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인정 받는 사역자
(Approved Unto God)
목차
1. 사역자란 누구인가?
2. 기본 자격
3. 사역자의 영적인 삶
4. 사역자와 말씀
5. 사역의 바른 방향
6. 배우는 학생이 되라
7. 나는 어디에 있는가?
8. 가장 주된 사명
9.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먼저 되라
10. 언제든지 쓰임 받기 위하여
11. 설교자의 의무
12. 설교자로서 본문을 통하여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13. 가장 중요한 것을 첫째로 하라
14. 우리 구원의 기원
15. 제자도의 십자가
16. 왜 설교자가 되어야 하는가
17. 하나님의 심연(the abysses of God)을 확신하라
18.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가?
19. 하나님의 것
20. 주님과의 일치
1. 사역자란 누구인가
1) 중요한 점
<모든 사람을 반석 위에 심으라. 온 인류를 그 반석 위에 심으라.>
(1) 온갖 종류의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고전 9:11-15)
사역자가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은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 가운데서 어떻게 고결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복음 사역자는 절대로 다음과 같은 핑계를 대서는 안된다. “다른 곳에 있었더라면!” 사역자가 정말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으려면 세상의 하찮은 사람을 만나면서도 천박하여지지 않고 죄성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죄성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을 위한 사역자는 스스로 선택하여 되는 것이 아니다. (참조, 요 15:16).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한 사역자가 되기로 스스로 결심하고 그 길을 가지만 그들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에게는 분명한 특징이 있다. 바로 주께서 주신 사명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모세와 사도 바울처럼 사명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하나님께서 맘껏 사용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장중에 있어야 한다. 그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증거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주의 반석(the Rock) 위에 심으신다.
(2) 능력의 사건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교리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고전 9:16-17)
만일 복음에 대한 바른 지식과 애착이 없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다. 당신의 믿는 바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을 기록해 보라.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나는 죄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나님께서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다고 믿는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이라고 믿는가? 먼저 당신 자신이 가장 중심되는 유일한 사건(one central Fact only)인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접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증거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하게 될 때 나타나는 속성이다. 그러나 복음 선포자가 되기 위해서는 16절의 내용처럼, 하나님의 빚으시는 손에 사로 잡혀야 한다. 바울의 모든 삶은 오직 한가지를 위하여 하나님께 사로 잡혔다. 좌로나 우로 빠지지 않고 오직 한가지 목표를 향하여 갈 수 밖에 없었는데 바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우리 중에 몇이나 바울처럼 하나님의 복음에 사로 잡혀 있는가? 17절의 앞부분은 대부분의 사역자들에게 해당할지 모르겠다.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자신들이 스스로 복음 전파자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여 그토록 미지근하고 게으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을 때는 내가 대단하다는 착각에서 나오게 된다.
2) 자세
<상황은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1) 외부적으로 압박을 가하는 것들에 대한 자세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 9:18-19)
하나님께서는 사역자에게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하신다. 사역자들을 위해 따로 기념비를 세워주시지도 않으신다. 사람들은 그들을 거들떠보지 않는다. 이는 사역자들이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에서 누가 바울을 볼 수 있었는가?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후에야 귀중한 존재로 부상되었다. 모든 하나님의 종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특별한 사명 때문에 그들은 특별한 존재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심기 원하시는 곳에 주의 사역자들을 심으신다. 지금 이 시대는 성도들이 모욕을 당하는 시대이다.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에 따라 자세는 달라진다. 바울의 온 영혼과 지식과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려고 오신 그 위대한 사명에 사로 잡혔다. 그는 이 한가지만은 절대로 놓친 적이 없다 (참조, 고전 2:2).
(2) 부름을 받은 자와 스스로 택한 자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린도전서 9:20-27).
하나님의 의하여 선택 받지 않은 사역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대한다.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 다르게 대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에 의하여 사로잡힌 사역자는 사람마다 다르게 대함으로 그들을 주님께로 사로 잡아온다.
하나님에 의하여 선택 받은 사역자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한다. 아무리 많은 아픔이 있을지라도 맡겨진 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스스로 하나님을 위하여 할 일을 선택하는 사역자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한다. 이들은 결국 성경을 이용하여 유익을 보려는 자들이 된다.
