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안셀무스의 신존재 증명

하나님아들 2023. 1. 8. 23:17

안셀무스의 신존재 증명

신존재의 증명
{그러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신을 알지도 못하고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이에 대한 안셀무스의 독특한 생각은 그의 신존재에 관한 존재론적(혹은 본체론적) 증명 속에 나타나 있다. 이 증명은 신의 관념으로부터 출발하여 신의 實在를 논증하는 것이다. 이런 논증 방식은 '선험적'인 것, 풀어 말하며 경험에 앞선 것을 말한다.}<가철69>
{안셀무스가 엄격한 증명 의도를 가졌다는 것은, 슈미트가 매우 명백하게 밝혀 냈다. 그렇더라도 독자들이 안셀무스의 목적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플라시99>
안셀무스가 신앙을 개인적 신념으로 요구하면서도, 그 증명 과정 자체를 위해서는 개인적 신념을 배제한다는 사실이 복잡하게 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나 신의 현존재나 선성, 그리고 세계 창조, 심지어 삼위 일체까지도 엄격하게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칸트 이후의 학문 개념을 거스르는 셈이 된다. 그러나 안셀무스의 학문 개념은 칸트 이후의 학문 개념과 달랐다. 즉 안셀무스는 세계 포괄적 구조 능력을 전제로 했다. <플라시100>
수많은 개별적인 사과를 동일한 명칭이 ‘사과’라는 명칭으로 부르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 수많은 개별 사물은 바로 그 명칭이 지칭하는 일종의 실재적 공통성을 가졌을 것이다.
안셀무스는 인간의 사유가 통일적이면서도 다양한 세계 근거의 현재성을 증명해 내야 한다고 하였다. <플라시101>}
역사적 고찰
[정의채81,91-100]
{안셀무스의 사상은 플라톤 계통에 속하는 사상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플라톤에 있어서는, 개개의 사물보다는 개개의 사물을 포함하는 통칭이 더욱 고차적인 실재였다.
이모, 김모 보다는 그들을 포함하는 통칭인 '사람'이 더욱 실재에 가까운 것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개념적 지식론에서 유래 되었다.
개물이 아니라 보편이 실재요 또 개물의 근거라는 것이 그의 중심사상이다. 신의 존재에 관한 안셀무스의 소위 존재론적 증명은 이러한 실재론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본질로서의 신은 안셀무스에게 전달된다. 안셀무스는 플라톤에 의해 그 제자들에게 전달된 본질존재론에 충실을 기하다. 
물론 안셀무스가 'Qui sum'(나는 있는 자)의 성서구절과 관련하지만 그는 신에게 고유한 것은 '그가 무엇인가'의 본질적 문제로 본다.
신의 고유한 속성은 항상 같은 것으로 있는 것이며 다른 것과의 어떠한 혼합도 갖지 않는 것이다. 신은 순수하고 단순한 존재이다.(Proslogion 22)
안셀무스가 때에 따라 실체(substantia) 혹은 본성(natura)이란 말을 쓰지만 존재 자체로서 받아들인 신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본질(essentia)이란 말이 더 적합한 것으로 생각한다. - 본질은 '존재'(esse)와 '유'(ens)에 대한 명사이다.
그러므로 안셀무스에 있어서 본질은 '있는 것', 혹은 '존재하는 것', '자립하는 것'이며 신이 최고로 존재하는 자라는 것은 최고본질로서 있다는 것이다.}

1) Monologion에서의 하느님의 존재 증명
[85/139-142]
{『모놀로기온』에는 계시의 힘에 의하여 입증되는 내용은 전혀 없고 이성의 힘에 의하여 입증되는 내용만 있다. 그러나 『모놀로기온』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논증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Monol. 1, 145A) <질송98,193>}
{안셀무스의 저술 중에서 가장 깊고 가장 힘찬 부분은 신의 존재의 증명에서 볼 수 있다.
이 신의 존재의 증명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신에 투철하면서, 그 변증하는 짜임새의 견고함과 그 엄밀한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증명을 넘어서는 것이다.
{안셀무스는 Monologion(獨語錄)에서 피조물 가운데서 발견되는 완전성의 여러 단계로부터 하느님의 존재 증명을 전개시키고 있다.
