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에 대한 이해
성육신(Incarnation)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이란,
하나님이 인간의 속성을 입고 하나님의 아들이요 삼위일체의 제2격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인간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 교리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요 참 인간이다. 신성과 인성이 따로 떨어져 단절된 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통적으로 위격의 일치라고 언급되어온 인격적 일치로 예수 안에서 결합되었다. 두 본성의 일치로 속성이 감소 또는 혼합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자의 정체는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양성론).
인카네이션(Incarnation)이라는 말은 동정녀 마리아의 태 안에서 삼위일체의 2번째 위격의 신성과 인성의 일치가 이루어지는 순간 또는 예수의 인격 안에서 이루어진 그 일치의 항구적인 현실을 지칭한다. 이 용어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다시 말해서 인간의 속성을 입었다는 〈요한복음〉서두의 주장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로고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성육신 교리의 핵심은 선재하는 말씀이 인간인 나사렛 예수 안에서 구현되었다는 것인데,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성부와 인격적으로 긴밀하게 연합해 있으며 그가 복음을 설교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고 한다(→ 로고스).
그리스도의 선재에 관한 신앙은 〈신약성경>의 여러 서신들, 특히 〈빌립보서〉에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성육신은 본질상 하나님이고 하나님(성부)과 동등하지만 종의 신분으로 나중에 하나님에 의해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 예수의 자기비움으로 묘사된다.
더 정교한 성육신 신학의 발전은 예수의 신성문제나 예수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에 관한 여러 가지 잘못된 해석에 초대 교회가 대응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니케아 공의회(AD 325)는 그리스도는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태어난'것으로, 그는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라고 결정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예수가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졌다'는 데 있다. 이 교리는 칼케돈 공의회(AD 451)에서 더욱 분명하게 정의되었다. 이 공의회에서 예수는 완전한 '신'임과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며, 이 신성과 인성의 양 본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선언했다. 그리스도 인격의 통일성과 동시에 그리스도와 하나님, 그리스도와 인간의 통일성이 확보된 것이다.
예수의 신성과 인성 중 어느 한쪽을 강조하는 여러 경향들이 있어왔지만, 이후의 신학은 칼케돈 공의회의 정의를 반영했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일치가 그의 인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흔히 인정되어왔다.
예를 들면 위대한 거룩함의 은총이 바로 그것이다. 신학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의 일치는 인류를 죄에서 구원해주고 인간의 활동에 내재하는 잠재적 선(성육신 교리에서 유래함)을 인식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인간 전체를 위한 은총이라고 생각했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12s0881a
1. 성육신의 의미
성육신이라는 단어 자체가 성서에 나오지는 않지만, 성육신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안에"와 "육신")는 나옵니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썼습니다(요 1:14). 그는 또한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사실에 대해서도 썼습니다(요일 4:2; 요이 7). 어떻든지 간에 그분의 인간성에는 죄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 사실에 대해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그분이 오셨다고 쓰고 있습니다.
2. 성육신에 대한 예견들
A. 신인(God-Man)에 대한 예견
이사야 9:6에 나오는 메시야에 관한 예언에서, 이사야는 메시야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분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는 한 아기(인성을 의미함)가 날 것이라고 예언했고, 메시야의 성격에 대해서 그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엘 기보르(el gibbor), 신성을 의미함)이라 일컬어지는 분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에 대해 언급할 때에만 엘(el)을 사용하는데(이사야 31:3을 보라), 기보르(gibbor)란 영웅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 구절은 메시야의 가장 주요한 특징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으로 존재하는 영웅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한 구절에는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동시에 예견되어 있습니다.
B. 동정녀 탄생에 대한 예견(사 7:14)
이 예언에서 이사야는 동정녀 탄생을 성육신의 수단으로 예언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은 만약 이사야가 분명히 동정녀를 말하고자 의도했다면 베뚜라(bethulah)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히브리어의 알마(almah)를 '동정녀'라고 번역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알마(almah)가 성적으로 성숙한 결혼할 수 있는 여자를 의미하고, 베뚜라(bethulah)가 성별된 여자, 즉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 처녀를 의미한다는 점은 사실입니다(에 2:17; 겔 23:3; 욜 1:8). 그러나 비평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사야가 동정녀임을 확실히 나타내고자 했다면 베뚜라를 사용하는 것이 더 정확한 용법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외적으로 볼 때 알마는 처녀를 나타내는 전문적 용어는 아닙니다. 그러나 처녀성을 특징으로 가지고 있는 젊은 여자를 언급하는 단어입니다(창 24:43). 알마가 처녀가 아닌 젊은 여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증명될 수 있는 예는 한 군데도 없습니다. 셉튜아진트(Septuagint,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본)는 일곱 번 중에 두 번 그 단어를 마태복음 1:23과 같이 파르떼노스(parthenos)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 단어는 처녀성을 특징으로 가지고 있는 결혼할 수 있는 연령에 도달한 젊은 여자를 의미합니다.
3. 성육신의 증거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그녀가 메시야를 낳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을 때, 그녀는 자신이 사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천사는 그녀에게 핵심적인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실 것이다."(눅 1:35) 이 언급은 아기의 탄생 방법보다는 아기의 신적 생성이라는 사실을 더 강조하고 있는 언급입니다.
