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하나님의 심연(the abysses of God)을 확신하라
구원은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측량할 수 없이 깊다. 구원은 체험이 아니다. 체험은 단지 구원이 우리에게 의식되어지는 매우 작은 부분일 뿐이다. 우리는 체험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생각을 설교해야 한다.
1) 무한한 사랑에 내린 심판
베드로전서 4:17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어려워하는 자들 편에 서서 그들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 하나님은 비난 받으실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게 진리를 제시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보여주실 것이다.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임을 기억하라. 따라서 우리는 심판에 대하여 반드시 언급해야 한다. 설교에서 가장 혹독한 시험은 모든 사람을 심판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성령께서 각 사람을 책망하신다. “나는 그것만은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지 말라. 이는 무의식적인 신성 모독이다. 만일 자신의 무능 때문에 복음이 막힌다면 이는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내 자신을 의지하려는 모든 불신앙적 요소들을 철저하게 제거하라. “나는 시키시는 대로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 자신에게 의지할 것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진정한 성도는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가 할 수 없다면 주께서는 그러한 요청을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온전한 연약함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성령이 주님의 능력을 드러내신다. 사역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빛으로 볼 때 정죄 받을 만한 것이 절대로 없어야 한다.
2) 십자가의 심연에 선 양심
고린도후서 5:10-12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11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
12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모든 사람에게 가장 공통적인 것은 양심이다. 십자가는 최고의 열정으로 타오르는 하나님의 양심이다. >
양심은 십자가 앞에서 교육되어져야 한다. 사역자로서 우리는 사람들의 양심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면하도록 해야 한다. 나의 삶은 과연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흘리신 보혈의 가치를 드러내고 있는가? 십자가를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평강과 능력으로 나의 삶과 재능 가운데 나타나는가? 그렇지 않다면 나는 뭔가 잘못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란 성령께서 나를 주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강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 내가 모든 덕을 다 소유할 때까지, 모든 승리를 얻을 때까지, 모든 생각이 거룩하여질 때까지, 내 안에 주님만 남을 때까지, 십자가만 붙듭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양심을 바르게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계속 십자가의 빛 가운데 머무는 것이며 성령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주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와 십자가로부터 우리의 눈을 떼고 이제 자신의 체험 위에 신앙을 세우려고 하면 이는 우리를 구원한 그 능력에 대항하여 반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께서 나를 깨끗하게 하셨으니 나는 내 힘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버리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로 잡힌 바 되어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서 걸을 때에만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거룩함이 우리 안에서 나타나게 된다. “적절한 생각을 먼저 생각하자” 라고 하며 지적인 생각을 앞세우지 말라. 먼저 적절한 삶을 살라! 그러면 당신은 적절한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아-계시이다. 곧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주시는 방법이었다. 오늘날 설교를 들어보고 신앙관련 책들을 읽어보면 영특한 사람의 지혜는 보이지만 얄팍한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그 이유는 그 내용들이 십자가의 그 놀라운 사건과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하나님 자신과 일치시키기 위하여, 또한 그들을 높이시기 위하여 자기 자신마저 다 주신 그 놀라운 십자가의 사건! 사람들은 그 사건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3) 속죄의 심연에 선 도덕성
고린도후서 5:20-21
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 곧 신체적, 도덕적, 영적인 부분은 속죄의 거룩의 기준에 의하여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에 사역자는 언제나 속죄에 대하여 깊이 묵상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의미하지 않는 거룩을 절대로 말하지 말라. 하나님의 거룩은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감시 하에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며 동시에 그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언제나 유혹은 타협을 통하여 찾아온다. 타협은 음성은 “너무 까다롭게 거룩을 세우려고 하지 말라. 너무 강력하게 순결을 부르짖지 말라. 너무 올바른 절제를 주장하지 말라” 고 속삭인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동행을 가로 막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당신 안에 있던, 다른 사람에게 있던 조금도 타협할 마음을 갖지 말라.
