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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과 안식일과 창조후의 안식에 대한 논쟁에 관한 말씀

하나님아들 2024. 5. 18. 19:57

주일과 안식일과 창조후의 안식에 대한 논쟁에 관한 말씀

 

1. 최근 일부 이단들이 안식일에 대한 그릇된 신학 사상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안식일을 십계명에 따라 토요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있다. 그리고 그 예로서 예수님도 안식일을 지켰다고 말하고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지키고 있는 주일은 로마의 태양숭배의 날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고의적으로 주일이라는 명칭조차 사용하지 않고 일요일이라고 말하며 또한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자들을 짐승의 표를 받은 자라고 말하기까지 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 내용은 안식일에 대한 신학적 해석과 그리고 주일의 유래와 그 신학적 의미를 살핌으로써 안식일과 주일의 바른 관계를 밝히고자 한다.

 

2. 안식일의 유래와 신학적 의미.

 

안식일과 주일에 대한 신학적 논의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안식일의 유래와 신학적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볼 때 안식일과 주일은 전혀 관계가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 자체를 지키지 않고 있고 주일은 안식일이 아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주일로 대치한 것도 아니다. 주일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안식 후 첫날 모임을 가진 것으로부터 유래하였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과 주일을 함께 지켜왔고 이런 것이 오랜 전통이 되었다. 그러던 중 공의회를 통하여 안식일을 폐하고 주일을 지키게되었다. 그러므로 현재의 안식일과 주일에 대한 신학적 논쟁 자체가 무의미하다.

다만 이 두 관계에 대한 신학적 논의를 해야 한다면 그것은 안식일을 폐한 것에 대한 논의가 되어야 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목적이 주일을 통해서는 성취될 수 없는지에 대한 논의가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논의들을 위해서는 신학적 해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특별히 안식일의 폐지와 관련하여 생각해야 할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십계명의 제4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 구원으로부터 제외 될 수 있는 심각한 죄인가라는 물음이고,

또 다른 하나는 4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어떤 의미냐이다.

특별히 후자의 문제에 대하여 이단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단순히 주일에서 토요일로 날짜를 옮기는 것이냐 아니면 안식일 법을 문자적으로 온전히 지키는 것이냐에 따라서 안식일을 지킨다는 의미는 전혀 다르다. 만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전자의 의미라면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다. 왜냐하면 문자대로 안식일 법에 따라 지켜야 한다면 안식일에 지켜야 할 모든 것을 지킬 때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후자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바리새인들은 의인이 되며 주님은 죽임을 당할 죄인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안식일을 지키셨지만 안식일에 관한 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안식일에 일하셨고 범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하나님께서도 그날 일하셨기 때문에 주님 자신도 일하신다고 말씀하셨다(5:16,17). 주님의 말씀은 안식일을 지킬 때 안식일 법을 문자대로 온전히 지켜야 한다면 하나님조차도 안식일의 법으로부터 자유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것은 이단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문자대로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면 토요일뿐만 아니라 안식일에 관한 모든 법도 지켜야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렇게 지키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죽여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죽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31:14,15).

 

우리가 이 문제를 논의하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십계명은 그 자체가 신학적 해석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 전체가 문자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신학적 해석을 요청하고 있다.

실례를 든다면 주님은 십계명 자체를 해석하셨다. 즉 십계명을 비롯하여 모든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사랑을 하도록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22 :37-40). 그러므로 문자대로 모든 계명을 지켰을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는 계명을 지킨 것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주님의 산상수훈을 통하여 찾을 수 있고(5:21,22,27,28), 또한 부자 청년의 경우에서 찾을 수 있다(10:17-22). 이런 의미에서 제4계명도 문자적 해석이 아닌 신학적 해석을 요청하는 것이다.

1) 해석(20:20,21)

 

또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리라 하였노라

그러나 그들의 자손이 내게 반역하여 사람이 지켜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따르지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였고 나의 안식일을 더럽힌지라 이에 내가 이르기를 내가 광야에서 그들에게 내 분노를 쏟으며 그들에게 내 진노를 이루리라 하였으나(31:13)”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축복해 주시기 위하여 안식일을 허락해 주셨는데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안식일을 더럽혔다고 말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복된 삶을 살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하심 가운데 살게 되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복된 삶을 위해 주신 복된 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별히 여기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게 되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은 안식일을 지킴으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됨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처럼 안식일이 우리의 복된 삶을 위한 은혜의 수단이라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음의 두 가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하나는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리라는 말씀에 대한 이해이고,

다른 하나는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라는 말씀에 대한 이해다. 우리는 이와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이해 할 때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때 비로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이다.