1장에서는 이 논증을 선(善)에 적용하고 
2장에서는 '크기'에 적용하고 있다.
그가 말하고 있는 크기라는 것은 양적인 크기가 아니라 예지와 같은 성질을 의미하며, 주체가 이러한 성질을 많이 소유하고 있을수록 그만큼 더 선한 것이다.
양이 크다는 것이 질이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질은 경험의 대상들 가운데서 여러 가지 정도로 발견된다. 
따라서 이 논증은 예컨대 선의 여러 단계에 대한 경험적인 고찰에서 시작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논증은 '경험적인'(a posteriori) 증명이다.
완전성의 상이한 정도에 관한 판단(안셀무스는 물론 이 판단이 객관적인 근거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은 완전성의 규준에 대한 관계를 나타내고 있는 반면에, 
사물들이 상이한 정도를 따라서 객관적으로 선을 분유(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이 규준 자체가 객관적이라는 것, 
즉 예를 들어 모든 선한 것이 참여(분유)하는 하나의 절대적인 선이 존재하여 그것에 참여하는 것은 각자의 형편대로 그 절대적인 선에 상이하게 접근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논증은 성격상 플라톤적이며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적인 사고 방식을 따라서 보다 더 선한 것이 있다면 최고선이 있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넷째의 길'(Via quarta)에서 다시 나타난다.
이 증명의 형식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선의 여러 단계에 관한 판단의 객관성과, 또 안셀무스의 논증이 근거로 하는 원리를 증명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이 증명은 다음 두 개의 원리가 승인된 것으로서 상정하고 있다.<85/139=가철71; 질송98,193>
원리1: 모든 사물은 완전성에 있어서 동등하지 않다는 것 (경험에서 관찰할 수 있는 사실로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원칙)
원리2: 다소나마 완전성을 가지는 것은 절대적 완전성에 관여함으로써 그 완전성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좀더 높은 정도나 좀더 낮은 정도의 완전을 가진 사물들은 그 완전을 가장 높은 완전에 포함되어 있는 동일한 완전으로부터 그 완전을 얻는다. <질송>
상대적인 것들은 언제나 절대적인 것의 분유이며, 그러므로 절대적 존재는 그 분유들의 존재에 의하여 요구된다는 사실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두개의 원리는 감각적으로 주어진 것에나 이성적으로 주어진 것에나 다 적용되지 않으면 안되고, 이 주어진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이를테면 행복을 논증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외<의> 추상적 개념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여기서는 문제가 안 된다.
(1) 첫 번째 증명: 존재에 나타난 완전(善)으로부터의 논증
{첫번째 증명의 출발점은 사물 속에는 선(善)이 있다는 사실이다.<질송98,193>
이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니, 실로 우리는 사물들을 원하며 오직 사물들이 선하다고 판단하므로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좋은 것(善)을 <맛보고 즐기고자/享樂하고자> 욕구한다. 따라서 우리가 좋다(善)고 판단하는 이 모든 것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그것을 우리가 반성하기에 이르른다는 것은 대체로 무리라고 할 것도 아니고 또한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를 신에게로 인도하는 것은 우리의 내적 생활의 내용에 관해서나 또는 우리의 소원이나 소망의 대상에 관한 자연스러운 이 반성인 것이다.
생각컨대 우리들은 가지 가지의 행복이 숱하게 존재하는 것을 감각에 의해서 실증하고 이성에 의해서 식별한다.
또 한편 만물에는 하나의 원인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으나 실상 좋은 것은 각각 그 특수한 원인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선한 사물마다 자기의 특별한 원인이 있는지 이 모든 선에 대하여 유일한 원인은 없는지 자연스럽게 의심할 수 있다.<질송>)
그런데 다소나마 완전성을 가지는 모든 것은 단 하나인 동일한 원인에 관여함으로써 그렇다는 것이 아주 확실하고 명백한 것이다. 
