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인물

[스크랩] 김형주목사님

하나님아들 2012. 11. 16. 12:02

고 이병철 회장의 질문과 그 해답

 

 

지난 20111231일 중앙일보에 게재된 내용이다. 삼성의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이 종교적 질문 24개를 물었다. 천주교 신부에게 보냈으나 그는 1달 후 대답을 듣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24년 후 차동엽 신부가 답변과 함께 이제야 공개한 것이다. 그 사이 여러 교단 여러 목사님들의 답변들이 나와서 인터넷 화면들을 채우고 있다. 필자는 이 질문과 답변들을 검토하면서 좀 더 성경적인 바른 답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이 질문들은 인간이면 모두가 고민하는 문제들이다. 과연 그 해답은 무엇인가?

 

 

1.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여러 이론이 있다. 우주론적, 존재론적, 목적론적, 도덕론적 논증들이 있다. 그러나 좀더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증명할 수 있다. 내가 존재하는 것은 나를 낳아준 부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저절로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면 나의 부모의 존재가 증명이 된다. 마찬가지로 인간과 만물은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특히 생명체는 저절로 만들어질 수가 없다. 만일 저절로 생명체가 만들어진다면 지금도 돌이나 흙과 같이 생명이 없는 무생물에서 생명체가 계속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생명체는 생명체에서만 나온다는 것이 생물학의 정설이다. 따라서 최초의 생명체는 생명의 근원이신 신에게서 나온 것이다. 현재 세상에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생명의 근원이신 신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그 신이 자신을 똑똑하게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만물은 각기 존재 방식이 다르다. 인간은 만물의 그 존재 방식에 따라서 접근해야 한다. 태양은 빛과 열로 자신의 존재 방식을 나타낸다. 인간이 만일 그 태양을 좀 더 똑똑하게 알기 위해 육안으로 계속하여 바라본다면 실명이 되고 만다. 고압선이 흐르는 전깃줄을 더 똑똑하게 관찰하기 위해 손으로 잡으면 감전사고로 죽게 된다. 신은 태우는 불과 같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신다. 그를 보고 살자가 없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러므로 그가 자신을 인간 앞에 더 똑똑하게 나타내지 않는 것은 연약한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이다.

   

2. 신은 우주만물의 창조주라는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우주와 만물의 근원은 무엇인가. 이것은 오래 동안 과학이 풀지 못한 숙제이다. 과학이 우주 생성의 근원을 연구해 왔으나 고작해야 진화론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진화론은 다양한 화석을 찾을 수 없는 만큼 그 한계에 머물고 있다. 만물의 근원에 대한 해답은 성경이 말하는 창조론 밖에 없다. 인간보다 더 지혜롭고 우주보다 더 크신 능력의 소유자 곧 신이 우주만물을 직접 만들었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 결과를 보아서 증명할 수 있다. 6.3빌딩을 보면서 저 건물이 저절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는가. 그 속에 놀라운 설계자의 지혜가 들어있고 또한 최첨단 건축 공법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산 밑에 저절로 모여쌓인 돌무더기와 다르다. 그렇다면 작은 꽃 한 송이는 저절로 만들어졌는가. 그 세포조직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면 놀라운 조직과 유기적인 활동을 발견하게 된다. 어찌 저절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일 우주를 신의 창조가 아니고 저절로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면 원숭이가 베토벤의 교향곡을 작곡했다는 말에 동의해야 할 것이다. 원숭이가 자판기를 두드리다가 어느 날 우연히 베토벤의 교향곡을 작곡하고 춘향전을 썼다고 할 수 있는가. 우주 만물은 어쩌다 저절로 우연히 자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신의 창조물이다. 따라서 만물은 신의 솜씨와 신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우주는 누군가 훌륭한 건축가가 건축하고, 훌륭한 조각가가 조각하고, 훌륭한 음악가가 작곡하고, 훌륭한 미술가가 그려놓은 최고의 작품이다. 성경은 그 작가를 가리켜서 신 곧 하나님이라고 한다.

 

3. 생물학자들은 인간도 오랜 진화과정의 산물이라고 하는데, 신의 인간창조와 어떻게 다른 가? 인간이나 생물도 진화의 산물 아닌가?

