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신학논쟁
바르트와 브룬너를 중심으로
목창균/서울신대 교수
Ⅰ . 들머리
18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유럽 신학계를 지배했던 자유주의 신학은 제1차 세계 대전을 기점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유주의 신학의 사상적 터전이 되는 인간이성의 능력, 낙관주의 및 역사적 진보주의에 대한 신뢰가 전쟁을 통해 허구로 판명된 결과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20세기 초에 나타난 새로운 신학사조가 신정통주의 신학이다. 이것은 '위기의 신학', '변증법적 신학' 또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라고도 불려진다. 위기의 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과 명령 아래 놓여있다는 것과 계시를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다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 계시와 이성 사이의 모순과 대립을 지적하고, 이 양자 사이의 무한한 차이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변증법적 형식을 사용하기 때문에, 변증법적 신학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이해 사이의 관계를 긍정의 관계에서 파악하지 않고 긍정과 부정의 변증법적 관계에서 파악한다. 자유주의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시하고 사람의 말을 중시한 데 비해, 이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의 토대와 출발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라고 한다. 한편 루터와 칼빈주의적 정통주의 신학과도 다르고 19세기 자유주의 신학과도 다른 점에서 신정통주의 신학이라고도 부른다. 정통주의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이러한 신정통주의 신학의 대표자가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와 에밀 브룬너(Emil Brunner, 1889∼1966)이다. 이들의 관계는 우정과 갈등의 관계로 표현할 수 있다. 자유주의 신학을 분쇄하고 종교개혁 신앙에 기초한 정통주의 신학을 재정립하는데 뜻을 같이한 동료요 동지였으나, 자연신학에 대한 견해 차이로 서로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들의 우정의 토대는 무엇이었으며, 그것을 갈라놓았던 견해 차이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일반 계시와 자연신학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였다. 바르트는 이를 부정하는데 반해, 브룬너는 그것을 인정했다. 필자는 바르트와 브룬너의 생애와 신학을 중심으로 이들의 관계성을 해명한 뒤, 갈등의 원인이 되었던 자연신학 논쟁을 분석하고자 한다.
Ⅱ. 펼침
1. 바르트와 브룬너
바르트와 브룬너는 많은 공통점과 유사점을 지닌 신학자들이다. 첫째, 이들은 모두 스위스출신의 개신교 신학자이다. 바르트는 1886년5월 10일 바젤에서 출생했으며, 그의 아버지 프리츠 바르트(Friz Barth)는 베른 대학의 교회사와 신약 성서 교수였다. 브룬너는 1889년 12월 23일 츄리히에서 출생했으며 생애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다.
둘째, 바르트와 브룬너는 그들의 학력과 경력에 있어서도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스위스와 독일에서 자유주의 신학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했으나, 목회 활동을 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의 한계성을 깨닫고 그것과 결별했다. 그들은 인간의 경험에 기초한 자유주의 신학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종교 개혁적인 신학에로 돌아가려 했다. 바르트는 스위스 베른에서 대학교육까지 받고 독일로 유학하여 베를린 대학에서는 당대의 가장 탁월한 교회사가요 자유주의 신학자인 하르낙(Adolf von Harnack) 밑에서, 튀빙겐 대학에서는 보수적인 신약성서학자 슐라터(Adolf Schlatter) 밑에서 그리고 마르부르그 대학에서는 유럽 최고의 칸트주의 신학자요 자유주의 신학자인 헤르만(Wilhelm Hermann)밑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스위스의 작은 공업도시 자펜필에서 10년 동안(1911∼1921) 목회활동을 했으며 그의「로마서 주석」출판(초판 1919년, 재판 1921년)은 그를 시골의 무명목사로부터 20세기 신학의 거두로 부상하게 했다.「로마서 주석」은 "신학자들의 유희장에 폭탄이 떨어진 것과 같다"는 평을 받았을 정도로 신학적 선풍을 일으켰다.1 그것은 슐라이에르마허로부터 시작되는 자유주의 신학 전통에 반대하는 선언서였다. 