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들 설교 모음

광복기념 주일 말씀

하나님아들 2024. 11. 10. 00:19

광복기념 주일 말씀

 

 

* 본문 : 누가복음 4 : 14 - 19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 본문 요약 :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처음으로 가르치신 이사야서의 멧세지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가난한자에게 복음을 전해 저들이 포로된 자에게서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케하는 은혜의 해(50년만에 해방되는 희년)를 전파하게 하려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광복기념 80주년 주일에 억눌린 우리 민족에게 해방을 주신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진정한 해방과 자유의 복음을 선포하는 주일이 됩시다.

 

 

 

 

아래 제가 작성한 광복기념주일 설교 한 편과 몇 분 목사님들의 설교를 싣습니다.

 

 

누가복음 4 : 14 - 19 은혜의 해를 전하신 예수님 (2008. 광복기념 주일)

 

미국의 오클라호마 대학에서 동물중 지능이 가장 뛰어나다는 15살된 침팬지에게 언어실험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침팬지는 140개의 언어표현을 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 훈련에는 "배가 부르다. 즐겁다. 기쁘다."를 계속 훈련시켰습니다. 그리고 많은 단어를 알게 되자 첫 번으로 문장을 지어 말하게 했읍니다. 그랬더니 맨 처음 만든 문장이 "나를 밖으로 내보내 주세요"라 했답니다. 이처럼 동물도 먹고 자는 것만으로 만족치 않고 자유를 누리고 싶어합니다. 자유는 만물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요 선물입니다.

그래서 패트릭 헨리는 오래 전 이렇게 외쳤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기록을 보면 우리나라 고려시대의 노비는 공노비와 사노비가 있었습니다. 공노비는 관청의 재산, 사노비는 개인의 재산, 노비는 재산 그 자체이었습니다. 노비 문서가 있어서, 상속, 매매, 증여가 가능했습니다. 조선시대, 사노비는 죽이는 경우에만 관청에 고발하고, 그 외의 어떤 형벌도 가능했습니다. 또한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는 자동적으로 노비의 신분이 됩니다. 이 노비세습제는 1886년 폐지되고, 1894년에는 노비제가 폐지되었습니다.

 

이 노예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 삶인지 흑인 들이 부르던 영가 중에, "오~자유, 오~자유, 나는 자유하리라. 비록 얽매였으나 나는 이제 돌아가리 자유 주시는 내 주님께"라는 곡이 있습니다. 얼마나 자유를 갈망했는지 지치고 피곤한 몸, 하루도 쉴 수 없는 신세, 석양을 바라보고 눈물 흘리며 육신은 비록 얽매였으나 영혼의 자유를 누리게 하시는 예수님을 찬양하며 부르던 영혼의 노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노예에서 해방되기를 원합니다.“해방이란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풀 해(解), 놓을 방(放), 다시 말해서 풀어놓는 것이 해방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자유는 크게 여섯 가지로 나눕니다. (1)신체의 자유 (2)거주와 이전의 자유 (3)종교의 자유 (4)사고와 표현의 자유 (5)집회, 결사의 자유 (6)직업의 자유 등입니다. 일찍이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모든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자유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언론의 자유, 신앙의 자유,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 이 네 가지입니다. 인간이 자유를 그처럼 갈구하는 것은 자유가 없이는 참 평화가 없고 행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지구상에는 아직도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반이 넘습니다. 민주주의의 핵심 국가인 미국과 영국도 노예해방을 선포한 것이 지금부터 150년 밖에 안 됩니다.

 

1939년에 독일과 일본에 의해 6년간 일어난 세계 제 2차 대전 중에 죽은 사람 숫자만 해도 우리 대한민국 인구보다 더 많은 4-5천만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동남아 지역을 식민지화 하고 우리나라는 36년동안 일본에게 통치를 받게 됩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많은 나라들이 일본에 의해 엄청난 피해를 당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말도 빼앗기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성도 빼앗겼습니다. 일본은 말로는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고 하였지만 실제는 우리 민족을 식민지 노예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좋은 것들은 일본으로 다 가지고 갔습니다. 쌀, 생선, 과일 등 좋은 것들은 모두 일본 사람들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젊은이들을 일본 땅으로 데리고가서 힘든 일들을 다 시켰습니다. 일본에는 지금도 70만이 넘는 동포가 살고 있는데 대부분이 일제 식민지시대에 일본으로 끌려간 동포들의 후손들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동남아시아와 미국과 전쟁을 하면서 수많은 젊은이들을 군인으로 강제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여인들을 일본군인의 성적 노리개로 끌고 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에 대한 감정이 매우 좋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8.15광복은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에게 자유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은 그 자유가 짓밟히고 파괴될 때, 파괴자를 철저히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당시 일본의 힘이 얼마나 강했습니까? 중국과 싸워 이긴 일본은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하였습니다. 세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 일본은 아시아를 손안에 넣고 세계를 제패하려고 미국 진주만을 습격하였습니다. 독일과 이태리와 힘을 합쳐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 일본의 강한 힘을 대적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회의 지도자가 될 만한 사람은 일본의 계락에 넘어가 친일파가 되고, 항거하는 지도자는 투옥되거나 고문당하고 죽었습니다. 법도 인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유를 짓밟는 일본을 심판하기 시작하셨습니다. 2차 대전 종전 직전 일본의 패색이 짙어갈 때, 한국에 있던 일본 지도자들이 자주 비밀회의를 하였습니다. 일본이 이 전쟁에서 질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조선인들이 알면 3.1운동 같은 봉기가 일어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일본 지도자들은 봉기를 일으킬만한 한국의 지도자들과 종교인들을 모두 학살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명단을 작성하였습니다. 모두 20만명이었습니다. 이들을 전국적으로 일제히 죽일 수 있는 거사일을 1945년 8월 17일로 정하였습니다.

죽이는 방법은 비행기를 띄워서 적의 비행기로 보이게 한 다음, 공습경보를 울리고 그들을 모두 방공호로 대피시켜 히틀러가 했던 것처럼 독가스를 주입해서 죽인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음모입니까? 하나님께서 이것을 그냥 두시겠습니까? 거사일 10일전인 8월 6일 미국 B29기가 원자탄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차례로 투하하였습니다. 그때 죽은 일본인의 수가 20만 명이었습니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세운 나무에 자기가 달려죽었듯이 일본은 자신들이 판 구덩이에 자신들이 빠져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심판자이십니다. 원자탄이 투하되고 8.15 학살거사일 이틀 전 미국 미조리 함상에서 연합군에게 일본 천황은 무조건 항복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광복의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생각해보면 조국의 광복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8.17대학살을 미리 막아 우리민족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애국가 가사처럼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를 목이 터지게 감격스럽게 불렀던 것입니다. 우리 함께 그 때 불렀던 광복의 기쁨을 노래합시다.

 

- 광복의 노래 - 다 함께

 

일본과 한국 사이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드는 낱말이 하나 있습니다. ‘역사 왜곡’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죄를 인정하지 않고 역사를 왜곡해서 만들려 합니다. 일본 사람들이 과거 역사를 왜곡하여 "신사참배는 강요가 아니고 장려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눈 가리고 아옹하는 격입니다. 일제시대는 모든 관공서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집집마다 신사를 모시게 했고 동방요배를 강요했으며, 심지어 우리 장로교 총회에서 목사들에게 신사참배를 하기 위해 총대 옆에 형사 한 명씩 앉혀서 강제로 신사참배 결의를 하였고 그것을 반대하는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을 투옥시켰으며 주기철목사님, 박관중장로님 같은 분들이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순교까지 당하셨습니다.

 

20세기에 세계를 침략 전쟁으로 어지럽게 만든 대표적인 두 나라가 있습니다. 독일과 일본입니다. 아시아는 일본이, 유럽은 독일이 피로 물들였습니다. 그런데 독일은 역사 왜곡을 안 합니다. 독일은 진실을 밝히는 작업을 아주 열심히 하고, 일본은 열심히 감추려합니다. 독일이 유대인을 가장 잔인하게 학살한 장소가 아우슈비츠입니다. 지금 그 장소에는 독일의 학생들이 단체로 견학을 옵니다. 정부가 가라고 하는 겁니다. 부끄러운 조상의 죄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못되고 잔인했는가를 체험할 수 있도록 체험학습장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세계에서 잘못한 것을 보고 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독일의 슈뢰더 총리는 그곳에 가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머리 숙여 사죄를 했습니다. 베를린 중심지에 있는 브란데 부르크문은 독일인의 자부심 상징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옆에다 대규모 유대인 추모 공원을 만들었습니다. 그 추모공원 입구에 들어가 보면 새까만 대리석 같은 돌로 직사각형, 정사각형의 돌을 1,000개 이상이나 늘어 놓았읍니다. 이 새까만 돌이 어두움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우리 독일이 유대인에게 어두움을 주었다는 뜻으로 독일인이 가장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브란데 부르크 문 옆에 추모공원을 만들어 과거 우리 조상이 유대인들에게 큰 잘못한 것을 독일인들이 가장 잘 오는 장소에다 만들어놓고 회개한다는 뜻을 나타내게 했읍니다.

 

이처럼 독일은 자신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인정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비해 일본은 역사 왜곡 일변도의 길을 가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은 자신들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들을 솔직히 인정하고 용서를 구한 뒤 또 다시 그런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후손들을 지도해야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들은 아직도 침략의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독도를 자기 땅이라 우겨 우리의 마음을 분노하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하신 첫 번째 설교 말씀입니다. 회당에 들어가서 이사야 35장을 찾으시고 7백년 전 이사야의 예언을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함이라 하였더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은혜의 해를 전파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여기 '은혜의 해'란 희년, 혹은 거룩한 해, 속죄의 날을 의미합니다. 레위기와 신명기에 보면 7년에 한 번씩 오는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낸 49년의 이듬해인 50년째 해를 '희년', 즉 주님의 '은혜의 해'로 선포하였습니다. 이 해가 되면 샀던 농토는 원 소유자에게 돌려주고 종들도 해방되고 고향으로 돌아가며, 금전적 채무는 일체 탕감을 받게 됩니다. 즉 50년 동안 굳어진 사회의 구조악을 허물어 버리는 날이 '은혜의 해'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희년의 은총과 같은 진정한 해방을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믿기만 하면 주님께서 그에게 진정한 해방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해방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1. 빈곤에서의 해방입니다.

오늘 본문 4:18절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축복의 종교요, 예수님은 우리의 가난을 해결해 주시고 축복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세계의 여러 나라들을 비교해 보면 아무리 영토가 좁고 자원이 부족하고 자연 환경이 불리하더라도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간 나라는 축복을 받아 부요하게 살게 됩니다. 아무리 가난에 찌든 사람도 빈곤에서 해방을 주시는 주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아 번영하게 됨을 봅니다.

 

세계적 갑부이며 강철왕으로 알려진 미국의 카네기에게 어느 날 신문기자가 성공의 비결을 말해달라고 부탁을 받았을 때, 카네기는 서슴없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나의 성공의 비결은 역설적이지만 가난이었습니다.” “나의 성공의 비결을 설명하면

첫째, 나는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기에 늘 가난한 생활에 한탄하시는 부모님을 볼 때마다 분발심이 솟아서 ‘이놈의 가난 두고 봐라. 부모님을 근심시키는 가난이라는 놈을 없애버리고 말겠다.’라고 결심하고서 맡은 일을 부지런히 했더니 성공을 했습니다.

둘째, 가난했기에 무슨 직업이라도 가리지 않고 어떠한 일이라도 좋아했고 항상 제일인자가 되도록 힘써서 일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제일 중요한 성공한 비결은 내가 가난함으로 심령이 가난하여 진실하시고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라 했습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하여 고통당하는 것을 무조건 성경에서는 축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심령이 가난하여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게 되고, 우리 주님을 만나게 되고, 그 분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가난으로부터 벗어나는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귀한 복을 여러분 모두가 누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려고 오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의 포로가 되어, 어떤 사람은 출세의 포로가 되어, 어떤 사람은 돈과 물질의 포로가 되어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갑니다. 어떤 이는 잘못된 습관의 포로가 되어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술과 담배와 마약 도박 같은 잘못된 습관을 벗어나지 못해 괴로워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이슬람 국가를 여행 중에 호텔에 머물렀는데, 그 호텔 수영장 물이 차가워서 들어가지는 못하고 주변을 거닐다가 수영장 관리자를 만났습니다. “이렇게 큰 수영장과 체육관을 담당하고 계신데 대학에서 무엇을 전공하셨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체육입니다.” “나이는 어떻게 됩니까?” “43세입니다.” “아이는 몇 명입니까?” “넷입니다.” “축하합니다. 제가 당신을 위해 기도해주고 싶은데 뭘 위해 기도해드릴까요?” “제가 담배를 피웁니다.” “아니, 체육을 전공하고 남의 건강을 도와주겠다는 분이 담배를 피웁니까? 언제부터 피웠습니까?” “고등학교 때부터입니다.” “당장 끊으세요! 당신 아내에게 당당신 아이들에게까지 피해가 갑니다. 그런데 담배로 당신 자신과 가정을 망가뜨리다니 당장 끊으세요!”“끊으려고 해도 잘 안 됩니다.” 나쁜 습관이 오랫동안 계속 되었기 때문에 잘 안 된답니다. “끊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러면 제가 기도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사람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참 좋은 아빠요, 참 좋은 남편이요, 훌륭한 체육 선생님인데 담배 때문에 고생을 합니다. 성령께서 이 사람을 도와주셔서 담배를 끊게 해주옵소서. 자유를 주옵소서. 건강한 남편이 되어서 가족을 잘 돌볼 수 있고 좋은 직장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그만큼 잘못된 습관을 고치고 싶어도 안 되어 괴로워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어떤 종류의 사슬이든지, 여러분을 꽁꽁 묶고 있는 그것을 예수님께로 가져오십시오. 예수님께서 딱 끊어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로 된 자들, 억눌린 자들에게 자유를 주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3년의 공생애 동안 수많은 붙들린 자들, 억압받는 자들, 자유가 없는 자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 능력을 주십니다. 나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마음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영접하세요.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영생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그때부터 문이 열립니다. 그때부터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때부터 기적이 일어납니다.

