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이 왜 구속의 완성인가?
내용 목차
1.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
2. 구속 역사 완성을 위한 하나님의 두 계획
(1) 하나님은 메시아를 죽이셔야만 했다.
(2) 하나님은 메시아의 부활도 계획하셨다.
(3) 하나님은 복음이 전 세계적으로 전파될 것도 계획하셨다.
3. 예수님의 생애와 구속 완성
(1) 하나님 나라 설립과 확장
(2)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
(3) 죄 문제 해결과 제사제도의 완성
① 제사제도의 완성
② 선지자직, 제사장직, 왕직의 완성
(4) 예수님의 부활
①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 부인
② 부활의 역사성을 입증하는 바울의 변증(고전 15:1~11)
(5) 부활에서 예수님과 성도들의 연합
① 예수님의 부활에 있어서의 수동성
② 성도들의 부활의 미래적인 면
③ 성도들의 부활의 과거적인 면
4. 성도가 어떻게 자신의 육체 부활을 확신할 수 있는가
(1) 바울의 역설적인 논리(고전 15:12-20)
(2)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성도의 육체 부활을 보증해 준다.
(3) 같은 성령을 도구로 사용하심(롬 8:11)
5. 성도들은 언제 부활하게 되는가?
(1) 고린도전서 15:21-28
(2) 고린도전서 15:50-56
(3) 데살로니가전서 4:13-18
6. 성도들은 어떤 몸체로 부활하는가?
(1) 고전 15:35-49
(2) 데살로니가후서 1:10-12
7. 성도들의 현재의 삶
(1)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고전 15:57)
(2) 주의 일을 열심히 하는 삶(고전 15:58)
8. 하나님나라의 완성과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완성
(1) 새 하늘과 새 땅
(2) 창세기와 계시록 비교
부활이 왜 구속의 완성인가? 라는 질문은 구속역사의 종말을 내다보면서 할 수 있는 질문이다. 이 말씀은 우리를 로마서 8장으로 눈을 돌리게 한다. 로마서 8:18-25의 말씀을 보도록 한다.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18-25, 개역개정).
이 말씀은 하나님이 구속 역사 진행을 어떻게 하고 계심을 들여다보게 한다. 하나님은 세상과 인간을 아름답게 창조하셨다. 심지어 성경은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라고 하나님의 심정을 기록한다. 좀 더 원어의 감정을 실어 번역하면, “하나님이 그가 지으신 모든 것을 보셨다. 보아라, 얼마나 좋은지!”라고 번역해야 한다.
1.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창 1:27).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시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며, 모든 생물을 다스리도록 하셨다(창 1:28). 그리고 아름다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하셨다. 이것이 창조의 목적이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되 그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이성과 감성을 가진 인격체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단순히 기계처럼, 로봇처럼 창조하시지 않고 인간이 스스로 결정하고 즐길 수 있도록 이성과 감성을 주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그 주변에 죄 성이 있는 것들을 창조하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죄 없는 에덴동산(the Garden of Eden)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즐겁게 살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성과 감성을 가진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창조주와 피조물을 구분하는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Adam)과 하와(Eve)에게 한 가지 제한을 두셨다. 그것은 에덴동산의 각종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이었다(창 2:16-17). 선악과는 인간이 세상에서 자유와 주권을 누릴지라도 인간이 피조물인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인간은 자유를 누렸고 하나님의 선물인 주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선악과는 그들에게 제한이 있음을 알게 하고 그들이 하나님이 아니요 하나님께 대한 책임이 있음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하나님과 아담과 맺은 행위언약(the Covenant of Works)이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금지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 먹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사탄 유혹을 받아 죄가 없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따 먹은 사실은 인간 스스로는 자신의 온전함을 지킬 수 없음을 증거 하고 있다. 첫 인간은 하나님께 치명적인 범죄를 한 것이다. 이 처음 죄는 인류를 대표한 죄이기 때문에 모든 인류가 이 죄의 영향으로 사망의 법아래 종노릇하면서 살게 된 것이다. 이 죄를 가리켜 원죄(the original sin)라 한다(창 3:15-20; 롬 5:12, 17-19; 6:23).
처음 사람 아담이 범한 원죄에는 몇 가지 특성이 있다. 이 원죄의 특성은 현재 우리들이 범하고 있는 죄 있는 삶의 특징과 거의 다를 바 없다.
첫째, 인간 편에서의 불성실한 면을 보여준다.
둘째, 인간이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반역한 면을 보여준다.
셋째, 처음 조상이 지은 죄의 특성으로 또 하나는 교만이다. 우리들의 삶도 불성실하고, 하나님에게 반역하고, 교만한 마음으로 산다.
이처럼 첫 사람 아담(Adam)이 범죄 함으로 모든 인류는 전적으로 부패하여 참 지식과 의와 거룩을 상실하였고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영적인 선행도 할 수 없게 되고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해야 한다. 아담과 하와는 죄 없는 세상에서 살면서 죄를 지었다. 그런데 우리는 죄 많은 세상에서 살면서 죄 짓지 않고 살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 스스로를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아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우신 계획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구속 사건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시며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나를 위하여 부활하셨다고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롬 10:9-10). 이것이 은혜언약(the Covenant of Grace)이다. 은혜언약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방법을 만드시고 인간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이 죄 없는 세상에서도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했는데 우리가 죄 많은 세상에서 살면서 우리의 위치를 지킬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의 구원 문제를 계획하신 것이다.
2. 구속 역사 완성을 위한 하나님의 두 계획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눅 24: 46-48, 개역개정)
예수님은 누가복음 24:46-48절에서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두 요수를 말씀하신다. 누가복음 24:46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언급하고, 누가복음 24:47은 복음의 전 세계적인 전파를 언급한다. 그리고 누가복음 24:48은 복음을 전 세계에 전파할 사람이 바로 우리 성도들이라고 선언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누가복음 24:46 서두에 “이같이 기록되었으니”(ou$tw" gevgraptai; Thus it is written)라고 시작함으로 46절의 내용과 47절의 내용을 함께 묶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이같이 기록되었으니”라고 말할 때는 신약이 아직 한권도 기록되지 않은 때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기서 구약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복음의 전 세계적인 전파가 구약에 이미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요소는 하나님께서 미리 계획하신 바요 하나님의 뜻임에 틀림없다. 이제 이 두 요소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눅 24:46) 그리고 복음의 전 세계적인 전파(눅 24:47)가 구약에 나타나는지 확인하도록 한다.
(1) 하나님은 메시아를 죽이셔야만 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범하자마자 메시아(Messiah)를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신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개역개정). 이 말씀은 아담과 하와를 넘어지게 한 뱀에게 내리신 저주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도 된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범하자마자 약속으로 “여자의 후손”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여자의 후손”은 단수로 표현되어 한 사람을 통해 이 일이 성취될 것임을 암시한다. 약속은 은혜의 범주에 속하지 공로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죄 문제를 해결하실 때 우리의 공로를 계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해결하실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에도 율법을 지키는 우리의 공로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 것이다.
메시아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구약 성경에서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를 가리켜 계시의 점진성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이삭을 주시고 또 이삭을 바치게 하심으로 앞으로 오실 메시아가 어떻게 태어날 것과 어떻게 죽을 것을 표상적으로 암시해 주신다. 앞으로 오실 메시아는 불가능한 가운데 이적 적으로 태어날 것이며 죽음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창 22:1-19). 메시아가 고난의 길을 가게 될 것이라는 예언은 구약에서 점점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시편 22편에 보면 메시아가 당할 고난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심지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시 22:17-18, 개역개정; 마 27:35 성취)라고 구체적으로 예언한다. 우리는 이사야 53:1-12의 내용에서 역시 메시아가 어떤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을 본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사 53:3, 개역개정).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개역개정).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사 53:9, 개역개정; 마 27:57-60 성취). 이 모든 말씀은 메시아가 고난의 종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고난을 받으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메시아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실 것이기 때문에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야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구약은 메시아의 고난에 대해 풍성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심지어 구약은 메시아가 어디에서 태어날 것까지 예언하고 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2, 개역개정). 상고에 계신 분이 누구인가? 태초에 계신 분이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이 아니신가. 이 말씀은 죄 문제 해결을 위해 하나님이 친히 메시아로 오실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면 왜 메시아가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셔야만 하는가? 그 이유는 죄의 값이 사망이기 때문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히 9:22)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은 메시아의 부활도 계획하셨다.
구약 내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수난보다는 더 명백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 이유는 구약의 전망으로 볼 때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있을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은 예수님의 부활을 명백히 증언하고 있다. 시편 16:10,11은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개역개정)라고 메시아의 부활을 예언한다. 이 예언은 사도행전 2:24-28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또한 시편 49:15에서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Sheol)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개역개정)라고 메시아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으며, 시편 71:20에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개역개정)라고 메시아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구약에서 예언된 사건이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이 부활하셔야 하는가? 그 이유는 인간의 죄 문제 해결만으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은 복음이 전 세계적으로 전파될 것도 계획하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해답을 이사야 49:6과 마태복음 28:18-20에서 찾을 수 있다. 이사야 49:6은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개역개정)고 읽는다. 또한 이사야 42:6절도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개역개정)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은 그들을 “이방의 빛”으로 삼기 위해서이다. 이사야 60:1-3과 이사야 60:19-22의 내용은 종국에 여호와 자신이 빛으로 오셔서 그에게로 그의 백성을 모으실 것을 증언하고 있다.
구약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신약시대에 교회를 세우셔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도록 명령하신다. 마태복음 28:18-20의 대 전도명령(the Great Commission)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의 빛”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신약의 교회는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취하신 복음을 전파하면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마 5:13-16).
