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들 설교 모음

빛의 열매

하나님아들 2024. 12. 1. 23:58

빛의 열매


"(엡5:7)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여하는 자 되지 말라 (엡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바울은 이방인은 어두움의 자녀들이요, 그리스도인들은 빛의 자녀들이라고 하지 않고 이방인들은 어두움이요, 그리스도인들은 빛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생활을 어두움 가운데 사는 생활이라고 보았고,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빛 가운데 사는 생활이라고 보았습니다.

어두움의 자녀는 불순종의 자녀로서 극심한 죄악 속에 휩싸여 전혀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엡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살후2:3)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히4:6)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어두움의 자녀들의 행실은 죄악된 것들로서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들은 세속 문화의 지배를 받고 있는 자들로 육체는 무가치하며 악하다고 말하면서 죄를 경홀히 여기며 하나님을 떠나 탐욕적인 우상숭배를 즐기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자들입니다.
반면에 복음 안에서 새롭게 된 자들을 "빛의 자녀"라고 부릅니다. 빛의 자녀는 빛의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빛의 열매는 곧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거니와 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선과 의와 진리를 추구할 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빛은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빛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낳습니다.
착함은 일종의 관대한 정신을 말합니다.
의로움은 인류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진실함은 도덕적인 진실함으로 아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바를 실제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져다 주시는 빛은 우리로 하여금 진실하다고 아는 바를 실행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나무는 빛을 받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인생도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지 못하면 열매 없는 삶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빛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것과를 분간하게 합니다.
빛은 악한 것을 폭로합니다. 악한 사회나 악한 세계를 제거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그것을 빛 가운데로 끌어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을 깨끗이 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활동을 깨끗이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것들을 그리스도의 빛 아래 드러내는 것입니다.
빛은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질병이 단지 햇빛을 쪼이게 하는 것만으로도 정복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은 죄를 고발하는 것만이 아니라 성결케 하는 능력을 가진 것입니다.
빛이 있으면 좁은 길도 잘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빛이 없으면 아무리 넓은 길도 제대로 갈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8:12) .......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또한 예수께서는 "(마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있음으로 세상 사람들이 생명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생명을 주고 기쁨과 소망을 주고자 한다면 "빛의 열매"를 맺어야만 합니다.
첫째,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에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달란트의 비유에서 "착하다"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마25: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마25: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마25: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마25:17)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마25: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마25: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마25: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마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마25: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마25: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이 비유의 말씀에서 착한 사람은 주인이 맡긴 달란트(소유)를 가지고 곧 바로 가서 장사하여 더 남긴 사람을 가리킵니다. 다섯 달란트 맡은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고, 두 달란트를 맡은 자도 두 달란트를 더 남겼습니다. 또 이와같이 그 맡긴 바를 가지고 곧 바로 가서 장사하여 남겼다고 하는 것은 자기에게 소유를 맡긴 주인의 뜻을 바로 알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착한 사람은 먼저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그 뜻대로 행하여 자기에게 맡겨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남겨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여러 가지 것을 맡기셨습니다. 건강과 재능, 물질과 지식 등을 맡기셨습니다. 이것들을 가지고 주인되시는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여 주인을 위해 무엇인가를 남겨야만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빛의 열매를 맺고자 하면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착한 사람의 모형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눅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눅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눅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눅10: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눅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눅10: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눅10: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눅10: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우리가 말하는 선이란 모든 사람이 하자는 대로 줄줄 따라 다니는 무골호인(無骨好人)의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사람, 착한 사람이란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보면 무한한 동정심을 품고, 그의 위험에 뛰어들며, 그의 상처를 닦아주고, 그의 불완전한 것을 온전케 하기 위하여 시간과 소유를 내어줄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남의 어려움에 뛰어드는 마음, 그리고 남의 상처를 싸매주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둘째, 빛의 열매는 의로움에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실 때 최초로 말씀하신 것도 천국,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들도 모두 천국,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이 세상이나 세상 물질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고 천국에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눅12: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눅12: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눅12: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눅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눅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마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복있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인 것을 산상수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  (마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종교와 경제의 기초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분명 정의에 있습니다. 정의가 없이는 아무리 부유해졌다 하더라도 올바른 사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정과 부패, 불의가 판치는 경제는 오래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기독교가 정의감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의 무속 종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항상 먼저 그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생활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세워지기 위하여 부르짖고 간구하며 경제 정의, 사회 정의 실천을 위해 핍박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삶의 질이 향상된 복지 국가 사회는 경제 정의, 사회 정의가 실천되는 나라인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생활을 하여야 빛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 지상에서 행복을 누리는 길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평화요 둘째는 빵입니다. 잠언은 참된 행복을 이렇게 말합니다.