마치 다소나마 공정한 것은 그것이 많고 적건 간에 절대적인 공정에 관여하기 때문에 공정한 것이듯이, 특수한 모든 행복도 유일하고 동일한 선에 관여함으로써만 좋은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좋은 것(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다(善)고 하는 모든 좋은 것을 다 좋게 하는 그 원인이 되는 행복은 참으로 커다란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이와 다른 모든 행복은 이 원인인 행복으로 말미암아 좋은 것이지만 그 자체로서 좋은 것, 즉 善自體는 그야말로 완전한 선(完全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다른 것에 의해서 좋은 것은 어떤 것이나 그 자체에 의해서 좋은 것(善自體)에 비해 결코 더 나을 수가 없는 것이다.}
최고선으로서의 신
{그러므로 이 선자체, 즉 완전한 선이란 가장 좋은 선(最高善)이기에 이 지고한 선은 至上의 행복이 아닐 수 없으며, 그런 것은 그것보다 나은 어떤 것도 없다고 하는 점에서 다른 모든 것보다 뛰어난 것, 즉 월등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자체 좋은 것, 즉 善自體는 절대적으로 좋은 것이고 이것은 가장 완전한 선이니 또한 最高善이고, 이런 것은 가장 위대한 것이 아닐 수 없으니 또한 절대적으로 커다란 것, 말하자면 그것보다 더 커다란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서 최대의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것은 모든 실재하는 것보다 탁월하고 월등한 최고의 실재라고 할 만한 최고 존재인 것이다. 이것은 모든 완전성을 갖추고 있는 최고완전자가 아닐 수 없으니 이것을 바로 우리들은 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Monol. 1, 145B-146B)
(2) 두 번째 증명: 공통으로 갖고 있는 완전으로부터 (Monol. 3)
{우리는 이 증거의 기반을 넓힐 수 있다. 존재에 나타난 완전으로부터 논증하기보다 존재들이 서로 정도는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완전으로부터 논증할 수 있다. 
그 완전은 곧 존재다. 사실상 존재하는 모든 것은 원인을 갖고 있다. (질송98, 194)} 
{모든 사물은 숱한 원인을 가지는가, 아니면 다만 하나의 원인밖에 안 가지는가? 만약에 우주가 숱한 원인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것이 결국은 단 하나의 원인으로 돌아가느냐? 그렇지 않고 각자 독립하여 존재하느냐?
1. 만일 숱한 원인이 결국 하나로 돌아간다면, 이 유일한 원인이 우주의 원인
2. 만일에 그런 숱한 원인이 각자 독립하여 존재한다면, 그것은 각자가 독립하여 존재하는 이 능력만은 적어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그런 것으로 하여금 존재이게 함은 실로 이 공통된 능력인 것이다.
3. 숱한 원인이 서로 간에 생겨난다 - 하나의 물건이 그 존재를 부여하는 다른 물건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이성에 안맞는 가정}
{이는 어떤 관계의 조건에도 타당하지 않고 관계 그 자체에도 타당하지 않다. 주인과 종은 서로 상대적이다. 그러나 각각은 다른 것 때문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스스로 생겨난 그들을 연합시키는 이중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 관계는 두 진짜 주체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이 두 진짜 사이에 있다. <질송98,195>
그러므로 하나의 유일한 가설만 받아들일 수 있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유일한 원인 때문에 존재하며, 스스로 존재하는 이 원인은 하느님이다. (Monol. 2; 146-147).}
(3) 세 번째 증명: 사물이 소유하는 완전성의 정도에 의한 논증 (Monol. 4)
우리를 신에게로 인도해 갈 수 있는 제3의 논증은 여러 사물들이 가지고 있는 완전성의 정도에 관한 것
{말이 나무보다 우월하고, 사람이 말보다 우월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
다른 물건보다 나은 것이기는 하지만 다른 어떤 물건보다 결코 못하지 않는 그런 한 자연이 필연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85/142>
우주의 단계의 정상에는 많은 자연이 동등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가정 - 그렇다면 그런 것들이 공통하게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말미암음.