 

첫째,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리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여기 이것이란 안식일을 말하고 나와 너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말한다. 그리고 표징이란 문자적으로는 표, 깃발, 증거, 표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말이 본문에서 하나님과 백성이라는 관계에 대한 증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20절을 풀어 쓴다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될 것이다. “안식일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관계를 보증해 주는 증거가 됨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한 하나님을 언제나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확신할 수 있다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안식일은 마치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 나무 열매를 따먹지 않는 한 언제나 자신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도 안식일을 지키는 한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째서 이처럼 안식일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표징으로 주셨을까? 안식일이 갖는 특별한 의미는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얻고자 한다면 안식일에 대한 역사를 돌아보아야 한다.

안식일의 역사를 돌아볼 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피조물을 위하여 최초로 제정하신 제도라는 것이고, 또한 오랜 후에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으로 주셨다는 것이다.

이처럼 안식일은 모든 사람과 피조물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들에게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제도였다.

 

다음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시고 안식일을 제정하신 이야기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시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2:1-3)”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며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말씀 자체는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셨다는 것만을 말하고 있을 뿐 우리에게 안식일을 지키라는 언급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이 중요한 것은 안식일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이 말씀에서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일곱째 날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여기 일곱째 날은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의 일을 모두 마치신 이후의 모든 날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일곱째 날 세계의 모습은 하나님의 계획이 완전히 실현 된 조금의 부족함도 없는 완전한 모습이었다.

이것은 일곱째 날 이후로는 하나님께서 세계 창조를 위하여 더 이상 일하실 필요가 없으셨던 것을 말해 준다. 그래서 계시의 말씀인 성경은 천지 창조와 관련한 날들을 이야기 할 때 제칠 일에서 끝나고 창조를 위한 그 이상의 날들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일곱이라는 수를 완전수를 상징하는 수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여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완전한 세계야말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은혜였다. 왜냐하면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지으신 완전한 세계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최상의 환경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완전한 세상은 우리의 복된 삶을 위해서도 최적의 환경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이 말씀은 문자대로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특별히 구별하여 복을 주셨다는 의미이지만 또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완전하게 창조하신 세계는 그 자체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이 된다는 의미도 된다.

이처럼 안식일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은혜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하나님만이 복의 원천이라는 신앙의 고백을 새롭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안식일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다. 즉 안식일을 신학적으로 해석할 때 안식일을 지키는 형식은 시대에 따라 각각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역사를 살펴볼 때 안식일에 대한 신학은 변함이 없었지만 안식일의 형식은 시대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나타났다.

우리는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먼저 하나님께서 십계명 중 제4계명으로 안식일을 제정하신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살펴야 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안식하시고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신 날을 후에는 하나님의 백성 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날로 정해 주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4계명으로 안식일을 제정하시기 전에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즉 제4계명을 정하시기 전에 안식일은 무형의 형태로 지켜졌다고 할 수 있다. 여기 무형으로 지켜졌다는 것은 참된 안식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하며 사는 삶을 말한다.

 

그러면 어째서 하나님은

무형의 안식일을 유형의 안식일로 제정하셨을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주신 십계명 중 네 번째 계명을 이해해야 한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20:8-11)”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전까지는 안식일이 제도로서 존재해 오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신 이후부터는 제도로서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부터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의 말씀을 받기 전까지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키며 살았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안식일에 대한 언급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믿음의 조상들의 삶에서조차 안식일을 지켰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째서 하나님은 지금까지 존재해 오지 않았던 안식일 제도를 출애굽 한 이스라엘에게 시행하도록 하셨을까?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구속사를 통해 찾을 수 있다. 구속사는 시간이 더해 감에 따라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처럼 사람들이 은혜로부터 멀어져갈수록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도 멀어져가고 또한 그들 자신의 복된 삶도 상실해 갔다. 왜냐하면 우리를 포함하여 모든 피조물은 창조의 질서 안에 있을 때 가장 완전한 모습이 되어 하나님께는 기쁨이 되고 자신에게도 복된 길이 되었는데 사람들이 반대의 길을 향하였기 때문에 그 결과도 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안식일 제도를 허락해 주시고 그 날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은혜(창조의 질서) 가운데 살도록 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신 가장 큰 목적은 신앙의 회복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즉 신앙의 회복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기억해야 할 것들을 반복적으로 기억함으로 오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언제나 안식일을 범했다.