 

3. 예수님은 눈 먼자의 눈을 열어주러 오셨습니다.

이 말씀은 육신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 다시 눈을 뜨는 치유의 역사를 주신다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영적인 눈을 뜨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신적인 눈이 있지만 영적인 눈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불행한 것은 태어나면서 죄악으로 말미암아 타락하여 영적으로 장님으로 태어났기에 물리적이고 세속적이며 현세적인 것만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 중요한 영적이고 영원한 진리의 세계는 못보기에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하여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찰스 콜슨은 닉슨 대통령의 특별 보좌역으로 모사꾼이었습니다. 그는 정적들의 계획을 몰래 탐지하는 도청장치를 했다가 들키는 유명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징역을 살게 되어, 권력의 날개가 부러지고 교도소에 수감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영의 눈을 뜨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간증집인 '거듭남(Born Again)'이라는 책을 쓰고 세계적인 교도소 선교사로서 삶을 살게 됩니다. 새로운 눈을 뜨게되어 권력의 욕심에서 벗어나 복음을 전하는 사림이 된 것입니다.

 

영의 눈이 열리면 오늘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한번은 아람군대가 이스라엘을 침공했을 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집을 포위하였습니다. 밖을 내다보던 사환이 큰 두려움에 겁에 질려 덜덜 떨며 엘리사에게 말합니다.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그 때 엘리사가 대답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그리고는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사환이 다시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보호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왕하6:14-19)

믿음의 눈이 떠지면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보입니다. 오늘도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보게되어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눈을 떠 보게 하려고 세상에 오셨읍니다.

 

4. 죄와 죽음과 심판에서 해방을 주러 오셨습니다.

인간의 비참한 3대 운명은 죄(롬 3:23, 6:17, 18), 죽음(롬 6:23), 심판(히 9:27)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인생의 3대 운명인 죄와 죽음과 심판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롬 8:1-2절에 보면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죄에서의 해방을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와 사망에 눌려 지내던 영혼이 해방을 받아 참 기쁨과 평안속에 사는‘은혜의 해’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한 죄수가 재판을 받는다고 생각을 해봅시다. 재판관이 재판의 최종 결정을 “너는 죄가 없다. 석방이다.”그러면 그 죄는 모두 끝나는 것입니다.

미국의 심슨이라는 이가 두 사람을 죽인 살인용의자로 재판을 받을 때 신문에 논평이 많이 났습니다. 미국 국민들은 1년 넘게 긴 재판을 TV로 지켜보면서 그가 살인자라고 믿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부족하다고 논평이 되었습니다. 결과는 마지막 재판관이 너는 죄 없다고 판결한 것입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풀려나서 여행 다니며 자유하게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나 실시하는 죄수에 대한 특례법이 있습니다. 명절이나 국경일이 되면 특별 사면령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죄는 있지만 죄 값은 사면하여 주는 일입니다. 이번 8.15 국경일에도 많은 이들을 특사로 풀어준다 합니다. “너는 오늘부터 자유의 몸이다.”라고 하면 그 사람은 과거에 자기가 어떤 죄를 지었든지 상관없이 자유를 그대로 받아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주님의 사면령을 받았으므로 과거에 어떤 죄가 있든 죄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면령을 받았느냐 받지 못했느냐에 따라서 죄인이냐 사면을 받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울산 큰빛교회 김진수 집사님이라는 분이 있는데 깡패 출신이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이분에 대해서 써놓은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는 젊을 때 먹고살기 힘들어서 깡패 생활을 했습니다. 감방에도 몇 번씩 들락날락하고 그러다가 이 생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사우디 취업 시험을 몇 번 쳤는데 계속 떨어졌습니다. 그는 독실한 불교 신자 집안이었는데 급하니까 기도하면 이뤄주신다는 말을 듣고 하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제가 사우디를 가게 해주세요." 기도를 했더니 놀랍게도 사우디가 취업이 되었습니다. 그 때 되게 겁나더랍니다. 교회 안 나가면 벌 받을 것 같더랍니다. 그래서 교회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사우디에서 돌아온 후에 돈을 좀 벌었습니다. 건물도 몇 채 갖고 있었고 모든 것이 잘 나갔습니다. 그렇게 되자 그 후로 교회를 안 나갔습니다. 카바레를 하나 갖고 있었는데 그것이 마음에 걸려서 못 나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IMF가 터졌습니다. 꾼 돈을 갚지 못해서 고소를 당했는데 전과가 많다고 해서 수감이 되었습니다. 그때 가진 것 하나도 남은 것 없이 모두 다 날렸습니다. 빈털터리가 되고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그 때에 목사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집사님을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확실히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교도소에서 풀려 나온 후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 애를 썼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복을 주셨습니다. 잃었던 건물도 하나 되찾았고 집을 지어 분양을 하는데 어려운 시기에 70% 이상 분양이 되었습니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돈이 꼭 필요하면 꼭 한 채가 분양되게끔 하나님이 하신다고 그는 간증 했습니다.

교도소에서 만난 한 친구가 불경을 읽고 있기에 그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야, 나도 믿어보았는데 헛것이더라. 불경 읽지 말고 성경을 읽어라." 그리고 친구가 얼마 후 석방되었는데 그 집사님이 데리고 쓰면서 함께 신앙생활하며 축복을 누리게 되었답니다. 그는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광복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무력으로 일본과 싸워 얻은 해방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본에 원자탄을 터트리게 하시니 순간에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공ㄹ발에서 교회에서 나라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이들, 이 나라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며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한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보시고 이 땅에 은혜의 해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땅에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qlerh 의지한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해 가난한자를 부요케 하시고, 눈먼 자의 눈을 열어주시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죄와 죽음과 심판에 눌린 인생들에게 자유를 주러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이 엄청난‘은혜의 해’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 모두가 한분도 빠짐없이 이 귀한 복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가족들과 친지들이 여러분을 통하여 이 귀한 복을 누리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민족의 해방 80주년 기념일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서 이 귀한 은혜를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지와 이웃들에게 전해서 저들과 몸과 마음과 영혼이 자유의 해방과 감격을 누리게 되시기를 촉복합니다.

 

 

* 찬송 : 268장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 찬양 : 내게 오라

 

이정익목사 자유함과 해방을 위하여 눅04장 16절 ~ 절

 

본문말씀은 이사야서 61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을 쓴 누가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해서 기록한 말씀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어려서 자라신 곳 나사렛에 있는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었다고 했는데 그때 읽은 성경이 바로 이 이사야가 쓴 본문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 하더라“.

 

이 내용을 자세히 보면 주목할 대목이 몇 번 나옵니다. 하나는 그곳이 나사렛에 있는 회당이라고 했습니다. 오랜만에 예수님이 고향에 들러 사람들을 만나서 가장 먼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또 손에 성경을 들고 읽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읽은 내용이 이사야 61장 1-2절로 예수님 자기 자신에 대해서 예언된 내용입니다. 그 당시로부터 700년 전에 이사야가 장차 이런 사람이 세상에 오셔서 이런 일을 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그로부터 700년이 지난 지금 그 예언의 주인공인 예수님이 그 내용을 읽고 있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일 아닙니까. 여기 보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몇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려

 

여기 “가난한 자”는 산상수훈 첫머리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은 마음의 순수하고 맑고 무욕하고 사모함이 있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을 들으면 그대로 믿고 받고 용납합니다. 그런데 마음에 욕심이 가득하고 이생에 집착하는 사람은 순수함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전도해도 씨도 안 먹힙니다. 그리고 부자들은 대부분 교만함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실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상대도 하지 않고 경멸합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은 게을러서 못산다고 생각하고 무능력하다고 단정합니다. 자신이 부한 것은 유능하고 부지런해서 잘 산다고 생각하며 나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고 단정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부자들은 교만하고 전도해도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 전도했습니다. 갈릴리의 어부들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자신도 구유에서 태어났고 인류의 구원사역을 감당하면서도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로부터 억눌린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이 말씀을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유하게 해 준다는 말씀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와서 로마를 무찌르고 당당하게 다윗시대의 영광을 재현할 만왕의 왕으로 고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이 그렇게 열광하면서 맞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로마 군인들에게 잡혀가는 예수님의 무력한 모습을 보면서 열광하던 백성들은 반대로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나온 결과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오셔서 온 인류를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해방시킬 것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이 억압이 얼마나 무거운 짐입니까. 중병자들이 지고 있는 짐이 무겁습니다. 가난도 무거운 짐입니다. 신체장애도 무거운 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장차 예수께서 오시면 그런 무거운 짐으로부터, 억압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있던 사람들이 결국 예수를 만나고 나서 얼마나 환희와 기쁨과 감사함을 고백하였습니까. 현실은 변한 것이 없지만 내면에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무겁던 짐도, 장애의 짐도, 암 덩어리가 짓누르는 짐도 가볍게 느껴진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만남으로 얻어지는 축복입니다.

 

일본인 가가와 도요히코는 “사선을 넘어서”라는 자서전을 썼습니다. 그는 젊어서 폐결핵을 앓았습니다. 그때는 폐결핵은 치료가 어려운 병이었습니다. 그는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 무거운 짐이 짓누르는 고통스런 인생을 살았습니다. 매일같이 절망감이 엄습해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어느 날 작심하기를 “죽는 시간까지 기다리지 말고 남은 시간 선용하자“하고 빈민가에 들어가 그 사람들을 위해서 정신없이 헌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때 그는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그의 마음에 환희와 감격과 희망과 자유함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후 50년을 더 살아갑니다. 예수의 오신 목적이 이 무거운 짐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시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세상에는 육신적으로 눈이 어두운 장님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육신의 눈은 떠 있으나 영적으로 눈이 어두운 장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영적 눈을 떠서 천국을 보게 하고 구원의 길을 보게 해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육신의 눈이 어두운 것도 고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더 불상하게 여기신 것은 영적 눈이 어두운 장님입니다. 눈은 있는데 성경을 보면서도 보지를 못하는 불행이 더 큰 불행이라는 것입니다. 이 눈을 가지고 겨우 보는 것이 세상적 재리만 보고 욕망이나 보고 이생만 본 다는 것 얼마나 불행합니까. 헬렌 켈러라는 분은 눈도 귀도 입도 막힌 여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얼마나 불행한가 하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때 헬렌 켈러가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세상을 볼 수 없고 당신들의 얼굴도 볼 수 없으나 나는 이 눈을 가지고 천국을 보았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여인을 보고 불행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영적인 눈을 가진 것이 보배입니다. 육신의 한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신비하게 천국을 보고 하나님을 보고 부활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여러분들이 모두 육신의 옷을 입고 있지만 천국을 보고 소망하고 바라고 믿는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주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눈을 뜨게 해 주신 결과입니다.

 

눌린 자에게 자유를

 

이 말씀은 죄의 노예가 되어 세상의 근심과 걱정에 얽매이며 고통 받는 자에게 영혼의 평안과 자유를 주실 것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인간이 지는 가장 무거운 짐은 죄의 짐입니다. 우리들이 죄의 짐을 풀었지만 우리 마음에는 아직도 이 죄의 뿌리가 들어 있습니다. 회개해도 이 뿌리는 그냥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있으면 속에서 이 뿌리가 고개를 들고 나옵니다. 어느 장로님이 장로가 되기 전에 술 고래였다고 합니다. 예수 믿고 술을 끊고 장로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과 동행해서 심방 가느라고 양조장 근처를 지나는데 순간 막걸리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그때 그 술 냄새를 맡은 장로님이 “죽여주는구먼” 그랬다고 합니다. 옛날 술 마시던 그 근성의 뿌리가 조용히 있다가 순간 막걸리 냄새에 꿈틀거린 것입니다. 이것이 죄성의 뿌리입니다. 이 뿌리가 가만히 있다가 어느 순간 기회가 되면 꿈틀거리는 것입니다.