하나님께서 사역자를 부르실 때 먼저 그들을 부수시고 깨뜨리셔서 빚기 시작하신다. 그때 그들은 왜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는지 알지 못한다. 주님께서는 오직 한가지 목적, 즉 “이 사람이 나의 사람이라” 라고 말하시기 위하여 그들을 빚어가신다. 절대로 스스로 사역자가 되려 하지 말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역자로 부르시면 당장 좇으라. 만일 다른 길로 도망치면 당신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역자로 부르신 후에는 전에 대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당신을 다루실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과도 다르게 다루실 것이다. 이때 주님의 원하시는 대로 당신을 다루시도록 주께 모든 것을 맡기라.
2. 기본 자격
디모데전서 1:12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 사역자가 참으로 감사해야 할 것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감사함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들은 마치 주님을 찬양하는 오케스트라와 같다. “여호와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이 주께 감사하며” (시 145:10).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하나님의 귀에 가장 절묘한 음악을 만들어낸다. 사람도 처음에는 이 오케스트라에 참여하여 주를 찬양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죄로 인하여 타락하게 되었고 이제는 오히려 피조물 가운데 광란의 불협화음을 만드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실현은 회개라는 단조(the minor note)를 사용하여 사람들을 하여금 다시 찬양의 자리에 서게 하였다 (참조, 눅 15:10).
하나님을 찬양함이 우리 모두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방향이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시 50:23). 당신이 아프던 건강하던, 돈이 없던 많던, 이러한 것은 하나님께 중요하지 않다. 오직 주님께 중요한 것은 당신이 하나님 귀에 감사의 찬양을 올리는 것이다.
바울은 회개를 통하여 다시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참조, 딤전 1:13). 이제 그는 사역자로서 그의 모든 기초를 다시 다지게 되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감사의 마음이 그의 기초였다. 그 후로 그의 전 생애는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었다.
2) 사역자가 통과하여야 할 시험
“나를 능하게 하신….”
사역자는 자신이 주 예수님에 의하여 능력을 입게 된다는 사실을 아는 자이다. 따라서 언제나 능하게 하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역하며 더 나은 사역을 위하여 주를 의지한다. 주께서 내가 사역자가 될 수 있도록 힘을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나는 절대로 약해질 수 없다. 한편, 주제넘을 정도로 자신의 약함을 너무 의식하는 것도 주님께 감사치 못하는 강퍅한 마음이다. 그 이유는 주님에 의하여 힘을 얻는 것을 거부하겠다는 심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너무나 약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나는 너무 고집이 강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나는 할 수 없어요” 라는 말은 사실 “나는 절대로 하지 않으렵니다” 라는 말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능하게 하시면 나는 언제나 주님처럼 강하게 된다. 바울은 이 역설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후 12:10).
3) 사역자에 의하여 인식된 사실
“나를 충성되이 여겨….”
주께서 나를 충성되이 여기실 것을 인식하게 되면 우리는 자신의 용기를 우상화하려는 마지막 유혹을 제거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만일 자신의 용기로 어려움을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는 주께서 나를 충성되이 여기시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게 된다. 그 이유는 주께서 귀히 여기시는 사역은 내 안에서 주께서 이루시는 사역이지 내가 주를 위하여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주님께서 이미 만유의 주시며 모든 만물의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고 극복할 것도 없다. 이미 우리는 주님을 통하여 승리자 이상의 자리에 서 있다. 이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 사역자는 더 이상 자신의 영웅심을 부추기지 않아도 될 것이며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만을 놀라울 만큼 영화롭게 하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를 귀히 여기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승리를 얻는 방법”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 이는 이미 영원한 승리자께서 우리를 온전히 붙드시고 승리를 안겨 주셨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그분의 승리를 즐기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승리는 언제나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기억하라. 계시록에 언급된 “이김”은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이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단호하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설 때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생명이 이기는 것을 말한다.
4) 사역자가 책임져야 할 직분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디모데전서 1:11 절을 보면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라고 되어 있다. 즉, 맡기신 바 직분이란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말한다. 만일 내가 이 직분에 충성하려면 이를 방해하는 그 어떤 것에도 적절하지 못한 관심이나 감정을 허락해서는 안된다. 이 직분은 내 자신이 복음을 알고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는 두 가지 방법으로 실현된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속하셨다는 완벽한 확신 가운데 머무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 확신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강권적 필요에 따라 내가 접하게 되는 모든 사람에게 사역하는 것이다 (참조, 골 1:28-29).
3. 사역자의 영적인 삶
1) 하나님의 생명과 대화를 나눔
갈라디아서 2:20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역자가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영적인 삶을 건강하게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절대로 영적인 안일함을 허락하지 말라. 영적 안일함은 하나님을 심각하게 대하지 않을 때, 혹은 주님을 위하여 뭔가를 해야 하는 것을 거부할 때 찾아온다. 이 두 가지를 마음 속에 새기라.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생각은 하나님께서 다루시게 하고 내부적으로는 나의 관심이 하나님께 있게 하라는 점이다.
