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계시록!!! 마라나타!!!

척스미스 예한계시록강해

하나님아들 2023. 11. 7. 00:01

 

척스미스 목사의 계시록 강해
호심경추천 0조회 15912.07.12 05:16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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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의 사항
1. 이 글은 전천년적인 기본 골격을 갖추고 있으나 성경구절을 세부적으로 자세히 다루지는 않습니다.

2. 이 글은 1970년대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예언해석에 있어서 당시의 세계정세와 상황에 따른 성급한 추정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감안해야 합니다.
3. 로마가톨릭의 영적 부흥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4. 본문에 인용된 성경구절은 개역한글판으로서 교리적 오류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독해해야 합니다.(NIV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변개를 넘어서 코메디 수준으로까지 의역된 곳이 계시록 22장 14절 등입니다.)

 
출처 - http://korean.pastorchuck.com/index.php?option=com_biblestudy&view=studieslist&Itemid=2&limitstart=150
 
요한계시록 1 - 계시


성경은 유일하며 세상에 있는 다른 어느 책과도 다르다. 끊임없는 오랜 비판 속에서도 성경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성경은 수천 년 동안 많은 사람들로부터 망치질을 당했다. 그 망치들은 낡아 없어졌지만 성경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성경은2,000여 년에 걸쳐서 50여명의 저자를 통해 기록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범죄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계획을 기록한 아름다운 이야기책이다.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기록한 것이며 성경의 마지막 책이다. 요한계시록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요한계시록 1:19에서 요한은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요한계시록 1장에서 요한은 그가 본 것-즉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기록했다. 이 계시가 바로 요한계시록의 첫 번째 부분이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는 현재 있는 일, 즉 교회에 관한 일, 교회의 봉사의 일, 세상에서 감당할 교회의 증거 등에 관해서 기록했다. 이 메시지가 요한계시록의 두 번째 부분이고, 이것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교회 시대를 말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4장부터는 계시록의 세 번째 부분으로 교회가 이 세상에서 데려감을 당한 후에(공중재림 후) 일어나게 될 일들을 예언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앞에 펼쳐질 미래에 속한 일이다.


요한계시록 1:1-2


킹제임스(흠정역) 성경 서두에는 "신성, 성 요한의 계시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인간의 머리말이다.요한계시록은 신성, 요한을 계시한 책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한 책이다. 요한계시록 1:1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말은 헬라어의 '아포칼립시스(apokkalypsis)'를 번역한 말인데, 이것의 문자적인 의미는 "감추인 것을 드러낸다."라는 뜻이다. 시청 앞에 제막되기 직전에 덮여있는 동상을 머릿속에 그려 보라. 벤드가 음악을 연주하고, 시장이 나와 연설하고, 그 동상을 제작한 예술가가 그 동상의 의미를 설명해 준다. 이윽고 극적인 순간이 되어 덮고 있던 막이 들려진다.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앞으로 시청 앞을 장식하게 될 이 동상을 보게 된다. 그 막을 들어 올리는 것이 헬라어로 말하면 '아포칼립시스(apokalypsis)'이다. 감추인 것을 드러내어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감추어진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있는 책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에 관해서 전혀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의 마음은 어두워져 있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혀 없다. 혹자는 눈과 마음에 막이 덮여 있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아예 원치 않는 사람들도 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알아보려고 찾지도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말씀해 주셨다. 과거에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였고, 오늘날 같은 마지막 세대에는 그의 귀하신 아들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시니, "이 아들을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충실히 나타내는 증인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싶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잘 살피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해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1:1)


이 말씀을 통해서, 이 계시가 우리에게 오게 된 경로를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계시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고, 그에게 앞으로 드러나게 될 영광도 보여주셨다. 십자가에 관해서 성경은,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라고 했다. 요한계시록의 대부분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있는 즐거움이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영원한 미래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게 될 자리를 그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예수는 그 계시를 그의 천사에게 주셨고, 다시 천사는 그것을 그의 종 요한에게 주었다. 그래서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다."( 1:2). 요한은 첫 번째 서신에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우리가 보고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기록했다. 요한은 자기가 보고들은 바를 쓰고, 하나님께서 쓰게 하신 것을 모두 충실히 기록했다. 이 계시는 음성으로만이 아니라 환상으로도 왔다. 요한이 이상 중에 본 영적인 실체들은 이상 중에 본 사람들로, 그들은 요한과 함께 대화하고 그가 본 많은 것들을 설명해 주고 있다.