3. 예수님의 생애와 구속 완성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예언된 대로 때가 찼을 때 여자를 통해 율법아래 태어나셨다(갈 4:4). 예수님은 초대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Caesar Augustus: BC 31-AD 14)가 로마 제국을 다스리고 헤롯대왕이 유대 땅을 다스리던 때에 태어났다(눅 2:1-7; 마 2:1-12,19). 예수님의 태어나신 년대는 대략 BC 4년 혹은 BC 5년으로 추정한다. 예수님이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될 때는 마리아가 갈릴리 나사렛(Nazareth)에서 요셉과 함께 살았다(눅 2:4). 그러나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 령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오게 되었고 그때 마리아가 예수님을 출산하게 된 것이다(눅 2:4-7). 이는 선지자 미가(Micah)의 예언 성취인 것이다(미 5:2). 예수님은 태어난 직후부터 수난의 길을 걷는다. 헤롯 대왕이 죽이려고 함으로 애굽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마 2:13-15). 이 사실 역시 선지자 호세아로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호 11:1). 헤롯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요셉과 마리아는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나 아켈라오가 헤롯대왕에 이어 유대의 왕이 된 것을 알고 갈릴리 나사렛으로 가서 정착하게 된다. 그래서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마 2:23)라고 기록한다.
예수님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 신약은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단지 예수님이 12살 되던 해에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눅 2:41-52). 예수님은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눅 3:23).
(1) 하나님 나라 설립과 확장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의 첫 선포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였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심으로 천국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막 1:1)고 그의 복음서를 시작한다. 예수님의 첫 복음의 선포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였다. 그 이후 예수님의 교훈과 사역은 “하나님 나라”를 설립하시고 확장하시는데 바쳐진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설립하시고 확장하셨는가?
첫째, 예수님의 인격자체의 임재가 하나님 나라의 실현임을 증거 한다.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가운데) 있느니라”(눅 17:21)고 대답하신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있는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해 있음을 증거 한다.
둘째, 사단과 귀신을 쫓아냄으로 하나님 나라가 실현된 것을 증거 한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 하였느니라”(마 12:28). 왕국의 능력인 성령으로 귀신을 쫓아냄으로 사단의 영역이 하나님의 영역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셋째, 복음전파로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돋고자 하여도 듣지 못 하였느니라”(마 13:16,17)고 말씀하셨다.
넷째, 이적을 행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었음을 증거 한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와 그 질서가 파괴되어졌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파괴된 질서를 회복시키는 이적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임함을 가르치신다.
다섯째,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계속 확장될 것을 가르친다.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사이에 교회는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천국을 확장하게 된다(눅 24:46-49; 마 28:18-20; 행 1:8). 교회의 복음전파는 왕국 활동의 일환이다.
여섯째, 예수님의 재림으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게 될 것이다. 일반 부활과 마지막 심판 이후에 완성된 천국이 설립되게 될 것이다. 예수님 재림 후에 완성된 왕국에서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통치하게 될 것이다(마 8:11-12; 25:31-34; 고전 15:23-28; 딤후 2:12).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산상보훈을 통해 천국의 성격이 어떤 것임을 가르치신다.
(2)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
예수님의 생애는 십자가를 향한 순종의 길이였다. 십자가의 길은 하나님이 정하셔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걷게 하신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보아서는 수동적 순종이라 할 수 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자신의 십자가 수난을 세(3) 번 예고하신 것으로 기록한다(막 8:31; 9:31; 10:33/마 16:21-28; 17:22-23; 20:17-19).
십자가는 화목(reconciliation)을 이루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죄로 인해 불목의 관계에 있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목하게 만드신 사건이었다. 또한 인간과 인간 사이도 화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고후 5:14-19).
십자가는 구속(redemption)을 이루셨다. 죄의 값은 사망으로(롬 6:23)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위해 예수님이 피를 흘려 구속해주신 것이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는 것이다”(히 9:22). 예수님은 자신의 피를 십자가에서 흘리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그의 피로 값을 치르고 우리를 구속했다고 말할 때 이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우리를 구속했다는 뜻이지 사단에게 값을 지불했다는 뜻은 아니다. 예수님은 약 3년 동안 메시아로서 공생애의 길을 걸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 그때가 역사의 년대로는 AD 29년쯤으로 추정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에게 자유(freedom)를 주셨다. 죄의 멍에로 부자유한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방종하도록 주신 자유가 아니라 섬기도록 주신 자유이다(갈 5:1; 고전 6:19-20).
(3) 죄 문제 해결과 제사제도의 완성
① 제사제도의 완성
예수님은 구약의 제사제도를 자신의 죽음으로 완성하셨다(마 5:17-18). 구약의 율법을 편의상 의식적 율법(ceremonial law), 법률적 율법(legal law), 도덕적 율법(ethical law)으로 나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율법을 완성시키신 것이다. 예수님은 완전한 대제사장이셨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완전한 희생제물이 되셔서 한번 죽으심으로 구약의 제사제도를 완성시킨 것이다(히 9:26). 예수님이 죽으실 때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사실은 인간의 죄 문제를 영원히 해결하셨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마 27:51).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은 죄의 속죄가 필요할 때마다 희생 제사를 드렸다. 그들은 먼저 자신을 위해 속죄의 희생을 드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완전했기 때문에 단번에 완전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셨다(히 7:26-27). 구약시대의 희생제물은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려 바치는 제사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완전한 희생물인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쳐 구약의 제사제도를 완성시킨 것이다(히 9:11-14). 구약시대의 제사는 매일 반복될 수밖에 없었지만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제사는 단번에 드린 것으로 완전하고 영원한 효과가 있는 것이다.
② 선지자직, 제사장직, 왕직의 완성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사역과 연관시켜 선지자직, 제사장직, 왕직 셋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 직책들은 예수님이 선생으로, 구세주로, 통치자로의 역할을 감당하신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약의 선지자직이 성취되었음을 명백히 한다. 신명기 18:15에서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라”했는데 사도행전 3:12-26에 베드로는 신명기 18:15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예언 성취로 오신 “나와 같은 선지자”임을 명백히 한다(행 3:22 참조).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선지자로 인정받은 것이 명백하다. 엠마오 도상에서 재자들이 예수를 가리켜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눅 24:19)라고 말했다(마 21:11, 46; 요 6:14). 예수 그리스도는 예언된 선지자로 오셔서 그의 사역을 통해 선지자직을 완성하신 것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약의 제사장직이 성취되었음을 명백히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이었다. 창세기 14:17-20에 기록된 멜기세덱은 그리스도의 모형역할을 한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임을 설명하고 왜 그리스도가 레위계통을 따르지 않고 유다 계통을 따라 태어났는지를 설명한다. 그 이유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먼저 자신의 죄를 위해 속죄하고 다음으로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 속죄해야 하는 불완전한 제사장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의 죄만을 위해 죽으신 제사장으로 구약의 제사장 직을 성취하신 것이다(시 110:4).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약의 왕직이 성취되었음을 명백히 한다. 창세기 14장에 나온 멜기세덱은 설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멜기세덱이 표상적으로 메시아를 가리킨다고 말한다(히 5:6). 이는 살렘왕인 멜기세덱이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이요, 따라서 살렘왕은 “평강의 왕”이란 뜻이요,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란 뜻이기 때문에 메시야는 “의의 왕”으로 “평강의 왕”으로 오시게 된다(시 45:6-7; 사 9:6-7; 눅 1:31-33; 19:27,38; 요 18:36-37).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원수인 사망을 멸하고 온 세상을 다스리실 왕이신 것이다(고전 15:24-28). 계시록 19:16에는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라고 예수님이 왕이심을 분명히 한다.
(4) 예수님의 부활
①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 부인
성경은 예수님의 역사적 부활을 확실하게 전한다. 그러나 인간 이성은 모든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18세기 영국의 자연신론(Deism)과 독일의 계몽주의(The Enlightenment)의 출현으로 인간 이성이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자율이 인정을 받게 되고 따라서 인간 이성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 것이다. 그들은 성경도 인간의 이성의 판단 대상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의 우주관은 폐쇄된 우주관(closed universe)을 견지하고 개방된 우주관(open universe)을 배척했다. 따라서 그들은 우주 내에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설 자리를 빼앗아 버린 것이다. 그들은 자연히 초자연적 사건인 이적을 부인하게 되었고 결국 부활도 부인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부활을 논할 때 순전히 합리적인 방법으로 시체 도적설, 예수님 기절설, 또는 신화설 등을 논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성경 내에 나타난 초자연적인 사건을 배제하고 성경을 비평적으로 연구하게 한 방법론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사람이 트뢸취(Ernst Troeltsch, 1865~1923)이다. 트뢸취의 방법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비평의 원리 - 과거를 판단할 경우 흑백을 가리듯 진리와 비진리로 구분할 수 없다. 그들은 개연성 정도의 문제이다. 그것들은 항상 재분석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유추의 원리 - 과거의 경험은 결코 현재의 경험과 완전히 다를 수 없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과거의 경험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셋째, 상관의 원리 - 과거에 발생된 사건은 연쇄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즉 하나의 개체적 사건은 다음에 일어날 사건과 연관 관계에 놓여 있다.