그는 「로마서 주석」 출판이 계기가 되어 1921년 독일 괴팅겐 대학 교수로 초빙받게 되었다. 그뒤 윈스터 대학을 거쳐 1935년 나치 정권에 의해 교수직에서 해직될 때까지 본 대학 교수로 활동했다. 그는 히틀러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하고 독일 복음교회를 지배하려는 나찌의 시도에 반대하기 위해 일어난 독일 고백교회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로 말미암아 신학 교수직을 박탈당한 유일한 교수가 되었으며, 1935년 독일로부터 추방된 뒤, 고국 스위스로 돌아와 1968년 죽을때까지 바젤 대학 교수로 활동했다. 한편 브룬너는 츄리히 대학을 거쳐 독일의 베를린과 미국 뉴욕의 유니온신학교에서 공부했으며,1913년 츄리히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간의 경험에 근거한 모든 신학을 의문시했다. 그의 「신비주의와 말씀」(Mysticism and the Word, 1924)은 슬라이에르마허에 대한 비판서였다. 그는 슬라이에르마허나 자유주의신학에 대한 비판에서 바르트와 입장을 같이했다. 그는 스위스의 농촌교회에서 목회를 하기도 했으나, 1924년 이후 은퇴할 때까지 40여년간 츄리히 대학에서 조직신학과 실천신학교수로 활동했다. 그리고 잠시 동안 미국과 일본 등지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셋째 바르트와 브룬너는 공통적인 학문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신학적으로는 칼빈주의의 후예들이며, 철학적으로는 칸트철학과 키엘케골(Kierkegaard) 및 하이데거(Heidegger)의 실존주의 철학의 추종자들이었다.바르트는 개혁교회적인 가정환경에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베른 대학 시절부터 개혁신학을 그의 신학의 근본 토대로 수용했다. 그는 또한 칸트의 이론철학과 실천철학을 공부했으며 키엘케골의 변증법을 그의 신학 전개를 위한 방법으로 이용했다. 특히 1921년 「로마서 주석」 제2판의 출판으로부터 시작되는 변증법적 신학의 기간 동안에 그는 헤겔에 대한 키엘케골의 비판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한편 브룬너는 지식과 신앙에 관한 저술에서는 칸트의 영향을, 종교적인 경험에 대한 강조에서는 키엘케골의 영향을, 하나님의 초월성과 사회 및 정치적 활동에 대한 필요성에 대한 강조에서는 루터와 칼빈의 영향을 받았다.2 특히 바르트와 브룬너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무한한 질적차이를 강조하고 하나님에 대한 진리는 오직 변증법적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은 키엘케골의 사상에 힘입은 바 크다.
넷째, 바르트와 브룬너의 신학은 공통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다. 이들의 신학을 신정통주의 신학,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 변증법적 신학, 위기의 신학, 또는 스위스학파로 부르는 것이 이를 입증해 준다.3 그리고 이들의 신학사상이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주의라는 것도 또 다른 중요한 공통점이다. 이것은 변증법적 신학의 특징이기도 하다. 바르트 신학의 본질은 절대적인 그리스도 중심주의이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부터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끝난다. 그는 계시, 특히 예수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신학의 토대를 두고있다. 따라서 그의 신학의 중심에는 기독론이 있다. 이는 그가 30년 이상 저술하여 사망할 때까지(1932∼1967) 13권을 완성한 「교회 교의학」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교회 교의학」의 전체 중심과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하나님이며 진정한 사람이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에 유일한 중심을 두고 신학의 방향을 재설정했다. 한편 브룬너 역시 바르트처럼 하나님은 오직 계시에 의해 알려지며,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임을 강조했다. 계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낸 것을 의미하며, 이것이 신학교의 규범과 내용이 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 장소이다. 따라서 브룬너는 기독론을 모든 교리의 핵심으로 간주했다. 그는 기독론에 의해 다른 모든 교리들을 이해하고 해석했다. 이러한 입장은 그의 저서 「중보자」(The Mediator)와 「교의학」(Dogmatics)에 잘 나타나있다. 특히「교의학」은 그리스도 중심적 관점을 토대로 계시, 하나님, 창조, 인간 등 기독교의 모든 교리들을 논의했다.