4) 복음의 심연에 선 자유함
갈라디아서 5:1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자유함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주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 자유를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이 우주에는 단 하나의 자유함만이 있다. 바로 우리의 양심 안에서 역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함이다. 이 자유는 우리에게 옳은 것을 할 수 있도록 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자유로 자유하다면,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영향을 미치는 자들도 우리가 누리는 똑같은 자유함을 누리기 시작할 것이다. 언제나 당신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하여 평가하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어주시는 멍에만 메고 그 외의 다른 멍에는 아무 것도 메지 말라.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지 않은 멍에를 다른 사람에게 두지 않도록 주의하라. 우리가 행하는 것처럼 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틀렸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벗어나는 것은 오래 걸린다. 이러한 관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이 아니다. 우리가 온전히 온화하신 주님과 한마음이 될 때 온화하신 주님을 분명히 증거할 기회를 갖게 된다. 사역자의 삶은 주님의 손에 사로 잡혀 희생됨으로 다른 사람들의 자유함을 위한 자양분이 되어야 한다.
18.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가?
1) 여전히 작은 음성
마태복음 4:19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계셨다. 그때 주님의 “나를 따르라”는 초청은 확고한 것이었다. 베드로는 그 부름에 분명하게 응답하였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막 10:28).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베드로처럼 모든 소유와 모든 가족을 문자적으로 버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제자로 부름을 받을 때 반드시 버려야 하는 것은 죄와 세속이다. 이러한 것들을 버려야 하는 줄을 몰랐다고 말하지 말라.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조아리고 묻기 바란다. “주님, 왜 나는 주님을 지금 따를 수 없는 것이지요? 왜 허락해 주지 않으십니까?” 그러면 주께서는 당신이 지금 왜 주님을 따를 수 없는지 당장 보여주실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변명하며 말한다. “그러나, 주님. 그것만은 안됩니다. 그것은 사실 별 것 아닌데 왜 그러십니까?” 그러나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그것 때문에 당신은 주를 따를 수 없는 것이다. 성령의 음성과 상충되는 생각이나 말을 결코 믿지 말라. 성령께서 당신 안에서 뭐든 감지하여 가책을 주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당장 좇아내라. 그 이유는 성령께서 감지해 주신 것은 당신의 깊은 죄성과 뿌리깊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당신이 내려 놓지 못하는 그 작은 부분은 사실 당신의 전반적인 죄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전반적인 죄성은 내 자신에 대한 나의 권리이다. 그래서 당신은 “그것만은 안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2) 조용하지만 분명한 비전
마가복음 4:34
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예수님과 단둘이 함께 한 적이 있는가? 제자들은 주님의 입술로부터 친히 진리를 듣는 엄청난 특권을 누렸다. 뿐만 아니라 주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질문할 수 있는 특권도 있었다. 제자로 부름을 받은 우리는 예수님께 직접 배우며 질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예수님께 직접 설명을 들으려 하기 보다는 유명한 주석들을 찾으러 다닌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주님께 나아가 직접 들을 수 있을까?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바르게 설명하시는 유일하신 분이시다. 성령은 사람들의 주석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하여 주신다. 성령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참된 의미를 식별하신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요 16:13). 성령의 해석은 결코 복잡하거나 머리 좋은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러한 해석이 아니다. 성령의 해석은 언제나 심오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다. 당신은 성령의 해석을 깨달으면서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진리이다” 라고 확신하게 된다. 만일 어떤 해석이 당신에게 이러한 확신을 주지 않으면 당장 멈추라. 그 해석이 주님의 것인지 아닌지 분명할 때까지 기다리라. 머리로 따지려 하지 말고 주님과 동행하며 주께 물으라. 만일 주님께서 당신을 아직 기다리게 하시면 그 분께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에 관한 분변과 영적인 성품은 언제나 비례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산상수훈은 주님의 제자에 대한 한가지 원칙을 말하는데, 주의 제자란 끊임없이 주의 말씀을 듣는 자라고 한다 (참조, 마 7:24). 불규칙적으로 주의 말씀을 듣는 자는 한쪽으로 치우친 비정상적인 성도가 되기 쉽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 그들은 구원 및 죄사함, 그리고 여러 치유 사역의 반짝이는 체험들이 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말한다. “내가 옳으니 나를 좇으라.”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높이라”고 하신다. 모든 것을 주님 발 앞에 내려놓고 배우라. 주의 말씀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교훈을 받으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친히 들으라. 성령께서 당신을 가르치도록 하라. 꾸준히 행하라. 듣기만 하는 자가 되지 말고 순종함으로 제자가 되라. 절대로 당신의 체험이 당신의 삶을 인도하지 못하도록 하라. 체험이란 단지 그 체험을 주신 주님을 더 알게 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하나님을 알기에 힘쓰며 끊임없이 배우는 자가 되라. 그러면 진리가 항상 당신 앞에서 열릴 것이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해결하시지 못하시는 인간의 문제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3) 계속적으로 조심스럽게 걸음