미국 켈리포니아 주 산타로사(Santa Rosa)에 웨스타 연구소(The Westar Institute)가 있다. 이 웨스타 연구소는 역사적 예수 연구에 관한 최근의 연구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웨스타 연구소는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예수 세미나”는 성경에 묘사된 예수는 교회가 도금시켜 놓은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나사렛 예수일 수 없으므로 신앙의 그리스도와 나사렛 예수를 구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웨스타 연구소는 “예수 세미나”를 통해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에 관한 특이한 연구를 하고 있다. 그들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을 연구하고 의논한 후 네 개의 색깔로 된 구슬을 가지고 각자의 의견을 투표로 제시한다. 그들은 빨강색, 분홍색, 회색 그리고 검정색 구슬을 투표의 도구로 사용한다. 그들은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거나 예수님의 말씀에 근접한 내용이라고 생각하면 빨강색(Red) 구슬을 사용하고, 예수님이 말씀했을 개연성이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하면 분홍색(Pink) 구슬을 사용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지만 사상만큼은 예수님의 말씀과 비슷한 내용이라고 생각하면 회색(Grey) 구슬을 사용하고,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가 만들어 낸 말이라고 생각하면 검정색(Black) 구슬을 사용하여 투표한다.
② 부활의 역사성을 입증하는 바울의 변증(고전 15:1~11)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네 가지로 증명한다.
첫째, 바울은 자신이 전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초대교회의 증언과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둘째,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성경대로” 이루어진 사건이기 때문에 확실하다고 말한다.
셋째,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 많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부활은 부인할 수 없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넷째, 바울은 자신의 삶의 변화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 진정성을 증명하고 있다고 말한다.
(5) 부활에서 예수님과 성도들의 연합
바울사도는 부활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연합된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자신의 부활에서 수동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묘사한다. 바울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묘사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성육신하여 우리와 동일시되신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자신의 부활에서 수동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① 예수님의 부활에 있어서의 수동성
바울사도가 부활을 묘사할 때 “일으킨다” 혹은 “세운다”(에게이로)의 동사가 능동형으로 등장할 때는 하나님을 동작의 주인으로, 예수님을 동작의 대상으로 묘사한다(롬 10:9; 고전 15:15). 그리고 “일으킨다” 혹은 “세운다”의 동사가 수동형으로 사용될 때는 예수님이 문장의 주어로 등장하지만 역시 동작의 대상이 된다(롬 4:25; 고전 15:20; 참조, 고후 5:15; 딤후 2:8). 부활을 묘사하는 같은 동사가 분사형으로 사용될 때도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갈 1:1; 롬 4:24; 골 2:12; 살전 1:9, 10).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을 묘사하면서 거의 모든 경우에 예수님이 일으킴을 받는 수동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설명한다(예외: 살전 4:14). 바울 사도가 예수님의 역할을 수동적으로 묘사한 의도는 무엇인가? 무슨 의도로 예수님의 수동적인 역할을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가? 이 질문의 답은 바울 신학의 특징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울은 부활에 있어서 예수님의 수동적인 역할을 강조함으로 예수님의 부활과 신자들의 부활의 밀접성을 제시하고 있다. 사실상 이 연합 개념이 바울 사상의 기초가 된다. 바울은 예수님이 수동적인 입장에서 잠자는 자들과 함께 동등하게 된 것을 강조하며 또한 예수님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부활하신 것을 강조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과의 결속된 사실을 증명하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가 되며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신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부활에 있어서 예수님과 신자들의 수동적 역할을 강조한 사실로 보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과 그의 백성들의 부활 사이의 차이점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히려 그 두 사이의 공통점에 관심을 쏟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바울은 부활에서 예수님의 신성과 권능을 전시하려고 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죽기까지 복종하신 수난을 통해 성육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확증되시고 변형되신 사실을 나타내기를 원한 것이다(참조, 롬 1:4; 고전 15:45).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가 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요(참조, 롬 8:29), 둘째 아담으로서 그의 신분을 확증하는 것이다. 다른 표현을 빌린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그 성격에 있어서 대속적인 성격이 있을 뿐만 아니라 메시아적인 성격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이 대속적이고 대표적인 만큼 예수님의 부활도 대속적이고 대표적인 것이다(롬4:25 참조). 예수님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성도들의 부활은 미래에 있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② 성도들의 부활의 미래적인 면
첫째, 고린도전서 15:20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개역개정). 본 절 하반 절에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들의 부활의 연합 개념이 명백하게 나타난다. 우리들의 관심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에 있다. 바이스(Johannes Weiss)는 이 구절 속에 한 논문(a thesis)이 들어있다고 말했다. 사실상 이 구절에 나타난 사상은 고린도전서 15장 전체의 논리와 연관을 맺고 있다.
둘째, 골로새서 1:18
본 절에 나타나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는 예수님을 지칭하며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묘사하고 있다(참조, 계 1:5에서는 전치사 에크(e*k) 없이 사용되었다). 여기 나오는 “프로토토코스”(prwtovtoko")는 “아파르케”(a*parchV)보다는 유기적인 연합 개념을 더 명확하게 나타내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앞으로 일으킴을 받을 자들과 그의 부활에서 결속된 사상이 명백하다. 즉 부활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앞으로 일으킴을 받을 성도들 간의 견고한 연합을 볼 수 있다(롬 8:29 참조). 일으킴을 받을 죽은 자들의 무리가 있고 예수님이 바로 이 무리들로부터(e*k tw'n) 먼저 나신자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유기적인 연합개념을 생각할 때 로마서 8:29의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즉 많은 형제의 무리가 있고 이 무리 중 예수님이 맏아들이 되신 것이다.
셋째, 고린도후서 4:14
본 문맥은 바울사도의 목회적 성격을 반영하는 부분이다. 즉 바울은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개역개정) 확신하고 있다.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과 성도들의 부활의 연합개념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두 사건 사이에 아울러 시간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을 확실히 하고 있다. 연합개념은 “예수와 함께”(suVn jIhsou' )라는 구절에서 명시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예수와 함께”라는 말을 쓸 때 신자들이 예수와 동시에 부활했다는 뜻으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바울의 의도는 과거의 예수님의 부활에 기초를 두면서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지 않았으면 우리들에게도 생명으로의 부활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문의 “예수와 함께”라는 말을 하나님이 앞으로 신자들을 예수와 함께 살린다는 미래적인 개념으로도 생각할 수 없다. 오히려 과거의 예수님의 부활에 성도들이 연합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성취된 모든 축복을 예수님과 연합된 성도들이 앞으로 부활하므로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개념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이 신자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었다는 개념과 같은 뜻이다. 본문 마지막 두 구절에서는 미래의 육체부활의 개념이 뚜렷이 나타난다. “예수와 함께 우리도 살리 사 너희와 함께 서게 하실 것이다”
③ 성도들의 부활의 과거적인 면
바울사도는 그의 서신 여러 곳에서 성도들이 이미 부활했다는 성도들의 과거부활을 말하고 있다(엡 2:5f; 골 2:12f; 3:1; 롬 6:3f; 갈 2:19f). 바울사도가 흔히 “우리들은 일으킴을 받았다”(골 2:12)라고 쓸 때는 요셉의 무덤에서 예수님이 부활할 때 이미 성도들이 부활했다는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즉 예수님은 우리들을 위해 부활하셨고 또한 우리들은 그때 예수님과 함께 부활했다는 부활사상이 본문에 나타난다. 우리들은 예수 안에서 부활한 것으로 생각된다.
에베소서 2:5-10절은 과거 예수님의 부활과 신자들의 부활이 어떻게 연합되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에베소서 2:5에 허물로 죽은 상태에 있는(엡 2:1 참조) 우리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함께 일으키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말한다. 여기서 사용된 용어들은 모두 단순과거(aorist)들로서 과거의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들이 연합함으로 신자들도 과거에 이미 부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을 때 그와 연합되어 부활 생명을 살게 되는 것이다.
4. 성도가 어떻게 자신의 육체 부활을 확신할 수 있는가
(1) 바울의 역설적인 논리(고전 15:12-20)
바울은 예수의 부활과 성도들의 부활의 연합을 믿고 이 사건을 하나의 사건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의 논리가 역설적인 논리로 전개된다. 우리들은 성도들의 부활을 증명하기 위하여 우리의 논리의 방향을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성도들의 부활”로 움직이게 만든다. 그리스도가 부활했으니 우리들도 부활할 것이라는 논리이다. 물론 그 논리나 내용에 잘못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에서 우리의 논리의 방향과 전혀 다른 바울의 논리의 방향을 본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고전 15:13, 15, 16 참조). 바울의 논리는 마치 그리스도의 부활이 죽은 자의 부활에 의존된 것 같이 말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은 자의 부활의 연합개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지 그리스도의 부활이 죽은 자의 부활에 의존되어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다.
바울의 이런 역설적인 논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들의 부활을 분리된 사건으로 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들의 부활을 연합된 하나의 사건으로 보기 때문에 가능하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들의 부활이 분리된 사건이라면 그리스도의 부활이 성도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의의가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성도들의 부활의 첫 열매로서 부활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고전 15:20).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들의 부활은 하나의 연합된 사건이요 그리스도의 부활은 부활사건의 맨 처음에 발생한 첫 열매 역할을 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연합되었음을 풍부한 자료로 증거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성도들은 “함께 살고”(롬 6:8), “함께 고난 받고”(롬 8:17),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롬 6:6), “함께 죽고”(롬 6:8; 고후 7:3), “함께 장사지내고”(롬 6:4), “함께 부활하고”(골 2:12; 3:1), “함께 살림을 받고”(골 2:13; 엡 2:5), “함께 영광에 이르고”(롬 8:17), “함께 후계자가 되고”(롬 8:17), 그리고 “함께 통치한다”(딤후 2:12; 롬 5:17).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연합된 사실을 근거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2~20에서 성도들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아무런 의의를 가질 수 없다고 강조함으로 성도들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성도의 육체 부활을 보증해 준다.