 

또 세상의 걱정 근심도 무거운 짐이고 멍에입니다. 이 멍에 없이 사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습니다. 얼마나 그 고통이 심하면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겠습니까. 그리고 그 짐이 얼마나 무거우면 인생을 다 포기하겠습니까. 엊그제 총기 탈취범의 범행동기가 애인과 이별하고 허전한 마음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했습니다. 그가 지고 있던 짐이 무거웠을 것입니다. 실연당해 본 분들은 그 짐이 얼마나 무거운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좀 일찍 그 짐을 내려놓는 방법을 알았더라면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도 목을 맬 수밖에 없는 큰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정신이 돌아온 후에 생각해 보니 엄청난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스승을 팔다니, 내가 스승을 배반하고 동료들을 배반하다니”, 그것은 너무 엄청난 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곧 돌아와 회개하고 잘못했다고 했으면 되지 왜 미련스럽게 목을 매었느냐고 하지만 유다는 그 상황에서 돌아오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목을 맨 것입니다. 오늘도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자꾸만 제 2의 가룟 유다가 출현하고 제 3의 총기 탈취범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모두 감당하기 힘든 근심과 걱정의 무거운 짐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베드로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베드로도 유다 못지않게 예수님 앞에서 배반하고 실수한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보는 앞에서 선생님을 배반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 말씀대로 닭이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 닭 울음소리와 함께 베드로는 나가서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왜 어쩌다 이런 실수를 저질렀는가”, 그때 그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가서 유다처럼 목을 맨 것이 아니고 통곡하고 재기의 길을 걸었습니다. 재기의 길을 걷고 예수께로부터 용서를 받았지만 전설에 의하면 그 후 베드로는 닭만 보면 얼굴을 못 들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사기만 치던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천국 입구에서 심판대에 섰습니다. 때마침 베드로가 자격심사를 하다가 그 사기꾼을 만났습니다. 그를 보자마자 “너는 천국에 갈 자격이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니까 사기꾼이 “왜 안 되냐”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너는 맨날 사기나 치고 배반이나 하고 사람들을 속이지 않았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기꾼이 짐 보따리를 슬그머니 베드로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사기꾼이 말했습니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한번 들추어 볼까요” 베드로가 그 짐 보따리 속을 들여다보니까 그 속에 닭 한마리가 들어있었습니다. 그 닭을 보자마자 베드로가 두말 안하고 “빨리 들어가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걱정과 근심” 이 짐이 그 옛날 사람에게도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감당하기 어려운 짐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려고 왔다”고. 성경을 보면 그때부터 예수님은 3년 동안 하루도 쉴 날 없이 이 억눌린 사람들을 치료하고 자유하게 하시려고 동분서주하셨습니다. 가는 곳 마다 찾아오는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 앉은뱅이 된 사람, 하루 종일 피를 흘리는 혈루병자, 중풍병자, 나병환자 등 각종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모습들을 볼 때 참으로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의 멍에에 씌워져 저렇게 고난 받고 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쉴 사이 없이 병자들을 고쳐서 육신의 멍에로부터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또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귀신들로부터 억압당하고 이방인들이 보는 앞에서 별 미친 짓을 다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보시고 탄식하시면서 그 사람 안에 들어있는 귀신에게 명하시기를 ”귀신아 나오라“고 외치시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셨고 사람들이 귀신들로부터 억눌린 것을 영적으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또 영적 무지자들에게 가르쳐서 그들을 무지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율법에 한정된 안목을 가지고 살아가던 당시 유대인들에게 복음의 세계를 보고 믿게 하시려고 회당 마다 찾아가셔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 내일 일 때문에 매일 같이 근심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그날그날을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거운 짐은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질병들도 다 짐입니다. 이를테면 편견, 늘 비난하는 병든 생각, 이것들도 무거운 짐입니다. 그 사람들도 늘 입만 열면 누구를 흉보고 악평하는 자신이 싫었을 것입니다. 그것도 그가 지니고 살아가는 짐입니다. 어느 그림 비평가가 늘 비평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세상에 온전하게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비평거리였습니다. 이 분이 마침내 시력까지 어두워졌습니다. 어느날 부인과 함께 미술 전시장엘 갔는데 그림이 윤곽만 보였습니다. 남편은 어느 그림 앞에서 비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화가는 그림을 잘 그렸는데 모델을 잘못 선택했어, 모델이 너무 못 생겨서 그림을 잘 그리고도 실패했군, 예술가가 명작을 기대한다면 모델을 잘 선택해야 해“, 그때 옆에 있던 아내가 자꾸만 이야기를 중단시키려 했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비평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소리 쳤습니다 “여보, 당신은 지금 거울을 보고 있단 말 이예요.” 그래서 이것이 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지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천국을 보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 가르침을 받고 들을수록 눈이 뜨였고 귀가 열렸고 마음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천국이 보였고 귀신들이 막 쫓겨 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얼마니 신비했겠습니까. 지금까지 자기들이 오해한 것, 무지해서 보지 못하던 것들, 근심 걱정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던 것들은 알고 보니까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그 가르침에 먹는 일도 잊어버리고 광야로 따라다니며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 이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린 사람들은 모두 자유하게 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큰 은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자유입니다. 패트릭 헨리는 “나에게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외쳤습니다. W. 위트만은 “자유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다시는 죄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자유함을 누린 사람은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숨길 것 없는 자유, 잃을 것 없는 자유, 두려워할 것 없는 자유를 누렸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유하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유 해야 할 가치를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유 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무엇엔가 억눌려 살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내 자식이 그런 짐을 지고 곤고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에 예수를 보내신 것입니다. 모든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시고 사해주시고 평안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탄생 700년 전에 이 말씀으로 장차 이 세상에 메시아 예수께서 태어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우리는 내가 그 예수를 알게 된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은혜를 입었나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조용기목사 해방과 자유 눅04장 16절 ~ 절

 

<서론>

우리는 일본에 나라를 잃고 신음 중 기미년 3월 1일 민족적인 독립과 해방을 주장하는 독립운동을 일으킨 3.1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우리 선조들이 목숨을 잃고 체포 감금되었으나 그런 민족적 단합과 해방을 위한 투쟁이 있었기에 우리는 해방을 얻어 오늘날 같은 독립된 번영하는 독립국가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눈에 보이는 원수가 아닌 눈에 안 보이는 마귀의 지배와 억압을 당하고 평생에 마귀의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그 말굽 밑에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복음은 가는 곳마다 자유와 해방을 갖다주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굴레를 씌우고 법칙을 세워서 종교적인 우리 속에 감금하는 그런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30세에 나사렛 회당에서 그의 사명에 대한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마귀의 정사와 권세에 대한 선전포고이며 우리들에게는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선언인 것입니다.

 

<본론>

1.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주님께서 그의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러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책을 달라고 하셔서 성경에 있는 이사야서를 중심으로 해서 당신의 사역을 설명할 때 먼저 누가복음에 기록한 대로 자유와 해방을 주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예수님을 섬길 때 자유와 해방을 떼어 놓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는 철저히 마귀의 속박 속에 고통당하는 자를 자유롭게 하고 해방을 주려고 역사하는 곳입니다. 성령이 교회 와서 교회는 예수님 이름으로 말미암아 우리 사람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고 행복과 기쁨을 누리고 주를 섬기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주의 성령이 임하셨으니 성령이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이 또한 성령을 통해서 자유와 해방의 역사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해방과 자유의 영이십니다. 고로 성령이 임하여 계신 교회는 사람들이 와서 예배 드리면서 마귀의 다스림과 고통에서 해방과 자유를 얻습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요사이는 주의 성령이 몸된 교회에 임하셨으니... 예수님께 임하셨을 때 자유와 해방을 주는 역사를 베푸시는 성령께서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임하셔서 똑같이 자유와 해방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나타나서 자유와 해방의 역사를 베풀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오늘 여러분과 저의 삶속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놀라운 자유와 해방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기름을 부으셨다.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예수님께서 임하셔서 교회에서 사역하게 하는 것은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찾으시고 가난한 자를 복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꽉 들어차 있으면 더 담을 스페이스가 없습니다. 담을 스페이스가 없으니까 더 줄 수가 없어요. 완전히 비어버린 그릇에는 담을 수 있는 여백이 있습니다. 마음에 텅 빈 공간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를 찾아서 주님께서 복을 빌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관심을 가진 대상 ‘가난한 자’가 교회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말하니까 어떤 가난한 자를 말하느냐. 영이 가난한 자,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저들의 생애 속에 떠나버리시고 영적으로 죽어버렸기 때문에 가난한 정도가 아니라 파멸된 존재인 것입니다. 선악과 열매를 먹으면 죽으리라고 했는데 먹고 난 다음 영이 죽어버렸습니다. 죽은 사람이 대화도 안 되고 같이 생활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난한 자를 찾으실 때 영이 죽은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죄인을 찾아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주님은 영적으로 죽은 죄인을 살려주시고 하늘나라에 영광과 의와 거룩함으로 채워 주시므로 충만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마음에 희망을 잃어버리고 기쁨도 잃어버리고 평안이 없어 정신적으로 고통하는 자를 주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가난한 자는 육신이 허약한 자, 병든 자 육체적으로 가난한 자인 것입니다. 육체적인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사람 많은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 다음 생활이 가난한 자는 말할 필요 없이 생활이 핍절한 자인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얻지 못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영혼이 가난한 자, 마음이 가난한 자, 육체가 가난한 자, 생활이 가난한 자, 좌우간 가난한 자에게 복을 주어서 더 이상 가난 속에 살기를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난 다음에 성도들이 예수 믿는 의미를 깨달아 알고 그리고 그것을 꿈꾸고 믿고 입술로 고백하면 승리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가난한 자로써 왔을 때 주님이 가난한 자를 위해서 교회에서 사역하시고 십자가를 걸머진 것을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인의 죄를 담당하시고 의로움을 채워 주시고 더러운 사람들의 추함을 제하시고 거룩함으로 옷 입혀 주시고 병든 자를 위해서 채찍에 맞으신 공로를 통해서 치료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생활에 가난한 자는 저주와 가난에서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을 허락해 주시고 생명을 잃어버리고 죽는 사람은 죽어서 음부에 내려가지 않고 영생복락을 누리고 하나님께로 나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했으므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고 말씀을 읽고 묵상해서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 진리를 알고 내가 그 진리 가운데 사는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자기의 새로운 모습,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된 자기의 모습을 상상하고 그려보고 그렇게 된다고 믿고 입술로 늘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입술로 늘 중얼중얼하고 나니는 것이 입술의 고백이고 그것이 여러분의 믿음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영과 혼과 육과 생활이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먼저 달라져야 되고 생각이 달라지면 생각을 꿈꾸게 되고 마음속에 살아가는 꿈이 영롱해지면 그 꿈이 이루어질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게 되고 믿음이 있으면 입술로 중얼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가 나의 죄를 담당하시고 나를 의롭게 해주셨다. 나를 거룩하게 해주셨다. 나에게 치료와 건강을 주셨다. 나에게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함을 주셨다. 나에게 영생복락을 주셨다. 중얼중얼하는 것이 묵상기도인데 굉장히 여러분에게 믿음을 더해주는 효과있는 기도인 것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데 얼마나 하나님이 역사하느냐면 우리 교회 나오는 집사님 중에 한분이 사업을 했는데 IMF때 사업을 해서 쫄딱 망했습니다. 빚더미에 올라앉았습니다. 그래서 자동차를 휘몰아서 강물로 뛰어들어가려고 전력을 기울여서 악셀레이터를 밟았는데 뛰어 들어가려던 그 장소에 굵은 바윗돌 하나가 있어서 바퀴가 바윗돌에 부딪히니까 차량이 거기에서 뒤집혀졌습니다. 안 그랬으면 물 속에 그대로 들어갔을 것인데 그 하나님께서 죽지 말라는 것인가보다. 그래서 새로 사업체를 일으켜서 그는 이제는 방법을 달리했습니다. 전에는 세상 중심으로 사업을 하고 하나님은 예외로 믿었는데 이제는 하나님 중심으로 주의 복음을 전하겠다는 생각일변도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4차원의 영성을 배워가지고서 하나님의 은혜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하고 아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머리가 확 돌아간 사람처럼 주님 중심으로 사업을 했는데 하나님이 그때부터 축복을 해주시는데 환경에 의지하지 않고 축복이 넘쳐나서 자기 점포가 전국으로 3백 개가 있어요. 이제는 중소기업의 사장이 되고 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제게 늘 하는 말이 자기가 잘나서 사업이 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고 같이 역사해 주셔서 그렇게 되었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이 지상에 내려와서 살았다는 것은 얼마나 가난한 생활이었습니까? 하나님이 하나님 옷을 벗어버리시고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오셔서 33년 반 동안 이 땅에 사셨는데 그 가난함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의 가난함을 다 청산해 버리신 것입니다. 나는 요사이 대개 교회 집회를 가면은 목사님 사무실에 들어가면 사무실이 굉장히 화려합니다. 저도 목사지만 옛날 목사님들은 사무실이 화려하지 않았는데 사무실이 화려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제가 집회를 간 교회 목사님 사무실에 가니까 옛날 이조시대와 같이 화려하지 않아요. 아주 서민적인 그러한 책상과 걸상과 가재도구들이 펼쳐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목사보고 말했습니다. 내가 참 당신을 새롭게 봅니다. 내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화려한 것보다도 예수님이 가난하게 지냈으니 저 목사의 사무실이 가난을 그대로 몸소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을 믿습니다. 그 교회가 불꽃같이 일어나는 교회인데 교인들이 하나님께 축복을 받아서 선교사도 많이 내보내고 지교회도 많이 세우는 좋은 교회인데 목사님이 겸손하게 사치스럽게 살지 않고 그러나 그의 생활 전체는 4차원의 영성을 따라 살고 있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그는 생각이 거듭나고 찬란한 꿈을 가슴에 안고 믿음으로 살고 입술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늘 고백하면서 살아서 하나님이 그를 부요케 해주신 것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었다. 그것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그 가난하게 됨은 그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 댓가를 찾아야지요. 예수님이 여러분 때문에 가난하게 되었는데 여러분도 가난하자. 그러면 예수님이 헛것 안했습니다. 예수님이 가난한 조건을 이룩해야 돼요. 왜 가난했냐. 나 때문에 가난했다. 내가 부요케 되기 위해서 가난해졌다. 하나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골수를 쪼갠다고 말씀을 받아서 여러분이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여러분 생활 속에 역사하는 것입니다.