 

진화론은 가설이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추측을 뜻하는 말(may)을 수없이 반복하여 사용하였다. 이 가설은 실험과 검증을 통해 사실임을 증명해야 한다. 그 때 증명된 사실이 과학적 사실이다. 그러나 진화론은 아직껏 그 가설이 완전히 증명되지 않고 있다. 특히 대진화의 중간 단계를 증명하는 화석을 찾지 못하고 있다. 소가 고래가 되었다면 그 중간 단계에 따라 화석이 발견되어야 한다. 앞다리가 변하고 뒷다리가 변하고 꼬리가 변하는 모습이 차례로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그 중간 단계의 화석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가설을 확증할 수 있는 증거가 없다. 따라서 진화론은 과학이라고 할 수 없다. 생물학자들은 이 증명할 수 없는 과정을 덮어두기 위해서 수억 년이라는 긴 시간으로 포장한다. 그 긴 세월 속에서 우연히 조금씩 나아져서 인간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연은 과학이 아니다. 오히려 지혜로운 신이 인간과 생물을 각기 종류가 다르게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인 대답이다.

 

4. 언젠가 생명의 합성, 무병장수의 시대도 가능할 것 같다. 이처럼 과학이 끝없이 발달하 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

 

과학의 발전을 긍정적으로만 본다면 무병장수와 영생이 가능하고 인간이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도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과학은 그 긍정적인 발전의 이면에 부정적인 결과를 동반하고 있다. 쥐를 잡고자 쥐약을 만든 결과 쥐만 잡은 게 아니라 고양이도 죽고 사람도 죽었다. 노벨이 인간의 노동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폭탄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폭탄은 지금 전쟁무기가 되어 수많은 인명과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 과학의 발달로 천국과 낙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문제는 그 과학을 주도하는 인간의 마음속에 죄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죄의 문제를 감추어두고 과학의 발전만을 꾀하면 신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5.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세상에 자식을 사랑치 않는 부모는 없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이 아무리 깊고 뜨거워도 그 자녀들 중에는 불행한 자가 있다. 특히 그 자녀가 부모의 뜻을 거역하고 부모의 사랑을 배반하면 불행해진다. 그러므로 자식의 불행을 부모의 탓이나 조상의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불행을 신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신은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만들었고 에덴이라는 낙원에서 행복을 누리게 했다. 그러나 인간이 신의 뜻을 거역하고 불순종하여 죄를 지었다. 그 결과 고통과 불행과 죽음이 찾아왔다.

 

6. 신은 왜 스탈린이나 히틀러 같은 악인을 만들었나?

 

스탈린이나 히틀러 같은 인물보다 더 악한 존재는 사탄이다. 악인은 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사탄이 만들었다. 사탄은 에덴에 들어가서 인간을 유혹하였고 죄를 짓게 만들었다. 그 때 신은 사탄이 악인을 만드는 일에 간접적으로 허용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악인에 대한 책임을 신에게 돌릴 수는 없다. 신은 거룩하고 선하시기 때문에 악을 행할 수가 없다. 악은 사탄에게서 시작되었다. 사탄은 자기의 교만 죄로 형벌을 받아 거룩한 천사의 지위에서 떨어졌다. 그 후 사탄은 인간을 자기의 수족으로 만들어 사용한다. 그러므로 신이 악인을 만든 것이 아니라 사탄이 악인을 만든 것이다.

 

7.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내버려 두었는가?

 

신은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만들어 두시고 인간에게 먹지 말라고 금하셨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검증하고 또 신과 인간의 한계선이 무엇인지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에덴에서 금단의 열매를 따 먹었다. 이것은 신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이요, 최초의 죄요, 원죄이다. 하나의 불씨가 온 산을 태우듯이 하나의 죄는 온 인류를 멸망으로 몰고 갔다. 죄란 유전병과도 같고 전염병과도 같아서 점차 인간 개인을 완전히 부패시켰고 또 사회 전체를 오염시켰다.

 

죄의 결과는 고통과 죽음과 지옥형벌이다. 인간은 모두 죄의 권세 아래에서 고통하며 죽음과 지옥 형벌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신이 강제로 죄를 막을 수가 없다. 신은 인간을 기계로 만들지 않고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적인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죄짓는 모습을 보고 내버려 두신 것도 아니다. 때로는 죄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때로는 죄의 결과에 따라 형벌을 내리셨다. 선지자와 의인들을 보내사 책망하고 교훈하셨다. 그러나 인간들이 듣지 않고 점점 더 죽음의 길로 달려갔다.

