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내가 아니요
(갈2:15~21)
1985.7.14
오승태
정리: 이옥기
갈2:15~21은 불과 7절밖에 안 되는 짤막한 말씀입니다만 그 말씀이 지닌 내용이나 정신에 있어서는 구원의 원리를 체계적으로 잘 논술한 롬1:18~8:39(성경 중에 성경, 복음 중에 복음으로 일컬음을 받음) 부분에 해당되는 말씀으로 여김을 받고 있습니다.
로마서가 신앙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하나하나 전개한 데 비하여 금일의 본문은 동일(同一)한 신앙의 진리를 단도직입(單刀直入)적인 체험을, 그 체험자체로 생생하게 밝혀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은 성경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곳의 하나로 여김을 받습니다. 벵겔은 오늘 봉독한 말씀 중에서도 19절 이하를 “기독교 신앙의 정수(精髓)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본문을 바로 이해한다는 것은 성경전체를 이해한다는 것이 되며, 따라서 기독교를 바로 이해한다는 것이 되겠습니다.
이 중에서 오늘은 특히 20절을 중심으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라는 제목으로 주시는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이를 위하여 15~19까지를 부연하며 다시 봉독하겠습니다.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본래 우리(나=바울)는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이요, 율법을 받은 백성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바로 살 수 있는 유대인입니다. 율법도 없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이방 출신의 죄인이 아닙니다.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나는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하여 살펴볼 때,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의식(儀式), 도덕률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롬3:20). 이를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면 성경말씀에 의거하여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윤리적인 삶을 살지라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16절의 핵심입니다.
이 16절에는 “율법의 행위로는 안 된다”는 것이 3번 나옵니다(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 이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도 3번 나옵니다(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양쪽이 대조되어 3번씩 강조하면서 나오는데, 3은 하늘의 숫자로 완전을 뜻합니다. 강조 또 강조한 말씀입니다. 결국 기독교가 말하는 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여기는 쉬운 대목이 아닙니다. 여러 설 중에서 대표적인 것 하나를 소개하면 “만일 바울이 주장하는 것같이 율법과는 별도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다가 율법을 범하여 죄인으로 드러나면”이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이 바탕에는 그 당시 유대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율법주의 위에 선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되지만 율법도 행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바울에게 동조하는 사람들이 율법으로는 안 된다고 하니, 율법을 무시하여 죄인이 되었다면, 결국 그리스도는 죄를 짓게 하는 자가 아니냐? 라고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 반박한 것입니다.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만일 내가 이러한 자들에 둘러싸여 율법의 행위 쪽으로 역행(逆行)하면, 내가나를 신앙의 의(義)를 본질적으로 파괴하는 범법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나는 율법으로는 죽을 수밖에 없으므로(롬1:18~3:20),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살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이 대목에서 “많은 장비를 갖추고 난코스의 산을 오르다가 절벽에 부딪친 사람이, 자기가 가진 많은 장비로도 포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내려와서는 모든 장비를 버리고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 이것이 신앙의 길이다”라고 표현한 분도 있습니다.
이제는 오늘의 본문 20절을 보겠습니다.
이치가 이러하니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어떤 분은 이 한절에 “신앙상의 3가지 큰 사실(事實)”이 포함되어있다고 합니다.
첫째“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生涯)는 사실 그리스도의 생애(生涯)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그리스도가 죽으셨을 때 이미 죽은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성령의 세례를 받고, 이를 표명할 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자가 됨과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 되었으므로 “과거(過去)의 사실”이 되겠습니다. 이 위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시작되는 근본의 사실이 됩니다.
둘째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자의 생(生)은 곧 그리스도의 생(生)이기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신자 속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영으로 들어오셔서 사시게 되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실지 그렇게 죽고 살았습니까? 여기에 우리들의 문제가 있습니다. 원리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완전한 실현은 부활의 그 아침 하나님께 있는 우리의 참 생명과 부활의 몸을 받았을 때입니다(골3:3~4). 그러므로 이는 “미래(未來)의 사실”이요, “이상적(理想的) 사실”입니다.
셋째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입니다.