요한삼서 1장 2절처럼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주님께서 여러분과 나의 전인구원을 저렇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예수님께서 오늘날도 살아계셔서 축복해 주신다고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오. 그러면 그 말씀 속에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일에 아브라함의 복이 임하고 형통한다는 것을 믿고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 강단에서 여러분 보니까 여러분 다 얼굴에 광채가 납니다. 성령이 여러분과 같이 계신 증거인 것입니다. 성령이 예수님 안에 계셨는데 이제는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복을 주셨는데 이제는 그 성령이 여러분을 통해서 복과 형통함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진리를 알고 믿고 입으로 늘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마귀에게 포로 된 자에게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기 전에는 마음에 완전히 마귀에게 포로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마음에 미움과 분노와 원한과 우울 이런 것을 풀어 놓지 않아요. 마음에 꽉 묶여 있어서 불행하기 짝이 없습니다. 육체는 죄, 불의, 추악, 저주, 절망, 가난, 질병에 묶이고 인간생활이라는 것이 영과 혼과 육이 생활과 함께 마귀에게 다 포로로 잡혀서 마귀가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그 마귀의 권세를 격파한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15절에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통치자, 세상에 인간의 통치를 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공중권세 잡은 자인데 공중에 마귀 정권을 세워 놓고 마귀 세계를 유지할 수 있는 통치를 하고 마귀 군사들을 동원해서 사람들을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마귀의 전술은 보통 사람에게는 곁에 따라다니면서 훼방을 하는 것입니다. 자꾸 참소하고 귀찮게 하고 훼방을 하다가 나근나근해지면 사람에게 붙습니다. 거머리 붙듯이 찰싹 붙어가지고서 자꾸 괴롭힙니다. 억압을 가합니다. 스트레스를 걸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쫓아내지 아니하면 그 다음에는 누릅니다. 발로 굴립니다. 아픈 데를 짓밟듯이 굴립니다. 고통스럽게 만들어요. 아이고 괴롭다. 사는 것이 괴롭다. 죽었으면 좋겠다. 그런 말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면 마음속에 들어와서 일을 일으킵니다. 자살을 하든지 집에다 불을 지르든지 가족을 죽이든지 이러한 흉악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여러분을 넘어뜨릴 때 오랫동안 뜸을 들여서 틀림없이 손아귀에 잡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브세션, 오프레션, 디프레션, 포세션 이 네 단계를 꼭 밟아가지고서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면 하나님이 이러한 마귀의 궤계를 들추시고 구경거리고 삼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 성도들의 대적에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두나미스, 폭탄 같은 힘을 가지고 있으나 우리 성도들은 힘은 없어도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권세는 힘과 다른 것입니다. 폭력과 다른 것이 권세인 것입니다. 청년들은 폭탄 같은 힘이 있어도 할아버지는 힘은 없으나 연로한 사람으로서 사회적인 존경을 받는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힘은 없어도 권세는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동차는 엔진에 폭탄 같은 힘이 있으나 교통순경은 그만한 힘은 없어도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권세는 힘을 이깁니다. 여러분,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래서 마귀를 짓밟고 쫓아낼 수 있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하나님이 이 마귀의 역사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이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몸 찢고 피 흘려서 우리에게 권세를 하사하시고 난 다음에 권세를 사용하시고 마귀에게 다시는 종노릇하지 마라.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를 늘 쫓아내고 승리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가족에게 있어서 마귀는 부부간에 싸움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부간, 자식 간에 싸움을 싸우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가장 어려운 것이 사람 모이는 곳에 서로 100% 마음이 맞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인격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조그맣게 마음이 다릅니다. 뭐하고 살아야 되느냐. 용서하고 살아야 합니다. 서로 미워하기 시작하면 누가 더 병드느냐. 미워하는 당사자가 미움을 받는 사람보다 더 병들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하고 괴로움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미움의 포로가 된 나를 해방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용서를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해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자요 베스트셀러 작가인 루이스 스미디스(Lewis B. Smedes)는 「용서의 미학」에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용서할 때 우리는 포로 된 자를 풀어 주는데, 우리가 풀어 준 포로가 바로 우리 자신이었음을 알게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용서를 해주면 상대방이 용서받아 좋은 것 보다는 자기가 더 좋습니다. 자기가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용서할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좋은 의사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분노하고, 미움, 원한과 같은 마음의 독(毒)을 가지고 있으면 이것이 암도 되고 관절염도 되고 장기에 병을 일으키는 독이 되는데 약을 먹어서 이것이 낫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약은 용서입니다. 용서를 해줘버리면 내 마음이 편안해지니까 마음이 편안해지면 그것이 치료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너무나 용서가 없는 사회가 되어서 그것이 큰 고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성령이 오시면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영이 죽었기 때문에 알지 못해요. 니고데모에게 우리 주님께서 이야기 하실 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일을 알지 못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장님에게 세상 환경을 아무리 설명해도 못 보니까 알지 못하는 것처럼 영적인 장님이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영적세계를 아무리 알려줘도 알 도리가 없습니다. 선악을 아는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는데 먹고 난 다음 반역해서 영이 죽어버렸기 때문에 중생하여 영이 다시 살아나기 전에는 하늘나라 일을 아무리 말해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5절로 8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성령으로 난 사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떻게 해서 성령을 받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면 우리가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들이고 영이 살아나므로 하늘나라 일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하늘나라 일을 아무리 말해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사이 무신론자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무신론자”라는 용어 대신에 “똑똑한 자(bright person)”라는 명칭을 사용합니다. 당신은 누구요? 똑똑한 사람입니다. 바보 같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똑똑한 사람은 하나님을 안 믿는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며, 그런 사고에 의하면 ‘하나님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합리적이고 현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눈에 그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영적인 맹인으로 생각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 믿는 사람은 자기들이 똑똑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믿는 사람보고 바보라고 말하고 믿는 우리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천재고, 안 믿는 사람이 바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천국 일을 말해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상당히 기도하고 성령님의 감화 감동을 가지고서 말을 해야 겨우 알아듣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 그냥 말만 해서는 하늘나라일이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2.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그리고 주님께서 오신 것은 눌린 자를 자유케 하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억압당한다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시골에서는 이 길을 가다가 봄날이 다가오면 파릇파릇 싹이 나는데 돌멩이를 밀어내보면 돌멩이에게 눌린 풀은 노랗게 떠있습니다. 그 돌멩이를 옮겨주면 햇빛을 받아서 곧 시퍼렇게 활기 있고 생명 있게 자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 그의 최악의 술수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억압합니다. 생기를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낙심하고 좌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훼방하고 삶을 압박해서 고통을 주고 우울하게 하고 점령하여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마귀는 눈에 보이는 체제로써 정치적으로는 공산주의자, 독재정치인, 종교적인 거짓 선지자 이러한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자기 먹이로 삼는 것입니다. 그들은 교만하고 오만합니다.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고 했는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그와 같이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 보면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마귀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종으로 삼지만 주님은 가는 곳마다 마귀에게 눌린 자를 해방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여러분은 모두다 자유와 해방을 위해서 태어났고 자유와 해방을 갖다주는 용사들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과 자유와 해방은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아무리 약을 먹어도 낫지 않고 요양소에서도 낫지 않는 이유는 마귀의 억압을 받아서 병든 사람은 약을 가지고는 낫지 않습니다. 마귀를 내어 쫓아야 낫습니다. 누가 마귀를 쫓습니까? 예수를 구주로 모시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는 권세를 주신 것을 알고 나는 권세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마귀를 물리쳐야 되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너희 거짓 귀신 마귀야 물러가라! 내가 예수 이름으로 너를 묶으니 이 몸에서 떠나 갈지어다! 전에 한번 내가 개척 당시에 마귀를 쫓아낸다고 했더니 마귀를 쫓아내라고 할아버지 한분이 마귀야~ 제발 좀 나가주소~ 이 누름은 우리가 어떻게 삽니까? 물러가소~ 물러가라~ 물러가라~ 그러고 있어요. 그래서 내가 할아버지 뭐합니까? 하도 마귀가 고통을 주기 때문에 좀 달래보려고 한다고... 마귀를 아무리 달래도 마귀는 설득 안 받습니다. 쫓아내야 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 갈지어다! 마귀는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칠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마귀의 일을 멸하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되 풍성하게 주기를 원하시는 것이 주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19절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오늘날 예수 믿는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특권을 너무나 잊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군지 모르고 삽니다. 세상 사람이 아니고 하늘나라 사람이고 세상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세상 사람들과 같이 하늘나라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면서 살고 자유와 해방을 갖다주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집집마다 들어가서 해방의 말씀을 전하고 기도를 해주므로 그 집안에 있는 원수 마귀를 청소하고 깨끗하게 하고 사회를 맑히고 밝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사회가 맑고 밝고 환해지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죄악의 더러움을 가져오는 원수 마귀를 쫓아내버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 하늘나라의 군사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랑하는 예수님의 군사가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을 무장하면 여러분은 놀라운 군사, 군인이 되는 것입니다.

국제 인권 단체인 프리덤 하우스가 「2015 세계 자유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세계 최악의 인권탄압국으로 북한을 지목했습니다. 이로써 북한은 42년째 연속 세계 최악의 인권탄압국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CBS 노컷뉴스, 2015.4.14.) 그런데 북한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억눌린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이슬람의 극단파들은 사람을 그냥 잡아서 목을 칼로 베지 않습니까? 오늘날 문명이 발달되었다고 하면서 이 세상에는 이와 같이 흉악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귀가 하는 일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될수록 의롭고 거룩하고 사랑의 영토가 넓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많이 전도해서 예수 믿는 사람 수가 많아지고 기도가 더 능력 있게 되어서 세계에 있는 원수 마귀가 다 쫓겨나가야 될 것입니다. 우리 한국도 1,200만 성도라고 하지만 200만은 떼버리고 천만이라도 똑똑히 되어가지고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환난 때 내가 저와 같이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하므로 저로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나님은 이렇게까지 우리 뒤에서 힘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응답하겠고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여주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와서 내게 맡기라. 우리 정말로 하나님을 믿고 우리의 삶을 주님께 맡겨야 되는 것입니다. 너희 자식이 떡을 달라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면 뱀을 줄 자가 있겠는가? 하나님이 극단적인 표현을 했지 않습니까?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 주는데 하물며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않겠느냐? 아예 한번 죽지 두 번 죽냐? 믿습니다. 그리고 내던져 맡겨버리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에 견줄 사랑이 이 세상에 없습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말미암는데 그 사랑을 우리가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많이 기도를 하고 하나님이 역사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조건이 있어야 그것을 가지고서 역사하는데 그 조건이 뭐냐, 여러분의 기도가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로 길을 닦아 놓으면 하나님이 그 길을 통해서 들어가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요즘 한창 봄이 되면 새싹들이 많이 나는데 집 밑에나 콘트리트 벽 밑에 나는 나무나 풀들은 생명이 시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곳에 시멘트를 치워주고 그늘을 치워주면 잘 자라요. 햇빛을 받아서 나무나 풀이 엽록소에서 산소동화작용을 해서 그 엽록소에서 양분을 만들어서 짐승들도 먹고 사람들도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빛은 생명인 것입니다. 빛이 있어야 동식물들이 기초대사가 이루어져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는 빛이라. 내 안에 있는 자들은 어둠에 다니지 아니한다. 우리 영적인 건강은 예수님을 따라갈 때 우리 속에 영적인 영양소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둠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이 교회고 우리가 교회 와서 예수님을 섬기며 예수님은 우리 주위와 우리 안에 있는 마귀를 다 쫓아버리는 것입니다.

 

3.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마지막으로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은혜의 해를 전파하려는 것입니다.

은혜의 해가 뭐냐구요?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로 아브라함의 시대까지 천진난만한 시대입니다. 천진난만했습니다. 그 다음 아브라함의 시대는 양심 시대가 왔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에서 모세시대까지 양심 시대입니다. 양심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모세 후 이스라엘은 율법 시대로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구속한 이후로는 이제 무슨 시대냐, 은혜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은혜는 삶을 값없이 주시는 것, 내게 값없이 주신 은혜를 알고 믿음으로 구원 받는 은혜의 시대. 우리가 참 좋은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천진난만한 시대도 지나고 아브라함의 시대 양심 시대도 지나고 모세의 이스라엘 율법 시대도 지나고 예수님과 이웃이 되는 은혜의 시대인데 에베소서 2장 8절로 9절 우리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 박대통령이 늘 말한 것처럼 대박이 터진 것입니다. 이 성경구절 하나가 대박입니다.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다. 내가 잘못, 잘한 것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아서 선물로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것 없습니다. 구원을 선물로 받고나면 하나님이 성령을 주셔서 성령의 승화작용으로 변화를 받아 주님 모습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그들이 가나안 복지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께서 7년 만에 농사를 짓지 않고 안식을 하도록 들과 밭을 다 쉬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6년째 많은 수확을 거두어서 하늘을 뛰어넘어서 살 만큼 수확을 주시고 7년째는 모든 것을 쉬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이 7년을 일곱 번 50년째는 희년이라고 해서 옛날로 다 복구시키는 것입니다. 종을 샀으면 자유인이 되고 집을 팔았으면 희년이 되면 공짜로 그대로 집 주인에게 주고 밭 다 논이나 이런 것 샀으면 그것도 공짜로 돌려줘야 되는 것입니다. 완전히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이 희년이 굉장한 날인데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그가 온 것은 우리들에게 희년을 전하기 위해서 왔다고 말한 것입니다. 은혜의 해를 전파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은혜의 해란 무엇이냐, 아담과 하와가 지음을 받은 그 상태대로 주님께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신다.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와 불의를 다 하나님이 청산해버리고 용서와 의와 영광으로 갚아주신다. 병도 다 고쳐 버리고 원래 건강을 주신다. 축복도 원래 축복으로 축복해 주신다. 제가 그 시대에 났더라면 원로목사가 아니고 원래 목사가 되어서 진짜 목사가 되었을 것인데... 분수에 넘치는 원로목사 이름을 받아서 부담이 많습니다.

레위기 25장 10절로 11절에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 갈지며 그 오십년 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모든 것이 원상복귀하고 자유를 얻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도록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자유와 해방을 갖다 주는 은혜의 해를 우리에게 전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 희년의 선포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유와 해방을 얻어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결론>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예수를 믿음으로 은혜의 해를 맞아 잃은 것 다 찾고 새 사람이 되고 하늘나라 시민으로서 살게 된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께서 홀로 다 이루어 놓으시고 인생들에게는 전혀 부담 없이 믿기만 하면 구원을 주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주님의 교회는 의식이나 율법을 시행하는 처소가 아니고 성령님의 임재하심 속에 수천 년 마귀에게 고통당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 마귀의 정사에서 해방을, 마귀의 권세에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묶인 인생에서 풀린 인생으로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묶인 인생에서 풀린 인생으로 변화된 사람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2년 동안이나 혈루병에 묶여 있던 한 여인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 병에서 풀려났고, 38년 동안이나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발이 묶여있던 사람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 자리에서 즉시 풀려나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또 날 때부터 앞을 못 본 채 구걸하는 자리에 매여 있던 바디매오는 여리고성 가에서 예수님을 만나자 장님이 눈을 뜨고 나사로는 죽어서 무덤에 들어갔는데 예수님이 그를 찾아와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호령하니 수의를 입은 채로 살아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무엇에 묶였습니까? 무엇에 해방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영적인 속박과 종살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 해방과 자유가 주어지고 말았습니다. 죄인은 용서와 의로움을 주시고 더러운 자는 깨끗함과 거룩함을 주시고 힘이 없는 자는 보혜사 성신님이 와서 도움 자가 되시고 병든 자는 치료와 건강을, 가난한 자는 아브라함의 축복과 형통을, 죽는 자는 영원 낙원을 주님께서 희년의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자유와 해방의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주시는 자유와 해방을 가슴에 가득히 담고 춤추고 기뻐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굉장히 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 두 세 사람이 모이면 교회고 교회를 통해서 여러분 주변의 세계를 자유와 해방을 가져오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아멘.