이러한 공통적 기반 위에 있었던 바르트와 브룬너는 동료요 동지였다. 이들은 바르트의「로마서 주석」출판 이후, 변증법적 신학으로 불리는 새로운 신학운동을 주도했다. 불트만(Rudolf Bultmann), 고가르텐(Friedrich Gogarten), 틸리히(Paul Tillich)가 이 운동의 또 다른 지도자였으며, 이들은 공동으로 학술잡지 「시간들 사이에서」(Zwischen den Zeiten)를 창간하여 그들의 신학을 전개했다. 변증법적 신학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을 그 출발점으로 삼았다.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을 인간으로 대치했으며 신학을 인간학으로 변경시켰다. 하나님의 실재성, 계시의 필요성, 성경의 권위, 인간의 유한성과 죄성, 신앙의 본질 등에 대해 충분하고도 진지하게 취급하지 못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의 본질을 오해했다. 변증법적 신학은 이러한 평가를 토대로 자유주의 신학의 방법론을 정반대로 뒤집어놓았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길을 택했다. 인간의 경험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를 신학의 근거로 삼았다. 따라서 변증법적 신학은 하나님은 하나님이라는 것,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실재한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 이외 어떤 다른 토대 위에 신학을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변증법적 신학의 지도자들은 많은 공통점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동일한 특징만을 지녔던 것은 아니었다. 이로 인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은 사상적으로 서로 갈라지게 되었다. 1920년대부터 바르트와 브룬너, 불트만과 고가르텐 사이에 틈이 생기게 되었다. 특히 바르트와 브룬너 사이의 논쟁은 자연신학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있는가 하는 것이 바르트와 브룬너 사이의 논쟁점이었다. 이 논쟁은 접촉점(point of contact)의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해 브룬너는 긍정적인 입장을 취한 반면 바르트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브룬너가 자연신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였으며, 1934년에는 자신의 입장을 제시한「자연과 은총」(Nature and Grace)을 출판했다. 이것은 바르트에 대한 비판서이기도 했다. 브룬너는 신학에서의 그리스도 중심을 강조했지만 바르트의 절대적이며 철저한 그리스도중심주의는 거부했다. 이에 대한 바르트의 반응은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그는 1934년 10월 모든 자연신학에 대해 "아니오 ! "로 응답했다. 이렇게 시작된 바르트와 브룬너의 논쟁은 깊은 우정에도 불구하고 끝내 치유될 수 없었던 갈등과 균열을 초래했다. 그들은 1930년대부터 서로 등을 돌리고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따라서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출판을 계기로 형성되었던 변증법적 신학 그룹(group)은 단지 10년간 지속되었으며, 1933년 그들이 더이상 그룹이 아님을 확인한 후에는 학술 잡지의 공동출판도 중지했다.4
바르트는 자신과 브룬너의 관계를 코끼리와 고래의 관계로 비유한 적이 있다. 바르트와 브룬너는 코끼리와고래 같았다.5 양자모두 하나님의 창조물이지만, 서로 만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동료와 동지였던 바르트와 브룬너는 어찌하여 이런 관계가 되었는가? 그것은 일반계시와 자연신학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이었다. 따라서 필자는 일반 계시와 자연신학이 무엇인지를 해명한 뒤, 이에 대한 바르트와 브룬너의 견해를 대비함으로써 양자 사이의 논쟁점이 무엇이었는지를 제시하려고 한다.