성도들의 육체 부활에 대한 확신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를 고찰하면 명백해진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엡 2:8). 그러면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다. 그래서 성경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개역개정)라고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분명히 한다. 우리들이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시요 그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사건임을 믿는 길 밖에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가? 인간이 자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수 있는가? 성경은 인간의 자력으로 예수를 구주로 믿을 수 없으며 예수의 고난과 부활이 자신을 위한 사건으로 믿을 수 없다고 분명히 한다(엡 2:1-7 참조). 우리들의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말씀과 함께 역사 하셔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라고 말한 것이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역사 하여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게 하며 그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를 위한 사건으로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이 우리 속에 역사 하신 그 순간부터 성령은 우리 속에 내주하시기 시작한다. 바로 그 순간부터 성도들은 성령의 인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것이다(엡 1:13-14).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개역개정; 참조 6:19; 고후 6:16; 딤후 1:14)라고 말한 것이다. 예수 믿는 성도들은 성령이 그 안에 내주 하는 사람들이다. 성령이 일단 성도 안에 내주 하시는 일을 시작하시면 성령은 그 선한 일을 끝까지 유지하시고 이루시게 된다(빌 1:6).
여기서 우리는 성도들의 미래 부활의 확신을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미래 육체 부활을 위해 하나님께서 쓰실 도구는 우리 속에 내주 하시는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개역개정)라고 증언하고 있다. 하나님은 성도 속에 내주 하시는 성령을 도구로 사용하여 성도들의 죽을 몸을 살리실 것이다.
(3) 같은 성령을 도구로 사용하심(롬 8:11)
비록 바울 서신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킬 때 성령을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그와 같은 사상은 바울 서신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로마서 8:11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킬 때 성령을 도구로 사용하신 사실을 함축하고 있으며 앞으로 성도들을 부활시킬 때도 성령을 도구로 사용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과거에 발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떻게 성도들에게 적용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어떻게 과거와 현재의 역사적인 간격이 연결될 수 있겠는가? 이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사도는 본문에서 신자 안에 내주 하는 성령이 과거의 그리스도 사건과 신자들의 현재 경험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은 신자들로 하여금 생명의 새로움을 가지고 현재 생활을 계속할 수 있게 한다(롬 6:4f). 확실히 신자가 생명의 새로움을 가지고 생활할 수 있는 것은 마치 자신의 생애에서 발생한 것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데 그 기초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의 생명은 부활생명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의 현재 생활도 영적인 상태에 있는 것이다.
바울사도는 로마서 8:11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유추로 사용하여 신자들의 미래 상태를 확신시키고 있다. 바울사도의 기본적인 사상은 예수님을 살리신 이가 하나님 아버지로서 바로 그가 신자들 안에 내주 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라는 것이다. 이 위대한 드라마(Drama)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들 중에서 살리신 것처럼 신자들도 역시 죽음에서 살리실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위해 성취하신 것을 역시 신자들을 위해서도 성취하실 것이라는 사상이 명백하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첫 열매에게 일어났던 사건은 나머지 열매에도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이상의 관찰에서 볼 때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들을 살리셨다는 삼위일체적(Trinitarian) 성격을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확고한 연합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의 부활에서 사용한 도구나 신자들의 부활에서 사용할 도구나 모두 같은 성령이며 그 성령이 현재 신자들 안에 내주하고 있다는 사실은 신자들의 부활의 확실성을 제시해 준다. 성도 안에 내주 하는 성령은 신자들의 생애에서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교량역할을 하는 것이다. 성령이 현재 신자 안에서 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명백해진 부활의 원리가 현재 신자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신자 안에 거하고 있는 성령이 장차 죽을 몸의 부활을 확실히 보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8:9~11에서 사도바울의 주장은 성령은 부활행위를 위한 도구로서 하나님께서 그 도구를 예수님의 부활에 사용했으며 또한 같은 도구를 신자들의 부활에도 적용하실 것이라고 한다. 이 도구인 성령이 현재 신자 안에 거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주하는 성령은 미래에 있을 완전한 구속의 약속이 되는 것이다(롬 8:23; 엡 1:14).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령은 보증으로서 미래에 있을 신자들의 육체부활을 확실하게 해주는 것이다(고후 5:1-5).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실 때 성령을 도구로 사용할 자리에 다른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바울이 성령 대신 사용한 표현은 ‘아버지의 영광’과 ‘권능’ 등이다. ‘영광’과 ‘권능’이 도구처럼 사용된 성구를 참고하기 바란다(롬 6:4; 고전 6:14; 고후 13:4). 이상의 구절에서 “영광”(dovxa)과 “권능”(duvnami")이 예수님의 부활에서 도구로 사용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영광’과 ‘권능’과 ‘성령’이 밀접히 결속되어 있기 때문에 본 구절들에서는 동의어로서 사용된 것이다. 바울서신에서 이상의 ‘성령’, ‘권능’, ‘영광’ 세 용어는 그 개념이 서로 엉켜져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성령’이 사용될 위치에 ‘영광’이나 ‘권능’이 사용되는 예가 흔히 있다. 이렇게 ‘영광’이나 ‘권능’이 사용된 곳을 해석할 때 ‘성령’의 역할을 배제하고 생각할 수는 없다.
5. 성도들은 언제 부활하게 되는가?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부활에서 연합되었기 때문에 성도들의 부활이 확실함을 증거 한다(고전 15:12~20).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사용하신 같은 성령을 사용하여 성도들을 부활시키겠다는 하나님의 구원 방법도 성도들의 부활의 확실성을 보장해 준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일반 성도들의 마음속에 잠겨 있는 부활의 때에 관한 문제 즉 언제 성도들의 부활이 발생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21-28과 고린도전서 15:50-56에서 성도들의 부활의 때를 다루고 있다.
(1) 고린도전서 15:21-28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5:20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언급한 후 곧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칭을 소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신자들의 부활체에 대해 계속 논리를 전개한 후 고린도전서 15:45에서 다시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칭을 사용한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이 성도들의 부활의 문제를 다루면서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칭 시킨 것은 대표원리를 사용하여 신자들의 부활체 문제를 해결하기 원한 것이다.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한 후 그리스도의 구속성취의 시간성을 소개한다.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나중)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 15:23-24, 개역개정). 어떤 이는 본문의 “다음에는”(e!peita), 그리고 “그 후에는”(ei^ta)의 용법에 근거하여 바울이 여기서 부활이 두 번 있을 것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고,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의 부활이 있을 것이며, 그리고 “그 후에는” 첫 번째 부활에서 살아남지 못한 자들(믿지 않은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의 부활이 있을 것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비슷한 개념으로 “다음에는”과 “그 후에는” 사이에 중간기 왕국(혹은 천년왕국)이 있을 것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5:24의 “그 후에는”은 토테(tovte)와 같은 뜻으로 사건들의 순간적인 연속을 표현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 “그 후에는”은 마지막 종말로 예수님이 나라를 아버지께 바칠 때라고 이해해야 한다. “에이타 토 텔로스”(ei^ta toV tevlo")는 “그 후에는 끝이니” 혹은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개역은 “나중이니”로 해석)라고 번역해야 한다.본문에서 “다음에는”과 “그 후에는” 사이에 장시간의 간격이 있는 것으로는 해석할 수 없으며 더욱이 한 천년 되는 간격이 있을 것으로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첫 열매의 부활은 이미 발생했지만 첫 열매에게 붙은 자들의 부활은 아직 미래로 남아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들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에 발생할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발생할 일반 부활이 바로 그 때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성도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할 것이며 바로 그때 마지막 원수인 사망이 멸망 받게 될 것이다(고전 15:26). 그리고 마지막 원수인 사망이 멸망 받을 때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통치하시게 될 것이다. 그 때에 그리스도는 그의 모든 구속적 성취를 아버지께 바치게 될 것이다. 쿨만(O. Cullmann)은 “모든 구속적 행위의 마지막 성취가 아들이 아버지에게 드리는 최종적인 복종으로 정확히 묘사된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고린도전서 15:28을 “모든 신약 기독론을 이해하는 열쇠” 라고 칭한다. 벵겔은 “아버지는 아들 없이 통치를 시작하지 않을 것이며 아들은 아버지 없이 통치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아버지와 아들의 왕국은 영원으로부터이며 영원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아버지가 통치할 왕국의 특성을 바로 묘사해 주고 있다. 아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지 아니하면 아버지께서 영원한 왕국을 받으실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바울이 첫 열매인 예수님의 부활을 언급하고 예수님께서 설립하신 나라를 아버지께서 받으실 때를 미래로 설정하고 논리를 전개시킨 이유는 과거의 첫 열매의 부활과 성도들이 부활할 때까지의 사이에 일정기간이 있을 것을 명백하게 제시하기 원해서이다. 성도들은 예수님 재림 때에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될 것이다.
