킨다.

② 유기적 두 인격체가 상호 협력함으로 같은 뜻을 이루는 '연합성'이다. 이는 상호 이해와 신뢰와 인정과 인내와 헌신을 바탕으로 할 때 가능하다.

③ 구별된 두 존재가 성숙한 사랑과 이해로서 영육간의 하나되는 '일체성'이다. 이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만큼의 강한 결집력을 암시한다.



2. 신약에서의 결혼

1) 예수님의 결혼관

마19:3-12의 말씀에서 예수님의 결혼관을 볼 수 있다.

이혼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예수님의 답변은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에 근거하고 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은 여자에게 남자가 있어야함 같이 남자에게도 여자가 수단이 아니라 존재(being)로써 필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또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의 인용은 부부간의 독특한 연합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단순한 성적 연합 뿐만 아니라, 결코 나누어질 수 없는 전인격적인 연합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혼의 조건으로 단 한가지 경우 음행만을 제시하시므로 이혼을 금지 시켰다. 하나님의 창조의 법인 결혼의 신적인 결속은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깨뜨릴수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라 하겠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하여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하나로서 그 결혼제도는 깨뜨릴수 없다고 하셨다.



2) 바울의 결혼관

고전 7장에서 바울은 결혼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1절)라는 말은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있는 것, 즉 독신으로 있는 것이 좋다는 표현이다.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남편을 두라고"(2절)을 말하는데 이것은 독신 생활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은사나 소명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바울의 의도는 독신생활은 특별한 소명으로 주님과 다른 사람을 섬기고 봉사하는 사람들에게 유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독신으로 인한 성적욕망을 절제 할 수 없을 때는 결혼하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또한 이혼에 대한 새로운 지침을 말하고 있는데 기독교인들끼리 결혼한 사람의 이혼을 금하고 있으며 이러한 권면이 자신의 말로써가 아니라 주님의 명령임을 강조한다. 만일 이혼을 하더라도 재혼하지 말고 다시 재결합 하기를 말하고 있다. 비기독교인과의 결혼에 있어서는 비기독교인이 결혼생활의 계속됨을 원한다면 이혼하지 말고, 결혼생활의 계속됨을 원치않는다면 그 원인이 신앙에 있을 경우 신앙 포기보다는 이혼을 허락하도록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바울에게 있어서 다같이 기독교인인 경우는 이혼이 불가하며 비기독교인인 경우는 보다 융통성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바울은 처녀의 결혼문제에 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는 없으되"라고 말하면서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독신으로 지내기를 권하고 있는데, 이는 미혼자도 온전히 주님을 섬길 수 있으나 기혼자는 배우자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마음이 나뉘므로 독신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결혼하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할수만 있다면 결혼하지 말라는 것을 권면하고 있다.

과부의 경우도 처녀처럼 독신으로 지내기를 권하고 있다. 바울에게 결혼이라는 것은 인간의 생리적 요구에 필요한 제 이차적 가치 밖에 없으며 그 같은 본성을 억제하는 것은 강한 성격의 소유자로 인정하였다. 또한 독신자의 위치를 결혼한 사람보다 높이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의 결혼관을 다시 정리해 보자.

① 음행의 죄에 빠져 신앙의 순결을 잃지 않기 위해 결혼할것 (2절)

② 부부는 피차간의 의무를 다할것 (3-5절)

③ 가능한한 기독교인들끼리 결혼할것 (10-16절)

④ 가능한 이혼보다 화평을 꾀할것 (10-16절)

⑤ 불신자와 이미 결혼한 경우에 억지로 이혼하지 말것 (12-15절)

⑥ 불신 배우자가 회심하여 신앙을 갖도록 힘쓸 것 (14-16절)

⑦ 자녀들이 본을 받도록 신앙으로 결혼생활을 영위할 것 (14절)

⑧ 결혼으로 신앙적의무를 소홀히 하지 말것(36-38절)

⑨ 다른사람의 강요에 의해 결혼하지 말것 (36-38절)

⑩ 자신의 뜻대로 결혼할 것이나 주안에서 할것 (39절)



Ⅲ. 기독교인과 결혼

1. 결혼의 목표

결혼은 하나님께서 세운 창조질서로서 두 사람만의 사랑만 가지고서는 결혼생활이 유지될 수 없다. 그러므로 결혼은 서로간의 신뢰, 헌신, 상대방을 수용하는 마음, 인내, 나눔에서 성숙한 두 인격의 완전한 연합이어야 한다. 즉 영적연합, 정신적연합, 육체적 연합이라 할 수 있다.

1) 영적 연합

사람은 동물세계 이상의 것을 갈망한다. 단지 먹기위해서만 일하지 않는 다. 사람들에게는 인간관계 에서 채워질수 없는 인격적인 필요들이 있다. 그것은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받고 있으며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인 안전감(security)과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중요하고도 지속적인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느낌인 중요감(significance)이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우리의 이런 필요들을 어디에서 채울수 있을까?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이신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안전감과 중요감을 채워 줄 수 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의 이 안전감과 중요감을 우리가 좀 더 나은 것으로 견고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우리의 자세가 필요하다.

첫째, 상대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우리 자신을 배우자에게 온전히 내어 줄수 있을 만큼, 그리고 상대의 반응이 어떠하든 계속하여 그를 섬기기를 기꺼워 할 수 있을 만큼 그리스도의 사랑을 충분히 신뢰해야 한다.

둘째, 자신을 가치있는 사람으로 느끼는 상대방의 자기수용의 경험에 우리가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정직하게 인식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인격적인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은 사랑이신 하나님으로 오직 주님만을 신뢰하는 관계이어야 한다.

영적인 공동기반을 구축하는 것, 영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상대의 필요를 채워주기위해 자신을 서로에게 내어줌이 있어야 한다.

2) 정신적 연합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고 바울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바울이 여기서 모든 기독교인들의 관계를 지배해야 하는 핵심적인 관계의 원리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이 원리는 결혼하여 늘 가깝게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도 적용이 된다.

정신적 연합이란 서로를 채워주는 관계로서, 이러한 관계는 부부 각자가 결혼이 그것을 위한 기회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된다. 정신적연합을 이루는 길은 상대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이자 그리스도안에서 참으로 안전하고 중요한 성도로서의 자신의 근본적 가치를 더욱 깊이 느끼도록 도와주는데 있다. 부부의 정신적 연합이란 주관적으로 느껴지는 너무도 친밀한 관계인 까닭에 성관계를 통해서 온전하게 표현될 수 있다. 이런류의 연합은 부부 각자가 상대의 섬김을 요구하는 대신 자기가 상대방의 필요들을 섬기겠다고 하는 무조건적인 헌신을 다짐함으로써만 이루어 질 수 있다.

3) 육체적 결합

바울은 남편과 아내가 상호관계의 근거에서 서로 성적 즐거움을 갖도록 권했다. 즉,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고전7:3-4)라고 했다. 주로 이러한 차원에서의 결혼의 기쁨이, 아가서에서는 완전하고도 아름답게 서술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대단히 만족스러운 인간관계가 묘사되고 있음을 대하게 된다. 결혼에서의 성행위의 역할에 대해 성경은 개인적, 영적, 사회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결혼으로 이루어지는 성행위는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동반관계의 필수적인 요소로 성경는 설명한다.

이처럼 육체적 연합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흥미를 좇는 섹스 이상의 것을 준다. 그 분이 마련해 두신 육체적 연합에는 성적 친밀감을 통한 온당한 육체적 쾌락은 물론이고 더불어 의미까지 포함되어 있다. 육체적 연합에는 육체의 쾌락과 인격의 풍부한 의미가 똑같이 포함되는 것이다.

이것을 좀더 정리해 보면, 육체적 연합이란

① 자신들의 필요들을 주님으로부터 채움받고 상대방의 필요들을 채워주기 위해 자신을 하나님의 도구로 드린 부부가 나누는 성적 쾌락이다.

② 배우자에게 육체적인 영역에서 최대한의 성적 쾌락을 주겠다고 하는 섬김에의 헌신으로부터 나오는 성적 쾌락이다.

③ 감각적 흥분과 성적 만족의 경험을 서로에게 충분히 나누어주는 성적 쾌락이다.

④ 부부 각자에게 그들의 끊을 수 없는 끈에 대한 인식을 더욱 강화시켜주는 성적 쾌락이다.

영혼과 정신의 연합을 표현해주는 성적쾌락의 경험인 육체적연합은 결혼의 전인격적인 연합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한 부분이다.

영적 연합과 정신적 연합과 육체적 연합 이 세가지 연합이 모두 이루어져가는 결혼은 그 부부에게 있어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인 교회의 영원한 연합에 대한 하나의 살아있는 비유가 될 것이다.

2. 결혼의 원칙

1) 일부일처제

창세기의 창조기사는 분명히 다음과 같은 일부일처제적인 말로 인간의 첫 결혼을 기록하였는데, 즉 "한 남자가 ...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라고 하였다. 많은 히브리 율법도 일부일처제 형태의 결혼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출20:17; 21:5; 레18:8, 16, 20; 20:10; 21:13; 민5:12; 신5:21; 22:22; 24:5 등). 행복한 삶에 대한 다양한 훈계를 포함하고 있는 잠언도 일부다처제적 생활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비교. 잠 12:4; 18:22; 19:13). 회의론자인 전도서 기자도 남자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아야 한다"고 기록 하고 있다(전 9:9).

비록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 특히, 아브라함, 야곱과 같은 믿음의 조상들이 일부다처제의 결혼 생활을 한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타락이후의 왜곡된 결혼제도이며 그로 인한 가정불화의 부정적인 면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수 있다(창21:9-21).

기독교인들의 결혼에 있어서 일부일처제는 꼭 지켜져야만 한다.

2) 순결과 정절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가 가가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창24:6). 이삭과 리브가의 얘기 속에 처녀 (virgin)란 말이 나온다. 거기에 더 자세하게 설명이 뒤따라 오는데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이라고 덧 붙였다. 하나님의 본래 계획은 결혼전에 성적인 행위를 금한 것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부정은 실제로 우리의 육체적 생존의 보다 깊은 의미를 부정하므로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가 되어있음을 무효화 시킨다고 했다(고전 6:15; 엡 5:3). 부정한 사람은 마치 인간과 동물 사이에 근본적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할 뿐만 아니라, 예를 들어서 외설적인 언어나 추잡한 행위로 성의 신비를 모독함으로써 사악한 기쁨을 과시한다.

정절은 개인의 활동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생활과 사람들에 대한 그의 전적인 태도에 깊은 영향을 끼치며 한 사람의 소원과 욕구를 지배하기도 한다. 정절은 혼외 성관계나 자음행위를 삼가는 것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정절은 이성에 대한 태도로서 불결한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으려는 태도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

3) 주 안에서 평등

인류 최초의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라는 사실은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가 하나님 앞에 동등한 존재로 서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하나님께 대한 책임에 있어 동등한 것이고 책임있는 존재로서 하나님 앞에 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창세기의 기록은 여자는 남자에게 적합한 조력자로 지음받았음을 의미한다. 결혼생활에 있어서 부부는 각각 서로 협조해야 한다. 남편은 남편의 도리를 다하고 아내 역시 그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기독교인의 결혼에 있어서의 두 사람은 서로가 당초부터 영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무조건 평등관계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부부간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 두 사람은 육체적조건과 기능에서 다르며 결혼관계에 있어서의 위치도 다르다.

그러나 각기 그 기능이 다르다 할지라도 똑같이 중요하다.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이 아니라 남자의 배우자이다. 성서는 시종 결혼의 평등주의와 민주적 성격을 가르쳐 주며, 동등한 인격의 존엄과 신분의 평등성이 아니고서는 진정한 '일체'란 존재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3. 배우자 선택기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은 어떤 조건을 기준으로 결혼을 해야 할까? 세상 사람들과 같이 상대방의 재력, 학력, 외모만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 성경이 보여주는 결혼상대자의 조건을 생각해 보자.

히브리 민족의 부모는 한 남자에게 자기의 딸을 주기 전에 그 청년의 신앙을 점검해 보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책임을 하나님 앞에서 다 할 수 있는지를 점검해 보았다. 즉 신앙의 확실성이 신랑될 사람의 조건이었다.

또 '신부'에 대한 히브리어의 뜻은 '완성자' 또는 '완전한 자'라는 것으로 여성에게 있어서 혼인은 완성과 성숙으로 볼 수 있다. 육체적인 성숙이 반드시 영적인 성숙은 아닐 것이며, 영적인 성숙이 반드시 육체적인 성숙을 동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두 가지를 잘 점검해서 그것을 갖춘 사람을 결혼의 상대자로 택해야 할 것이다.

조지 H. 헤이스는 배우자 선택 기준으로 다섯가지를 제시 하였다.

1) 공통의 신앙

결혼 반려자들에게 공통의신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어째서 중요한 것인가?

첫째, 이 근본적인 문제의 일치가 없는 한 하나님의 목적의 달성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반려자 중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기독교인 가정이라는 것이 세워질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그를 찬미하는 그런 생활을 못하는 결혼 생활에서 결코 영광 받을 수 없는 것이다.

둘째, 자녀의 종교 교육 문제가 부부간의 공통신앙을 요구하기때문이다. 생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대하여 부부간에 의견의 차이가 있다면 자녀들에게 정서적내지 영적인 원숙을 향하여 성장하고 발전해 나갈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결혼 전에 두 사람의 종교적인 병합을 위한 조절이 필요하다.

2) 감정의 성숙

감정의 성숙이란 나 자신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지고 나 자신을 용납하며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며,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과 원만히 지낼 수 있을 만큼 성장한 단계를 의미한다. 인생의 문제들을 정직하게 그리고 용감하게 대하고 처리해 나갈수 있을 때 그는 감정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3) 공통의 가치성

일반적으로 연령, 인종, 종교,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결혼은 모험성을 주는 것이가 때문에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할 문제이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은 반드시 모든 점에서 꼭 같아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취미가 서로 다양하게 다르다거나 또는 어느 정도 성질이 다르다거나 하는 것은 오히려 결혼한 두 사람의 시야를 넓게 하며, 결혼 생활의 범주를 넓게 하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무엇보다도 더 가장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그들의 인생관을 바탕으로 한 생활의 기준, 가치 및 원칙문제에 대하여 같게 느끼고 생각하여, 또한 그들의 근본적인 태도와 견해에 있어서 동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4) 결혼 반려자에 대한 이상

젊은 기독교인들이 결혼 할때 마음에 간직해 두어야 할 결혼 상대자에 대한 이상을 간추려 본다.

① 인품에 있어 의심할 여지가 없는 그리스도인.

② 건강한 사람.

③ 선량하고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

④ 비슷한 배경, 동일한 국가, 민족, 형편이 같은 가정에서 성장.

⑤ 거의 동등한 교육 및 지적 수준

⑥ 유우머에 대한 감식.

⑦ 금전에 대한 관리 능력.

⑧ 사랑을 주고 받는 능력.

위에 열거한 이상들을 우선 자기 자신이 달성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며, 다른 사람에게서만 찾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

5) 개인의 선택과 혹은 가족의 조정

기독교인 청춘 남녀는 부모님이 기독교인이 아닐때 개인적으로 신앙있는 배우자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부모님이 기독교인인 경우 좋은 신앙가문의 배우자를 선택하여 잘 알아 본 후 결혼을 하기도 한다.



