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기도문 !!

[스크랩] 기도

하나님아들 2013. 3. 5. 00:15

기도

 

- 기도하는 이유

 

기도하는데 어떤 규칙이 있을까? 기도의 정의를 떠올려 보면 거기에 해답이 있을 법하다. 일반적으로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정의한다. 그것을 풀어서 <달란트를 찾아서>라는 제 글에서 기도를 이렇게 정의한 적이 있다.

 

기도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마음의 눈으로 느끼게 하는 과정”이라고 말이다.

 

그때 수도원장의 예를 들면서, 기도해서 아침 해가 뜨게 할 수는 없지만, 아침 해를 뜨게 하시는 하나님을 느낄 수는 있다고 말이다. 즉, 기도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깨닫는 것이라는 정의이다. 지난주에는 이렇게 말씀드렸다. “아버지!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내 마음에 평화와 안식에 대한 확신이 든다.”고 말이다.

 

그런 정의를 세웠다면 이제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그런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을까를 모색해야한다.

그전에 먼저 <기도하는 이유>를 알아보자.

 

하나님과 대화를 시도하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답답하기 때문이다. 답답한 이유는 자기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문제들 중에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최고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는가? <구원>의 문제이다.

 

구원은 스스로 할 수 없다. 그래서 구원해달라고 하는 기도가 가장 절실한 기도이다. 이것이 <이신칭의>의 핵심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하나님이 인정하여 죄의 사망에 빠진 사람을 살려주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기도의 출발은 구원을 바라는 인간의 마음자세에 있다. 구원을 바란다는 것은 자기의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근원적인 죄를 느끼고 그 죄에서 놓여나기를 먼저 기도하는 것이 순서이다.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근원적인 죄 의식에서 놓여나기를 갈망하는 인간은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기도하는 사람의 유형

 

기독교는 그렇게 인간을 이해하기 때문에 기도를 바치는 것에 대하여 매우 익숙하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인간이 있는데, 기도하는 문제를 놓고 보면 3종류가 있다.

 

1) 자기의 온 힘을 다해서 노력했는데 안 되면 체념, 포기, 또는 용납, 결국엔 만족하는 유형이다.

2) 자기의 온 힘을 다해서 노력했는데 안 되면 힘 있는 이에게 청탁을 하는 경우이다. 부탁이 청탁이 되고 거래가 오가는 경우가 된다.

3) 자기의 온 힘을 다해서 노력했는데 안 되면, 이젠 무조건 하나님께 매달리는 경우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 가지 유형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이란 모든 일을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하던 사람이 변해서, 모든 일이 하나님의 손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고백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근원적인 죄 의식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할 때에 이것이 자기 힘으로 할 수 없었던 일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종 이런 사람이 있다. “주여, 이일은 내가 해도 쉽게 되는 일인데, 당신이 하십시오.”라고 아예 자신은 손 떼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더 훌륭한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절대로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하도록 기도만 한다면 이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다. 아마 공동체의 일이니까 그렇게 말한 것이지, 당장 자신에 관련된 중요한 문제였다면 그렇게는 못 할 것이다.

 

진정한 크리스천은 내가 희생하고 열심히 노력해서 일을 이루어가면서도, 감당할 능력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일이 이루어지면 이런 능력으로 주셔서 일을 이룬 것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감사의 기도를 드릴 것이 분명하다.

 

- 기도의 법칙

 

이제 진정한 크리스천의 기도를 정의하였으니, 그 방법에 대하서 논의하자.

 

첫째, 올바른 기도의 법칙은 “하나님과 대화하기에 합당한 정신과 마음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정신과 마음자세일까? 하나님을 묵상하는 데 방해가 되는 생각을 차단하려는 마음자세가 필요하다.

 

하나님을 묵상하는데 방해가 되는 생각이나 마음은 보통 정의하기를 “육신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말하면 기도는 반드시 “영적인 것”만 구해야 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여기서 “육신적”이라는 말은 내 생각에 “욕심으로 구하는 것”이라고 해설하고 싶다.

 

즉, 하나님과 대화의 기도를 하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욕심>이라는 말이다. 기도할 때에 제발 욕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욕심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우리의 정신은 흐리게 한다.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그런 욕심을 가져갈 수는 없다.

 

둘째, 올바른 기도의 법칙은 집중력이다.

 

지난주에 기도의 대상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친밀감에 대하여 말씀드렸는데, 친밀한 사이에서 조심할 것은 경외심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즉,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두려워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정도로 친밀하다고 느껴서, 어린 아이가 보채는 듯한 무분별한 기도를 드린다면, 정작 지금 자신이 무엇을 간구하고 있는지 놓치게 마련이다. 그래서 다른 길로 빠지지 않도록 집중해야한다는 말이다.

 

성경에 보면 여러 군데에서 기도할 때 손을 들고 기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오늘 본문 열왕기 상 8장 54절에 “솔로몬이 무릎을 꿇고 손을 펴서 하늘을 향하여 이 기도와 간구로 여호와께 아뢰기를 마치고...”라는 말에 나오는 것처럼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부흥회 모임에 가면 손들고 기도하자고 제안하는 사회자나 설교자가 많다.