누가복음 14:33
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현대 문명의 이상을 추구하는 이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정신 병자를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문명을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문명은 인간들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수천 수만가지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문명을 세워간다. 그러나 인간의 문명시스템은 어느 날 고철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때 인간들은 주님을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하여 후회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주를 따라야 한다고 심각하게 말씀하셨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주님은 심각하게 말씀하신다. 둘 중 하나를 포기하라고 하신다. 오늘도 주의 부르심과 문명의 혜택의 소리는 서로 큰 소리를 내며 맞부딪힌다. 산상 수훈을 읽어 보라.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눅 12:31). 이 말씀을 지금 당신의 현대의 삶에 적용해 보라. 이 말씀은 정신병자의 말이던지 아니면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될 것이다.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은 너무나 아름다운 책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근본적인 진리에서 왜곡되어 있다. 그 이유는 그 책의 내용에는 우리 주님께서 친히 이루신 중생에 관한 메시지가 무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닮아보려고 시도하지만 결국 절망 가운데 마치게 된다. 사람의 자연적인 속성으로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노력할 때는 반드시 실패한다. 그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생명이 없으면서 그렇게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기만이다. 오직 그러한 삶을 살았던 주님의 생명을 소유해야만 그러한 삶이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울 수 있다 (참조, 벧전 2:21-23).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주께서 우리 안에 넣으신 생명에게만 해당한다. 구속의 놀라움은 주께서 주를 순종하려는 자들에게 주님 자신의 성향을 넣어주실 수 있다는 점이다.
19.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언약은 내게 있네. 그러나 나는 그림자와 놀거나 잡초를 뽑기 위하여 언약에 서지 못하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허무하게 무너질 때에야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내려 놓네.>
1) 훈련된 삶
디모데후서 2:3
3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사역자에게 주어지는 첫번째 요구사항은 자발적으로 훈련에 임하는 자세이다. 열정적인 사람이 되는 것과 영적인 영향력에 감동을 받는 것은 쉽다. 그러나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려면 예수님과 진정한 사랑에 빠져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하여” 꾸준하게 걸어갈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잡아 메어야 한다.
훈련이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생소한 것 중에 하나가 되어 버렸다. 현대인들은 훈련을 견뎌내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의 생명과 은혜의 체험을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내 자신을 훈련하여야 한다. 사역자의 훈련은 자신을 개발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대장되시는 예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훈련한다. 그렇게 많은 훈련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곳에 단 한가지 목적, 곧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하기 위하여 있다는 사실을 잊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맺은 언약을 항상 기억하라. 만일 군인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는 군인이 될 자격이 없을 것이다. 주님의 제자로서 당신의 모든 것을 주께 드려라.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께 끊임없이 관심을 갖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이 예수님 대신에 소위 “사역이라는 일”에 빼앗기지 않도록 주의하라.
훈련된 삶이란 세가지를 의미한다. 주께서 생명을 주신 최상의 목표를 나의 목표로 삼는 것, 대장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리신 삶의 규칙을 지키는 것,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과 주의 말씀에 완벽하게 충성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반항하는 일이 없어야 하며 모든 충동과 감정은 철저하게 다스려져야 한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깨달음이 하나님과 주의 말씀에 어울리는가를 철저하게 점검하고 그렇지 않으면 당장 버려야 한다.
우리 주님의 삶은 훈련의 본이 되신다. 주님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아버지께 희생으로 드림으로 거룩한 삶을 사셨다. 그분의 말과 생각은 아버지의 말씀에 철저히 순복하신 결과였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끊임없이 순복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 있었다.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도 선생님처럼 해야 한다.