 

 

이필재목사 예수의 해방운동 눅04장 16절 ~ 20절

 

내일은 광복 6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날 태어난 아기가 이제 60세 환갑의 어른이 되었습니다. 어두운 역사를 살아온 세대들은 지금 우리나라의 형편이 조금 어리둥절합니다. 옛날에는 북한의 인공기를 손에 든 사람이 발견되면 그 사람은 볼 것 없이 잡혀가 형벌을 받았는데, 지금은 인공기를 불태우는 사람은 엄벌에 처하겠다고 국무총리가 선언했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변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8.15 당시나 지금이나 비슷한 사건도 있는 것 같습니다. 8.15 기념행사를 하는데 좌파와 우파가 따로 따로 8.15 기념행사를 한다고 신문에 발표가 났습니다. 보수단체, 진보단체가 각각 준비한 8.15 행사는 이미 사라진 이데올로기 전쟁이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요즘에는 어느 줄에 서야할지 모르는 국민 정서가 생긴 것 같습니다. 교회로도 공문이 많이 옵니다. 한쪽에서는 ‘이번 행사에 이런 것을 하니까 광고해서 많이 참여하도록 해주십시오.’ 또 다른 쪽에서 ‘그쪽으로 가지 말고 이쪽으로 오십시오.’일본에 대한 국민 정서도 이제는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8.15세대들은 청년시절에 일본에 대한 유머가 많이 유행했습니다. 세계인이 함께 배를 타고 여행을 하는데 배가 파선할 경우를 만났는데 선장이 광고를 하기를 “이 배는 파선할 수밖에 없으니 무게를 줄여야 됩니다. 세 사람을 희생시켜야 되는데 누구를 죽일 수가 없으니 여러분 가운데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사람이 있으면 나오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말이 떨어지자마자 영국 청년이 나서더니 “신사의 나라 영국이여, 영원 하라!” 그러면서 자기가 스스로 바다에 빠져서 죽었답니다. 그 다음에는 또 미국 청년이 일어나더니 “God Bless America!” 그러면서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몸을 던져서 바다에 빠졌고, 그 다음으로 한국 청년이 나오더니 “고요한 아침의 나라여, 빛을 발하라!” 하면서 옆에 서있는 일본 사람의 엉덩이를 차서 집어넣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재미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지금은 안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세상을 다녀본 경험으로 결론을 내린다면 세상에서 제일 죄가 많은 민족은 강대국들입니다. 강대국이 할 일이 있습니다. 못살고 불쌍한 이웃 나라 국민들을 도와주고 협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의 역사로는 짓밟고 빼앗고 죽였습니다. 중남미 일대의 23개국은 스페인어 하나로 모든 언어가 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강대국 스페인이 점령을 해서 다른 언어를 쓰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나라는 지금 40여 개국이나 됩니다. 영국의 침략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침략으로 많은 국가들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20세기의 100년 동안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전쟁으로 인해 고통의 역사를 살았는데 21세기는 치유의 세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지구촌이라는 말이 현실적으로 실천되어져 가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유럽의 각 국가에서는 하나의 나라로 통합하는 것이 어떠냐고 투표를 한다고 합니다. 이미 돈은 하나로 만들어 유로화 하나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아메리카 대륙의 나라들도 “우리도 그렇게 하자!”라고 해서 달라 하나로 통일하는 안건이 연구 중에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살기 위해서 이웃을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세상으로 변했기 때문에 과거의 일본과 미국은 원수였는데도 가장 가까운 우방이 되었고, 우리 한국 정부도 북한을 도와주는 일을 위해 미국을 열심히 설득하는 관계가 되었단 말입니다. 옛날에는 미국한테 북한을 제재해달라고 관제 데모까지 했는데, 지금은 북한을 어떻게 나쁘게 할까봐 미국을 설득하는데 최선의 외교적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많이 변했습니다. 저는 오래전에 사이판에 선교부흥회를 하러 갔는데 그곳에 참석한 수백명의 사람들이 거의 다 20대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들이 전부 손에 깃발을 들고 있었습니다. 거기가 미국령이니까 성조기를 들고, 선교사는 한국 사람이니까 태극기도 들고, 거의가 다 중국에서 왔기 때문에 중국 깃발을 들고 있고, 신분이 중국에 있는 공산당 자녀들이기 때문에 다 북한의 인공기를 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네 가지 깃발을 펄럭이면서 찬송가를 부르는데 처음 가본 그곳에서 어떻게 설교해야 될지 몰라 많이 난처해서 “모두 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라!” 그렇게 설교한 적이 있었습니다.

일본과 한국 사이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드는 낱말이 하나 있습니다. ‘역사 왜곡’이라는 말입니다. 왜 이 말이 없어지지 않는가? 20세기에 세계를 침략 전쟁으로 어지럽게 만든 대표적인 두 나라가 있습니다. 독일과 일본입니다. 아시아는 일본이, 유럽은 독일이 피로 물들였습니다. 그런데 독일은 역사 왜곡을 안 합니다. 독일은 진실을 밝히는 작업을 아주 열심히 하고, 일본은 열심히 감추려합니다. 독일이 유대인을 가장 잔인하게 학살한 장소가 아우슈비츠입니다. 지금 그 장소에는 독일의 학생들이 단체로 견학을 옵니다. 정부가 가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갔던 날도 고등학생 수백 명이 선생님의 지도하에 견학을 온 것을 봤습니다. 부끄러운 조상의 죄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못되고 잔인했는가를 체험할 수 있도록 체험학습장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세계에서 잘못한 것을 보고 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슈뢰더 총리는 그곳에 가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머리 숙여 사죄를 했습니다. 베를린 중심지에 있는 브란데 부르크문은 독일인의 자부심 상징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옆에다 대규모 유대인 추모 공원을 만들었습니다. 그 추모 공원이 생기고 일주일 만에 그곳을 다녀왔는데, 입구에 들어가 보면 이게 무슨 뜻인지 새까만 대리석 같은 돌로 직사각형, 정사각형의 돌을 1,000개 이상이나 늘어놓은 것이 보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제가 독일인에게 물어봤더니 자기들도 잘 모르겠다면서 “다만 돌아가는 소문은 이 새까만 것이 어두움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우리 독일이 유대인에게 어두움을 주었다는 뜻으로 독일인이 가장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브란데 부르크 문 옆에 바로 이것을 만들어 과거 우리 조상이 유대인들에게 큰 잘못한 것을 독일인들이 가장 잘 오는 장소에다 만들어놓고 회개하는 뜻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독일은 자신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인정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비해 일본은 역사 왜곡 일변도의 길을 가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에서는 8.15 해방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신학화해서 모든 교회는 8월중 한 주일을 광복절 기념 주일로 지내는데, 왜 교회가 정치기념일을 신학화 했는가? 예수의 복음 정신은 해방 운동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게 함이라.” 바로 예수님이 “내 사명이 여기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해방 운동은 몇 가지 뜻이 있는데, 구조적 악의 세력에서의 해방 운동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나라의 구조적인 악의 세력이 무엇이 있는가?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차적인 문제로 로마라고 하는 국가의 식민지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식민지 백성의 고난이란 이 생활을 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난하게 살아도, 아무리 어려운 고난 속에서 발전되지 아니한 국가에서 산다 하여도 식민지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자유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당시 유대인의 메시아관은 이 식민지 통치에서의 해방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에서 본다면 그들이 얼마나 그 구조 속에 갇혀 고통스러워했는지를 우리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 나라는 로마의 식민지 통치보다도 더 어려운 구조가 있었습니다. 이때 유대 나라의 왕이 헤롯이라고 했는데 이 사람은 로마 사람이 아니라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이면서 반 유대적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서 로마 정부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팔레스타인 식민지 반란이 일어났을 때 로마 정부를 위해 그것을 진압하는 공로를 세웠기 때문에 25살 때부터 출세의 길에 올라 마침내 통치권자의 자리에 앉게 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헤롯 왕가는 로마 정부보다 더 미워하는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유대인들이 동방박사의 아기 예수 탄생 소식을 들었을 때 “예루살렘이 소동한지라.” “과연 우리에게 이 해방자는 오신 것인가?” 그렇게 떠들썩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헤롯은 그 예수를 빨리 죽이라고 2살 이하의 사내아이 학살 명령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세력 구조 밑에서 유대인들은 숨도 크게 못 쉬고 살았습니다. 세계적 권력 구조인 로마를 배경으로, 그 힘의 비호를 받으면서 구조적인 악으로 헤롯 왕가가 존재하게 되니까 이중고 속에서 한없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 구조 악보다 더 무섭고 어려운 구조가 또 생겼습니다. 헤롯 왕가와 같은 반유대적 집단을 타도하기 위해 뜻있는 사람들이 모임을 갖게 되었는데 그들은 결속력을 가지고 민족의 장래를 구원하고자 뭉친 애국집단입니다. 그런데 그 집단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볼 때는 애국 집단이라 고 하는 이 바리새인들이 더 큰 구조 악을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집단은 정치적으로 민중을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적, 율법적으로 괴리집단 같은 종교집단을 만들어 모든 인간을 비인간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뜩이나 로마의 식민지 생활에 시달리고 헤롯 왕가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데 바리새인들까지도 종교집단을 만들어 자기들과 같지 아니한 사람들은 숨도 크게 못 쉬게 만들어버리니까 2중, 3중의 삶의 부담이 생겨 민중은 끝없는 고통 속에 살고 있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민중을 바라보시고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 자신의 삶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로마 정부도 헤롯 왕가도 바리새 집단도 다 구원이 없다. 내게로 오면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짐은 쉽고 내 멍에는 가볍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복음 앞으로 다 오라.”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구조 악을 봅시다. 안식일 날 어떤 사람이 질병의 고통으로 고난의 문제를 해방 받고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바리새인의 율법주의는 안식일에 그 사람에게 해방을 주면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그것을 깨뜨려 버리시고 질병에서 해방을 선언해 건강케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덤벼드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안식일의 구조는 내가 만든 것이다.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주인이 내 것을 가지고 내 맘대로 쓰는데 너희가 무슨 말이 많으냐?”이렇게 답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문둥병 들린 사람은 천벌을 받았다고 해서 인간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구조적 악입니다. 예수님은 그 구조를 깨뜨려버리십니다. 정상인으로 만들어서 그가 최고로 그리워하고 있는 자기 고향과 자기 집으로 돌아가 살 수 있는 해방을 주신 것입니다. 당시도, 지금도 이 환자들은 자기 가족과 살지 못합니다. 우리나라도 소록도에 수용소가 따로 있지 않습니까? 이들의 소원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구조적인 악은 집으로 못 돌아가게 합니다. 안식법의 본래 정신은 인간이 인간됨의 가치, 즉 하나님의 형상을 안식일을 통해 발견케 하려는데 뜻이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과 만나 내가 하나님 자녀인 것에 대한 기쁨과 행복을 주려는데 안식법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세기에 이 안식법 제정을 할 때 처음 하신 말씀이 이 날은 복 주려고 제정한 날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사람들은 안식일을 가지고 괴상한 제도를 만들어서 오히려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일을 계속해서 해 왔던 것입니다. 이것이 구조적 악입니다.