Ⅳ. 나오는 말

기독교인은 신앙에 기초한 결혼관을 위해 결혼의 목표와 원칙, 그리고 배우자 선택시 분명한 기준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임의로하여 나눌 수 없다는 것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혼의 신성성과 영구성을 분명히 해주는 것으로서 결혼이 주관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의지에 근거하는 개관적 사건이 되며, 하나님 앞에서의 소명이요 하나님 앞에서의 윤리적인 삶이란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혼이라든지, 결혼할 의사가 없이 남녀가 부부처럼 성생활하며 동거하는 것, 그리고 배우자 외의 이성과 성관계 하는 것 등은 신성한 결혼을 모독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교회는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결혼관 확립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우선은, 결혼의 이상이 되는 건전한 가정관을 확립시키는 일이다. 이를 위해 교회는 정기적으로 가정문제의 전문가를 초청하여 가정세미나를 실시하는 것이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주는 '건강한 가정상'의 제정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왜곡된 성윤리관을 올바르게 회복시키는 일에 앞장 서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교회는 중고등부의 프로그램으로 성교육을 실시할 수 있겠다.

또, 청춘남녀로 조직된 청년부에 결혼문제에 대한 교육과 토론이 성경공부과 함께 이루어지게 하는 것도 교회가 할수 있는 일이겠다.

더 나아가서는 교회에서 결혼하는 이들을 있을 때, 결혼식에 앞서서 목사가 예비 부부를 불러 상담하며 결혼생활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기독교인으로서 결혼은 하나님이 제정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축복을 받은 제도란 것을 인식하게 해야 할 것이다.(영흥중앙교회 안완구목사)



참 고 문 헌

1. 단행본

기독교문사 편,『기독교대백과사전』, 2권, 서울:기독교문사, 1980.
매스턴, T. B.. 틸만, W. M. 공저, 이 석철 역,『성서 그리고 현대 가정』, 서울:요단출판사, 1991.
선린출판사 편,『교리강해 연구』, 17권, 서울:선린출판사, 1993.
성서교재간행사 편,『그랜드종합주석』,1번. 15번, 서울:성서간행사, 1995.
성서연구사 편,『기독교문장대백과사전』,2권, 서울:성서연구사, 1993.
크랩, 로렌스 J.,윤종석 역,『결혼건축가』, 서울:도서출판두란노, 1992.
피터, 오토 A. , 전경연.강한표 공역,『성과 결혼』,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1988.
헤이스, 조지 H., 김한희 역,『그리스도인의 결혼과 가정생활』, 서울:침례회출판사, 1968.
훼리치아노,채프만.김순기 공저,『후회없는 만남을 위하여』, 서울:크리스챤서적, 1983.

2. 논문 및 간행물

송길원, "가정이혼 해결책이 아닌 자살책",『두란노목회시사정보』, 서울:도서출판 두란노, 95년 10월 2호.
이종윤, "기독교인의 혼인관", 『기독교 사상』, 1991. 7..
이효재, "서울시 가족의 사회학적 고찰",『한국문화연구원논총』,제1집, 1959.
경향신문(1995. 5. 23).
동아일보(1995.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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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호 통권 9호
2001.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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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청년 1 >

■ 기독 청년들의 결혼관(結婚觀)


유원식 목사

장성한 청년들이 짝(배우자)을 만나서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 결혼의 시작은 하나님으로부터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담이 독처하는 것을 보시고 돕는 배필로 하와를 만드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청년들은 결혼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하나님께서 성서를 통해서 제시하신 결혼관을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다. 감사가 넘치는 결혼은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혼은 하나님에 의해서 정해지고 구성된 인격적·성적(性的)·영적인 우애관계(companionship)이다. 이런 해석은 결혼을 창조주이며 구속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빛에서 이해하려는 성서적 입장에 근거한 것이다. 이 신앙이 결혼과 관련되어 분명하게 표현된 구절은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창 2:24)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도 이혼에 관해 바리새인들을 교훈하시면서 위의 성구를 부연하시되 "하나님이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그들이 한 몸이 될지니라"(막 10:6하-8)고 하셨다.
자손의 보존과 성(family name)을 보존하기 위해서, 인격적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 결혼은 중요하다. 때문에 결혼은 성서 시대의 사회에서 실제적으로 널리 퍼져 있던 관습이었다. 성서시대에는 과부는 있었지만 그러나 노처녀는 없었다. 독신생활은 상해로 인해서 성생활을 할 수 없었던 사람들(신 23:1)과 그리고 선천적인 조건이나 폭력이나 혹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고자가 되었던 사람들에게만 제한되어 있었다(마 19:12).
바울은 성적(性的) 욕망을 인정하고, 이런 욕망을 부정한 관계보다는 오히려 결혼을 통해서 만족시키는 것이 더욱 좋다고 하였다(고전 7:9). 바울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성적(性的) 즐거움을 갖도록 권했다(고전 7:3-4). 주로 이러한 차원에서의 결혼의 기쁨이 아가서에 아름답게 서술되어 있다. 결혼에서 성행위의 역할에 대해 성서는 개인적·영적·사회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결혼으로 이루어지는 성행위는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들의 동반관계의 필수적인 요소로 성서는 설명한다. 또한 성서는 결혼에서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남편은 그의 아내의 사랑을 항상 연모해야 한다(잠 519).
막 10:2-9에서 결혼은 두 사람 사이의 분리할 수 없는 연합이라고 언급되어 있으며, 두 사람의 성적 결합에 의해 변화됨이 언급되고 있다. 이 연합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인정된 것이다(창 1:27, 2:24). 복음서에서는 혼인잔치가 하나님의 나라의 즐거움과 축복을 묘사하는 비유로 사용되기도 한다. 바울은 미혼자들에게 독신행활을 계속하라고 권고하는 반면에, 결혼을 두 사람 사이의 긍정적이며 서로 관심을 갖는 인간 관계로 받아들였다(고전 7:32, 35). 결혼을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신비한 연합의 상징으로 본 바울의 가르침(엡 5:22-34)은 결혼 개념을 향상시키고 순화시킴으로서 기독교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도인에게 결혼은 일반적인 사회제도 그 이상의 것이다. 결혼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거룩한 것](holy estate)이다. 남편과 아내는 더 이상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단순한 육체적인 결합 이상으로 사랑과 애정에 의한 완전한 결합과 목적과 관심과 또한 이 세상의 재산에 있어서도 완전한 공동체, 그리고 완전한 상호이해를 의미한다. 또한 한 인격을 형성하기 위해서 두 정신을 결합하는 어떤 종류의 신비적인 결속 또는 아마 정신-육체적(psycho-physical) 결속으로서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결혼에서 형성된 신비적 결합이나 정신-육체적 결합의 사상이 바로 본질적으로 성례전적인 결혼관을 뜻한다. 이러한 성례전적인 견해는 중세기 때에 권위 있게 규정되었으며, 여전히 로마교회와 동방교회의 교리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기독교 사상과 기독교인의 생활을 위한 중요하고 실재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상처 입은 결혼


결혼과 더불어 [이혼]의 문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마 19:33, 막 10:2 이혼은 그 자체가 죄된 것이며 하나님이 정하신 결혼제도의 목적과도 일치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주님은 이혼은 결혼제도와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근본적으로 죄된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사도 바울은 이혼의 주제를 고전 7장에서 다루고, 주님의 권위에 근거해서 이혼에 대한 원칙적인 금지를 되풀이 주장하고 있다. 또한 모든 종류의 혼외 관계를 절대적으로 금지함으로 남녀간의 결합이 순화되어 왔으며, 결혼 관계에서 얻어지는 행복이 보호되어 왔다.


□ 결혼을 위한 유효한 조건들


1. 결혼을 약속하는 당사자들 간의 지위나 조건이 동등해야 한다는 것은 로마법에서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와 같은 동등성을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하기는 했으나 절대적인 필수적 요소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2.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 사이의 혼합결혼의 문제는 당연히 교회가 처리해야 할 최초의 실질적인 문제들 중의 하나였다. 그 문제는 고린도 개심자들이 바울에게 제기한 질문 중 한 주제가 되기도 했다. 개심 이전에 이루어진 결혼과 관련된 바울의 답변은 명백하다. 기독교인은 그의 믿지 않는 동반자가 그들의 결합을 지속하기를 원하는 한, 그 결합을 지속하여야 한다. 그 와 같은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경건하다. 즉 기독교의 세례에 합당한 대상들이다. 만일 믿지 않는 동반자가 그 결합을 해체키로 결정했을 경우, 믿는 상대편 형제, 혹은 자매는 아무 속박도 받지 않는다. 즉 이는 기독교인인 상대편은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고전 7:39에서 바울 사도는 기독교인은 [주안에서만] 결혼할 자유가 있다고 선언했다. 기독교인이 불신자와 하는 혼합 결혼은 장려되지 않았으며, 기독교인들에게 그것은 심지어 비합법적인 것으로 선언되기도 했다.
성서가 시사하고 있는 이상적인 결혼은 기독교 세계에서 지속적으로 유지되었으며 가정 생활을 숭고한 것으로 만들었으며, 또한 가정 생활의 성격을 발전시켰다. 일면에서 볼 때 결혼은 하나의 제약이다. 즉 억제되지 않은 방종과 과도한 탐닉에 가해지는 건전한 제약이다. 결혼은 우리의 능력과 활력을 요구하는 의무와 책임을 수반하며, 지속적인 인내와 자아부정을 요구한다. 그것은 제약이나 자아부정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좀 더 참되고 좀 더 영구적인 축복을 위한 것이다. 거룩한 결혼은 인류의 복지를 위하여, 또한 축복의 원천이 될 수 있도록 신성하게 제정된 것이다. 행복한 결혼 생활에서 인간은 진정하고 지속적인 행복을 찾을 수 있으며, 인간의 본질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충만한 완전성에 도달할 수 있다.
기도가 있고 구체적인 준비가 있어서 감사가 넘치는 결혼을 하기를 바라고 찬양이 흐르는 가정을 이루는 청년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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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 이혼 , 그리고 재혼

Stan Vespie 목사 著 / 김 기현 譯


머리말
두 남자의 이야기
결 혼
이 혼
재 혼
디모데 전서 3장은 ?




● 머리말

오늘날 미국침례교 신자들 사이에 가장 논쟁거리가 되는 주제 중의 하나는 결혼, 이혼, 그리고 재혼입니다. 수 많은 설교와 책자들이 이 문제를 다루어 왔습니다. 중요한 이 문제들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통찰력을 제공하는 읽을 거리가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이 유용한 것들에 하나 더 추가토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제 아내를 신실하고 진정한 돕는 배우자가 되도록 하나님은 18년 이상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녀는 모범적인 사모입니다. 사실 한번은 제가 시무하는 교회의 한 자매가 저에게 “설교자님! 우리는 매번 좋은 목사님을 모시지만 (반면에) 사모님은 유감스럽고 , 사모님이 좋으면 목사님이 유감스럽지요. 그러니 죠이스(Joyce)가 우리가 모셨던 사모중 가장 좋은 분이라는 것을 아셨으면 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누군가는 제 아내가 이 사실에 “아멘”으로 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내는 제가 “아는” 유일한 여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이 비난할지라도) 제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목사직을 계속하고자 논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두 아내”를 두었다는 사유로 (목사로서) 형제들의 기준으로 의해 부적격자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의 定義를 따른다 해도 저는 한 아내를 둔 사람입니다.

이 들끓는 논쟁의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혼 후에 재혼을 하면 아내가 하나일까요? 아니면 둘일까요? 이 외의 다른 것을 연구할 때도, 우리는 반드시 사람의 견해를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권위를 주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전통과 우리가 살아오면서 배운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하나님은 무어라 말씀하시는지를 지켜봐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교리에 해당하는 사람의 가르침과 전통에 대해 지속적으로 대항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거론할 때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1611년판 제임스 왕의 흠정역 성경(King James Authorized Version)을 지칭합니다.

이 책을 읽는 자에게 축복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이 책에서 얻은 결론에 동의를 하든지 아니하든지 간에 이 책의 독자를 성경을 찾아 보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인도할 것입니다.
만일 실패한 결혼 때문에 전쟁의 희생자 같이 된 사람이 있다면 그가 앞으로 남은 시간동안 하나님을 위하여 뭔가를 이룰 수 있다는 용기를 얻게 될 때가 저에겐 가장 큰 전율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남은 시간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 두 남자의 이야기

데일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을 사랑한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경험이 많았고 성공적인 선교사였습니다. 아름다운 가족과 풍성한 사역의 열매를 이루어 내었으며 복음에 목마른 한 시골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수 많은 기도를 거쳐 하나님의 은혜로 유능한 사람이 되어 어느 한 교회를 돌보았는데 어느날 그는 비참한 충격에 부딪혔습니다. 그의 아내가 고백하기를 마을 사람이 자신을 강간해서 임신이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안정시키자마자 아이를 키우기로 작정하고는 출산하게 했습니다. 데일은 그 아이가 자신의 자식이 아니었지만 자기 자식처럼 사랑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의 이유로 데일은 선교사역을 다시 감당할 수 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님께서 그에게 다시 교회 사역을 시작할 수 있게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다시금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침례를 주는 사역에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 악몽과도 같은 그 죄가 또다시 충격을 주었습니다. 바로 교회에 속한 남자와 사모가 정을 통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전에 (사모가 고백했던) 강간사건은 다름 아닌 또 다른 더러운 통정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데일은 간음으로 인해 사모와 이혼을 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묻고자 합니다. 데일이 부적격하다는 이유로 담임 교회의 목사직에서 사임을 하여야만 합니까?

여러분은 최종권위로서 성경을 택하든 인간의 전통을 택하든 간에 대답을 할 것입니다. 그 대답에는 사모가 간음을 범했기 때문에 목사는 반드시 사임을 하여야 한다고 하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살펴봄으로써 그 목사가 사임을 하여야 하는지의 여부를 알아 보겠습니다.

최근에 한 남자가 전화로 성경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한때 그는 全時間(full time) 복음 증거자로 일했습니다. 그의 사모는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하여 다른 사람에게로 떠났습니다. 그는 전쟁의 포로 같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는 교회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증거자의 직무를 사임하고 성직 임명장을 반려하고는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는 아내가 떠난다면 그는 더 이상 전도자의 자격을 갖출 수 없다고 배워왔고 열정적으로 (그렇게) 믿어왔습니다.
저는 30년전 죤 롤링박사님이 다른 전도자에게 했던 질문을 그에게 했습니다.
1) 하나님이 당신을 설교하도록 부르셨습니까?
2) 하나님이 당신의 아내를 설교하도록 부르셨습니까?
3) 당신의 아내가 그만둔다고 해서 당신도 그만둘 것입니까?
이런 훌륭한 질문들은 많은 사람들을 계속 분쟁 속에 있게 합니다.

그러면 성경은 결혼에 대해 무어라 말씀하실까요? 이혼에 대해선? 성경이 재혼을 수용하실까요? 재혼하는 것이 죄짓는 건 아닐까요?
랜디의 질문은 다시 그 문제들을 생각해보게 하였고 이 책자를 통해 제가 얻은 답을 드리고 합니다.

● 결 혼

성경에서 51개의 구절에서 결혼이란 단어가 56번 나타납니다. 첫번째는 창세기 19장 14절을 보면 롯의 딸들이 소돔 사람들과 결혼한 것으로 나옵니다. 분명히 이것은 아담과 이브의 결혼 때문에 첫 번째 결혼이 될 수 없지만 결혼이란 단어는 성경에서 이것이 처음입니다. 아담과 이브에 관하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4) 처음에 사람을 만드신 이가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시고 (5) 말씀하시기를, 이런 까닭에 남자가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하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6) 그런즉 그들이 더 이상 둘이 아니요, 한 육체이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 하시니.”
(마태복음 19장 4절~6절)
여기에 아담과 이브가 결혼한 것을 의심할 자가 있습니까?

아담과 이브가 결혼반지를 교환(이교도에서 유래함) 했다든지, 결혼피로연(동물을 제외하면 누가 참석했겠는가?)을 치렀다는 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만 .

