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와 교회
설교자: 김광채 목사
서울대학교 학사 및 석사
독일 하이델베르그 대학교, 신학박사
개신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교수
개신대학원대학교 총장
(현) 새날개혁신학연구소 소장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요한계시록 21:1-4)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1)계셔서 어떤 사본에, 「계셔서 저희 하나님이 되시고」가 있음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하나님 나라와 교회
2009. 3. 1 (주) 11:00 예배 설교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활약한 불란서 신학자 가운데 알프레드 루아지(Alfred Loisy, 1857~1940)라는 사람이 있다. 루아지는 1902년 간행된 ??복음과 교회??(L'Evangile et l'Eglise)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그런데, 도래한 것은 교회였다(Jesus annoncait le royaume, et c'est l'Eglise qui est venue)”. 루아지의 이 말은 웬만한 교회론 책에는 다 인용되는 말이다. 그만큼 교회의 본질에 대하여 고민하는 사람은 한번 쯤 반드시 새겨 보아야 할 말이다.
루아지의 이 말 속에는 “현실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와 같지 않다” 아니 “같을 수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루아지의 이 말은 이제까지 “교회 =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해 온 사람들에게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래서, 루아지는 1908년 로마가톨릭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가톨릭교회 입장에서는 루아지와 같은 사람을 자기 교인으로 인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 우리 개신교 목사들 입장에서도 루아지와 같은 사람을 쉽게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러나, 루아지의 이 말은,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 무엇이냐에 대한 우리의 고민에 중요한 답 하나를 해 주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야말로 교회의 존재이유라고 하는 것이다. 교회는 자기목적적 기관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교회가 자기목적적 기관이 아니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교회는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교회의 모든 기관,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존재한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봉사하지 않는 교회 기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봉사하지 않는 직분자가 있다면, 그 기관과 그 직분자는 하나님 나라와 올바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봉사하지 않고 있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 나라와 올바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약 시대의 유대인들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모두 자기들은 하나님의 선민이라 생각했다. 다른 말로 하여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 생각했다. 중세 시대와 종교개혁시대 교황들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모두 자기들은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 중 과연 몇 퍼센트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예수님의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었다. 마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에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복음 사역을 시작하실 때 첫 일성이 무엇이었나? 그것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이었다. 산상수훈의 첫 일성이 무엇이었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은, 천국 백성이 누리는 복이었다.
예수님의 비유는 어떤가? 예수님의 비유는 모두 천국 비유였다. 마 13: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마 13:31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마 13:45-46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마 13: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왜 예수님은 천국, 곧,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는가? 그것은, 독일의 신학자 에버하르트 융엘(Eberhard Juengel, *1934)이 잘 말해 주고 있다. 융엘이 쓴 책 가운데 중요한 것은 1962년에 초판이 나온 <바울과 예수>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융엘은,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비유를 많이 사용하신 데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융엘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비유적으로만 임재하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 나라가 비유적으로만 임재하는가?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에 대한 융엘의 답은? 그것은, 세상과 하나님 나라 사이의 근본적 차이에 기인한다. 이것이 융엘의 입장이다. 세상과 하나님 나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어떻게 차원이 다른가?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차이는 인간과 하나님의 차이를 살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어떤 분? 우리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분이시다. 우리 육신의 손으로는 만질 수 없는 분이시다.
여기서 히브리 종교의 가장 큰 특징에 대해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종교는 대부분 우상/신상을 만든다. 불교의 불상이 대표적인 예다.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들도 대부분 우상을 만든다. 하지만, 히브리 종교는 우상숭배를 엄격히 금지한다.
십계명 제2계명. 출 20:4-6.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히브리 종교가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데에는, 하나님은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분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요 14: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요 14:9. 예수님의 답.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도, 하나님은 우리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분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하나님은 가시적 세계 혹은 경험적 세계를 초월해 계신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처럼 하나님의 모습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미켈란젤로 같은 대미술가가 아담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그려 놓았을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보면, 하나님은 하얀 수염이 달린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과연 하나님이 그렇게 생기셨을까?