하나님과 책임 있는 대화를 나누는데 있어서 세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온 마음을 다하여 성육신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두는 것이다. 둘째는 자신을 교회와 일치시키는 것이다. 셋째는 성경의 계시를 수단으로 하여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육신 안에서 자신을 주셨으며, 교회를 통하여 자신을 주셨고, 주의 말씀 안에서 자신을 주셨다. 이것이 주께서 주의 생명을 우리에게 전달하시기 위하여 정하신 방법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말씀을 성찬, 곧 우리가 주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수단이 되게 하셨다. 따라서 성경은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 주시는 비밀의 문이다.
2)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협력
에베소서 3:16-19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는 어떤 부분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영적인 부분에서만 하나님께 협력하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소위 세속적인 것을 영적으로 만드는 일에는 협력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는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의 구분이 없으셨다. 우리가 이 경계를 쉽게 지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생명에 집중하지 않아서 그러하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내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 놓고 경계와 질투의 자세로 자신이 만든 세상을 지킨다. “나는 이것 저것을 해야 한다.” “나는 반드시 이곳에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세는 참된 사역자라면 취할 수 없는 자세이다. 매우 인위적인 자세이며 하나님의 생명이 전혀 나타날 수 없는 자세이다. 이러한 자세로는 현실의 긴장을 견딜 수 없다.
성경에는 병든 경건이란 없다. 우리의 경건은 이 세상 안에 있으면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강하고 생동력이 넘치는, 그러면서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속한 경건이다. 이 경건은 어떤 부분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고 승화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생명과 관련이 없는 경건을 주의하라. 이러한 경건은 종교적인 모양과 체험을 말하지만 하나님의 생명으로 인한 삶의 능력을 나타내지 못한다. 당신의 삶 속에서 온 힘과 마음을 다하여 경건에 힘쓰며 완전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라. 그러나 절대로 종교적인 사람이 되지는 말라. 가짜 종교인은 하나님을 심각하게 대하지 않고 자신만을 심각하게 고려할 뿐이다. 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예배의 대상은 자신의 체험이다.
3) 하나님께 집중함
로마서 8:3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하나님께 집중하려면 자신의 종교적인 자아-의지(self-will)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 우리 주님께서는 종교적인 자아-의지를 거절하셨다. 이에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흔들어 놓으셨다. 사람은 본래 종교적으로 자아-의지적이다. 이 의미는 하나님께 집중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뜻이다. 사람은 자신의 종교적인 이상에 집중하고자 한다. 자아-의지적인 종교는 거룩한 삶이 어떠해야 한다고 자기가 결정한다. 그리스도인의 경우도 자아-의지적인 경향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이 그를 통하여 역사할 기회를 얻지 못할 때가 많다. 사람은 가만히 있으면 자연스럽게 자아-의지적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자기 중심이 될 때 더 이상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지 못하게 된다. 자신의 종교 체험에 매어 달리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자아 중심적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의 삶 가운데 이러한 자아-의지를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모방”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죽을 육체를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상황을 조성하셔서 아무도 우리를 도울 수 없는 그런 어려운 상황으로 인도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그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생명을 드러내던지 아니면 겁쟁이가 되는 수 밖에 없다. 만일 어떤 신자가 “나는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나타낼 수 없다” 라고 말한다면, 이러할 경우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한다. 그러나 그러한 특별한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생명을 나타낸다면 - 당신이 허락해야만 하나님의 생명이 나타날 수 있다 - 이것이 바로 주께서 당신을 부르신 목적이며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사역자의 영적인 삶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을 통하여 나타나시는 것이다.