그들은 결혼을 했습니다. (자, 여러분이 혼란스러워 하기 전에 , 물론 저는 결혼했다는 것을 아내에게 보여 주기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결혼했다는 것을 듣기 위해 손가락에 결혼 반지를 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첫 번째 제도가 가족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사회적 근간의 기초가 되는 가족은 오늘날 사탄의 공격 대상이 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마귀가 특히 교회를 파괴하기 전에 가정을 파괴할 수 있다면 사회 전체가 붕괴되는 건 시간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 인간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남편과 아내입니다. 하나님은 결혼의 행위를 세우시고 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평생의 헌신으로 반드시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아껴주도록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결혼을 제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제도가 미국에서는 두 명의 동성애자를 가족과 아이들 양육에 적합한 것이라 하여 연방법원제도가 가족의 정의로 수용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성이 감당 못하는 교육을 받은 멍청이들과 비도덕적인 폐륜자들을 빼고 누가 이 사실을 모르겠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24장 38절에서 결혼에 관한 역사적인 첫 번째 말씀을 주시고 계십니다. 말씀하시기를 노아 홍수가 있기 전 부모들이 그들의 딸들을 결혼시켰다고 합니다. 비록 결혼이 하나님이 허락시고 성별한 것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은 ,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눅 20:34) 라고 말씀하셨고 그분의 제자들과 함께 가나의 혼인잔치(요 2:2)에 참석하셔서 (4천년간의 죄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결혼제도를 인정하셨습니다.

인류가 처음 시작할 때부터 하나님은 성공적인 결혼을 강조하셨습니다. 아담과 이브,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등등… 성경 초기시대엔 다중결혼(일부다처 :남자가 아내를 여럿 두는 것)의 문제가 있는 반면에 창세기전반에 걸쳐 결혼이 이혼으로 끝난 것을 발견할 수 없다니 흥미롭지 않습니까?
한번 여러분이 성경에서 첫 번째 이혼을 찾아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삭과 리브가가 서로 갈등으로 시달릴 때도 그들은 변호사나 별거의 방법을 택했다는 것을 읽을 수 없습니다. 야곱이 모든 온갖 어려움(4명의 아내와 살지 않았던가?)이 있다는 것을 하늘은 알고 있었지만 그는 아내 중의 어느 한명과도 이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한 남자가 한 여자와 일생동안 결혼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결혼 이혼 재혼이라는 이 글이 이혼을 부추긴다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분명히 밝히고자 하는 것은----하나님은 결혼을 찬성하시고 이혼은 반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성경신자로서 이혼을 권장한다는 전도자를 알지 못합니다. 사람이 결혼을 했으면 결혼서약을 일생동안 지켜야 합니다. 부부는 가능하다면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결혼서약이 파기된 곳을 회복시킬 노력을 반드시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결혼이란 항상 평생의 남녀의 관계를 의미하며 죽음이 갈라 놓을 때 까지 두 사람은 서로의 애정과 신실함 속에서 함께 살겠다고 약속한 계약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이 연합에는 많은 목적이 있습니다.

1. 남녀 사이의 문란한 성행위를 막기 위해서
2.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3.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자녀를 양육하는 장소를 확보하기 위해서

주인을 섬기는 중에도 종들(servants)은 결혼을 하여 아내들을 두었습니다.(출21:3 만일 그가 혼자 왔으면 혼자 나갈 것이요, 장가 들었으면 그의 아내도 그와 함께 나갈 것이니라.)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의 결혼 상대자 간택에 비난을 하다 어려움을 겪었습니다(민 12:1). 하나님은 이교도 여인과의 혼인을 금하셨습니다.(신 7:3,4) 결혼관계란 너무도 중요하기에 하나님이 명령하신 법에 따라 만일 누구든지 음행을 범하여 그 결혼관계를 파기한자가 있다면 처형당해야 했습니다.(신 22:22 남자가 유부녀와 함께 누운 것을 보거든 그 여자와 함께 누운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에서 악을 제거할지니라 ) 물론 범죄한자는 처형을 당했지만 음행으로 인해 피해를 본 배우자는 재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로 이끌기 위해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바라보는 사랑과 기쁨을 바로 공통적인 예로서 결혼을 사용하여 설명하시고 계십니다(마 22:2~9). 사실상 그리스도인의 결혼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의 관계를 지상에서 가장 잘 나타낸 그림입니다.(엡 5:21~33)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않는 자(잃어 버린자)와 결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고 6:14). 그리스도인이 그의 영적인 양아버지를 위해 마귀가 무엇을 해주기 원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한 것은 결혼하는 두 명의 믿지 않는 자들이 이해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의 관계를 보여준다는 사실입니다. 성령님은 구원의 증인으로서 결혼 자체를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결혼한 부부의 임무 중에는 자기의 배우자를 기쁘게 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고전 7:33~34)
우리는 우리자신을 기쁘게 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결혼한 자를 기쁘게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두 사람이 함께 한 발씩 묶고 달리는 경기에서 이기적인 상태가 되는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가려 한다면 인생의 경주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대언자는 수사적 표현으로 묻습니다,” 어떻게 두 사람이 동의없이 함께 걸어 갈 수 있겠습니까?” 대답은 명확합니다. 절대 할 수 없다! 입니다. 그럼 결혼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때가 오면 어떻게 될까요? 이혼이 성경적입니까? 부부가 이혼하는 것을 하나님이 언제 허락하신 적이 있나요? 만일 그렇다면 이혼한 남녀가 재혼하는 것이 온당합니까? 이 문제를 한번 다루어 보겠습니다.

● 이 혼

이혼(혹은 이와 관련된 것)이란 단어는 11개의 구절에서 11번 나옵니다. 아주 적기 때문에 한번 간단히 살펴 보겠습니다.

1. 제사장은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한다는 레위기 21장 14절에, “과부나 이혼한 여자나 신성 모독하는 여자나 창녀를 취하지 말고 자기 백성 중에서 처녀를 취하여 아내로 삼아.”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성막에서 제사장으로 하나님을 섬길 남자는 이혼한 여자와의 결혼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레 21:1 참조)
2. 만일 제사장의 딸이 이혼을 당했다면 그녀는 친정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레위기 22장 13절에, “ 그녀가 과부가 되든지, 이혼을 당하든지, 자식이 없어 자기 아버지의 집에 들어와서 어릴 때와 같으면 그녀는 자기 아버지의 음식을 먹을 것이나 타국인은 먹지 못할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3. 민수기서에는 주께서 약속(언약)의 법에 따른 요구사항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 “그러나 과부나 이혼 당한 여자들이 자기들의 혼을 속박하려고 행한 서약은 지킬 것이니라.”
4-5. 그럼 이혼에 관한 모세의 율법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신명기 24장 1-4)

“(1) 남자가 자기 아내를 취하여 결혼한 뒤에 그녀에게 부정함이 있음을 발견하였으므로 자기 눈으로 그녀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그녀의 손에 주고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수 있느니라. (3) 그런데 나중의 남편도 그녀를 미워하여 이혼증서를 써서 그녀의 손에 주고 그녀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혹은 그녀를 아내로 취한 나중의 남편이 죽었으면 (4)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녀를 내보낸 남편이 그녀를 다시 아내로 취하지 말지니 이 일은 주 앞에 가증한 것이니라. 너는 주 네 하나님께서 소유로 주시는 땅으로 하여금 범죄하지 못하게 할지니라.”

6.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를 보면 이사야 50장 1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버린 네 어머니의 이혼 증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권자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보라, 너희는 너희 불법들로 인하여 너희 자신을 팔았고 너희 어머니는 너희 범죄들로 인하여 버림을 받았느니라.”

7. 또 다시 예례미아 3장 8절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타락한 이스라엘이 이 모든 이유로 인하여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녀를 버리고 그녀에게 이혼증서를 주었으되 이스라엘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이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도 가서 창녀짓 하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신약성경은 4번만 이혼을 말씀합니다.

8-9. 마태복음 5장 31-32의 산상설교에서 주 그리스도 예수님은 이혼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증서를 줄지니라, 하였으나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의 이유 외에 다른 이유로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녀로 하여금 간음하게 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이혼 당한 여자와 결혼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니라.”

10. 바리새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여 마태복음 19장 7절에서 이혼에 대하여 묻기를,
“그들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 아내를 버리라 명령하였나이까?” (후에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다루겠습니다)

11. 마지막으로 마가복음 10장 4절에 이혼이란 단어의 형태를 보겠습니다. 이번에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답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묻습니다. “ 모세가 너희에게 무어라 명령 하였느냐?”(3절) 계속해서 4절에, “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아내를 버리도록 허락하였나이다,”(4절) 우리는 다시 이 질문과 답변 그리고 위에 기록된 반응들을 후에 다룰겁니다. 그러나 그 전에 여러분은 위에 기록된 이혼을 뜻하는 또 다른 용어가 있다는 것을 주목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이혼과 같은 뜻의 단어가 있으니, “버리다” 입니다. 이 말은 성경에서 53번 사용되었지만 이혼 문제에 국한하여 사용된 건 오직 19번입니다. 여러분을 부지런한 일꾼이 되게 하고 스스로 찾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참고적으로 소개합니다.
(이미 위에 나왔던 것도 있으니 참조 바랍니다.)
이혼관련 용어인 “버리다”는 다음 구절에 있습니다.
레21:7, 에스라10:3절,19절, 이사야 50:1, 렘 3:1, 겔 44:22, 호 2:2, 마 5:31~32, 19:3절, 8절~9절, 막 10:2절,11절~12절, 눅 16:18 그리고 고전 7:11

성경에서 처음 나오는 용어의 첫 번째 원칙은 처음 사용되는 단어가 전형적인 정의를 의미하게 됩니다.
창세기 35장 2절에서 “버리다”라는 뜻이 정의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그의 자녀들에게 말하기를, “ 너희 가운데 있는 이방 신들을 내어 “버리고” 정결하게 하고 옷을 갈아 입으라.” 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사용된 이러한 “버리다”는 무언가를 “제거하다”라는 의미가 확실합니다. 그것이 아내였다면 우리는 이혼이라고 말해야 할 겁니다.(참조 마태 5:31~32, 19:7)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이혼증서를 만드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 “너희 마음이 완악하므로..” 이것은 이혼이 절대로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마 19:7) 그러나 민수기 3장의 슬로브핫의 딸의 경우엔 하나님이 특별한 경우에 한하여 증서를 만들었습니다. 이혼은 있을 수 있지만 습관적인 것은 아닙니다. 최근의 통계를 보면 결혼하는 두쌍 중 하나는 이혼한다고 합니다. 신문에서 최근의 결혼과 이혼기사를 보십시오. 아마도 여러분은 이혼 숫자가 더 많은 것에 대해 놀라실 겁니다. 최근에는 테네시주 녹스 카운티의 라디오방송에서 3쌍중 2쌍이 이혼한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미국전체 평균으로는 약 두쌍 중 하나가 실패한다고 하는군요.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 “ 나는 아내 버리는 것을 미워 하노니…”(말 2:16) 하나님은 이혼한 사람을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이혼이 항상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성경적인 이혼 사유가 있습니다. 불가결한 피할 수 없는 이혼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혼하게 되면 “버리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부부들은 서로간의 차이를 해결하는 것 보다 죄책감 없는 이혼이 더 쉽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젊은 부부들은 결혼이 이상적 이라기 보단 끔찍한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처방을 찾고 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이혼은 결코 일상적인 것이 아닌 아주 보기드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합니다. 기독교인 누구든지 “처음에 실패하면 계속 해봐” 라는 식의 결혼관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절대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진실로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 이라면 이혼을 옹호하거나 권장하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쉬운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면 그건 성경을 잘못 읽고 있는 겁니다.
벌레 먹어 상해버린 결혼생활을 하나님이 회복시킬 때까지 무릎을 꿇고 금식과 기도로 간구하십시오.
사랑은 결정하는 것이지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사랑은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서약을 했다면 지키십시오. 신기하게도 사람이 치통으로 고생하면 치과의사를 찾고 뼈가 부러지면 외과 의사를 찾습니다. 하지만 결혼생활에 문제가 생기면 조언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목사님을 찾지 않습니다 !
겸손히 도움을 구하십시오. 여러분이 물에 빠졌다고 생각하십시오. 결혼생활이 물에 빠졌다면 살려줄 사람을 찾으십시오. 어떻게 하든 쉽게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혼은 절대로 권장할게 못됩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이런 생각을 심어 줍니다. “한번 사는 인생, 한번 더 자유를 누리자”. 마귀가 “자유”를 가지고 여러분을 괴롭힌다면 그 뒤에는 항상 쇠사슬이 놓여있습니다.

에스라 제사장은 에스라서 10장에서 이방여인의 아내를 버릴 것을 주님이 명령하셨을 때 아내를 “버리는” 것에 대해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여인과 결혼한 사람들이 이혼할 것을 원하셨습니다. 물론 구약성경에서
그러셨습니다. 여러분은 오늘날 그것을 지킬 의무가 없지만 (참조: 고전 7장) 정말 읽어볼 만한 것이 아닙니까? 유대인들은 이방여인들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어도 이혼을 했습니다.(에스라 10장 44절) 하나님은 수천년 간 성전에서 섬기는 제사장이 이방여인이나 이혼한 여인들을 포함하여 패역한 여인들과 결혼하는 것을 강력하고도 엄하게
금하셨습니다.(에스겔 44장 22절)

결혼에 실패하여 이혼한 그리스도인들은 (여러분도 포함하여) 과거에 잘못한 것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죄를 돌이키고 버리십시오. 교회가 공중으로 이끌려 주님을 맞을 때까지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이루려 하는 삶을 지속하십시오.

이혼에도 성경적인 지지를 얻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이혼을 반드시 하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이혼증서를 만드셨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어디서 하나님이 이혼을 허락하셨는가를 알아 보기 전에, 먼저 우리는 단어 정의를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혼은 결혼의 해체를 의미합니다. 기술적으로 말해 죽음이 부부를 헤어지게 합니다. 이것은 성경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유일한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특별히 지명된 장소 중의 한 곳에서 결혼을 했다면 영원히 결혼한 상태가 된다고 하는 몰몬교 신자 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자들에게 자명한 것입니다. (즉, 죽음이 부부를 갈라놓는다는 것). 만일 배우자가 죽었다면 그 결혼은 더 이상 지속되지 않습니다. 로마서 7장 1절을 보면 , “ 형제들아 (내가 법을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법이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만 그를 지배하는 줄 알지 못하였느냐?” 이 구절은 간단한 논리를 갖고 있습니다. 죽은 자를 기소하지 않는 것은 상식입니다. 어떠한 일을 했건 그를 묻어주는 일만이 있을 뿐입니다. 법은 죽은 자에겐 효력이 없습니다. 자살하는 건 법에 위배되지만 죽은 자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묻어주는 일 밖엔 없습니다. 팔레스타인들은 사울의 시체를 매달았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굴욕스런 일이었지만 죽은 사울에겐 더 이상 해가 되진 못했습니다.

위의 괄호 안에 있는 말씀을 간과하지 마십시오. 사무엘 깁 박사님은 이 괄호는 “독자에게 주는 저자의 특별한 알림” 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 법을 아는” 이라는 알림은 그리스도인들의 지적인 토론에서 90 %가 삭제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성경공부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습니다. 만일 공부를 한다면 그들은 대부분 구약성경이 어떠한 경우라도 그리스도인들에겐 적용이 안된다고 믿으면서 실수로 구약성경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내가 법을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이 뜻은 법을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서 7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성경의 많은 부분이 이러한 방식을 따릅니다. 이사야서 28장 9절로 10절에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가르치는가를 보여줍니다.
“(9) 그분께서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시려는가? 그분께서 누구에게 가르침을 깨닫게 하시려는가? 젖을 떼고 품에서 물러난 자들에게로다. (10) 이는 반드시 훈계 위에 훈계가 있어야 하며 훈계 위에 훈계가 있어야 하고 줄 위에 줄이 있어야 하며 줄 위에 줄이 있어야 하되 여기에도 조금 저기에도 조금 있어야 할 것임이요.”