옛날에는 노예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 노예들은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평생 동안 하루도 자유와 해방의 날이 없는 인간들이 노예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인간됨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법을 안식일로 주셨습니다.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일하지 말라.” 그것은 그들에게도 일주일에 하루는 쉼을 주어야 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하나님 형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여유를 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이렇게 자유롭게 하는 행복한 회복을 위해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서의 하나님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열심히 하신 일입니다. 만약 어떤 제도와 정치적 힘이 인간의 행복을 불행하게 한다고 판단하실 때는 하나님은 그 역사에 직접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도록 하셨습니다. 그 구체적 이야기가 출애굽 사건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애굽이라고 하는 나라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요셉이라는 사람을 통해 구원받은 나라요, 백성들이었습니다. 7년의 대흉년이라고 하는 국가적 위기를 요셉이라는 히브리 청년의 지혜와 노력으로 고난 없이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역사가 지난 다음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히브리인에 대한 박해 역사가 일어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행복의 조건이 하나도 약속되지 아니하는 무수한 강제노동에 시달리는 비인간화의 역사 속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히브리인의 번성을 막기 위해 출생하는 남자아이의 학살 명령을 왕명으로 실행해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참혹한 비극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출애굽기 2장 23절에 보면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라고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어떤 결정을 내리시는가? “내가 내려가서 즉, 그들의 역사 현장에 내가 참여해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내가 이르게 하리라.” 해방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세밀한 관심과 구원을 위한 구체적 행동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계사에서 배운 대로 그 당시는 애굽이 세계에서 제일 강대국이었습니다. 또, 인류 3대문명의 발상지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환경에서 노예화된 소수 민족이 반기를 든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였을 것입니다. 또, 그들이 목표로 하는 가나안땅에 정착하기까지의 이동 경로는 사람이 살아가기에 가장 악조건의 기후와 여건을 가진 땅인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들의 행로 가운데는 그들의 이동을 막는 수많은 적들과 무시 못 할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은 기어코 그들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목적하신 대로 해방시키고 성취하시는 해방자 하나님의 모습이 출애굽 역사에서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환자들의 질병을 고쳐주실 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18년 동안 몸이 꼬부라져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보고 “안식일에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18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매여서 노예화 되어버린 하나님의 자녀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대로 회복시켜 자유를 주신 이것이 복음이요, 진리이지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예수님의 해방 운동은 끝없이 진행됩니다. 예수님은 죄가 크면서도 의인인 체하는 사람을 책망하셨고, 죄인이면서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해방을 주셨습니다. 로마서 6장 22절에 “이제는 너희가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었느니라.” 6장 18절에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이 죄에서 해방을 받았다는 것은 모든 구조 악에서 자유함을 얻었고 양심의 고통에서의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양심의 자유함을 얻는 것보다 더 좋은 행복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 인간을 인간되게 하시고 최대 행복을 주시기 위해 해방자로 일하신 분입니다. 온 세계가 예수의 정신으로 돌아갈 때 세계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사람이 무엇에 매여 노예화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려고 예수님은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날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생의 길을 물었을 때 그에게 선한 방향 제시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의 충고를 듣지 아니하고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했는데 그 청년을 보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초점은 무엇입니까? 지금 이 사람은 물질의 노예가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물질의 포로에서의 해방이 구원입니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물 길러온 여인과의 대화를 보면 그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가고 지금 또 다른 남편 아닌 사람과 살고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여인은 애정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남편 다섯을 집어치우고 또 다른 남편과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요, 누구도 누구를 포로로 잡아도 안 되고 잡혀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가 제일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의 포로가 되어 그것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아니하고 그 하나를 얻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어떤 사람은 출세의 포로가 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과 신앙은 어디로 갔든지 그 하나를 위해서 달려갑니다. 어떤 사람은 성공의 포로가 되어 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모든 인간을 비인간화 하는 모든 포로 행위에서 “네가 누군데? 본래 하나님의 형상이야.” 인간을 회복하는 운동이 예수의 해방운동이었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됨의 가치를 알게 하는 내가 누구냐?” 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기독교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란 예수의 복음을 삶의 기본으로 믿고 따르는 무리의 공동체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기독교도 때로는 종교의 포로가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많은 교회들이 인간을 교회 안에서 비인간화한 역사가 얼마든지 많았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거 아닙니까? 종교의 포로에서의 해방!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 된 사람을 보고 멸시를 퍼붓는 사람들이 종교의 포로자들이란 말입니다. 그 종교가 그렇게 가르쳤고 시각장애인 된 그 사람도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에 그런 자존심 상하는 말을 듣고도 아무 항변을 하지 못하고 멀쩡하게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흉악한 이념의 종교에서 예수님은 해방운동을 하셨습니다. “아니다. 죄 값이 아니다.” 그 구조적 악을 깨뜨려 버리고 “하나님의 역사가 그에게서 나타날 것이다.” 인간을 본래 인간의 모습으로 회복시키시는 예수의 해방운동인 것입니다. 만약 기독교가 유대교와 같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정죄하고 비인간화 했다면 예수님은 기독교와 싸우실 것입니다. 바리새화 되어져가는 기독교인들을 보고 “화 있을진저 기독교인들이여! 화 있을진저. 교회여!”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만약 우리나라의 힘이 강해서 강대국이 되었다고 합시다. 그때 우리 주변에 힘이 없는 나라를 인권 침해하고 침략해서 그 국민의 행복과 주권 침해를 한다면 기독교는 그때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힘을 다해 대한민국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독일의 고백교회입니다. 자기 나라의 히틀러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생명을 바쳐가면서 일을 했던 ‘본회퍼’라는 사람은 목사이면서 히틀러 암살단 조직의 리더로 항상 권총을 차고 히틀러 죽이기 운동에 앞장서서 행동하는 신학으로 나서지 않았습니까? 우리나라 교육계 인사들이 일본 교육계 방문했을 때 어느 시골 학교 교장이 “비밀을 하나 발표하겠습니다.”하면서 자기 학교의 비밀 지하실을 구경시켜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게 뭡니까?” “예, 이 자리에 일본 기독교인들이 모여서 밤낮으로 기도했습니다.” “기도제목은 뭐였습니까?” “일본 망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해마다 광복절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념하는 뜻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구조적인 악의 체제가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무너진 것에 대한 감격을 하나님의 뜻으로 고백하는 날입니다. 힘이 좀 강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힘이 약한 이웃을 도와주지 아니하고 고통스럽게 만들어버리고 연약한 형제의 고통을 밟고 내 행복을 더 만들려는 폭력 문화의 소멸을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소멸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뻐하는 것은 일본 국가의 망함이 아닙니다. 악의 세력의 소멸입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문제를 중국과 일본에서,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모두 항변했습니다. 왜 항변했습니까? “그러면 침략이 옳은 행위였다는 말이냐? 그러면 일본은 또 그 길을 가겠다고 하는 신호냐?” 그래서 항변하는 거 아닙니까? 국민적 포로에서의 자유함, 이것은 출애굽 사건입니다. “이제 너희는 돌아가서 네 집을 갖고 네 고향을 가지며 네 이름을 사용하고 복권된 땅의 자유함을 가나안 땅에서 누리라. 행복하게 살아라.” 이것이 하나님의 해방 운동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과거 일본이 잘못된 정치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아시아를 피로 물들였던 죄를, 21세기에는 바로 그 아시아를 위해 일하는 나라로 변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일본을 영원한 증오의 대상이라고 하는 복수 감정에서 자유함을 가져 이제는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피차 행복의 나라, 인간들이 살 수 있는 그러한 세계를 만들어가자고 하는 것이 우리 희망의 기도 제목이란 말입니다. 오늘 말씀 “나는 포로된 자를 자유케하고 눌린 자를 해방하기 위해서 왔노라.” 예수의 복음 선언이 우리들 자신과 국민과 인류를 복되게 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조상호목사 과거가 아닌 현재를 보십시오 눅04장 16절 ~ 22절

전에 ‘코끼리 길들이기’에 대해서 몇 번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원래 코끼리는 코로 1톤 정도의 무게도 손쉽게 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작은 말뚝에 달린 가느다란 줄이 매여 도망갈 줄 모르는 서커스단의 덩치 큰 코끼리를 보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덩치 큰 코끼리가 힘을 한 번만 쓰면 쑥 뽑힐 것 같고, 가느다란 줄이 쉽게 끊어질 것 같은데도 코끼리는 도망갈 생각을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아기 코끼리 때부터 그렇게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단단한 말뚝에 튼튼한 밧줄로 아기 코끼리를 묶어 둡니다. 그러면 아기 코끼리는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중에는 포기하고 맙니다. “나는 이렇게 말뚝에 줄을 매어 두면 꼼짝 할 수 없어. 몸부림쳐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 아예 가만히 있는 것이 좋아.” 점점 몸집이 커져서 얼마든지 자신의 힘으로 그런 말뚝쯤은 거뜬히 뽑아 버릴 수 있는데도, 코끼리는 달아날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힘으로는 말뚝을 뽑을 수 없다는 생각이 이미 머릿속에서 단단히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굳어버린 생각은 무섭습니다. 과거에 생각이 묶이면 자신의 능력을 올바로 발휘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 너무 집착하다보면 새로운 것을 보지 못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 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눈앞에 놓여있는 현재를 보지 못하고, 과거에만 집착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고향인 나사렛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처럼 회당에서 복음을 증거 하셨습니다. 그 때 나사렛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한 줄 아십니까? 본문 22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또 마태복음 13장 54절부터 56절을 보면, 그들의 반응이 좀 더 자세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예수님께서 증거 하시는 말씀을 들은 나사렛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라고 말할 정도로, 예수님의 탁월한 지혜에 감탄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고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야고보를 비롯한 형제들이 있고, 누나들도 우리가 잘 안다는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메시야로서 사역하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과거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목수의 아들로 보았습니다. 탁월한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을 보았다면 예수님을 보는 눈이 달라져야 하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이전에 가졌던 시각으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현재를 보지 못하고 과거만을 보았습니다.

 

과거만 보는 사람들

제가 2004년도 5월에 광주에서 있었던 순복음선교사 수련회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전주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금요일 오후에 수련회를 마치고 그 주 주일예배를 인도하기 전까지 시간이 있어서 친구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철야예배를 인도하기 위해서 전주를 방문했습니다. 저는 그 친구목사를 거의 10년 만에 만났고, 함께 예배를 드린 것은 17년만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저에 대해서 소개한 후, 제 순서가 되어 1시간 정도 말씀을 전하고 기도회를 인도했습니다. 모든 순서를 마친 후, 그 친구 서재에 들어갔더니 갑자기 앉자마자 오랜만에 고향 친구를 만나서 그런지 전라도 사투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야, 네가 상호가 맞기는 맞능교? 너 많이 변했다. 잉~” 1시간 동안 강단에서 말씀 전한 강사가 내려왔으면 무엇보다도 먼저 마실 것이라도 줘야 하는데 물을 줄 생각은 하지 않고 “얌전한 니가 순복음교회 목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는디, 니가 말씀 전하는 것을 보니 정말 순복음교회 목사가 분명하구먼. 너 정말 변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질문할까요? 사람이 변합니까? 변하지 않습니까? 사람은 변합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변합니다. 10년 전과 현재가 다르고, 5년 전과 현재가 다릅니다. 아니 1년 전과 현재가 다릅니다. 그런데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는데 제가 바뀌지 않겠습니까? 바뀌지 않으면 이상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사람에 대해 과거 자기가 알고 있던 그 사람으로 고정시켜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오랜만에 만나면 뭐라고 말합니까? ”중학교 다닐 때, 그 친구 공부 지독히도 못했는데...“ ”고등학교 때, 그 친구 지각대장이었는데...“ ”처음 뉴질랜드에 왔을 때, 영어 한 마디도 못했던 친군데...“ ”그 친구 젊었을 때 얼마나 여자친구를 잘 바꾸었는지, 별명이 연애대장이었는데...“ 우리 주위에 보면 변화된 오늘을 보지 못하고 지나간 과거만을 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난주 ‘홈컴밍데이’를 마친 오후 시에, 이슬비가 내림에도 불구하고 이웃에 있는 Linwood Highschool 운동장에서 중고등부 학생들과 청년들과 함께 오랜만에 축구를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축구를 하면서 놀란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평소에 운동을 하지 않아 헉헉되는 저와 달리, 중고등부 학생들은 날아다니는 것이었습니다. 똑같이 부딪혀도 힘이 딸리고, 똑같이 달려도 달리기가 늦다보니, 볼을 빼앗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 때 아이들이 1~2년 사이에 부쩍 성장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그 동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계속 성장하고 있는데, 저는 그 동안 아이들을 과거에 묶어 두었던 것입니다. 제 머리 속에 아이들에 대한 정보를 Up Date 시키지 않은 채, 과거의 모습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과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습니까? 나사렛 사람들처럼 눈앞에 있는 현실을 보지 못하고 지나간 과거만을 보는 사람들은 아닙니까?

 

