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들 설교 모음

예수님이 오신 목적 (누가복음 4:16-19)

하나님아들 2024. 11. 24. 22:05

 예수님이 오신 목적 (누가복음 4:16-19)

 

 

예수님의 부활주일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부활주일을 앞두고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와 십자가와 고난을 묵상하며 경건히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에서 복음을 전파하시는 사건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전한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고자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의 의미를 잘 깨닫고 참 자유와 기쁨을 얻으며 우리도 열심히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몸은 신비롭고 소중합니다. 특별히 귀는 우리 삶에 필요한 정보를 흡수하는 기관입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귀에 대한 연구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 의학자 알프레 토마티(Tomatis)는 1940~50년대 오페라 가수들을 치료하면서 귀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오페라 가수들은 무대에서 아주 큰 목소리로 노래했는데, 그들 중 고음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느낀 가수들이 토마티에게 치료를 요청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의사들은 가수들의 목소리가 안 나오는 것은 후두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토마티는 후두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귀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마이크도 없이 높은 음으로 노래를 부르게 될 때 자기 귀에 들리는 소리는 약 130~140데시벨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제트기 엔진으로부터 3~4m 정도 떨어졌을 때의 소리와 똑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청력이 상실된 것입니다. 토마티는 청력이 상실된 소리의 주파수대와 발성하지 못하는 소리의 주파수대가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리하여 토마티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람은 자기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만 낼 수 있다. 사람은 후두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귀로 노래를 한다.” 우리는 이것을 '토마티 효과'라고 부릅니다. 청각에 문제가 생기면 듣지 못합니다. 듣지 못하면 이웃들과의 대화가 끊어집니다. 그리고 말할 수 있는 능력도 저하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귀로 들어야 신앙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신앙의 노래는 무엇보다 마음으로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마음의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속에 잠길 때, 우리 속에서 신앙의 기쁨이 샘솟고 참된 신앙의 노래가 연주되는 것입니다.

 

 

알프레 토마티는 자폐증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그들은 곤충이 주위를 날아다니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바로 곁에서 어머니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알아채지 못한다.” 그들은 듣습니다. 그러나 귀를 기울여 듣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눈으로 봅니다. 그러나 주의 깊게 보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자폐증의 모습입니다. 때로 성경을 읽다보면 우리가 자폐증을 앓고 있는 환자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을 걸며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을 거절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기를 거부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듣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기뻐하고 감격하며 눈물까지 흘립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돌변합니다. 벌컥 화를 내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비난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자폐증에 걸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본문 말씀은 주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처음으로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영적인 자폐아가 되지 말고 말씀에 귀를 귀울여 다 함께 은혜 받고 축복받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습니다. (18절)

 