2) 얽매이지 않은 삶
디모데후서 2:4
4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민수기 6:2-3
2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고 하면
3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로 된 초나 독주로 된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예수님의 제자는 자신이 무엇에 얽매여서는 안 되는지 잘 알아야 한다. 제자는 하나님 앞에서의 언약 외에 자신을 주장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위하여 얽매이지 않는 것과 하나님 때문에 얽매이지 않아야 하는 것 사이의 분명한 차이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유혹에 얽매이지 않는 것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보통 이러한 경우 주님을 위하기 보다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이것 저것을 내려 놓을 수 있다. 그러나 사역자는 추가적으로 자신에게 유익이 되고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라 할 지라도 주님의 손 안에서 찢겨진 빵이 되고 부어진 포도주가 되는 것과 거리가 먼 것이라면 그러한 것들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우리는 우리의 영성 개발을 위하여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부서지기 위해서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에게 유익을 주고 우리를 개발시킬 수 있는 너무나 많은 프로그램들이 있다. (역자 주 - 더 좋은 경력 및 학력을 쌓는다던지 특별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의 언약을 마음에 두고 아무리 좋아 보이는 것이라도 그것이 주를 향한 우리의 충성을 방해할 경우 멀리해야 한다. 바울은 이렇게 논한다. “내 안에 무엇이든, 옳은 것이든 그른 것이든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된다면 나는 포기하겠다. 그것이 심지어 이 땅에서 가장 합법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나는 포기할 것이다” (참조, 고전 8:13). 사람들은 말한다. “왜 내가 이것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불쌍한 사람들이여, 하라! 그것은 옳은 것도 아니고 그른 것도 아니기에 당신이 그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당신의 사랑이 당신에게 유익을 주는 수천 수만 가지로부터 당신을 자유롭게 할 만큼 크지 못하다면 당신은 주님의 종이 될 자격이 전혀 없음을 기억하라.
오늘날 기독교 사역을 원하는 자들을 보면, 사역이 자신의 재능에 잘 맞기 때문에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사역에 맞게 자신을 맞추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도록 주님의 손에 맡겨져야 한다. 이는 주님의 목적을 방해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얽매이지 말고 자유해야 한다는 뜻이다. 만일 당신이 잘 익은 포도알의 상태로만 남길 원한다면 주님께서 당신을 짓이기시기 전에 당장 주의 손으로부터 도망치라. 그러면 당신을 통하여 그 어떠한 포도즙도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 사역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박물관에 보전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그들이 흩어지는 것이다. 성도들은 언제나 남의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 한다. 그곳에서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만이 흘러 나도록 해야 한다.
3) 분리된 삶
디모데후서 2:4
4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레위기 21:12
12 그 성소에서 나오지 말며 그의 하나님의 성소를 속되게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서 성별하신 관유가 그 위에 있음이니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사역자는 하나님을 향하여 분리된 삶을 살아야 한다. 분리된 삶을 사는 예로, 언제나 중보기도를 드렸던 선지자의 삶을 들 수 있다. 너무나 소수의 사람들만이 중보기도를 드리고 있다. 그 이유는 중보기도라는 것이 대리적인 사역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중보 사역은 우리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한 사역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다.
마음이 좁기 때문에 분리된 삶을 사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집중적으로 영적인 순결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분리된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은 아버지 하나님의 생각만큼이나 깊고 넓었다. 따라서 주님은 어디에나 가실 수 있었다. 결혼식장에도 가셨고 당시의 모든 사회 생활에 참여하실 수 있으셨다.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던 이유는 예수님의 도덕성이 완벽하게 순결하였기 때문이다. 완벽한 순결!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다.
처음에는 열성 때문에 모든 외적인 것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차단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곧 진정한 분리라는 것은 외적인 것으로부터의 분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한 영적 순결임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내적 순결은 오직 빛 가운데 행함으로 유지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주님이 원하시는 곳에 두신다. 외지이던 내지이던 상관없다. 우리는 장소에 연연해 하지 않으며 어디든지 간다. 그러나 내면은 언제나 어디서나 세상으로부터 순결하게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의 확신을 사회나 일반 사람들의 기준에 맞출 때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한걸음씩 멀어진다.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지 않을 때마다 우리는 점점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진다. 왕 같은 제사장들이 그 내면의 세계에 있어서 완벽한 분리 가운데 서 있지 못하고 오히려 주님을 섬기려는 그 열심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볼 때, 그리고 마침내 세속에 물드는 것을 볼 때, 나의 가슴에서는 피눈물이 난다.