2. 일반 계시와 자연신학
하나님은 무한하고,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인간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에게 알려줄 때,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능하다. 이렇듯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 자신을 나타내는 것,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그와 친교를 나눌 수 있는 방식이 계시이다. 신학의 대 전제가 계시이다. 계시가 없다면, 기독교 신학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주는데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신학의 중요한 전제 가운데 하나이다. 신학은 계시를 체계적인 방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계시(revelation)라는 신학적 용어는 '아포칼리프시스(apocalypsis)'와 '파네로시스(phanerosis)'로 표현된 신약성서의 개념을 결합한 것으로부터 유래했다. 전자는 "벗기다. 드러내다"등을 의미하고, 후자는 "지금까지 숨겨져 있던 것이 나타나는 것"이나 "쓰고 있던 가면 혹은 껍질을 벗어버리고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계시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계시는 정보의 분여"(impartation)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표명(self-manifestation),하나님의 자기폭로(self-disclosure)를 의미한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정통주의는 일반적으로 계시를 두 종류로 분류한다. 일반적인 계시 혹은 자연적인 계시와 특별계시 혹은 초자연적인 계시가 그것이다. 전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통한계시를 말하며, 후자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계시를 의미한다. 일반 계시는 하나님이 때와 장소 및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그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주어진 것일 뿐만 아니라 그 내용 또한 일반적인 것이다. 특별 계시는 하나님이 특정한때, 특정한 사람에게 자신에 대한 특별한 것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 계시는 자연, 역사 및 인간존재를 통해 나타난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일반 계시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피조된 자연 질서를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다. 또한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인지하는 것이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일반 계시는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든 인간 자신을 통해 나타난다. 그것은 인간의 육체적 구조나 정신적 능력 또는 종교적 본성에서 발견된다. 일반 계시에 대한 가장 고전적인 성서적 근거는 창세기 1장 26절, 욥기 12장 7∼15절, 시편 19편, 사도행전 17장27절, 로마서 1장19-20절 등이다. 이런 구절들은 하나님은 그가 창조한 자연 세계에 그 자신에 대한 증거들을 남겼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일반 계시만으로는 하나님을 명확히 알 수 없다. 인간의 죄가 일반 계시의 증거를 파괴해버렸기 때문이다(창3:17∼19, 롬8:18∼25, 고후4:4). 따라서 일반 계시는 인간을 구원에로 인도할 수 있는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 없게 하는 소극적이며 부정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롬 2:14∼16,3:9∼18).
특별 계시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모든 자연과 역사를 통하여 자신을 일반적으로 알려지게 하는 한편, 특별히 선택한 민족의 역사를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한 민족을 택해 그 민족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이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의 역사인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모든 다른 계시가 이해된다. 그리스도는 이전의 모든 계시의 목표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의 결론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분노가 특별 계시의 내용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분노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에게서 나타났다. 후자는 율법을 통하여, 전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계시된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하여 인간을 심판하는 반면, 복음을 통하여 인간을 구원한다.7 특별 계시에 대한 성서적 근거는 요한복음 1장 14∼18절, 14장8∼9절, 사도행전4장11-12절, 로마서 3장 21∼26절, 5장 12∼21절, 갈라디아서 2장 15∼21절 등이다.