{이제 만일 그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것이 그들의 본질이라면, 그들은 공통된 본질을 갖고 있는 것이며 그들은 하나의 유일한 본성일 따름이다. <질송98, 195>
반면에 그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것이 그들의 본질 이외의 것이라면, 이 공통된 요소는 그들보다 우월한 다른 본성일 것이며, 이 본성을 그들은 분유한다. (Monol.4; 148-150)
이 증명은 하나의 유일한 항으로 계열을 끝내지 않을 수 없다는 내용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때 이 계열은 유한한 수의 항을 포함하고 있는 위계다.}
위의 세 개의 증명은 공통점이 있으니 그 증명들이 다 주어진 실재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점과 경험의 여러 면의 하나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
실제로 행복, 존재, 그리고 여러 가지 정도의 존재가 존재한다. <85/143>
세 개의 증명은 매우 논증적이긴 하지만 너무 자상하다. 그래서 그 자체로써 충분하고, 거꾸로 다른 모든 증명이 그것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나오게 되는 그런 유일한 증명이 있어야만 한다. 

2) Proslogion에서의 하느님의 존재 증명
{안셀무스는 단순하고 가장 즉각적으로 명백한 신 존재 증명을 발견하기를 언제나 바랐다. 
그가 보기에 『모놀로기온』의 세 가지 논증들은 타당하지만 아직도 복합적인 것으로 보였다. 오랜 연구 후에, 그는 마침내 새로운 방법을 발견했다. <질송 98,196>
이 방법의 유일한 전제는 ‘하느님’이라는 낱말에 대한 지식이며, 그 말에 돌릴 수 있는 유일한 의미에 대한 지식이었다. 
『프로슬로기온』에 있는 것처럼, 이 증명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라는 일반적인 규칙을 한번 더 적용한 것이다. 사실상 이것은 그가 자기 논문에 맨 처음 붙였고, 나중에 『프로슬로기온』의 제목으로 바꾼 제목이었다.
적어도 우리는 ‘하느님’이라는 낱말을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이 존재하심을 믿으며,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은 어떠하시다고 믿는 그 분이심을 믿는다. 즉 하느님보다 더 큰 존재는 없다고 믿는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참되다고 믿는 것은 자연적인 이성의 빛으로 논증될 수 있는가?}
{『프로슬로기온』에서 안셀무스는 이른바 '본체론적 증명'을 전개하고 있는데, 
이는 하느님에 대한 관념으로부터 하나의 실재, 즉 존재하는 자로서의 하느님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는 동료들의 요청과 '모놀로기온'의 복잡 다단한 논증의 재검토에 의해서, 하느님의 실체에 대해서 우리가 믿고 있는 모든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한 논증을 찾아낼 가능성을 검토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 증명은 이전의 자기 '소논문'에 있는 많은 논증을 보충하는 역할을 다할 것이다. 마침내 그는 다음과 같은 증명을 찾아 내었다고 생각했다. 
{안셀무스에 의하면 "어리석은 자는 자기 마음 속으로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어리석은 자에게 적어도 그의 정신 속에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치면 그는 그것을 이해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이해하는 모든 것은 그 이해 속에 존재하는 까닭이다. {그가 그 존재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가 이해하는 것은 그의 이해 속에 존재한다. 어떤 사물이 실제로 존재함을 인식하는 지성이 없더라도 그 사물이 그 지성 속에 존재하는 일은 실제로 가능하다. 화가가 자신이 그릴 작품을 스스로 그려볼 때, 그는 그 작품을 자기의 지성 속에 갖고 있다. 그러나 그가 아직 그 작품을 그리지 못했을 때 그는 그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다. 반대로 그가 그 그림을 그렸을 때 그는 자기 지성 속에 그 작품을 갖고 있으며 동시에 그 실존을 의식하니, 그가 이미 그것을 다 그렸기 때문이다. <질송98,196>
그러므로 우리는 어리석은 자에게 적어도 그의 마음속에는 가장 큰 존재가 있음을 확신하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이 말을 들을 때 그는 그 말들을 이해하고 그가 이해한 것은 그의 지성 속에 있기 때문이다.} 

(신의 개념은)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다. 이와 같은 존재는 다만 이해 속에만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니다. 만일에 그것이 참으로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만 지성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지성 속에 존재하는 것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이 실재로서도 또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Prosl. 2)
<가장 커다란, 즉> 뛰어난 존재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에 그것보다 더 큰 어떤 것도 인정되지 않는 그 같은 존재(X) 가 다만 지성 속에만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 무엇인가(X')가 인정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된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전자 X보다 후자 X'가 더 커다란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인정할 수가 없는 그런 존재는 필연적으로 지성 속에나 실재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안셀무스 자신은 이 증명을 하느님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전개하고 있지만, 여기서 편의상 삼단 논법의 형식으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I) 하느님은 그 이상으로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것이다.
