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토마스 아퀴나스의 '하느님의 존재증명' 방법

하나님아들 2023. 1. 8. 23:13

 

토마스 아퀴나스의 '하느님의 존재증명' 방법

 

 

 

 

토마스 아퀴나스의 5가지 신존재 증명 

1.운동에 의한 증명 
아무것도 스스로 움직일 수 없으므로 움직이고 있는 모든 것은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움직여 지고 있음이 틀림없다. 움직이게 하는 것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움직임의 원인에 신이 있다. 

2.능동인에 의한 증명 
능동인을 고찰하고, 모든 원인들이 그 어떤 것에 의해 원인이 주어진 것이다. 첫 번째 원인이 있다. 그 첫 번째 원인이 신이다. 

3.우연성에 의한 증명 
모든 존재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필연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모든 것들은 가능적인 존재다. 오직 가능하기만 한 존재는 그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 우연적인 존재만 있다면 지금은 아무것도 없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하나의 존재가 있다. 이 존재자는 필연적이다. 후세의 사람들이 이를 우주론적 증명이라고 하였다. 

4.완전성의 단계에 의한 증명 
완전성의 단계에 의해 보다 더 완전한 것이나 보다 덜 완전한 것이 배후에서 하나의 최고로 완전한 것을 꿰뚫어 본다. 이 최고로 완전한 자는 (보다 많이), (보다 적게)의 척도가 된다. 이 최고로 완전한 자는 동시에 가치 있는 모든 것들의 근거이다. 

5.(세계를 지배하는 데서 생긴)목적론적 신증명 
세계에는 질서가 있고, 목표를 달성하려는 노력이 있다. 이 합목적성을 설명할 수 있을 그런 최고의 지성이 있어야만 한다. 

 

 

 

 

 

하느님의 존재 증명

 

1. 신존재 증명의 가능성과 한계

 

토마스는 신학대전(1,2,1)에서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명적인 일인가하는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 하나의 장을 할애한다. 그리고 대이교 대전(1,10~11)에서 하느님의 존재는 자명적이므로 증명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대한 고찰을 위해서 두 개의 장을 할애하고 있다.

 

토마스는 하느님에 대한 자연적인 인식은 애매하고 막연하여 이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진리가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근본적인 제1의 진리이며 진리의 근원인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알 수 있게 하는 하느님의 힘은 직관의 대상이 아니라 성찰에 의해서만 알려지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지성은 하느님의 본성에 대한 선험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 지성은 약하므로 우리는 최고로 완전한 존재, 즉 존재가 자신의 본질인 그러한 존재의 적극적인 가능성을 선험적으로 알아낼 수가 없다. 우리가 이러한 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이러한 존재에 대한 관념의 분석이나 고찰에 의하지 아니하고 그것의 결과로부터의 경험적인 논증에 의해서이다.

 

하느님의 존재가 하느님의 관념, 즉 하느님의 본질로부터 선험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고 한다면, 결국 하느님의 결과를 검토함으로써 경험적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느님의 결과는 유한하데 비하여 하느님은 무한하므로 결과와 원인 사이에는 아무런 비례 관계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원인에 비례하지 않는 결과를 고찰함으로써, 원인에 대한 완전한 인식에 이르지는 못할지라도,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 수 있다고 그는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결과에서 그 원인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다. 그리고 만일 그 결과가 이러한 원인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정당하게 그러한 종류의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논할 수가 있다.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간에 대상은 존재와 함께하고 있는 한에서는, 즉 현실태에 있는 한에서는 가지적이다. 그리고 지성 자체는 존재를 파악하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지성 그 자체만 생각한다면, 지성은 모든 존재를 자신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 말하자면 지성의 첫째 대상은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의 특수한 지성, 즉 인간의 지성은 신체와 결합되어 그 작용에 있어서 감각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지성이 감각적인 사물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과, 그리고 감각적인 사물을 초월하는 대상은 감각적인 대상이 그 대상과의 관계를 지니고 그것을 나타내고 있는 한에서만 당연히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인간 지성은 신체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 현 상태에 상응하는 자신의 자연스러운 고유대상은 유형적인 대상이다. 그러나 이는 지성이 존재자 일반을 본성적으로 지향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유형적인 대상이 자신을 초월하는 대상과의 알아볼 수 있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지성은 그러한 대상이 그 초월자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는 한에서는 지성은 그 특성에 대한 어떤 인식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감각 대상이 그 초월자의 본성을 충분히 또는 완전하게 나타내지는 못하므로 그러한 인식은 충분하거나 완전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유형적인 대상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지니고 하느님을 나타내고 있는 한에서 지성은 하느님에 대한 어떤 자연적 인식에 이를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인식은 물론 완전한 것이 아니며, 직관적인 성질의 것일 수도 없다.