어떤 때는 그 날을 구별하여 지키는 것 자체에 실패함으로 안식일을 범했고, 어떤 때는 그 날을 지켰지만 안식일을 지키는 의미를 상실함으로 안식일을 범했다. 이로 인하여 그들은 점점 신앙으로부터 멀어졌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범함으로 신앙에서 떠나게 되었고 또한 신앙을 통하여 누릴 수 있는 복된 삶도 상실하였다.

 

다음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말해 주고 있다. (31:12-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 하라(31:12-17)”

여기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는 표현들은 안식일을 범하는 자들이 받게 되는 두려운 심판을 말한다.

 

언급한 것처럼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산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안식일을 범한다는 것은 은혜로부터 떠나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그 자체가 멸망을 의미한다.

그래서 본문은 안식일을 범하는 자는 죽이라고 말하고 있고 또한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버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의 복된 삶과 저주는 안식일을 지키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의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형통한 삶을 원하시는 하나님은 모든 시대 자기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은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여기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을 내용적으로 생각할 때 구약 시대를 포함하여 모든 시대 동일한 의미를 갖지만 형식면에서 볼 때 시대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창조시부터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기 전까지는 안식일이 무형의 제도로서 존재해 왔고,

십계명을 받은 이후부터 은혜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즉 구약시대는 유형의 제도로서 존재해 왔다.

그리고 은혜의 시대에는 공적 예배라는 형식으로 존재하고 있다.

 

- 본래 역사적으로볼 때 안식일과 주일은 전혀 관계없는 날이지만 안식일을 성경신학적으로 해석할 때 두 날은 안식일에 대한 서로 다른 계명의 형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이처럼 안식일이 시대에 따라 여러 형태로 존재해 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영적 상태에 따라 또는 필요에 따라 그것에 합당한 형태로 허락해 주셨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무형의 형태로 안식일을 지키도록 하셨는데 사람들이 쉽게 그것을 잊기 때문에 이를 위하여 유형의 형태로서 안식일을 지키도록 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이 제도라는 유형의 안식일을 지키기 시작하면서 안식일을 지키는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또 다시 안식일을 공적 예배라는 형식으로 지키도록 하셨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복음서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특별히 주님은 안식일을 지키는 목적을 상실하고 형식으로만 지키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6:5)” “안식일에 선을 항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6:9)”라고 물으심으로 목적을 상실하고 안식일이라는 제도 자체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책망하셨다.

 

이처럼 은혜의 시대에는 제도로서 안식일보다는 공적 예배의 형식을 통하여 안식일을 지키도록 하셨는데,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스니라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스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2:42-47)”

여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이것은 오늘의 공적 예배의 모습을 말해 준다. 그들은 공적 예배를 통하여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고, 기도하는 일과 성도의 교통을 가졌다. 그리고 이와 같은 모임 가운데 진정한 예배가 있었다. 본문 중 하나님을 찬미하며라는 말은 바로 예루살렘 교회의 공적 예배 가운데 하나님께 드리는 신령과 진정한 예배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로 인하여 그들은 항상 은혜 가운데 살 수 있었고 또한 말씀에 따라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그들은 복된 삶을 살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모든 시대 자기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인가? 여기 거룩이라는 말은 구별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합당한 방식으로 허락해 주신 안식일의 형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 안에 샬롬이 있음을 신앙으로 고백하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영육 모두 회복을 가져오는 날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형식으로 안식일을 지키도록 하셨든지 그것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맺은 언약의 표징으로 삼음으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안식일을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아담과 하와에게 신앙의 표상이 되었던 것처럼 안식일을 우리의 신앙의 표상으로 삼으라는 의미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나무 열매를 따먹지 않았을 때에는 언제나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고 또한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복 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어떤 형식으로 주일(안식일)을 지키든지 그것을 신앙의 표상으로 삼고 지킬 때 이것이야 말로 주일(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이 되는 것이다.

 

3. 주일의 유래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교를 없애고 싶다면 주일을 폐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오.” 라고 한 볼테르의 말이 지닌 의미심장한 뜻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한 사람의 그리스도교 신자를 없애고 싶다면 그에게 고립된 신자, 자기 자신 혼자서 사는 신자가 되라고 가르치시오 그러면 자기 혼자서 죽고 말 것이오라고 하라. (폴 쥬이트, 주일의 참뜻, 1989, P180.)

 

여기 인용된 말은 우리로 하여금 주일을 연구하기에 충분한 이유를 주고 있다. 주일은 그리스도교를 존재하게 하고 보존하게 하는 수단이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영적 생명을 유지하게 하고 충만케 하는 수단이다.