(II) 그러나 이 이상으로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그것은, 정신 즉 관념 안에만이 아니라 정신 밖에도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III) 그러므로 하느님은 관념, 즉 정신 안에만이 아니라 정신 밖에도 존재한다. 
대전제(I)는 단순히 하느님에 관한 관념, 즉 비록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할 지라도 인간이 하느님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관념을 전제하고 있다.
소전제(II)는 명백하다. 만일 그 이상으로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그것이 정신 안에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이상으로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그러한 것은 못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 이상으로 큰 것, 즉 관념 안에만 아니라 정신 밖의 실재에서도 존재하는 하나의 존재가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증명은 그 이상으로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것인 하느님의 관념, 즉 절대적으로 완전한 것으로서의 하느님의 관념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것이 하느님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만일 이러한 존재가 관념적인 존재만을 지니고 있다면, 즉 우리의 주관적인 관념에만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아직도 그 이상으로 큰 존재, 즉 단지 우리의 관념에만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실재하는 존재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절대적인 완전성으로서의 하느님의 관념은 필연적으로 실재하는 존재의 관념이다.<코플88,220>
그리고 이 경우 하느님의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안셀무스는 말하고 있다.
가령 하느님을 초인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면 그러한 의미에서의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그러나 하느님의 관념의 객관성마저도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하느님'이라는 말의 뜻을 생각하여 하느님의 바른 관념을 가지고 있을 경우, 비록 입으로는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을지라도, 만일 이 부정의 의미(즉 자신의 본질에 의해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존재, 즉 필연적인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부정한다고 한다면, 이는 분명한 모순을 범하고 있다.
즉 마음 속으로 '하느님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insipiens)에 지나지 않는다.
최고 완전자로서의 신
신은 바로 '최고 완전자'이다. 말하자면 그 이상 더 완전한 것은 결코 생각할 수가 없다는 의미에서 절대적인 '최고완전자'이다.
이 같은 최고 완전자는 다만 우리의 지성 속에만 존재할 뿐 아니라 실재적으로도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지성 속에밖에 존재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지성 속에 뿐만이 아니고 실재적으로도 존재하는 것이 더 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이 참으로 최고 완전자라면 필연적으로 실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에 그런 신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그때에는 그 최고완전자인 신에게 실재적인 존재성을 결여하게 하는 모순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는 존재하는 것이 자신의 본질인 존재이며 필연적으로 존재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 이상으로 완전한 하나의 존재가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완전한 존재는 필연적인 존재이며, 필연적인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개념상 하나의 모순이라 하겠다.
안셀무스는 자신의 논증이 하느님의 본성에 대해서 우리가 믿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증명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이 논증은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에 관한 것이므로, 하느님의 여러 속성은 그 증명의 결론 안에 은연중에 포함되어 있다.
하느님은 전능, 전지, 최고 정의 등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 이상으로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하나의 존재 관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논증의 기초가 되어 있는 원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85; 질송98,197참조>
1. 신앙에 의해서 주어진 신의 관념
2. 사유 속에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이미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3. 사유속에 하느님의 개념이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실제로 존재함을 단언할 것을 논리적으로 요구한다. 