 

 

2. 5가지 신 존재증명방법

 

a. 처음의 세 가지 증명

 

1) 운동에 의한 증명

 

운동의 부분에서(ex parte motus) 생기는 첫 번째의 증명은 운동이라고 하는 경험적인 사실로부터 시작된다.   

 

아무것도 스스로를 움직일 수 없으므로, 움직이고 있는 모든 것은,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우리들은 움직여지고 있는 자가 움직이게 하는 자에게 의존하고 있는 관계를 무한히 거슬러 올라가서 추구할 수는 없다. 만약 첫 번째로 움직이게 하는 자가 없다면, 두 번째로 움직이는 자도 없다. 왜냐하면 모든 두 번째의 원인은 그 첫 번째의 원인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첫 번째로 움직이게 하는 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첫 번째로 움직이게 하는 자는, 어떤 다른 것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는 자이며, 이것을 모두 신이라고 한다. 토마스는 이 논증을 “보다 명확한 길”이라고 말하고 “대이교도대전”에서 이를 상세히 전개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발견되어 마이모니데스와 성 알베르투스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었다.

 

2) 능동인에 의한 증명

 

두 번째의 증명은 능동인을 고찰하고, 모든 원인들이 또 그 어떤 것에 의해 원인이 주어진 것이며, 다시 또 다른 어떤 것에 의해 그 원인이 주어진다는 등등의 사실에 착안한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스스로의 원인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원인이기 위해서는 그것은 자기 자신보다 앞서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에도 역시 원인의 계열을 무한히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아무것도 증명해내지 못한다는 것이 강조된다(만약 첫 번째의 원인이 없으면, 중간 원인과 마지막 원인도 있을 수 없다. 즉 무한한 원인의 계열이 일관해서 이어질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맨 마지막 원인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제2권에서 제기되어 아비첸나, 알랭 드 릴르(Alain de Lille), 그리고 알베르투스에 의해서 사용됨. 감각적 세계에서 출발.

 

3) 우연성에 의한 증명

 

세 번째 증명은 어떤 존재자는 생성하고 소멸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생성소멸은 그 존재자들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것으로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 존재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그 존재자들이 필연적이라고 한다면, 항상 존재했을 것이며 생성하거나 소멸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토마스는 우연적인 존재자들이 존재하게 되는 이유인 하나의 필연적인 존재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만일 어떤 필연적인 존재도 없다고 한다면, 어떠한 것도 전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마이모니데스가 아비첸나로부터 계승하여 발전시킨 증명이다.

 

4)  세 증명에 대한 유의점 세 가지.

 

첫째, 무한히 소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 원리는 세 증명 모두에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토마스는 시간 속에서 소급하는 계열, 말하자면 하나의 수평적인 계열을 생각하고 있지 않다. 예컨대 그는 자녀가 그 생명을 부모로부터, 그 부모는 또 자신들의 부모로부터 생명을 이어받고 있다는 이유에서 부모 없이 직접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된 최초의 남녀 한 쌍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부정하고 있는 것은 실제로 의존하고 있는 원인들의 서열에 있어서의 무한한 계열, 즉 무한한 수직의 계열이다. 그 계열을 아무리 끝없이 소급해 올라갈지라도 그 계열이 존재하는 근거를 밝혀내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 계열전체는 우연적인 존재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계열 전체는 이 계열 밖에 있는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그 자체가 다른 것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는 존재자가 존재한다고 결론짓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수학적인 무한의 계열은 토마스의 증명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토마스가 부정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무한한 계열 그 자체의 가능성이 아니고 존재론적인 의존의 질서에 있어서의 한 무한한 계열의 가능성이다. 즉 경험계의 운동과 우연성은 어떤 궁극적인 충분한 존재론적 설명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부정하고 있다.

 

셋째, 부동의 원동자나 제1원인 또는 필연적인 존재가 하느님으로 불리운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신론자를 반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토마스는 무신론자를 대상으로 하지 않고 대이교도대전에서도 오히려 하느님에 대한 굳은 신앙을 지니고 있었던 회교도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즉 그의 주된 관심은 “신앙의 전재”에 대한 증명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는 하느님은 하느님을 믿고 있는 모든 이들에 의해서 제1원인과 필연적인 존재라고 인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고 그 이상의 논증에 대한 부당한 압력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b. 네 번째의 증명: 완전성의 단계에 의한 증명(ex gradibus perfectionum)

 

이 논증의 기원은 플라톤에게 있으며, 분유의 관념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1)의 몇 마디 말에 암시되어 있고, 그 요점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안셀무스에서 볼 수 있다.  