요한계시록 1:3


요한계시록에는 축복이 함께 들어 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1:3)


요한계시록을 듣는 자와 읽는 자들에게는 축복이 있다. 계시록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책이었고, 요한계시록은 이 일곱 교회에서 읽혀지기를 바라고 쓰여졌기 때문에 각 교회를 위한 사본도 만들어서 보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서점이나 수퍼마켓에 책 진열장도 없었다. 글 쓰는 종이가 매우 진귀했다. 초기 글 쓰는 종이로는 이집트의 파피루스가 있었는데, 그 당시 이집트에서는 파피루스를 장려하여 가격을 올려 이익을 보려고 파피루스를 수출금지까지 시키기 시작했다. 그래서 버가모에서는 글 쓰는 종이로써 양피지를 발명해 냈다. 그러나 양피지도 역시 귀했다. 그리스도 당시에는 대형 도서관이 있기는 했지만 개인 소유의 책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래도 개인적인 서한을 쓸 제구는 갖추고 있었다. 각 교회에서는 편지의 사본을 받으면 그것을 교회에서 큰 소리로 읽어 주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예배시간에 여러 서신서와 요한계시록을 읽는 것으로 예배를 드렸다. 이 예언의 말씀을 듣는 자와 읽는 자와 거기 기록된 것들을 지키는 자들이 복되다고 했기 때문이다.


요한이 직접 요한계시록을 예언이라고 말한 점을 주시하라.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에는 미래를 살펴보아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장차 일어날 일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석 -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과거 해석법이 있는데 그것은 요한계시록의 모든 사건을 로마 제국에 맞서 대항한 교회의 투쟁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방법에 의하면 요한계시록은 여러 황제가 교회를 심하게 핍박했던 로마사 시기에 기록되었다고 하며,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초대 교회의 역사에서 이미 완성되고 실현된 것으로 해석된다. 역사적 해석법도 있는데, 이는 요한계시록을 세계의 체제에 대항한 교회의 투쟁사라고 본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로마 시대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고 본다.


영적인 해석법도 있다. 그런데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사건들을 완전히 혼동되게 만들어서 아무도 그 실상을 알 수가 없다. 모든 사건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어서 말하는 그 자체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영적인 비유로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성경을 해석하면 성경에 있는 어떤 권위나 교훈이 제거된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의 영적 해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래 해석법도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미래주의 관점이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있다. 미래주의 관점으로 성경을 읽으면 성경은 말한 그대로를 의미하며, 또 의미하는 그대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성경을 억지로 여기저기에 끼워 맞추려고 할 필요도 없고, 어떤 계획에 맞추려고 왜곡시킬 필요도 없다. 미래 해석법은 요한계시록을 읽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1:4-5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명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1:4-5)


일곱이라는 숫자는 요한계시록에 여러 번 나온다. 일곱은 때로는 하나님의 완전수라고 불리는데, 그 이유는 일곱이라는 숫자가 완전함 또는 총체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레가 일주일을 만들고, 일곱 음표가 한 음계를 이루며, 무지개에는 일곱 가지 빛깔이 있다. 그래서 일곱 교회는 완전한 교회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지리적으로 보면, 이 일곱 교회는 작은 원을 이루고 있다. 소아시아에는 이 일곱 교회 외에도 많은 교회가 있었다. 그 중의 한 교회가 골로새 교회인데 요한계시록에는 빠져 있다. 그러나 일곱이 완전함을 나타내는 숫자이기 때문에, 일곱 교회도 완전한 교회사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이 예언서에는 일곱 인과 일곱 나팔의 재앙, 일곱 뇌성,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 등이 있는데, 모두 하나님의 이 땅에 대한 완전하신 심판을 나타낸다. 따라서 '여덟'이라는 숫자는 새로운 시작을 나타낸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여덟 번째 날은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는 날이고, 일곱 음표후의 여덟 번째 음표는 새로운 음표를 시작한다. 헬라어의 알파벳에는 각각 고유한 숫자가 매겨져 있는데, 헬라어로 예수의 이름에 해당하는 모든 이름의 총 숫자가 모두 여덟으로 나누어 떨어진다는 사실도 매우 흥미롭다.(Jesus, Christos, Kuris)


그는 새로운 시작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이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성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과거에도 계시고, 현재에도 계시고, 미래에도 계신다.


