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우리 구원의 기원
베드로후서 1:16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계시는 근본적으로 내 영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고리와 물려있는 사건 속에 있다.>
복음을 설교하면서 기억해야 하는 것은 구원이란 우리의 체험이기 전에 하나님의 위대한 생각이란 점이다. 체험은 구원이 우리의 의식 세계로 들어오는 입구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가 맺어질 때 나타나는 증거이다. 절대로 체험을 설교하지 말라. 그 체험 뒤에 놓여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생각을 설교하라. 사람들이 영적으로 정체되는 이유는 자신들의 체험의 그림자를 넘어서서 모든 체험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그 계시”이며 우리의 모든 체험은 주님께로 따라 올라가 그분 안에 거하게 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1) 우리의 구원의 초자연성
에베소서 1:7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요한복음 3:7-8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복음은 우리의 자원의 승리가 아니라 우리의 가난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기독교의 굵직한 사건들에 근거하지 않은 잘못된 영성을 조심하라. 굵직한 사건 중에 하나는 죄악에 대한 용서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엡 1:7). 죄사함은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이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완전하게 용서하셨다는 그 놀라운 사실을 깊게 묵상해 본 적이 있는가? 죄사함은 우리가 미안해 하기 때문에 허락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주님의 자비 때문이다. 하나님의 용서는 오직 초자연적인 영역에서 자연스럽게 허락되는 것이다.
또 다른 굵직한 사건은 중생이다. “내게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곧 성령의 초자연적인 재창조를 수단으로 하여 당신에게 새생명이 침투하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바람처럼 신비한 사건이지만 하나님의 가장 분명한 역사이다. 기독교 내에 이러한 초자연적인 역사를 희석시키려는 경향을 주의하라.
2) 우리의 구원의 본질
에베소서 4:13-16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사람의 극한 상황은 구세주 하나님의 가장 중심 된 자원들을 이끌어낸다.>
사역자의 개성이 종종 복음을 가릴 때가 있다. 그 이유는 제시된 진리에 의하여 사람들의 발이 끌리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제시하는 사역자의 개성이 너무나 강하여 그 힘에 빨려 들어가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특이한 개성을 사용하셔서 무시되었던 진리를 강조하시기도 한다. 그러나 사역자가 어떤 개성을 가졌던 간에 그들은 구원의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 3:30).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의 유일한 기준이다. 세례 요한은 개성에 근거한 설교자가 되려는 자세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말해준다. 설교자의 자격은 오직 선포되는 복음의 “메시지” 때문이어야 한다.
<우리는 사람의 조건을 해결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람의 근본적인 필요를 만족시키는 완벽한 그리스도를 전해야 한다.>
많은 설교자들이 그리스도의 박애적인 면을 설교한다. 유가족을 향한 주님의 동정심, 고통과 죄로 물든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당하는 슬픔을 위로하시는 위로자 예수님을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들을 때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러나 설교자는 사람의 근본적인 필요를 만족시키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따라서 이를 위하여 그들의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를 드러내야 하는데 이때 그들은 분개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내리신 판결을 나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나에 대하여 죄악이 가득한 죄인으로 판결하신 것에 대하여 나는 믿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부패한 마음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절대로 믿지 않는다. 오직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 속에 주님께서 진단하신 것이 깜짝 놀랄만한 진리임을 계시하실 때에야 그들은 자신들의 사악함을 인정하게 된다 (참조, 막 7:20-23).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에 관한한, 사람들에게 어떠한 말을 들어도 절대로 부담을 갖지 않았다. 바울의 마음 속에 흐르는 간절한 호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다 (참조, 고전 2:2). 하나님의 찢겨진 마음인 구속의 비극 (십자가)을 선포하는 설교자는 언제나 인간의 조건과 비극을 동정하는 척하며 복음을 대항하는 여러 방해꾼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설교자로서 사람의 조건을 기억하지 말라. 오직 구원을 위한 굵직한 사건들을 기억하라. 그러한 사건들을 감추려고 시도하지 말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15. 제자도의 십자가
1) 제자가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
마태복음 8:20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누가복음 9:60-61
