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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예배와 기도 (이사야 56:1-10)

하나님아들 2015. 5. 9. 16:15

 

 

  sg130310     예배와 기도 (이사야 56:1-10)

 

 

러시아의 대문호인 톨스토이의 글 가운데 ‘세 개의 물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인생론이요, 행복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세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은 누구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하고 말입니다. 이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현재라는 시간이고 가장 필요한 사람은, 옛날에 알았던 사람도 아니고, 앞으로 내가 만나게 될 사람도 아니라, 바로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그 사람이다. 매일같이 내가 만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 내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사람이다.

셋째로, 가장 중요한 일이란 바로 현재 내가 만나고 있는 그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고, 여기에 행복이 있다. 행복이란, 자신이 지금 복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 있다.’ 톨스토이의 말을 따를 경우, 예수를 믿는 우리가 오늘 만나야 할 중요한 분은 누구일까요? 그리고 현재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선을 베풀어야 하겠습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오늘’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고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는 가운데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음을 깨달아야겠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내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누구나 평화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 것이다(56:2 현대역 )’라고 말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할 경우, 그 가정과 교회와 국가는 평안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올 한 해 동안에 진정으로 평안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 기본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주일성수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안식일을 더럽히지 않고 잘 지키는 사람은 행복한 인생을 살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믿음의 행위는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으며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 때마다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기쁨을 얻게 됩니다. 본문 56:7 “내 기도하는 집에서 너희에게 기쁨을 줄 것이며...”(현대인의 성경)라고 밝혔듯이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며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주님과 더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되고 기쁨의 우물물을 길어 올리게 됩니다.

 

본문은 기원 전 530년 전후의 이스라엘이 겪은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페르시아(Persia)의 고레스(Cyrus)가 기원 전 538년에 바벨론 제국을 무혈점령하자마자 약 70여 년 동안 바벨론의 포로 민으로 살았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민족 해방에 관한 칙령”을 내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조국 귀환을 허락한 직후인, 바로 그 이듬해, 기원전 537년에, 그 귀환한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에 제2성전의 기초를 놓고 건축을 시작하였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성전건축은 비록 시작되었으나 단지 기초만 놓여 졌을 뿐, 주변의 반대 세력에 의한 저항에 부딪혀 기초 공사만 시작해 놓고 15년 동안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다리우스(Darius)가 페르시아의 왕위에 올랐을 무렵(주전 522년)에, 예루살렘에 귀환(歸還)한 백성들을 향하여 <조국재건의 미래운명은 새 성전 건축 여하에 달려 있다>는 메시지로 새 바람을 일으킨 예언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학개(기원 전 520년 활동), 스가랴(학개와 동시대인 기원전 520년경 활동) 등의 예언자들이었습니다.

 

 

70년 바벨론 포로기는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예언 패턴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즉 “율법주의”라는 멍에의 시대로부터 “복음주의”라는 긍휼의 시대로의 대 전환(大 轉換)을 했습니다. 사 56:1-8은 말씀의 내용과 그 문맥을 살펴보면, 말씀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는, 놀랍게도, “이방인”(異邦人=外國人, 3,6절)과 “고자”(鼓子, 3,4절)들입니다. 이른 바, “국외자들”(局外者, Outsider)입니다. 그러나 그 국외자들인 “이방인”은 하나님 앞에 나온 연합한 이방인”(3절)이고, “고자”도 또한 “안식일을 지키고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일을 하며 여호와의 계약을 굳게 붙잡고 있는 자”(3b절)입니다. 말하자면, 이방인들과 고자들이 그들의 올바른 삶 때문에 “유대인”과 일치되고, 선민(選民)과 동등한 사람으로 대접받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고자는 그가 비록 제사장 가문의 한 사람이라 할 지라도 성전에 들어가 제사드릴 수 없었습니다. 고자는 누구와 연합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이를 엄격히 명시하여 하나님 성전에 이르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새 시대가 열리면서 연합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흠이 있는 사람에게도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렇게 흠결있는 인생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와 연합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과 연합합니다. 그리하면 고자 같은 사람도 놀라운 결실을 얻습니다. 이방인이 고자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 되는 열매, 믿음의 조상이 되는 열매를 맺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연합함으로써 우리는 놀라운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들로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56:6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이방인이지만 주일을 지키며 주님을 믿으면서 믿습니다, 하고 사는 사람에게 주시는 큰 열매는 마치 로마서11장17-20절에 나오는 말씀과 같이 놀라운 좋은 감람나무 열매를 맺는 것 같은 이방인이 됩니다. 롬11: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 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우리는 본래 고자와 같고 이방인이었는데 참 감람나무인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참 감람나무 열매는 맺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그리스도와 연합함을 통하여 이루어진 기적입니다.

