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적 관점으로 본 예수님의 탄생
(마1:18-25을 중심으로)
1. 도입
마태는 그의 복음서 1장에서 예수님의 족보 기술을 통해 예수님을 구약에 예언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곧 바로 지목합니다. 이는 예수님이야말로 다름 아닌 아브라함 언약과 다윗언약의 궁극적 성취자로 오신 분임을 강력히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때문에 의도적으로 이런 사실을 언급한 후에 이내 예수님의 탄생기사로 방향을 급선회시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인 사실을 단도직입적으로 증거하려고 하는 의도적인 행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기사에서 마태는 특별히 세 가지 측면에서 그 구속사적 중요성을 성경독자들에게 부각시켜 설명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탄생은 자연출생이 아닌 동정녀 수태로 말미암은 기적적(奇蹟的) 탄생이라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탄생은 단순히 한 인간의 출생이 아닌 성삼위(聖三位)의 하나님 중 제 이 위(位)이신 예수님 곧 구속주의 탄생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분’의 자격으로 말입니다. 셋째는 이런 사실로 인해 예수님의 탄생은 철저히 신적 기원에 의한 구약 언약의 성취자로 오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그의 오심이 우연의 산물이 아닌 하나님의 주도적인 작정과 계획으로 이루어진 구속경륜의 핵심 내용임을 증거합니다.
2.전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예수님의 탄생은 일반인의 출생을 뛰어넘는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남녀의 결혼으로 말미암는 자연출생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는 이를 설명하면서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고 짤막하게 기록합니다(18, 20절). 이는 예수님의 탄생이 하나님에 의한 신(神)기원적이고 초자연적인 출생임을 가리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적적으로 잉태되고 급기야 출생을 보게 됐다는 지적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기사와 배경을 비교적 짧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표적을 구하기를 좋아하고 이미 그런 사건에 익숙해 있었던 유대인들에게(고전 1:22, 요 4:48) 동정녀 탄생은 결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새로운 경험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누가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기사를 상대적으로 세밀하게 소개합니다. 이는 누가복음의 기록의도가 하나님과 구약적 배경에 대해 선(先)지식이 부족한 이방인들을 염두에 두고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로서 구약에 예언된 언약의 성취자로 오신 사실을 증거하려는 또 다른 의도가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거슬려 올라가는 방식을 사용했으며 결국 예수님의 기원을 아담과 하나님에게까지 연결시키는 것을 통해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만인의 메시아이며 세상의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알리고자 의도했던 것입니다(눅 3:23-38, 행 4:12). 그래서 예수님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인 사실과 그가 구약의 다윗 언약에 약속된 참 다윗 왕으로 오신 분임을 비교적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눅 1:31-33). 아울러 누가도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탄생사건과 관련해 마태의 설명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하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눅 1:35)라고 기록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하심으로 인해 처음부터 특별한 목적과 사명을 띠고 탄생하신 사실을 시사합니다. 마태는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로 부각시킵니다. 다시 말해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는 구원자의 자격으로 오시기 위해 동정녀 탄생의 방식을 빌려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 초두에서 예수님을 선재(先在)하신 하나님이 성육신하신 분으로 소개합니다(요 1:1-5).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분, 곧 장막(tabernacle)을 치신 분으로 설명합니다(14절). 이는 달리 구약의 성막의 실체로 오신 분임과(요2:20-21) 성막이 담고 있는 계시적 표상인 임마누엘의 당사자로 오신 분임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출25:8). 마태가 아기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에 근거합니다(마 1:22-23).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란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는 하나님으로 계시돼 사람들 가운데 임재 하게 된 사건이 곧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사건 속에 담긴 구속사의 비밀이란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시의 총화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실존과 인격과 사역에 접촉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독생하신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예수님이라는 인격 속에서 육체로 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의 심령 속에 성령님을 통해 삼위 일체적 개념으로 내주 해 계십니다(요 14:23). 여전히 우리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보호하시고 통치하시고 인도하십니다(마28:20).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동정녀 탄생의 방식을 통해서만 오셔야 됐을까요. 이는 다름 아닌 인류의 죄와 허물을 위한 대속물의 자격으로 오시기 위함입니다. 마가는 이를 설명하면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라고 기록합니다(막 10:45). 이제 예수께서 죄를 위한 대속물로 오셔야만 했었던 구속사적 당위(當爲)와 필연(必然)에 대해 살펴봅니다.