만일 우리가 하나를 모르면 둘을 모르고 그 다음 셋도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을 이해하도록 하나님께서는 다른 모든 학습처럼 한번에 하나씩 기록된 것들을 나열하셨습니다.
우리는 단계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그런즉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선생 이었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 함이라.” (갈3:24)
율법을 잘 알수록 그리스도 예수님을 더 잘 알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완성입니다. 율법을 더 많이 알고 이해할수록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천년왕국시대와 그 이후에도 구약의 율법이 유효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들은 천년 왕국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자들이 구약성경의 율법에 근거해 심판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단지 배우기 위해 공중으로 이끌림을 받은 이후에도 아주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입니다.(이사야 29장 23절~24절 참조)
우리는 그러면 상당히 많은 시간을 말씀공부에 매달려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축복을 놓칠 겁니다. 결국엔 우리가 감당 못해 다스릴 수 없을 겁니다.(딤후 2:12)
하나님은 성경을 읽고(이사야 34:16), 연구하고(딤후 2:15) 또한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구분하라고(딤후 2:15)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우리 각자가 행하도록 그 분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선 우리가 어떻게 행하는가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 겁니다.(고전 3:13) 만일 우리가 이렇게 간단한 가르침에도 지금 복종할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훗날 더 큰 책임을 우리에게 돌리실까요?

그 이유로는 하나님이 로마서 7장 2 절에 ,
“남편 있는 여인이 자기 남편이 살아있을 때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여 있으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자기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주께서 한 예로서 율법 아래 있는 여자를 사용하신 이유는 남편이 어떠한 행동을 했다 하더라도 그녀는 그 남편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세 율법에는 여자가 이혼의 사유를 갖지 못합니다. 남자는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 그의 아내와 이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몇 가지 예외가 있지만 거의 대부분 아내에게 기쁨을 얻지 못하면 남편은 이혼을 할 수 있었습니다.(신 24장)
여자가 남편으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방법은 남편이 죽는 것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여자가 남편과 이혼할 수 있는 다른 사유가 있습니다. 잠시 이것을 살펴 보겠습니다. 그러나 여자가 남편이 죽어야 해방된다는 것은 여전히 옳은 것입니다. 만일 남편이 죽으면 여자는 그 남편으로부터 해방됩니다. 고전 7장 39절에는 또한, “아내는 자기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법으로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롭게 되어 자기가 원하는 자에게 시집 갈 수 있으나 오직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여기서 결혼을 끝내는 원인으로서의 죽음과 성경에 기록된 또 다른 결혼을 살펴보겠습니다.
주목하십시오 여러분 이혼이 성경적 이면 재혼도 성경적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선 지상사역 기간동안 “논란이 분분한” 문제들을 많이 다루셨습니다.
그 중 하나가 이혼입니다. 주님은 요단 강 넘어 유대 해안까지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9장은 한 바리세인중의 하나가 예수님의 말씀에 꼬투리를 잡을 게 없나 하고 질문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리면 이 질문을 한 사람은 성경이 말씀하시기를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였다고 하였고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한 그 바리세인에게 예수님은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질문은 인간의 중대사인 이혼에 대한 주님의 견해를 인류에게 주시고자 정리한 것이었습니다. 그 바리세인이 묻습니다, “ 남자가 어떤 이유로든 자기 아내를 버리는 것이 율법에 맞으니이까?” 여러분도 답을 듣고 싶어하는 똑 같은 문제이지 않습니까? 그럼 주님께서 무어라 하셨을까요?

“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 정말 기상천외한 질문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인지 하셨다면 누군가 성경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자 할 때 거의 대부분 분별있는 그리스도인이 꺼리는 사람은 아주 완고하고 확신도 없는 사람, 바로 성경을 읽지 않는 자 아닙니까? 여러분이 지금 해야 할 것은 이 책자의 진도를 더 나가기 전에 먼저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무어라 말씀하시는 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이 여러분이 지금 읽고 있는 이 글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성경을 펼치시고 위에 기술된 구절을 찾으십시오. 여러분은 질문을 합니다., “ 이혼을 하는 것이 정말 온당한 것인가? ” 아마도 여러분은 바리세인도 아니며 마음의 동기가 순수하지만, 이 질문의 답은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이 바리세인에게 질문한 것과 여전히 똑 같습니다. “처음에 사람을 만드신 이가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런 까닭에 남자가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하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 그런즉 그들이 더 이상 둘이 아니요, 한 육체이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여기에 예수님이 주신 3가지 메시지가 있는데 결혼의 최우선성, 결혼의 지속성, 그리고 결혼의 연합성 입니다.

이것은 다른 질문에도 적용됩니다.,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어 아내를 버리라 명령하였나이까?” (마19:7)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같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결혼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왜 하나님은 이혼을 허락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모세가 너희 마음이 완악하므로 아내를 버리도록 허락하였으나 처음부터 그렇지는 아니하였느니라.” 구약성경에서 남자는 어떠한 경우라도 그의 아내를 버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신 24:1) 이 법이 여전히 유효합니까? 주님은 마태복음 19장 9절에서 답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 외에 다른 이유로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니라.”

이 성경 구절의 말씀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혼의 사유를 주십니다.
첫 번째 : 성경적인 이혼 사유는 “간음” 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가르침 - 즉 간음이란 사람이 결혼 전에 성관계를 갖는 것이라든가 / 결혼 이외의 성관계를 음행이라 한다 - 을 깨끗이 정리해줍니다. 분명히 결혼한 사람도 간음죄를 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간음은 결혼 전이나 결혼 후에 관계없이 불법적인 성관계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독신자나 결혼한 자나 간음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배우자 외에 다른 사람과 성적으로 결합했다면 간음죄를 지은 것이고 이혼의 사유가 됩니다.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이혼은 필수적인 것이 절대 아닙니다. 만일 범죄로부터 피해를 당한 자가 용서하고(물론 잊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범죄한자가 진정으로 돌이키고 자기 죄를 버리고 결혼이 회복된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피해를 당한 자가 이혼을 요구한다면 그는 성경적인 권위를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로마서 7장으로 돌아가 살펴보면 온당한 사유가 없는 이혼을 성령님은 음행으로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이혼이 되는 죽음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로마서 7장 1-2의 두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지금은 음행에 대해서 로마서7:3-4을 보겠습니다. 1절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법을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그래서 이 글은 구약성경을 잘아는 사람을 위해 쓴 것입니다.

로마서 7:2-3에서 바울은 말씀합니다.
“(2) 남편 있는 여인이 자기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여 있으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자기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3) 그런즉 만일 그녀가 자기 남편이 살아있을 때에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 간부(姦婦)라 할 것이로되 그녀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와 결혼할 지라도 간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만일 여자가 자기 남편이 살아있는 데도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면 그녀는 음행한 여자가 됩니다. ( 이 여자는 음행한 여인이라고 “불리워” 집니다. 이것은 공적이며 교회전체에서 응징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여기에 소설 주홍글씨의 사상이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녀가 율법에 부합되게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남편이 죽는 겁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을 따른 겁니다. (롬 7:1) 정당한 이혼은 간음입니다.(마 19) 그리고 떠나는 것
입니다.(고전 7장-후에 다루겠습니다) 또한 좀 더 있다가 재혼의 경우를 다루겠습니다. 지금은 마태복음 19장을 읽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 눈과 이해력이 열려 성경을 알게 해달라고 간구하십시오. 하나님은 믿음과 실행의 모든 문제에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안그런가요?

두 번째 : 성경적인 이혼 사유는 고전 7장에 있습니다.
1절에 의하면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에게 다양한 주제를 편지로 물었습니다. 바울은 결혼의 의무를 다루면서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결혼에 대해 이렇게 조언합니다.
고전 7:7-11
“(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사람마다 하나님께 받은 고유한 은사(恩賜)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8) 그러므로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말하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그들에게 좋으니라.
(9) 그러나 그들이 억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게 하라. 불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10)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령하노니 명령하는 이는 내가 아니라 주시니라. 아내는 자기 남편을 떠나지 말라.
(11) 그러나 떠나게 되거든 결혼하지 말고 그대로 지내든지 아니면 자기 남편과 화해하라. 또한 남편도 자기 아내를 버리지 말지니라."

명령은 분명합니다. 가능하다면 혼자 사는 것이 좋다는 겁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도록 초점을 맞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있는 자는 주어지는 의무가 있습니다.(7:32-35) 정욕이 불타오르는 것 보다 결혼하는 것이 더 낫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람은 배우자와 성욕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과 같은 사람은 독신의 은사가 주어졌습니다.(마 19:11-12)

10절과 11절은 성경적인 이혼 사유를 이해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명령은 분명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떠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아내의 의무는 남편에게 결혼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겁니다. “그러나 떠나게 되거든 ….” 그녀가 떠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10절 참조) 그러나 어찌 되었던 그녀는 떠납니다. 이것은 사람이 자유로운 의지가 있기 때문이고 만일 배우자가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떠난 사람은 “ 결혼하지 말고 그대로 지내든지 아니면 자기 남편과 화해 하라.” 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그것이 간음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떠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합니다.(고전 7:12-16)
(12) 나머지 사람들에게 말하노니 이는 나의 말이요 주의 말씀이 아니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않는 아내가 있어 그와 함께 살기를 기뻐하거든 그 아내를 버리지 말고
(13) 또한 여자에게 믿지 않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살기를 기뻐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14) 이는 믿지 않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히 구별되고 믿지 않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히 구별됨이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들도 부정하였으리라.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거룩하니라.
(15) 그러나 믿지 않는 자가 떠나려 하거든 더나게 둘지니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경우에 얽매일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에 이르도록 우리를 부르셨느니라.
(16) 오 아내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오 남자여, 네가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각 사람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누어 주신대로 주께서 그를 부르신 그대로 행할 지니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 같이 지시 하노라.” 이 말씀은 각기 떠나는 믿는 자 또는 안믿는 배우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10절과 11절에서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명령 즉 아내는 남편을 떠나지 말고 남편은 아내를 버리지 말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 명령에 어떤 예외는 없는가 궁금해 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이와 같이 질문을 제기 했을 겁니다. " 믿지 않는 자 둘이 결혼을 했는데 그 중 하나가 구원을 받았다면 그리스도인은 믿지 않는 자와 이혼을 할 수 있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급하지 않으신 주제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 구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는 것이므로 바울의 견해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헤어짐에 대한 질문에 강한 어조로 “안됨” 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믿지 않는 자가 구원받은 자와 계속 결혼한 상태로 있기 원한다면 구원받은 자는 성경상의 의무로 결혼한 상태로 있어야 합니다. 만일 믿지 않는 자가 떠난다면 구원받은 자는 그런 경우 고전 7:10 -11의 굴레아래 있지 않습니다.

만일 믿는 배우자가 떠난다면 그리스도인 남편은 어떻게 해야 될까요? 같은 원리가 여기에 적용됩니까? 우리가 이 주제를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인 것은 두 그리스도인의 헤어짐에 대한 해당 조건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짐작컨데 두 그리스도인는 이혼하지 않고 그들의 서약을 지킬 겁니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도 이혼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아시는 우리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이혼하는 것을 분명히 아십니다.
하나님은 고전 7장의 그리스도인들 위해 이혼증서 만드는 것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버리는 것은 성경적인 이혼 사유입니다. 다시 고전 7:14-17을 읽으시고 특히 15절에 주목하십시오. “그러나 믿지 않는 자가 떠나려 하거든 떠나게 둘 지니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경우에 얽매일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에 이르도록 우리를 부르셨느니라.” 주님은 믿지 않는 자가 믿는 자와 결혼하는 것을 다루십니다. 떠나는 것은 이혼의 사유입니다. 불신자와 구원 받은 자(다시 말하면 이것은 불신자와 결혼한 이후에 구원받은 사람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인이 이런 경우엔 얽매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조언은 그들을 가도록 놔두는 것입니다.

말하기 어렵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성경적입니다. 두 그리스도인의 이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이혼으로 받으시는 사유는 감음죄를 범했을 뿐입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은 이혼을 허락하십니다. 기타 다른 경우에는 그리스도인 아내가 그녀의 남편을 떠나서는 안됩니다.(고전 7:10) 그리고 그리스도인 남편은 그의 아내를 절대로 버리면 안됩니다.(고전 7:11) 만일 그렇게 하면 죄가 됩니다. 만일 당신이 구원을 받았고 당신의 배우자가 떠난다면 그 배우자와 이혼하는 것에 대해 성경적인 허락을 받지 못합니다.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독신으로 있든지 아니면 화해를 해야 합니다.(고전 7:10) 만일 배우자가 당신과 이혼을 한다면 당신은 굴레아래 놓이지 않습니다.(고전 7:25-28) 그러므로 떠나는 것의 성경적인 정의는 당신의 배우자가 떠나고 이혼을 하는 경우입니다. 만일 배우자가 그냥 떠난다면 당신은 이혼을 해야만 합니다.

두 그리스도인들이 이혼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다는 것이 성경적인 진리라는 것을 재차 강조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일평생 결혼을 유지해야 합니다.

고전 7:25-28에 보면 독신자들에게 주는 지혜의 말씀이 있습니다.
“(25) 처녀들에 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명령이 없으되 주의 긍휼을 받아 신실하게 된 자로서 내 판단을 말하노라.
(26)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현재의 고난으로 인하여 사람이 그대로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27) 네가 아내에게 매여 있느냐? 벗어나려 하지 말라. 네가 아내에게서 놓여 있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28) 그러나 네가 장가를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며 처녀가 시집을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들에게는 육신 안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성령님은 (사도 바울이 아님) 독신으로 있는게 좋다고 재차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벌써 결혼을 했다면 이혼을 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만일 아내로부터 (이혼하여) 자유롭게 되었다면 아내를 얻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혼의 사유를 주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떠나기에 대한 구절을 따라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떠나기의 성경적인 정의는 앞의 글에서 설명 드렸습니다.
떠나는 것은 율법적인 헤어짐 보다 더 심한 것입니다.

정신적인 고통에서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모든 사유로 인해 배우자와 법적으로 타당한 이혼을 했다고 해도 간음과 떠나기 만이 성경적인 이혼의 사유가 됩니다. 그 외의 모든 이혼사유는 불법입니다.

만일 사람이 합법적인 사유로 이혼을 했다면 (오직 합법적인 사유는 성경적 이어야 한다) 우리 주님이 보시기에 그것은 독신으로 있어야 합니다. 데일(이 책의 첫 페이지 두 남자의 이야기에 나오는 목사로 간통한 사모의 남편.)은 미국법으로 보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나 더 이상 여자와 결혼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독신이기 때문이지요. 그는 아내와 함께 살지 않습니다. 아내가 없습니다. 오직 성경(“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 ?…”) 에 무지한 사람이나 혹은 바리세인 같은 사람만이 그 사역에서 이 사람 데일이 떠나야만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데일은 결혼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 재 혼

이 부분에선 우리가 반드시 마태복음 19장과 고전 7장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이 두 구절에서 하나님은 이혼을 다루시면서 재혼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마19:9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 외에 다른 이유로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니라.”
한 남자가 간음 때문에 아내를 버렸다고 가정합시다. 그녀는 남편에게 부정을 저지른 죄를 짓고 다른 남자에게 결혼을 했다고 하면 이 경우 그 남자에게 성경적인 이혼의 사유가 되어 간음죄 없이 자유로운 재혼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견해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간음으로 인해 그의 아내를 버리는 자가 특정한 여인에게 장가를 더 이상 가지 않으면 독신입니다. 즉 아내가 없습니다. 그는 성경적인 이혼사유를 갖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성경적인 재혼의 사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그 남자가 재혼할 상대의 여인이 버려지지 않은 여인이라면 그 남자는 간음 죄를 지지 않습니다. 이 일은 성경을 따른 것으로 그 남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한 여인과 결혼한 것입니다. 만일 그 남자가 감독(딤전 3:2) 이라면 한 아내를 가진 남편입니다.