 

이 증명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 가운데 있는 완전성, 선성, 진리 같은 단계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단계가 있기 때문에 “이것은 저것보다 더 아름답다”든가 “이것은 저것보다 더 좋다”든가 하는 비교 판단이 가능하다. 토마스는 이러한 판단이 객관적인 근거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여, 완전성의 단계가 있다는 것은 반드시 하나의 최선의 존재, 하나의 최고 진리의 존재 등등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연적인 존재자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스스로 가지지 않으며, 자신들의 선이나 자신들의 완전성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것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 완전성들의 그 궁극적인 원인은 그 자체가 완전일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그것은 다른 것으로부터 자신의 완전성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그 자체가 완전성이 아니면 안 된다. 이는 자존하는 존재이며, 완전성이다.

 

이 논증은 앞의 증명에서 이미 사용된 원리를 순수한 완전성에 적용하는 데 있다. 이 논증은 플라톤의 계통을 이어받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다른 증명들의 일반적인 정신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다.

 

c. 다섯 번째 증명: 목적론적 증명

 

세계를 지배하는 데서(ex gubernatione mundi) 생긴 목적성에 의한 증명: 세계질서에 의한 증명. 이 증명은 스토아학파에 의해서, 특히 키케로와 세네카에 의해서 알려졌다.

 

세계에는 질서가 있고, 목표를 달성하려는 노력이 있다. 따라서 이 합목적성을 설명할 수 있을 그런 최고의 지성이 있어야만 한다. 무생물들은 목적을 위해 작용하고 있으며, 이 현상은 언제나 또는 매우 자주 일어나고 있으므로 이는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지향하는 결과일 수밖에 없다. 무생물들은 인식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것은 마치 “화살이 그 사수에 의해서 과녁으로 향하게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지적 존재, 즉 지식의 소유자에 의해서 이끌어지지 않으면 하나의 목적으로 향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자연물들을 하나의 목적으로 향하게 하는 하나의 지적인 존재가 있다. “그리고 이를 우리는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d. 다섯 가지 증명에 대한 종합적 논평

 

1)토마스의 논증의 목적과 대상

 

토마스의 신 존재 증명은 매우 간결하다. 그의 의도는 증명을 철저하게 다루는 데 있었다기 보다는 간결한 형식으로 ‘신앙의 전제’를 증명하는 데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의 주요 대상은 무신론자들이 아니라 이미 신을 믿고 있는 회교도들이었다.

 

2) 세 번째 길이 기본적이다.

 

토마스는 ‘보다 분명한 길’이라고 부를 만큼, 첫 번째의 증명을 우선시하고 있으나 실제로 기본적인 증명은 세 번째의 증명 즉 ‘우연성에 의한 증명’이다.

 

우연성에 의한 논증은 첫 번째 증명에서는 운동이나 변화라는 특수한 사실에 적용되고, 두 번째의 증명에서는 인과성의 질서 또는 인과적인 생성에 적용되고, 네 번째 증명에서는 완전성의 단계에, 그리고 다섯 번째 증명에서는 목적성, 즉 우주의 질서를 이룸에 있어서 무생물들의 협동에 적용되고 있다. 우연성에 의한 논증 그 자체는 만물이 자신의 충분한 이유(근거)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 즉 그것의 존재 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 충분한 이유(근거)를 변화와 운동은 하나의 부동의 원동자에, 이차적인 원인과 결과의 계열은 하나의 원인되지 않은 원인에, 제약된 완전성은 절대적인 완전성에, 그리고 자연에 있어서의 목적성과 질서는 유일의 예지자 또는 설계자에 각각 두어야 한다.

 

3) 논리적 기원

 

아우구스티누스나 보나벤투라에 의한 하느님의 존재 증명이 지닌 내면성(interiority)은 성 토마스의 다섯 가지 길에는 없다. 그러나 그의 다섯 가지 증명은 지혜서에 나오고 로마서에 나온다.

 

지혜서 13장:“. .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시는 분을 보지 못하고,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만든 장인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 . 아름다움을 만드신 분께서 그것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또 그것들의 힘과 작용에 감탄하였다면, 바로 그것들을 보고 그것들을 만드신 분께서 얼마니 힘이 세신지 알아야 한다.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 창조자를 알 수 있다. . . ”.                                       

 

로마서 1, 20:  “세상이 창조될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 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고문헌

    

 F. 코플스톤 지음, 박영도 옮김, 『중세철학사』,1988.

'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은 존재하는가?  (0) 2023.01.08
안셀무스의 신존재 증명  (0) 2023.01.08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바른 이해  (0) 2022.12.23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바른 이해  (0) 2022.12.18
신학이란  (0) 2022.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