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우리 주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는 제자 훈련이 있다. 이는 복음의 존엄성에 어울리지 않는 방법으로서, 사람들을 주님께 돌아가도록 강요하는 방법이다. 물론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엄청난 역사를 이루셨다는 선상에서 설득한다. “주님을 향한 감사한 마음으로부터 당신이 주를 위하여 하실 일은 없나요?” 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께 동정심을 갖게 함으로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도록 하는 방법은 우리 주님께서 결코 인정하지 않으신다. 주님께서는 그 누구에게도 무조건 자신을 따라오라고 강요하신 적이 없다. 또한 즉각적이고 열정적인 충동에 의하여 주를 따르는 것도 원치 않으셨다. 주님은 제자가 되라고 결코 부탁하신 적이 없으며 결코 덫을 놓아 그들을 사로잡지도 않으셨다. 오히려 주님은 제자 훈련을 아주 좁게 만들어 놓으시고 주님을 좇는 자들에게 여러 조항을 엄격하게 주장하셨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주님께서 언급하신 제자도의 엄격한 내용들을 제거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은 지키기가 어렵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에게는 쉽다. 주님께서는 제자도를 말씀하실 때 “만일”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셨다. 절대로 “너는 … 해야만 한다” 라고 강력한 주장을 하지 않으셨다. 제자도는 언제나 본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최근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에 있어서 십자가의 국면이 거의 상실되고 있다. 십자가는 더 이상 단호한 영웅적 결단과 희생이 아니라 아름답고 소박한 상징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이 쉽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주께서는 사람들에게 경고하길 그리스도인은 여러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그리스도인으로 당하는 환난이야말로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표현하셨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어떤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제자로 부르시는 때는 주님께서 높아지신 때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높아져 있는 때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때 누구에게도 강요 받지 않고 완벽하게 자유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세상의 화려함과 아름다움이 한 편에 있고 다른 편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 거친 훈련의 길이 있다. 이러한 때 주의 제자로 부름을 받고 따라야 주의 제자 훈련에 속하게 된다.
또한 우리 주님은 우리가 어떤 열광적인 상태에 빠져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즉흥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결정을 내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주의 제자의 길을 결정할 때 우리는 균형잡힌 의식 가운데 있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분명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우리 속에 강력한 간절함을 일으키지만 동시에 강한 거부감을 일으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설교자들은 언제나 의지의 문제를 다루어 회중들에게 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2) 제자도에 있어서 십자가의 의미
마태복음 16:24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다음 번에 이 구절을 읽을 때 모든 감상적인 느낌을 철저하게 제거한 후 다시 읽어 보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주님께서 어떠한 의미로 십자가를 언급하셨는지 아는가? 적어도 이때 주님께서 십자가를 말씀하신 이유는 아름다운 감상 속에서 영웅심리를 부추기기 위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의미하려는 바는 예수님께서 친히 지셔야 하는 십자가이다. 즉 살을 찢는 흉측한 망치와 못! 주께서는 그러한 무섭고 잔인한 의미로 십자가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다.
지난 20세기 동안 사람들은 십자가를 감상으로 덮어 버렸다. 우리는 자리에 앉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서 눈시울을 적시곤 한다. 그러나 너무나 적은 사람만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는 의미를 깨닫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일하며 홀로 서 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지도록 부름을 받은 적이 없다.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주신 십자가를 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와 특별한 관계를 맺을 때에만 주어진다. 이때 “내 십자가”란 바로 내 자신을 향한 나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자기 십자가”는 우리 자신의 양심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 아니다. 죄책감에 의한 것도 아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고 주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도 양심으로 인한 고통을 당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사람들도 죄책감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한다. 자신들이 사회의 소금이라고 믿는 자들도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던 아니던 상관없이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고통을 느낀다.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란 주님께 내 모든 권리를 맡기고 주님만을 따를 때 오는 고난의 체험들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계시이다. 그러나 “우리의 십자가”는 예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맺음으로 인하여 오는 삶의 고난의 체험들이다.
