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들 설교 모음

영원한 칭찬 마가복음 14:3-9

하나님아들 2024. 11. 11. 23:52

주님의시선 헌신예배설교

 

여전도회 헌신 예배

영원한 칭찬

마가복음 14:3-9

 

오늘의 말씀은 우리들이 잘 아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들리셨을 때 그 동네에서 없었으면 싶은 한 여인이 나와 매우 값진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머리에 부어 드리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등까지 내려 온 그 기름을 씻겨 드렸다는 말씀입니다.

이 여자에 대하여 요한복음 12장에서는 죽었다가 살아 난 나사로의 오누이인 마리아라는 내용이 있습니다만 다른 성경에는 그렇게 분명히 그 여자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지 않아서 그 여자가 마리아다 아니다라는 이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가 마리아이던 다른 여자이던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여자의 주님에 대한 헌신이요 그 여자에 대한 주님의 영원한 칭찬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생활은 늘 아쉽고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으나 바치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을 드리고 몸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생명도 드립니다. 그런데 드리되 잘 드려야 할 것입니다. 가인처럼 드리고 가롯 유다처럼 헌신을 하면 참 헌신이 아닐 뿐 아니라 차라리 나지 않는 것만 못하고 드리지 않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는 영원히 칭찬을 듣는 헌신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드리는 것이 이런 칭찬을 듣는 헌신일까요.

 

1. 주님께서는 잘못된 헌신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막14:4-7) “어떤 사람들이 분 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일년에 몇 번씩 정례 행사를 치르는 것처럼 물난리를 만나고 어떤 종류의 재난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우리 온 국민들이 어려움을 당한 이웃을 돕기 위해 거족적인 모금 운동을 하고 민족애를 발휘하여 한민족 공동체 의식을 확인합니다. 이 일이 얼마나 아름답고 흐뭇한지 외국 사람들도 이상한 일이라고 하고 한민족의 단결심을 보는 것 같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하면서 유난히 일반인들이 교회를 보는 시선이 따갑습니다. 교회는 그 많은 헌금을 거두워 세금 한푼 내지 않으면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지는 않겠으나 가끔 교회의 이름이 신문이나 다른 매개체에 등장하면서 수제 의연금 얼마를 헌금했다는 사실이 보도되곤 합니다. 과히 보기 나쁜 일은 아닙니다.

 

사실 많은 교회들이 그 지역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라는 목표를 세웁니다. 성전을 세우기도 하고 노인 대학이나 어린이집 같은 실제적인 어떤 봉사 활동도 합니다.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도 이런 사회 봉사 활동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던지 “(마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라는 말씀들이 모두 그 말씀 인줄 압니다. 그리고 실제로 주님께서는 문둥병자를 고치신다 던지, 오병이어로 많은 사람을 먹이셨다 던지는 모두 가난한 사람들을 돌아보신 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구제 사업이나 사회 봉사 사업이 우리 기독교의 본질적인 모습은 결코 아닙니다.

어느 날 제가 차를 타고 가면서 기독 방송국의 상담 시간의 방송을 듣게 되었습니다. 전화를 받고 상담하시는 분은 박종순 목사님이셨는데 어떤 여성도가 묻기를 ‘교회는 많은 헌금을 거두워 어려운 사람을 돕지 않고 무엇을 하는가’라는 좀 항의 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박목사님은 아주 명쾌하고 속 시원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즉 교회는 사회 사업을 하는 곳도 아니오, 구제 사업을 하기 위해 세워진 곳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명령을 따라 죄인을 구원하는 영혼 구원하는 곳입니다. 물른 이웃을 돕는 일을 해야 하지만 그것이 우리 기독교의 본질은 아닌 것입니다.’

 

어느 날 티비에 어떤 장로님이 등장하셨습니다. 그 분이 그 시간에 티비에 나온 것은 그 교회에서 구로 공단에 근로자들을 위한 아파트를 지어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임대를 하게 되었는데 이 일이 우리 사회에 큰 미덕으로 칭송을 받게 되어 출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은 대담을 하는 도중에 크나 큰 실수를 하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대담 자가 묻기를 ‘그런 좋은 일을 하셨는데 혹시 그 일을 통해 어떤 특수한 목적 즉 기독교 전도를 위한 것은 없습니까?’ 그러자 그 장로는 거침없이 ‘없습니다. 아주 순수한 동기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아파트를 지어 근로자들을 돕는 일은 순수한 것이고, 그 좋은 일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순수하지 못하다는 말인지---- 그 말을 듣는 내 가슴이 섬듯했습니다.

 

주님이 오병이어로 많은 사람을 먹이신 것도, 병든 사람을 구해 주신 것도, 죽은 사람을 살리신 것들도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시오, 그 일을 통해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그 장로는 알지 못한 것 같습니다.

주님이 끼여 들 수 없는 자선이나 주님을 배제하고 주님의 구령 사업의 목적을 멸시한 사회 사업은 우리 기독교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가 하나님께 드린 헌금을 가지고 그런 일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이런 잘못된 산행에 대해 책망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통한,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행을 제켜 두고 자기들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한 선행을 하려 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한 헌신도 아니오,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신앙 행위도 아닙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믿지 않는 죄인들과 똑같은 선을 행하므로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까?