여기 가난한 자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도 포함되지만 특별히 ‘심령이 가난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누가 복음을 듣습니까? 가난한 사람만 듣습니까? 우리나라 기독교인의 분포를 보니 서울 강남, 분당, 과천이 제일 많다고 합니다. 기독교인이 30%가 넘고 어느 지역은 40%를 육박합니다. 공통점은 부자들만 모인 동네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만이 이 복음의 말씀을 듣는 것은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듣습니다. 심령이 교만하거나 부요하면 복음이 들려오질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복음은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하면 그 사람은 변합니다. 귀가 열리고 복음이 귀에 들려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세계적 갑부이며 강철왕으로 알려진 미국의 카네기에게 어느 날 신문기자가 성공의 비결을 말해달라고 부탁을 받았을 때, 카네기는 서슴없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나의 성공의 비결은 역설적이지만 가난이었습니다.” “나의 성공의 비결을 설명하면 첫째, 나는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기에 늘 가난한 생활에 한탄하시는 부모님을 볼 때마다 분발심이 솟아서 ‘이놈의 가난 두고 봐라. 부모님을 근심시키는 가난이라는 놈을 없애버리고 말겠다.’라고 결심하고서 맡은 일을 부지런히 했더니 성공을 했습니다. 둘째, 가난했기에 무슨 직업이라도 가리지 않고 어떠한 일이라도 좋아했고 항상 제일인자가 되도록 힘써서 일한 탓입니다. 셋째로 제일 중요한 성공한 비결은 내가 가난함으로 심령이 가난하여 진실하시고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가난 했기에 하나님을 만났다. 바로 그것이 축복이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 된다는 말씀은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인간을 부자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실 때 가난하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살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에덴은 낙원입니다.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 낙원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부요하게 살도록 지음을 받았지만 마귀의 미혹에 넘어가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하나님께 범죄하여 에덴에서 쫓겨나고 가난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회복이란 무엇일까요? 회복의 원뜻은 ‘원래 상태로 돌려놓는 것’을 뜻합니다. 건강하다가 병에 걸립니다. 그러다 의사의 치료를 받아 병이 고쳐지면 ‘회복’되었다라고 합니다. 이 ‘회복’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좋은 방향으로 돌아가는 것만을 뜻합니다. 나쁜 쪽으로 되돌아가면 회복이 아닌 악화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경제가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여러 가지 정책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경기가 좋아지면 경기가 ‘회복’되었다라고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은 우리를 타락 이전으로 회복시키러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죄악으로 그 형상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그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영적으로든 육적으로든 부요하게 살게 하시기 위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이 복음을 주셨습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인간은 원래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후에 인간은 죽음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죽음 앞에 꼼짝달싹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죽음을 해결하셨습니다. 대신 죽어 주셨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단순히 감옥에 갇힌 사람들만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 되었다가 해방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사건을 인용해 우리의 죄와 죽음의 사슬에 묶여있는 사람을 회복시키는 것으로 적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무언가에 다 포로가 되어 있어요. 물질의 포로가 돼 있기도 하고 세상 권력의 포로가 돼 있기도 하고 도박의 포로가 돼 있기도 하고 알콜의 포로가 돼 있기도 하고 음란의 포로가 돼 있기도 하고 분노의 포로가 돼 있기도 하고 요즘 청소년들은 인터넷 게임에 포로가 돼 있어요. 시간만 나면 앉아서 인터넷을 합니다. 일곱 시간이고 여덟 시간이고 그냥 넋을 빼놓고 인터넷을 하고 있어요. 부모님들이 바쁘다고 부부가 나가서 일을 하는 동안 아이들은 인터넷 앞에서 정신이 황폐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가장 심각한 것은 우리가 죄의 포로가 돼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간의 힘으로는 이 죄로부터 자유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로마서 7장 19절에서 20절에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 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아무리 죄를 짓지 않겠다고 몸부림쳐도 결국 나는 그 죄의 현장에 피를 흘리며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와 같이 탄식했습니다.

 

 

로마서 7장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죄는 여러분의 어깨 위에 있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어린 양인 그리스도의 어깨 위에 있든지 둘 중의 한 곳에 있어야 된다.” 만약 우리가 죄를 예수님 어깨 위에 맡기면 우리는 죄용서 받고 의인이 되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죄를 우리가 짊어지고 있으면 그 죄 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한 지옥 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린 것입니다. 여러분도 죄의 사슬에 매여 살지 않고 주님이 주신 자유를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8장36절에“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하셨습니다. 그 자유를 여러분 모두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한국의 초대역사 가운데 연동교회 고찬익 장로님 계십니다. 이분은 초대 장로로 교회를 봉사하신 분인데 원래 노름꾼에다가 술꾼에다가 사기꾼입니다. 그래서 관가에 끌려가서 요즘 말하면 경찰서에 끌려가서 매를 맞고 그리고 이제 풀려남을 받았는데 얼마나 매를 맞았던지 그만 말을 못하게 되었어요. 빚 독촉까지 받게 된 그는 어느 날 독약을 먹었는데 죽지 않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그 때 연동교회 와서 사역하고 계시던 게일 선교사님을 만났는데, 선교사님이 그에게 전도지를 줍니다. 야곱의 얘기를 담은 ‘네 이름은 무엇이냐’ 하는 그 전도지를 주었습니다. 무심코 전도지를 받고 집에 전도지를 구겨놓고 집에 와 밤에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하얀 옷을 입은 분이 나타나서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래서 꿈에서 그가 덜덜덜 떨면서 ‘고, 고, 고’ 간신히 ‘제 성이 고씨구요 싸움꾼이고 술꾼이고 망나니입니다. 당신이 누군지 모르지만 저를 좀 구원해주세요 저를 좀 용서해주세요.’ 그러니까 그 하얀 옷 입은 분이 말씀합니다. ‘너는 오늘부터 내 아들이니라.’ 퍼뜩 잠에서 깼습니다. 그래서 그 선교사님이 준 전도지를 또 읽고 또 읽는 가운데 아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구나 그래서 선교사님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그 교회의 장로님이 되어서 아주 충성된 일꾼이 되었습니다.

