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어거스틴의 「시간과 영원」

하나님아들 2023. 1. 31. 20:53

어거스틴의 「시간과 영원」

                                                                  선한용 지음

 

 

 

제1장 서 론

  측량할 수 있고 계산할 수 있는 객관적인 지식과 구별하여, 주관적인 시간 또는 체험된 시간이라 말한다. 체험된 시간 = 시간성(temporality)이라고 부른다.

  시간은 적극적으로 보아 미래를 향한 창조적 과정이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창조의 창조성과 함께 계속적 붕괴(the perpetual perishing of occasion)와 상실을 수반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거스틴이 말하는 시간이란?

1) 시간은 하나님의 창조물. 하나님의 영원성과 구별된다.

2) 결코 머물러 있지 않은 것(umquem stans)이다.

즉 시간적 존재인 인간의 실존은 불안정, 무상, 계속적인 붕괴, 불안으로 특징지어진다.

3) 시간은 분열과 분산을 의미한다.

4) 시간은 일회성과 비반복성을 의미한다.

 

제2장 어거스틴의 사상적 특색

  철학은 체계화(systematization)와 체계(system)로 구분되는 데 이 둘은 분리불가하면서 구별된다. 어거스틴은 체계에 속한다.

  그는 “알기 위해서 믿어야 하고 동시에 믿기 위해서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1) 행복론(eudaemonism)으로서, 그의 사상이 행복의 추구에서 시작하고 또한 그것으로 채색되어 있다는 것이다.

  진리자체 = 하나님으로서 진리는 영원성과 불변성(절대성)이 핵심이고 진리의 최종적 목적은 “궁극적 있음”이다.

반면에 상대적인 것은 가변성과 일시성이 핵심이고 이것의 최종적 목적은 “궁극적 없음”이다.

2) 인간의 내면성을 강조

  빈델반트는 “내면성의 형이상학”이라고 특징지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이 진리를 인지하고 또한 소유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마음 밖에서 찾지 말고 자기 자신 안으로 들어가 “인간의 내면”(homo interior)에서 찾아야 한다.

  그는 시간의 현상을 객관적인 운동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고 인간의 시간체험(의식)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 삼위일체론의 유비를 인간의 내면세계에서, 즉 기억, 지성, 의지 혹은 사랑한 자, 사랑받은 자, 사랑 자체에서 찾으려고 시도한 것은 바로 이 내면성의 철학의 특색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말은 결코 진리가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든가 그 안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진리를 파악하는 길은 인간의 마음을 통해서라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3) 신 중심 사상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최고선이다. (하나님 = 최고선) 진리 안에서 최고선을 소유한다는 것은 진리자체요, 존재의 근원이요, 최고선이신 하나님을 바라고 소유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소유한다는 것은 곧 그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앙이 없다는 것은 무(허무), 무의미를 말하는 것이고 이것의 목표는 불행이다. 즉 인간이 신앙이 없으면 그 결과는 불행이다.

  인간은 최고선인 하나님을 의지(존재론)하고 알고(인식론) 사랑하면서 소유(행복론)할 때 참 행복에 이름.

  그는 사랑을 중심으로 하여 철학과 신학을 가지고 사랑을 설명한다.

  이러한 신 중심 사상은 존재론과 행복론뿐만 아니라 지식론(인식론)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추상적인 지식도 영계를 비추는 하나님의 조명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조명설(illumination theory)이라고 한다.

4) 은총론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셔야만 즉 은총을 주셔야지만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성립된다.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이유는 두 가지로 하나는 인간의 피조성과 다른 하나는 타락한 인간의 죄성 때문이다. 어거스틴을 하나님의 은총(은혜)를 강조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교회는 그를 “은총의 박사”라고 불렀다.

 

제3장 시간과 무로부터의 창조

  그는 창 1:1의 성서의 증거에서 창조론을 전개한다. 그는 이 성서의 증거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경험적인 통찰로 확인하며 철학적, 신학적으로 해명하려 하였다. 그가 성서적 창조론을 해명하려고 할 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을 전제로 하고 있다.