물론 여기서도 역시 사실에서 출발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사실이란 특수한 질서 즉 신앙의 그것에 속하는 것이다. 여기에 전개되는 모든 내부적 대화는 신앙에서 나와서 이성에 이르른다.}
{여기서 펼쳐지는 전체 추상적 변증법은 신앙에서 이성으로 나아가, 그 출발점으로 돌아와 신앙이 제시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가우닐로의 반박
{'프로슬로기온'에서 안셀무스가 제출한 논증은 수도자 가우닐로(Gaunilo)에 의해서 '프로슬로기온에서의 안셀무스의 논증에 대항하는 어리석은 이를 위한 책/프로스롤기움에서의 안셀무스의 궤변을 논박함'(Liber pro insipiente adversus Anselmi in Proslogio ratiocinationem)이라는 책에서 공격을 받았다. <코플88,221>}
{가우닐로는 두 가지 중요한 반대를 제기했다. <질송98,197>
(1) 첫째로 우리는 하느님의 실존을 추론할 하느님에 대한 명백한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2) 그 다음으로 우리는 사유 바깥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하여 사유 속의 실존에 의존할 수 없다.}
{가우닐로는 그 책에서 우리가 사물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관념이 정신 밖의 존재를 보장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안셀무스는 논리적 질서에서 존재적 질서로의 부당한 이행을 범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코플88,221>
그렇다면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한에 있어서의 가장 아름다운 섬이, 우리가 그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어딘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지성으로 생각하는 사고 속의 존재로부터 사고 밖의 존재를 귀결짓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고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다만 생각하여진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은 사고 밖에서도 아무런 존재도 가지고 있지 않는, 즉 실재성이 없는, 많은 오류나 틀린 관념을 생각 속에 품을 수도 있다. {사실상 사유의 대상으로 실존하는 것은 참된 실존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실제가 아닌 것 혹은 심지어 불가능한 대상을 생각할 수 잇다. 이 대상들은 사유 속에 있지만, 사유 바깥에 실재를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이 대상들은 그 대상을 파악하는 지성 속에 있는 개념에 불과하지 전혀 실재가 아니다.<질송98,197>}

가령 우리가 망망 대해의 어딘가에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보물이 가득 찬 '축복된 섬'을 가장 완전하게 생각하였다고 하자. 그런 관념을 생각 속에 가진다고 해서, 그것으로부터 그런 섬이 실제로, 즉 실재 속에도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귀결은 결코 나오지 않는다. }<가철70>

안셀무스의 대답
{안셀무스는 사유 속의 존재로부터 실재 속의 존재에로의 이행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최대의 존재가 문제로 되는 경우에만 가능하고 또 필연적인 것이라고 대답한다.} <85/145>
{안셀무스는 '(어리석은 자를 위해 대답하는) 가우닐로에 대한 변명'(Liber Apologeticus contra Gaunilonem respondentem pro Insipiente)이라는 책에서 위에서 예거한 두 예는 같은 것이 아니라고 그 동등성을 부정했는데, 이 부정은 옳았던 것이다. <코플88,221>
만일 하느님의 관념이 온전히 완전한 한 존재의 관념이고 또 절대적인 완전은 존재를 지닌다고 한다면 이 관념은 존재하는 것, 즉 필연적으로 실재하는 존재의 관념인 반면에, 가장 아름다운 섬의 관념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의 관념은 아니기 때문이다. 
& 순전한 논리적인 질서에 있어서도 예거했던 두 관념은 동등한 것이 아니다. 만일 하느님이 가능하다면, 즉 온전히 완전하고 필연적인 존재의 관념에 아무런 모순이 없다고 한다면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순전히 가능적인 필연적 존재(이는 명사상의 모순이다)에 대해서 말하는 것 자체가 불합리한데 반하여, 단순히 가능적인 아름다운 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무런 모순도 아니기 때문이다.} 
안셀무스에 대한 주요한 반론
- 이는 데카르트에 대해서 제기되고 라이프니츠가 대답하려고 시도했던 반론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관념, 무한하고 절대적인 완전성이라는 관념이 하나의 가능적인 존재의 관념임을 '선험적으로'(a priori) 알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관념 안에 있는 모순은 알 수 없을 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 '부정적인' 가능성이 '적극적인' 가능성과 같은 것은 아니라고 반론자들은 말하고 있다. 이것이 관념에 참으로 아무런 모순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관념에 아무런 모순도 없다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증명했을 경우에만 비로소 명백하게 된다.