4. 사역자와 말씀
1) 성스러운 권위의 면
마태복음 21:23
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사역자는 위로부터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권위에 충성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당신은 순종해야 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효력이 없다. 권위는 자발적으로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 미신적으로 따라서는 안된다. 과거에 교회의 권위와 성경의 권위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따르는 권위가 아니라 강제성을 띈 외적 권위였다. 오늘날 사람들은 말한다. “외적인 권위를 무시하십시오. 왜 그러한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까?” 그러나 사람이 위로부터 거듭나 영적인 사람이 되면 그 순간부터 성경은 그의 삶과 마음의 절대 권위가 되어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된다. 그의 양심은 오직 성경의 절대적인 법에 따라서 분별하기 시작한다. 성경이 인용되면 즉각 그의 직감이 말한다. “그렇다. 이것이 분명한 진리이다.” 그는 성경으로부터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변한다. 이와 같이 사람이 위로부터 거듭나면 새로운 내적 기준을 가지게 되는데 이때 이 내적 기준의 유일한 객관적 기준은 성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복음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의 핵심을 다룰 수 있는 용어들로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the Gospel of the Son of God)을 다시 분명하게 재언급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진리 및 진리에 관한 용어들을 내팽개치고 있다. 왜 우리들은 지금 이 시대의 군중을 향하여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서지 못하는가? 정통을 따지는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가망이 없을 정도로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다. 오히려 비정통의 사역자들이 쓰임을 받고 있는 처지이다.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흠뻑 젖어서, 이 시대에 호소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하여 오랜 참 진리를 분명하게 말하는 사역자들이다.
2) 사회적인 권위의 면
요한복음 18:36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기독교는 그 근본에 있어서 사회적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보는 관점으로 사는 것이다. 그 삶은 우리 믿는 자들이 서로 온전한 친교를 나누는 삶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지 않은 사람과는 진정한 친교를 나눌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기 시작하면 세상과 정욕과 사탄은 그에게 있어서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세상 눈으로 볼 때 네가 지녀야 하는 덕은 오직 나의 제자라는 사실 뿐이다.” 또한 주께서 말씀하시길,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라” 고 하셨다 (참조, 요 15:19).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 믿는 자들은 서로 하나가 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교회의 의미이다.
과거 시대에 카톨릭 교회는 권력을 쥐고 집권을 했다. 그러나 이제 그 권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종교 단체를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여러 종교 단체를 대하게 된다. 그들은 형제 사랑을 외친다. “만인 형제 사랑”의 정신 위에 문명 시스템이 세워지고 있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들이 외치는 형제 사랑과 다른 형제 사랑을 외치면 요한복음 16:2절과 같은 사건들이 발생하게 된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면, 기독교는 중생에 의하여 하늘로 올려져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된 사람들의 형제 우애를 근거로 한 사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요 18:36).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순종하기보다 여전히 세상의 명령을 수행하려는 경향이 많다.
3) 인격성의 면
요한복음 17:22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회에 대하여 갖고 계신 개념은 주께서 아버지와 하나이심같이 사람들이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인격성(personality)’ 이라는 용어의 근본 개념은 하나님에 의하여 인격을 형성하는 존재들을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 완전한 인격성까지 자라나지 못하였다. 또한 오직 하늘로부터 거듭나야만 그 후에 완전한 인격성을 향하여 자라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가치는 우리의 인격성의 발전과 성장에 비례한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아 거룩하게 된 사건과, 지금 이 땅에서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순종의 삶을 선택하는 사건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믿고 구원만 받으면 된다는 식의 일반적인 관점은 사실 기독교의 걸림돌이다. 우리 중에 몇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 중에 몇이나 자신의 모든 정신적, 도덕적, 영적 에너지를 주를 위하여 사용하고 있는가? 이것이 하나님께서 의미하시는 사역자의 개념이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이 땅에 남겨 두셨는가? 구원을 받고 거룩하게 되기 위함인가? 아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여기에 남겨져 있다. 만일 우리가 계속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정신을 가지고 이 땅에서 한 발자국씩 나아가면 어느새 우리의 인격성이 개발되게 될 것이다. 인격성이 개발된 사람은, 단지 구원 받아 거룩하여진 후에 더 이상 아무 영적 진보를 하지 못한 사람들과 비교될 때, 예수 그리스도께 훨씬 더 소중한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다.
당신은 주님의 손에 붙들린 바 되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찢겨진 빵과 부어지는 포도주가 될 의향이 있는가? 지금 이 시대 속에서 당신의 생명과 인생이 주의 다른 제자들을 만드는데 쓰임 받을 수만 있다면 어떻게 낭비되어도 상관없는가? 사역자로서의 삶이란 말로 다 할 수 없는 주님의 구원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표현이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아 거룩하게 되었다고 해서 세상으로부터 믿음과 증오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날마다 성화의 원칙에 따라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아갈 때 그때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고 증오한다. 세상으로 하여금 분개하게 만드는 것은 거룩에 대한 ‘설교’가 아니다. 죄사함을 얻은 후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가 되는 거룩한 삶을 현실 속에서 살 때, 곧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된 삶을 살 때, 그 때 세상은 우리를 멀리하고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 6:53, 66). 누구든지 주님을 버리고 타락하면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될 것이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전 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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