  첫째는 "이 세계는 무엇으로부터 창조되었는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 세상은 언제 창조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들에 대해 어거스틴은 첫 번째의 질문에 대해서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로 대답하고,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태초”라는 시간의 절대적인 시작을 말함으로써 답하려고 한다.

그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세 가지로 생각한다. 첫째는 “형성설”(formation theory)이요, 둘째는 “유출설”(emanation)이며, 셋째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n out of nothing)이다. 형성설은 플라톤에 의해, 유출설은 플로티누스에 의해 주장된다.

  어거스틴은 피조물이 어떠한 신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강조한다. 즉 이것은 범신론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시간은 유동성과 가변성이라는 특징이 있다. 그는 “시간이란 머물러 있지 않고 항상 지나가는 것으로만 존재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가변적 시간의 반대는 불변한 영원이다.

  피조물인 인간은 “무에로의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타락한 이유와도 관계되는데, 인간은 타락할 수 없는 경향성(가능성)이 전혀 없는 인간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경향성 때문에 타락했다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무에로의 경향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악의 기원문제(신정론)에 관해서 말하는데, 그는 악을 선의 결핍 혹은 선한 의지의 결핍(부재)으로 본다. 그러므로 악은 실체가 아니라 비실재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창조가 하나님의 자발적인 사랑의 행위로 말한다. 그는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의 절대의존성을 존재론적으로 기초 세운 것이다.

 

제4장 시간과 존재의 기원

  어거스틴에 의하면, 창 1:1의 “천지”는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저 하늘(천)과 이 땅(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에게서 하늘과 땅(caelum et terra)이란 완전히 형상화된 영적인 하늘과 아직 형상화되지 않은 어떤 질료, 즉 무형의 물질(materia informis)을 의미한다.

 

제5장 시간과 하나님의 영원성

  하나님은 절대적 존재이고 피조물은 상대적 존재이다. 피조물은 상대적 존재이기 때문에 비존재와 같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은 피조물에게도 절대성의 요소는 있지 않을까하는 물음이 생긴다.

  그는 영원과 시간의 차이는 본성에 있고 시간의 길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성을 시간의 무한성 혹은 무한한 연장으로서의 시간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절대 불변성으로 본다. 즉 영원은 = 초시간성, 무시간성으로 이해한다.

 

제6장 시간의 본질

  그에게 있어서 영원은 항상 머물러 있는 현재이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관련이 있어서 영원을 초시간성 혹은 무시간성을 이해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의 본질을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그것의 있음(that which is)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시간이란 무엇인가? 라고 물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시간은 항상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시간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만 시간을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말한다.

  그는 시간은 물체의 운동이 아니라 “영혼의 팽창”으로 말한다. 또한 그는 객관적인 시간을 인정하되 그것의 파악은 내적 인간의 체험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마음은 시간의 구조와 본질을 이해, 해석할 수 있는 지평선에 이르게 된다.

 

제7장 시간과 그리스도의 성육신

  어거스틴에 의하면, 피조물인 인간은 타락할 수 있는 경향성(fallible,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항상 무로부터 창조받았기 때문에 항상 무로 귀환하려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항상 거역하려는 경향성을 가진 존재이다.

  그는 인간의 타락을 초역사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이 세계에서의 역사적인 타락으로 본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의 타락의 뿌리는 교만이다. 교만은 영원한 하나님을 저버리고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추켜올리는 것이다. 이 교만으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을 마땅히 사랑하지 않고, 자신과 세계를 지나치게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인간의 교만 ⇛ 자기사랑으로 가게 만든다.

  인간 타락의 결과 중에 몇 가지를 든다면, 1) 무지 즉 모든 오류가 그것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마음의 어둠이요 2) 선을 택할 능력을 상실한 악한 의지이다. 선을 택할 능력이 없으니 결과적으로 선을 행할 능력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조명과 도움만으로 선을 택하고 행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그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죄인”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즉 타락한 인간은 숙명적으로 죄를 짓는 인간이란 의미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의 필요성이 필연적으로 대두된다. 이제 인간은 내면에서가 아닌 외부에서의 초자연적인 능력만이 인간을 죄로부터 치료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적인 성육의 사건을 굳게 그리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fides)이라고 했다. 믿음이란 그리스도의 성육의 역사적(시간적)인 사건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인간은 그 믿음을 통하여 겸손해지고 고침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것이다. 우리가 믿음의 단계를 벗어나 “얼굴과 얼굴을 대해서 볼 수 있게 될 때” 믿음은 진리의 관상으로, 시간은 영원으로 대치되게 된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에게서 믿음은 어디까지나 시간적인 것과 관계되어 있고, 관상은 영원과 관계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어거스틴에게서의 믿음은 시간적인 것과 관계되어 있지만 인간 구원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성육에 대한 역사적인 믿음이 인간을 겸손하게 하고 정화시켜 영원을 관상하도록 준비시켜 주기 때문이다.