 

주일학교어린이 들이 부르는 복음 성가에도 “손을 높이 들고 주를 찬양, 높은 곳을 향해 주를 찬양”이라고 부르는 찬양이 있기도 하다. 그렇게 손을 드는 이유에 대하여 여러 가지 말들이 있지만, 핵심은 디모데 전서 2장 8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그냥 손을 드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손>을 든다는 말은 자기의 마음을 정하게 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손을 드는 외적 표현 속에 담긴 본질은 하나님의 거룩성과 만나는 현장에서 자신의 거룩함을 유지하려는 집중력이다. 그러니 거룩한 분께 이것 저것 속된 것을 달라고 정신없는 기도를 할 수는 없다.

 

사실 기도하려고 두 손을 모으고 시작하면 간구할 것이 너무 많아서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제 경우는 매우 그렇다. 중보기도 부탁을 받은 것을 빠뜨리지 않기 위해 정신을 차려야한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정작 기도의 본질을 놓치고 이것 저것 내가 구해야 할 기도의 목록만 중얼거리다 끝나기 마련이다.

 

그럴 때 쓰는 방법, 즉 기도에서 집중력을 놓치지 않는 것은 이것 저것 정신없이 구하는 자신이 느껴질 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기도법을 말한다. <거룩>이라는 단어도 좋고, <긍휼>이라는 단어도 좋다. <사랑>도 좋고, <인내>도 좋다. 그날 기도를 시작하면서 그 단어에서 출발하고 집중력이 흐트러질 때에는 다시 그 단어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셋째, 올바른 기도의 법칙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한도 내에서 구하는 것이다.

 

참 어려운 말이다.

하나님이 어디까지 허락하시는지를 알아야 그 한도 안에서 구할 터인데, 우리는 그 한도를 모른다. 그렇지만 이렇게 반대로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너무나 뻔뻔하게 자기들이 꿈꾸는 바를 그대로 구하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고 이루어주시는 것은 분명하지만, 변덕스런 인간의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이 늘 맞추어가면서 응답하시겠는가 말이다.

 

기독교인이 아닌 철학자나, 문학가도 자기의 소원과 욕망대로 다 이루어 주기를 바라며 살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올바른 기도의 법칙은 “기도를 성숙하게 만들어가며 기도하는 것”이다.

 

- 기도의 능력

 

나는 기도의 능력은 하나님의 언약에 있다고 믿는다. 또 신학적으로도 옳은 말이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었다. 언약이란 하나님이 인간에게 무엇을 주겠다는 약속인데, 그 약속에는 조건이 있다. 결정적인 조건은 하나님이 명령하신대로 따라 사는 일이다. 명령은 지키지 않으면서 내게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하기만 하면 언약의 기본규정을 어기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기도의 능력은 언약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드릴 때에 간절하게 하는 것이 필요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기도할 때 유념해야하는 네 번째 법칙은 “구하는 바를 열정적인 소원을 가지고 아뢰는 것”이다.

 

이것을 오해하여 기도를 마치 어린 아이가 떼쓰는 것으로, 또는 소리를 크게 질러야 하는 것으로 간절함을 표현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란다. “열정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말은 마치 기도를 무슨 의무행사처럼 형식적으로, 매일 하는 당연한 반복행사처럼 습관적으로 하지 말라는 말이다. 같은 소원이라도, 매일 반복하는 내용이라도 그 내용에 열정을 담으라는 말이다.

 

우리가 가장 많이 드리는 “회개의 기도”를 보자. 스스로 죄인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이런 저런 죄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한다면, 그 기도에 능력이 있는가 말이다. 주의 기도문으로 기도할 때에도, 자기는 남을 용서할 생각조차 없으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라고 기도하는 것이 바로 습관적이고 의무적인 기도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눈물 나도록 간절함이 우리의 기도에는 필요하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중언부언하지 않는 기도의 법칙이다. 마태6장에 보면 주님이 기도에 대하여 가르쳐준 것이 나온다. 외식하는 기도도 하지 말고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는 기도도 하지 말라고 한다.

 

그중에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말만 다루어보자. 원문에는 바탈로게오(βατταλογεω)라고 되어있다. 독일어로 플랍펀(Plappern)이라고 하는데 그 말뜻은 “종알거리다. 막 지껄이다. 쓸데없는 말을 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의 숨은 뜻은 “누구를 괴롭히고 고통을 준다.(quälen)”는 뜻이다. 어떤 고통인가하면 “가시가 달린 나뭇가지로 찔러대는 고통”이다.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입으로만 혀로만 아무리 지껄이게 되면, 오히려 하나님을 괴롭히는 일뿐이라는 것이다.

 

결론

 

디모데 전서 2장에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하는 말의 의미는 풀어쓰면 이런 기도의 법칙들을 유념하여 기도하자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1. 자기의 정신을 가다듬어 욕심을 버리고,

2. 자기가 무엇을 구해야할지 판단하고 이에 집중하며,

3. 점차 성숙해져가는 기도로 무엇을 구하고 구하지 말아야할지를 분별하며,

4. 의무와 습관적인 기도가 아니라, 열정이 담긴 기도를 드리며,

5. 하나님을 괴롭히는 지껄임을 피하고 진실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

 

결국, 기도는 하나님이 모든 선한 것을 베푸시는 주권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인생의 문제를 두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과 얄팍한 타협을 하려고 시도하지 말아야한다. 기도는 나의 전 생을 걸고 드리는 것이고, 하나님의 언약에 나와 우리를 맡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의 법칙을 다시 생각하시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옮겨옴)

출처 : 아촌의 이야기
글쓴이 : 아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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