"(잠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평화가 없으면 아무리 먹을 것이 많고 사회적 명성이 높다 하더라도 빛 좋은 개살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 평화와 빵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평화는 의의 결과로 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32:17)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에 의해서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마실 것이 해결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이 땅 위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기독교가 되어져야 하며, 이 땅 위에 먼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세워지도록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에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지만......"
이것은 가수 양희은씨가 부른 '작은 연못'이란 노래의 첫 소절이다. 아주 먼 옛날, 깊은 산 속에 자그마한 연못 하나가 있었다. 그 연못에는 어여쁜 붕어 두 마리가 그 속에서 사이 좋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무슨 일인지 붕어 두 마리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어찌나 치열한지, 서로 물고 뜯고 하더니 ......
결국 한 마리가 죽어 물 위에 떠올랐다.
그러자 연못의 맑았던 물도 죽은 한 마리의 붕어와 함께 썩기 시작했다. 승리감에 도취되었던 붕어, 영원히 혼자 잘 살 줄 알았던 붕어도 썩은 물을 먹게 되어 얼마 후에 죽고 말았다. 이젠 그 작은 연못에는 더러운 물만 고인 채 아무것도 살지 않는다.
우리 나라의 외채가 1,000억불이 넘는다고 한다. 4,200만 남한 국민 한 사람이 2억원을 외국에 빚지고 사는 셈이다. 노.사.정의 싸움으로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가 20일 동안 입은 손해는 1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노동자 측은 전면 파업을 금년 가을까지 끌고 가겠다고 한다. 야당 측은 이를 대선에 이용하겠다는 당리당략을 앞세우고 파업을 부추기고 있다. 서로 물고 뜯으면 피차 망하는 법이다. 너 죽고 나 살자는 싸움인지, 아니면 너 죽고 나 죽자는 싸움인지? 노(勞).사(使).정(政)은 진정 나라를 사랑하는 싸움인지 아니면 나라를 망치고자 하는 싸움인지 그 싸움의 본질을 다시 한번 깨닫고 다 함께 사는 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 '너 살고 나 사는 법'이 있다.  
"(잠15:17)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셋째, 빛의 열매는 진실함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가지는데 있어서 첫째 단계는 예배입니다. 기독교인은 예배로부터 시작해야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잡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요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은 참으로 진실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자는 빛의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삼으실 때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진실한 사람을 선택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요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시32:2)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진실한 것은 여호와의 말씀과 그의 행사입니다. 그러므로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진실된 것입니다.

"(시33:4)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시도다."

베드로는 말씀에 순종하여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눅5: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눅5: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눅5: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눅5: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눅5: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사람들은 다 지식에 의해 살아가고, 풍부한 경험과 부지런한 노력에 의해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진실 무망하신 말씀에 의지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세상의 지식이나 경험이나 노력에 의지한다면 이 세상의 빛이 될 수 없습니다. 말씀에 대한 신앙으로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으며 빛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진실한 것이란 약속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는 것이요 쓸데없이 남을 오해하거나 중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진실한 사람을 원하십니다.

"(시51: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진실한 사람만이 세상에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시15:1)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시15:2)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시15:4)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시15:4)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시15:5)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유럽의 종교 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95개조의 논제를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공시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480여 년 전의 일이지만 그의 용기는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길이 빛날 것입니다. 권위에 대하여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할 때, 특히 그 권위가 나에게 죽음을 줄 수 있는 상황 아래서의 항거는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진실의 편에 서는 것이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임을 믿었습니다. 그는 "이 마을의 모든 기왓장이 나를 거스를지라도 나는 진실을 추구하겠다." 라고 선언하였습니다. 학문도, 종교도 진실의 추구라고 하지만 실제적인 생활에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이란 순간마다 진실과 거짓을 두고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진실을 선택하며 사는 것이 바른 생활이지만 욕심과 무지와 교만이 앞을 가려 거짓을 선택할 경우가 많습니다. 진실의 선택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기의 자리를 유지하려는 사람이나 물질적 손실을 염려하는 사람이나 어떤 종류이든 위험을 느낄 때  내 몸을 도사리는 사람은 한평생을 살아도 진실을 위한 바른 결단을 한 번도 내리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애굽 왕은 심한 노역을 시켜도 이스라엘 인구 팽창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자 영아 살해의 극악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는 이스라엘 산파들에게 왕명을 내려 남자 아이는 출산과 동시에 죽이게 했습니다. 잔인한 법이었습니다. 동족 살해의 괴로움까지 주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은 왕명에 복종하지 않고 이스라엘 남자 아이를 살렸습니다.

"(출1: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라고 성경은 기록하였습니다. 그들이 왕명을 어긴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는 표현은 하나님을 무서워한다는 뜻보다는 경외 즉 존경하고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산파들 앞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었습니다. 왕명을 따를 것인가,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인가 하는 선택이었습니다. 왕명을 따르는 길은 무사하고 무난하고 상급을 받을 수도 있는 넓은 길이었습니다. 왕명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위험하고 죽을지도 모르는 좁은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은 좁을 길을 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새로운 역사가 전개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좁을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정과 부패, 불법과 불의, 사치와 허영, 음란과 거짓이 판을 치고 이 어두운 사회에 성도 여러분들은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빛의 열매를 맺으시므로 나라의 생명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