일반적인 계시의 본질, 범위 및 효력에 대한견해는 다양하다. 그 중의 하나가 자연신학이다. 자연신학은 자연, 역사 그리고 인간의 양심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며 그것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얻는 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단지 이성에 기초하여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지식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자연신학의 핵심이다. 성경 혹은 계시와 관계 없이 인간의 직관, 도덕적 통찰 및 이성적 추론에 근거하여 신학을 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 자신의 계시에 대한반성으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그것은 계시신학, 신조신학 또는 고백적 신학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나 기독교 신앙 공동체의 신조 혹은 고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신학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에 초점을 두는 반면, 계시신학은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는 것에 초점을둔다.8
자연신학은 몇가지 중요한 신념 위에 기초하고 있다. 객관적이고 보편 다양한 일반적인 계시가 있다는 것과 인간은 자연세계로부터 지각하고 배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 정신과 하나님의 창조물 사이에는 일치점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자연을 통해 알려지게 하며, 인간은 자연적인 제한과 죄와 타락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창조물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인간 정신의 질서는 기본적으로 우주의 질서와 동일하다는 것이 자연신학의 전제이다.9
자연신학의 역사는 자연이나 실재에 대한고대 철학자들의 설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기독교가 '신학'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훨씬 이전에, 그것은 헬라 사상가들의 저서에서 사용되었다. 플라톤은 잘못된 신학적 신앙을 교정하고 무신론이 국가에 위해하다는 것을 제시하기 위하여 이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적 이성의 존재를 논증했다.10
자연신학은 기독교인들에게 두가지 문제점을 제기했다. 자연신학과 계시신학의 관계성과 인간의 책임성이 그것이다. 자연신학은 특별계시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과 자연신학에 대한 부정이 하나님을 모르는 것에 대한 인간의 책임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였다. 중세 기독교는 자연신학에 대해 적극적이며 긍정적이었으며 그것을 신학의 중요한 분야로 취급했다. 인간은 이성적 추론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자연신학의 대표적인 주제는 하나님의 존재 증명이었다. 안셀름은 순수 사유에 의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다. 존재론적 증명이 그것이다. 존재론적 증명은 하나님에 대한 관념으로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 것이다. 하나님은 더이상 위대한 분을 상상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존재이다. 그런 존재가 인간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고 실재하지 않는다면, 가장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가장 위대한 존재자는 인간의 관념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역시 순수 이성에 의해 하나님의 존재나 인간 영혼의 불멸에 대한 신념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제시한 논증 가운데 하나가 우주론적 논증이다. 이는 자연 세계에 대한 관찰로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운동이 있다는 사실로부터 최초의 운동자(prime Mover)로서의 하나님, 그리고 인과 관계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제일 원인으로서의 하나님을 논증한 것이다. 중세의 알셀름, 아퀴나스 이외에도 현대의 데칼트(Rene Descartes), 헤겔(Geore Hegel), 하트숀(Charles Hartshor-ne) 등이 자연신학을 발전시켰다.
자연신학은 많은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18세기 영국의 철학자 흄(David Hume)은 원인과 결과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성이 있다는 것을 부정함으로써 우주론적 증명을 비판했다. 그는 자연신학을 단순한 사변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또 다른 논증인 목적론적 논증 역시 다윈(Charle-s Darwin)의 진화론을 통해 도전과 비판을 받게 되었다. 칸트(Immanuel Kant)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순수 이성으로 하나님의 존재, 인간 영혼의 불멸, 자유를 증명하거나 인식할 수 있다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합리적인 증명을 비판했다. 하나님의 존재나 영혼의 불멸은 지식의 항목이 아닌 신앙의 항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편 자연신학에 대한 반대는 철학에서뿐만 아니라 신학에서도 제기되었다. 그 대표자가 바르트이다. 바르트는 일반 계시와 자연신학 모두를 거부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는 항상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존재한다는 그의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바르트의 주장에 반기를 들고 자연신학을 변호하려 한사람이 다름 아닌 그의 친구 브룬너였다. 1934년 그는 공개 서한을 통해 바르트에 도전했다. 그것이 토마스주의의 유명한 표어를 표제로 사용한 「자연과 은총」(Nature and Grace)이다. 이것은 바르트의 계시관에 대한 비판서였다. 이에 대해 바르트는 같은 해10월 「아니오 ! 에밀 브루너에 대한 응답」(No! An Answer to Emil Br-unner)이라는 저술을 통해 즉각적으로 응답했다.11 바르트와 브룬너 사이의 자연신학 논쟁이 시작된 것이다.
3. 자연신학 논쟁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새로운 신학운동을 일으킨 동지였던 바르트와 브룬너는 끝내 화해할 수 없는 적수로 변했다. 그것은 자연신학에 관한 논쟁 때문이었다. 바르트는 일반 계시와 자연신학을 부정했던 반면, 브룬너는 그것을 인정했다. 그렇다면 어떤 근거에서 바르트는 자연신학을 부정하고 브룬너는 그것을 인정하게 되었는가? 필자는 「자연과 은총」과「아니오 !」를 중심으로 양자의 견해를 대비함으로써 이를 해명하고자 한다.