다시 말해서 주일은 세속 사회 가운데서도 교회와 그리스도인 모두로 하여금 영적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신앙의 틀또는 신앙의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각 시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주일에 대한 신학에 따라 그들을 통하여 나타나는 신앙의 모습도 달랐던 것이다. 이것은 주일에 대한 바른 신학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기도 하였고 그 자유를 상실하기도 하였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주일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하고 또한 이와 같은 주일이 시작되어 정착하기까지의 역사적인 이해와 각 교파들이 가지고 있는 주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와 같은 이해가 있을 때만 주일과 안식일의 관계에 대하여 그리고 신학적 연결에 대하여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그리스도교 안에 주일이 정착되기까지의 역사적 과정

 

주일이 교회 가운데 정착되기까지의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기 전, 우리는 먼저 안식일과 주일은 으미는 같지만 역사적으로 어떤 연결점도 찾을 수 없는 전혀 다른 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처럼 서로 다른 근원을 가지고 있는 안식일과 주일을 관계 시키는 것은 역사에 대한 무지로 인한 것이다.

물론 여기 안식일과 주일은 근원부터 서로 다른 날이라는 것은 역사적인 의미에서이고 신학적으로 연결을 찾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안식일과 주일을 혼돈 하고 있는 가장 주된 이유는 이 둘이 시간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안식일에 대한 개념은 하나님께서 창조사역을 완성하시고 그 날을 기념하신 것으로부터 나왔다. 여기로부터 칠일이라는 시간적 주기와 노동으로부터 자유라는 안식일의 중심 개념이 나온 것이다.(2:1-3)

이런 개념이 구체화되어 이스라엘 가운데 법으로 규정된 것은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율법을 수여 받은 후부터다. 모세를 통해 받은 십계명 중 제4계명은 바로 이 안식일에 대한 법이다.

그리고 이 법은 종교적인 의미는 물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공동체 안에서 기본적으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적인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다. 즉 이 법은 노동을 금함으로 신분의 차별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으로 노동으로부터 자유 하여 한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하는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특별히 이 법이 출애굽 후 율법으로 제정된 것은 구속사적인 면에서 볼 때 강하신 손과 편 팔로 애굽의 종 되었던 속박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대 구속 사역을 기념하는 날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안식일에 대한 율법은 본질에 충실하기보다는 지나치게 형식에 집착하는 종교지도자들에 의하여 변질되고 손상되어 후에는 오히려 사람들을 구속하는 짐으로서 작용하게 되었다.

안식일의 율법을 변질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랍비들이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들은 안식일을 위한 더 까다로운 세칙을 만들어 내는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로 인하여 본래 사람들을 자유케 해 주기 위하여 제정된 법이 오히려 사람들을 구속하는 법으로 변질되었다.

우리는 주님 당시에 안식일에 대한 법이 얼마나 본질로부터 멀어져 있었는지에 대하여 복음서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주님께서 당시의 종교지도자들과 논쟁한 것들 가운데 가장 심각했던 것은 안식일에 관한 문제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변질된 안식일의 법을 본래의 모습으로 돌려놓으려 하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제자들은 안식일을 지켰고,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오순절의 역사로 인하여 교회가 탄생된 후에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안식일은 오랜 세월동안 지켜졌다.

 

* 다음은 주일이 어떻게 시작되어 어떤 과정을 거치며 교회들 가운데 정착되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을 살펴볼 때 우리는 안식일과 주일의 혼돈문제를 규명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주일이 안식일과 다른 점은 안식일은 처음부터 율법으로 규정됨으로 시작되었지만 주일은 그리스도인들의 필요에 의하여 시작되어 발전의 과정을 거친 후 관습이 되어 정착되었다는 점이다. 여기 주일이 필요에 의하여 모였다는 것은 주님께 부활하신 날을 기념한 것과 관계된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 안식 후 첫 날 즉 주일이었고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날에 함께 모여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였던 것이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이날 모여서 서로 떡을 떼며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했는데 여기 떡을 떼는 것을 그들은 주의 만찬이라고 불렀다.

 

오늘의 주일은 바로 여기로부터 연유되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날을 지켰다고 하여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에 관련된 자료들을 보면 지역에 따라 3세기 혹은 4세기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과 주일을 겸하여 지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안식일 준수가 그리스도교 안에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집권한 후부터 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주의 날이 교회력으로 인정 된 것은 321년 콘스탄티누스 시대였다. 그리고 363년 라오디게아 회의에서 이 날의 예배를 의무화했고 주의 날에 노동하는 것을 정죄했다.