그는 과거에 오셨고, 현재에도 계시고, 장차 미래에도 오실 분이시다. 또한 동시에 모두 계신 분이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과'영원한 현재'의 상태에 있다.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 여기에서는(요한계시록 3,4,5장에도 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는 일곱 명이 나온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일곱이라는 숫자는 성령의 완전하신 사역을 가리킨다.


이사야서 11장 첫 부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시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시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이렇게 성령의 일곱 가지 사역을 정의하여 기술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과 성령 그리고 "충성된 증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의 축복을 보내고 있다.( 1:5)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증거하는 충성된 증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배반당하시던 날 밤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계셨다.


빌립이 예수께 외쳤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대답하셨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기를 원하신다. 세상이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는 바라시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의 매우 중대한 의무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누구신지를 바로 증거하는 삶이어야 한다.


'증인'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martus'인데 거기에서 영어의 'martyr(순교자)'가 파생되었다. '충성된 증인(순교자)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예수 그리스도'( 1:5). '먼저 나셨다'는 말에서 먼저란 시간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우선 순위의 의미에서 먼저라는 뜻이다. '먼저 나셨다'는 것은 탁월함을 말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예수는 다시는 죽지 않고 영생한 몸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 다른 사람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서 두 번째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예수는 다시 죽지 않을 몸으로 살아났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이다.


그는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이다.( 1:5). 이는 왕국 시대에 예수가 갖게 될 위치와 칭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천사보다 저금 못하게 만드시고 그에게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씌워 주셨다". 세상은 혼란하고 사탄의 세력과 지배아래 있음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께서 이 땅의 임금들의 머리로 오실 때 임할 영광의 그 나라를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요한계시록 1:5에는 예수와 우리와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를 사랑하사" 당신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치 말라! 사탄은 그 사랑을 어떻게 하든지 의심하도록 만들려고 애쓴다. 사탄은, "너는 악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지금 너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으신다. 너는 틀렸다(실패했다)! 너는 하나님의 규례에 맞추어 살지 않았다. 예수는 너 같은 악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수군거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형편이 어떠함에 상관치 않고 당신을 사랑하신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 그리고 당신이 죄인되어 그를 거역할 때에도 그는 당신을 사랑하셔서 당신을 위해 돌아가셨는데, 당신이 그에게 마음을 열고 그를 따라 산다면, 그 풍성하신 사랑과 은혜를 얼마나 많이 체험하게 되겠는가?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1:5).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인간은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사랑으로 피를 흘리셨고 우리의 모든 죄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셨다.


요한계시록 1:6-7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1:6). 또는 좀더 문자적으로,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제사장들의 나라로 삼으신 그에게" 구약의 제사장에게는 두 가지 사역이 있다.


첫째로, 제사장은 하나님에게 백성들을 대표했다. 이 일을 행할 때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의미하는 12개의 돌이 박힌 흉패를 착용했다.


두 번째로, 제사장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대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제사장도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매인이었다. 예수는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셨고,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계신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시다.


그는 그곳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대리하고 계신다. 그 나라가 임하면 우리는 제사장들의 나라가 되어 백성을 대표하여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고 동시에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백성 앞에 서게 된다.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1:6).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려고 이 땅에 곧 돌아오신다. 인간의 시대는 거의 끝이 났다. 인간에 의한 세상은 이제 거의 마지막에 이르렀다. "그 날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우리는 지금 감해지고 있는 날들을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속히 처리하신다.