브룬너는 「자연과 은총」에서 자신이 이해한 그리고 교정하기 원한 자연신학에 관하여 바르트의 견해를 명제(theses)형식으로 언급한 후, 그것에 대한 반 명제(counter-theses)형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제시했다. 브룬너가 이해한 바르트의 견해는 여섯 개의 명제로 요약된다. 첫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했다. 인간의 죄가 그것을 완전히 파괴했기 때문이다. 둘째, 일반적인 계시가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시도는 철저히 거부되어야 한다. 오직 하나의 계시 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가 그것이다. 셋째, 창조와 보존의 은총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유일한 은총이다. 넷째, 보존을 위한 하나님의 제도나 법령은 없다. 다섯째,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접촉점은 없다. 접촉점은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의 역사에 모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새로운 창조는 결코 옛 창조의 완성이 아니다. 그것은 옛 것의 철저한 파괴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새 사람이 옛 사람을 대치하는 것이다.12
브룬너는 바르트의 견해에 반대되는 여섯 개의 명제로 자신의 입장을 제시했다. 첫째,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형식적(formal)형상과 실질적(material) 형상으로 구분된다. 실질적 형상은 죄로 인해 완전히 상실되었으나, 형식적 형상은 소멸되지 않았다. 형식적 형상은 인간이란 개념을 의미한다. 그것으로 인해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구별된다. 인간은 죄인이든 아니든 간에 하나의 주체자요, 합리성과 책임성을 지닌 존재이다. 형식적 형상은 죄를 범하거나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의 전제(前提)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둘째,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 세계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세계의 창조는 동시에 계시요, 하나님의 자기 전달이다. 인간이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죄에 의해 영향을 받지만 파괴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창조 안에 나타난 계시를 통해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얻을 수는 없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계시를 통해서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셋째, 하나님의 보존 은총(preserving grace)이 있다. 이것은 지켜주고 도와주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한다. 타락하여 그와 소원해진 피조물 안에도 하나님은 임재하신다. 넷째, 보존을 위한 제도가 존재한다. 그것은 역사적 생활과 사회적 생활의 기본적 요소이다. 그것이 없다면, 공동생활은 상상할 수도 없다. 결혼제도는 창조의 질서라면, 국가는 보존의 질서이다. 다섯째, 인간에게는 구속은총에 대한 접촉점이 있다. 그것은 계시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형식적인 하나님의 형상이 그것이다. 죄인도 그것을 상실하지 않았다. 여섯째, 새 창조는 옛 창조의 완성이다. 옛 아담의 죽음이 새 아담의 생명의 조건이다. 옛 아담의 죽음은 결코 인간본성의 형식적인 면이 아닌 실질적인 면을 항상 의미한다.13
브룬너는 은총과 자연을 불연속성의 관계가 아닌, 연속성의 관계에서 이해했다.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브룬너의 주장은 하나님의 일반 계시가 있다는 것과 자연신학이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브룬너는 성서와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빈의 교리에 근거하여 이를 주장했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들이 하나님을 계시한다는 것과 그리스도 이전의 인간에게도 하나님의 진리가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시19, 롬1:18, 2:4∼5, 요1:4∼5, 행 14:17).14
바르트는 1934년 10월 30일, 종교개혁 기념일에 출판된 「아니오 !」에서 브룬너를 '타협의 선구자'로 간주하고 그의 자연신학을 거부했다. 바르트는 자연신학을 "신학적이라고 주장하는 하나의 체계의 형성"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자연신학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와 근본적으로 다르며, 그 방법은 성경의 설명과 전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했다. 자연신학은 진정한 신학의 범위 안에서 별개와 주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바르트가 자연신학을 거부한 것은 그것을 별개의 문제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15