예수님의 마음에 있었던 십자가의 의미는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의미로 다가온다. 곧 십자가의 의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오는 고난을 말한다. 지금은 이러한 십자가의 의미가 사라지고 없다. 오히려 우리가 거룩하여지면 모든 것이 형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러한가? 바울의 삶이 세상적으로 볼 때 형통한 삶이었는가? 예수님의 삶은 어떠했는가? 제자도의 의미는 우리의 관심이 주님의 관심과 같아진다는 뜻이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는 것을 의미한다 (골 1:24). 중요한 것은 우리가 거듭남으로 깨끗케 되어 우리 주님과 일치가 된 후에야 비로서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3) 제자도에 있어서 십자가로 공격함
마태복음 10:34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태복음 10:16-39절을 다시 잘 읽어 보라.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쓴 잔을 마셨기 때문에 자신들이 이 땅에서 모든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 덕분에 이 땅의 축복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주님을 위하여 부어지는 포도주는 짓눌러진 포도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주님을 따름으로 인한 삶의 고난을 포함하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불평을 하며 자신을 위한 공평을 구한다. 억울하다는 것이다.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복음의 사역자로서 자신과 관련한 공평을 구한다면 당신은 곧 자기연민 및 낙심에 빠져 가방을 싸고 주님의 제자도의 길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로 자신을 위하여 공평을 구하지 말라. 억울한 일이 발생하면 당하라. 끝까지 남들에게 주라. 또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만나게 된 만남을 유지하라. 아무리 불쾌한 만남이라도 참으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 15:1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4). 이 말씀은 제자들이 개인적인 삶에서 어려운 반대 세력을 만나게 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정부의 세력마저 그들을 대적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들은 핍박을 받아야 하고 심지어 죽음에 처하기도 한다는 뜻이다. “에이, 예수님 당시에나 그러했겠지요” 라고 말하지 말라. 만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께 진실하게 선다면 이 세상이 당신에게 미소를 띄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개심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틈만 나면 모든 트집을 잡으며 귀찮게 할 것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 15:18-19).
주님께서 주의 제자들이 져야 할 십자가를 말씀하실 때, 주님은 그들이 십자가를 지면 거룩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십자가를 지는 이유는 그들 자신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또한 선지자들이 고난을 당한 것같이 그들이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 5:11-12).
오늘날 풍조는 이렇게 말한다. “거룩한 삶을 사십시오. 그러나 거룩에 대하여는 말하지 마십시오. 거룩에 대하여 증거도 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예수님과의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고백하지 마십시오. 그렇게만 하면 우리는 당신을 괴롭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4) 제자도에 있어서 반대 세력으로 인한 십자가
마태복음 5:16, 10:32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즉, “입과 삶으로 예수님을 시인하면” 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바른 삶을 사는 것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지 않는다. 우리가 핍박을 받는 이유는 예수님만을 주로 고백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지 않는 많은 사회 사업(Social Work)이 진행되고 있다. 물론 사람들은 선한 일을 장려하셨던 주님을 끝없이 칭찬한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주님을 주로 고백하면 사람들은 당장 당신을 따돌리기 시작한다. “당신의 종교를 이곳에서 선전하지 마십시오. 이곳에서 구원 또는 성화 따위의 종교적인 말을 삼가주십시오.” 그럼에도 당신은 그곳에서 주님을 주로 시인해야 한다. 물론 그렇게 할 때 반대는 대단할 것이다. 그때 그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인류를 향한 박애주의와 친절에 관한 가르침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가르침은 오히려 자신들에게 유익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의 성령에 따라 주님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선포할 때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건드려지는 것을 느끼며 분개한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기득권이 있는 그곳에서 감히 주님의 십자가를 지려는 주의 제자들을 향하여 대항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세상은 인간의 극기와 자기 희생을 가장 좋은 덕목으로 인정하여왔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한 가식을 전혀 허용하지 않으셨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극기란 인간의 교만을 드러내기 위한 위선이라고 하셨다. 물론 주님께서도 자기 부인과 자기 희생을 언급하셨다. 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신 자기 부인과 자기 희생은 세상이 말하는 극기 및 자기 희생과 전혀 의미가 다르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 10:38-39). 여기서 자기 부인이라는 말은 물론 뭔가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부인이란 자신에 대한 자기 권리를 부인하는 것으로서 자신이 의지하던 모든 것을 예수님의 주권에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세상이 말하는 자기 희생은 여러 정신적인 부담 가운데 마침내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각오를 말한다. 그러나 긍극적으로 이들의 각오는 자기 때문이다. 그 동기는 영웅심리이다. 여러 계산을 한 이후의 결정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자기 희생은 그 동기가 예수님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 때문이 아닌 자기 희생은 우리 주님이 보실 때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3).