 

제8장 시간과 사랑

  인간이 성육신을 받아들이는 믿음을 통해 영원자이신 하나님께 귀환하는 것을 회심(conversio), 재형성(reformatio), 지향성(intentio), 하나님을 향한 사랑(amor Dei), 혹은 한데 모으는 것(colligare)이라는 표현들로 사용한다.

  그는 혼의 흩어짐을 통일시키는(한데 모으는) 계기를 절제라고 표현한다. 인간의 혼이 영원자에게로 향하는 이 지향성(intentio)을 어거스틴은 하나님께로의 사랑(amor Dei) 혹은 ‘카리타스’(caritas)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그에 의하면, 물질적인 세계에서 어떤 인력과 같은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과 같이, 정신적인 세계에서는 사랑의 힘이 작용하고 있는데, 이것을 의지라고 한다. 그래서 서양사상에서는 어거스틴을 의지론의 창시자라고도 말한다. 그래서 그는 “나의 사랑은 무게입니다”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본연의 자리란 그가 행복하기 위해 끈임없이 추구하는 대상 곧 선(bonum)이다. 여기서 말하는 선이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간의 도덕적인 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완성(행복)을 위해 추구하는 목적인 것이다. 모든 인간은 행복을 갈망한다. 그런데 참된 행복은 참된 선을 소유할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다시 말하면 선이란 인간 욕구의 대상이요, 행복은 그 목적을 소유할 때 경험한 혼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행복으로의 추구 혹은 선을 추구하는 혼의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사랑을 = 소유욕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의존된 존재요 시간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스스로 자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의 선과 행복을 자기 자신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고 자신들의 밖에서 찾아야만 한다.

  인간이 어떤 것을 사랑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고 그 사랑의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사랑의 좋고 나쁨이 결정된다. 그에 따르면, 욕구(의지)로서의 인간의 사랑은 자기 자신이나 혹은 피조물을 사랑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하게 된다. 그는 “너는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라는 말씀을 인간의 교만으로 보고 이것에서 “자기 사랑”을 하게되고 자기 사랑으로 전향하는 모든 곳에 모든 죄의 근원과 본성이 있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자기 사랑에서 모든 죄가 발산되기 때문에 “자기 사랑”은 죄의 뿌리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자기 사랑(amor sui)과 탐욕(cupiditas, amor mundi)은 왜곡된 사랑이다. 하나님을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자기 사랑과 탐욕은 참 사랑의 왜곡, 선의 결핍(privatio boni)즉 나쁜 사랑, 악한 것이 된다.

  그런데 이 말은 결코 피조물이 악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선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선하고 가치있는 것이며,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피조물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에 비교해서 상대적이요 제한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피조물을 사랑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이고, 제한적이다. 즉 절대자이신 하나님은 절대적으로(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서) 사랑하고, 상대적인 존재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즉 자신과 세상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고 하나님 사랑을 고려하지 않을 때, 그 사랑은 cupiditas가 된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을 궁극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카리타스 사랑은 자신과 세계를 부정하도록 만들지 않는다. 이렇듯 사랑은 대상의 계층에 따라 질서지워져야 할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질서지워져야 한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세상을 수단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시간적인 것을 사용하여 영원한 하나님을 즐겨야 한다는 것(향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왜곡이란 하나님을 이용하여 세상을 즐기려는 것, 영원한 것을 사용하고 시간적인 것을 즐기려고 하는 것이다. 이 사랑의 왜곡이 바로 cupiditas(탐욕, 옳지 못한 사랑)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상 숭배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인간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질서지워지지 않은 사랑이 나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왜곡된 사랑인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안에서만 참다운 자기 완성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혹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관계하에서 자신을 사랑하게 될 때라야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 하나님 사랑과 자기 사랑이 연합하게 된다. 또한 이웃을 사랑할 때는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되고, 그 자신을 목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즉 그는 사랑의 질서와 방법에 따라 사랑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고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인간에게 사랑의 질서가 세워지게 된다. 어거스틴이 즐겨서 쓴 “내 안에 있는 사랑을 정돈해주소서”란 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성화도 그릇된 사랑(쿠피디타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카리타스”로 변화되어야 함을 말한다.