 

 

이 분이 신발을 만드는 재주가 있어갖고 신발을 만들어갖고 사람마다 찾아가서 전도합니다. “내가 도적놈에다 노름꾼이요 싸움꾼이었습니다. 사기꾼이었습니다. 예수 믿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제가 이 신발을 선물로 드리니 이 신발을 신고 제가 다니는 교회 좀 오세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분이 변화된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분은 술의 노예가 되어 있었고 또 노름의 포로가 되어 있었고 또 사기치고 거짓말하는데 포로가 되어 있었는데 예수를 믿고 나서 완전히 자유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로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이 우리를 모든 결박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입니다.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셨습니다.

 

유대지역은 태양의 직사광선과 사막의 모래바람으로 시력을 잃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눈이 멀게 되면 그의 인생은 세상 밖으로 밀려 나게 됩니다. 직장을 잃게 되고, 사회로부터 가장 가난하고 약자의 자리에 내려가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거지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소개되는 소경은 대게 거지로 소개됩니다. 소경은 한 마디로 세상에서 버림받은 인생입니다. 그러한 인생은 행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목숨만 붙어 있지, 죽지 못해서 사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바뀌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14만 여명의 맹인이 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 위원회에서는 맹인들의 개안 수술을 해주는 운동을 전개해서, 실로암 병원을 세우고, 이를 통해 수천 명의 눈 먼 사람의 눈을 고쳐 주었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원래 창조시에 영적인 존재로 창조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저지른 후에 그 눈이 가려졌습니다. 영적 소경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뵐 수 있게 하셨습니다. 육신의 눈이 어두워 볼 수 없는 하늘나라를 믿음으로 보게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도 이 회복의 은총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영안이 회복되어야 기쁨이 있고 영안이 열려야 믿음 생활이 힘이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눈을 떴는데도 실제로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하는 영적인 맹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얼마나 감사합니까? 눈을 떴든지 뜨지 못했든지 영적인 눈이 띄어져서 저 하늘나라의 신비한 것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영적인 맹인들을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 가장 부요했던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십니다. 계시록 3장 17절에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들은 물질의 풍요로움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눈이 멀었습니다. 주님이 책망하십니다. “네가 영적으로 눈이 멀었도다! 네가 벌거벗은 수치가운데 있다.” 여러분, 예수 믿고 축복받은 다음에 영적인 눈이 멀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기도도 게을리 하고 예배도 적당히 드리고 주님 앞에 열심을 다하지 않으면 영적인 소경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영적인 눈이 밝아 늘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 천국을 바라보고 나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여 나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 주셔서 영의 눈을 열어주시고 주님을 바라보고 기도하게 하시고 믿음으로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책망 받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물질이 풍요로워졌다고 해서 옛날처럼 기도도 하지 아니하고 옛날처럼 다시 주님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점점 나태한 믿음 생활하다가 소경되지 않게 하소서. 늘 기도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눌린 자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셨을 때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후 뒤바뀌게 되었습니다. 다스리기는커녕 지배를 받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피조물들을 신으로 섬기는 우상숭배를 합니다. 동물도 신이고 고목나무도 신이고 태양도 달도 신으로 섬기는 어리석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돈에 지배를 당하고, 재물을 신처럼 받들며 눌려 살고 있습니다. 날마다 무거운 죄 짐에 눌려 쓰러지고 넘어집니다. 얼마나 힘든지 살아갈 의욕을 잃고 하루하루 허덕이며 사는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근심 걱정 염려에서 도저히 풀려날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눌린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예수를 영접하면 이 모든 눌림이 다 풀어지는 것을 체험합니다. 이것이 회복입니다.

 

 