 

이제 인간 구원의 유일한 길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게 하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의 죄를 무조건 용서하는 데 있다. 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희생양이 되어 대신 죽으신 자가 예수님이다.

 

8. 성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성경은 1,600여 년 동안에 40여 명의 저자들이 썼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거나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환상을 본 후에 기록했다. 이처럼 신이 자기의 뜻을 인간에게 나타내신 것을 계시라 한다. 신이 자기의 뜻을 특정한 인간에게 계시하사 기록하게 하셨다. 가령 구약의 모세는 시내 산에서 80일을 머무는 동안에 신의 음성을 직접 들었고 그 명령과 율법을 받았다. 그 중 십계명은 신이 직접 써서 주시기도 하였다. 모세는 하나님이 기록하라는 명령대로 그것들을 기록하여 오경을 만들었다. 신약의 바울 사도는 성령의 영감을 통하여 받은 진리를 기록하여 신약의 절반 가량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은 인간의 손으로 기록하였으나 그 내용의 출처는 신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성경은 먼저 자증하고 있다. 성경 스스로가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과 같은 표현이 수없이 나타난다. 다음 성경은 오랜 기간 동안에 각기 다른 사람들이 각기 다른 장소와 처지에서 기록하였으나 일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진짜 저자가 한 분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 일관성은 창조와 구속과 심판과 같은 전체적인 구조와 틀이 모두 같다는 점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때로는 문장과 단어와 수치까지 일치되고 있다. 특히 구약의 예언이 오랜 세월 후 신약에서 성취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 저자 배후에 신이 저자로 활동하신 것을 알 수 있다.

 

9. 종교란 무엇인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

 

종교가 무엇이며 왜 필요한가를 말하기 전에 종교는 출생 시부터 인간 본성에 뿌리 박혀있다고 보아야 한다. 종교는 인간이 필요하여 만든 것이 아니다. 본능적으로 신을 찾는 마음이 인간 속에 있다. 고아원에서 자란 아이 마음속에 엄마를 찾는 그리움은 누가 가르친 것이 아니다. 본능적으로 심어져 있다. 그 아이는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엄마를 항상 찾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신을 찾는 마음이 본능 속에 들어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인간이 신의 형상을 가진 신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신을 떠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신을 떠나 사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새들도 고기들도 또 숲속에 떼 지어 사는 고등한 동물도 마찬가지이다. 그들도 신을 모르고 있다. 그러나 그들 속에는 신을 찾는 행위가 없다. 원숭이 집단 속에는 종교가 없다. 물개들의 집단 속에도 예배가 없고 찬양이 없다. 종교는 오직 인간에게만 존재한다. 인간만이 신과 함께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존재로 지음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 사회는 문명인이든지 야만인이든지를 막론하고 어디든지 종교가 있다. 인간은 종교적인 동물이다. 인간이 신을 만든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 신이 인간을 만들 때 인간의 유전자 속에 신을 찾을 가능성을 입력해 놓으셨다. 본디 인간은 신을 잃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 가능성을 따라서 신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 신을 찾는 행위가 곧 종교이다.

 

10. 영혼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는 사람을 몸과 정신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성경은 몸과 영혼으로 구분한다. 영혼은 정신보다 그 범위가 깊고 넓다. 영혼은 정신을 포함하는 인간의 본질적 요소이다. 본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두 가지의 재료를 사용하셨다. 흙과 생기이다. 흙은 인간의 육체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생기는 우리의 영혼이 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육체와 영혼 이 두 가지 부분을 가지고 있다.

 

이 두 가지가 결합하여 있을 때 우리는 살아있게 된다. 그러나 만일 이 두 가지가 나누어지면 죽게 된다. 즉 영혼이 육체에서 떠나면 아무리 건강하여 신체에 이상이 없는 자라도 죽게 된다. 육체는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영혼은 우리 속에 들어있으며 보이지 않으나 더 본질적이고 더 중요한 부분이다. 신은 이 영혼 속에 신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입력해 놓으셨다. 바로 이점에서 볼 때 영혼은 정신이라는 범위보다 더 넓다. 또 이런 점에서 볼 때 모든 동물 속에 없는 영혼이 인간 속에만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1. 종교의 종류와 특징은 무엇인가?