4) 분변하는 삶
디모데후서 2:6
6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사야 28:23-28
23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
24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어찌 쉬지 않고 갈기만 하겠느냐 자기 땅을 개간하며 고르게만 하겠느냐
25 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소회향을 뿌리며 대회향을 뿌리며 소맥을 줄줄이 심으며 대맥을 정한 곳에 심으며 귀리를 그 가에 심지 아니하겠느냐
26 이는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적당한 방법을 보이사 가르치셨음이며
27 소회향은 도리깨로 떨지 아니하며 대회향에는 수레 바퀴를 굴리지 아니하고 소회향은 작대기로 떨고 대회향은 막대기로 떨며
28 곡식은 부수는가, 아니라 늘 떨기만 하지 아니하고 그것에 수레바퀴를 굴리고 그것을 말굽으로 밟게 할지라도 부수지는 아니하나니
사역자는 농부와 같은 분변력이 있어야 한다. 곧, 지켜보는 방법, 기다리는 방법, 풍성한 열매를 맺는 방법등을 알아야 한다. 농부는 팔짱을 끼고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집중적으로 활동을 하며 기다린다. 추수 때까지 부지런히 일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당황스러운 문제를 가지고 당신을 찾아오면,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답변하지 말라. 대신 그 문제를 주님께 가져 가라.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알려 주실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분변하는 것을 배우면 당신은 사람들이 가져오는 문제를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데로 다룰 수 있게 되며 분별력 있게 말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용하시는 이유는 당신이 틀린 것을 분변할 줄 알아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당신에게 분변력을 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은 말을 하면서 성령께서 당신을 통하여 사람들이 가져온 문제에 대하여 얼마나 합당한 말을 주시는지를 보며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내가 왜 그때 그렇게 말했는지 나도 놀랍다” 라고 말하게 된다. 그러나 더 이상 놀랄 필요가 없다. 바로 그것이 성령께서 당신을 감화하시는 방법이다.
우리가 성령께 쓰임 받을 때 우리는 우리가 쓰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한편 쓰임 받기를 기대하며 설칠 때는 오히려 쓰임 받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를 통하여 분별하실 수 있도록 급한 일들 속에서 더욱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사역자는 ‘나는 하나님의 것’ 이라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어야 한다. 사역자는 다른 사람에게, 또는 이 세상의 다른 부름에 유용하지 못하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눅 9:62).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약속을 당신의 것으로 삼았다면 당신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때마다 비참과 요란함이 당신의 삶에 임하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것 저것을 하면서 형통할지 몰라도 당신은 그럴 수 없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다른 일을 할 때 형통하지 못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역자들에게 발생하는 일들에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여러 이유들이 언제나 있다.
사역자 각자에게 절대로 지워지지 않게 쓰여진 한 단어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 이라는 단어이다. ‘하나님의 것’ 으로 여겨진 인생들마다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따라서 그들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사역자가 무너지는 때를 보면 그가 짊어지지 말아야 할 책임을 짊어졌을 때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다른 책임을 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당신이 져야 할 책임만 생각하라. 사역자는 주께 책임을 넘기는 것 외에는 다른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당신이 짊어진 책임이 당신을 먼지처럼 짓누른다고 해도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아무런 책임을 지우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 때 당신은 어린아이처럼 자유하게 될 것이다. 자녀의 삶은 오직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시 55:22).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방해하는 것들은 언제나 우리를 무겁게 한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자유함과 단순함을 앗아간다. 자유함과 단순함은 언제나 한 곳으로부터 흘러 넘치는데 그곳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평안을 누리며 안식하는 곳이다.