(2) 고린도전서 15:50-56
바울은 부활체를 입은 성도들이 받을 궁극적인 유업은 하나님 나라임을 밝힌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첫 선포의 말씀으로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라고 하신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고전 15:50)는 성도들이 현재의 몸체로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마지막 나팔을 불면 즉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우리가 “썩지 아니할 것”(고전 15:50, 54), “죽지 아니할 것”(고전 15:53)을 입게 될 것이다. 즉, 성도들은 썩지 않고, 강하고, 영광스러운 부활체(고전 15:42-43)를 입게 될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될 것을 비밀이라고 표현한다. 비밀은 이전까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밝히 드러난 하나님의 계획이다. 바울은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 15:51-52, 개역개정)라고 비밀의 내용을 밝힌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모든 사람이 다 죽을 것이 아니요 어떤 사람은 죽은 상태에 있을 것이요 또 어떤 사람은 아직 살아있는 상태에 있을 것이지만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이 다 변화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바울은 예수님 재림 때에 죽은 상태로 있는 성도나 그 당시 살아있는 성도나 모두 변화할 것임을 말하고 곧 바로 그 당시 죽은 상태로 있는 자들이 어떻게 변화에 참여 할 것인지를 설명한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게 될 것이다”(고전 15:52). 보스(Vos)는 본문에서 “확실한 점은 바울이 부활을 영적인 변화가 포함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라고 설명한다. 이 변화는 예수님의 재림 때에 있게 될 것이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4:16에서처럼 예수님의 재림을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본문이 성도들의 변화에 강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영적 변화가 있으면 마지막 대적 사망이 정복되고 성도들은 썩지 아니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 칼빈(Calvin)은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를 해석하면서 “죽음은 우리에게 상처를 입힐만한 무기로 죄 이외의 다른 무기를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죽음은 하나님의 진노에서부터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의 죄에 대해서만 진노하신다. 죄를 없이해 버리면 죽음은 더 이상 우리를 해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성도들은 모두 부활체를 입고 영적인 변화를 하게 될 것이요 그 때가 되면 사망은 그 쏘는 힘을 잃게 될 것이다.
(3) 데살로니가전서 4:13-18
데살로니가전서는 예수님의 재림을 강조한 서신이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에는 예수님의 재림이 매장마다 언급되어 있다(살전 1:10; 2:19; 3:13; 4:13-18; 5:2, 23). 특별히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13-18에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비교적 자세한 묘사를 하고 있다. 본 구절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언제일지를 밝히기보다 예수님의 재림 때에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해 성도들이 알기를 원한다. 성도들이 영적인 실재를 알지 못하면 위로와 소망을 가질 수 없다. 성도가 자신의 부활을 확신할 때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다. “예수의 죽었다가 사심”(o@ti *Ihsou'" a*pevqanen kaiV a*nevsth)은 복음의 핵심이다(참조, 롬 1:2-4). 브루스(F.F. Bruce)는 예수의 죽었다가 사심은 “더 이상 축소시킬 수 없는 복음의 기초”라고 설명하며, 스톳트(John Stott)는 “더 이상 축소시킬 수 없는 복음의 핵심”이라고 설명한다. 바울은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살전 4:14)라고 말하므로 자기 자신을 믿는 자의 반열에 포함시키고 “믿는 자들”과 “소망 없는 다른 이들”(살전 4:13)을 대비시키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자연히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을 믿게 된다고 말한다.
본문에서 바울의 관심의 초점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있지 않고 예수님의 재림 때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인지에 있다. 뒤따라 나오는 본문(살전 4:15~17)의 내용이 이를 증거 한다. 바울이 설명하고자하는 문제는 부활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과 예수님의 재림과의 관계이다.
바울은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4:15부터 예수님의 재림 때에 있을 사건들을 집중적으로 설명한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관심은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이 어떻게 될 것이냐에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의 말씀”으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염려를 해결해 준다. “주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직접 언급한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그러나 이런 내용이 복음서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본 구절의 내용과 가장 근접한 내용은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 24:31, 개역개정)이다. 이처럼 비슷한 내용이 복음서에 나오지만 그 내용이 본 구절의 내용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이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어떤 이는 여기 “주님의 말씀”이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직접 주신 계시라고 주장한다. 다른 이는 예수님께서 다른 선지자에게 주신 말씀을 바울이 전해들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적당한 해석은 예수님께서 직접하신 말씀으로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은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참조, 요 20:30; 21:25). 우리는 성경 저자들이 예수님의 어떤 말씀은 정경에 포함시키고, 또 어떤 말씀은 포함시키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바울은 주님 강림하실 때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살전 4:15)라고 말한다. 바울 당시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앞서 죽은 성도들이 예수님 재림 때에 어떤 위치를 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예수님 재림 때에 살아있는 사람들이나 이미 죽은 사람들이나 차이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 재림 때에 살아남아 있는 자들이나 이미 죽은 성도들이나 공평한 대우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의 재림의 날짜를 정하지 않는다(살전 5:2). 바울은 예수님의 재림이 언제 발생할 것인지 알지 못했다. 바울은 예수님의 재림이 곧 발생할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귀, 그리고 성령을 부어주신 오순절 사건 이후 이제 하나님의 계획으로 남아 있는 구속 사건은 예수님의 재림만 있는 것을 알았다. 예수님의 재림은 앞으로 있을 구속 사건이요 또 마지막 구속 사건이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의 재림이 속히 있었으면 하고 바라면서 살았던 사도였다. 그런 강렬한 소망 때문에 바울은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라고 표현한 것이다. 바울이 본문에서 강조하고자 한 것은 언제 예수님이 재림하시느냐는 때에 관한 것이 아니요 예수님의 재림 때에 살아있는 사람도 이미 죽은 성도보다 앞서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즉, 예수님의 재림 때에 살아있는 자나 이미 죽은 자나 공평한 대우를 받게 될 것이다.
6. 성도들은 어떤 몸체로 부활하는가?
(1) 고전 15:35-49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들의 부활의 연합 개념에서 성도들의 부활체에 대한 개념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들의 부활의 연합 개념은 성도들의 부활체와 예수님의 부활체가 같을 것임을 내다보게 한다. 바울사도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고린도전서 15:35에서 두 가지의 질문을 한다.
첫째,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 수 있느냐?
둘째, 부활할 때 어떤 종류의 몸으로 되느냐?
바울사도는 이 두 질문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죽은 자가 부활할 수 있고 하나님이 그의 정하신 뜻에 따라 몸체를 주신다고 말한다(고전 15:36-38). 특히 바울 사도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을 언급한다. 그래서 바울은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고전 15:36)라고 말하며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고전 15:38)라고 선언한다.
바울 사도는 “그 뜻대로”(h*qevlhsen)와 “주시되”(divdwsin)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 죽은 자의 부활이 이미 하나님의 뜻 속에 있으며 하나님이 그의 권능으로 죽은 자를 부활시키실 때 하나님이 원하는 몸체를 주실 것임을 암시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36에서 특별한 용어인 “조오포이에오”(zvw/opoievw)를 사용하여 같은 사상을 전한다. “조오포이에오”는 신약 성경에 12회 사용되었고(요 5:21, 21; 6:63; 롬 4:17; 8:11; 고전 15:22, 36, 45; 고후 3:6; 갈 3:21; 딤전 6:13; 벧전 3:18) 그리고 12회중 8회가 바울 서신에 사용되었다. 바울 서신에 사용된 “조오포이에오”의 용법을 고찰하면 모든 경우에 하나님이 “조오포이에오”의 주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5:36에서 특별한 용어인 “조오포이에오”를 사용한 것은 성도들의 일반부활 때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조오포이에오”는 항상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과 연계되어 사용되었다.
바울 사도는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간단한 설명으로 끝나지 않고 고린도전서 15:38-49에 이르는 긴 설명을 하고 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전서 15:42-49 사이에서 죽은 몸(The dead body)과 부활체(The resurrection body)를 비교한다. 고린도전서 15:42에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는 단적으로 그 비교를 설명하고 있다. 본문에서 바울사도는 “죽은 몸”의 특징은 “썩을 것”(고전 15:42), “욕된 것”(고전 15:43), “약한 것”(고전 15:43)이며 부활체는 “썩지 아니할 것”(고전 15:42), “영광스러운 것”(고전 15:43), “강한 것”(고전 15:43)이라고 비교하고 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5:44 상반 절에서 지금까지의 비교를 종합하여 한 쌍의 대칭을 말한다. 바울은 성도들이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일으킴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대칭을 시킨 다음 바울사도는 고린도전서 15:44 하반 절에서 “육의 몸이 있은즉 영의 몸도 있다”라고 논증하고 있다. 개역 한글판 번역 성경은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개역개정)라고 하므로 하나의 진술인지 논증인지 확실치 않다. 그러나 원문 성경은 논증임을 증거 한다. 바울 사도는 자연적인 몸에서부터 영적인 몸으로 그의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다. 자연적인 몸은 영적인 몸의 조건으로 존재한다. 영적인 몸은 자연적인 몸을 기초로 추상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현재 “육의 몸”을 가지고 있지 않고 예수님을 구주로 받지 못하는 어떤 존재도 앞으로 예수님 재림하실 때 “영의 몸” 즉 부활체를 입지 못할 것이다. 이 논증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바울사도는 그 다음절인 고린도전서 15:45에서 창세기 2:7을 인용한다. 바울사도가 창세기 2:7을 인용할 때는 70인경을 사용한다. 머레이(Murray)는 본 절과 다음에 나오는 고린도전서 15:45~49절을 설명하면서 “바울은 여기서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장 뚜렷하고 중요한 사상 구조를 제공한다. 두 아담을 머리로 한 체계 밑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취급하고 계시는 사실을 설명한다. 아담(Adam) 이전에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첫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에도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둘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이후에도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그가 마지막 아담이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바울 사도가 신자의 육체부활을 취급하면서 대표 원리를 소개하는 이유는 분명히 이 원리를 사용하여 문제의 해답을 제공해 주기 위해서이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5:20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언급한 후 곧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칭을 소개한 점과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신자들의 부활체에 대해 계속 논리를 전개한 후 고린도전서 15:45에서 다시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칭을 사용하는 것은 대표 원리를 통해 신자의 부활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원한 것이다.