 

종교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자력종교와 타력종교이다. 자력종교는 자기의 힘으로 구원의 길을 찾는 것이다. 자기의 힘 즉 종교적 활동과 봉사, 희생, 수양, 선행 등 온갖 선한 언행을 통해 스스로 신을 찾고,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다. 가령 불교는 자비로운 언행으로 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무한히 힘써야 한다. 유교는 인자한 말과 행동으로 법과 질서를 세워서 사람을 편하게 해야 한다. 그 밖의 모든 종교도 다 이 자력종교에 해당한다.

 

그러나 유독 기독교만은 타력종교이다. 기독교는 자기 힘이 아니라 타인의 힘으로 구원의 길을 찾는 종교이다. 타인이란 예수님을 말한다. 인간의 노력으로 신을 찾을 수 없으므로 예수님이 자신을 통해 신을 보여주셨다. 또 신이 요구한 율법을 인간이 지킬 수 없으므로 예수님이 대신 지키고 완성해 주셨다. 그리고 인간이 범한 모든 죄의 빚을 인간 스스로는 도무지 갚을 길이 없으므로 예수님이 자기의 몸과 피 값으로 대신 갚으셨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자기 힘이 아니라 남의 힘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나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시므로 인간의 힘으로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다. 태양을 스스로 만들어서 그 빛과 열을 사용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공기를 스스로 만들어서 마시라고 하지 않으셨다. 물을 스스로 만들어서 먹고 마시고 사용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태양과 공기와 물은 인간 생존에 가장 귀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인간 스스로에게 맡기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직접 만드시고 준비하셨다. 인간은 그것들을 받아 사용만하면 된다. 마찬가지로 인간 구원의 길은 너무 귀하고 어려운 일이어서 인간 스스로 만들 수가 없다. 그래서 신이 직접 구원자 예수를 보내시고 그로 대신 죽게하사 구원의 길을 만드셨다. 인간은 다만 그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12. 천주교를 믿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는가? 무종교인, 무신론자, 타종교인들 중에도 착한 사람이 이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천주교를 포함하여 기독교는 구원의 길이 예수 뿐이라고 말한다. 그 배타적인 주장 속에는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는 듯한 독선이 들어있다. 요즈음 다원주의라는 신학 사상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의 일부 종파는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한다. 다원주의를 말하는 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비유가 있다. 산을 오르는 데는 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길이 있다고 말한다. 길은 다르지만 결국 꼭대기에 가면 다 만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구상에 산이 하나만 있으면 그 비유가 합당하다. 그렇지만 사실상 지구상에는 수없이 많은 산이 있다. 오르는 길이 다르면 전혀 다른 산에 오를 수 있다. 산을 오르는 자마다 꼭대기에서 반드시 만나는 것이 아니다.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무종교자나 무신론자도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신이 있다고 믿거나 신이 없다고 믿거나 모두 믿음을 가지고 산다. 무종교자나 무신론자는 큰 산은 아니지만 작은 산을 오르거나 때로는 아무도 오르지 않는 산길을 혼자서 오르는 자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시 그들도 꼭대기에서 함께 만날 수는 없다.

 

착하게만 살면 천국이든 극락이든 그 꼭대기에서 만날 것이 아니냐고 그들은 말한다. 착하다, 악하다가 구원을 얻고 못 얻는 기준이라면 그 말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 구원의 기준은 도덕과 윤리가 아니라 믿음이다. 착하다 악하다가 기준이 아니라 믿느냐 안 믿느냐가 구원의 기준이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이요, 안 믿으면 멸망이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상에 있던 강도는 착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다만 그는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

 

13.종교의 목적은 모두 착하게 사는 것인데 왜 천주교만 제일이고 다른 종교는 이단시하나

 

질문자는 종교의 목적을 오해하고 있다. 일부 종교는 질문자의 생각과 일치하는 경우도 있다. 가령 유교는 법과 질서에 맞게 즉 착하게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불교도 자비를 베풀며 착하게 살 것을 바라고 있다. 이것은 자력 종교의 특성이다. 자력종교는 모두 인간이 만든 종교이다. 인간 스스로 구원의 기준을 착함에 두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신이 주신 계시의 말씀에 따라 만들어졌다. 즉 기독교는 신이 만든 종교이다. 따라서 신이 목적하신 것이 무엇이냐가 중요하다. 신은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과 인간을 만드셨다. 신은 인간이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며 자기를 경외하고 자기의 명령에 순종할 것을 원하신다. 기독교는 바로 이 신의 말씀을 담은 성경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종교이기 때문에 다른 종교를 이단시한다. 신이 주신 계시의 말씀 때문에 오직 기독교만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하고 있다.