미켈란젤로의 그 그림은 소위 신인동형설(神人同形說, anthropomorphism)에 근거한 그림이다. 로마가톨릭은 우상숭배의 문제를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로마가톨릭은 성상숭배까지 한다. 그러나, 성상숭배는 엄연히 우상숭배다. 마리아숭배도 마찬가지다. 우리 개신교는 우상숭배를 거부한다. 당연히 성상숭배, 마리아숭배, 성인숭배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에게는 육신이 있기 때문이다.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육신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기가 쉽다. 요즘 우리나라에는 성형수술이 유행하고 있다. 한국의 성형수술 기술 수준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외국인들까지도 성형수술 받으러 한국에 오고 있는 실정이다. 왜 성형수술이 유행하는가? 사람들이 정신적인 아름다움보다 육신적인 아름다움을 더 추구하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것은 눈에 안 보인다. 파악하기 어렵다. 반면, 육신적인 것은 눈에 보인다. 파악하기 쉽다.
그러나, 잘 아는 대로,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진정한 가치를 지닌 것이 있다. 그것을 우리는 내면적 가치 혹은 영적인 가치라 부를 수 있다.
삼상 16:6-7.
6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람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기 쉽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다.
하나님 나라의 참된 백성은 외적인 것에 현혹되지 않는다. 외적인 것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것이다. 하나님을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존재. 그것은 다 시간적 존재라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시간적인 것에 연연하기가 쉽다. 그러나,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가장 중요한 점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인간이 시간 속에서도 영원을 사모한다는 데 있다. 전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우리가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우리 인간도 시간 속에 산다는 점은 다른 동물과 같다. 우리 인간도 육신을 가졌다는 점 역시 다른 동물과 같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시간과 육신을 초월한 세계와 연결될 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우리 눈앞에 보이는 그것에만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다.
여기서 나는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다”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우리 인간이 우리 눈앞에 보이는 그것에만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가능성이다. 이 가능성이 가능성으로 끝나지 않고, 현실성이 되어야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다. 이것은 오직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이루어지는 일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인가? 그곳은 오직 택함을 받은 사람만 갈 수 있는 곳이다. 마태복음 22장에는 천국 잔치의 비유가 나온다. 이 비유의 끝에 이런 말씀이 있다. 마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다 천국 잔치에 초대하셨다. 그러나, 초대받은 사람이 다 천국 잔치에 참여한 것은 아니다. 오직 택함을 받은 자만이 천국 잔치에 참여하였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육신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잘 아셨다. 우리가 외적인 것에 쉽게 현혹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잘 아셨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설명하실 때 비유를 사용하셨다. 공중을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를 가지고, 천국의 백성 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가르쳐 주셨다. 천국 백성은 어떤 자들인가? 그들은 공중을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를 보고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는다. 빌 4:6 말씀 대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자들이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 특성은 오직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만 이해가 된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 특성을 설명하면서 “신앙의 유비”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로마가톨릭교회에서는 “신앙의 유비”라는 말 대신 “존재의 유비”라는 말을 사용한다. “존재의 유비”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이 세상의 보이는 것을 통해 계시된다는 것이다.
일견 그럴 듯해 보인다. 그래서,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없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는 말이 된다. 하나님을 모르고 어찌 하나님 나라를 알 수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가톨릭교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연계시를 통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다. 주님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죄 많은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아는 것. 이것만이 우리 하나님에 대하여 제대로 아는 길이다. 자연계시는 믿음이 없이 이성만으로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믿음으로만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존재의 유비”가 아니라 “신앙의 유비”가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치 보는 것처럼 믿는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하는가? 그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까지 넘겨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란 무엇인가? 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이 땅에서 이룬 공동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자기들이 이 땅에서 순례자라는 것을 잘 안다. 순례자? 이 말 속에는 시간적인 존재라는 뜻이 포함돼 있다. 시간 속에 살면서도 시간을 초월하면서 살려고 하는 자. 이런 자들이 순례자들이다. 진정한 교회는 이런 사람이 모여서 이룬 공동체다.