 

2. 올바른 헌신은 무엇입니까?

 

①. 주님에게 먼저 드리는 헌신입니다.

주님에게 먼저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 사람들에게 늘 당부하시는 말씀은 가장 좋은 것, 먼저 얻은 것, 첫 세끼, 첫 이삭들은 모두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드린 것을 나누어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도 첫 아들은 주님에게 드려야 합니다. 다른 일을 시켜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가정에서 첫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면 복잡할 뿐 아니라 혹시 속이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므로 첫 아들 대신 레위 지파를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을 섬기게 하고 나머지 지파의 아들들은 세겔(헌금)을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레 27: )

 

②. 주님의 죽음을 준비한 헌신입니다.

“(막14:8)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주님께서 이 여자의 헌신에 대해 결정적인 칭찬을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미리 준비한 기름 부음”이란 무슨 의미입니까?

주님의 죽으심은 죄인의 죄를 속죄하심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메시아의 죽으심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죽는다고 사람의 죄를 속할 수는 없으나 다만 메시아의 죽으심은 죄인의 죄를 속죄하여 용서하시는 죽으심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메시아 되심은 이 시간 이 여자의 주님에 기름 부음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이 여자의 기름 부음을 메시아의 죽음을 준비한 신앙고백이 있고 속죄의 감격이 있는 기름 부음으로 인정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헌신이 이 수준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그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있는 헌신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무엇 주면 감사하고 내 요구에 미치지 못하면 불만 하는 사람의 헌신이나 또는 내가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한 조건부적 헌신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정결하고 아름다운 정성이 못될 것입니다. 오직 나를 위해 죽으신 그 은혜를 감사 감격하여 드리는 헌신이야말로 영원히 칭찬을 받을 수 잇는 헌신이 됩니다.

 

③. 힘대로 정성스럽게 드려야 합니다.

돈의 액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부가 연보 궤에 두랩돈 드리는 것을 칭찬하셨습니다. “(막12:42-43)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값진 것이라는 것은 정성스러운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결정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겔46:1-8)------그 소제는 숫양 하나에는 밀가루 한 에바요 모든 어린양에는 그 힘대로 할 것이며 밀가루 한 에바에는 기름 한 한씩이니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송아지를 바칠 수 있는 사람이 비들기를 드리면 안되는 것이며 비들기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빗을 내서 송아지를 바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힘대로 정성스럽게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여인이 그 때 주님을 위해 드린 기름은 300데나리온의 값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돈은 5병2어의 기적 전에 빌립이 주님에게 한 말, 즉 200데나리온의 떡이 있어야 이 사람들을 다 먹일 수 있다고 한 말과 비교를 할 때 엄청나게 비싼 기름이 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2병2어에서 떡을 먹은 사람은 남자만 5,000명이었고 그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200데나리온이 있어야 하였으니 300데나리온은 여자와 어린이를 제외한 남자만 7,500명이 먹을 수 있는 금액이고 노동자의 일년 품삯이 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값진 예물을 넉넉지 못한 그 여자가 준비하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정성을 다했겠는가를 짐작케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오늘 성도들이 진실로 하나님께 정성스러운 예물을 드리며 몸을 바쳐 헌신되고 있는지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④. 시간을 잘 맞추어야 합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데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그런 시간이 아닙니다. 주님의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때를 잘 분별하여 헌신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요7: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나 주님의 죽으심에 동참할 기회는 한 번밖에 없습니다.

 

성경에는 시간에 대한 말씀이 많습니다. 24시간적인 시간의 개념도 있으나 기회라는 시간의 개념도 있습니다. 24시간의 개념의 시간 보다 기회라는 시간의 개념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헌신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전3:1-17)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다 싶으면 주저 없이 가장 적절한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적절한 시간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⑤. 헌신 할 때 오는 시련을 극복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별별 소리를 다 했습니다. 책망을 했다고 했습니다. 가롯 유다 같은 사람은 다른 심보를 가지고 법석을 떨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오직 주님만을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드림에 있어 주님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큰 일을 하는 사람은 큰 핍박을 당할 수가 있고 작은 일을 하는 사람은 작은 어려움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대신 일을 안하는 사람은 어려움도 핍박도 없으나 칭찬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 하나님의 일은 없습니다. 성도는 잠을 자고 있어도 사단은 잠을 자지 않고 성도들을 유혹하고 괴롭힙니다.

 

욥은 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큰 시련을 당하고 그 믿음을 증거 받았으며 삼손은 큰 믿음을 가지기 위해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3. 주님의 영원한 칭찬이 있으셨습니다.

“(막14: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주님의 이 말씀에 의해 우리는 오늘도 이 여자의 아름답고 거룩한 헌신에 대해 생각하고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이 여자의 헌신은 이미 천국에서도 소문이 나 있을 것입니다. 바른 헌신으로 주님의 영원한 칭찬을 들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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