 

이처럼 안식일과 주일의 형성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어째서 안식일과 주일을 혼동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안식일과 주일 사이에는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안식일과 주일을 혼동하는 가장 큰 이유가 시간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실제로 주일도 기본적으로 구약의 안식일처럼 칠일을 한 주기로 지켰다. 이처럼 시간적으로 안식일과 주일이 밀접하게 연관 되어 있기 때문에 후에 안식일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주일과 동일시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안식일은 율법에 따라 노동을 중지하는데 강조점이 있고 주일은 필요에 따라 제정 된 날로서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성례전을 통하여 그 은혜를 회상하며 감사하는데 중심이 있다.

 

2) 주일에 대한 몇 가지 신학들

초기 교회에서 주일은 안식 후 첫날 부활의 기념일로 축하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 초기부터 유대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정착된 듯하다. 우리는 바울 서신을 통하여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62절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매 주일 첫날에헌금할 것을 권하고 있다.

 

여기 매 주일 첫 날이라는 말은 고린도교회에 이미 주일이 정착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또한 바울은 드로아의 그리스도인들도 안식 후 첫날 떡을 떼기 위하여 모였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20:7).

이런 사실은 주일이 초기 교회에 이미 정착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우리는 초기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주일을 지켰는지에 대하여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시의 주일 예배가 오늘날 주일 예배처럼 예배 의식이 발전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이 때 주일 예배의 모습은 사도행전 전체에서 보여주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의 모습일 것이다(2:43-47, 4:32-35).

이렇게 시작된 주일 예배가 공의회를 거치며 교회 내에서 법적 효력을 갖게 되었고 또한 특별한 예배 의식을 갖는 주일 예배로 정착되어 갔다.

 

*이처럼 발전의 과정을 거치며 정착된 주일이 교회에서 안식일과 같은 개념으로 지키기 시작한 것은 중세 때부터였다.

다음의 글들은 중세 교회들이 주일과 안식일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말해 준다.

 

주후 796년 아퀼레이자의 플리너스에 의해 소집되었던 종교회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하였다. 일요일의 가치가 비록 유대인의 안식일로부터 유래 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쉬라고 한 명령 자체는 죄를 그만 두는 것으로 본 어거스틴의 의미로 보든지, 육체적 노동을 그만 두라는 문자적인 의미로 보든지, 아직도 유효하다는 사실이다. 긍정적인 입장에서 일요일은 삼위 되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로 선언되었으며, 이 날을 성자의 부활일로, 성령일로, 성부의 천지 창조일로 봄에 따라 그 존엄성이 더 많이 부과되었던 것이다

이 글은 중세 교회가 주일을 다른 날과 구별된 특별한 날로 보고 또한 노동을 금하고 있다는 것에서 주일을 안식일의 개념으로 지켰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또 다른 예를 학자 앨프릭(955-1020)의 제 4계명 교리 문답에서 찾을 수 있다. 4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이다.

우리말대로 하면 그 의미는 쉬는 날을 거룩히 지킬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모세의 율법 하에 있던 당시에는 토요일을 사람들이 크게 경외하고 거룩히 구별해서 심한 노동을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그와 같이 구별해서 심한 노동을 금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부활절 주일에 죽음에서 일어났고 주일은 창조의 첫날이 되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의 이름을 찬양해야 하기 때문이다.(위의 책, P96)

 

이 글에서도 주일을 안식일처럼 거룩히 구별하여 지켜야 한다는 것과 그 날을 온전히 예배하는 일에 드려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교회가 주일과 안식일을 혼동하게 되었을 때 유대주의자들에 의하여 안식일의 본질이 훼손되었던 것처럼 주일의 진정한 의미가 훼손되었다.