마태는 우리 주님의 가계 족보를 언급하면서 주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 조심스럽게 변호하고 있습니다(마 1:16). 그는 요셉이 마리아의 남편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예수님이 태어난 것은 마리아에 의해서였다고 오직 마리아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에게서'라는 표현을 위해 사용한 원어의 대명사는 여성 단수명사로서, 그 단어는 예수님이 마리아와 요셉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리아에 의해서만 태어났음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는 단어입니다.
동정녀 탄생의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동정녀 탄생이 그리스도께서 죄가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꼭 필요한 수단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기만 한다면 그 아기의 무죄성을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두 부모를 능력으로 덮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정녀 탄생은 탄생한 인격의 독특성을 보여주는 표시로서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 동정녀 탄생이라는 사실이 그리스도와 동시대에 살던 사람들에게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폭넓게 알려지게 되었겠습니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쓰여졌을 때에는 물론 그 사실이 알려진 상태였고, 그때로부터 초대교회는 동정녀 탄생을 핵심 교리로 여겼으며, 2세기 초 즈음에는 그 교리가 초대교회에 정착되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모두 처녀의 몸에서 탄생한 성자의 족보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41명의 선택된 이름이 포함되어 있고, 반면에 누가복음에는 77명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왕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 족보를 추적하고 있고, 누가복음은 아담까지 추적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이름들은 주로 요셉의 가계로 여겨지고, 누가복음의 이름들은 주로 마리아의 가계로 여겨집니다.
4. 성육신의 목적
왜 하나님은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그분의 아들을 보내셨습니까? 성서는 이 질문에 대해 몇 가지 대답을 줍니다.
A.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해서
비록 하나님이 우리 주변에 있는 자연의 광대함 등을 통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분 자신을 계시하시긴 하지만, 오직 성육신만이 비록 완전하지는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정수(the essence of God)'를 계시한 것이었습니다(요 1:18; 14:7-11). 인간이 성부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자에 대해서 아는 것이고,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서에 나와 있는 그분의 삶에 관한 기록을 공부하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그분이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계시가 인격화되었고, 그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계시는 완벽한 진리입니다.
B. 우리의 삶에 본보기를 주기 위해서
우리 주님의 지상 생애는 우리들에게 오늘날 우리들의 삶에 대한 하나의 본보기로서 여겨집니다(벧전 2:21; 요일 2:6). 성육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러한 본보기를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주님은 삶의 흥망성쇠를 경험하셨고 우리에게 경험적 본보기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서 주님은 그분의 본보기를 따를 능력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C. 죄를 사하는 효과적 대속물이 되기 위해서
성육신이 없었다면 우리들은 구세주도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죄는 그 대가로 죽음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세주는 죽을 수 있기 위해서 인간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보통 인간의 죽음은 죄에 대한 대가를 영원히 지불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세주는 또한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신인이신 구세주(a God-Man Savior)'를 가져야 하고, 우리 주님 안에서 우리는 그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히 10:1-10).
D. 다윗 언약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그녀의 아들에게 다윗의 보좌가 주어질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습니다(눅 1:31-33).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일을 통치하시기는 하지만(하나님은 분명히 그렇게 하신다), 다윗의 보좌에 대한 약속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invisible God)'에 의해서는 성취되지 않습니다. 다윗의 보좌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야는 인간이 되어야 했습니다.
E.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요일 3:8)
이 사역이 '그리스도의 나타나심(Christ's appearing)'이 의해 수행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해 보십시오. 여기에서 말하는 초점은 '그분의 오심(His coming)'에 있지, 흔히 여겨지는 바와 같이 '그분의 부활(His resurrection)'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을 패배시키기 위해서 왜 성육신이 필요했습니까? 왜냐하면 사단은 그가 차지하고 있는 영역인 이 세상에 패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사단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보내어지셨습니다.
F. 체휼하시는 대제사장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히 4:14-16)
우리의 대제사장은 그분의 우리처럼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시험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체휼(體恤, 몸으로 함께 느끼면서 긍휼한 마음을 가지심)하시는 제사장이 될 수 있도록 시험받으실 수 있는 입장에 처하기 위해 인간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G. 합당한 심판관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심판하시는 분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을지라도, 사실상 예수님이 그 심판관의 역할을 하실 것입니다(요 5:22,27). 모든 심판은 "주님의 인자됨을 인하여(because He is the Son of man)" 우리 주님에 의해 수행될 것입니다. 이 '인자'라는 명칭은 주님을 이 땅 및 이 땅의 사역과 연결시키는 명칭입니다. 왜 심판관이 사람이 되어서 이 땅에서 살아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내세우는 모든 핑계가 합당한 것이 아님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왜 심판관은 또한 하나님이기도 해야 합니까? 그것은 그분의 심판이 진실되고 공정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이와 같이 성육신은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 우리의 구원, 우리의 매일의 삶, 우리의 급박한 필요, 그리고 우리의 미래와 관련하여 수많은 파생적 진리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진실로 성육신은 역사상 가장 중심적 사실입니다.
ⓒ 촬스 라이리/이한규목사 번역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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