 

그분과 연합으로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게 됨(1절)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가 쉬 나타날 것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공평과 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공의로우십니다. 공평하시고 의로우시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편벽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으심도 없으시니라”(대하19:7)고 했습니다. “공평”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미쉬파트”(mishpat, משׁפט)인데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인 정의나 하나님의 통치원리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의를 행하라”는 앞에 나오는 “공평”을 다시 한 번 부연 설명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뜻은 정의,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법도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과 연합된 사람은 하나님의 공평하시고 의로우신 것처럼 공평하고 의로운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의로우신 판단은 공평한 자에게와 의로운 자에게 나타나고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고 하셨습니다. 회개한 사람만이 가까이 온 천국을 소유할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고 하신 말씀은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는 자만이 구원하심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공평과 의는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놓으신 공평과 의를 우리는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뿐입니다. 무엇이 공평이고 무엇이 의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값을 십자가에서 피 값을 주고 지불하심으로 공평과 의가 성립된 것입니다. 주님이 이루어 놓으신 공평과 의로 내가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이르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 분과 연합으로 안식일을 지키게 됨(2-6)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중요한 법을 주셨는데 그것은 안식일에 관한 법입니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슴이니라”(창2:1-3)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제 4계명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제 칠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8-11)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마12:8)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친히 안식하신 날이며 복주시고 거룩한 날로 정하신 날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계명으로 안식하도록 명령하신 날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므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믿음이 되고 복 받는 날이 되며,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구별된 삶이 되고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일이 됩니다. 본문에도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않아야 하나니 이같이 이 계명을 굳게 잡은 인생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안식일은 유대인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도 지켜야 할 규례인 것입니다.(6절) 4-5절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의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자녀보다 더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성도에게는 그것을 지킴으로 받을 수 있는 축복의 기념물을 줄 것이고 그 자손이 영영히 끊기지 않고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주일을 잘 지키는 나라는 번영하고 주일을 안 지키거나 주일에 전쟁을 일으킨 나라들은 모두 망했습니다. 히틀러가 주일에 영국을 침공하였다가 망했고, 일본이 1941년 12월 8일 주일에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 해군기지를 침공했다가 원자폭탄으로 망했습니다. 북한 김일성이가 1950년 6월 25일 주일에 남침했다가 지금은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반대로 미국은 주일을 철저히 지켜서 번영했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안 나가고 세상 일로 분주한 성도는 마치 학생이 학교 가는 날 학교에 안 가고 놀러 다니는 것과 똑같습니다. 모든 날이 주의 날이지만 6일 동안은 우리를 위해서 쓰고 하루는 하나님의 일만 하는 날로 주셨는데 그 날이 주의 날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사랑하시는 줄 아십니까? 걱정 근심 내려놓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4종류 사람이 있답니다. 똑부-똑똑하고 부지런한 사람, 똑게-똑똑하고 게으른 사람, “멍부”는 멍청하고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멍게”는 멍청하고 게으른 사람입니다. 누가 제일 문제일까요? “똑부” 가 제일 골치 아픈 사람입니다. 똑똑하고 부지런하니 모든 일을 다 하려고합니다. 남이 시원찮게 하는 것을 두고 못 봅니다. 그러니 “똑부”는 골치가 아픕니다. 이런 사람은 일중독에 빠지기 쉽고 일에 대한 염려로 단잠을 잘 수 없어 불면증에 시달리기 일 수 입니다. 그런데 똑게는 똑똑하지만 게으릅니다. 이런 사람은 좀 느긋한 합니다. 그래서 숙면을 합니다.

 

그런데 멍부도 있고 멍게도 있습니다. 특히 “멍부”, 이런 사람은 대책이 없습니다. 일을 얼마나 저지르는지 모릅니다. 멍청한데 부지런하니 얼마나 골치 아픈지 모릅니다. 무식한 사람이 소신껏 일하는 것은 아무도 못 말립니다. 차라리 “멍게”가 낫습니다. 이 멍게는 좀 답답하지만 일은 안 저지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습니까? 그러면 주일을 잘 지키시길 축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에게 단잠을 주십니다. 왜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근심 걱정 염려를 별로 안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문제를 내려놓습니다. 그러면 육체의 안식도 누려져 잠을 잘 자게 될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모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주일날 학교에 결석한 것에 학교 선생님이 몹시 화가 났습니다. 그것도 전교 회장이 빠진 것입니다. 전교 회장을 전교생 앞에 불러 세우고 물었습니다. 그는 장로 아들이었습니다. “어제 왜 결석했나!” “교회에 가야 하기 때문에 결석했습니다.” “학교가 중요한가? 교회가 중요한가?” “학교는 학교대로 중요하고, 교회는 교회대로 중요합니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둘 다 중요합니다.” 체육 선생은 그 학생을 몹시 때렸습니다.