예를 들면 “1362년 영국에서 공포된 이슬랩의 율령 제 3는 다음과 같은 날에 칸타베리 구내에서 아무 일도 하지 말도록 명령하고 있다. 우선 먼저 안식일의 저녁 기도부터 시작되는 거룩한 주일을 지켜야 한다. 우리가 개종한 유대교 신자로 오해받지 않기 위하여 그 시간은 삼갈 것이다. 그리고 축일 전야의 예배가 있는 축제일에도 꼭 같은 식으로 지켜야 한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성탄일, 성스테반 기념일, 요한 기념일, 이노센트, 순교자 도마의 기념일이상의 모든 축제일도 마찬가지로 지킬 것이다. 이처럼 주일을 안식일과 혼동하게 되었을 때 주일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짐이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와 같은 중세 교회의 주일 관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다음의 루터의 말을 통하여 종교 개혁자들의 중세 교회 주일 관에 대한 태도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어디서든지 주일을 단순히 주일이란 그 날을 위해 거룩히 구별해야 한다면, 만일 어디서든지 유대교적 근거에 입각하여 그 날을 성수해야 한다면 나는 당신들에게 주일에도 일하고 말도 타고 댄스를 하고 연회를 베풀고 기독 신자의 자유를 침식하는 이 같은 제도를 없애기 위한 무슨 일이라도 하라고 명하겠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에게 주일은 그리스도인들이 한 주 동안 예배를 위하여 함께 모이기 위하여 정한 날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사상은 후에 주일에 대한 가치를 저하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로 인하여 교회가 쇠퇴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 이들에 비하여 제7일 안식교는 지금까지 주일을 거부하고 안식일을 고집하고 있다.

그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콘스탄티누스 때까지 안식일을 지켜왔다고 말하고 안식일이 주일로 변한 것은 콘스탄티누스의 칙령으로 인한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그들은 콘스탄티누스의 그리스도교 칙령을 다니엘7장에 나오는 배도라고 말하고 있다. 다음의 말은 안식교가 안식일을 지키는 이유에 대하여 잘 말해 주고 있다. 『…초대 교회 때 배도한 교회가 이 습관을 이교도들에게서 빌려와 개신교에다 물려주었기 때문에 주일 후 첫날을 예배하게 된 것이다. 이교도들은 바로 그날 태양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일요일은 항상 이교도들의 예배일이었다. 그 예배는 언제나 태양신에게 드렸다.이교도들의 태양 숭배로부터 일요일이란 말이 나왔다. 에스겔 선지자는 당시 이스라엘이 행하던 가증한 것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 앞들에 들어가시기로 보니 여호와와의 전 문 앞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25인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낮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 경배하더라(8:16)”

 

*주일을 일요일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를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태양의 날의 기원은 고대 바벨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바벨론인들은 행성에 신들이 살면서 인간 세계를 지배한다고 믿었다. 신들은 이 세상에 전쟁과 질병을 일으키고 가뭄과 기근 지진과 홍수를 일으키며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믿었다. 이 행성들은 토성(토요일) 태양(일요일) (월요일) 화성(화요일) 수성(수요일) 목성(목요일) 금성(금요일) 이었다. 이처럼 바벨론인들은 일곱 행성에 살고 있는 신들을 숭배했는데 그 날들이 칠일을 주기로 반복되었다. 이것이 오늘의 요일에 대한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태양의 날이란 태양신을 숭배하던 날이었다.

주일을 일요일에 지키게 된 동기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반유대주의적 동기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여기 태양을 주님을 상징하는 것으로 신학화 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로부터 임하는 돋는 해”(1:78,79), “의로운 해”(4:2) 라고 했고 따라서 태양의 날을 주의 날로 기능 대치했던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콘스탄티누스의 정략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태양을 숭배하는 자들의 마음을 동시에 사기 위하여 정략적으로 주일을 일요일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 다음은 청교도들의 주일관이다.

다음의 고백문에서 그들의 주일관이 잘 나타나고 있다. 보통 시간의 일부분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자연 법칙에 합당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통하여 적극적이고 도덕적이고 항구적인 계명으로서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명령하여 이레 중 특히 하루를 안식일로 택하여 하나님께 거룩한 날로 지키게 하였다. 이 날은 창세 때부터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날까지는 일주일간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부터는 한 주간의 첫날로 변경되었다. 이 날은 세상 끝 날까지 기독교의 안식일로 지켜질 것이다.

청교도들은 주일을 안식일의 한 연장선으로 본다. 다만 주일과 안식일의 차이를 주님의 부활로 인하여 한 주간의 끝에서 첫날로 바꾸어 진 것에서 찾는다. 따라서 청교도들의 주일관은 안식일이 규정하고 있는 율법적 요소들을 수용하고 있다.

 

3) 신학적 비판

 

주일 신학을 정립하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은 주일은 안식일과 다른 날이라는 것이다.