죄는 법정적 특성상 대가를 요구합니다. 죄인에게 재판에 의해 합당한 형벌이 주어지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이런 죄와 형벌과의 관계를 선악과 금령법의 언약을 계시적 사건사례로 주시는 것을 통해 이 사실을 인간의 삶 속에 근본원리로 삼으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순종하고 의존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 분으로 즐거워하는 삶을 누릴 뿐 아니라, 보다 고차원적인 영생의 삶의 실질로 나아가야 했습니다(창2:16-17).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인간역사 속에서 정당하게 시행되는 것을 통해 당초 품으셨던 하나님의 나라가 마침내 세상 가운데 온전히 드러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창1:28). 그러나 최초의 인간은 이 일에 실패합니다(창3:1-6). 그래서 그의 범죄로 인한 죄과는 그의 허리에 있었던 모든 인류에게 자신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생득적으로 전가되고 말았습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죄의 대가와 구체적 형벌로 온 인류에게 선고된 것이 이런 이유에서입니다(롬5:12, 6:23). 그래서 창세 이후로 죄는 그에 보응(報應)하는 합당한 형벌로 다스려지게 된 것입니다.
다른 한편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됐다는 사실은 이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함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전무(全無)함을 시사합니다. 정당한 여호와 신앙의 제 일 단계는 죄로부터의 구원에 있습니다. 이로 인해 구원의 감격과 기쁨과 감사의 반응이 다름 아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며 출발입니다. 따라서 죄의 문제를 해결함이 없이 어떤 신앙적 선행과 공적도 결코 인간을 죄로부터 자유케 할 수 없습니다. 죄로부터 나온 것은 결국 죄의 열매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성경은 이를 증거하면서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고 반문합니다(마7:18). 결코 그럴 수 없다는 지적입니다. 하나님 면전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에 죄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함이 없이는 어떤 인간의 선행도 상대적 선행은 될 수 있을지언정 하나님의 절대선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성경의 시각입니다. 이로 인해 의인은 하나도 없고 선한 일을 행하는 자도 하나도 없다는 것이 성경이 보는 인간에 대한 관점입니다(롬 3;10-12). 그래서 결국은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 정죄 돼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히 9:27).
따라서 절대 타자로서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자력구원은 절대 불가능한 것이 인간의 영적 상태인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실상이 이렇습니다. 역사적 개혁주의자들은 이런 인간의 비참한 영적 상태를 성경적으로 바르게 규명하는 가운데 인간의 ‘전적타락과 무능’교리를 발전시켰습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죄 값을 지불해 줄 대속주가 필요하게 된 사연이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바로 이런 대속자로서의 자격을 위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제일 요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무죄자가 아니고서는 인류의 대속자가 될 수 없는 구속의 원리에 의해서 말입니다. 아기 예수님은 이렇게 인간에 의해 자연 수태된 것이 아닙니다. 위로부터 성령과 지극히 크신 분의 능력으로 잉태되셨습니다. 단지 여인의 태만 빌리는 형식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분의 출생의 비밀은 본질에 있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오신 것입니다. 보냄을 받으신 것입니다. 선재(先在)하신 예수님께서 세상 가운데로 들어오셨다는 사실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적인 죄성이 예수님에게 전가되는 것을 처음부터 차단하셨습니다. 죄가 예수님을 결코 오염시킬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의 비밀이 이런 사실에 있습니다. 무죄자로서 죄의 대속물이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나아가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본체로 증거합니다(빌 2:6). 절대 의로운 자로서 외부적 타자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으로 성경은 증거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을 신학적으로 성육신(incarnation)사건으로 부르는 의미가 이렇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인간이시며 동시에 하나님이신 불가사의한 분인 셈입니다. 이를 신(神)-인(人)으로 표기하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표현과 설명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표현과 함께 지극히 성경적이면서도 인간의 지혜로는 그 전모를 온전히 인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사실 성경은 처음부터 창조주 하나님을 인간의 이성과 논리를 통한 증명의 대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저자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의 형식이 아닌 선포의 형식으로 계시합니다(창 1:1). 이는 하나님의 실존과 사역을 창조자와 피조물과의 관계를 통해 믿음과 신앙의 대상으로 수납해야 함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인간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인간의 모양과 성정을 가지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신성을 동시적으로 소유하고 계신 분으로 인해 죄인은 아닙니다. 