2006년 4월 CBS기독교 방송에서 세계 역대 왕들의 수명에 대한 칼럼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로마 황제의 평균 수명이 35세. 중국 왕들의 평균 수명이 36.7세. 우리 조선 시대 왕들, 조금 더 오래 살았어요. 43.3세. 그러니까 여기 우리 대부분 분들이 로마 황제보다도 오래 살고 계시고 중국의 왕들보다 오래 살고 있고 조선 왕들보다 오래 살고 있어요. 왜 그들이 가장 좋은 음식 먹고, 하여간 못 먹어본 음식 그들은 다 먹어볼 것 아닙니까? 그리고 보약이란 보약은 다 달여 먹는데 왜 이렇게 일찍 죽었습니까? 스트레스 때문에, 염려 때문에, 근심 때문에. 그래서 그 눌린 마음 이기지 못해서 그들이 일찍 병에 걸린 것입니다. 스트레스가 마음에 걸리면 우울해지고 마음속에 절망이 다가올 뿐만 아니라 그것이 육신을 눌러서 육신이 병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암이 생겨나고 심장병, 당뇨, 신장염, 고혈압 각종 병이 생겨납니다.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기를 병의 60퍼센트는 이 스트레스에서 온답니다. 특별히 암은 스트레스가 그 주요원입니다. 예수의 피로 염려와 근심의 스트레스를 다 ?아내시기 바랍니다. 예수 이름으로 치료함 받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중에 가위 눌린 경험이 있습니까? 가위눌리면 꼼짝할 수 없습니다. 입도 벌리지 못합니다. 꼭 죽을 것 같지만 거기서 벗어나기가 너무 힘듭니다. 마귀에게 눌리면 가위눌린 증상하고 비슷합니다. 마귀가 마음을 누르면 마음에 병이 생깁니다. 육신을 누르면 육신에 병이 생깁니다. 환경을 누르면 환경에 문제가 생기고, 관계를 누르면 관계에 문제가 생깁니다.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기가 너무 힘듭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마귀는 처음에 우리를 따라 다닌다고 합니다. 따라다니다가 안 쫓아내면 붙어 다니고, 붙어 다니다가 안 쫓아내면 그 다음에는 올라탄답니다. 올라타도 그대로 내버려 두면 억압합니다. 자유를 빼앗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마귀에게 눌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마귀가 있기는 어디 있느냐”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영안이 열리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영적인 눈이 열려서 보면 마귀가 사람을 누릅니다. 마귀에게 눌리면 영적으로 답답해지고 마귀가 원하는 대로 끌려 다닙니다.

 

 

조셉 스크리븐이라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주 비관적으로 세상을 살던 사람입니다. 사람을 만나면 시비를 걸고 싸웠습니다. 늘 그는 혼자였습니다. 너무나 난폭하고 흉악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가까이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원래 스크리븐은 문학을 사랑하는 아주 온순한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변하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매우 사랑했던 여인이 결혼 전 날 수영을 하다가 익사해버렸습니다. 그 때부터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들을 원망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시비를 걸고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속에 증오와 미움과 원한이 가득해서 늘 그는 욕구불만의 모습으로 다투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고향 아일랜드를 떠나서 캐나다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예수님을 만났어요. 예수님을 만나니까 그 마음속에 울분이 사라졌습니다. 그 마음에 고통이 사라졌습니다. 그 마음에 상처가 사라졌습니다. 주님께 모든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고 주님 은혜 감사하며 지은 찬송이 찬송가 369장입니다. “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얻지 못하게.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마귀의 눌림으로부터 자유하려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충만하게 역사하시면 마귀의 눌림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행 10:38에 보면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마귀에게 눌린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감사한 것은 예수님에게 능력으로 역사하셔서 마귀에게 눌린 자들을 고치셨던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마귀의 눌림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성경 눅 10:19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여기서 뱀과 전갈과 원수는 마귀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습니다.

 

 

은혜의 해를 전파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3절. 기쁨의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19절,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여기 은혜의 해라고 할 때 해는 년(年)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희년(禧年)의 해를 선포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은혜의 해는 50년마다 오는 희년(禧年)을 뜻합니다. 7년마다 안식년이 옵니다. 그 안식년이 7번 지난 후 희년이 옵니다. 그 때가 되면 모든 것이 해방됩니다. 빚진 자는 빚을 탕감 받고, 종이 된 사람이 자유인이 되고, 팔았던 땅이 주인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세상에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 차는 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禧年, 기쁜 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기쁨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옛날과는 차원이 다른 기쁨의 나날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산다면 이것이야 말로 비극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 인생이 기쁨의 인생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엄청난 희락을 누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기쁨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바로 지금 은혜의 해, 희년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오십년에 한번이 아니라 매일 매일 순간순간이 희년이 되는 것입니다. 기적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축복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자유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해방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 해방이 그 축복이 그 자유가 오늘 여러분에게 임하였습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주인으로 오셔서 우리 마음의 모든 죄의 결박에서 놓여남 받게 하십니다. 우리를 누르고 있던 모든 것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을 뜨게 만들어주시고 우리의 마음속에 기쁨과 평안을 넘치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주님의 구원의 은혜의 해에 놀라운 축복을 이미 다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개인이, 여러분 자녀가 여러분 직장이 여러분 사업이 이와 같은 축복을 이미 다 받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슴을 피고 크게 주님께 외쳐야 될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 안에서 자유함을 받았습니다. 나는 해방되었습니다. 나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든 문제에서 놓여남 받았습니다. 나는 희년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이 희년의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