진정한 교회 공동체는 이 땅에 영원한 소망을 두지 않는다. 시간을 초월한 세계, 육신을 초월한 세계에 소망을 둔다. 그렇다 해서 이 땅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본문 말씀대로 참된 교회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 새 하늘만 바라본다 하지 않았다. 새 땅도 바라본다 하였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세계다. 이 영원한 세계가 시간 속에 들어온 것. 이것이 진정한 교회다. 그래서 시간 속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를 통하여 비유적으로 임재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를 통하여 비유적으로 실현된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와 똑같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죄 많은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죄가 많을 뿐 아니라 연약하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단 하루도, 아니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이런 것이다 하는 것을 온 세상에 보여 주고 싶어하신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교회가 할 일이 참으로 많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홍보처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시민이 되고 싶은 사람은 다 교회로 모여들게 되어 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는 이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첫째, 잘못된 성직자주의와 교회중심주의 때문이었다. 잘못된 성직자주의와 교회중심주의는 평신도들의 역할을 축소시켰다. 교회에서 축소시켰고, 사회에서도 축소시켰다. 평신도들이 일반사회에서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에 대해서 성직자들은 과소평가하였다.
그래서, 평신도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지 못하고, 주중에도 교회로 불러들이는 일에 급급하였다. 그러니까, 평신도들이 자기 전공 분야에서 최고가 될 수 있는 길을 교회 스스로가 막은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교회는, 평신도들이 자기 전공 분야에서 최고의 존재 내지 독보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도와야 한다. 그래서, 자기의 전공을 통해서 사회에 봉사하고, 나아가 하나님 나라의 홍보대사의 역할을 하도록 도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목회자들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목회자들은 문자 그대로 종이다. 혹은 머슴이다. 그러나, 종이라 해도 하나님 나라를 위한 종이니까, 영광스러운 직책이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섬기는 자가 왕이다. 문자 그대로 Servant Leadership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평신도들이 사회에 나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봉사 잘할 수 있도록 최대한 돕는 사람이 돼야 한다.
어떻게 보면 교회는 큰 가족이다. 그리고, 이 가족관계는 하나님 나라에까지 연장될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 본문 3절과 4절.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여기서 말하는 장막이란 무엇을 상징하는가? 가족의 처소를 상징한다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가족들은 하나님의 장막에 거한다. 가족의 중요한 특징이 무엇인가? 그것은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다. 오늘날은 소가족제도, 아니, 핵가족제도가 주를 이루고 있다. 독신가구도 늘어 가고 있다. 이것이 개개인의 독립성을 보장한다는 점에서는 좋지만, 좋지 않은 점도 있다.
교회는 이런 점에서도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말하자면, 교회가, 옛날의 대가족이 하던 일을 상당 부분 흡수하는 것이다. 물론, 무슨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인위적으로 하는 것은 꼭 바람직하다 할 수 없다. 다만, 가족적인 분위기가 되도록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여겨진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와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물론, 오늘의 본문은 주님이 재림하신 다음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주님이 재림하시기 이전 상황은, 고통과 눈물이 반드시 따르게 되어 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선취(先取)하는 장소다. 선취. 문자 그대로는 “미리 취한다”는 뜻이지만, “미리 맛본다”고 번역하면, 훨씬 더 실감이 날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와 똑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종말론적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맛보는 장소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맛보고 싶은 것. 그것은 의와 사랑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죄가 많고, 이 세상에는 사랑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무엇인가? 그것은 이기주의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사랑이다. 그리고, 당연히 의가 짓밟히기가 쉽다.
나는, 교회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맛볼 수 있게 해 주는 장소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언젠가 사회봉사에 대해서 이야기하였고, 네트워크교회에 대하여도 이야기하였다. 나는 오늘 그 이야기를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내가 전에 제시했던, 모든 방안은 결국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지향해야 하는 것이라는 점은 말씀 드리고 싶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노력으로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노력하지 말자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이루시는 분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기도 제목은 그러므로,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는 것이다. 세상 끝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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