  정리하자면 그에게 있어서 사랑은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를 연합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랑은 대상과 연합하려고 하는 욕구뿐만 아니라. 그 연합의 성취요, 그 연합을 즐거이 누리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랑의 개념이 삼위일체론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제9장 시간과 은혜

  그는 원죄론에 있어서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타락을 주장했다. 그는 인간 본성의 왜곡을 설명하기 위하여 하나의 예를 들고 있는데, 인간이 건강에 필요한 음식을 먹지 않으면 몸이 쇄약해져서 마침내는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듯이, 인간의 타락도 그와 같아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께로 향할 수 있는 능력조차 상실했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타락이나 원죄사상은 어거스틴 이전의 교부들 즉 이레니우스, 오리겐, 갑바도기아 교부들, 키프리아누스, 암브로시우스 등이 먼저 주장했다.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인간 자신에게는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카리타스”가 없다고 말한다. 선을 택하고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상실했다. 영원을 향한 인간의 지향성도 사실은 힘을 잃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만이 인간의 죄된 본성을 변화시키고 살릴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불어넣어 주시는 사랑의 주입(infusio caritatis) 혹은 새롭고 선한 의지를 재창조해 주시는 역사인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창조와 보전,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은 이제 성령을 통해서 내면화되도록 역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현재에서도 영원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인간을 하나님으로 인해 말로 다할 수 없는 내적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내적 체험, “말로 다할 수 없는 단 맛"은 중세 신비주의 사상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경험한 체험은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혹은 진리의 말씀을 성령의 조명을 받아 깨달아 알게 됨으로 인해 하나님의 성품과 그의 뜻안에서 교제함으로 누리는 말로 할 수 없는 내적 즐거움이다.

 

제10장 직선적 시간과 역사적 의미

  그는 순환론적 시간관을 반대함과 동시에 “무한한 시간 개념”도 반대했다. 종국의 완성없이 무한히 계속되는 시간은 완성(목적)이 없는 역사의 과정과 같다. 완성이 없는 역사의 과정은 목적없는 끝없는 여행길과 같아서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그는 무한한 시간을 영원과 동일한 뜻으로 이해하지 않으며, 또한 의미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창조때 시작된 시간이 반드시 어떠한 목적을 향해 나아갈 때만 의미를 갖는 것이다.

 

제11장 시간과 두 도성의 무호성

  어거스틴에 있어서 하나님의 도성은 하나님 사랑위에 세워진 도성이고 지상의 도성은 자기 사랑위에 세워진 도성이다. 즉 이 두 도성의 구별은 “카리타스”이냐 왜곡된 사랑은 “쿠피디타스”냐 하는 문제이다.

  그는 지상의 정부와 국가체제를 하나님의 도성과 동일시 하지 않는다. 세상의 국가는 철저히 지배욕, 탐욕, 교만, 이기적인 사랑 등으로 이끌림을 받아 시간적인 것만을 추구한다. 그레래서 세상의 국가는 어디까지나 바빌론이요, 사탄의 도성에 가깝다. 하지만 국가들은 사회에 있어서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제도이기도 하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이기심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자신의 정의를 구현하는 사회적 도덕적인 통치의 수단으로 사용하신다.

  또한 그는 지상의 교회를 하나님의 도성과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본래 하나님의 도성을 영원히 하늘에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지상에서의 교회는 불완전하고 임시적이기 때문에 지상에서는 하나님의 도성이 완전히 실현되지 않는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성례는 신적인 것을 가리키고 있는 보이는 사인이요 상징이다. 그 사인은 실체와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매개하는 수단이 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인은 실체와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실체자체는 될 수 없다. 이렇듯 실체를 “가리키는 성례전적인 사인”과 “백성들을 가르치는 권위”가 교회에 주어져 있는 것이다.