지키는 날짜도 서로 다르고 내용도 다르다. 구약의 안식일은 율법으로 정해진 날이고 주일은 필요에 따라 시작 된 것이 성경신학 안에서 역사적 과정을 통하여 발전 및 정착된 날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교회가 어떤 경우에도 주일을 안식일과 동일시하여 율법적으로 강제성을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은 우리의 삶을 영적으로 이끌어 주는 신앙의 틀로서 중요한 절대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주일 신학이 바르게 정립될 때 우리의 신앙은 바르게 성장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 영적으로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실제로 각 시대가 가졌던 주일에 대한 태도를 살펴보면!

주일을 구약의 안식일과 동일시할수록 주일의 본질은 훼손되고 마치 유대인들이 안식일의 본질을 무시하고 형식에 대해서 지나치게 집착함으로 사람들을 자유케 해 주기 위하여 제정 된 안식일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멍에가 되었던 것처럼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반대로 주일의 중요성을 상실할수록!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영적 힘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주일 신학을 바르게 정립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지 말해 준다.

주일신학을 바르게 정립하기 위하여 요청 되는 기본 전제들이 있다.

그것은 언급한 것처럼 주일은 필요에 의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정한 날이라는 것이고 이것이 문화화 되어 정착된 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주일은 말씀과 기도와 교제와 찬송을 통하여 서로 믿음을 격려하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일은 안식일의 의미를 가지고하나님을 예배하고 우리의 영성을 회복하는 날이었다.

 

*여기 주일이 필요에 의하여 정해진 날이라는 것은 우리가 필요에 따라서 주일을 다른 날로 지켜도 된다는 의미다.

만일 직장이 주일근무하고 월요일 쉬는 날이라면 교회는 이들을 위하여 월요일 공적 예배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나 기억해야 할 것은 이미 주일은 교회 전통 가운데 일요일로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대부분의 나라들은 이 날 공요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다른 어떤 날보다도 전심으로 영적인 일에 드릴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회복을 위하여 지킬 수 있도록 문화화 한 이 날을 우리가 지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직장을 선택하거나 또는 무슨 일을 결정할 때 섬김의 마음과 헌신의 마음에서 주일을 지킬 수 있는 직장 또는 일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급한 것처럼 주일을 다른 날로 지킬 수 있다는 의미는 한 개인의 헌신이나 결단으로도 어쩔 수 없는 경우를 말한다.

 

그리고 주일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영적 회복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이것은 교회의 모든 프로그램이나 또는 그리스도인 개개인들이 주일에는 영적 회복을 위해 계획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 영적 회복이란 예배와 서로에 대한 믿음과 선행을 격려하는 것을 의미한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행하였던 것처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주일을 믿음의 한 표현으로 지켜야 한다.

만일 이처럼 주일을 지킨다면 강제성이 있는 율법에 따라 안식일을 지키는 것보다 더 헌신적으로 그리고 온전한 마음으로 주일을 지킬 것이다. 주일이 안식일과 별개의 날이라는 것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주일을 세속화하는 근거로 삼는다면 그는 주일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다른 사람에 대한 섬김 또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안다면 결코 주일을 경하게 여길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 인용한 말을 여기 다시 한 번 인용한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교를 없애고 싶다면 주일을 폐지하지 않으면 안되오” “만일 당신이 한 사람의 그리스도교 신자를 없애고 싶다면 그에게 고립된 신자, 자기 자신 혼자서 사는 신자가 되라고 가르치시오 그러면 자기 혼자서 죽고 말 것이오

 

4.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의 주일에 대한 비판에 대하여

 

1) 안식교의 안식일 주장과 교회의 주일 비판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안식하신 일곱째 날과 안식일의 혼돈으로 인한 것으로부터 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마치시고 제칠일에 안식하셨다는 그 날과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제4계명으로 주신 안식일은 같은 날이 아니다. 이것은 제4계명에서 명하신 안식일은 신학화 된 날이라는 의미다. 즉 제4계명에서 명하신 제칠일은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바로 그날이 아니고 그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어느 날을 정해 주신 날이다. 이것은 이미 안식일 자체가 신학화 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신학적 해석이 요청 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즉 특정한 날을 신성시 할 근거가 없다는 의미다.