 

14.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흙과 생기로 만들었다. 흙은 육체가 되고 생기는 영혼이 되었다. 이 둘이 함께 결합되어 있을 때 인간은 살아있게 된다. 만일 영혼이 육체에서 떠나게 되면 죽는다. 죽은 후 인간의 육체는 땅속에 들어가서 썩어 없어진다. 그러나 영혼은 썩는 물질이 아니다. 처음부터 신의 생기로 만들어진 비물질적 요소이며 신의 형상을 닮은 부분이다. 그러므로 썩지 않고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한다. 사람이 죽은 후에는 그 영혼이 천국과 지옥으로 가서 영원히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영혼이 천국과 지옥으로 가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인간은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었다. 태아에게는 어머니의 자궁이 우주 전부였다. 태어나고 보니 더 넓고 큰 세상이 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는 우주라는 자궁 속에 있다. 죽은 후에는 또 다른 천국과 지옥의 세계에서 눈을 뜨게 될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믿을 것인가. 죽어보면 안다. 그렇다고 죽으면 그 때는 늦어버린다. 다시 돌이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죽은 후에야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지옥에 떨어진 자의 불행은 말할 수 없이 크다. 그러므로 살아생전에 사후 세계를 알아야 한다. 여기서 파스칼처럼 내기를 해볼 수 있다. 만일 살아생전에 사후 세계를 모른다 해도 믿으면 손해가 적다. 믿는 자는 천국과 지옥이 있으면 천국에 들어간다. 사후 세계가 없으면 살아생전 신앙생활로 손해 본 것으로 그친다.

 

그러나 안 믿는 자는 만일 천국과 지옥이 있을 경우 틀림없이 지옥에 갈 것이므로 그 손해는 계산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반대로 만일 사후 세계가 없으면 살아생전 마음대로 살았던 것 때문에 조금 득을 본 셈이다. 이렇게 계산해보면 믿는 것이 유리함을 알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이런 계산 때문에 사후세계를 믿는 것은 아니다. 가장 확실한 증인을 통해 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예수님은 하늘에서 온 자요, 다시 하늘로 올라가신 자요, 머지않아 다시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자이다. 그는 죽은 후 부활하심으로써 자기 말의 진실성을 증거해 주셨다. 예수님이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천국을 소망하며 살 수 있다.

 

15. 신앙이 없어도 부귀를 누리고, 악인 중에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신이 세상을 만드신 목적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신의 영광을 나타내고 신이 인간을 통해 영광을 얻으려는 것이다. 그렇다고 신이 인간의 행복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 에덴의 낙원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이 부귀와 영화를 누리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을 원하셨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긴다는 조건 아래서 그 행복은 가능하였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다. 하나님은 모든 부귀영화를 거두어버릴 수 있다. 고통 속에서라도 다시금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그 고통 속에 있다. 하나님께는 인간의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 차라리 가난하여서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다면 하나님은 가난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부귀영화를 누리면서도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다면 하나님은 그에게 부귀영화를 금치 않으실 것이다. 그런데 만일 악인이 악을 계속하고 있어도 부귀영화를 누린다면 하나님은 이미 그의 영혼을 버린 것이다. 그가 비록 부귀영화를 누린다 해도 잠시잠간이요, 곧 멸망에 이를 것이므로 하나님은 참고 계신다.

 

16. 성경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약대(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가장 많이 위협하는 것을 지적하셨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이를 사랑하고 저를 미워하거나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긴다. 둘을 똑같이 사랑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말씀 속에서 둘을 비교하실 때 하나님과 명예를 비교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과 권력도, 하나님과 지식도 비교하지 않으셨다. 오직 하나님과 재물을 비교하셨다. 재물, , 물질이라는 것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였다. 아간과 가룟 유다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유혹하였다. 재물은 하나님과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는 하나님을 잃어버릴 수 있는 가장 무서운 독약을 항상 곁에 두고 있는 셈이다. 부자가 악인이라는 말이 아니라 부자는 돈을 하나님 자리에 둘 가능성이 많으므로 조심하라는 말씀이다.