어떤 교회에서 카펫을 깔게 되었는데 빨간색으로 깔아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녹색으로 까는 게 좋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위원회를 만들어서 토의를 하는데 ‘빨간색은 보혈을 상징한다, 성령의 색깔이다, 십자가의 색깔이다‘라고 말하며 카펫은 빨간색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녹색은 희망의 색깔이요 새로운 미래의 색깔이요 성장의 색깔이다‘라고 말하며 카펫은 녹색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싸움이 커져서 두 교회로 나뉘어 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빨간색으로 깔아야 된다는 사람들은 나가서 ’빨간 십자가 교회‘를 세웠고, 녹색으로 깔아야 된다는 사람들은 ’늘푸른 교회‘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만두 장사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속 터진다‘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만두전문점을 하시는 분이 안계시기 때문에 말씀드립니다만, 과거의 전통에만 매여 살아가는 사람은 ’정말 속 터지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과거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과거의 훌륭한 점들을 배워야 합니다. 선배들의 뛰어난 장점들을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과거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재와 미래입니다. 우리는 이미 지나간 과거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놓여있는 현재와 미래를 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과거를 날마다 묵상하며 후회할 것이 아니라, 언제나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과거를 기억할 것이 아니라, 현재의 변화된 모습을 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편견을 가진 사람들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 사람들은 현재의 모습보다 지나간 과거를 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5절을 보면 빌립이 메시야를 만난 이후 나다나엘에게 가서 ‘모세의 율법과 여러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된 메시야를 만났는데, 그 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시다’라고 하며 그에게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그 때 나다나엘이 뭐라고 대답한 줄 아십니까? 딱 한마디 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 이 말은 나사렛에서는 그 어떠한 선지자도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의 이 말은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맞는 말이었습니다. 나사렛 동네는 사면이 산으로 둘러쌓인 매우 작은 동네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지역과 교류가 활발하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깡촌 중의 깡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 사는 주민들은 무식하고 성질이 괴팍하여, 다른 도시의 주민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이런 동네에서 큰 인물이 나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지방의 사람들이 나사렛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사렛에 살고 있는 동네 사람들과 예수님의 가족들조차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 5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가까운 친척들조차 예수님이 메시야 이신 것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나사렛 깡촌에서 메시야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수의 아들은 절대로 메시야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들의 고향인 나사렛에서는 절대로 메시야가 나올 수 없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편견이 무섭습니다.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 그 편견대로 생각하고 편견대로 해석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학을 나왔으면 유식한 반면, 대학을 나오지 않았으면 무식하다는 학벌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학 나왔지만 머리에 든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대학은 나오지 않았지만 정말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도사람들이 잘 속인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아예 인도사람과의 거래를 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도 사람 중에는 정직한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세계에서 제일 믿을 만한 사람은 스위스사람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위스 사람 중에도 사기꾼은 엄연히 존재합니다. 영국 사람이라고 모두 신사가 아니고, 독일 사람이라고 모두 다 부지런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통계에 따라 어느 정도까지 들어맞는 경우가 많지만, 그러나 상대방의 진짜 모습을 확인하기도 전에 상대방에 대한 선입견에 사로잡히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자기 동네에서는 어떤 선지자도 나올 수 없다는 편견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자기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함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역사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예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24~27절). 과거 엘리야 시대에 삼년 육개월 동안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특별히 남편이 없는 과부들은 너무나 어려워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엘리야 선지자는 가뭄에 고생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많은 과부들을 남겨두고, 시돈에 있는 작은 마을 사렙다에 사는 이방인 과부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기적을 일으켜 흉년이 끝날 때까지 먹을 수 있는 양식을 공급해주었습니다. 또 선지자 엘리사 때, 이스라엘에는 많은 문둥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한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만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엘리야와 엘리사 같은 선지자도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하고 다른 지역에서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예를 들면서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시자,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다같이 28절과 29절을 보겠습니다.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편견의 무서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 상대방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편견은 사람을 미워하게 만듭니다. 편견은 돌을 던지게 하고, 심하면 살인까지 저지르게 만듭니다. 우리가 편견 속에 살아가다보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의용 씨는 ‘세상 보기’라는 글에서 "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이란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라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안경을 쓴 사람에게 "왜 안경을 썼습니까?"라고 물으면, 대개 뭐라고 대답하는 줄 아십니까? "안 보여서 썼습니다."고 대답을 합니다. 이 자리에 있는 안경 쓰신 들도 대부분 그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틀린 대답입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잘 보려고 썼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안경을 쓴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안보여서 썼다’는 말과 ‘잘 보려고 썼다’는 말은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안보여서 썼다’는 말은 부정적인 관점에서 대답한 말인 반면, ‘잘 보려고 썼다’는 말은 긍정적인 관점에서 대답한 말입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앞집에 사는 한 학생이 성적표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모든 과목이 ‘수’였고, 음악만 ‘미’를 맞았습니다. 엄마에게 성적표를 보여주자, 엄마는 ”야, 음악점수가 왜 이러니? 어덯게 음악점수를 미 받을 수 있니?“라고 야단을 쳤습니다. 같은 날 뒷집에 사는 다른 학생도 성적표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성적표를 보니까 모든 과목이 다 ‘가’이고, 유일하게 음악만 ‘미’를 받았습니다. 성적표를 한참 동안 보고 있던 엄마가 한 마디 했습니다. ”얘야! 너무 한 과목만 집중적으로 공부하지 말거라.....“ 앞집에 사는 엄마는 그 많은 ‘수’는 보이지 않고, 단 한 개의 ‘미’만 보았습니다. 이 엄마는 한쪽 면만을 보는 편견을 가진 엄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편견을 가진 사람들은 아닙니까? 전체를 보지 못하고 한쪽만을 보는 사람들은 아닙니까? 깊은 내면을 보지 못하고 겉모습만 보는 사람들은 아닙니까? 저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편견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편견을 가지고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던 나사렛 사람들과 같은 분들이 이 자리에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물론 편견을 갖지 않고 산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모든 편견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편견을 줄이려고 노력할 수는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한 번 익숙해진 습관을 바꾸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여러분, 양팔을 어깨 높이로 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양손을 맞잡고 깍지를 끼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엄지가 위로 올라옵니까? 이번에는 반대로 해보시기 바랍니다. 아까 위로 올라온 엄지가 아닌 다른 엄지가 위로 오도록 손깍지를 끼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습니까? 매우 어색하고 불편할 것입니다. 이처럼 한번 익숙해진 습관은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운전을 처음 배울 때부터 과속을 한다든지, 끼어들기를 한다든지, 크락션을 눌러대는 것을 예사로 여기며 배운 운전습관은 익숙해진 후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잘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습관이라면,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날마다 조금씩 조금씩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며 우리에게 익숙한 습관을 바꿀 수 있습니다.

 

사단은 오늘도 우리를 과거의 사슬에, 편견의 사슬에 붙들어 매려고 합니다. 사단은 나를 실망시킨 사람을 보면, 나에게 돌을 던진 사람을 보면, 나에 대해서 이상한 말을 하고 다닌 사람을 보면, 섭섭한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세상에서 못된 짓을 하던 사람이 예수 믿고 구원받아 새 사람이 되었지만, 사단은 여전히 그 사람의 복잡한 과거를 생각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는 다른 사람들의 과거의 모든 정보와 나의 과거의 모든 정보가 새롭게 바뀌어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다른 사람의 과거를 기억할 것이 아니라, 현재의 변화된 모습을 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로마서를 읽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놀라운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놀라운 진리를 깨닫고 난 후에도 죄책감이 망령처럼 그의 마음을 괴롭혔습니다. 어느 날 말씀을 묵상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꿈 속에서 사단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루터가 그 동안 지었던 죄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죄를 조목조목 쓰면서 ”네가 이러고도 용서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니?"라고 계속 죄를 열거했습니다. 이 때 루터의 마음 속에 요한일서 1장 7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자유케 하실 것이오." 그가 이 말씀을 크게 외치자, 그 동안 자기를 번민케 하던 사단이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잠에서 꺠어났습니다. 루터는 그 날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이제 꺠끗함을 느낀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피로 죄 용섬함 받았다면 더 이상 더러운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이 된 줄로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죄 수렁에서 헤매던 내 모습을 기억할 것이 아니라, 새롭게 변화된 현재의 모습을 보고 미래를 향하여 힘차게 전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문기태목사 예수 믿으면 자유롭게 됩니다. 눅04장 18절 ~ 절

 

호주 시드니의 교도소에 수감된 한 죄수가 탈옥을 꿈꿨습니다. 그는 빵 배달 차가 일정한 시간에 교도소에 오는 것을 눈여겨봤습니다. 그리고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은밀히 그 차 안에 숨어들었습니다. 차 안은 산소가 부족해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해 온몸이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됐습니다. 그러나 그는 얼마 후면 펼쳐질 자유로운 삶을 상상하며 고통을 꾹 참아냈습니다.

 

얼마 동안 달리던 차가 이윽고 멈추었습니다. 그는 주위를 살핀 후 차에서 내렸습니다. '이제는 어떤 구속도 없는 행복하고 자유스런 삶을 살리라.' 그러나 배달 차가 도착한 곳은 다른 교도소 구내였습니다. 그는 곧바로 붙잡혀 다시 감옥으로 보내졌습니다. 그가 자유를 소망하며 탈출한 곳은 결국 또 다른 감옥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한 채 아무리 발버둥쳐도 감옥에서 또 다른 감옥으로 탈출하는 어리석은 죄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죄의 감옥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 비로소 자유를 얻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해방시키기를 원하시며 진정으로 자유롭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노예가 아니라 아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처음부터 자유인으로 창조하시었습니다. 우리에게 소중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가 틈만 보이면 죄를 짓게 하고 우리 안에 들어와 주인 노릇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마귀 사단에게 속아 죄를 짓고 악한 영에게 붙잡혀 눌리고 속박당하고 자유를 잃어 버린 채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와 율법에서 해방되었고 하나님을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직 한 분, 우리를 정죄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진정 자유롭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예수님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악한 영의 모든 눌림과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와 평안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두려움과 불안함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 안으로 옮겨질 때 어떤 자유가 주어집니까?

 

1. 포로 됨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섯 가지 복을 주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 다스리고 정복하라. 그런데 사람이 사단에게 속아 하나님께 죄를 짓고 쫓겨나면서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마귀, 사단에게 다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사단의 포로가 되어 끌려 다니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술의 포로가 되어 하루도 술이 없이는 살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도박의 포로가 되어서 도박을 하지 않고는 하루도 못 견딥니다. 어떤 사람은 마약에 포로가 되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음란의 포로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물욕에 포로 된 자, 도벽의 포로가 된 자, 쇼핑중독자, 게임 중독자, 일중독자 수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무언가의 포로가 되어 공중 권세 잡은 마귀의 조종을 받으며 끌려 다니고 있습니다.

 

자신도 그것이 얼마나 자신을 망가뜨리고 있는지 깨닫고 있으나 어쩌지 못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나 보려고 안간 힘을 쓰지만 자기의 의지로 결코 벗어나지 못합니다. 포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포로는 싫으나 좋으나 자신을 포로로 잡은 자에게 끌려 다닐 수 밖에 없습니다. 포로는 자유가 없습니다. 얽매여 있어서 마음대로 못하고 쩔쩔매며 종 노릇합니다. 포로가 되면 비참하고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도 수 많은 사람이 포로가 되어 자유를 잃고 불행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자신이 보이지 않는 존재에 붙잡혀 포로가 된 사실 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왜 자신이 불행한지도 모르고 비참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이 임하면 자유롭게 됩니다. 예수님이 그 안에 들어가시면 그를 자유롭게 해 주십니다. 그를 사로잡아 꼼짝 못하게 만들고 주장하던 것들이 다 떠나갑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자유롭게 될 뿐 아니라 잃어버린 복을 예수님께서 회복시켜 주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며 다스리고 정복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을 자유롭게 살도록 만드셨고 우리들에게 자유를 누리며 살도록 에덴 동산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자유를 누리며 살 때만이 행복이 있고, 삶의 풍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그 자유를 잃어버리고 죄의 종이 되었고 자기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는 완전히 타락한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오늘도 사단은 죄를 통하여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미움, 원망, 의심, 불의, 음란, 탐욕, 우상숭배 등 온갖 죄에 빠지게 하고 그 틈을 이용해서 우리를 포로로 잡아 자유를 빼앗아 버립니다. 여러분, 죄가 여러분을 사로잡지 못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죄의 포로가 되면 여러분의 소중한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자유를 잃으면 축복도 잃습니다. 평생 종 노릇하며 원치 않는 것에 시달리며 불행하게 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포로 됨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마귀 사단의 세력과 싸워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포로로 사로 잡힌 데서 구출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죄의 권세에서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믿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는 자유의 회복입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자유인으로 회복되었다는 말입니다. 포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될 때 참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안으로 옮겨져 자유롭게 되고 평안을 누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독교는 구원을 자유와 해방으로 설명합니다. 자유는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며 최고의 은총입니다.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 이 진리라고 하는 것은 복음인데 이 복음을 알면 자유인이 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려면 예수님의 말씀에 거해야 합니다. 새 번역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그 말씀을 따라 살 때 자유롭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여러분 안에 충만하게 하여 믿음이 충만해지고 예수님이 주신 자유를 풍성히 누리며 자유롭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2. 눌림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무언가에 눌려 살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마귀에게 사로잡혀 눌려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각색 질병에 눌려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국가적 사회적인 제도와 차별로 눌려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눌린 자의 결박을 풀어 자유롭게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행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현대인중에는 심적으로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스트레스는 사람들로 쉽게 지치게 하고 피곤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스트레스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소한 일에 짜증스런 반응이 나오도록 만듭니다. 스트레스는 사람들에게 심각한 질병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심장병, 위장병, 불면증, 각종 암을 유발시키는 발병원인이 되는 수가 많습니다. 스트레스는 기억력을 둔화시키며 판단력을 흐리게 하기도 하고 우리로 불안하고 두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의 행복을 송두리 채 앗아가는 정신적으로 나쁜 바이러스 같은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이런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신경안정제를 처방 받아 먹습니다. 각종 레져 활동 또는 문화활동을 합니다. 여행이나 인터넷 등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 모든 것은 유익함이 많이 있고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는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만으로 사람들은 스트레스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온갖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안식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오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 있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예수님은 스트레스로 인하여 눌리고 고통스러워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확신을 가지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참된 안식을 주고 지치고 병든 너희를 온전히 치유하겠다."라고 말입니다.

 

오늘날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우울증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우울증은 심각하고 무서운 병입니다. 멀쩡하던 사람을 망가뜨리고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불행하게 만듭니다. 살 의욕까지 빼앗아 갑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극복해보려고 병원도 다니고 약도 먹고 온갖 노력을 하지만 쉽게 극복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점점 심해져서 너무너무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심한 우울증으로 고통을 많이 겪으며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던 분들 중에서 예수 믿고 깨끗이 치유된 분들이 우리 교회에 많습니다. 약을 너무 많이 먹어서 위가 손상되어 약도 먹을 수 없고 상태가 너무 심해 문밖으로도 나오지 못하고 집안에서 겨우 지내던 분이 예수를 믿고 기도하니까 점차 좋아지더니 온전해져서 목자가 되어 사명을 잘 감당하는 분도 있습니다. 두려움에 벌벌 떨며 하얗게 질려서 정신을 못 차리고 쩔쩔 매던 분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바라보기 시작하니까 두렵게 위협하던 것들이 다 사라지고 아주 건강해서 생활을 잘 하고 있습니다.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로 인해 하루하루가 지옥과 같은 생활을 하던 분이 예수님을 믿고 성경 말씀을 암송하며 살게 되니 두통도 사라지고 불면증도 치유되고 온전해졌습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 이런 간증이 아주 많습니다.

 

여러분을 자유롭지 못하도록 짓누르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질병입니까? 악한 영입니까? 염려와 근심입니까? 두려움입니까? 우울증입니까? 그것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짓누르고 괴롭히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고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함으로 여러분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울증에 붙잡힌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루 종일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묵상하는 대신 다른 것들을 바라보고 묵상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하루 종일 질병을 바라보고 묵상합니다. 어떤 분은 하루 종일 염려와 두려움을 바라보고 묵상합니다. 어떤 분은 하루 종일 죄와 심판을 바라보고 묵상합니다. 어떤 분은 하루 종일 상처와 상처를 입힌 사람을 바라보고 묵상합니다. 그러면 악한 영에 속습니다. 여러분이 결국 그런 것들에 삼키어지고 하나님께 받은 복과 은혜를 빼앗깁니다. 사단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든지 이제 더 이상 그것에 붙잡혀 있지도 말고 그것을 두려워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끝까지 책임지시는 예수님께 다 맡겨드리기 바랍니다.