첫째와 둘째 이 양자 곧 이미 죽은 것과 사는 것의 중간을 걷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이요, 이것이 현재(現在) 우리의 현실(現實)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사실이 되겠습니다.
원리적으로 나는 이미 죽은 자이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서 나의 주인이 되어 나를 움직이시는데, 현재로는 아직 그렇지 못합니다. 아직 완전히 죽지 못했고, 아직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점령(占領)된 삶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처지에서 내가 지금 할 일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현재 죽음과 진정한 삶이 이루어지는 중간적 존재 안에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아직 나의 구원이 완성되지 않는 도상(途上)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의 나는 완성을 대망(待望)하며 신앙으로 삽니다. 살게 됩니다.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신앙을 가지고 살면, 이상적으로 보이던 그 구원이 순간순간 영원한 현재적으로 재 수립(再 樹立)되면서 걷다가 마침내 부활의 아침 하나님으로부터 나의 몸과 나의 참 생명을 받아서 실질적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애(生涯)입니다.
여기서 오늘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의 완전한 실현은 부활의 아침입니다. 그러나 도상(途上)에 있는 우리는 신앙 위에서 “이제는 내가 아니요”라는 이러한 바탕 위에 서야 합니다. 이 말씀에는 천금의 무게가 있습니다.
내가, 나는, 나의, 나에게, 나를 등 결국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것이 생래의 인간이며 구원받지 못한 나, 우리가 됩니다. 이러한 자는 영원한 멸망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오늘 여기서 말하는 율법주의 자입니다. 율법주의자란 내가 행하였으니, 그 대가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율법주의는 다릅니다.
밖으로 표명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의 이름으로, 또한 성경말씀, 경건의 모습, 자선(慈善), 정의의 이름, 교회의 이름으로 나온다고 할지라도 그 바탕에 내가, 나는, 나의, 나에게, 나를 등 내가 중심이 되고 있는 한 하나님 앞에서는 구원받지 못한 나, 우리가 됩니다.
쉬운 보기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집이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나의 교회, 내가 하는 교회가 되어, 그것이 목표가 되면 기독교가 아닌 교회교가 되어버립니다. 교회를 유지하기 위하여는 뭐든지 이용합니다. 어떤 큰 교회가 교회당을 짓는데 자금이 모자라 한 사람당 얼마씩 받고 몇 십 명의 장로를 세웠다는 것은 모두다 아는 사실입니다. 성경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까? 예수를 안 믿는 일반인의 상식으로도 할 수 없다고 할 것인데, 왜 그렇게 합니까? 교회가 목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예를 든 것입니다.
교회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되어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앙이란 나를 극복(克服)하는 것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다고 하는,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다고 하는 내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렇게 될 때 진정한 “나”가 탄생되고 확립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역사(役使)입니다. 신앙이란 이 생래의 내가 죽는 것, 없어지는 것, 극복(克服)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신앙의 원리적인 면을 말씀 드렸습니다만 나머지 시간은 구체적인 것으로 적용하여 보겠습니다.
16절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원문에는 “pi,stewj VIhsou/ Cristou/(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되어있습니다. pi,stewj(신앙)은 진실이란 뜻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번역도
①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眞實)
②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신앙(주격적 소유격)
③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목적격적 소유격)
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우리의 성경은 ③번을 취하였으며 많은 성경이 그러하며, 이는 옳은 번역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 안에는 ① ②의 뜻이 포함되어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특히 ①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다는 주해자들도 많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하나님의 진실(眞實)이 나타나있습니다. 이 진실에 접하면, 율법주의 자들이 행위로 말미암아 존경을 받고 있는 외면상(外面上)의 진실은 사실 진실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에 접하면 폭로(暴露)가 됩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진실(眞實)은 십자가에서 완벽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에 바로 접하기만 하면 하나님 앞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 우리 자신, 생래의 나, 나 자신이 가지고 있던 불 진실(不 眞實), 거짓이 폭로(暴露)되며,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내가 없어져야 한다.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이 십자가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만,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과 내가 결합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거짓의 “나”는 죽고, 영의 역사에 의하여 그리스도와 결합 된 참 “나”가 탄생됩니다.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여 보면
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데서 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注目)하는 것입니다(갈3:1).