한편 바르트는 「아니오 ! 」에서 브룬너의 반(反)명제들을 조목조목 반박했다.16 첫째, 브룬너는 하나님의 형식적 형상은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다고 했다. 그러나 바르트는 브룬너가 하나님의 실질적인 형상이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에게 계시를 위한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보았다. 둘째, 브룬너는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로서 인간에게 알려진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지식이 계시 없이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르트는 하나님의 참 지식은 계시 없이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셋째, 브룬너는 보존은총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르트는 어떤 의미에서 그리고 어떤 권리로 브룬너가 그리스도의 은총에 선행하는 또 다른 특별 은총이 있다고 말하는가하고 반문했다. 넷째, 브룬너는 창조의 질서와 제도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르트는 인간이 그리스도 없이 이런 질서와 제도를 어느 정도 인식할 수 있다면, 계시에 대한 능력이 단지 인간의 형식적 요소만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고 반문했다. 바르트는 형식적 형상과 실질적 형상을 구별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섯째, 브룬너는 구속의 은총을 위한 접촉점, 즉 계시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식적 형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형식적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의 접촉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접촉의 가능성을 준비해 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하나님이 접촉의 가능성을 준비해 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바르트는 브룬너가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총만으로"로 대변되는 종교 개혁신앙을 포기한 것으로 간주했다. 여섯째, 브룬너는 계시가 없어도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을 알고 어느 정도 그의 뜻을 성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과 고린도전서 2장10절을 토대로 그것을 증명하려 했다. 또한 옛아담의 죽음이 인간본성의 형식적인 면이 아닌 실질적인 면의 소멸을 의미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 본문을 사용했다. 그러나 바르트는 그것을 성경 본문에 대한 임의적인 사용으로 취급하고 바울서신에는 그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바르트는 브룬너를 토마스주의자와 신 개신교주의자로 규정하는 동시에, 자연과 은총을 대립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어떠한 종류의 자연신학도 단호히 거부했다.17「그는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부터 이해했으며 그리스도를 떠나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부정했다. 자연 세계를 통해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즉 일반 계시를 인정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특별 계시가 불필요하기 때문이었다.18
1934년부터 시작된 바르트와 브룬너의 자연신학 논쟁은 근 20년 동안 계속되었다. 바르트는 브룬너의 입장을 토마스주의적이며 신개신교주의적이라고 신랄히 비판한 반면, 브룬너는 바르트의 입장이 비성서적이며 비종교개혁적이라고 비판했다. 이 논쟁 과정을 통해 바르트와 브룬너는 자신들의 초기 입장을 다소수정하기도 했다. 특히 바르트는 「교의학」(Church Dogmatics)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하고 참된 말씀이며 생명의 빛이지만, 창조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는 수많은 작은 빛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따라서 만년에 이르러 바르트가 브룬너의 입장에 보다가까이 접근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지만 바르트의 입장이 근본적으로 변했던 것은 아니었다.19 양자 사이의 완전한 화해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Ⅲ. 마무리
바르트와 브룬너의 자연신학 논쟁은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하나님의 지식에 이를수 있는길이 있는가 하는 것이 핵심 문제였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일반 계시와 자연신학의 가능성을 부정했다. 바르트에게 있어 계시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의미했다. 반면, 브룬너는 바르트의 절대적인 그리스도 중심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칼빈의 교리에 근거하여 자연 세계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일반 계시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인간이 일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지식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독립적인 자연신학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브룬너의 견해는 바르트의 견해 보다 온건한 동시에, 종교개혁적이며 성서적이라고 평가된다. 