부연하여 만일 한 남자가 간음이나 떠나기 이외의 다른 사유로 이혼을 하고 다른 여인에게 장가를 든다면 , 그는 간음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아주 분명하게 누가복음 16장 18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니라.”

만일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같이 살 수 없다고 결정한다면( 이것을 법정에서는 “양립할 수 없는 의견차이), 이 부부의 유일한 선택은 여생을 독신으로 지내든가, 다시 화합해야 한다.
한번 더 고전 7:10-11의 말씀을 보면 “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령하노니 명령하는 이는 내가 아니라 주시니라. 아내는 자기 남편을 떠나지 말라. 그러나 떠나게 되거든 결혼하지 말고 그대로 지내든지 아니면 자기 남편과 화해하라. 또한 남편도 자기 아내를 버리지 말지니라.”
자세한 예를 들기 위해 ,아내가 남편을 떠난다고 생각해봅시다. 이때 아내와 이혼하는 것이 남편에겐 성경적인 사유가 되지 않습니다. 남편은 부주의한 사람(방탕자, 건달, 도덕적으로 불순한 사람)입니다. 그 남편은 그녀를 기쁘게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사랑하지도 않았지만, 그는 아내를 신뢰했고 같이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녀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고 짐을 꾸려 떠난다고 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녀는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독신으로 지내든지 아니면 남편과 화해를 하든지…

성령님께서는 명백하게 다루셨습니다. 이 여인에게 지시합니다. “남편을 떠나지 말라” 그리고 남편에게 똑 같이 지시를 줍니다. “아내를 버리지 말라” 즉 아내는 남편을 떠나지 말라고 하며 남편은 그 아내와 이혼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궁금해 할 겁니다. “아내가 떠날 경우엔?” 그래도 남자에게 주시는 명령은 변하지 않습니다. “ 남편은 아내를 버리지 말라” 입니다. 옛 말에 “둘 다 틀리면 바로 잡을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옳은 겁니다. 남편이 아내와 이혼하지 않으려면 아내를 그냥 편히 가게 놓아줘야 합니다. 이 방법이 이혼을 싫어하는 남편과 이혼하기를 원하는 아내의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남편의 생각에 그녀를 제거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내를 죽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남편은 아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떠난다고 생각해야만 합니다. 남편이 “아 좋다! 그녀가 나를 떠났지, 그러면 이혼해야지” 생각한다면 이 각본은 고전 7:10과 대치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하고 간단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 남편은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남편이 아내와 이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남편 여러분들은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남편은 어떠한 경우에도 아내와 이혼을 하지 말라! 디모데 후서 2장 13절에서 말씀합니다. “ 우리가 믿지 아니하여도 그분은 항상 신실하시니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느니라”

만일 그 여인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남편을 떠나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간다면 그녀는 간음죄를 지은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되었을 경우 남편은 자유인이 되어 성경적인 재혼 사유에 부합됩니다.(고전 7:28) 만일 그의 아내가 (하나님이 금지하시는) 떠나기를 하여 남편과 이혼하지 않은 상태나 다른 사람과 간음을 행하지 않은 상태로 있다면 반드시 남편과 아내 둘 다 여생을 독신으로 남아야 합니다.

만일 그 남자가 성경적 이혼 사유에 부합되어 재혼을 한다면 그의 아내는 두 가지의 선택에서 하나만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반드시 여생을 독신으로 남아 있던가 아니면 알면서도 고의로 간음죄를 범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여러분은 저와 다툴게 아니고 성경의 권위와 상대를 하십시오. 하나님은 결혼 서약을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결혼은 정말 신중한 일입니다. 결코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만일 결혼한 남자나 여인이 간음죄를 범하고 배우자가 이혼을 원한다면 죄를 범한자가 반드시 여생을 독신으로 보내든지 아니면 알면서도 고의로 간음죄를 범해야 합니다. 다윗의 경우, 우리는 그가 죄값을 톡톡히 치른 것을 압니다. 그러니 독신으로 그냥 있는게 훨씬 좋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이것은 너무 하다고 생가할지 모릅니다. 허나 죄의길이 너무한 겁니다.
(잠 13:15)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말하기를 결혼한 자들은 이혼할 생각을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만일 성경에 부합된 이혼을 한다면 다시 결혼을 해서는 안된다고 하십니다.(고전 7:27)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 (28) 그러나 네가 장가를 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자들에게는 육신 안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재혼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이혼과 재혼을 하는 자는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재혼하는 자에게는 육신 안에 고난이 있을 겁니다. 만일 당신이 사라라는 여인과 수년동안 결혼 했다가 그녀가 죽거나 당신을 떠나서 재혼을 한다고 한다면 때때로 당신은 그 새로 맞이한 아내를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할 겁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 가를 보겠습니다. 당신은 음식 만들기, 청소, 취미나 습관을 비교하게 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성경에 부합된 재혼을 한 사람은 죄를 짓지 않지만 앞에서 경고했듯이 육신 안에 고통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처녀가 온당하고 좋은 상태로 결혼한다고 믿습니다. 주께서는 성경에 부합되게 이혼한 사람은 처녀가 결혼하는 거와 같은 권리와 특권이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고전 7:28) 데일과 랜디 두 사람은 성경적 사유로 이혼을 했습니다. 한 분은 (아내의) 간음으로 인해 이혼을 받아들여야 했고 다른 한 분은 (아내의) 떠나기로 인해 이혼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사람은 성경적인 재혼 사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당시에도 재혼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재혼을 한다면 한 아내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 같은 죄책감을 갖지 마십시오. 성경 마가복음 7:13절에 ,“너희의 전해 내려오는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가 되게 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너희가 많이 행하느니라.”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남자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 입니다. 특히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이 실수를 할 때엔 더욱 그렇습니다. 이것은 수용의 문제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드립니까? 아니면 그것을 바꿀려고 합니까? 당신의 신앙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합니까? 아니면 당신의 신앙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게 합니까?

이 글은 쉬운 길을 선택한 간음한 남자와 여자에게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간음죄는 끔찍한 것입니다. 이 나라 미국은 완전히 간음한자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 큰 나라에 저주를 가져온 건 바로 죄입니다. 누구도 간음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동시에 우리 주님처럼 우리도 죄를 회개하고자 하는 간음죄를 범한자들에게 동정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간음 죄를 범하다 잡힌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범죄하지 말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당신이 간음 죄를 범하였고 결코 하나님께 자백하지 않았다면 지금 당장 반드시 자백하십시오. 죄는 암적인 것으로 당신의 모든 축복을 갉아 먹을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 …음행을 일삼는 자나 부정한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결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왕국에서 아무 상속도 받지 못하리라.” (엡 5:5) 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가 범하는 죄들에 국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든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요일 1:7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모든 죄에는 간음죄도 포함됩니다.

구약성경에는 간음을 범한 자에게 아무런 증서도 만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만일 사람이 간음이나 살인을 범했다면 죽이는 것이 율법의 명령입니다. (신 17:7, 레 20:11)
신약성경에는 로마서 5장 20절에 말씀하십니다. “죄가 넘친 곳에 은혜가 더욱 더 넘쳤나니.”
하나님은 당신을 용서하십니다. 반드시 하나님께로 가서 죄를 자백하고 당신의 죄를 기꺼이 버리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용서하시길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 중 어떤이는 아내나 남편과 별거할 지도 모릅니다. 오직 여러분은 이전 페이지에 있는 성경적인 이혼사유의 두 가지 선택을 동시에 가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어떻게 해야지?” 라고 질문합니다. 만일 하나님 말씀을 따르기 원한다면 오직 두 가지 중에서 하나만를 선택해야 합니다.
(1) 배우자와 화해한다.
(2) 여생을 독신으로 지낸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한 상태로 벌써 재혼한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그들은 분명 간음을 범하고 사는 겁니다. 그럼 질문하실 겁니다. “전의 배우자와 화해하기 위해 지금 결혼해서 살고 있는 사람과 이혼해야 하나요?” 대답은 신명기 24장 1-4에 있습니다,
“(1) 남자가 자기 아내를 취하여 결혼한 뒤에 그녀에게 부정함이 있음을 발견하였으므로 자기 눈으로 그녀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그녀의 손에 주고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수 있느니라.
(3) 그런데 나중의 남편도 그녀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녀의 손에 주고 그녀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혹은 그녀를 아내로 취한 나중의 남편이 죽었으면
(4)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녀를 내보낸 남편이 그녀를 다시 아내로 취하지 말지니 이 일은 주 앞에 가증한 것이니라.

" 너는 주 네 하나님께서 소유로 주시는 땅으로 하여금 범죄하지 못하게 할지니라.” 또 다시 옛 말에 “ 둘 다 틀리면 바로잡을 수 없다.”는 말이 적용됩니다. 만일 당신이 율법에 부합되게 한 여인과 결혼하였다면(롬 13:1), 당신은 결혼을 지속하고 아내를 신뢰하여야 합니다. 간음으로 판단되는 한 반드시 주님의 피에 그 죄를 내려 놓고 하나님 어린양에게 없애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성령님께서 다윗과 밧세바의 경우를 말씀하신 것이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큽니다. 하나님은 세 번이나 “헷 족속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라고 부르십니다.(삼하 11:3, 26 12:10) 그러나 가장 흥미로운 예는 삼하 12:15입니다. 우리야가 죽게된 정황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왕 다윗이 요압에게 명하여 이 힘센 용사를 격전지에 보내고 그를 버리도록 해서 죽였습니다. 우리야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성령님께서 말씀하십니다, “ 우리야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치시매 아이가 심히 앓으니라.” 비록 우리야가 죽은지 아홉달이 되었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밧세바를 우리야의 아내라고 부르십니다. 그녀는 두 명의 남편을 두고 있습니다. 밧세바는 우리야의 아내일 뿐만 아니라 다윗의 아내 (삼하 11:27, 12:24)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창기의 이름(라합)과 모압 여인(룻)이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에 기록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일은 하나님에게 심히 역겨운 것이 되어서 밧세바의 이름이 기록되는 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 “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1:6) 우리야는 기록되었지만 밧세바의 이름은 빠져있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장의 우리야의 아내 “였던”이란 단어를 가볍게 넘기지 말아야 합니다. 삼하 12장에선 우리야가 죽은 후 아홉달이 지나 그 아이가 죽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여전히 밧세바는 우리야의 아내였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삼하 12:24) 분명히 그 아이가 죽은
후 주님께서는 분명히 과거시제로 그 결혼을 말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피의 속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간음을 한 사람을 죽이도록 요구하십니다. “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롬 6:23) 하나님은 이 무죄한 어린아이가 다윗과 밧세바를 대신해서 죽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전형입니다. 이 속죄가 이루어진 후 밧세바는 다윗의 아내로 불리워졌습니다. 우리야와의 결혼은 과거시제가 되었습니다. 간음한 여인은 갔고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아니 했습니다. “가서 다시는 범죄하지 말라.” (요 8:11) 다시말하면 그녀는 일생동안 다윗을 따랐습니다.

당신을 대신하는 것은 당신의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대신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죄들을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희생이 되셨습니다. 만일 당신이 간음죄를 범하고 계시다면 하나님께 나와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십시오. 간음죄가 엄청난 값을 치른다 하더라도 용서받지 못할 죄는 아닙니다. 다윗은 그 사실을 알았고 그의 죄는 버려졌지만 (put away)-【삼하 12:13에서 상용된 이 단어가 흥미롭지 않습니까?-(비교)-마 19:9의 “버리다(put away)와 같은 표현임)】그 가 심은 대로 얻은 수확은 마음의 비통함 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젊어서는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인생의 실패로 인해 기도합니다. 항상 그런 식으론 해결이 안됩니다. 간음은 가정과 마음과 건강을 망가뜨립니다. 결단코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짧은 쾌락으로 수년간의 슬픔, 고통, 비통과 거래하는 것은 무가치합니다. 당신이 범죄했다면 오직 그리스도만이 안식처가 됩니다. 그분은 산산조각 난 삶의 부스러기들을 다시 모아 한 자리에 돌려 놓을 수 있습니다.

● 그럼, 디모데 전서 3장은 뭐라고 말씀하죠?

디모데전서 3장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감독(bishop)이 반드시 해야 될 것들(blueprint)을 주목하십시오. 주님은 미사 여구를 사용하지 않고 말씀하십니다.
“(2) 감독은 반드시 책망 받을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며 깨어 있으며 행실이 바르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는 재능이 있으며
(3) 자기를 술에 내어주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이익을 탐내지 아니하며 오직 인내하며 말다툼하지 아니하며 탐욕을 부리지 아니하며
(4) 자기 집을 잘 다스려서 자기 자녀들로 하여금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 것이며
(5) (남자가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으리요?)
(6) 초신자는 안되나니 이는 그가 교만으로 높아져서 마귀의 정죄에 빠질까 염려함이요,
(7) 또한 감독은 반드시 밖에 있는 자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아야 하나니 이는 그로 하여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딤후 3:2-7)

자격요건이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는 반면에 “반드시”란 단어가 있어 16가지의 중요성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맨 처음 책망받을 것이 없어야 한다고 하면서 바로 “한 아내의 남편” 이어야 한다는 경고가 나옵니다. 성령님은 목사에게 다중결혼(일부다처 : 아내를 여럿 두는 것)을 금하고 계십니다 (이 문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됨). 만일 한 남자가 성경에서 벗어난 어떤 사유로 인해 이혼을 하고 다른 여자와 재혼을 하면 그 사람은 빈드시 감독의 직분에서 사임해야 합니다. 집사의 경우에도 같습니다. (딤전 3:12) 우리의 믿음에 비난이 될 소지가 있는 “한 때의 한 아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남자가 성경적인 사유로 이혼을 했다면 그는 아내가 없습니다. 그는 독신입니다. 그는 성경에서 말하는 처녀와 같습니다. (고전 7:28) 그 남자가 처녀라는 의미가 아니라 처녀가 지니는 거와 같은 특권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누구도 “한 아내를 가진 남편”을 덜 강조하지 않는 데도 불구하고 덜 강조되어야 마땅한 그 이외 것들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습니다. 동시에 16항목중 하나라도 다른 15개 항목 보다 강조 되서는 안됩니다. 순서적으로 성령님께서 참된 감독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책망받을 것이 없고
(2) 한 아내의 남편이며
(3) 깨어있고
(4) 맑은 정신
(5) 행실이 바르고
(6) 나그네를 대접하고
(7) 가르치는 재능이 있고
(8) 자기를 술에 내어 주지 않고
(9) 구타하지 않고
(10) 더러운 이익을 탐내지 않고
(11) 인내하며
(12) 말다툼 안하며
(13) 탐욕을 부리지 않고
(14) 자기 집을 잘 다스리고
(15) 초신자가 아니어야 하며
(16) 밖에 있는 자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어야 함

만일 위의 항목 중의 하나를 강조하는 정당성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첫 번째 항목이 되야 합니다. 반드시 감독은 책망받을 것이 없어야 (또는 반드시 인내하며 그리고 탐욕을 부리지 않음) 하는 것에 시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항목 중 두 번째 것이 최대의 논쟁거리가 되는 것은 이상합니다. 그렇습니다. 감독은 반드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것들도 역시 잊어서는 안됩니다. 감독이 나그네를 잘 대접하지 못한 이유로 자격을 상실했다고 말하는 사람을 들어 본적이 있습니까? 깨어 있는 것에 대해선 어떻습니까? 잘 가르치지 못하는 많은 목사님들에 대해서는? 제가 딤전 3장 2절을 깍아 내리려고 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는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오히려 전문장을 지속적으로 관조하게 됩니다. 만일 남자가 간음죄를 범하면 결코 감독직을 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가 아내에게 싫증을 느껴 같이 살 수 없다는 이유로 아내를 버리면(put away) 반드시 감독의 일을 그만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사유로 이혼을 했다면 한 남자가 강제적으로 자녀를 가지지 않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 남자에겐 그 직무(더 많은 것들을 포함해서)를 계속하도록 성경이 지지합니다. 여러분도 아멘 하십니까?