성경은 이런 예수님을 표현하기를 죄를 모르는 분(고후 5:21), 죄가 없는 분(요일 3:5), 죄를 지을 수 없는 분으로 설명합니다(벧전 2:22). 이는 예수님의 본질이 하나님이신 사실을 증거 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상이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증언이며 구속사적인 관점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인간에게 베풀어주시기 위해 스스로 속죄 제물로 오신 한 마리 어린양이란 지적입니다(요 1:29, 고전 5:7).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의 구속사적 의미가 이렇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통한 성육신 사건 속에는 대속물로서의 필요충분 조건인 하나님과 인간이 한 몸 안에서 신비적으로 연합된 하나님의 비밀이 간직돼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통해 주신 제사제도는 바로 이런 대속물을 통해 죄 사함을 받게되는 하나님의 구속의 도리를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보여주는 계시적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짐승을 대속물로 삼아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속해 주시는 것을 통해 이제 어린양의 실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의 죄를 대속적으로 사면해 주실 것을 구속사의 점진적 계시를 통해 미리 예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모형으로서의 속죄 제물이 실체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성취된 것입니다.
구주가 되신 예수님
이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획인 구속의 도리를 세상 가운데 펼쳐 보이기 위해 구속사적 사명을 띠고 세상 가운데 오신 각별한 분입니다. 구세주로써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분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시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란 메시아의 희랍어식 표현으로서 곧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을 위해 따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일컫습니다. 구약적 배경에서는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이 자신들의 업무를 위해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이는 이 삼직(三職)을 수행함에 있어서 특별히 하나님의 신성한 사역을 선택적으로 담당하는 자들로 부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으로서의 삼직을 온전히 수행하신 분입니다. 아니 구약의 삼직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온전한 실체로 성취된 것입니다. 이 사실들에 대해 살펴봅니다.
먼저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의 사역에서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왕적 권세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고, 죄를 사하시며, 온갖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하시는 사역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이는 또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예수님을 통해 권세 있게 시행되는 것으로 인해 불가시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소위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 말입니다. 마태는 이런 사실을 확증하는 가운데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했다”고 주님의 말씀을 인용해 설명합니다(마 12:28). 누가도 이 일에 같은 생각을 피력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갖고 오신 하나님 나라의 왕이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 이 땅에서 ‘이미’ 현존하는 것을 통해 역사 속에서 그 나라를 확장시켜 가고 있습니다(마 13:31-32). 당신의 백성들 속에 영으로 내주 하시는 성령님의 유기적인 사역과 능력을 통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나라를 지속적으로 운반하고 확장하는 가운데 그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일환으로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서 천국백성의 삶의 목적과 방향성을 지적하는 가운데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는 것’(마 6:33)으로 나타나야 됨을 강력히 시사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란 세상 가운데 침노해 들어온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적극 받아 누리는 천상적 신분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하는 특별한 자들입니다. 이 사실을 인식함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법을 생명과 신앙과 삶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일에 총력을 경주하게 될 줄로 압니다. 선(先) 은혜가 후(後) 일치하는 실천적 삶을 강력히 요구하는 원리에 따라서 말입니다(약 2:17, 22, 26, 롬 16:16). 이런 거듭난 생명적 활동이야말로 태초 아담과 하와에게 복의 언약으로 부여하셨던 하나님의 문화명령(창 1:28)을 복음 안에서 성실하게 수행하는 삶으로서 곧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는 삶에 상응(相應, correspondence)한다 하겠습니다. 이로 인해 문화명령의 현재적 수행에는 한시적으로 세상에서 왕노릇 하고 있는 사단과의 지속적인 영적 전쟁이 불가피합니다. 지상의 교회의 특징이 전투하는 교회요 성도의 또 다른 신분적 성격이 하나님의 군사로 불리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단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하는 에베소서 기자의 설명이 이를 뒷받침합니다(엡6:12).