바울사도는 그의 논리를 증명하기 위하여 70인경(LXX, 285-150 BC)에서 창세기 2:7을 인용하면서 “첫째”라는 말과 “아담”이라는 말을 첨가하여 사용하였다. 즉 바울사도는 창세기 2:7을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의 그의 입장에서 해석한 것이다. 70인경은 “그 사람은 산 영이 되었다”(창 2:7b)로 되어 있는데 “첫째”(prw'to")와 “아담”( jAdavm)을 첨가하여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고전 15:45a)라고 하였다. 이는 바울사도가 창세기 구절을 그리스도 사건 이후의 견지에서 해석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5:45 하반절에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라고 말함으로써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와 첫 사람 아담과 비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와 아담을 비교하면서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이라 칭하고 이와 대칭을 이루기 위해 창세기 2:7b의 “그 사람은”을 “첫 사람 아담은”으로 해석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사건 이후의 견지에서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으로 칭한 것은 부활 후의 특징이다.
바울이 어떤 과정을 통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다”라는 진술을 하게 되었는지는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탈굼(Targum)에 풀어 쓴 형태로 비슷한 내용이 나타나긴 하지만 바울이 거기에서 빌어 왔다고 말할 만한 아무런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이 구절은 바울이 창작하여 사용했을 것이다.
바울 사도는 여기서 아담과 예수님을 비교함으로써 그의 전망을 넓힌다. 바울사도의 전망의 범위는 한편으로는 “산 영”(yuchVn zw'san)으로서 아담이 있고, 다른 편으로는 “살려주는 영”(pneu'ma zw/opoiou'n)으로서 예수님이 있다. 그런데 첫 아담은 창조로 인하여 산 영이 되었고 마지막 아담은 부활로 인하여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전 15:20 이하 참조). 첫 아담이 창조에 의해 산 영이 되었다는 것은 70인경(LXX)의 창세기 2:7을 인용한 사실이 명백히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는 사실은 명백하게 언급되지 않았다. 예수님이 살려주는 영이 되신 기원에 대해 주석가들은 견해를 달리한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언제 예수님이 살려 주는 영이 되었는지 정확한 시간은 말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어떤 이는 그 때를 성육신으로 생각하고, 다른 이는 부활이나 재림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 때를 확실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다”라고 말한다. 흐로샤이데(Grosheide)와 핫지(Hodge)는 그 때가 성육신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맥에서 논의되고 있는 내용은 부활에 관해서이다. 개핀(Gaffin)은 말하기를 “고린도전서 15:45은 고린도전서 15:22과 연관시켜 이해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고린도전서 15:22에서도 아담과 그리스도와의 사이에 분명한 대칭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두 구절을 연관시켜 연구하면 “첫 열매”(a*parchv)로서의 그리스도와 “살려주는 영”(pneu'ma zw/opoiou'n)으로서의 그리스도 사이에 분명한 연결이 나타나며 그리스도가 첫 열매가 되며 살려주는 영이 된 근거는 그의 부활에 있음이 나타난다”라고 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오로지 그의 부활한 상태에서만 그리고 그의 부활을 근거로 해서만 살려주는 영(Life-giving Spirit)으로서 기능을 발휘하신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살려주는 그리스도이시다”라고 했다.
그러면 바울 사도가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전 15:45)라고 대칭을 시키는 의도는 무엇인가. 이처럼 아담과 예수님을 비교함으로써 고린도전서 15:35에서 반대자들이 제기했던 질문에 해답을 줄 수 있겠는가. “죽은 자들이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고전 15:35)라는 질문의 답으로 아담과 예수님을 비교한 바울의 논리는 그 방향이 빗나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맥을 자세히 고찰해 보면 부활체를 설명한 고린도전서 15:44과 아담과 예수님을 대칭 시킨 고린도전서 15:45 사이에 분명한 논리적 연결이 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5:42-44에서 부활체에 대한 설명을 한 다음 고린도전서 15:45 초두에 “이처럼 기록되었으되”라고 말함으로써 고린도전서 15:45과 전 절과의 논리적 연결을 보여준다.
그러면 고린도전서 15:35에서 제기된 질문과 연관하여 생각할 때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가? 첫 사람 아담은 몸을 가진 존재의 표본으로서 육의 몸의 소유자였고 마지막 아담 예수님은 부활 후 영적인 몸의 존재를 대표하는 신령한 몸의 소유자이다. 즉 부활 전의 우리들의 몸은 타락한 이후의 아담의 몸과 같은 형태이고 부활 후의 신자들의 몸은 부활 후의 예수님의 몸과 같이 될 것이다. 바울 사도는 다른 곳에서도(롬 5:12ff.; 고전 15:22) 그러했듯이 여기서도 아담과 예수님을 한 개인으로서 비교하지 않고 대표자로서 비교하고 있다. 바울사도의 논리는 아담을 대표로 한 육의 몸으로서의 존재 양식과 예수님을 대표로 한 신령한 몸으로서의 존재 양식을 비교하고 있다. 바울사도는 개인이 포함된 두 세상의 질서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사도는 반대자들의 질문(고전 15:35)에 대한 답으로 우주적인 전망을 제시하고 개인 신자의 문제는 그 개인이 속해있는 세상의 질서로부터 그 해결책을 찾도록 한 것이다. 즉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은 부활할 때에 그리스도의 부활체와 같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것을 말하고 있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아담과 그리스도를 두 세상의 질서를 대표한 대표자들로서 대칭시킨 것은 아담이 타락되기 전 세상까지도 포함시키고 있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아담이 산 영이 된 것은 창조로 인해 된 것이지 그의 타락으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본문의 대칭이 아담 타락 이전까지 포함시킨 사실은 대칭의 광범위성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구속역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역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상을 부활체와 관련하여 설명한다면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우리들의 현재 몸의 형태보다 더 훌륭한 종류의 몸을 계획하고 있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바울은 “부활체”와 대비되는 구약의 “몸체”를 생각할 때 아담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바울이 아담의 질서와 그리스도의 질서를 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표로 삼고 이어지는 대표원리가 타락 이후의 “어느 몸체”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아담”이 “종말”(Endzeit)을 마감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바울의 사상은 자연히 “시작”(Urzeit)과 함께 존재한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을 비교하도록 만든다. 첫 사람 아담이 생령의 질서를 소개한 것처럼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는 성령의 삶의 질서를 소개한다.
그리스도 사역의 종말론적 중요성은 고린도전서 15:46에서도 재확인된다. 우리는 바울 사도가 두 세상의 질서를 비교하면서 그 순서를 조심스럽게 배열한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마땅히 “육 있는 자”(toV yucikovn)가 먼저요 “신령한 자”(toV pneumatikovn)가 그 뒤를 따른다. 아담의 질서가 먼저요 그리스도의 질서가 그 다음이다. 이 순서는 결코 변경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게 속한 질서는 마지막 질서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님 이후에는 아무도 있을 수 없다(고전 15:45 e!scato" 참조). 머레이(Murray)도 같은 뜻으로 “아담 이전에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첫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이후에도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그가 마지막 아담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개핀(Gaffin)은 고린도전서 15:46을 설명하면서 이는 “압축하여 표현한 역사철학”이라고 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첫째 아담의 시대로서 육의 질서(the Physical order)는 전 종말론적(Pre-eschatological)시대요, 불완전하고, 과도기적이요, 준비적인 세상 질서이지만 반대로 마지막 아담의 시대로서 영의 질서(the Pneumatic order)는 종말론적이요(Eschatological), 완전하고 결정적이며 최종적인 세상질서를 가리킨다고 했다. 보스(Vos)도 같은 의미로 말하기를 “고린도전서 15:46에 나타난 “신령한 것”(toV pneumatikovn)과 “육적인 것”(toV yucikovn, 자연적인 것)은 보편화된 표현이기 때문에 그 뒤에 몸(sw'ma)을 붙여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 두 표현은 역사 선상 두개의 포괄적인 원리의 연속적인 통치를 지칭하는 것이다. 즉 두개의 세상질서로 그 자체의 아담을 선두로 한 첫째 창조와 둘째 창조를 가리키는 것이다”라고 했다.