영향 및 평가
{하느님의 실존에 대한 논증은 확실히 어떤 정의에 의하여 작동하는 순수 변증법의 승리다. 이 논증은 실로 절대자 속에 있다고 본 존재라는 개념에 독특한 것을 깊이 의식한 데서 그 힘을 얻는다. <질송98,198> 
이 증명을 바로 반대하는 사람들도 안셀무스가 절대 존재의 개념 즉 가장 크다고 생각할 수 있는 존재가 자기를 인식하는 사유에 의하여 자기의 존재를 확정할 것을 요청할 때 발휘하는 불가항력적인 힘을 강조하는 데에 바른 사물관을 갖고 있었음을 인정할 것이 틀림없다.
이것이 타당한 직관이라는 표시는 안셀무스의 논증이 입증한 내용들이 그 이후 수세기 동안에 존속했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이 증명 내용을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그 내용을 형성하려는 철학자들은 언제나 있어 왔다. 
그리고 그것의 함축 의미는 아주 다양하여 그 내용을 거부하거나 인정했다는 그 사실 만으로도 한 철학이 [어떤 학파에 속하는지] 규정하기에 거의 충분하다.}
{'프로슬로기온'의 논증이 즉시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13세기에 가서 보나벤투라가 그것을 논리학적이기보다는 인식론적인 측면에 역점을 두고 사용한 반면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를 거부했다.
둔스 스코투스는 이를 임시 수단으로 사용했다. 
'근대'에 와서는 다양하지만 뚜렷한 변천이 이 증명에 있었다. 데카르트는 이를 채용하여 수정하였고, 라이프니츠는 주의깊고 교묘한 방법으로 이를 옹호했으나 (로크와) 칸트는 이를 공격했다. (헤겔은 나름대로 이 내용을 취했다.)
스콜라 학파 중 몇 사람의 사상가는 이 증명의 타당성을 주장했지만 일반적으로는 그것이 부정되고 있다.}
{이 내용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점은 실제 존재와 사유가 파악하는 예지적 존재를 같은 것으로 본다는 사실이다. <질송98,198>
이 원리를 정죄하는 자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점은 경험적으로 주어진 존재를 제쳐 놓고 존재 문제를 고찰하기를 거부한다는 사실이다.}
{안셀무스의 신학은 이성적 사변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를 연구하는 역사가 가운데 한 사람은 이 신학을 ‘기독교 합리론’이라고 불렀다. <질송98,205>
이 신학의 애매한 것은, 이 신학이 이해를 구하는 신앙의 내면적 생활을 표현할 때 때로는 신비주의와 맞닿은 종교적 감정으로 차고 넘치고 동시에 신앙을 이성적 필연성으로 바꾸는 변증법적 정열로 가득차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신학에서는 안셀무스를 스콜라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러 왔다. 그에게 이런 칭호를 붙이는 것은 정당한 근거가 있다. 
실로 그것은 그가 신학적 사유의 문제에서 철학을 사용한 맨 처음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신학의 이상을 추구하면서 그 변증론적 엄격함으로 신학을 일종의 학문으로 바꾸어 놓았던 맨 처음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13세기 스콜라주의자들의 선구자였다. 
이들의 야심은 신앙 안에서 신앙의 학문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 될 것이다. 
반면에 ‘필연적 이유들’에 대한 동일한 변증론적 열정과, 논리적 추론을 추상적 개념과 정의에 사용한 일관성있는 동일한 적용과 아우구스티누스의 핵심 교리를 잘 구성되고 다 논증된 전체 결론으로 환원할 것을 외치는 동일한 주장은 후대에 나타나는 둔스 스코투스의 교리적 종합을 생각나게 한다. 
만일 가장 높으신 존재가 가능하다면 그는 존재한다고 하는 스코투스의 진술도 안셀무스가 미리 말했던 것이며, 수세기 후에 이 진술은 라이프니츠가 다시 해석할 것이다.
철학에서 안셀무스의 이름은 소위 ‘존재론적 증명’ 즉 수세기 동안 형이상학자들을 갈라놓게 할 끝간데 없는 논쟁과 나누어질 수 없다. <질송98,206>
명백한 것은, 형이상학자가 ‘존재론적’ 증명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를 아는 것이 그의 철학을 아는 데 충분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형이상학이 갖고 있는 몇몇 기본적인 측면에 대하여 그럴듯하게 추측을 할 수 있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