주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부인 및 자기 희생은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흘러 나온다. 우리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구원 받는 영혼을 얻게 하시는 것 외에는 삶의 다른 관심을 포기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희생하는 단 하나의 위대한 동기가 있다. 바로 예수님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만을 위하여” 희생한다.
16. 왜 설교자가 되어야 하는가
사도 바울이 설교자가 된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은 십자가로부터 오는 축복만을 이해한 상태이다. (역자 주 - 여기서 챔버스가 말하는 축복은 물질적인 축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모든 영적 축복을 의미한다.) 그들은 축복과 관련한 몇 가지 교리에 집착하며 그 교리에 헌신한다. 그러나 바울은 오직 한 가지만 설교하였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 1:30).
1) 교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린도전서 1:23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십자가로부터 나오는 축복을 절대로 혼돈하지 말라. 바울은 모든 열정을 다하여 한가지만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의 가르침의 중심은 우리의 구원 및 거룩이 아니라 가장 위대한 진리인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이 한가지 사실에 있었다. 따라서 바울의 진술은 인위적이거나 희미한 적이 없었다. 바울이 가르친 모든 교리는 보혈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으며 그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가르쳤다. 또한 바울의 모든 가르침에는 놀라운 영감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사람들이 거룩하여지는 것을 원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부차적인 것이었다. 하나님의 전시장에 멋지게 진열될 꿈을 꾸면서 개인의 거룩에만 신경쓰는 사역자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전혀 감도 잡지 못한 사역자이다. 그러나 바울이 섰던 곳에 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무엇을 의미하시는지를 이해하게 된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돌아서지 못하게 할 것이다 (참조, 롬 8:35-39).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9). 만일 바울이 자신의 거룩만을 목표로 하였다면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 9:3). 바울은 이 땅에서 오직 단 한가지 - 그리스도의 십자가 - 외에는 다른 아무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바울의 설교에서 가장 위대한 열정 가운데 드러나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하여 그는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게 되던 상관하지 않았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고전 9:16). 바울의 설교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복음으로서, 그는 이 일을 부득불 할 수 밖에 없었다.
2) 방향을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린도전서 2:2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성도들 앞에 서던, 죄인들 앞에 서던 바울의 감성은 동정적이거나 종교적이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뜨겁게 사로잡혀 있었다. 나의 설교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내는 나의 글들은 어떤 방향을 취하고 있는가? 또한 나의 인생의 꿈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나의 전반적인 삶의 방향은 무엇을 위한 것이며 어떤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가? 바울은 그의 삶의 방향을 단 한가지로 정하였다.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강조하고 설명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의 설교에서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 부분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대하여 듣기도 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어떤 희생을 치루어야 하는지를 듣는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보았던 것을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였으며 그것을 붙잡았다. 따라서 그는 지칠 수가 없었고 다른 길로 갈 수도 없었다.