바울 사도 앞에 펼쳐진 전망은 우주적인 것임에 틀림이 없다. 계속해서 대칭의 포괄적인 성격은 “하늘”과 “땅”이라는 상반되는 용어들에 의해 확증되고 있다(고전 15:47). “영”(pneu'ma)과 “육”(yuchv)이 “하늘”(ou*ranov")과 “땅”(gh')에 의해 대치되었을 뿐 바울 사도의 논리를 약화시킨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명백한 우주적인 언어를 사용한 것은 그 대칭의 성격이 포괄적이고 전체를 포함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해준다.” “땅에서”(e*k gh'")나 “하늘에서”(e*x ou*ranou')와 같은 표현은 질적인 면을 설명하고 있지 그 기원을 가리키고 있지 않다. 이 표현들이 질적인 면을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은 고린도전서 15:48과 고린도전서 15:49에 사용된 “하늘에 속한”(e*pouranivou)이라는 표현이 이를 확증하고 있다. 이 형용사는 그리스도에게뿐 아니라 신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는데 신자들에게 적용되었을 경우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을 때 신자들이 하늘에서부터 왔다는 뜻으로 결코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문맥을 조심스럽게 연구해 보면 “땅에서”나 “하늘에서”라는 표현이 기원을 가리키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해주고 있다. 중복된 표현인 “흙에 속한”(coϊkov", 고전 15:47)은 선행(先行)하는 구절의 질적인 면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아담이 창조로 인해 된 결과적인 상태와 그리스도가 부활로 인해 될 결과적인 상태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 이전의 상태는 바울의 관심 밖의 일이다. 적어도 이 구절에서는 예수님이 부활 이전에 어떤 조건 하에 존재하였는지는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15:48에서도 아담과 예수님이 개인으로만 비교되지 않고 그들과 관련된 자들의 대표자로서 비교되었다는 것이 명백하다. 아담은 “흙에 속한 자”(o& coϊkov")로서 “흙에 속한 자들”(oi& coϊkoiv)을 대표하고 반면에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이”(o& e*pouravnio")로서 “하늘에 속한 이들”(oi& e*pouravnioi)을 대표한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를 맺어 주는 결속의 원리가 강조되었음을 증거한다. 바울 사도는 이 결속의 원리를 개인에게 적용하여 “죽은 자들이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고전 15:35) 하는 질문에 답을 하고 있다. 신자들이 부활할 때는 그리스도가 그의 부활 후에 가졌던 부활체와 같은 몸을 갖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a*parchv)로서 그가 가졌던 부활체는 뒤따라 올 열매들이 어떤 부활체로 나타날 것을 보증해 주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에 맺어진 결속의 원리로 고린도전서 15:35에서 제기된 문제의 답을 찾으려고 하는 논리의 방향은 고린도전서 15:49에서도 확증된다. 고린도전서 15:49은 지금까지 전개한 논리의 절정으로서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신자들의 몸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9).
신자들은 부활할 때에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게 될 것인데 이는 고린도전서 15:44의 “신령한 몸”을 가리킨다. 신자는 성령이 일으키시고 조종하며 또 성령이 내주 하는 신령한 몸을 갖게 될 것이다. 신자들은 영적인 왕국에 적합한 존재로서의 몸을 갖게 될 것이다.
신령한 몸은 살과 뼈가 있으며(눅 24:7, 39),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눅 24:41, 42), 다른 사람이 식별할 수도 있고(눅 24:39), 사람이 만질 수도 있다(눅 24:39). 그러나 신령한 몸은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눅 24:36). 이처럼 육체는 가졌지만 갑자기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고(눅 24:31), 문이 닫혀진 방에 나타날 수도 있고(요 20:19, 20),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실 수도 있었다(행 1:11). 신령한 몸은 썩지 않고(고전 15:42), 영화로운 몸이며(고전 15:43), 강한 몸이다(고전 15:43). 고린도전서 15:47에서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자요, 그에게 딸린 자들은 고린도전서 15:49에 있는 대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게 될 것이다. 즉 신령한 몸을 입게 될 것이다. 이 신령한 몸을 입게 될 때 신자들의 구원이 완성되게 된다. 그래서 로마서 8:23에서는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개역개정)했고, 고린도후서 5:1, 2에서는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개역개정)고 했다.
고린도후서 3:18은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thVn au*thVn ei*kovna)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개역개정)했으며, 빌립보서에서는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1, 개역개정)고 했다.
요한 사도도 같은 뜻으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 개역개정)라고 말했다.
성경은 신자가 소유할 부활체의 특징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도 부활체의 특징을 “썩지 아니할 것,” “영광스러운 것,” “강한 것”으로 묘사할 뿐이며, 그 구체적인 특징은 그리스도의 부활체의 활동에서 연상해 볼 수 있다.
복음서에 나타난 부활하신 예수님의 활동은 신자들이 부활 후, 어떤 부활체를 소유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약간의 자료를 제공해 준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연합개념을 사상의 구조로 삼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탕으로 신자들의 육체 부활과 신자들이 소유할 부활체에 대해 바울 사도답게 심오하게 논설하고 있다.
(2) 데살로니가후서 1:10-12
데살로니가후서 1:10-12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나타날 광경을 들여다보게 한다. 우선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개역개정번역은 “그날에 그가 강림하사”로 번역했고, 개역 한글 번역은 “그 날에 강림하사”로 번역했다. 그러나 헬라어는 “그가 오실 때”를 문장 앞에 두고 “그 날”은 문장 마지막에 위치 시켰다. 헬라어는 “그가 오심”을 강조하여 “그 날”은 그가 오셔야만 발생할 것임을 함축하고 있다. “그 날”은 예수님의 재림하실 날을 가리킨다. “그 날”은 미래에 발생할 것이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전 후서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고 있는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이다. 바울사도는 예수님의 재림 때에 있을 잔치는 성도들만을 위한 잔치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본분은 예수님이 강림하실 때 일어날 두 가지 광경을 소개한다. 첫째, 예수님은 “그의 성도들에게서”(ejn toi'" aJgivoi" aujtou')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둘째,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ejn pa'sin toi'" pisteuvsasin) 놀랍게 여김을 얻으실 것이다. 예수님 재림 때에 있을 잔치에 불신자들의 자리는 마련되지 않을 것이다. 여기 “성도들”과 “모든 믿는 자”는 예수님 재림 때에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을 같은 그룹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벵겔(John A. Bengel)은 “성도들”과 “모든 믿는 자”를 구분하여 설명한다. 벵겔은 “이 단어(모든)가 성도들에게는 덧붙여 사용되지 않고 믿는 자에게만 덧붙여 사용된 이유는 믿는 자들이란 용어가 성도들이란 용어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할례를 통해 구성된 사람들이요, 믿는 자들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도 포함된 이방인들로 구성된 사람들이다”라고 해석한다. 벵겔은 특별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성도들과 믿는 자들을 구별한다. 벵겔의 구분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그러나 본 절에서 바울 사도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구원 받은 모든 그의 백성들의 영광을 받으시고, 놀랍게 여김을 받으실 것을 설명하고 있다(롬 1:7; 고전 1:2).
첫 번째 예수님이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뜻은 무엇인가?”(살전 1:10). 박윤선박사는 “‘영광을 받으심’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도들을 구원하시므로 그들이 그의 구원의 덕을 찬양하며 송영함을 의미 한다(시 67:3-5; 88:8; 사 49:3)"라고 성도들의 찬양과 송영함을 통해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신다고 평범하게 해석한다. 그러나 바울은 “영광을 받는다”(ejndoxavzw)는 표현을 특이하게 본서에서만 두 번 사용 한다(살후 1:10, 12). 부정사 “영광을 받으시고”(ejndoxasqh'nai)와 함께 사용된 전치사 “안에서”(ejn)는 영광을 받으시는 일이 어디에서 발생할 것인지를 가리킨다. 즉 주님은 성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이디(John Eadie)는 이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디는 “그는 그들(성도들) 안에서 영광을 받는다. 그는 그들의 인격 안에서, 그들을 용서하고 변화시킨 구원의 능력 안에서, 그들의 영적인 성숙 안에서, 영적인 성숙에 이르는 모든 이전 단계와 과정 안에서, 그들 위에 지울 수 없게 인을 친 자기 자신의 형상 안에서, 그들의 완전하고 변할 수 없는 축복됨 안에서, 그리고 그들의 충만하고 최종적인 영화로움 안에서 영광을 받는다. 그들의 역사와 예정의 이 모든 요소들 안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반영되어 있다. 그는 그 자신이 영광을 받으신다(엡 1:6, 12). 그의 사랑과 그의 대속적 죽음, 그의 영과 그의 중보 기도가 그 자신의 거룩한 목적을 그들 안에서 이루셨다, 그리고 그는 그의 중보의 열매로서 그들 안에서 영광을 받는다.”라고 해석한다. 구원 받은 성도들이 재림하시는 예수님께 영광을 올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둘째, 예수님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신다는 뜻은 무엇인가?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만드신 걸작품이다(엡 2:10).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완성된 하나님의 걸작품을 보시고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예수님 재림 때에는 성도들이 예수님께서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신 눈부신 사역 때문에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은 성도들 안에 온전하게 형성된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놀랍게 여김을 받으실 것이다”(살후 1:10).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성도들이 부활체를 입고 있는 완성된 존재가 예수님을 놀라게 할 만큼 걸작품이라는 뜻이다. 바울은 여기서 놀라움을 표시하는 단어인 “다우마조”(qaumavzw)를 사용한다. 원래 “다우마조”는 그 어근이 “본다”(qeavomai)에 근거하고 있다. 그래서 “다우마조”는 보고 놀란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창세기 1:31에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qeavomai)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 1:31)라고 첫째 창조 때도 하나님이 보시고 감탄하셨다. 예수님의 재림의 때, 즉 하나님의 구속이 완성되는 그 때 예수님께서 완성된 걸작품을 보시고 놀라실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 때에 하나님께서 성도들 안에 이루신 일은 모든 기대를 뛰어 넘을 것이요, 모든 인간의 생각을 능가할 것이다.