데일의 이야기를 기억하시죠? 지금 그는 새로 개척한 교회에서 선교사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전쟁 속에 아직도 메어 있습니다. 그는 성경적 사유로 이혼을 했습니다. 그가 거주하는 주 법정에서 간음으로 인한 사유로 이혼을 받아 들였습니다. 딤전 3장에 의하면 그가 한명의 아내를 가지고 있는 저와 같이 똑 같은 목회의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데일은 아내가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아내를 그에게 보내 주신다면( “누구든지 아내를 얻는 자는 좋은 것을 얻고 주의 은총을 얻는 자니라.” 잠언 18:22), 그는 여전히 딤전 3:2의 말씀에 부합되는 겁니다. 제발 데일과 한 남자를 바리 세인의 굴레에 넣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 특별한 젊은이를 결코 또 다른 아내에게 보내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결혼 시켰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당신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앉아 당신의 위치를 변호할 겁니까?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한 것이었다면 당신은 변호하는데 상당이 어려움을 겪을 겁니다.

이 책자를 처음 시작할 때, 당신은 오직 이혼만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성경을 찾아 보셨나요? 자세히 읽었다면 성경구절 중에 하나는 찾을 항목 속에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3:8에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 타락한 이스라엘이 이 모든 이유로 인하여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녀를 버리고 그녀에게 이혼증서를 주었으되 이스라엘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이를 두려워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도 가서 창녀 짓 하는 것을 보았노라.”
또 다른 구절은 이사야서 50:1 입니다, “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버린 네 어미의 이혼증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권자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보라 너희는 너희 불법들로 인하여 너희 자신을 팔았고 너희 어머니는 너희 범죄들로 인하여 버림을 받았느니라.”

하나님이 이혼을 하셨다니! 이스라엘의 간음으로 인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이혼증서를 주셨습니다. 오늘날 바리세인들의 옹호를 받는 기준에 의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는 자격을 상실하게 되는 거죠. 하나님이 이혼을 하셨으니까!

지금 우리는 이 사실이 아주 우스꽝스런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논리에 웃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순수하시고 순결하시며 그분의 영화로운 성품에 흠과 점이 없는 분이십니다. 비록 이스라엘과 이혼하셨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하나님이 간음한 여인과 이혼을 하는 것은 죄 또는 그 밖의 죄를 범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이혼을 하는 또 다른 사유가 됩니다.

만일 당신이 결혼을 끝내고자 하는 마음으로 괴로워 한다면 이혼에 대한 마음의 상처를 마무리하려는 것은 더욱 어렵게만 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혼은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아닙니다. 당신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요일 1:7) 만일 당신이 간음한 남자나 여자라면 요한복음 8장의 “가서 다시는 범죄하지 말라” 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십시오. 당신의 치료약을 받으십시오. 당신은 배우자와 화해하든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시고 그 다음에 독신의 은사를 간구하십시오.(고전 7:7)

만일 당신이 온전한 성경적 이혼의 사유(간음, 떠나기)를 가진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당신은 “오직 주안에서” 재혼할 수 있습니다.(고전 7:39) 오직 이것만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결혼할 수 있는 것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들에게는 육신 안에 고난이 있으리니,”(고전 7:28) 당신이 충돌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지는 않겠지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속이지 마십시오.

한번은 제가 목회하는 교회에 하나님께 수년동안 기도하여 자존심을 다시 세우고 재혼하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전처는 다른 남자에게로 시집 갔습니다. 목요일 저녁 교회에서 음악지휘자가 결혼하는 커플을 위해 친구들이 주선하는 파티(wedding shower)를 연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나 새 신부의 이름 팜(Pam) 대신 전처의 이름(폴라-Paula)을 자기도 모르게 말했습니다. 이름의 유사성으로 그러한 실수를 일으키기가 쉽다는 것을 당신도 잘 아실
겁니다. 덧붙이자면 이 음악 지휘자는 수년동안 게리와 폴라(Gary and Paula)를 말해 왔었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참석자 모두가 당황했지만 게리와 폴라에게 당면한 몇 가지 고난(trouble)의 좋은 예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게리가 자기도 모르게 팜이라고 부르는 큰 고난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이었습니다.
게리 또한 재혼녀 팜에게 "폴라! 아이구 이거 큰일 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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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관계에 대한 성경적 근거


1. 구약시대의 결혼

1) 태초의 결혼
결혼은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었으므로 신중하게 계발되고 보호되어야 한다. 결혼은 우리 인간의 성별의 목적과 성취이다. 그리고 가정 생활과 행복의 고유한 배경이 된다. 결혼에 관한 성경 구절들로는 창세기에서 발견되는 구절들보다 더 아름다운 구절들은 별로 없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우리는 성경안에서 원만한 가정과 함께 종종 실패한 가정을 읽게 된다. 그러나 이 실패들은 언제나 그들의 속성, 즉 하나님의 의도와는 다른 인간의 탈선들에 기인하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결혼을 위한 신약 성경의 표준들을 구약 성경 이야기들에 적용시키기를 주장한다면 우리는 실망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 성경의 양식들과 원리들이 의미 있는 친족관계와 행복한 가정들을 세우고 육성하는 방법에 관해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과 바울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근거하여 결혼과 가족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을 세우고 있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마19:4-5, 5:31).
(1) 결혼의 역사
창세기 2:18-21의 하나님의 창조사(創造史)를 읽게 되면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를 시작하심과 함께 결혼의 기원을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자를 지으신 목적과 지으신 방법이 나온다. 여자는 남자를 위해, 남자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창조되었으며, 결혼을 통해서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도록 하셨다(창1:26-28).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결혼을 허락한 것은 첫째는 성행위, 둘째는 남편과 아내사이의 반려 관계 형성, 셋째는 가족 경제기능, 넷째는 종교적 기능, 다섯째는 자녀를 낳아서 대를 이어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단 한 남자와 오직 한 여자와의 결합만 땅에 전제하셨다(창2:24참조).
(2) 결혼의 참 그림자
성경의 결혼역사는 아담이 첫 테이프를 끊은 이래 현실 세상에서 영구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혼인 잔치로 막을 내린다. 바로 결혼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로운 연합을 상징하는 모형이다. 아담이 한 아내를 얻기 위해 옆구리를 찢기우고 피흘려야 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의 옆구리를 찢기우고 피흘리심으로 교회가 탄생했다(행20:28, 2:36-47참조). 바로 아담 부부의 범죄 후 인간 유죄시대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인 어린양 혼인 잔치에 의해 회복되고 인류 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될 것이다(계21:2참조).
(3)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피조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전제에 비추어 결혼과 가정을 포함한 인간 관계들을 해석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가 창세기의 가르침을 이해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성경적 결혼관을 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은 인격적인, 이성적인, 신뢰할 수 있는, 창조적인, 주권적 및 영적인 피조물이다. 인간은 도덕적인 선택과 지성적인 결단을 내릴 수 있다. 또한 깊고 의미 있는 관계들을 맺을 수 있다. 이것이 결혼에는 필수적이다. 물론 인간이 이러한 놀라운 능력들을 소유하고 있는 반면에 인간이 그 능력들을 완전히 조절하지 못하므로 해서 왕왕 좌절을 겪게 되기도 한다. 바로 이것이 성경은 '죄'라고 부르며, 그것을 또한 인간의 타락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한 교리는 우리를 절망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소망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을 실력대로 평가하며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창조주에게 다시 순종하도록 촉구한다. 이 돌아서는 회심을 통해 인간은 그의 완전한 잠재력뿐만 아니라 동시에 새로운 자유와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들 속에서의 새로운 차원들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을 닳은 인격임을 말한다. 즉 완전한 지(知)정(情), 의(意)를 갖추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또한 마음도 감정도 의지도 죄의 침해를 받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4) 남자와 여자로서의 인간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 들의 이름을 '사람' 이라 일컬으셨더라".
우리가 '사람'(man)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우리는 그것을 남성에 제한시키는 경향이 있다. 위에서 인용된 구절들이 기록된 창세기 기사에서 '사람'(man)이나 '아담'(Adam)이라는 단어들은 두 가지 성(性)들을 나타내고 있다. 남성과 여성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으로 전체에 대한 보충적인 표현들이다. 창세기 1장에서의 창조 기사는 신중심적이고 개괄적이다. 창세기 2장에서의 창조 기사는 인간 중심적이고 세부적이다. 어떤 일시적인 독자들이 제시하고 있듯이 이 창세기의 장들 사이에는 전혀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다. 창세기 1장은 창조의 면류관으로서의 인간과 더불어 창조의 광범위한 영역을 제시하고 있다. 반면에 2장은 하나님(7절), 인간의 환경(9-14절). 인간의 책임(15-17절), 인간의 주권(19, 20절, 창1:26; 시8편)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의 성별(18, 20-24절)등과 관련된 인간의 관계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이 인간성별의 주제는 우리의 당면한 연구에 중요하다. 창세기 2:18-21에서 말씀되고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 속에는 몇 가지 사실들이 명백하게 떠오른다.
첫째, 그 이야기에는 한 인격적인 존재로서의 아담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실재한다. 이 이야기의 문맥 속에서 생각할 때 바로 이 관심이 하나님께 서 하와를 창조하셨던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이 된다.
둘째, 우리는 인간의 상관적인 측면도 발견하게 된다. 한 인격적인 존재로서 아담이 고독하고 미완성적인 존재로 나타나고 있다. 즉 그는 창조물 가운데에서 비할 데 없는 독특한 존재의 위치에 서 있지만 돕는 배필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관계의 능력을 실현하려고 한다면 그는 관련이 될 어떤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성경이 지적해 주고 있듯이 인간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필요로 한다(창2:18). 이 필요성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더욱 발전된 증거가 된다. 성경의 하나님은 비인격적인 무정한, 독자적인 존재이신 것이 아니라 관계들 안에서 즐기시고 그 자신을 나타내시는 살아 있는 인격이시다.
셋째, 이 이야기 속에는 아담의 응답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도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은 하와를 남자와 전혀 관계없이 창조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그녀에게 즉시 반응을 나타내어 그녀를 그녀 자신으로 생각하면서도 그 자신과도 관계를 가진 존재로 이해했다. 그것은 마치 그 형상이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가 거울을 보고 그가 본 것을 좋아했던 것과 같다. 그것은 마치 그가 이렇게 말했던 것과 같다. "그녀는 '나'이면서도 그러나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단어인 '이쉬'(Ish)와 '이솨'(Ishah)에서도 암시가 되고 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더욱 자세히 고찰하게 되면 인간 관계들의 기본에 관해 아주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이 성경 기사는 하나님이 하와를 아담에게서 '만드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의 기사를 읽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이 기사의 아름다운 묘사를 통해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들을 배우게 된다.
첫째, 남자는 여자의 창조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여자는 하나님의 수공품이었다. 이 이야기의 해설자는 남자가 잠들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단순히 마취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아마도 아담이 창조에 있어서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둘째, 여자가 남자에게서 독립된 존재이긴 할지라도 여자는 남자의 한 부분이다. 창세기 저자가 문자적인 의미에서 갈빗대 하나에 대해 생각하도록 우리에게 의도하고 있든지 안하고 있든지 그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고찰 중인 관계에 대한 것이다. '갈빗대' 에 대한 히브리어 단어는 아마도 '옆구리'(side, NIV)로 해석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 그것은 '여자'가 실제로 남자의 인격의 한 온전한 면(side)이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거기에 여성에 관한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나 이 특성은 남성과 비교될 때 가장 잘 이해가 된다. 오늘날 말은 사람들이 인간적 성별의 육체적인 면을 과장하고 악용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성경이 이 육체적 양상을 인정하고 있는 반면에 그것은 한 남자와 그의 부인의 심리적이고 영적인 연합에 주의를 환기시키는데 더 많은 관심이 있는 것 같다. 설사 중상적인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 시대의 여성 차별주의에 대한 논쟁에 있어서 성경이 남성 우월주의를 지원하는 문서들 가운데 하나로 공격을 받아 오고 있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잘못 전해들은 여성 해방론자들은 성경을 남성 우월권의 대헌장으로 이해해 왔으며 여성의 권리를 확립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경을 출입금지 지역으로 선포해 왔다.
어떤 여타 문학도 성경보다 더 여성의 권위를 확립하고 여성들을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키는 데 기여하지 못했다는 것이 진실이다. 더욱이 지금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이 특별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그것은 여성이 아담을 위한 일종의 장남감으로서가 아니라 아담의 협동자와 보완자로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나타내고 있다. 신약 성경 구절을 인용해 보건대 아담과 하와는 남편과 아내로서 '생명의 은혜를 함께 유업으로 받을 자'들로 제시되고 있다(벧전3:7). 어거스틴(Augustine)은 이 창세기 기사를 주석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여자를 남자의 머리에서 만들지 않으셨으며, 또한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여자를 남자의 발에서 만들지 않으셨던 반면에 남자와 여자가 서로 협력자들이 되도록 여자를 남자의 옆구리에서 만드셨다고 해석을 했다.
(5) 남녀의 차이
남자와 여자가 심리적으로 보완이 되는 것은 전혀 별 문제로 하고 남녀 간에는 서로의 육체적인 차이가 있다. 이 사상은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성(sex)은 성경에서 추잡한 단어가 아니라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의 요소가 된다(창1:28). 하나님께서 최초의 결혼을 주례하셨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성경은 단순하게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하와)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성애(異性愛, heterosexuality)의 기적과 상호적인 사랑의 이적을 통해 남자와 여자는 심리적이고 육체적인 완성을 다같이 발견했다. 바로 여기에 결혼의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양식이 존재한다. 그 밖의 무엇이든지 다른 것은, 즉 동성애 관계나 혼외 정사 등과 같은 것은 탈선이며 실제로 하나님의 질책과 심판을 받게 된다(출20:14; 신22:2; 레18:22; 20:13). 자녀의 출산은 결혼의 완전히 자연적이고 예기된 결과이다. 이상적으로 말해서 자녀들은 성적 욕구를 동시에 만족시켜 주는 사랑의 행위에 의해 출산이 된다. 바로 이것이 결혼과 가정 내부의 안전을 받혀 주는 기반이다. 이것은 다음의 말씀들이 지닌 의미의 본질적인 요소가 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6) 떠남과 연합
결혼과 가정의 여타 중요한 양상들이 '떠남'(leaving)과 '연합'(cleaving)이라는 말들 속에서 표현이 되고 있다. 이 단어들은 모든 각 세대와 모든 각 새로운 가정 단위에 대한 독특하고 독자적인 역할도 암시하고 있다. 일단 자녀들이 성년에 도달하게 되면 그들이 가족의 둥우리를 떠나서 그들 자신의 가족들과 가정들을 세우러 나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당연히 예기되는 일이다. 그리고 각 새로운 가정은 대용물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새로운, 독자적인 그리고 책임 있는 가정이기도 하다.
또한 이 단어들은 사람들이 적절하게 '떠날' 때만이 책임 있게 '연합' 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책임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에게 결혼을 위한 준비를 시켜야 될 책임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결혼이 성립될 때 그들의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들이 단절되는 것을 허용해야 된다는 것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이제 함께 결합한 새로운 부부가 책임을 수납해야 하며 새로운 가정 단위를 성실하게 세워야 된다는 것도 암시하고 있다. 위협을 느끼는 젊은 기혼자들은 '연합' 이 '떠남' 을 요구할지라도 '연합'은 '떠남' 에 대한 변상들 이상의 것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이해해야 된다.
'연합한다' 라는 단어는 결혼 관계의 영속성을 암시한다. 나중에 이것에 대해 더 많이 언급하게 될 것이지만 하여튼 창세기 기사는 아주 최소 한도로 일부일처제, 정절 및 영속성 등을 분명하게 암시하고 있다.

