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다섯 가지 제물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성경에는 여러 곳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한 표현이 나온다. 왜 그리스도가 “양”으로 표현되어 나오는 걸까? “양” 하면 독자 여러분의 마음에는 어떤 장면이 떠오르나? 사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원의 경륜에 있어서 그 근본은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고 용서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이다. 희생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보혈을 통해서만이 우리의 죄가 속량될 수 있고, 죄로 인하여 생긴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재연합될 수 있게 된다.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세우신 그분의 놀라운 계획을 보여 주시려고 하셨다. 그것은 바로 희생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어떻게 해결하시는지를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히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 4장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받으신 아벨의 제사 이야기를 미루어 봐서, 우리는 그것이 어린 양의 가죽옷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표상을 통해, 앞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메시야가 되어 이 땅에 와서 그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그들의 죄가 용서받고, 그들이 구원을 받을 것을 가르치신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성소 제도나 희생 제사에 대해 별로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소에서 드려지던 희생제물은, 유혈 희생이나 무혈 제물이나를 막론하고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했다. 그 희생 제물들은 어린양 되신 그리스도의 생애와 고난을 보여주고, 어린양이 어떻게 자기 삶으로 죄인들을 속죄하여 주는지를 설명하여 줄 뿐 아니라, 희생제물되신 그리스도의 품성의 특성과 인격의 본성과 그분의 봉사의 범위를 보여주므로, 그 희생 제물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영적으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특별히 여기서 언급할 것은, 모든 희생 제물은 거룩하신 예수를 나타내었기 때문에, 그것이 짐승이었든, 새들이었든, 무엇이었든 간에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흠이 없”는 완전한 것이어야 했다. 그러면, 이제부터 희생 제물되신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제물들과 그 의미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①-희생 제물들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특성
*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있어서 여호와께서는 여섯가지 종류의 희생제물을 허용하시었는데, 그것들은 세 가지 동물과 세 가지 새들이었다. 곧, 길들여진 유순한 수소, 양과 염소, 산 비둘기와 집 비둘기, 그리고 때때로 산 참새 (레 1:2,4,10,14, 14:4) 들이 희생제물로 드려졌다.
1.어린 양 ;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7) 온순하고 온유한 어린 양은 벌거벗은 죄인들을 덮도록 자신의 가죽을 주시고(창 3:20 비교), 양털을 의복으로(레 13:47), 육신을 음식으로 주신(삼상 25:18) 예수님, 곧 불평하지 않고 복종하며,“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저항하지 않는 예수님의 온유하신 특성을 대표한다.
2. 수 소 ; 때때로 “힘센 소”(시 22:12, 사 34:7)라고 칭하여진 황소는 가장 존중되고 값비싼 제물이었다. 뿔과 굽으로 상징된 이 동물의 힘은 “황소가 힘”을 발휘하여 멍에를 씌어(민 7:3), 밭을 갈거나(신 22:10), 곡식을 추수할 때(신 25:4), 많은 것을 얻어 내도록 한다. 항상 짐을 걸머질 준비를 하고 있고(시144:14), 기쁘게 희생적 봉사를 참을성있게 하는(시 29:6) 황소는 “첫 송아지”로서, 소가 하루 일을 마칠 때에 항상 자기 목표점인 주인의 구유만을 바라보는(사 1:3) 것처럼, 끝까지 충성스럽게 하나님 아버지께 그리고 인간들을 위하여 충성한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3. 염소 ; 이 동물은 성소 예식에서 인류의 죄짐을 짊어지는 속죄제로서 “위풍 있게“(잠 30:29,31)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 번제단의 길을 오시는 예수를 상기시켜 준다.
4. 비둘기 ;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하는 비둘기들은 유순한 자(아 1:15), 순전한 자(미 10:16), 혹은 저항하지 않는 자의 모습을 묘사한다. 비둘기는 원래 하나님과의 화평과 화목의 전주자로서 사용되었고, 성령의 상징으로도 사용되었으며, 평생동안 같은 짝하고 살기 때문에 다정다감하고 헌신적인 사랑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새들은 가난한 자들의 제물이었고, 유순하시고, 사랑이 깊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상징하기에 알맞는 제물이다.
5. 참새 ; 참새는 문둥병자들의 정결 예식에 사용되었다. 보잘것없이 보이는 참새는 매일 하나님 아버지의 돌보심을 신뢰하며 감사한다. 이것은 하나님이셨지만 보잘것없는 인간이 되신, “멸시를 받아서... 싫어 버린 바”(사 53:3)된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한다.
②-희생제물과 십자가
희생 제사 중에 속죄제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죄지은 자가 자기의 죄를 용서함 받기 위하여 드리는 가장 중요한 제사였다. 이 제사는 죄없는 어린양의 피가 우리의 죄를 속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실물 교훈을 통하여 죄인에게 실감시키는 제사였다. 이것은 제사장이 희생 제물의 속죄의 피를 성소로 가지고 들어가 휘장 앞에 일곱번 뿌리고 나서 중보 기도를 드림으로 죄인의 죄가 용서받도록 하는 제도였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피를 흘리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했다.