우리는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고 예수께서는 곧 오실 것이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도 그와 함께 다시 오게 될 것이다.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는 영광 중에 구름을 타고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고, 우리는 주님과 함께 그 땅에서 천년동안 다스리게 된다. 성경에는 우리가 해마다 예루살렘에 모여 경배를 드리고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 했다. 성경에는 그 때의 통치체제 성격이라든가 그것이 어떨 것이라는 것 등은 자세히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아마도 멋지리라 생각한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1:7).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름을 타고 오신다고 말한 곳은 많이 있다.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다니엘은,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라고 예언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 위에 계시다가 하늘로 올리어지고 구름으로 가리워 졌다. 천사들(흰옷을 입은 두 사람)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말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이것은 성도들의 구름, 증인들의 큰 구름으로 예수님은 그 가운데서 돌아오실 것이다."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1:7). 다시 오실 때 주님은 비밀히 오시지 않을 것이다. 비밀스런 작은 방으로 오시지 않을 것이며, 선택받은 특정한 몇 명의 사람만이 그것을 보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온 세상이 그가 다시 오심을 알게 될 것이다.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1848, 1878, 1917, 1918, 또는 사람들이 제시한 많은 연대와 날짜에 비밀스럽게 이루어진다는 이론을 분명히 반박하고 있다.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그런 이론들을 반박하면 그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가 우리들이 알 수 없는 곳에 오셔서 그가 온 것을 몇 사람밖에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라고 말씀하신다. 그를 찌른 자들은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1:7). 스가랴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언했다. 그는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고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가랴는 또,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통곡하리로다."라고 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한 사실로 슬퍼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당시 자기 민족이 예수가 메시아 되심을 깨닫지 못함과 현재까지도 자기 민족의 영적인 소경 됨을 인하여 매우 슬퍼하고 통곡할 것이다.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1:7). 스가랴는 그 슬퍼함이 죽은 독자를 인하여 통곡하는 여인의 통곡 같은 것이라고 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민족적 소경 됨을 인해서 애곡하고 슬피 울 것이다.


요한계시록 1:8-9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1:8).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원성을 설명하실 때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영어의 A와 Ω에 해당하는 헬라어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되신다. 그는 처음이요 나중이시다.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 시작했고 하나님으로 끝난다. 그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이다. 그는 영원하시다. 요한계시록 21:6에서도 예수님은 이와 똑같은 말씀을 하신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도 역시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존재이시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그는 알파와 오메가로 처음과 나중이 되신 하나님 아버지와 똑같이 영원하신 분이다.


이어서 요한은 자기가 처음으로 환상을 볼 때의 상황을 설명한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1:9). 요한의 아름다운 겸손이다. 그는 자기를 위대한 지도자로 말하지도 않고, 혹은 자기의 권위에 복종하라는 요구도 하지 않고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형제'라고 부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내에서 어떤 영적인 계급 체재가 이루어지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으셨다. 우리는 모두 한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다.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하나님께는 특별한 사람도 특히 좋아하시는 사람도 없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빌리 그레함과 당신을 똑같은 관심으로 보고 계시며 Dwight Moody, Charles Finney, John Wesley, John Knox, Martin Luther에게 기울이셨던 관심을 오늘날 당신에게 동일하게 기울이고 계신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보다 더 사랑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만 꾸준히 귀를 기울이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당신에게 똑같이 귀를 기울이고 계신다. 요한은, "나는 너희 형제요 동참하는 자라."고 말했다. 오늘날 사역자들이 형제요 동참하는 자와 같은 자세를 같게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라. 바울이 말했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 우리는 모두 함께 나누어야 한다. 우리는 한 백성이다. 무리가 바울 앞에 제사하려고 할 때 바울은 자기 옷을 찢으면서 말했다. "여러분 나도 당신들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나는 신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우리는 모두 똑같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개인을 생각하시고 사랑하신다. 그리고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속일 수가 없고,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다. 하나님을 눈가림만하여 적당히 대할 수도 없다.그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신다. 하나님께 압력을 넣을 수도 없고 강제로 권할 수도 없다. 하나님을 바라볼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려 애를 많이 쓴다. 하나님께 당신이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똑같이 대하시고 똑같이 사랑하신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1:9). 예수 그리스도의 참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야고보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라고 기록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주 여호와를 기다리는 인내를 가지라고 격려했다. 바울 역시 인내하라고, 곧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라고 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다"( 1:9).


로마제국하의 첫 번째 대박해는 네로의 정권 때에 있었다. 그 때 수천 명의 기독교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했다. 바울과 베드로도 네로의 박해 때에 죽었다. 그 후 도미시안(A.D. 81-96) 황제 때 두 번째 박해가 일어났다.  4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지키다가 죽어갔다. 요한이 밧모섬으로 귀향간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그곳에서 요한은 여호와의 이상을 받은 것이다.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었던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인해서 밧모섬으로 추방되었다. 교회 역사가인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요한은 끓는 기름 속에 던져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요한은 굴하지 않았기 때문에 에게해에 있는 에베소에서 약32마일(51.2Km) 떨어진 소아시아 해안의 바위가 많고 험준한 작은 밧모섬으로 보내어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실 특별한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밧모섬으로 추방되었다. 에베소 교회에 있는 박해와 그 소란함으로부터 떨어진 조용한 장소로 그를 옮기신 것이다.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에도 밧모섬에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요한은 밧모섬 귀향 후에(A.D. 96) 에베소로 다시 돌아와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을 수도 있다.