루터와 칼빈은 시편 19편 로마서 1∼2장 등에 근거하여 일반 계시를 인정했다. 자연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 계시를 인정하는 브룬너의 견해가 그것을 부정하는 바르트의 견해보다 더 성서적이며 종교 개혁자들의 신학과 일치된다.20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그리스도의계시를 극단적으로 강조한 나머지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일반 계시를 부정했다. 뿐만 아니라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성경본문을 임의적이거나 독단적으로 해석한 경우가 없지 않았다. 반면, 브룬너가 일반 계시뿐만 아니라 또한 자연신학도 인정한 것이나 인간의 타락으로 실질적인 하나님의 형상은 파괴되었으나 형식적인 형상은 상실되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 등은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우리는 성경 저자들이 일반 계시가 제공하는 증거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자연, 역사 및 인간의 양심을 통해 하나님의 일반계시가 나타난다. 그러나 성경은 자연신학을 건설하기 위해 그것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교훈해 준다. 일반 계시는 인정된다. 그것이 신자와 불신자 사이의 접촉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일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으나 명확히 알지는 못한다. 일반 계시는 인간을 성경의 하나님에게로 인도하거나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에 의해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자연신학은 인정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과 구원에 관한 진정한 지식에 접근할 길은 없기 때문이다. '태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한편 바르트와 브룬너의 자연신학 논쟁은 이 문제를 현대 신학의 새로운 관심사로 부각시킨 데에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이 문제는 바르트와 브룬너 이후에도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바르트의 입장은 몰트만이나 틸리히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대체로 후대의 학자들은 브룬너의 견해를 지지하는 쪽과 바르트의 견해를 지지하는 쪽으로 나뉘어진다. 알트하우스(P.Althaus), 베일리(J. Baillie), 버코워(G.C. Berkouwer), 카이퍼 (A. Kuyper)등이 전자에 속하는 반면, 니젤(W.Niesel), 토란스(T.F.Torrance)등은 후자에 속한다.
주(註)-----------------
1. Clifford Green, rgrf BgrrA(Glasgow:Collins PuLlishers, 1989), p. 16.
2. Mircea Eliade. rflr ffiryrfoprjio ff arflfiou, vol.f(New York:Macmillan Publishing Company,198f, p. 315.
3. H.R. 매킨토쉬, 「현대 신학의 선구자들」(서울:대한기독교서회, Iy73), p. 2aO
4. David F. Ford. The Modern Theologian, vol.I(New York:Basil Blackwell Inc., 1989). p. 32.
5. Alasdair 1. C. Heron. f CrHrHry ?f ProfrffdHrTarofofr(London:Lunerwoth press, 1980), p.90.
6. Thomas C Oden. The living God (New York:Harper & Row. Publishers,1987, p.17.
7. 김균진, 「기독교조직신학」I(서을 :연세대학교출판부, 1986), pp. 118-119
8. Oden, op.cit.. p.6.
9. Millard J. Erirkson, Christian Theology. vol.1(GrandRapids:Baker Book House, 1983), p. 156
10. Oden. p.7.
반 A. 하비. 「신학용어 핸드북」(서울 :소망사,1992), p. 211
11. 이 두 논문은 영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Baillie, Natural Theology (London : Cen tetra ry press , 1946) .
12. Ibid., pp 2of. Green, p. 154. 이 책에는 바르트의 「아니오 ! 」의 서론, 2부 및 3부가 수록되어 있다.
13. Ibid., pp.22∼자, Green, pp. 156∼167
14. 브룬너는 그의 저서 「계시와 이성」(Offenbarung und Vernunft)에서 자연계시에 대한 다양한 성서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김균진, 「기독교 조직신학」, pp.134-136을 참조할 것.
15. Baillie, p. 75, Green, pp. 154∼155.
16. Ibid., pp.79∼94. Green, pp. 156∼167.
17. Ibid., pp. 87∼9(1. Green, p. 64.
18. 바르트가 일반 계시를 거부한 이유에 대해서는 김균진, 「기독교 조직신학」, pp. 136∼138을 참조할 것.
19. Heron, p. 90.
20. 이종성, 「신론」(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87), pp.105∼130.여기서 이 교수는 바르트와 브룬너의 논쟁을 자세히 논술하고 있다.
목창균/드루대학교에서 조직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서울신대 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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