인간들의 깊은 영혼은 단순한 거룩의 개념과 종교적 감상에 의하여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열정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다. 어떤 연로하신 작가께서 십자가를 “우리 주님의 열정(The Passion of Our Lord)”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의 피를 끓게 만드는 가장 위대한 원인이다. 이 피가 끓으면 사람들은 생명을 다하여 주를 섬기게 된다. 당신의 설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가? (참조, 갈 6:17). 아니면 회중의 마음 속에 설교자가 얼마나 따뜻하고 멋진 사람인가에 대한 인상을 남기는가? 바울의 설교를 보면 그 설교가 사람의 마음을 찌르던 아니면 위로하던, 칭찬을 하던 정죄를 하던, 그의 말씀 후에 남는 인상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이었다. 나아가 부활하시고 존귀함을 얻은 예수님 보다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게 하였다.
우리의 설교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경탄할 만한 감동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그 설교에 하나님을 향한 열정은 없고 단지 사람들을 향한 열정만 있기 때문이다. 사역자들이 해야 하는 단 한가지는 늘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며 오직 그분만을 높이는 것이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요 12:32). 바울은 한가지 열정만 있었다. 그 이유는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고후 4:6).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그분은 십자가에서 높임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3) 성향을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갈라디아서 6:14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은 자신의 모든 삶과 모든 관심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빛 안에서 보았다. 위의 구절을 이해할 때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된 면만 보아서는 안된다. 바울은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라고 말하지만,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향하여 못 박히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나와 예수님의 일치된 면만 다룬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객관적인 부분들을 놓치게 된다. 즉 이 구절에서 나와 관련한 주관적인 체험의 가장 오묘한 진리를 깨달았다고 할 지라도 만일 이 구절이 담고 있는 객관적인 계시를 놓친다면 그의 깨달음은 아주 얕은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강조하는 것은 우리 주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생명을 얻기 위하여 십자가를 이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십자가를 이해함으로 그는 영생을 얻었다. 곧 객관적이며 역사적인 십자가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때 주관적인 구원의 체험은 자연스럽게 따라 오는 것이다.
십자가를 연구하되 다른 목적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입장에서 해 보라. 그러면 당신은 당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룩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이 얼마나 거룩한가를 보려고 한다. 이때 위험에 빠진다. 그러나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는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안전하다 (요 12:32). 혹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대신에 주께서 하실 수 있는 일들을 높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바울의 열정의 뿌리가 무엇인지 제대로 깨달을 때까지 우리에게는 언제나 곁길로 빠질 수 있는 함정이 있다.
설교자로 부름을 받게 된 것은 내가 특별한 은사가 있거나 하나님께서 나를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의미를 희미하게나마 알게 되었기 때문이요 그 이후로 삶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바울의 설교의 열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드러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고통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사역자들마다 “갈보리(십자가)” 신학교에서 배워야 한다. 바울은 말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2:2). 심지어 바울의 설교의 내용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힌 자기 자신도 아니었다. 설교에서 나의 구원은 구원 받은 여러 사람들 중에 하나일 뿐이다. 오직 설교 후에는 단 한 분만 남아야 한다. 주님의 십자가와 함께 주 예수 그리스도만 남아야 한다.
4)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훈련
갈라디아서 2:20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구절은 신학적인 언급이 아니다. 이 구절은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그리스도인의 고백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가족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신다. 이때 우리는 십자가의 영원한 효력에 의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리스도의 죽음과 일치되는 바울의 인격적인 체험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 사람들의 삶에 어떠한 역사가 나타나는지를 단순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아-계시(the Self-Revelation of God)이며 신성(Godhead)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을 드러내신 것이다.
오늘날 가장 큰 열정은 영혼을 향한 열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열정은 사실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열정은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이다.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사람을 향한 열정이 아니다. 사람을 향한 열정은 결국 자기의 가슴만을 찢는 실망만을 초래한다. 그러나 성령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은 이 세상과 육체와 마귀가 만들어낼 수 있는 그 어떠한 고통보다 더 깊은 곳까지 내려 간다. 그 열정은 우리 주님께서 내려갔던 그 자리까지 간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생각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도 역사하시면서 우리의 가슴을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으로 타오르게 한다. 그러나 영혼을 향하는 열정은 있지만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이 사라질 때는 사탄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우리를 찾아와 미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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