 

17. 이태리 같은 나라는 국민의 99%가 천주교도인데 사회혼란과 범죄가 왜 그리 많으며 세 계의 모범국이 되지 못하는가?

 

에덴 동산은 이태리보다 더 좋은 곳이었다. 더 좋은 환경과 더 좋은 사람들만 살았다. 99%가 아니라 100%가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도 사탄이 들어갔고 사람을 유혹하였다. 지상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만큼 좋은 성도들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속에도 가룟 유다가 있었다. 유다는 예수님의 눈 앞에 앉아있는 순간에도 그 마음 속에는 사탄이 있었다. 가장 거룩한 성찬식 자리에서도 사탄은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 있었다. 예수님을 팔려는 악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구약 성경에 있는 유대인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유대인은 가장 경건한 하나님의 선민이다. 그러나 그들은 우상숭배와 성적 타락이라는 죄의 유혹에 자주 빠졌다. 결국 그들의 역사는 실패와 징벌의 반복이었다. 종교적 환경이 아무리 좋고 경건해도 그 속에 사탄이 들어갈 수 있다. 그 사탄의 유혹에 넘어진 자는 바른 신앙을 떠나 악에 빠지게 된다. 신앙은 99라는 수치로 확인할 수 없다. 그 속에 질적으로 얼마나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이태리는 바른 신앙을 찾기 위해 다시 한 번 종교 개혁이 있어야 할 것이다.

 

18. 신앙인은 때때로 광인처럼 되는데 공산당원이 공산주의에 미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사람이 미치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다. 부정적으로 미치거나 긍정적으로 미치는 경우가 있다. 마약이나 술이나 노름에 미치면 패가망신한다. 그들은 모든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 그러나 운동에 미치면 세계적인 운동선수가 된다. 음악에 미치거나 미술에 미쳐도 그 분야에서 정상에 이르게 된다. 만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이처럼 미치는 것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그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부정적인 경우가 있고 긍정적인 경우가 있다. 공산주의와 기독교에 미치는 경우도 이와 같이 구분할 수 있다. 공산주의에 미치는 것은 부정적으로 미치는 것이다. 공산주의라는 이론은 함께 살자는 선한 목적을 위해 폭력도 불사한다. 그 이론 속에는 절대성이 없다. 그것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상대적인 이론이요 위험한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확실하지 않은 것을 찾아 미친 듯이 살아가는 것은 마치 구름을 잡는 것과 같고 신기루를 찾아 달리는 것과 같다.

 

기독교는 절대자인 신의 계시에 기초를 두고 있다. 만일 그 계시인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가르치는 교회라면 온 마음을 다 하여 미칠 듯이 섬겨도 해가 되지 않는다. 심은대로 거두게 하시는 신의 약속이 그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공산주의는 뜬 구름이요, 신기루에 지나지 않으나 기독교는 반석처럼 확실하고 분명하다. 성경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산다면 신의 약속대로 축복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안에도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고 그 결과 성도들을 바르게 인도하지 못하는 교회들이 있다. 성도들은 옥석을 가려서 믿고 섬겨야 할 것이다.

 

19. 천주교와 공산주의는 상극이라고 하는데 천주교도가 많은 나라들이 왜 공산국이 되었 나?

  

두 개의 직선이 한 점에서 만나면 그 후로는 영원히 멀어지게 된다. 갈수록 그 사이는 벌어지게 된다.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유신론과 무신론이라는 대 전제부터 다르다. 따라서 둘은 철저하게 다른 길을 달려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이 만나게 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기독교과 공산주의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볼세비키 혁명이전 구 소련은 90% 이상이 기독교도였다. 그들은 그리스 정교를 믿었다. 그리스 정교는 삼위일체를 부정하였다. 성부의 권위 아래 성자와 성령의 종속을 믿었다. 이것은 성경 해석상 오류에서 나온 교리였다. 삼위의 동등을 부인하고 성부의 독재체제를 인정한 것이다. 그 잘 못된 교리에서 잘못된 교회조직과 사회조직이 나왔다. 교회는 이미 피라미드식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토양에서 나온 공산주의도 일당 독재와 피라미드식 조직을 만들었다. 공산주의의 특징은 이 일당 독재와 피라미드식 조직이다. 그 조직의 꼭대기는 전체를 지배하는 독재의 수장이 있다.