②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데서 옵니다(갈3:2).
① 우리의 신앙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데서 옵니다.
모든 인간은 살아가면서 언제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책을 읽든가, 극(劇)을 보든가 하면서도 항상 직접, 간접으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 대한 말이나, 평가에 대하여 신경을 쓰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생래의 인간은 이렇게 자기의 모습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며 때로는 우쭐대며 뽐내기도 하고, 때로는 자포자기 되고, 절망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 인생의 실상인 것을 여러분도 경험했을 것입니다. 하늘에 오르는 기쁨에 취하다가, 천길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절망 사이를 오가면서 여러 가지 공상(空想)과 망상(妄想)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생래(生來)의 인생입니다. 그런데 신앙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주목(注目)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 자기를 발견하게 됩니다(빌3:9).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에 주목(注目)할 때 우리의 삶을 가장 잘 설명하여 줍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보여주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보여줍니다. 부활은 십자가를 바탕으로 하여 영원한 생명을 보여줍니다.
그리하여 십자가와 부활에 항상 주목하게 되면 자신을 뽐내면서 자기중심으로 공상하는 일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죄가 무엇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자포자기되고 절망, 망상에서도 벗어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대한 “하나님의 용서”가 있고, 거기로부터 오는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십자가의 부활을 바라보는 것에 우리 인생의 참 모습, 참 인생이 걸어가는 길의 설명(說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항상 주목한다는 것은 오리무중(五里霧中) 속에 항해하는 배의 선장이 자기 위치를 알려주는 “레이다”의 화면을 부단히 주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를 보면 죽지만 그리스도를 보면 삽니다.
② 신앙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데서 옵니다(갈3:2).
가령 병에 걸렸을 때, 우리는 여러 가지 자신의 용태(容態)를 생각하며, 이렇게 하면 좋을까, 저렇게 하면 좋을까 궁리하게 됩니다. 때로는 그것이 맞을 수도 있지만 대체로 그대로 하다가 위험에 처하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전문의(專門醫)의 진단을 받고 그대로 따를 때 건강이 회복되고 유지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그리하여 신앙은 자기 생각에서 떠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눈을 돌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생래의 자기가 극복되고 그리스도가 주관(主管)하는 진실한 자기가 확립됩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내가 아니요” 하는 삶이,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는 삶이 열리게 됩니다. 곧 인본주의(자기중심인 이기주의)에서 신본주의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이요, 기독교인입니다. 이의 완성은 부활의 아침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 우리는 신앙에 의하여 영원한 현재적으로 영을 받으며, 불완전하나마 그 바탕 위에서 걸어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생애입니다. 20절은 이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기독교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한 것입니다(살전5:16~18).
그리하여 바울은 21절을 소리높이 외칩니다.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개역)
인생이 이러하니, 기독교의 일체가 이러하니
내가 유대인들의 반대, 율법주의 자들의 반대가 심하여, 나를 죽이려 해도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의 은혜, 부활의 은혜로, 내가 없어지고 그리스도가 살게 되는 이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만약 폐(廢)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헛되게 죽으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 바탕 위에서만이 성립됩니다. 본말(本末)을 전도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진노(震怒)의 채찍을 받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이 말씀 안에서 개인이 걷고 우리교회가 걷는다면 이 지상에서는 어떠한 존재로 보일는지 몰라도, 욥이 그 어려움에 처하여 세상에 조롱거리가 되었지만 만고(萬古)에 빛나는 의인이 된 것처럼 우리는, 우리교회는 이 나라, 이 교계뿐만 아니라 기독교 역사에 빛을 발할 줄 압니다.
'목사님들 설교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참 믿음의 4대 요소 (눅 7:2-10) (0) | 2024.11.13 |
---|---|
영원한 칭찬 마가복음 14:3-9 (0) | 2024.11.11 |
광복기념 주일 말씀 (0) | 2024.11.10 |
솔로몬의 기도 (0) | 2024.11.10 |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0) | 2024.1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