  진정한 교회는 시간 안에서 영원한 도성을 가리키는 표지판의 역할을 해야 한다. 16세기의 루터의 종교개혁의 소리가 바로 그 소리였다. 그 점에서 교회는 항상 하나님의 도성의 빛에 의해서 자신을 개혁해나가야 한다.

 

제12장 시간과 악의 문제

  악의 문제를 존재론적 차원에서 볼 때 어거스틴은 악을 선의 결핍 혹은 선한 의지의 결핍(부재)으로 본다. 그러므로 악은 실체가 아니라 비실재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악의 문제를 인간의 자유의지의 왜곡(결핍)에서 찾는다. 먼저는 무에로의 경향성이다. 타락하고 잘못된 선을 추구할 수 있는 경향성을 지닌 존재에서 악의 기원을 다룬다.

  그에게 있어서 도덕악 인간 의지의 왜곡이요, 자연악 그 결과이다. 전자는 요, 후자는 죄에 대한 벌인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악을 창조하시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악을 다스리기는 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어 악을 행하도록 허락하시지만, 그것은 선한 목적을 성취하시는 능력에 의하여 조정되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인간이 의도한 악에서 선을 가져오시고 인간의 자멸한 행동에서 그의 구원을 가져오신다. 어거스틴은 과격한 표현을 사용하여 “하나님은 악이 존재하지 않도록 하기보다는 악에서 선을 이루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하셨다.고까지 말한다.

  이것인 악을 심미적인 관점에서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위의 논설에 의하면 악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에 필요한 것처럼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의도한 것은 시구의 대조를 통하여 시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듯이, 역사에 있어서도 선과 악의 대조를 통해서 역사의 의미와 조화를 이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드러남을 말하려고 한 것이다.

 

제13장 시간과 역사안에서 가져야 할 그리스도인의 삶의 스타일

  어거스틴은 죄를 세 가지로 형태로 말한다.

1) 세상의 재물을 탐하고자 하는 탐욕 혹은 물욕(avaritia)이다.

이것은 “쿠피디타스”의 표현이다. 이 재물에 대한 욕심은 반드시 다른 죄악들을 발생시킨다.

2) 지배욕(libido dominandi), 즉 권력욕이다.

지배욕은 무서운 질병과 끔찍한 전쟁을 동반하게 한다.

3) 정욕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성욕이다. (정욕 = 성욕)

  타락전의 인간은 정욕의 차원에서 후손들을 출산한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에 순종하여 정욕없이 출산하였다. 하지만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이성적인 자유의 선택에서 동하기보다는 정욕에 의하여 발동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타락한 인간들에게 찾아오셔서 주권적인 은혜를 주시면 인간은 시간적인 것에서 영원자에게로 전향(회심, conversio)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회심이다. 회심과 더불어 그들의 가치관이 전도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존재의 계층에 따라 사랑과 가치의 계층을 수립해야 함을 알게 된다. 그 결과로 그리스도인들은 우선순위를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세계 내에서의 초월” 혹은 “이 세상적인 금욕주의”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스타일은 초현실주의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극단적 현실주의자도 아니다. 어느 것도 믿음으로 사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질서와 모습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살지만 삶의 양태를 삶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오직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서 사는 것이다. 삶의 모든 양태 속에서 그러한 삶을 구현해내고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서 정체성을 알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서 정직하게 행하는 삶의 모든 양태와 모습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때에 영원성을 결정하게 해줄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삶이 아주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세상과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 긴장관계의 삶이다.

 

평가

  어거스틴의 시간과 영원은 나에게 영적인 큰 통찰을 주었다. 평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또한 세상을 사랑하는 것, 절대성과 상대성 등의 질문에 명확한 정리가 되어있지 않았고 이 부분은 결코 쉬운 부분이 아니라 많은 사색과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이러한 생각에는 변함없지만 어느정도 진리에 대한 해갈이 있어서 영혼의 기쁨을 누렸다. 신학도라면 어거스틴의 신학사상을 탐방하는 것은 아주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