 

이 조직 체계라는 점에서 보면 공산주의와 천주교도 비슷하다. 천주교에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식 조직이 있다. 공통분모를 가진 두 집단은 공존이 가능하다. 특히 배가 고프면 유신이냐 무신이냐 보다 먹는 것이 앞서게 된다. 그래서 남미는 천주교 일색이지만 경제적 빈곤 때문에 해방신학이 태동하였다. 해방신학은 신학과 공산주의를 혼합한 것이다. 이것이 남미에서 가능하였던 것은 경제적 빈곤 이전에 벌써 독재체제라는 조직상의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주교와 공산주의는 대전제가 다르지만 그 조직상 일치점이 있어서 쉽게 동화 되고 있다.

 

20. 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은데 사회범죄와 시련이 왜 그리 많은 가?

 

이 문제의 답은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다. 이태리에 범죄자가 많다는 것과도 같은 문제이다. 예수님 제자 속에도 유다가 있었다. 초대교회에도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있었다. 에덴 동산에도 사탄이 있었다. 종교가 그 이상보다 현실에 눈을 돌리면 세속주의에 빠지게 된다. 종교가 본래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않고 사람이 주인이 되면 타락한다. 한국 교회도 120여 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놀라운 부흥과 성장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차츰 세속주의에 빠지고 기복신앙에 사로잡히고 있다. 교회가 그 본질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다. 성도들도 바른 신앙을 잃어가고 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사명을 감당치 못하고 있다. 물질주의에 빠져서 하나님 자리에 재물을 놓고 섬기고 있다. 그 결과 나타나는 것이 사회적 범죄요, 교회내부의 혼란이요, 분열과 파쟁이다. 한국 교회도 내부로부터 새로운 개혁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21. 로마 교황의 결정엔 잘못이 없다는데 그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독선(獨善)이 가능한 가?

   

천주교는 교황이 신앙과 도덕에 관하여 정식으로 결정하고 공포한 것은 오류가 없다고 주장한다. 질문자는 교황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독선이 가능한가 묻고 있다. 이 질문은 종교개혁자들이 던진 질문과도 같다. 질문자가 종교 개혁자들의 주장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대단히 예리한 질문이다. 천주교 신부가 이 대답을 위해서는 많이 고심했을 것이다.

 

개신교 입장에서는 분명하다. 교황무오설은 성경적 근거가 없다. 인간적인 상식으로 보아도 잘 못된 주장이 틀림없다. 인간은 완전한 자가 없기 때문에 무오하다는 말을 할 수 없다. 더욱이 역사적으로 보면 이 주장은 터무니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허물투성이의 인간이었다. 그가 초대교회 지도자가 된 후에도 갈라디아 교회에서 실수한 후 바울에게 공개적으로 책망을 받은 일도 있었다.

 

1869년 이후 교황 무오설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교황들은 오류가 있었다는 말인가. 14세기 말 경에는 교황이 한꺼번에 세 명이 나타나서 서로가 교권을 차지하려고 싸웠다. 그 때는 누가 교황이고 누구의 주장이 바른 것이었는가. 교황이 세상 정치를 맡은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참회한 때도 있었고, 교황이 군대에게 뺨을 맞은 때도 있었다. 그 때 교황의 무오라는 진리와 그 권위는 어디 갔는가.

 

최근 교황청은 유아림보라는 교리를 폐기하였다.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황의 결정에는 오류가 없다는 주장을 하면서 교리를 폐기하다니 언어도단이다. 교황이름으로 결정하고 발표하였다가 교황이름으로 없애버린 것이다. 유아림보가 진리인가 교황무오설이 진리인가. 둘 다 성경적 근거가 없으므로 진리가 아니다.

 

22. 신부(수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이 제도 역시 성경적 근거가 거의 없다. 예수님이 독신이었으니 그 모범을 따른다는 주장을 많이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독신을 요구하신 일이 없다. 베드로는 결혼하여 장모까지 모시고 살았다. 그는 아내를 데리고 다니면서 전도에 힘썼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독신을 본받는다는 것이 과연 예수님의 원하신 일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차라리 예수님을 본받으려면 예수님의 마음과 언행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굳이 제자들도 실천하지 못한 독신주의라는 제도를 만들어서 예수님을 잘 따르는 것처럼 보이려는 것은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 공식적으로는 1074년 그레고리 7세때부터 생긴 제도이다. 힘들고 어려운 멍에를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사제의 권위와 위상을 높이려한 것 같다.