이디는 “성도들이 그 날에 그렇게도 순수하고, 그렇게도 사랑스럽고, 그리고 그렇게도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때; 그들의 그렇게도 죄가 많고, 그렇게도 연약하고, 그렇게도 더럽고, 그리고 그렇게도 무력한 지상에서의 처음 상태와 성도들이 누릴 재림 때의 영광이 비교될 때; 그들이 무슨 일, 즉 그의(예수님의) 십자가와 수난으로 구원 받았다는 생각을 할 때; 이런 일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어린이의 신뢰와 같은 단순한 방법으로 성취되었음을 생각할 때; 그러면 그들을 위해 그런 위대한 일들을 이루신 그분은 마땅히 그들의 존경과 경의를 받을만하다”라고 해석한다. 이 말씀은 비록 성도들의 최종 구원 받은 상태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성취된 것이지만, 성도들 안에 성취된 하나님의 눈부신 계획은 재림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것을 봄으로 영광을 얻으시고, 또한 그것을 봄으로 놀라게 되실 것이다. 브루스(Bruce)도 같은 어조로 “믿는 자들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걸작품이다(그의 만드신바, 엡 2:10); 예술가의 지혜와 기술은 그의 걸작품의 특질에 전시되었다. 그는 그의 걸작품을 고맙게 감상하는 사람들의 존경을 얻는다” 라고 설명한다. 스토트(Stott) 역시 같은 어조로 “우리들 자신이 영화롭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의 완전한 변형을 수반할 것이다. 우리들의 몸은 부활과 함께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빌 3:21)와 같게 될 것이다. 우리들의 성격은 그리스도처럼 될 것이다. ‘우리가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시면 우리가 그와 같게 될 것이다’(요일 3:2). 종국적으로 우리는 모든 죄와 이기심에서 구원 받아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랑으로 최대한으로 채워질 것이다. 그 결과 우리들은 진정한 인간 정체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라고 바로 설명한다. 이미 구약은 성도들의 귀중함을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시 16:3)라고 예언하고 있다. 이 예언의 종국적 성취는 성도들이 부활체를 입는 그 순간이 될 것이다. 성도들이 입을 부활체는 재림하시는 예수님이 보시고 깜짝 놀랄 걸작 품이 될 것이다.
7. 성도들의 현재의 삶
(1)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고전 15:57)
성도들은 구원받은 상태로 부활체를 덧입기 전까지 일정기간 살아야 한다. 그러면 아담의 질서에 따른 “육의 몸”을 입고 사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도 괴롭힌 죄 문제, 사망의 문제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해결하셨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서신 다른 곳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개역개정)라고 말했다. 사망의 문제만큼 인간을 많이 괴롭힌 것이 없다. 많은 군왕들이 오래 살고 사망을 피하기 위해 그들의 재물과 그들의 권력을 총동원해서 노력했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사망을 이길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들의 죽음의 문제를 예수님의 죽음으로 해결하셨다. 하나님은 죽음의 문제를 역설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신 것이다. 이처럼 죽음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이 하나님의 지혜이다. 이와 같은 해결 방법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죽음을 통해 죽음을 해결하시고 부활로 이를 확증하셨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부활은 사망을 이긴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개역개정)라고 승리를 외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망의 세력을 무효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라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항상 감사하며 하나님께 찬양하는 삶을 이어가야 한다.
(2) 주의 일을 열심히 하는 삶(고전 15:58)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마지막 결론으로 현재 살아있는 성도들에게 간결하면서도 심오한 권면을 한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 이 말씀은 현재 몸을 가지고 살면서 육체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친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이 육체로 계실 때 어떻게 살았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주님이요 주인이며 왕이시라면, 그리고 우리들이 앞으로 부활하신 주님처럼 부활체를 입게 될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시기 전 그의 육체로 계실 때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배워 그대로 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육신의 아버지 요셉(Joseph)의 목수 일을 도우면서 자라고 강건해졌다. 그는 그의 삶 속에서 자제하는 것을 배웠다. 그는 휴식을 취해야만 했고 잠을 자야만 했지만 여러 날 밤 아버지께 기도하면서 지냈다. 그는 먹어야 하고 마셔야 했지만 그는 이런 식욕에 의해 주장되지 않았다. 예수님은 항상 자제와 단련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셨다. 이처럼 이미 부활 생명을 소유하고 살고 있는 성도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 사셨던 삶처럼 현재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롬 12:1)로 드리라고 권면 하고 있다. 성도들이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 “죽은 몸”이 아니라 “살아있는 몸”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예수님처럼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부활의 확신을 믿고 사는 성도들의 삶이다. 성도들의 수고는 주 안에서 결단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8. 하나님나라의 완성과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완성
모든 선택받은 자들이 구원을 얻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완성되게 된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우리를 위해 “새 하늘과 새 땅”을 마련하시고 그 곳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하면서 살게 하실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인간이 죄를 짓고 싶어도 죄를 지을 수 없을 것이며 사실상 죄를 짓고 싶은 생각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1)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은 계시록 21장에서 타락한 에덴동산을 대치할 새 하늘과 새 땅을 요한(John)에게 보여 주신다(계 21:1).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이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고 말씀하신 음성을 듣는다. 요한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호화찬란한 거룩한 성 예루살렘(Jerusalem)을 보는데(계 21:10-21) 그 성 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한다. 그 이유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계 21:22)이시기 때문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있어 해와 달이 필요 없고(계 21:23), 밤이 없기 때문에 성문들이 항상 열려있는 모습이다(계 21:25). 하나님의 성에는 ① 성전이 없고, ② 해와 달이 없고, ③ 닫혀진 성문들이 없고, ④ 불결한 것이 없고, ⑤ 거짓말하는 자가 없고, ⑥ 가증한 일이 없고, ⑦ 밤이 없다(계 21:22-27). 반면 어린양은 참된 예배, 참 빛, 공개적인 환영, 거룩한 백성, 하나님의 임재, 그리고 신의 임재에서 오는 영원한 조명을 제공해 주실 것이다. 새 예루살렘은 죄로 인해 에덴(Eden)에서 상실한 모든 복을 성도들에게 회복시켜주는 곳이다. (박형용, 「신약개관」(서울: 아가페, 2002), p. 260). 우리 성도들이 이런 완벽한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 수 있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이시고 사흘 만에 부활시킨 것이다.
계시록 22장에서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아름다움을 계속 묘사한다. 사도 요한은 “내가 속히 오리니”(계 22:7, 12, 20)를 세 번 언급함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도록 권면한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생명나무가 있고 다시 밤이 없고 다시 저주가 없는 장소이다(계 22:2-3). 신천 신지를 만드신 하나님은 “나는 알파(the Alpha)와 오메가(the Omega)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 22:13, 개역개정)고 말씀하시면서 이 모든 말씀을 요한에게 보이신 이유를 “교회를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계 22:16, 개역개정)고 말씀하신다. 마지막으로 요한은 지금까지 본 두루마리의 말씀에 어떤 것을 더 하거나 빼는 것은 생사의 문제가 걸린 심각한 일이라는 음성을 듣는다(계 22:18-19).
(2) 창세기와 계시록 비교
창세기(Genesis)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시작을 기록하고 인간의 역사의 시작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죄로 물들지 않은 에덴동산(the Garden of Eden)을 만드시고 아담(Adam)과 하와(Eve)를 그 안에서 살게 하셨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범죄하게 된다. 창세기는 인간의 범죄로 인해 창조의 질서가 일그러진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인간과 세상을 회복하시기 위해 메시아를 보내주시겠다는 구속계획을 예고하신다(창 3:15).
반면 계시록(Revelation)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성취되고 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은 신천 신지(The New Heaven and the New Earth)를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성도들을 위해 에덴동산보다 더 좋은 신천 신지를 마련해 두셨다. 에덴동산은 사람이 죄를 범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신천 신지에서는 죄를 범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 신천 신지가 우리 앞에 펼쳐지는 것을 볼 때 죄 범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완성될 것이다.
이제 창세기와 계시록을 요목별로 비교하기로 한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심을 전한다(창 1:1).
계시록은 하나님이 신천 신지를 마련하셨음을 설명 한다(계 21:1).
창세기는 해와 달과 별들이 존재하게 되었음을 말한다(창 1:16).
계시록은 해와 달과 별이 필요 없고 하나님의 영광이 빛을 발한다(계 21:23).
창세기는 실낙원 (Paradise Lost)을 묘사 한다(창 3:1-21).
계시록은 복락원 (Paradise Restored)을 설명 한다(계 2:7; 22:2).
창세기는 마귀의 간사함과 능력을 전한다(창 3:1-5).
계시록은 마귀가 불과 유황의 못으로 던져진 것을 묘사 한다(계 19:20).
창세기는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고 하나님으로부터 숨는 모습을 그린다(창 3:8-9).
계시록은 하나님이 성도들과 함께 거하고 하나님과 성도들의 긴밀한 교제를 그린다(계 21:3).
창세기는 생명나무를 지키는 모습이 묘사 된다(창 3:24).
계시록은 성도들에게 생명나무를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다(계 22:14).
실낙원이 복락원으로 회복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이 모든 것이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을 증명해 준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인간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음을 아시고 구약에서 메시아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리고 실제로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아가 그의 백성을 대신하여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신다. 이제 하나님의 구속역사 성취를 위해 남아 있는 사건은 예수님의 재림뿐이다.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신 이 역사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정리되고 하나님은 성도들을 신천신지(the New Heaven and the New Earth)로 인도하실 것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성도답게 삶을 이어나가야 한다.
우리가 시작할 때 읽었던 로마서 8장의 구절을 다시 읽도록 한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인간이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하면서 살 수 있도록 계획하시고 그 계획을 완성하실 것이다. 그 때는 바울의 표현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때이며 모든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을 멈추는 때이다. 그 때는 우리의 소망이 현실이 되는 때이다. 우리는 그 때를 참으면서 기다려야 한다.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18-25, 개역개정).
박형용 박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명예교수)/
'성경 상식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눈으로 보는 신구약성경 (0) | 2024.03.22 |
---|---|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님 기름부음 (0) | 2024.03.22 |
하나님의 섭리 (0) | 2024.03.20 |
선민 역사에 영향을 미친 고대 제국들 (0) | 2024.03.19 |
구약성서에 대한 다섯가지 물음 (0) | 2024.03.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