요한계시록 1:10 상반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1:10 상반절).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첫 번째는 주일날에 그 계시가 임했다는 것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한 주간의 여덟 번째 날이며 첫 번째 날인 주일을 주의 날이라고 불렀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날도 주일이었고, 교회가 함께 모였던 날도 주일이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명하기를 매 주일 첫날에 함께 모였을 때 연보를 내어, 자기가 갈 때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했다. 사도행전에 보면 기독교인들은 한 주일의 첫날에 함께 모여서 떡을 떼었다. 초대 교회사에서는 주일을 주의 날이라 불렀다.


안식교인들은 이날은 콘스탄틴 황제가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많은 이들로 하여금 그렇게 믿도록 잘못 역설하고 있다. 실제로 콘스탄틴 대제보다 2세기 앞선 터툴리안은 주일이 교회가 성찬식을 가지는 유일한 날이었다고 썼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이 그 날에 부활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물론 이것은 그의 논리이고 따라서 절대적인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주일의 첫날은 교회 역사를 보면, 초대 교회 때부터 그리스도께 예배하는 날로 따로 구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그러므로 요한은 주일날에 자기가 성령에 감동되었다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헬라어 성경에 의거해서 요한계시록 1:10 말씀을 번역하면 "주의 날에"라기보다는 "주의 날 안으로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여호와께서 요한을 시간의 방으로 데려가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요한을 마지막 시대로 옮겨가게 하셨다. 거기에서 요한은 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전쟁과 심판들을 직접 보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미래의 주의 날로 옮기셨다. 그래서 요한은 자기가 정말로 거기 있는 것처럼 이러한 사건들을 보고 기록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변화산에 데리고 가셨을 때도 일종의 시간의 방으로 데리고 가신 것이다.


이에 앞서 주님은 말씀하셨다.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엿새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다. 그 곳에서 예수님은 그 제자들 앞에서 변화되셨다. 그의 옷은 빛과 같이 희어지고 그 얼굴은 해같이 빛났다. 제자들은 하나님나라의 일에 대해서 예수님과 더불어 이야기하고 있는 모세와 엘리야를 보았다. 무슨 일인가? 그 제자들은 시간의 방에 들어가서 미래를 본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장차 영광을 보았다. 주님은 모세, 엘리야와 함께 왕국시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계셨다. 어쩌면 요한도 이렇게 주님에게 이끌려 시간의 방으로 들어갔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므로 요한을 잠시 영원의 차원으로 이끌어, 미래의 마지막에 일어날 모든 일들을 보여주시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지구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미 보셔서 알고 계신다. 그는 전지하시므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다음 번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떻게 발생할지, 어디서 일어날지도 정확하게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 대해서는 우리들의 삶은 마치 영화의 재상영과 같다. 따라서 요한이 장차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미리 보았을 가능성도 많다. 저자인 나는 개인적으로 이것이 본문에서 의미하는 바라고 생각한다. "주의 날 안으로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요한계시록 1:10 하반절-16


요한의 이상은 계속된다.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끝이라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10 하반절-12) "일곱 금 촛대는 광야에서의 성막을 연상시킨다. 성막의 성소 안에 비치된 거룩한 기구들 가운데 금 촛대가 있는데, 이를 "황금 메노라"라고 부른다.