다음으로 예수님은 선지자의 실체로 오신 분입니다. 구약적 배경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하나님의 대변자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대리적으로 수행하는 하나님의 대사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로 오신 분으로 모든 구약의 선지자들의 사역을 자신 안에 총 망라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에는 하나님의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으로 천국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사실은 특별히 산상수훈에서 구약의 율법을 재해석하는 가운데서 절정을 이룹니다. 마 5장에서 저자는 주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가운데 “옛 사람에게 말한 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방식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임을 단도직입적으로 증거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되심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거 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사실을 주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의 내용을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요 17:21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
이 뿐만이 아닙니다. 주님은 지상의 사역기간 동안 적잖이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기도 하셨습니다. 유다의 배신, 베드로의 부인(否認)과 죽음, 부활후의 사역, 보혜사 성령의 강림과 제자들의 복음사역, 그리고 종말론적 말세의 징조 등 다양한 내용을 예언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예언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제반 가르침 등은 바로 예수님의 선지자적 사역을 구체적으로 실증하는 내용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세상 가운데 도래시킨 분으로 친히 하나님의 왕적 권세를 발휘하는 가운데 참 선지자로서의 사역을 능력 있게 담당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실체로 오신 분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죄인과 동일시함으로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고 기꺼이 한 마리 어린 양으로 속죄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되심으로 대제사장적 직분을 온전히 감당해 주셨습니다. 죄로 인해 원수 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목과 화해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창세 이후로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은 제사장적 중보사역인 동시에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한 대속적 사역이기도 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 속에 나와 우리 모두의 죽음이 포함된 대속적 죽음 말입니다. 로마서 기자는 이를 “예수는 우리의 범죄 함을 위해 내어 줌이 되고”라고 설명합니다(롬 4:25). 고린도서 기자는 해석하기를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 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기록합니다(고후 5:14). 갈라디아 저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설명함으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자신의 죽음을 동일시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모두의 죽음을 대표해서 죽으신 대속적 죽음임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갈 2:20). 이사야 선지자는 그의 고난의 종에 대한 묘사에서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고 예언적으로 선포합니다. 이상의 설명은 한결 같이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의 성격이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한 대속적 죽음과 중보적 사역임을 증거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중보사역을 통해 우리가 사죄의 은총과 새사람으로써 거듭난 새 생명을 얻게 됐음을 성경은 강력히 증거합니다(갈 2:20, 고후 5:17, 롬 8:1-2).
그러나 이런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중보사역은 지상의 사역으로 아주 종결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재림으로 인해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가 최종적으로 실현될 그날까지 여전히 지속됩니다. 지상의 성도는 이런 주님의 한결같은 대제사장적 중보사역에 힘입어 오늘도 지상에서 전투하는 교회원으로써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으며 모든 일에 주님의 인도와 보호와 다스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님의 내주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서 말입니다. 빌 1:6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 2:13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 뿐만이 아닙니다. 보다 확증적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롬 8:34입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히 7:25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는 이상의 내용을 통해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존귀로 관쓰시고 여전히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대제사장으로써 중보사역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이런 사실은 보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우리의 마음속에 내주케 하시는 방식을 통해 여전히 지상사역의 연장선상에서 동일하게 임마누엘하고 계심을 의미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 모든 예수님의 전(全)구속사역의 내용은 본질적으로 에베소서 기자가 밝히 드러내고 있듯이 창세 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과 작정에 근거해서 계획하신 하나님의 구속계획의 전모입니다(엡 1:3-6).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세상 가운데서 실제로 실현시키는 것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에로 인도하기 위해 구원자로 오신 분입니다.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 중 제 2 위의 하나님의 성육신(聖肉身)사건 말입니다.