2) 구약 시대의 결혼
결혼의 주제를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는 어떤 특별한 성경 구절이 구약 성경에 한 구절도 없는 반면에 우리의 성경의 첫 번째 부분은 결혼에 관한 모든 종류의 정보와 위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우리가 이 구약 성경의 본문들을 검토할 때 우리가 고대의 결혼 전승들을 고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것과 전혀 다른 문화 속에서 이루어진 결혼 전승들도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것과 윤리적이고 영속적인 것을 고찰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1) 중매 결혼
현대 서구인이 구약 성경의 결혼들에 관해 읽을 때 그에게 충격을 안겨 주는 첫 번째 사실들 가운데 하나가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들을 위한 적당한 배필들을 고르는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분명히 그러한 결혼 약정들은 자녀들이 아직 어린 시절인 아주 초기에 합의가 되어서 실제 결혼은 약혼 당사자들이 십대 초반에 도달했을 때 이루어졌을 수 있다. 소녀들은 열 두 살에 결혼할 수 있었고, 소년들은 열 두 살에 결혼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결혼 전승이 지닌 사상은 사춘기에 결혼을 시켜 난잡한 생활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사람에게 더 좋다는 것이었다.
구약 성경의 유명한 중매 결혼들 가운데 하나가 이삭과 리브가 사이의 결혼이었다. 우리는 자신의 하인장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는 아브라함의 말을 듣게 된다.
"내가 너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펼쳐질 때 우리는 어떻게 고대의 전승들이 준수되었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실례로 어떤 정식적인 조정들이 이루어질 수 있기 전에 리브가의 아버지와 형제가 협의가 되어 그들의 허락이 획득되어야 했다(창24:50). 이 약정이 성사되자 앞서 리브가에게 금손목고리들을 주었던 종은 정식으로 그녀의 가족에게 아주 값비싼 선물들을 건네주었다. 세세히 진술되지는 않았을지라도 이 선물은 아마도 신부의 아버지에게 통례적으로 주었던 돈이나 물품 지불을 나타내는 모하르(Mohar)나 '신부 몸값' (bride price)이었을 것이다. 그것의 일부는 그의 딸의 손실에 대한 보상이었고 일부는 그녀 남편의 이른 사망의 사건에 대비한 그녀의 미래의 보증금이었다.(참조, 창31:4), 신부 몸값을 지불하는 이 모하르(mohar)관습은 라반이 그의 딸들인 레아와 라헬을 위해 십사년 간을 노동하도록 야곱을 교묘히 속였던 사실이 기록된 나중의 이야기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창29:14-30). 마지막으로 신부의 확실한 동의가 실재한다(창24:57-58). 비록 이점에 있어서 그것이 입에 발린 말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하는 것 같을지라도 말이다. 중매 결혼들에 대한 구약 성경의 다른 유명한 실례들로는 옷니엘과 악사 사이의 결혼(수15:16-17), 삼손과 딤나 여인 사이의 결혼(삿14:1-14) 그리고 룻과 보아스 사이의 결혼(룻기) 등이 있다.
이 계약 결혼 관습이 사랑을 위한 결혼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분명히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구약 성경 기사들은(이미 언급된 기사들을 포함해서) 결혼들이 통례적으로 사랑의 향유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사람들은 분명히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깊은 안전감을 발견했다. 중매 결혼들이 아직도 실행되고 있는 사회들에서는 이혼율이 아주 낮다. 물론 거기에는 여타의 공헌 요소들도 있을 수 있지만 말이다.

(2) 결혼의 형태
성경에는 여러 가지 결혼 형태가 존재한다. 이러한 형태는 우리가 따라야 할 모델이 아니고 깊이 고찰할 문제이다. 오토 바압(Otto Baab)은 성경 속에서의 결혼의 형태를 다음 일곱 가지 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여가장 결혼이다. 이것은 어머니의 권위 아래 있는 결혼 상태이다. 구약에서 이것은 또 다시 두 가지 형태로 나뉘어 진다. 하나는 어린아이들이 어머니의 통제 아래 남아 있고, 남편은 그의 아내의 집에서 다소 영구적으로 정착하는 형태이다. 예를 들면 야곱과 모세의 경우라 고 할 수 있다(창29:1-3, 출2:21-22). 다른 하나는 아내가 자기 친족과 남아 있으면서 그녀의 남편이 때때로 방문하는 형태이다. 삼손이 딤나에 있는 그의 아내를 방문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삿15:1).
둘째는 부가장 결혼이다. 이것은 아버지의 권위 아래 있는 결혼 상태이다. 이것은 족보나 인구 조사 명단에서 볼 수 있다(창5장). 여기에는 딸들의 이름은 없다. 부인들의 이름은 아버지의 아들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민1:1-3:39. 26:5-62; 룻4:18-22). 이것이 현저히 나타난 것은 남편이 자기 아내에게 가지는 힘이다. 즉 아내가 자유와 권리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단지 남편의 권위를 넘을 수 없다(고전11:3). 더 나아가 남편은 소유권과 통제할 수 있는 맥락 가운데 이해된다(창20:3; 출21:22; 신22:22, 24:4; 삼하11:26).
셋째, 일부다처제의 결혼이다. 문자적으로 보면 결혼을 여러번 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둘 이상의 여자와 결혼한 것을 의미한다. 일부다처는 고대 이스라엘에 퍼져 있던 형태로서 자녀를 얻기 위하여 가지는 수가 있었다(창16:3, 29:18). 그러나 아내를 많이 가질 경우 거기에는 갈등과 불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대하11.1-22).
넷째는 일부일처제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구약에서도 나타나고(창2:24), 신약에서도 규칙적으로 전제되고 있다(마19:5; 고전6:16; 엡5:32). 또 많은 이스라엘의 법은 일부일처제를 강하게 지원하고 있다(출20:17. 21:5; 레18:8, 20:10, 2113; 민5:12; 신5:21).
구약 성경은 일부다처제의 실재를 인정하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이상에서의 이탈로 간주된다. 이 결혼 관습의 기원은 가인의 불미스러운 증증손자 라멕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창4.19). 일반적으로 말해서 성경 시대의 평범한 사람들은 창조의 '한 남자, 한 여자' 즉 일부일처 질서를 준수했다. 아주 유복한 사람들, 즉 부유층 계급만이 일부다처제 관습을 실행할 수 있었을 따름이다. 솔로몬에 관한 구약 성경의 이야기를 통해 미루어 보건대 사람이 더욱 유복해지고, 더욱 세속적이고 그리고 영적으로 더욱 둔감해 질수록 그 사람은 처첩들을 거느릴 수 있는 가능성이 더욱 높아 졌다(왕상11:1-6; 느13:26).
아브라함, 야곱, 엘가나, 다윗, 솔로몬 및 여타의 사람들처럼 남자들이 일부다처제를 실행했다는 사실이 결코 성경에 있어서의 그들의 이미지를 고양시키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암시하지도 않는다. 실제로 이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으로부터의 그들의 이탈은 그들 자신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온갖 종류의 비탄과 번민을 안겨 주었다. 아마도 가장 악명 높은 실례는 -이것의 결과들은 지금도 현대 문명을 파괴하려고 위협하고 있다- 하갈과 아브라함의 '결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합의 소산이 바로 이스마엘이었으며, 그를 통해 아랍 민족이 발생했다. 이삭과 이스마엘 자손들 사이에는 지금도 사랑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
일부다처제가 구약 성경에서 관용되고 있는 곳이 한 군데도 없으면서도 그것이 엄격하게 규정이 되고 있다. 그 실례는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는 사랑을 받고 하나는 미움을 받다가 그 사랑을 받는 자와 미움을 받는 자가 둘 다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소생이 장자이면 자기의 소유를 그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날에 그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로 장자를 삼아 참 장자 곧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보다 앞세우지 말고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다섯째는 족외혼(族外婚)이다. 이것은 자기 종족권 외에서 일어나는 결혼 형태이다. 예를 들면, 모세와 요셉이 각각 이방 여인과 결혼한 것이다(출2:21;창41:45). 특별히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한 후. 그들과 가나안 혼합 종족들과 불가피하게 접촉하게 되므로 서로 결혼하게 된 것은 족외혼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에스라는 이것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다(스9:2이하).
여섯째는 동족 결혼이다. 다른 종족에 속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고 관습에 따라 자기 종족끼리 결혼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다른 씨족과 결혼하는 것은 금지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는 동족 결혼이고 비이스라엘과는 족외혼이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그 자부를 구하는 내용에서(창24:4, 10) 그리고 야곱이 아내를 가나안 족속 가운데서 찾지 않고 그의 외삼촌 라반의 딸 가운데서 취한 것(창28:1-2)과 같은 것이다.
일곱째는 수혼(嫂婚)이다. 이것은 죽은 남편의 형제와 그 과부가 결혼하는 형태이다(신25:5-10). 이 형태의 목적은 이스라엘 여인이 종족 외에 남자가 결혼하는 것을 방지하고 이스라엘 안에서 죽은 남편의 이름을 계속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동족 결혼의 가치(동족의 순수성)와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3) 결혼에 관한 제한들
일반적으로 말해서 초기의 구약 성경의 관습은 한 남자가 그 자신의 종족 그룹이나 씨족 내부에서 결혼할 것을 요구했다(창34:10). 이것은 이삭(창 24:4), 야곱(창28:2) 및 삼손(삿14:3)등의 이야기들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이 요구는 나중에 이스라엘의 민족 내에 있는 어떤 사람이든지 포함되도록 확대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이 영적인 배교를 야기시키는 경우에 있어서는 외국인들과 결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출34:15-16; 신7:3-4). 포로 이후 시대에서조차도 우리는 유다로 귀환했었던 유대인들을 이방인들과 교혼한 것 때문에 느헤미야가 호되게 비난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느13:23-28).
이방인들과의 결혼에 관한 이 율법들과 더불어 가족 내부의 결혼에 관한 규칙들이 있었다. 실례로 남자가 그의 숙모와 결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민26:59). 한 남자와 그의 딸 사이나 또는 한 여인과 그녀의 아들 사이나 또는 오빠와 누이 사이 등의 근친 상간은 엄격히 금지되었다(레18:7-9). 또한 인척간의 결혼도 금지되었다(레18:8-17). 한 남자가 동시에 두 자매들과 결혼해서는 안된다(레18:18). 이 법률들의 배경이 되는 이유들은 육체적인 관점과 영적인 관점에서 다같이 현명한 것이었다. 그 법도의 의도는 이스라엘의 순결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4) 이혼
이혼의 권리를 인정하면서도 구약 성경은 부당한 취급에서 여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세심한 입법 조치를 첨가했다. 구약 성경은 신약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아무리 느슨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이스라엘 밖에서 관용되었던 것보다는 훨씬 우월했다.
우리의 주님께서 바리새인들과 토론하시면서 마태복음 19장에서 언급하셨던 이혼을 다룬 특별한 구약 성경 구절이 신명기 24:1-4이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게 된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 후부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내었거나 혹시 그를 아내로 취한 후부가 죽었다 하자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어 보낸 전부가 그를 다시 아내로 취하 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으로 너는 범죄케 하지 말지니라."
이 본문에서의 중심어들은 수치 되는 일이 그(아내)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있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많은 논란의 주제가 되어 왔다. 그러나 유대교 랍비적인 가르침에 비추어 생각할 때 본문의 언급은 결혼 생활의 부정에 대한 어떤 종류를 나타내는 것인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이혼 증서를 써 주는 것은 이혼을 허락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혼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의 의도는 이혼녀를 보호하는 동시에 결혼 제도의 보존을 위한 것이었다. 한 여인이 그녀의 남편에 의해 이혼을 당한다면 이유 없이 길거리로 내쫓길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합법적인 이혼 문서의 적절한 보호와 양식을 제공받아야 했다.
분명히 이혼을 허용하고 있는 율법은 재혼을 허용했지만 그러나 그 허용은 일단 한 남자가 그의 아내와 이혼했었으면 그가 그녀와 재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조건부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이 인간의 죄로 가득한 심령의 강퍅함 때문에 주어졌다고 설명하셨다. 이혼이 바람직하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위배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죄로 말미암아 이미 훼손되었고 파괴되었던 어떤 것을 밀고 나아가기 보다 결혼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시 한번 우리는 남자가 그 자신의 생활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때만이 그가 다른 남자들과 여자들과 조화를 이루어 사이좋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2. 신약시대의 결혼