그것은 본 줄기에서 가지가 셋씩 양쪽으로 나와 있는 나뭇가지 모양의 금 촛대로, 성막의 기구 가운데 하나이다. 이 일곱 가지에는 촛대로 쓰이는 작은 등잔들이 달려 있고, 이 촛대는 성소를 밝혀주고 있다. 이 일곱 금 촛대는 이스라엘 백성이 세상에서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나타내고 있는데, 곧 세상에 하나님의 빛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교회에 적용시키면 일곱 금 촛대는 세상에 있는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빛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13) 일곱 개의 금 촛대 사이를 걷고 계신 이는 인자로 표현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하셨고, 인자라고도 하셨다. 인자란 예수 그리스도가 왕으로 다시 오시리라고 예언한 다니엘의 예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나서 요한은 그의 옷차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맑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1:13-16). 주님의 얼굴은 해를 보는 것처럼 그렇게 빛나며, 주님은 촛대 사이를 걷고 계셨다.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요한은 여기에서 주님의 교회 사이에서 계시는 주님을 뵌 것이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긍휼과 말씀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도움을 베푸시고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만족시키신다. 주님은 지금도 일곱 개의 금 촛대 -모든 세대의 주님의 교회- 사이에 계신다. 요한은 주님의 오른손에 있는 일곱 개의 별을 보았다. 일곱 별은 이 일곱 교회의 사자들이다(참조,  1:20). 이 부분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서술적으로 묘사한 바 있다.


요한계시록 1:13-16까지의 말씀은 고난받는 구세주의 모습이 아니라 하늘에서 영광 중에 계시는 높으신 여호와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요한은 영광 중에 계신 주님을 보고 그 영광 가운데 계신 주님을 서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에서,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 하셨다. 주님은 그 영광이 다시 되돌려져서 우리가 영광스런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되기를 바라신 것이다. 여기에서 요한은 우리가 나중에 뵙게 될 그 주님의 모습을 보고 있다.


주님의 얼굴은 한낮의 태양과 같이 빛나고 있고 그의 머리와 털은 양털 같고 눈처럼 희다. 눈은 불꽃같고 발은 풀무에 단련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큰 물소리와 같으며 그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온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요한계시록 1:17-18


주님을 볼 때 요한은 "그 발 앞에 엎드려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1:17) 요한은 모든 환상에 완전히 압도되었고, 또 아주 놀라운 환상을 받은 다니엘도 항상 그의 발 앞에 엎드려졌다. 다니엘도 "나 다니엘이 혼절하여 수일을 앓다가 내가 그 이상을 인하여 놀랐고"라고 말했다. 다니엘은 영적 차원을 거치고 영적인 계시를 받고 난 후 실제로 앓았다. 사도 바울도 여러 계시를 받는 것이 지극히 크므로 육체에 가시를 받았다고 했다.


여기에서 요한은 발 앞에 엎드려져 죽은 자 같이 되었다. 요한계시록을 읽어 나가다 보면 요한은 여러 번 엎드려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런 종류의 경험을 겪는 것은 분명히 놀라운 영적인 능력의 체험이다. 예수님은 오른손을 요한에게 얹으시고 말씀하셨다.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17-18) 예수님께서 음부와 사망을 이기셨다. 그는 승리하셨다. "내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이는 갇힌 자를 자유롭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주님은,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기억하라.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들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이미 죽어 무덤과 음부에 갇힌 자들에 대해서는, "내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음부를 열어 갇혀 있던 영혼들을 놓아 주셨다.


사도 바울은 위로 올라가신 주님이 먼저 땅 아래 곳으로 내려오신 동일한 분이시라고 말했다. 주님은 위로 올라가실 때 사로잡힌 자를 사로 잡으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고 했다. 예수님은 음부를 열어 아브라함과 믿음을 가지고 메시아의 오심을 믿고 기다리고 있는 자들을 구하셨다.


요한계시록 1:19-20


요한계시록의 열쇠가 여기서 발견된다. 여호와께서 요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1:19) '장차'라는 말은 헬라어로 'meta tauta'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일 후에'라는 의미이다. 이 명령으로 인해서 요한계시록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요한이 본 것으로 요한계시록 1장에 있는 그리스도의 환상, 이제 있는 일로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의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 이러한 일들이 "있은 후(meta tauta)"에 될 일로 요한이 보는 미래의 사건들이다.


요한계시록 4장이 'meta tauta',  '이 일 후에'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무슨 일 후에'라는 말인가? '교회의 일이 완성되고 난 후에'라는 말이다.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 오라 이후에(meta tauta)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4:1).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4:1부터는 미래에 관한 일들이다. 그것은 아직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교회의 임무가 이 세상에서 다 이루어진 후에 일어날 일들이다. 다음 양식을 따르면 요한계시록의 구분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이 본 것, 현재 있는 일, 이 일 후에 일어날 일들로써 나눌 수가 있다. 예수님은 요한이 본 환상을 설명하신다.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1:20)


'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