 

 

그 입에서 학교가 더 중요하다는 대답을 듣기 위해서 심하게 때렸습니다. “둘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하겠느냐?” “둘 다 선택하겠습니다.” “꼭 하나만을 택하라면 교회를 택하겠습니다.” 체육 선생은 다음 주일(일요일)에도 그 학생을 등교시키기 위하여 심한 기합을 주었으나 그 학생은 끝가지 주일 성수를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전교생들은 숨을 죽여 가면서 체육 선생과 전교 회장의 대립을 지켜보았습니다. 이 사건은 그 후에 큰 문제로 비약되었습니다. 교회로서는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목사님이 교장을 찾아 엄중히 항의하고, 교육청장에게도 엄중히 항의하여, 체육 선생을 다른 학교로 전출시키고 교장 선생님이 전교생 앞에서 잘못된 것을 사과함으로써 사건을 수습시켰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이 학생과 같은 거룩한 고집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날을 우선순위로 여겨 어떤 일이 생겨도 이 날을 지키고자 하는 고집이 우리에게 반듯이 필요합니다.

 

 

어느 미국에서 사는 성도가 이렇게 주일에 대해 한탄하였다고 합니다. “옛날 증조부 때는 성일을 ‘거룩한 안식일’이라고 하더니 조부 때는 그냥 ‘안식일’이라고 하고, 아버지 때는 ‘일요일’이라고 하고, 오늘날은 주일을 ‘주말’(Week-end)라고 한다” 이것은 영적 타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주일 개념이 자꾸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주일은 마귀와 대치하는 마지막 철책선입니다. 주일이라는 이 선이 무너지면 믿음이라는 도성은 쉽게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안식일 계명을 지켜 행하는 기본적 믿음이 있어야겠습니다.

 

 

주님과 연합하면 기도하게 됩니다. (7절)

7절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이신 박영돈 교수님이 쓰신 “기도는 삼위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이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그 내용 중에 기도가 왜 삼위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인지 이렇게 썼습니다. “기도는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영광스러운 특권이다. 성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 아버지가 되어 주셨기에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성자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기에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시니 그 은혜로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삼위 하나님께서 이루신 위대한 구속사역의 열매다. 기도는 고역스러운 율법적 행위가 아니라 성부께서 성자를 통해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보배로운 선물이다.”

 

하나님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이사야가 이 말씀을 선포했고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면서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의 집을 기도하는 집이고 했을까요? 하나님의 집의 기능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구약성경에 나오는 유대교의 성전은 제사가 주요한 기능입니다. 그 다음에 각 지역에 세워둔 회당은 말씀을 가르치는 교육이 중요한 기능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시편을 보면 성전에 올라가면서 그들이 찬송을 불렀다고 하는 기록에 근거해볼 때 하나님의 성전에서 늘 찬송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사야 선지자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을 했을까요?

 

 

이유는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인데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지름길은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제사도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제사장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의 집이 교육시설이라고 해서 가르치는 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가르치는 자가 있어야합니다. 찬송하는 집이라 그러면 혼자도 찬송할 수 있지만 찬송을 모르는 사람들은 적어도 반주자가 있어야하고 음악을 아는 사람이 있어야만 찬송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데 돕는 이가 없으면 하나님을 만나는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 기도는 다릅니다. 기도는 철저하게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일대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1일대일의 관계로서 하나님을 만날 수 가 있습니다. 가톨릭은 고해성사 제도를 가지고 있지만 개신교에는 고해성사 제도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매개자가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죄를 용서함 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인이 목사나 사제에게 와서 상담을 합니다. 좋은 일입니다 또 목사나 사제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가 죄 사함 받았음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목사나 사제의 상담이나 선포가 있기 때문에 죄가 용서된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죄가 용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주 놀랍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데 있어서는 그 어떤 매개자가 없이도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가 되셔서 그리고 대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 앞에 단번에 제사를 드리므로 모든 제사의 효력을 다 끝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철저하게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우리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끝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14절에『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하십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이 한 번의 제사가 모든 제사의 효력을 완성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임을 만날 수 가 있습니다.

 

 

오 할레스비는 기도하려고 결심하면 마귀는 “나는 먼저 이 일을 해야겠다. 이것을 하고 나면 한동안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유혹하여 기도하지 못하게 하고, 그 일을 마치면 또 다른 일을 주어서 기도하지 못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할레스비의 말처럼 우리의 육적인 성품은 매일 매일 기도를 반대하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볼 때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 대한 것입니다(엡6:12). 우리가 이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하나님과 깊이 만나는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특별히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자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언약의 말씀대로 행하면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링컨 대통령은 남북 전쟁을 할 때 그가 집무를 보는 군 막사가 있었는데, “아무리 급한 일이 벌어졌다 하여도 막사에 하얀 깃발을 걸어놨을 때는 나를 절대 찾지 말라.” 그것을 끝까지 지켰어요. “왜 그랬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그 시간은 내가 막사 안에서 하나님과 회의를 하는 중이다. 즉, 기도하는 중이다. 그때 나의 기도시간을 깨우지 말아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중 안식일 지키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루터는 바쁠수록 더 많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때를 사는 성도들이여 기도의 줄을 놓지 맙시다. 주님 만나는 시간을 더 늘려가도록 합시다. 기도만이 내 무능을 내려놓고 주님의 절대능력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 지저스보이(Jesusboy)
글쓴이 : 물맷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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