 

23. 천주교의 어떤 단체는 기업주를 착취자로 근로자를 착취당하는 자로 단정, 기업의 분열 과 파괴를 조장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미덕을 부인하는 것인가?

   

남미는 천주교 일색이었다. 그러나 경제적 빈곤을 극복하지 못하여 빈부의 차이가 심하였다. 천주교 신부들이 빈부갈등의 문제를 해결코자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 때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찾아낸 것이 해방신학이었다. 백성을 정치적 압박과 경제적 빈곤과 문맹에서 해방시키자고 신학자들과 신부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사회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갈등구조로 보았다. 공산주의처럼 사회를 서로 대립되는 두 집단으로 구분하고 가진 자는 착취자로 못 가진 자는 착취당하는 자로 단정지었다. 이런 사회 구조를 깨고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해방신학이라는 이론을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해방신학은 기독교와 공산주의가 함께 만들어낸 기형아이다. 기독교에서는 해방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였고 공산주의에서는 해방을 위한 투쟁방법을 도입하였다. 그 방법은 폭력도 불사한다는 공산주의식 방법이었다. 해방이라는 개념도 죄에서 해방이라는 영적 개념을 무시하고 단지 육신적 고난에서의 해방으로 그 목적을 한정지었다. 이 목적을 위해 폭력이라는 공산주의식 방법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 해방신학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우리사회를 바라보니 우리 사회도 역시 가진 자와 못 가진자의 갈등 구조가 나타났다. 기업주와 근로자라는 기업구조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그래서 기업주를 착취자로 근로자를 착취당하는 자로 보게 되었다. 또 그 구조를 깨기 위해 한 때나마 일부 교회가 앞장서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회를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보고 흑백 혹은 선악으로 단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더욱이 성경적 해방의 개념은 죄에서의 영적 해방이 더 귀한 것이다.

   

24.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그 동안 기독교의 안과 밖에서 지구의 종말을 예언하는 소리가 많이 있었다. 기독교 안에서는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을 한 사건으로 보았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직후 천사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예언하였다. 사도들은 그 예수님의 재림으로 세상의 종말이 오리라고 거듭 예언하였다.

 

시대에 따라 종말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아지기도 하였다. 특히 어렵고 힘든 시대이면 종말에 대한 기대감이 많아졌다. 그런 성도들의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성경의 수자를 연구하여 짜 맞추는 시한부 종말론자들도 종종 나타났다. 벌써 1세기 당시부터 예수님이 곧 오신다는 기대감 때문에 혼란이 있었음을 데살로니가후서가 말해준다.

 

AD 1,000년에 예수님이 재림하고 세상이 끝난다고 주장한 자들이 있었다. 최근 2,000 년을 전후하여 또 다시 많은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나타나 사회와 교회를 혼란스럽게 했다. 1992년에는 이장림이가 휴거열풍을 일으켰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까지 끌어다 종말의 예언에 보태었다. 이런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질문자도 종말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종말이 언제 일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성경이 말한다. 그러나 종말이 분명히 있다고 성경은 강조한다. 그 종말의 모습을 성경은 그림처럼 때로는 사진처럼 보여주기도 한다. 공관복음서의 소묵시록이라고 부르는 부분과 요한 계시록은 바로 종말이라는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성경은 예수님의 초림을 450여 번 예언하였다. 그러나 재림에 관하여는 그 세 배 정도나 예언하고 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줄 믿는 자에게는 종말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나 다름없이 확실하다. 그러나 성경을 믿지 않는다면 종말의 예언은 한낱 혹세무민의 술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문제의 해답은 성경 속에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 성경을 믿으면 모든 문제는 쉽게 풀어진다. 반대로 성경을 믿지 않으면 인생의 중대한 문제들이 풀어지지 않는다. 성경을 먼저 읽고 배우고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어야 문제가 풀어진다.

 

출처 : 군산남성교회(예장합동)
글쓴이 : 여호와로이(최옥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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