 

코카콜라 창업자인 아사 D. 캔들러라고 하는 사람은 본래 알코올중독자였습니다. 술에 중독이 되어서 술을 안 먹으면 살 수 없고 술을 먹으면 정신이 들지 않았습니다. 알코올 중독자 수용소에 끌려가서 오랫동안 여러 차례 고생을 했건 만 술에 대한 욕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그렇게 비참하게 살아갔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서부터 들려오는 강한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내 자신의 본능적 욕구를 거절하는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다. 속에서 올라오는 이 악한 욕구, 이 욕망을 거절해야만 내가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캔들러는 깊이 깨닫고 집에 돌아가 아내의 손을 잡고 자기가 깨달은 바를 고백하고 같이 울며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합니다. 자유인으로 시작합니다. 술의 노예가 되었던 사람이 이제는 자유인으로 그 양심도 그 영혼도 모든 악한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자유인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바치면서 코카콜라라고 하는 큰 기업을 이루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습니까? 예수님만이 여러분을 포로 됨에서 자유롭게 하십니다. 예수님만이 여러분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죄의 권세에서 자유롭게 하십니다. 예수님만이 여러분을 누르고 있는 악한 권세에서 여러분을 해방시켜주고 자유를 안겨주십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님을 믿고 자유를 되찾고 평안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여러분 안에 가득하게 하여 눌림에서 벗어나 날마다 예수님만 바라보며 기쁨을 되찾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경직목사 기독교와 자유 눅04장 18절 ~ 19절

 

오늘은 주님의 성일인 동시에 민족으로서 잊을 수 없는 八월 十五일입니다.

첫째로, 오늘은 해방 기념일입니다. 우리 민족이 四十년 간 일본 제국주의 아래서 압박을 받다가 해방되어 우리가 자유를 얻은 날입니다.

둘째로 기억할 것은, 우리가 받은 이 해방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조금이라도 과거의 애국 지사들과 독립 운동을 한 여러 동포들의 노력을 과소 평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인류의 역사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옛날 유대인이 바벨론에 잡혀갔다가 파사가 근동 일대를 다스릴 때에 돌아오듯이 연합국의 승리로 말미암아 일본의 패전으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의 자유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크신 은혜로 자유를 주셨지만, 속담의「호사다마」(好事多魔)로 공산당들의 야욕으로 말미암아 아직까지 북한 동포는 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또 국토 양단과 민족 분열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은 과거 수 년 간 말할 수 없이 비참한 길을 걸어왔고 결국은 六·二五사변이라는 참절(慘絶)한 민족적 비극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날을 당해서 깨들을 바도 있고 결심한 바도 있는 줄 압니다만, 제일 먼저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깊이 깨달아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우리가 八·一五 그 날 얻었던 그 감격과 민족 양심으로 다시 돌아가야 되겠습니다. 그 동안 너무도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이 날의 감격과 민족적 양심을 잃어버린 현상이 너무도 많습니다.

다음은 우리가 특별히 이 날 남북의 통일과 실지(失地)의 회복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또 이를 위해서 우리 민족의 전 정력을 모아서 노력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때가 이른 것입니다. 인간적 견지에서 우리의 노력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럴수록 만능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낙심하지 말고 간절히 기도와 노력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 날 우리는 이렇게 남한에서라도 귀한 자유를 향유하였으매 이 남한에 세워진 대한민국을 관민(官民)이 일치 협력해서 과연 문자 그대로 자유를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 국가가 될 수 있도록 또 이러한 나라를 발전시키고 육성하기 위해서 새로운 결심과 각오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날을 당해서 이 날의 의의(意義)와 이 날의 결심을 생각하면서 또한 주님의 교훈을 더듬어 오늘 우리의 은혜로 삼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 나가서 四十일 주야로 기도하시며 모든 악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고 성신의 충만하심을 입어서, 누가복음에 의하면 크신 능력으로 먼저 자기가 자란 갈릴리 나사렛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안식일을 당하여 예수 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시매 그의 앞에 성경을 들었습니다. 예수 님께서 성경을 받으시고 이사야 六十一장 一-二절과 누가복음 四장 十八-十九절에 있는 말씀을 읽었습니다.『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 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하며, 눌린 자를 다시 자유롭게 하며, 주의 영광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글이 오늘날 너희에게 응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자기가 역사를 시작하실 때에 이사야 六十一장에 있는 말씀을 읽은 까닭은 이 말씀 가운데서 자기의 사명을 발견하셨고 이 말씀이 자기에게 와서 응한 것을 깨달으시고 이 말을 통하여 장차 자기가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선포하시려 함인 것입니다.

포로 된 자를 자유롭게 하시고, 눈먼 자를 보게 하시고, 눌림을 받은 사람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님께서 세 살에 오신 것은 사로잡힌 자들을 해방하고, 눌린 자를 해방해서 그 얽매인 쇠사슬을 풀고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대에 그 형상대로 지으시고 사람에게는 양심을 주시고 한 걸음 더 나가서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죄를 범한 후에는 그 성품이 부패해지고 여러 가지 죄악의 결과로 말미암아 본래 받은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심령의 자유를 아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심령의 자유를 잃어버린 결과 모든 다른 방면의 자유도 결국 잃게 되었습니다. 얽매이는 죄악의 결과로 말미암아 정치적 방면, 경제적 방면, 사회적, 문화적인 모든 다른 방면에까지 인생이 얽매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눈을 들어 세계의 정세를 살펴보십시오, 아직 정치적 견지에서 볼 때에도 악한 독재자의 정치 하에 노에 생활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거의 세계의 절반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자유 세계에서 산다고 하는 사람 가운데도 그의 내적 생활과 그의 심적 상태를 보면, 죄악의 쇠사슬에 얽매인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 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 님께서 주시는 자유는 모든 자유의 근본이 되는 자유입니다. 사람의 심령을 얽매는 모든 죄악의 쇠사슬을 풀어서 그 심령 속에 자유를 주십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도 그런 자유를 주셨습니다. 삭개오에게도 그런 자유를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그런 자유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의 생활을 보면, 사실 옥에 갇힌 대가 많습니다. 로마 감옥에 갇혀 있던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유인이었습니다. 로마 감옥이 사도 바울을 얽매지 못했습니다. 그 심령은 자유의 혼이올시다. 그 때 로마 제위(帝位)에는 네로라는 청년이 황제로 앉아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그야말로 세계에 가장 방대했던 로마 제국의 모든 정권과 백만의 대군을 한 속에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네로의 생활을 보면 그는 종이었습니다. 죄악의 종이었습니다. 악한 성품의 종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감정의 종이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에게 주시는 자유는 무엇보다 먼저 사람으로 하여금 근본 속을 부 자유롭게 하는 죄악의 아성을 깨뜨리고 나올 수 있는 심령의 자유인 것입니다. 이 심령의 자유를 얻은 사람은 세계의 어떠한 부자유한 환경에 있을지라도 그 영혼을 구원할 다른 세력은 천하에 없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먼저 정신적 자유를 주시고 이 자유를 통해서 다른 여러 가지 죄악에 얽매인 쇠사슬을 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면, 유대 사람들에게는 예수 님 당시의 율법이라는 것이 큰 구속의 세력이었습니다. 율법은 본래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유대인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죄로 말미암아 여러 지도자들의 편견(偏見)과 그런 사람을 통해 들어온 전통과 해석으로 말미암아 예수 님 당시에는 율법이 유대인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보다도 여러 가지 영적 자유를 구속했습니다. 안식일의 모든 규례를 보아도 그렇고, 예배 시의 모든 규례를 보아도 그렇고, 손발을 씻는 규례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님께서 복음으로써 구원을 얻어서 생명을 구원하신 다음에는 번다한 율법의 구속에서 해방하였습니다.

모든 율법은 그리스도에게 와서 다 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도 율법 가운데 도덕적인 방면을 지키지만, 이것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리, 구원받은 우리가 감사한 마음으로 그 율법을 기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 님은 세상에 계실 때 흔히 죄악의 결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사귀 들린 사람을 혹은 병 가운데 사로잡힌 사람들을 권능으로 고쳐주어서 모든 병과 사귀의 세력 가운데서 해방해 주었습니다. 그것 역시 심령의 자유를 얻은 후에 자유인에게 오는 결과로 이와 같이 나타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보면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죄악의 결과로 인생을 구속하는 모든 쇠사슬이 하나씩 하나씩 끊어진 것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가는 곳마다 여러 가지 사교(邪敎)와 미신에 얽매인 쇠사슬에서 인간들을 해방해 주었습니다. 여러 가지 사교는 여러 가지로 사람을 얽매는 것입니다. 구속합니다.

 

지금까지 인도(印度)의 三억 대중이 얽매여 있는 힌두교를 생각해 보세요. 사람을 四대 계급으로 나눕니다. 그 계급 사이에는 천양지차가 있습니다. 인도인의 어떤 사람은 四대 계급에 들어갈 수 없는, 소위 만지지도 못하는 불촉(不觸)계급까지 있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아직까지 그 계급에 종노릇합니다. 인도 대중 가운데 예수를 믿는 三백만 기독교도만이 그 계급의 사슬을 푼 것입니다. 또한 여러 가지 미신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있던 여러 가지 미신을 생각해 보세요. 미신 때문에 어떤 여행할 날을 자유로 작정할 수 없고, 미신 때문에 잔치할 날도 자유로 정할 수 없고, 어디로 마음대로 가지도 못하게 여러 가지로 미신이 사람의 자유를 구속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는 사람마다 이 미신의 쇠사슬에서 벗어났습니다.

인도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통해서 역사를 통해서 기독교 복음이 가는 곳마다 사교와 미신의 쇠사슬에서 인간을 해방했습니다. 또한 기독교 복음이 가는 곳마다 문화적으로 큰 해방이 있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세계의 많은 사람이 무지(無知)와 미개(未開)와 문명(文明)의 쇠사슬에 걸려 있습니다. 알지 못해서, 무식해서 여러 가지 얽매이지 않을 곳에 얽매이었습니다.

한국도 역시 그랬습니다. 우리가 기독교 복음이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다른 공헌은 말할 억 없이 학교와 문화 기관을 통해서 한국을 문화적으로 해방한 모든 사실을 볼 때에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한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 한글을 대중에게 보급한 공헌만 해도 우리 문화사상(史上) 잊지 못할 금자탑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어느 곳에나 기독교 복음이 가는 곳마다 자유를 얻고 또한 기독교 복음이 가는 곳마다 사회적 해방이 있었습니다. 죄악의 역사 가운데 하나는 사회적으로 일생을 구속한 것입니다. 지나간 세기까지 노예 제도가 있었습니다. 사람을 종으로 부렸습니다. 상전은 노예의 생명을 좌우하는 절대 권리를 가졌습니다. 이와 같은 노예 제도는 결국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복음 그대로 성취하겠다는 지도자들로 말미암아 완전히 온 세계에서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자유를 얻었습니다.

 

여러 세기 동안 어떤 나라를 물론하고 사회적으로 여자를 구속했습니다. 여자는 차별했습니다. 여자의 외출은 특히 금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근동(近東)지방에서는 여자가 외출할 때에 얼굴을 가립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결국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리라는 사상 가운데서 남녀의 동등을 주장하게 되었고 오늘날은 정치 방면으로나 각 방면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된 것입니다. 결국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여자에게 맨 사슬을 끊어서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또한 정치적으로 볼 때 더욱 현저합니다. 죄악이 인간 사회에 한 번 들어온 후부터 정치 제도라는 것은 거의 세력 가진 사람의 농락 물이 되어서 옛날이나 오늘이나 세력 가진 폭군들 혹은 독재자들이 국민을 압박하고 사유를 많이 구속했습니다.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우익 독재자들이 믿는 사람을 구속하고 압박했습니다. 오늘날은 좌익 독재자들인 말렌코프나 모택동이나 김일성 같은 자들이 국민을 압박하고 자유를 구속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역사를 보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사람의 생명은 존귀하고 사람은 평등이며 사람은 자유가 있는 것을 밝히 알게 되었고, 이 기본 인권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서 아무도 빼앗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임금이나 어떤 정부라도 이 자유를 빼앗을 수 없다고 하는 민주주의 정치 사상과 민주주의 정치 제도가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민주주의 진영에게 결국은 우익 독재자들이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오래지 않아서 민주주의 진영, 자유 진영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죄악 독재자들이 멸망할 날도 멀지 않은 줄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는 한, 어떠한 정치적 세력이라도 인간을 영원히 압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결국 정치적으로 인간에게 자유를 주어 해방하고야 맙니다.

경제적으로도 역시 기독교가 인간에게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농촌 운동을 통한다든 가, 혹은 노동법안을 제정해서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고, 토지법안을 제정해서 모든 농민들의 권리를 옹호해주고, 여러 가지 조합 제도와 보험 제도를 두어서 일반적으로 보호를 받게 하는 이른바 복지국가 제도를 선진 기독교 국가에서 실행해서 기독교 진리가 오래 확보되고 기독교 정신에 의지해서 사회 제도가 수립된 나라일수록 기본적으로 그 경제 생활이 비교적 균등한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은 피 흘리는 일없이, 사람을 숙청하는 일없이 정당한 민주주의 제도와 그 자유를 통해서 결국은 온전히 전 인류를 빈궁에서 해방할 날도 멀지 않은 줄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러 오셨습니다. 먼저 죄악의 쇠사슬을 끊어서 우리의 심령이 자유를 주시고, 그 다음에 죄악의 여파로 말미암아 오는 모든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쇠사슬을 끊어서 우리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를 부여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후서 三장 十七절에『주는 신이시니 주의 신이 있는 곳에 자유 함이 있느니라.』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주의 신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인간에게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오한복음 八장 三十二절에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너희가 내 길에 항상 있으면 너희가 참 내 제자가 될 것이요, 또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놓아주리라.』주님의 진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인간은 해방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갈라디아서 五장 一절에『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이렇게 자유 함을 주어 자유 하게 하셨으니 그런고로 너희들은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죄의 멍에를 메지 맙시다! 다시 사회적으로 죄의 멍에를 메지 맙시다! 다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죄의 멍에를 메지 맙시다!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으로 그리스도께서 해방하여 주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