죄를 한 번도 지은 적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보혈이 되어 우리의 모든 죄를 씻는 샘물이 된다. 법을 만드신 하나님의 죄 없으신 피가 우리 죄를 대신하여 흘려짐으로 우리가 다시 새로운 생명 가운데 살게 되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1)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24)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친히 당신의 몸에 지시고 담당하셨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께서 당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는가? 우리는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의 예수님의 고통에 대해 살펴 봄으로써만이 그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그 자체가 되시어 죄인이 자비가 섞이지 않는 심판을 지나가는 경험을 우리 대신 경험하셨다.
인간의 죄를 짐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분리됨을 느낄 때에 당한 말할 수 없는 고민에 대하여 우리는 희미한 개념밖에 가질 수가 없다. 그분은 타락한 인간을 위하여 죄가 되셨다. 하늘 아버지의 사랑이 그분으로부터 거두어짐을 느낄 때에, 그분의 고민에 찬 심령은 다음과 같은 비통한 말씀을 발하였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영원히 신비로 남게 될 영원한 사랑 외에는 어떤 것도 그리스도로 하여금 하늘에서의 그분의 존귀와 위엄을 버리고 죄된 세상에 오셔서 그분이 구하고자 오신 자들에게 무시와 멸시와 배척을 받으시고 마침내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도록 할 수 없었다.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렇게 신속히 끊어진 것은 육체적 고난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짓누르는 세상 죄악의 무게와 하늘 아버지의 진노 때문이었다. 하늘 아버지의 영광과 유지하시는 임재가 그분을 떠났으며 절망이 그 흑암의 짓누르는 무게로 그분을 눌렀으므로, 그분의 창백하고 떨리는 입술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고통의 부르짖음을 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혹까지도 운명 중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공격했다. 그분은 무덤의 입구 너머를 보실 수 없었다. 밝은 희망은 그분에게, 그분이 정복자로 무덤을 나설 것과 아버지께서 그분의 희생을 받으실 것을 제시하지 않았다. 세상의 죄가 그 모든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에게 절실히 느껴졌다. 죄에 대한 하늘 아버지의 불쾌와 그 형벌, 즉 죽음이 이 놀라운 흑암을 통하여 그분이 인식할 수 있었던 전부였다.
죄가 하늘 아버지의 목전에 너무 가증하므로 하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과 화해할 수 없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의 유혹을 그분은 받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복수가 죄인들에게 내려질 때 죄인들이 느낄 그 절망을 느끼셨다. 마지막 영영한 심판이 회개하지 않은 자들에게 이를 때에는 죽음의 휘장 같은 검은 절망이 그들 죄의식에 시달리는 영혼 주위에 몰려들 것이요, 그들은 그때 비로소 죄의 가증함을 충분히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셨던 당신의 가납하심과 동의에 대한 확신을 이제 제거하셨음으로, 믿음과 희망은 그리스도의 숨이 끊어지는 고통 가운데서 흔들렸다. 그리하여, 그 때 세상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까지 그를 강건하게 하여 온 증거, 즉 하늘 아버지께서 그분의 수고를 가납하셨고 그분의 사업을 기뻐하셨다는 증거와 그분의 사랑의 증거들을 의존하셨다. 숨을 거두는 고통 가운데서 그분의 고귀한 생애를 마치면서, 그분은 오로지 믿음만으로 당신이 항상 즐겨 순종하던 하나님을 의뢰하셨다.
그분은 좌우편 어디에서도 명확하고 밝은 희망의 빛줄기로 격려를 받지 못하셨다. 모든 것이 짓누르는 흑암에 둘러싸여 있었다. 동정하는 천연계에까지 느껴진 그 두려운 흑암 가운데서, 구속주께서는 그 신비의 잔을 마지막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셨다. 밝은 희망, 장래에는 그분의 것이 될 승리에 대한 확신도 얻지 못한 채, 그분은 큰 목소리로 부르짖으셨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있어서 육체적인 고통은 고뇌의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세상의 죄가 그분을 눌렀으며, 범하여진 율법의 형벌을 당하는 동안 하늘 아버지의 진노에 대한 깨달음이 그분을 눌렀다. 그러나 자신의 속죄로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될 인간 자녀들을 생각하시는 사랑과 기쁨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그 고통을 참으셨다.
오!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 사랑인가!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영원히 죽어 없어진다고 해도 우리를 구하실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을 나타내셨다. 그것이 바로 희생 제물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께 여러분의 마음을 모두 바치겠는가? 그리고 모든 죄를 버리고 그분의 발 앞에 엎드리어 다시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를 반복하기 원치 않으니 힘을 주십사고 기도하려는가? 그리고 주님 뜻대로만 살기로 결심하겠는가?
예수님의 고난의 장면을 예언한 시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게 된다.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음으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시 40:12). 우리의 많은 죄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죄악이 되어서, 나의 죄악이 머리털보다 많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다시 말해서 심장이 터졌다는 예언의 말씀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희생 제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늘 생각하며, 회개하고 또 다시 죄를 범해 그리스도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지 않도록 늘 경계하며, 그분께 충성하는 사람들이 되자!ⓗ