 

2) 그들의 주일에 대한 비판은 주일의 기원에 대한 무지로부터 온 것이다. 그들은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인 언어로 사용하고 있는 주일 조차 일요일이라는 말로 바꿈으로 인하여 그 날이 로마에서 태양신을 숭배하던 날이었다는 것을 부각시킴으로서 마치 주일을 지키는 것은 우상숭배하는 것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나 주일은 태양신 숭배와는 전혀 관계없는 유대에서 기원 된 날이다. 유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안식후 첫날에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이 전통은 복음이 증거된 곳에 그대로 이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행전 또는 바울의 서신을 통하여 안식후 첫날에 모임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관한 기록들을 볼 수 있다. 복음이 로마에 전파 되었을 때 이 전통은 로마에도 그대로 전승 되었다. 다만 이 날이 공교롭게도 로마에서는 태양신을 숭배하던 날과 일치하였을 뿐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처음부터 지켜 왔던 주일에 대한 전승이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에 의하여 공인되었다고 그 날을 태양신을 숭배하는 일요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안식교에서 주일을 고의적으로 일요일이라고 부르며 그날을 태양신 숭배의 날과 연결시키는 것의 오류 중의 하나는 그 날을 지키는 의미가 각각 다른 별개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고 태양신을 숭배하는 자들은 태양신을 예배했다. 그런데 어떻게 주일을 일요일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우리의 이웃이 주일에 조상에게 제사하는 날이라고 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을 제사하는 날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안식교의 주일에 대한 비판은 무지로 인한 것이다.

 

3) 안식교는 주일을 지키는 것에 대하여 비판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히신 후 무덤에 머물러 있던 기간을 그 시간 무덤에서 안식일을 지키셨다고 하는데 이것은 비성경적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영으로 그 시간에 옥으로 내려가셔서 그곳에서 영들에게 말씀을 선포하셨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벧전3:19). 이 말씀과 이미 언급한 말씀처럼 주님은 안식일에 쉬신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일하셨다는 것이다(5:16,17). 이처럼 그들이 주님께서 무덤에서 안식하셨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신학적 무지인가를 말해 준다.

 

4) 그들은 안식일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주장하기 위하여 성경에도 없는 절기 안식일을 말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폐하신 것은 바로 절기 안식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 해석이다. 십계명이 중요하다면 다른 모든 계명도 동일하게 중요하다. 그런데 자신들이 주장하고 싶은 십계명에 대해서는 중요성을 말하고 기타의 계명에 대해서는 성경에도 없는(그들은 성경에도 없는 말이라는 것을 자주 말함) 절기 안식일이라는 말을 지어내어 다른 절기들 즉 유월절, 무교절, 오순절, 나팔절, 대속일 등과 같은 날에만 대속의 은혜로 폐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스스로 모순에 빠지는 행위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평가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5)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들과 하나님의 인()맞은 자들을 동일시하고 있다. 즉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짐승의 표를 받은 자이고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은 하나님의 인맞은 자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오류다. 그러면 결국 안식일을 지키는지의 여부(與否)가 곧 구원의 근거가 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은 헛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인 맞은 자의 수를 십사만 사천이라고 한다. 그들은 현재 안식일을 지키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교에 속하는 자들이 2,000만명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들조차 십사만 사천에 들지 못하지 않는가? 그들은 신학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5. 결론

 

이상과 같은 고찰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안식일과 주일에 대한 신학적인 논의는 신학적 해석을 요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있었던 안식일에 관한 논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지키려 했고 주님은 안식일 주인으로 해석하여 지키려하셨기 때문에 여기에 첨예한 논쟁이 있었던 것이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정죄하심으로 안식일을 비롯하여 모든 율법을 우리가 어떻기 해석해야 할 것인지 지침을 마련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안식일과 주일에 대한 신학적 논쟁도 이 원리에 따라 해석할 때 바른 해석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바르게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은 십계명뿐만 아니라 성경의 모든 계명은 사랑의 삶을 위한 수단으로 주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문자대로 온전하게 지켰을지라도 그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궁극적인 목적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것은 계명을 지킨 것이 아니다.

안식일과 주일도 이 원리에 의하여 해석될 때 비로소 바르게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형식은 언제든지 다를 수 있지만 그것을 지키는 궁극적인 의미는 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형식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안식일과 주일은 어떤 관계도 없다.

그러나 신학적 해석을 통하여 본다면 안식일과 주일은 형식에서는 다를지라도 내용에서는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주일이라는 형식을 통해서도 주일(안식일)을 거룩해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의미는 신학적이든 율법과 복음이든지 그 의중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창조 하신후의 안식과 율법의 안식일과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님의 강림 하신 후의 주일은 그 뜻은 동일하다.

참 안식 평화와 복 주심과 거룩케 하심과 그 날을 구별하심은 동일하다. 하나님의 역사는 시대에 따라 옷은 다르게 구별하여 입을 수는 있으나 성경의 아버지의 뜻과 마음은 항상 변함없이 동일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