위의 내용들은 체험이 아니라 삶이다. 체험은 삶으로 이어지는 입구이다.체험에 있어서 우리가 주의하여야 하는 것은 우리는 자꾸 그 체험으로 돌아가길 원한다는 것이다. 체험은 체험대로 두라. 체험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서 원하는 것은 체험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삶이다. 어떤 사람은 “우리 속에 있었던 불을 다시 지피고 싶은데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라고 하며 비통해 한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놀라운 깨달음의 시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가도 그것들을 다시 모두 가져 가신다. 그때 우리는 비전 가운데 본 것을, 수고하는 손과 피 흘리는 발로 이루어 내야 한다. 이를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20. 주님과의 일치
일치는 체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치는 체험보다 훨씬 더 깊은 무한한 차원의 것이다. 일치는 계시이며 체험을 설명한다. 모든 것을 체험이라는 틀에 가두려는 자세에서 나오라. 두 가지를 기억하라. 첫째, 체험은 그 자체가 체험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점이요, 둘째, 우리의 체험을 측정할 수 있는 어떤 기준적인 계시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체험을 측정할 수 있는 기준적인 계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즉, 체험은 언제나 이 계시까지 좇아갈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그 어떠한 체험보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무한하게 높여야 한다.
1) 성육신. 연약하여진 말씀. 신-인
요한복음 1:14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신이 된 존재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분이시다. 주님은 자신의 영광을 비우시고 성육신하셨다. 성육신과 속죄를 절대로 분리시키지 말라.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주시기 위함이 아니었다. 성육신은 사람이 하나님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길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한가지 목적을 위하여 사람이 되셨다. 그분은 죄를 제거하시고 온 인류로 자신과 하나되게 하시기를 원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사람의 개인으로 오신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온 인류를 자신의 위격에 (Person) 포함시키셨다. 그는 그 위격 안에서 ‘신-인’ 이시다. 사람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로 들려 올라가게 되었으며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내려오실 수 있게 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역자 - 범신론을 빗대어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으로 나타나셨다고 말씀하셨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요 14:9). 성육신의 사건은 친히 모든 인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이 나타날 수 있도록 하신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이 뜻을 완성하는 과정에 성육신, 갈보리, 부활 사건이 있다.
2) 일치. 죄가 된 아들. 신-인
고린도후서 5:21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지금 이 내용은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이 구절은 우리 주님의 체험을 언급하고 있다. 이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을 대신하여 “형벌을” 당하셨다는 내용이 아니다. (역자 주 - 내 입장에서 유익을 얻는 차원의 관점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는 것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일치가 되셔서 죄를 제거하셨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로 하여금 주의 성도가 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친 아들을 죄가 되게 하셨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일치함으로 세상의 죄를 짊어지셨다고 계시한다. 예수님께서 죄와 일치되신 이유는 세상의 죄를 공감하셨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취하셔서 자신의 위격(Person)에 인류의 모든 죄를 놓으시고 담당하셨던 것이다. 그렇게 하심으로 주님은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데로 인류를 회복시키셨고, 이에 누구든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사역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게 되었다.
3) 침투. 성도가 된 죄인. 신-인
갈라디아서 2:20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절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가 된 사실을 표현한 구절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그의 모든 삶이 바뀌었다. 바울의 삶의 목적은 더 이상 자아-실현이 아니었다. 그의 목적은 오직 그리스도와의 일치였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일치의 계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음을 알려준다. 우리의 순종에 의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일치되는 것이 아니다. 순종은 이 엄청난 계시에 인간이 접할 수 있는 길일 뿐이다. 우리는 순종과 믿음의 문을 통하여 일치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미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깨달아야 할 “계시”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접하게 되면 주님과 접하고 있다는 의식마저 사라지게 된다. 우리는 주님의 평강과 능력에 빠져들게 되며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하나됨을 확신하게 된다. 죄 사함 받아 거룩케 되는 체험은 이 관계에 들어가는 입구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아-실현은 우리의 구속(our Redemption)이다. 구속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주님께서 자아 실현의 과정에서 겪었던 과정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될 때 우리도 겪게 된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벧전 4:13).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요일 4:17).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 1:24). 우리의 삶에 있어서 우리를 사로잡는 단 한가지 열정은 주님만을 위하는 것이어야 한다.
“오, 그러나 나는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물론 당신은 자격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기도와 순종도 당신에게 아무 자격을 줄 수 없다. 오직 당신을 주님의 손에 의탁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하여 당신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계시를 믿으라. 그리고 그 믿음 가운데 당신 자신을 완전히 주께 던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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