구약언약의 성취자
우리는 마태의 예수님의 탄생기사와 관련해서 그 분의 ‘동정녀 탄생’과 ‘구속주’로 오신 사실의 당위와 필연을 살펴봤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무죄자만이 속죄(贖罪)의 자격자로써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하는 구원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계속해서 예수님이 인류의 구원자로 오심은 바로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임을 증거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구약언약의 최종적 성취자로 오신 분이란 사실을 선지자들의 예언을 인용해서 증명합니다. 이런 그의 시도는 다분히 의도적인 기술로써 구약성경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믿고 섬기는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저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하신 메시아인 사실을 확증시키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이 구약언약의 성취라고 천명하면서 이사야의 글을 증거 본문으로 제시합니다(마 1:22-23). 이는 다름 아닌 사 7:14의 인용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당시 이사야를 통해 하신 본문의 말씀은 유다 아하스 왕에게 주신 내용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상당히 불경건한 자로 소개됩니다. 당시 아하스 왕은 이스라엘과 앗수르의 연합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포위된 상태에서 큰 위기를 맞게된 상황에서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됩니다. 다름 아닌 예루살렘을 저들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히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도움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해 먼저 아하스에게 어떤 징조를 먼저 구할 것을 이사야를 통해 요구하십니다(10-11절). 왕은 이를 거절함으로써 하나님을 불신하는 마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아하스의 불신과 거절이 하나님의 뜻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다윗의 위를 통해 주시기로 약속하신 후손을 하나님은 당신의 신실성 안에서 반드시 보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 7:14의 말씀은 아하스의 징조 거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지속적으로 보존하실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예언인 것입니다. 그래야만 다윗의 왕통을 이을 후손이 처녀의 몸을 통해 다윗의 자손으로 유다 나라에 오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온의 보존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의 회복은 이렇게 그 이름을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내용의 당사자인 예수라는 분의 도래로 말미암아 비로소 온전히 성취를 보게 됐다는 것이 마태가 본문을 예수님의 탄생과 연결해서 해석한 관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임마누엘 하신 당사자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이런 사실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居)하시매(즉 장막을 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고 설명합니다. 이는 다분히 구약적인 배경 하에서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해명함에 다름 아닙니다. 지금 요한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백성 가운데 임재하셔서 저들과 동행하시고 교제하시는 모습을 구약의 성막제도를 통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성막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동일한 방식으로 임재하시고 동행하셔서 교제하기 위해 오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의 성막은 그 자체가 하나의 상징과 예표의 성격을 띠고 있는 바, 바로 임마누엘의 의미(출 25:8)와 임마누엘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요 1:14, 사 7:14).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성막계시의 실체로 오신 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성막을 통해 임재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해 육신을 입고 현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임마누엘의 온전한 성취자로, 다윗 언약에 약속된 참 다윗 왕으로 영원히 쇠하지 아니할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가지고 마침내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셔서 당신의 영원한 백성을 삼고자 언약의 당사자로 오신 분입니다. 마태가 지금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의 말씀을 인용해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설명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을 확인시키기 위함입니다(마 1:22, 2:23).
이 뿐만이 아닙니다. 임마누엘로 오실 분은 처녀에게서 나실 분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마 1:23상). 이는 또 다른 의미에서 창 3:15의 여자의 후손의 결정적인 성취자로 오실 분임을 가리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여자의 후손이란 먼 훗날 바로 십자가의 사역을 통해 뱀의 후손의 우두머리인 사단의 머리를 결정적으로 상케 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인해 지금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된 아기 예수는 다름 아닌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로 오신 분임을 동시에 증거합니다. 바로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을 여자의 후손 한 사람의 순종함을 통해 많은 사람을 의인되게 할 당사자(롬 5:19)가 동정녀 잉태방식을 통해 오신다는 사실의 지적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런 사실에 동의하면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갈 4:4)라고 설명합니다. 처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 예수님은 이런 의미에서 모든 구약언약의 최종적인 성취자와 언약의 머리로 오신 분임에 의심의 여자가 없습니다. 마태의 복음서 기록의 핵심적 의도가 바로 이 사실을 전하려는 데 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란 구속사 경륜의 대 주제 말입니다.
3.결론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로 인해 새로운 계시시대가 열렸음을 선포합니다. 상징과 예표론적인 구약의 계시역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안에서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사의 경륜은 마침내 구속계시의 절정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마태는 이렇게 구약계시의 성취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정통성과 진정성을 성경 독자들 특별히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확고부동하게 확증시키기 위해 저들이 즐겨 기준 삼는 족보와 선지자들의 말씀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명실공히 유대인의 메시아일 뿐 아니라 온 인류의 유일한 메시아로써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구속자의 신분으로 마침내 역사의 전면에 그 영광의 자태를 드러내기에 이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런 언약적 구속사 진행의 경륜을 마태로 하여금 직시할 수 있도록 그의 전인격을 영감하심으로 이 신묘막측 하신 하나님의 일을 당시 유대인과 오늘날 성경 독자들에게 밝히 해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이 크신 일을 이루신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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