1) 결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주님께서는 결혼을 심히 중히 여기실 뿐만 아니라 그는 결혼에 대한 분명하고 직접적인 교훈들을 제시해 주고 있다. 본 주제에 관한 주님의 가장 완전한 강연이 마태복음의 바로 이 구절에서 발견된다. 이 구절이 간략하고 그리고 일단의 바리새인들에 의해 제기된 시험 질문에 대한 대답의 본문 속에서 대체로 제시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실로 완전하다. 예수님이 새로운 결혼관을 가르치고 계실 뿐만 아니라 창조에 있어서의 신의 질서를 새로 진술하고 강화하고 계심이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결혼이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일환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계신다. 윌리암스는 신약시대의 결혼의 중요 원리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남녀 상호간의 보완
예수님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사실을 지지하셨다. 비록 그가 창세기 1:27의 말씀을 전부 인용하지는 않으셨을지라도 확실히 그는 그 구절 전체를 염두에 두고 계셨었다.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으되 독특하지만, 보완적인 두 성(性)인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셨다. 예수님은 인간의 성별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나타내셨다.
예수님에게는 남자가 남자이고 여자가 여자이긴 하지만 그러나 결코 어떤 성도 상대편이 없이는 완전하게 되지를 못한다. 다시 말해서 이성애가 결혼관의 기본이 된다. 예수님에게는 성별의 차이가 남녀를 보완하게 하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계획된대로 사회에서의 그들의 역할에 근간이 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동성애의 악용뿐만 아니라 남녀 성별 폐지론자의 남녀 공통 철학도 배척한다. 예수님에게는 남성과 여성이 갈등, 투쟁 및 경쟁 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와 완전을 의미한다. 남성과 여성은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의미하는 요소들이 된다. 두 성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어떤 사실을 깨닫게 된다.
(2) 일부일처제
창조 질서에 대한 우리 주님의 승인은 일부일처제에 관한 분명한 진술을 담고 있다. 예수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존재하는 한 관계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가 '한 사람'과 '그의 아내' 에 관해 말씀하셨으며, '둘' 이 '한 몸' 이 된다고 말씀하셨던 것을 주목하도록 하라. 그 다음에 그는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한번이라도 일부다처제를 용인하셨던 적이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는 조금도 없다. 예수님에게는 성경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계획이 한 여성을 위해 한 남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요4:16-18). 우리가 성경의 기사들에서 일부다처제가 실행되거나 관용된 것을 어디서 발견하든 지간에 우리는 그곳에서 영적인 쇠퇴와 문제들을 발견하게 된다. 오직 아주 조야한 가상의 과장이나 '성경의 왜곡' 에 의해서만 우리는 성경이 중혼이나 일부다처제를 용인하고 있다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이 이러한 탈선들의 실재를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과도함을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어떤 것에 대한 하나님의 용인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3) 새로운 가족 단위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라는 말씀에 대한 주님의 더욱 발전된 인용을 통해 예수님은 모든 새로운 가정 단위의 중요성을 재 강조하고 계신다. 흠정역(KJV은 '떠남'(leave)과 '연합'(cleave)을 대조시키고 있다. 예수님은 한 남자가(이 본문에서 창시자로 나타나고 있다) 그의 본래 가족을 '떠나는 것'과 그의 아내와 '연합하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할 때만이 그가 결혼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계신 것 같다. 만일 떠남이 없다면 연합도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은 한 남자가 그의 유산의 평가를 그만 두지 않는 것처럼 한 남자가 그의 부모들과 가족과의 모든 관계들을 단절해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한 남자가 그의 아내와 연합하여 그녀를 그의 배우자로 후원하고 인척들로부터의 나쁜 종류의 압력을 막아 주는 책임을 의도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문제에 대해 어떤 한편이라도 그 해결책이 '가정을 어머니에게 맡기는 데'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결혼은 결코 성사되지 못할 것이다. 갓 결혼한 신혼 부부들은 그들이 그들 자신의 가정 교육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워서 그들 자신의 관계들에 배운 어떤 가치 있는 교훈들을 적용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들의 부모들이 일들을 어떤 방식으로 처리했다고 해서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나 최선의 방법이 된다고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결혼은 때때로 두려운 책임들처럼 생각될 수 있는 것을 떠맡는다. 그러나 결혼에 관한 이 권면을 제공하시는 주님은 우리가 어떤 짐을 맡기든지 우리와 함께 져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시는 바로 그분이시다(마28:20; 벧전5:4).
(4) 결혼을 통한 연합
우리의 주님께서는 결혼의 유대를 통한 남편과 아내의 하나됨을 주장하셨다. 이 사실은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 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창세기의 말씀에 대한 주님의 인용과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말씀하신 주님 자신의 논평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창세기 2:4의 칠십인경 역본에서 인용되어 국제새번역본(NIV)에서 '연합된'(united)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스콜레테세타이'(proskollethesetai)는 문자적으로 "아교로 붙이다" 또는 "적합하다" 등을 의미하는 헬라어 콜라오(kol1ao)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마태복음에서 이 동사는 결혼 유대의 밀접성을 더욱 강조하기 위하여 수동태 재귀형으로 사용되고 있다. 분명히 '콜라오'는 여기에서 비유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의 참된 의미를 파악하게 되는 곳은 이 단어의 비유적 표현 속에서이다. 그것은 마치 물체의 두 조각들이 일단 함께 접합되면 둘에게 손상을 입히지 않고는 분리 될 수 없는 것처럼 두 사람이 일단 결혼을 통해 결합되면 두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지 아니하고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권고의 지혜는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이다. 예수님의 말씀들은 이 본문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결혼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이혼에 대해서도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논리는 만일 우리가 '연합'의 밀접성을 더 잘 이해한다면 우리가 나눔의 비극과 상처를 더 잘 이해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여기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고 언급된 연합이 비록 육체적 연합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지라도 실제에 있어서는 그것보다 더 깊은 어떤 뜻을 의미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또한 그것은 심리적 결합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결혼의 경우에 있어서는 영적 완성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실제로 한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통해 연합이 되어 그 아름다운 관계의 충만 속에서 살게 될 때 그들은 하나로 융합이 되는 것 같다. 실례로 그 관계가 "결혼의 수학에서는 하나 더하기 하나는 하나가 된다"는 말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한때는 다른 두 사람을 서로에게로 이끌었을 수도 있는 타고난 기질적 차이들조차도 왕왕 사라지고 마는 경향이 있는 것이 결혼의 아름다운 합성이다. 많은 부부들이 오랫동안 함께 살고 난 뒤에는 견해, 욕망, 표현, 말투, 행동 및 심지어는 외양 등에 있어서 아주 많이 닳게 되는 경향이 있다.
(5) 결혼의 신성함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결혼이 하나님에 의해 조정된 어떤 것임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이 암시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말씀은 결혼이 한 제도로서 신성한 것이며 그리고 결혼이 어길 수 없는 계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실제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하늘에서 이루어졌다고" 생각되는 많은 결혼들이 있는 반면에 다른 곳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결혼들도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아주 깊이 숙고하면 모든 결혼이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음이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최초의 결혼을 주례하셨던 하나님께서 아직도 모든 다른 결혼의 성공에 관해 관여하고 계심도 여전히 사실이다. 이 의미에 있어서 모든 참된 결혼에 관한 어떤 특별한 신성함이 실재하고 있다. 참된 완성과 행복을 추구하는 모든 신랑과 신부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만일 그들이 번갈아 그들의 연합에 하나님의 축복을 원한다면 결혼하기 전에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을 추구해야 한다. 바울의 기록을 인용하여 말하건대 '주안에 있는 결혼'은 절대 무너질 수 없으며 그렇게 결혼한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함께 결합되었음을 분명히 기뻐할 것이다.(고전 7:39)
(6) 결혼의 영원함
비록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9:9에서 이혼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셨다고 할지라도 그는 결혼의 신성을 영원한 계약으로 확증하셨다. 함께 결합하라는 명령을 남편과 아내에게 반복하시는 동시에 결혼을 통한 연합에 대한 주님의 강조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명시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는 주님의 더욱 발전된 말씀은 결혼의 영원성의 주제를 명료하게 해준다.
마태복음 22:30-33도 역시 결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연관시켜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이 구절들에서 예수님은 일단의 사두개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계시는 중이었다. 당대의 합리주의자들을 대표하는 이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고대의 수혼 관습에 근거한 가설적인 질문을 했다. 그들은 만일 한 여인이 차례로 일곱 형제들과 결혼을 했다면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를 예수님께 물었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라고 물었다.
회의주의와 그들의 경박한 결혼관에 분명히 반대하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사두개인들에 대한 대답을 기록하고 있는 이 구절들과 다른 말씀들에서 예수님은 몇 가지 사실들을 지적하셨다. 첫째, 부활이 있다. 둘째, 인간들은 결혼을 하는 반면에 천사들은 분명히 결혼을 하지 않는다. 셋째,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마지막으로 결혼들이 현세에서 정상적인 것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러한 관계들이 내세에서는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은 인간의 성별이 지상에서는 의미가 있는 반면에 그것이 내세에서는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2) 결혼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
(1) 결혼의 원리
결혼에 관한 바울의 직접적인 가르침은 주로 그의 서신서들 가운데에서, 네 서신서에서 발견된다. 즉 고린도전서, 에베소서, 디모데전서와 후서 그리고 디도서 등에서 발견된다. 우리가 예상할 수 있듯이 바울의 강조가 각 본문마다에서 약간씩 다르지만 그러나 그의 원리들은 언제나 변함없이 동일하다.
① 결혼의 신적인 제정
주님처림 바울도 결혼의 유효성의 기반을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다 두었다. 바울에게는 결혼이 인간의 사회적 진화의 소산이나 인간적인 편의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결혼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 중에 중요한 것 하나는 결혼의 신적 기원에 대한 것이었다. 바울 자신이 결혼을 안했을지라도,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독신 생활의 부름을 받았다고 믿었든지 안 믿었든지 또는 어떤 상황들에 따라서 바울이 이혼을 허용했든지 안했든지, 결혼이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었다는 그의 기본 전제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② 결혼의 신성함
바울의 결혼관 속에는 세속적인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결혼 신의 계시에 근거된 것이었으며, 신성한 언약을 내포한 것이며 그리고 절대적인 충절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건대 결혼은 모든 면에 있어서 신성했다.
또한 바울은 혼합 관계의 본문에서 결혼의 신성함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바울은 남자나 여자의 아직 구원받지 않은 배우자를 떠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그리스도에로 돌아선 회심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이 회심자가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 계약되었던 결혼에 그대로 머무는 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에 어떤 수치가 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 결혼에 어떤 거룩하지 못한 것이 있는지를 의아히 여기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반대로 그리스도에로의 회심이 처자 유기나 이혼의 구실이 전혀 될 수가 없다. 당신은 결혼이 그리스도인이 되거나 이방인이 되거나 하는 데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 라는 사실을 기억하고서 결혼 생활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된다"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에게는 불신자들의 결혼조차도 하나님의 구례의 틀 속에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 같다. 이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인간 사회를 위협하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의 운명도 위협하는 것이 된다. 기독교는 정상적이고 합당한 인간 관계들을 파괴하기보다는 오히려 확고하게 다져 준다.
바울은 배우자와 자식이 그것을 인정하든지 안하든지 신자의 배우자와 자식에게 특별한 축복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바울이 믿지 않는 배우자가 '거룩하게' 되고 자녀도 거룩하게 된다고 말했을 때 그는 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그의 가족도 역시 구원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것이 배우자든 부모이든 한 그리스도인과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 구원받지 않은 자들에게 축복을 따로 마련해 주게 되고 그들을 아주 특별한 기도와 전도의 제목이 되게 한다는 것을 단순히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고전7:16). 이에 결혼 그 자체가 인간의 가족 관계의 유대를 굳게 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에 비교했을 때 결혼의 신성함에 관한 그의 아주 명백한 진술을 제시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5:32). 그리스도인의 결혼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사이에 존재하는 이상적 관계의 구상화(具象化)이다. 결혼 관계의 견지에서 생각할 때 그것보다 더 신성하게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③ 결혼의 영원성
바울에게는 결혼이 영원한 관계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여느 인간 계약들과 달리 그리스도인의 결혼은 서면으로 된 성문 조항들이 아니다. 어느 시대의 교회이든지 결혼은 영원한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독신생활이 결혼 생활보다 낫지는 않은지? 그리고 믿지 않는 배우자와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한 결혼을 취소해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에서 바울은 결혼이 평생의 관계임을 분명히 했다.(고전7:39; 롬7:2)
④ 결혼의 배타성
결혼의 신성함과 영원성에 관한 바울의 생각들을 나타내고 있는 그 구절은 결혼의 유일성도 지적하고 있다(고전7장). 바울은 결혼에 있어서 일부일처제와 정절에 관한 분명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결혼이 남편과 아내 사이의 완전한 연합에 근거를 둔 강한 포괄적인 관계인 것처럼 그것은 배타적인 관계이기도 하다. 결혼은 내적인 친교와 육체적인 관계에서 모든 다른 것들은 제외가 된다.
바울의 결혼의 배타성 사상을 옹호하여 우리는 순결을 명하고 부도덕을 정죄하는 모든 그의 기록들을 인용할 수 있다(롬13;13; 고전5:1-13; 6;9, 15-20; 10:8-13; 갈5:19-21; 엡5:3; 골3:5; 살전4:3-8; 딤전5:2).

(2) 부부에 대한 바울의 권면
남녀 공통(unisex)사상이 점점 더 조장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 남편들과 아내들의 역할들과 책임들이 그들의 성처럼 상이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은총 안에 서 동등한 배우자들이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결혼에 있어서의 평등에 대한 그들의 신념들을 다음과 같은 바울 사도의 말에 근거를 두고 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그런데 그러한 사상은 고린도전서와 목회 서신들에서의 바울의 가르침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오해이다.
갈라디아서의 본문에서 바울은 사람의 열납을 결정하는 것인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열납으로 인하여 인종, 사회적 지위 및 성 등이 모두 제거되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바울의 요지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축복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근거 위에서 모든 사람에게 유효하다는 것이었다. 은총 안에서의 우리의 입장은 우리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노예이든 자유민이든, 남자이든 여자이든 구애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입장 이 사회적 차이와 성적 차이를 갑자기 제거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남자들이거나 여자들이며 그리고 이 사실은 지 교회와 결혼에 관련한 바울의 가르침 속에 분명하게 들어 있었다.
① 남편의 책임들
- 남편은 지도자이다.(고전11:3).
- 남편은 연인이다.(엡5:25, 28, 33; 골3:19; 고전7:3-4).
- 남편은 부양자이다(엡5:28-30; 딤전5:8).
② 아내의 책임
- 아내는 내조자이다(엡5:21-24).
- 아내는 가정을 돌보는 주부이다(딛2:4-5).

3) 베드로의 가르침
(1) 아내들에 대한 권면
바울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결혼 생활에 있어서의 아내의 역할이 수행자와 내조자의 역할이라고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여성의 지위를 떨어뜨리지도 않으며 또한 어떤 가치 판단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베드로는 단순히 결혼에 있어서의 적절한 역할들을 받아들이는 것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베드로는 그것이 가정의 축복(벧전3:1)과 개인의 안전(벧전3:6)의 기반이 된다고 제시하면서 그의 주장에 대찬 성경적이고 족장적인 지지로 인용하였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아마도 우리는 '외모 단장'(outward adornment)의 상대적 중요성에 관한 베드로의 말들을 그 당시의 사치의 배경에 반대하여 해석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로마 사회의 부유층들에서는 머리 장식에 값비싼 보석을 치장하는 등 거의 외설 잡혀 있었다. 그 문제로 인하여 인생에 있어서의 어떤 실제의 목적을 빼앗기고 물질주의의 천박한 쾌락들에 물린 여성들이나 남성들이 자기 탐닉과 타락에 빠지게 될 수 있는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베드로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분명히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베드로가 현대식 의상들의 합당한 사용이나 화장의 온건한 사용까지 금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성격의 아름다움과 행실의 청결함이 의상의 사치스런 과시보다 상위를 차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의 독자들에게 상기시킴으로써 불균형을 시정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우리는 자신들이 인간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데 더 관심이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데 더 관심이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될 것이다. 베드로는 바울과 마찬가지로 초대 교회 안에 구원받지 않은 남편과 결혼을 하게 되는 아주 견딜 수 없는 문제에 직면했던 여성들이 종종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베드로의 권면이 그들에게는 설령 그들의 남편들이 그들의 말의 증거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지라도 그들이 아내들의 경건한 행실을 통해 확신을 얻게 되어 그리스도에게로 회심될 것이므로 그들이 순수한 기독교 은혜의 정신에 입각해서 행동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조용하고 일관된 그리스도인 행동에 대한 베드로의 강조는 그것이 현대의 '여성 해방 운동자들'에게 아무리 이상하게 들릴지라도 그것은 좋은 권면이다. 그리고 많은 경건한 아내들이 그것의 정당성을 날마다 입증하고 있다.
(2) 남편들에 대한 권면
베드로는 아내들에게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 남편들에게도 권면을 했다. 그는 그들에게 그들의 아내들에 대해 인정이 있고, 사려 깊고, 그리고 예의 바르게 대하도록 가르쳤다. 남편은 자기 아내의 여성적인 연약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녀가 그를 필요로 하는 만큼 그도 그의 아내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베드로가 남편과 아내는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 라고 강조했던 것도 실제로 이 점에 있어서였다. 만일 남편이 자기 아내를 적절하게 대우하기를 거절한다면 그는 아름다운 관계를 해칠 뿐만 아니라 주님을 불쾌하시게 만들 것이라는 어떤 암시가 이 권면에 내포되어 있다. 결혼에는 영적인 차원이 있다. 그리고 베드로에 따르면 우리가 이 영적인 차원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기도 생활을 방해받는 모험을 우리는 치르게 될 것이다. 베드로는 인간의 영성의 척도가 그의 공적인 신앙 고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정에서의 그의 성실성과 사려깊은 인정에 있다는 바울의 생각에 동의할 것이다.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남편들에게 살아가는 삶의 세 가지 원칙적 교훈을 주고 있다.(벧전3:7)
첫째, 남편은 이해력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그의 아내의 입장에서 기꺼이 귀를 기울인다는 뜻이다. 그는 기꺼이 아내와 함께 생각하며 아내의 감정, 기분 그리고 생각들에 민감해야 한다. 그는 아내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아내의 필요를 발견하도록 노력하며 그녀에게 최선을 다한다. 여기서 우리는 비이기적인 태도가 아내의 역할뿐만 아니라 남편의 역할에서도 중요한 것을 보게 된다.
둘째, 남편은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 아내가 육체적으로 강하지 못한 것을 아는 그리스도인 남편은 아내가 과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남편은 언제 아내를 저녁 식사에 데리고 나갈지, 또는 심지어 주말에는 아이들 없이 외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남편은 자녀들이 어머니에게 무례하게 행하지 못하도록 한다. 남편은 아내를 존경과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대하며 위험한 상황에서 아내를 보호한다.
셋째, 베드로는 아내들이 남편들과 같은 영적인 권리를 갖고 있는 것을 기억하도록 남편들에게 말하고 있다. 아내들은 하나님 은혜의 공동 상속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남편들을 사랑하시는 것만큼 아내들을 사랑하신다.
만일 남편들이 베드로전서 3장에 있는 교훈을 따르지 않는다면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기도가 막힐 것이다)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는 사람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않는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올바르지 못함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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